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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는 종교전쟁으로부터 안전한가?한국 교회 교우님들께 드리는 류상태의 주일편지 - 2013년 5월19일
류상태  |  sham5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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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3년 05월 17일 (금) 10:21:58
최종편집 : 2013년 05월 18일 (토) 00:46:13 [조회수 : 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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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교우님들께 저의 신간 장편소설 「신의 눈물」(부제 : 한반도종교전쟁, 2013년 5월 25일, 도서출판 모시는사람들 간행)에 대해 소개해드리고 싶습니다.

이 책은 2008년에 우리나라에서 종교문제로 인하여 긴박하게 일어났던 사회 갈등을 목도하면서 한반도의 종교 갈등이 전쟁으로 비화될 가능성에 대해 고민하며 쓴 소설입니다. 그해에 자료를 수집하고 2009년에 집필을 시작했는데 4년이 지나서야 출간하게 되었습니다.

책 소개는 후기에 실린 내용을 그대로 옮기는 것으로 대신하고자 합니다. (출판사에서 교정을 보기 전의 초고이므로, 출간된 책의 내용과는 조금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1.

한반도에 종교전쟁이 일어나는 게 가능할까요? 이념에 의한 전쟁이 아닌 종교전쟁이라니 무슨 생뚱맞은 얘기냐고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한반도가 종교로 인한 전쟁을 겪지 않고 지금껏 지내온 것이 기적같이 느껴집니다.

한반도에는 일찍이 불교가 들어와 천 년이 훨씬 넘는 세월을 지내오며 이 땅에 견고히 터를 잡아왔습니다. 유교가 국가이념으로 채택되어 한민족의 얼을 지배한 지도 수백 년 이상 흘렀습니다. 천주교가 들어온 지 이백 년, 개신교가 들어온 지 일백 년 이상 지났습니다.

지금 한반도에는 전통 무속과 함께 개신교와 천주교 불교 유교 등 세계종교가 공존하고 있으며, 천도교 원불교 증산교 등 신흥민족종교와 더불어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찾아온 이주민에 의해 이슬람교도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세계의 거의 모든 종교형태가 좁은 땅에 공존한 예는 역사적으로 그 유례를 찾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종교학자들은 한반도를 종교박물관이라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더욱 주목해야할 사실은 이런 유력한 세계종교들이 큰 전쟁이나 갈등 없이 비등한 세력으로 공존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한반도에도 종교로 인한 갈등이 있기는 있었습니다. 고려시대 국가이념으로 채택되어 중흥을 이룬 불교는 조선시대에 유교가 국교로 채택되면서 핍박을 받았습니다.

조선시대에 들어온 천주교는 당국의 핍박으로 수많은 신앙인이 순교하는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지금 천주교는 곳곳에 순교지를 조성하여 이를 기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천주교가 핍박과 순교로 이해하는 그 사건은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보면 조선시대 민족사상의 근간을 흔드는 외래사상의 문화적 침략으로 해석될 여지도 충분히 있습니다.

이처럼 종교로 인한 큰 갈등은 있었지만 한반도가 종교전쟁을 겪지는 않았습니다. 참 다행입니다. 종교전쟁이 벌어지면 가장 잔인하고 무자비한 참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한반도가 종교전쟁을 겪지 않은 중요한 이유는 유교나 불교 등 동양종교의 너그러움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만일 서양 유일신 종교들이 비등한 세력으로 한반도에서 그 위상을 오랫동안 차지하고 있었다면 결코 종교전쟁을 피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유교와 불교 등 동양종교, 그리고 우리 민족종교 등에 마음 깊이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앞으로도 한반도가 종교로 인한 전쟁이나 갈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혹은 갈등이 일어나더라도 이를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2.

이 소설의 초고를 쓰는 동안 어느 미국인 목사가 꾸란을 불태워 지구마을에 한바탕 소동이 일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선 어느 한국인 선교단체가 이슬람이 한국을 정복하기 위한 선교전략을 세우고 있다고 발표했습니다. 한국의 일부 대형교회 목사들은 비상식적인 발언이나 이런 저런 스캔들로 세간의 조소와 조롱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몇 년 전 어느 대형교회 목사는 동남아시아 지진해일이나 미국 뉴올리언즈 지역을 강타한 허리케인을 신의 징계로 해석하여 물의를 일으켰고 아프간에 선교여행을 떠난 개신교인들의 피랍사건 등으로 개신교는 우리 사회의 근심거리가 되었습니다. TV에 출연하여 유명세를 탄 어느 목사는 스님들도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는 상식 이하의 발언을 하여 이웃종교에 큰 결례를 범했지만 개신교 내에서는 오히려 할 말을 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습니다.


