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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은 어디에?
정연복  |  pkom545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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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3년 05월 08일 (수) 15:16:36
최종편집 : 2013년 05월 08일 (수) 18:19:43 [조회수 : 3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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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은 어디에?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1. 하늘 나라와 하느님 나라

요즘도 지하철이나 거리에서 "예수 천당, 불신(不信) 지옥"이라는 전도 구호를 힘차게 부르짖는 광신도들을 가끔 목격할 수 있다. 예수를 믿어야만 천당에 들어가고,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죽어서 지옥에 떨어져 활활 타는 유황불 속에서 영원한 고통을 겪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신앙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갖고서 사람들 앞에서 당당히 외치는 그들의 거침없는 용기는 부럽기도 하다. 하지만 천당과 지옥을 이분법적으로 갈라놓고 예수를 믿지 않으면 어쩔 수 없이 지옥행이라고 떠들어대는 그들에게 사람들이 싸늘한 시선을 보내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신약성서에서 "하늘 나라"(천국, 天國)는 마태복음에만 나오고 다른 곳에서는 "하느님 나라"라고 표현한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천국)는 유대교적 색채를 짙게 띠고 있는 마태복음의 독특한 용어라고 할 수 있다. 아마 거룩하신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기를 꺼리는 마태 공동체의 보수적인 신앙 분위기를 감안하여 마태복음 기자는 하느님을 하늘로 우회적으로 표현한 게 아닌가 싶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는 공간적 개념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통치권이 확립되고 그분의 뜻이 실현되는 이상 사회를 가리키는 정치적 개념으로 보아야 한다는 게 신약성서 학자들의 일반적 견해다.  

이 간단한 두 가지 사실만 놓고 보더라도, 사람이 죽어서 가는 천국을 유달리 강조하는 한국 교회 풍토는 문제가 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친히 가르친 '주의 기도'에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말하듯, 성경에서 강조하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이 땅에 실현되는 것인데, 이 점을 망각하고 사후(死後)에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마치 기독교 신앙의 목표요 핵심인 양 이야기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2. 천국은 이 땅 위에 이루어져야 하는 것

천국은
우리가 쳐다보는 저 먼 어느 공중에 있는 게 아니다.
그 천국은 이 땅 위에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만든 이 땅이 얼마나 아름다운데,
왜 우리는 이 땅을 업수이 여기는가?
설혹 천국이 아름다운 보석으로 꾸며져
우주 바깥 어느 곳에 있다손치더라도,
그것은 세상 끝나는 날 하나님의 계획에 맡겨 두고
우리는 우리 할 일을 해야 한다.
죽어서 가는 감상적인 꿈에서 깨어나
진정한 꿈을 이 땅에 이뤄야 한다.
이 땅에서 매이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이 땅에서도 풀리면 하늘에서도 풀린다.
이 땅에서 우리가 해야 할 임무를 다하지 않고
어찌 하늘의 영광을 기대하겠는가.          
(권정생, 1937-2007, '천국')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살며 한평생 시골 교회당 종지기로 봉사했던 권정생. 평생 새 옷을 거의 입어 보지 못하고 종이 한 장도 아껴 사용하며 항상 검은 고무신과 낡은 셔츠 차림으로 5평 남짓한 오두막에서 가난하게 살았던 그분은 "세상에서 가장 맑은 그리스도인"(이필완 목사)이었다.

우리 나라 아동문학의 최고봉으로 평가되는 <강아지똥>을 비롯해 <하느님의 눈물> <몽실언니> <하느님이 우리 옆집에 살고 있네요> <도토리 예배당 종지기 아저씨> <무명저고리와 엄마> 등의 동화와 <오물덩이처럼 뒹굴면서> <우리들의 하느님> 같은 수필집 등 수십 편의 주옥같은 작품을 써서 욕심을 부렸더라면 인세만 갖고서도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었을 테지만, 통장에 차곡차곡 쌓인 10억 원 가까운 인세를 북한 어린이들을 위해 써달라는 유언을 남기신 분.

정말이지 하느님 마음에 쏙 들었을 티없이 맑은 영혼과 순수한 믿음으로 평생을 살았기에 천국이 있다면 그곳에 들어가고도 남았을 그분이 딱 잘라 말한다. "천국은 우리가 쳐다보는 저 먼 어느 공중에 있는 게 아니다. 그 천국은 이 땅 위에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설혹 천국이 아름다운 보석으로 꾸며져 우주 바깥 어느 곳에 있다손치더라도, 그것은 세상 끝나는 날 하나님의 계획에 맡겨 두고 우리는 우리 할 일을 해야 한다.... 이 땅에서 우리가 해야 할 임무를 다하지 않고 어찌 하늘의 영광을 기대하겠는가."    

