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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예수’가 사람 잡는다교리로 부활한 예수가 참 예수를 죽였구나.
류상태  |  shalom77@cho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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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6년 04월 24일 (월) 00:00:00 [조회수 : 2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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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총(한국기독교총연합회)과 KNCC(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손을 잡았다. 부활절인 지난 4월 16일, 양 단체는 부활절 합동예배를 드렸다. 지난 몇 년의 세월에 걸쳐 오랜 화합을 시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것도 건진 것이 없는 양 단체가 이렇게 쉽게 손을 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무엇보다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기독교의 중심고백에 대해서만은 진보건 보수건 이견이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어찌하여 한국 교회는 예수의 탄생과 죽음과 부활은 그토록 소중히 여기면서, 그의 생애는 소홀히 여기는가. 만일 한국 주류 개신교회가 예수의 탄생이나 부활 못지않게 예수의 생애에 초점을 맞추고 그 분의 삶과 가르침을 온전히 따르고자 노력했다면, 세상은 교회를 향해 찬사를 쏟아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역사적 예수의 생애는 그런 힘을 갖고 있었다. 어느 종교의 창시자가 현실 세계에서 그렇게 낮아져 헐벗고 굶주린 이웃들을 온 몸으로 끌어안았는가. 어느 성인이 ‘높은 보좌에 앉아계신 하느님’을 억눌리고 소외된 자를 품어안는 ‘아빠 하느님’으로 소개해 주었는가.

예수는 현실의 부조리와 아픔에 힘겨워하는 민중들을 위로하기 위해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눈을 돌리라고 가르치지 않았다. 오히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라고 가르쳤다. 그는 하늘의 질서가 지상에 이루어지는 세상의 변혁을 꿈꾸었으며 그것을 ‘이 땅에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나라’로 인식하였다.

그는 그 깨달음을 온 몸으로 실천하였으며 이 땅에 실현하고자 노력하였다. 그가 가르친 것은 ‘피안’이 아니라 ‘현실’이었으며 ‘추상’이 아니라 ‘실존’이었다. 영생복락을 누리기 위해 미래로 도피하는 신앙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빼어난 교훈은 그의 제자들이 감당하기에 벅찬 것이었다. 제자들은 스승의 가르침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의 생애와 고난, 십자가, 심지어 부활 사건 이후에도 그의 제자들은 스승의 뜻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오랫동안 방황하였음을 성서는 증언한다.

한국의 교회들이여, 그의 십자가와 부활만 붙들지 말고, 그의 생애를 바라보라. 그의 역동적인 삶과 빼어난 가르침에 주목하라. 그는 “원수를 미워하라”는 구약의 독선과 배타를 허물며 “원수는 없다(성경에는,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선언하였다. 한국 교회여, 인류를 향한 예수의 대화합의 선언과 사해동포주의에 눈을 떠라.

그의 삶이 이렇게 눈부신 것이었기에, 그는 죽을 수 없었다.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두려워하는 자들은 그의 육신을 죽일 수는 있었으나, 그가 가르친 진리와 생명의 말씀들은 죽일 수 없었다. 그의 찬란한 삶과 생명의 가르침은 제자들을 비롯하여 그에게 감염(?)된 많은 민중들의 삶 속에 부활했다.

스승만한 제자가 없다고 했던가. 당시 그의 제자들과 민중들 가운데 그의 삶과 가르침을 온전히 이해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 부처의 가르침을 온전히 깨달은 제자가 별로 없었듯이, 예수의 가르침을 갈릴리 어부들과 민중들이 온전히 해득하기는 어려웠기에, 그의 빛나는 생애와 가르침은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 안엷 갇히게 되었다.

그래서 예수는 제자들의 삶과 공동체 안에 부활했지만, 그 예수는 ‘그들의 인식 안에 갇힌 예수’가 되었고, 인식과 해석은 사람에 따라 달라지게 마련이다. 부활의 예수는 그렇게 각 제자들의 ‘인식의 그릇’에 담긴 채 여러 갈래로 전해지며 교회에 수많은 ‘예수상’을 만들어냈다.

안타깝게도 견해가 다른 사람들의 의견은 옮음에 의해 조정되는 것이 아니라 힘에 의해 조정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역사는 증언한다. 예수의 위대함이 그를 따르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공동체를 만들게 하였지만, 우리가 ‘초대교회’라고 부르는 그 공동체가 조직을 갖추게 되면서, ‘조직의 생리’는 역사적 예수를 받아들이기 어렵게 만들었다.