3.

이 소설은 만들어낸 이야기이므로 허구입니다. 하지만 소재는 현실에서 실제로 일어난 많은 단편적 사건에서 따왔습니다. 현실기독교에 어떤 문제가 있으며 기독교가 안고 있는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우리 사회가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 독자들과 함께 고민해보고 싶었습니다. 특히 제 글이 기독교인 스스로 자신들이 절대 가치로 삼고 있는 현실기독교의 문제를 인식할 수 있도록 작은 도움을 준다면 큰 보람이 되겠습니다.

기독교인 중에는 이 소설을 읽고 기독교에 대한 편견과 오해의 소산이라고 분노하는 분도 계실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목회 경력 20년의 전직 목사입니다. 절대로 일어나선 안 될 일이지만 일어날 가능성이 농후한 일을 미리 예견하고 대비하도록 하는데 이 글을 쓴 주요 목적이 있습니다.

저는 기독교에 대한 애정과 우려를 동시에 갖고 있는 것처럼 이슬람교에 대해서도 비슷한 애정과 우려를 함께 갖고 있습니다. 기독교와 이슬람교, 이 두 형제종교가 어떻게 관계정립을 하느냐에 따라 지구마을의 안녕과 평화가 크게 좌우될 것입니다. 불교에 대한 저의 존경심과 믿음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저는 앞으로 기독교와 불교, 기독교와 이슬람의 갈등이 첨예화될 가능성이 있으며, 이 경우 우리 사회가 큰 혼란을 겪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와 관련해 시민들의 의식이 깨어있어야 훗날 종교 갈등으로 인한 사회혼란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이를 적절히 통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이 소설을 쓴 중요한 이유입니다.


4.

저는 2004년에 목사직을 반납한 후 줄곧 기독교의식개혁운동을 해왔습니다. 그 일환으로 시민단체를 만들어 활동하기도 했고 인터넷교회를 설립하여 대안을 모색하기도 했지만 결국 그 모든 일을 접었습니다. 기독교의 독선과 배타를 극복하고 새로운 기독교의 탄생을 고대하는 것은 모든 뜻있는 기독교인과 건전한 상식을 가진 시민들의 바램이지만 그 길은 너무도 멀고 험합니다.

안티기독교운동이나 시민단체의 노력 또는 법적 제도적 장치 등으로 인한 외부의 압력으로 개신교가 교리적 독선과 배타에서 벗어날 것 같지는 않습니다. 교리기독교인들은 어떤 압력과 제도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들의 신념을 지키려 할 것입니다. 현실기독교를 독선과 배타에서 벗어나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깨어있는 기독교인들의 내적 각성운동을 통해 변화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기독교의 진실을 알고 있는 진보기독교인들은 아직 소수이고 조직의 압력에 대항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용기를 내서 진실을 말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예수께서 전해주신 가르침이 배타적 교리가 아니라 따뜻한 인류애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개신교인들 스스로 독선과 배타에서 벗어나 따뜻한 기독교, 새로운 기독교로 거듭날 수 있도록 앞장서 노력할 것입니다. 아, 그런 세상이 올 수 있을까요? 이 소설이 그런 세상을 앞당기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저는 기뻐서 춤을 출 것 같습니다.


5.

이 소설을 저의 후원자이신 이용진 선생님께 먼저 드립니다. 선생은 제가 기독교의식개혁운동을 계속하고 글을 쓸 수 있도록 용기를 주셨을 뿐 아니라, 저의 가족 모두에게도 희망과 행복을 주셨습니다. 글쓰기를 포기하고 싶을 때가 몇 번 있었지만 저 자신을 채찍질하며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선생의 후원에 대해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을 놓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마음 깊이 감사드립니다.

부담이 될 수도 있는 글을 기꺼이 출판해주겠다고 나서주신 도서출판 <모시는 사람들>의 박길수 대표님과 소경희 편집장님께 감사드리며 함께 참여해주신 출판사의 모든 가족들에게도 감사드립니다.



2013년 4월

일산 탄현동 나의 작은 서재에서
류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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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ip Im (70.62.49.64)
2013-05-22 11:27:35
어떤 신문에 나온 칼럼 한 구절입니다.

위험에 처한 아랍권 기독교인
최근 시리아에서 시리아 정교회 요한나 이브라힘 대주교와 그리스 정교회 불로스 야지지 대주교가 납치됐다. 이 사건은 시리아 내전의 야만성을 보여줄 뿐 아니라 아랍권에서 기독교인들이 맞고 있는 위기를 반영하고 있다. 국제인권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세계 전체에서 자행된 종교적 박해의 80%는 기독교인이 대상이었다. 기독교인들은 수백 년간 살아왔던 나라에서 새로운 차별을 당하고 있으며 이 같은 사례는 급증하고 있다. 이는 이슬람교도들의 호전성이 커졌기 때문이기도 하고 ‘아랍의 봄’ 이후 정치적 이슬람교도가 늘어난 탓이기도 하다.

중동에서 이슬람주의 정당이 권력을 잡으면서 소수파 기독교인에 대한 위협과 차별의 고삐가 풀리고 있다. 예컨대 지난 2월 26일엔 리비아 벵가지의 의류시장에서 이슬람 민병대원들이 이집트 콥트기독교인 10여 명을 둘러싼 뒤 억류하고 고문하고 처형 위협을 가했다. 수도 트리폴리에서도 사제들이 공격당하고 교회가 방화당하기도 했다. 리비아에 거주하며 일하는 이집트인은 수십만 명에 이른다.

이들 사건이 보내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리비아에서 이슬람교도가 아닌 사람은 안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무슬림 형제단이 장악한 이집트 정부는 리비아 내의 자국 기독교인을 보호하는 데 열의를 보이지 않고 있다. 이집트 인구의 15%를 차지하는 기독교인들은 점점 나쁜 상황을 맞고 있다.



이런 현상에 대하여 우리는 어떤 말을 할 것입니까?
기독교인이 소수이기 때문에 당하였지 다수였으면 그 반대였을 거라고 할 것입니까?
사실 그 말도 맞을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은 어느 종교 하나가 노력하여 평화가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하여 모든 종교가 합심하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순진하다고 해야할는지 무식하다고 해야할는지...

결국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 해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또 제대로 파악했다 할지라도 궁극적으로 이 땅 위에서는 영원한 평화가 없습니다.
다만 그 평화를 위하여 노력하는(그리스도 안에서의 참된 평화를 위하여 노력하는)일들이 있을 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종교 간의 화합? 그래서 얻는 평화?
우리 주님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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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3
책광고 (174.114.60.109)
2013-05-21 07:55:51
아직도 책이 다 안팔렸나보네요.
그래서 이렇게라도 광고를 해야 하니... 좀 씁쓸합니다. 당당뉴스 관계자분은 당당뉴스 한 지면을 할애해서 좀 광고좀 해주세요.댓글 다신분들도 한권씩 사시고요.그래야 저분도 베스트셀러작가 반열에 오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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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9
이사야 (121.129.19.241)
2013-05-22 19:49:53
책광고라는 이사람
174.114.60.109....이사람 주목해야겠구먼.수준하고는
개악본부 2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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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0
Philip Im (70.62.49.64)
2013-05-21 06:01:16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우리 주님의 가르침을 보십시오.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사람들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원합니다.
물질,명예,존귀,섬김 등.
주님의 가르침과는 정반대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섬김을 받기를 원하는 것이 죄인된 사람의 원래 마음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런 마음을 아시고
"너희들이 간절히 바라는 그런 마음
간절한 그 마음으로 남을 섬겨라(대접하라)"고 명하십니다.

이는
"남이 네게 하기를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행하지 말라"는 소극적인 말씀보다 더욱 적극적인 것으로
사람의 약점을 장점으로 승화시키는 주님의 능력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내가 원하는 만큼 대접받을 그릇이 부족한대도 자기는 욕심을 내면서,
남에게 대접하려고 할 때는 상대의 그릇이 부족함을 핑계댑니다.
우리 주님이 그 마음은 헤아리지 못했을까요?