역사적 예수가 진정으로 원한 것은 ‘새로운 종교’가 아니라, 오히려 모든 조직과 틀을 해체하며 억눌린 민중들이 자유를 얻고, 눈먼 대중들의 눈이 열려 생명과 환희의 세계를 이룩해가는 ‘새로운 삶, 새로운 세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조직의 유지를 위해, 혹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혹은 무지로 인해, ‘그들이 바라는 예수상’을 만들어내기 시작했으며, 점차로 ‘부활의 예수’는 역사적 예수와는 매우 다른 모습으로 변질되었고, 공동체의 유지와 이익을 위해 일하는 ‘교리의 예수’가 되었다.

물론 순수한 복음의 원형을 추구하는 참 신앙인들은 이런 협잡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래서 초대교회 안에 끊임없이 역사적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증언하는 신선한 도전이 있어왔지만, 조직과 힘을 갖춘 주류교회는 그들을 이단으로 정죄하며 교회의 조직과 공동체를 위해 예수를 이용해 왔다.

4세기에 들어 점점 노쇠해져 가는 대제국 로마의 안녕을 위해 강력한 국가종교를 필요로 했던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를 선택했다. 흩어진 국론을 통일시키고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다시 확립하기 위해서는 먼저 기독교 신학이 하나로 통합되어야 했다.

313년에 밀라노 칙령을 발표하여 기독교 신앙의 자유를 선포한 콘스탄티누스는 325년 니케아 회의를 열어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하나의 통합된 신념체계를 만들게 했다. 이 회의에서 예수는 신으로 선포되었다. ‘본질상 신의 본성을 가진 신의 아들’로 선포된 예수는 제국의 백성을 하나로 모을 구심점이 되기에는 더없이 적절했다. 이렇게 해서 스스로 ‘사람의 아들’임을 주장한 예수는 신이 되었다.

신이 된 예수는 교회 안으로 들어오는 구성원들에게 온갖 특혜를 제공하였다. 그러나 공동체에 위협이 되는 세력에게는 가차없이 저주를 퍼붓고 심판을 내리는 무서운 심판자가 되었으며, 그의 사제들을 부유한 특권층으로 만들어주었다.

로마제국과 손을 잡은 교회를 견제할 수 있는 세력은 없었다. 역사적 예수의 발자취는 점차 희미해져갔고, 교권과 조직에 저항하며 복음의 원형을 찾으려는 하느님의 사람들은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이후 우리가 ‘중세 암흑기’라고 부르는 기간에도 교리를 돌파하여 진실에 눈뜬 소수의 선각자들이 있기는 하였지만, 그들 역시 주류세력에 의해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부활의 예수’가 교리에 갇혀 교회의 꼭두각시가 된 불행의 세월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합리주의가 피어나는 르네상스를 맞이하기까지 천여년의 세월을 기다려야 했다.

지금 한국 주류 개신교회가 경배하는 예수는 누구인가? 바로 그 교리의 예수가 아닌가. 보수를 넘어 수구의 길을 달리는 한국 주류 개신교회 안에 부활한 예수는 역사적 예수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오직 예수를 팔아 먹고사는 종교장사꾼들의 입맛에 맞는 허깨비 예수가 지금 한국 교회를 유린하고 있다.

‘부활의 예수’를 그린 그림들을 보면 한결같이 그 얼굴에 인자와 자비로움이 흐르고 있다. 그러나 한국 주류 개신교회에서,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의 공동체 안으로 두 손 들고 들어오는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를 신의 아들로, 또한 죄악 가운데서 구원해줄 구세주로 섬기지는 않지만, 마음 깊이 그를 존경하거나 그와 친구가 되기를 원하는 ‘선한 이웃들’과 ‘이웃종교의 길벗들’에게, 예수는 자신을 하느님의 아들로 경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가차없이 지옥에 보내는 무서운 ‘심판의 주’가 되었다.

‘환호환 탄환사’, “마술사가 허깨비 호랑이를 만들자, 허깨비 호랑이는 마술사를 집어삼켰다.” 원효 대사가 한 말이다. 역사적 예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허깨비 예수가 부활하여 참 예수를 죽였다. 막힌 담을 헐고 뭇생명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준 우리의 예수는 이렇게 죽었다.

한국 주류 개신교회와 미국의 근본주의 기독교에 부활한 예수, 그 허깨비가 역사적 예수, 참 부활의 예수를 모두 죽이고 사람을 잡고 있다. 지구마을을 갈등으로 몰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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