그러므로 이 말씀은 우리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행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랑을 행하라는 적극적인 말씀입니다.
상대가 원하지 않는 것을 하지 않는 소극적인 사랑이 아니라
상대의 필요를 해결해 주는 적극적인 사랑의 실천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이 사랑의 실천은 종교간의 갈등을 없애는 수단이 아닙니다.
물론 어떤이들은 그리스도인들이 희생적인 사랑을 실천해 주면 좋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공중 권세 잡은 사단은 그것을 못마땅히 여깁니다.
그 사랑이 하나님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로마의 박해를 받은 것은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섬겼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빙자하고 거짓 평화를 빙자하여 하나님도 섬기고 우상도 섬기는 것을 사단은 매우 좋아합니다.
그리스도인이 타협하는 것은 사랑도 평화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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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4
Philip Im (70.62.49.64)
2013-05-19 02:22:14
병호시비를 아십니까?
퇴계 이황의 두 제자 서애 유성룡과 학봉 김성일의 위패를 같이 모실 때 누구를 상석인 이황 위패의 왼쪽에 모시는가로 서로 다투었습니다.
400여년 끌어온 이 싸움이 얼마 전에 마무리 되었습니다.
유성룡의 위패를 상석에 두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이 싸움에 대하여 나름 의미를 붙이자면
저들의 철학이 걸린 저들만의 원칙에 충실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저들의 철학에 충실하다보니 다툼이 일어났고 누군가가 너가 위이다고 정해주어 결론이 났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와 반대입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3-45)

문제는 이런 예수님의 가르침을 사람들이 따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상 철학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입으로만 예수님을 따른다고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에 회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회심한 사람 가운데도 제대로 따르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회심은 순간이지만 성화는 점진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길이 참고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로 인한 병폐도 많지만 유교로 인한 병폐도 큽니다.
유교는 태생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사람이 문제입니다.

가르치는 사람이 문제가 있다면 모르겠거니와
문제가 없는데 배우는 자가 자기 욕심따라 문제를 일으킨다면
누구를 욕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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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7
포이멘 (183.109.98.59)
2013-05-18 23:49:52
평화의 나라를 만드는 순례하는 교회
1.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2.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3.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4.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5.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
6.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기에게 끌리며
7.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8.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9.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류상태 형제님,
평화의 나라를 만드는 순례하는 교회를 해하는
맘몬의 니골라당 (천주교, 삯꾼목사에 의한 개신교, 이만희의 신천지 등)은
어떻게 하여야 하나요?

저들의 니골라당은 종교다원주의, 에큐메니칼 이라는 명분으로
연합할 것이며 천주교의 교황은 연합단체를 좌지우지할 것입니다.

맘몬의 니골라당이 지배하는 교회는 종교전쟁을 피하지 않을 것이며
제2의 십자군 전쟁도 마다하지 않을 것입니다.

성도들에 의한 개혁이 일어나야 합니다.
루터, 칼뱅, 쯔빙글리등의 니골라당이었던 사제들에 의한 종교개혁이 아니라
성령님이 함께하는 성도들의 아래로 부터의 개혁이 필요합니다.

그때 평화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맘몬의 지배하에 있는 교회가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모임이 될 것입니다.

먼저, 성도들은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을 없애고
모든 성도가 하나님 아래에서 계급이 없는 한 형제임을 선포하고
단독의 목회에서 성도가 함께하는 공동의 목회가 되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천주교로 부터 이어져 내려온
잘못된 교리와 시스템을 점검하여야 할 것입니다.
바빌론의 종교로부터 전해져서 내려온 맘몬의 잘못된 전통을 바로 잡고

심령안에서 가난하고, 애통하며, 온유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르며,
자비롭고, 마음안에서 깨끗하며, 화평하고,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성도들을
교육하고 길러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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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0
포이멘 (183.109.98.59)
2013-05-18 23:55:23
천주교와 맞서 싸우지 않고 죽음을 택하였던
천주교로부터 이단과 마녀의 누명을 뒤짚어 쓴
순례하는 교회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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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빛 (207.210.3.147)
2013-05-18 05:17:57
골든룰!
'골든룰'이 있잖습니까.
"남이 네게 하기를 원치않는 것을 너도 남에게 행하지 말찌라"

기성종교라면 이 룰을 핵심으로 모두 가르치지요.
이 골든룰만 서로가 성심껏 지켜준다면 종교간의 갈등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종교전쟁이 일어나면, 옳고 그름의 논리는 더 이상 작동하지도 않고 효력도 없습니다.
이기는 자만 남게되고 역사는 이기는 자를 주인공으로 쓰여지게 됩니다.
정의란 승자에게만 있게되는 것이지요.

한국의 경우는 매우 희한한 현상같습니다.
본문에서도 지적했지만,
공격적인 근본주의 기독교와 여러 종교가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에
가시적으로나마 전쟁없이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저는 그 원인을 '유교'라는 데에 두고 싶습니다.
이조시대의 유교적 민족사상이 한국사람들 가운데 뿌리깊게 박혀있어 공통분모로써의 작용을 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더하여, 한국의 근본주의 기독교가 편견적이고, 스스로 우월의식에 빠져 폭력적이기도 하지만,
타 종교의 양보, 이해심과 너그러움 때문에, 다행스럽게도 큰 싸움으로 번지지 않고 쉽게 끝나곤 하는것 같습니다.

한국 기독교도 이제는 '골든룰'을 깨닫고 기독교의 박애정신을 행동으로 보여 주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어린아이 신앙, 일방적이고 주입식인 신앙, 말로만 지껄이는 신앙에서
성숙한 신앙, 이웃과 소통하는 창의적인 신앙 그리고 햏동하는 신앙으로 도약하여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로 부터 계속적으로 외면받아 쇠퇴하여
정통기독교는 결국은 박물관의 전시물로 남게 될 것입니다.


어느 종교이던지 양파껍질 벗기듯이 하나씩 벗기면서 파고 들어가 보면
속 깊이 끝에는 동일한 이 작은 것 하나 들어 있답니다.

"남이 네게 하기를 원치 않는것을 너도 남에게 행하지 말찌라"
리플달기
8 9
박평일 (72.196.234.24)
2013-05-20 01:16:21
아주 좋은 점을 지적하셨습니다.
여러 다른 종교가 공존할 수 있는 한국의 특이한 문화환경이
잘만 이용하면 인류의 종교적 갈등을 해결 할 수 있는
희망적인 실험장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한국의 일부 기독교인들처럼
삼청교육대식으로 일방적으로 밀어붙였다가는
분쟁의 화약고로 변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겠지요.

선생님이 지적하신 대로 한국에서
다른 종교가 공존할 수 있는 이유가
유교문화 탓도 있겠지요.
유교는 종교라기 보다는 사회정치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도이고 예의라고
볼 수 있으니까요.


저는 이런 관점에서도 생각해 봅니다.

동양인들의 무의식세계는
근본적으로 불교가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수천년간의 오랜 역사 때문이지요.
기독교역사는 겨우 100 년 밖에 되지 않아서
민족의 무의식 세계에 근본적인 영향을 주기에는
시간적으로 아직 이르다고 생각합니다.

불교는 일반적으로 다른 종교나 문화에 대해서
수용적이고 공존적입니다.
중동에서 나온 기독교나, 모슬람, 유태교처럼
공격적이고 배타적인 면이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종교전쟁이 없었지요.

현재 서구인들에게 인기있는 세계적인 불교지도자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나 월남의 틱낫한 같은 분들은
기독교를 비난하는 법이 없습니다. 불교로의 개종을
권하거나 강요하지도 않습니다.

서구 기독교인들에게

"예수님의 가르침 속으로 깊게 들어가라. 그러다 보면
불교와 서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라며
오히려 기독교를 열심히 믿으라고 권장하지요.

한국과 비슷한 불교적, 유교적 전통을
가지고 있고,
한국보다 일찌기 기독교가 전파된 일본의 경우
현재 기독교인구가 1 % 정도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것도 대부분 케토릭신도들이지요.

그이유를
기독교인이었던 쑈군 노부다가 가 죽은 후
그 뒤를 이은 철저한 불교신도 히데요시,
이에야스 막부시대에 기독교인들을 말살했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는 분들이 많지요.
임진왜란을 일으킨 히데요시만 해도
기독교인들을 수만명씩 모아서 공개 처형하곤 했습니다.

일본기독교인들은 숫적으로는 적지만
한국 기독교인들과 아주 다릅니다.
대동아 전쟁을 목숨을 걸고 반대했던 사람들이
대부분 일본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전쟁 중에 군부가 교회를 불태우며 기독교인들을
박해했던 이유였지요.

그 대표적인 인물로 유영모, 함석헌 선생님의 스승
우찌무라 간조을 들 수 있지요.
히틀러 나치를 반대하다가 처형당했던
독일의 본 훼퍼와 같은 분이지요

한국기독교문화와 일본기독문화의
차이는 서로 다른 유교문화때문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한국의 유교는 효와 예를 중요시 하고
일본의 유교는 충과 실을 더 중요시 합니다.

그 영향으로
한국에서 기독교는
개인과 가족을 위한 구복적이면서 사변적인 신앙으로,
일본에서 기독교는
사회적 공의와 실, 행위를 더 강조하는 신앙으로
자리잡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저의 개인적인 견해입니다.
서로 다른 장단점이 있겠지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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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빛 (207.210.3.147)
2013-05-20 05:24:15
좋은 의견에 감사합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내 눈에 박힌 들보를 먼저 빼내는 작업이겠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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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평일 (72.196.234.24)
2013-05-20 06:15:44
저는 그 점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봅니다.
한국 젊은이들의 정치적 의식수준이 변하 듯이 일단
변화의 물살을 타기 시작하면 급격한 변화가
일어 나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인터넷 문화는 의식세계의 국경을 무너뜨리고 있지요.
예전에 몇 백년에 걸처 일어났던 변화가
요즈음에는 몇 년 안에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면 근본주의 신앙은 머지 않는 장래에
설 자리를 잃게 될 것입니다.
미국에서는 그런 변화가 이미 오래 전 부터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지 않습니까?

현대 인터넷시대 젊은이들은
옛 사람들과는 의식구조 자체가 다릅니다.

솔직히 저는 한국근본주의 신학으로 교육받는 목회자들의
장래가 걱정도 됩니다.

내가 알고 지내는 장로님이 출석하고 게시는 LA 지역의 한
한국대형교회는 60세가 넘은 신도수가 500 여명이
넘는다고 합디다. 은퇴한 분들이라서
헌금이 줄어들어 어렵지 않는냐고 걱정을 했더니
관혼상제가 많아져서 오히려 낫다고 하던군요.

그것도 지나가는 일시적인 현상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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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
이사야 (121.129.19.241)
2013-05-18 21:03:32
참빛님
아멘 또 아멘 입니다...참빛 님 감솨
하늘님과 예수님 과 거룩한 영을 저질로 만드는 이땅에 개독들은
철저하게 회게할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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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빛 (24.141.4.52)
2013-05-21 02:22:32
마음으로나마 이사야님께서는 예수를 따르는 믿음의 동지로서 많은 힘이 되십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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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0
Philip Im (70.62.49.64)
2013-05-18 03:13:38
마치 기독교가 제대로 개혁된다면 더 이상 종교 전쟁은 없을 것이라는 듯하여 아쉽고도 씁쓸하다.
정말 그러한가?
타 종교는 평화를 원하는데
기독교만 배타적 교리를 갖고 있기 때문에
종교적 갈등 나아가 종교전쟁이 일어나는가?

기독교의 역사 가운데 중세기에 있었던 십자군 전쟁은
타락한 종교 지도자들과 복잡다단한 이해 관계에 의한 전쟁이었다.
예루살렘 성지 회복?
그것은 핑계에 불과하였다.

그후 종교개혁이 있었으나
오늘날 어떠한가?
새로운 종교개혁이 필요한 시대이다.

왜 개혁이 필요한가?
한 마디로 말하여 말씀 가운데 서지 못했기 때문이다.
고로 개혁은 언제나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어떤 인간적인 수단이나 목적을 동원한다면 그것은 개혁이 아니다.

그런데 말씀으로 돌아가더라도 언제나 그 개혁의 끝은 악으로 흘러간다.
우리는 이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우리 사람이 얼마나 악한 존재인가 하는 것이다.
성경 말씀이 그래서 옳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겸손히 하나님 앞에 내세울 것 없이 서야 한다.

우리는 기도한다.
개혁할 수 있도록 능력을 달라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말씀에 바로 서게 해달라고.
이것이 개혁을 부르짖지 않아도 개혁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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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165.124.87.164)
2013-05-18 01:30:18
때로는 긍정적으로 보고 싶습니다.
한 나라에 어느 한 종교가 아닌 여러 종교가 혼재해 있다는 것은 분명 긴장과 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종교간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종교를 대하는 한 종교내의 입장의 차이의 대립 또한 커질 수 밖에 없기때문입니다. 물론 기독교와 같은 배타적 성격의 종교에서 그 논란은 더 클 것입니다.

하지만 때로 이러한 면이 더 좋을 수 있겠다는 생각도 가끔 해 봅니다. 보수와 진보가 서로 협력하거나 이 둘을 아우를 만한 새로운 이념이 만들어지는 것은 기대하지 않습니다.

역사적으로 그리고 지금 세상에서도 내가 생각하고 느끼는 것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때가 얼마나 많았는가 생각해 봅니다. 치열한 논쟁과 다툼 속에서 한 순간이라도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이의 일부의 공감을 느낄 때가 있다면 그것은 모든 사회의 분위기가 한결같을 때는 절대 깨달을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일 것입니다.

문제는 그러한 논쟁속에서 점점 자신의 논리를 보호하고자 극단화 시키는 경우인데 삶의 이치가 항상 그렇게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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