여러 해 전에, 나는 이 글을 읽으면서 "천국"에 대한 그 동안 아리송했던 생각들이 말끔히 정리되는 느낌이 들었다. 천국이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 "하느님이 만든 이 땅"에서 "우리는 우리 할 일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하늘의 영광을 기대하겠는가."

지상에 발붙이고 살고 있는 한, 우리는 "저 먼 어느 공중에 있는" 천국을 바라볼 게 아니라 "이 땅에서 우리가 해야 할 임무"에 충실해야 한다. "죽어서 가는 감상적인 꿈에서 깨어나 진정한 꿈을 이 땅에 이뤄야 한다." 뜬구름 잡으려 하지 말고 '지금 여기'의 삶에 최선을 다해야 옳다는 그분의 말씀이 이제 한국교회 강단에서 선포되기 바란다.


3. 당신 하늘 나라를 이 땅 나라에 어서 이룩합시다.

세상을 만들고 나서도
하늘 뒤에 숨지 아니하시고
햇빛처럼 혹은 빗줄기처럼
끊임없이 땅으로 내려오시는 하느님
고맙습니다, 이 세상을
우리들의 손에 아주 맡기시지도 않고
그렇다고 인간의 손이 닿지 못할
어디 높은 곳에 두지도 않으시는 하느님
고맙습니다, 우리의 영원한 동역자여
당신 하늘 나라를 이 땅 나라에 어서 이룩합시다.
(이현주, '땅으로 내려오시는 하느님')

시인 목사는 말한다. 하느님은 "하늘 뒤에 숨지 아니하시고" "끊임없이 땅으로 내려오시는" 분, "이 세상을 우리들의 손에 아주 맡기시지도 않고 그렇다고 인간의 손이 닿지 못할 어디 높은 곳에 두지도 않으시는" 분, 우리 인간의 "영원한 동역자"라고. 그래서 인간은 하느님과 협력해 "하늘 나라를 이 땅 나라에 어서 이룩"해야 할 능력과 책임과 사명이 있다고.

이런 시인의 태도에 이 땅의 주류 기독교는 인상을 잔뜩 찌푸리거나 반대할지 모른다. "하늘 나라"는 인간의 능력 밖에 있는 초월적이고 신비한 나라, 즉 믿음의 선물로서 인간에게 "거저" 주어지는 나라이지 인간이 주제넘게 관여하고 건설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라는 것이 한국교회 설교의 단골 메뉴들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또 어쩌면 보수적인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은 감히 신과 인간의 협력을 말하는 것은 신학에서 말하는 '신인(神人) 협동설'로서 이단(異端) 색채를 띤 위험한 행동이라고 손사래를 칠지도 모르겠다      

물론 인간 능력에는 엄연한 한계가 있음을 인식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래야 인간은 역사 앞에서 늘 겸손하고 끊임없는 자기 반성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역사 창조 능력을 무시하고 깔보는 것이 올바른 기독교 신앙일까?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죽음을 눈앞에 둔 중대한 시점에서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말한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그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이다"(요한 14:12). 세상에서 박해와 핍박을 받으면서도 신실하고 굳센 믿음으로 사랑의 공동체를 지키려 애썼던 요한공동체의 자의식이 담겨 있는 이 말씀에 우리는 귀를 쫑긋 세워야 한다.

예수는 분명한 어조로 선언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이다." 무슨 말인가? '나는 이 땅 위에 하느님 나라를 이룩하는 일에 헌신하다가 세상 권력자들의 미움을 사서 이제 죽임을 당해 너희 곁을 떠나야 할 테지만, 조금도 기죽지 말라. 너희에게는 새 역사 창조의 무한한 잠재력이 있다. 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믿음에 기대어 수동적으로 살려고 하지 말고 너희 자신의 능력을 믿고 주체적으로 행동하라. 내가 지금까지 이룩한 일을 빌미로 나를 섣불리 우상화·신격화하지 말라. 내 앞에 공손히 무릎 꿇기보다 차라리 나를 딛고 나를 넘어가라'는 간곡한 부탁이며 분부가 아닌가.

하느님은 "우리의 영원한 동역자." 다시 말해, 하느님과 인간은 수직적 주종(主從) 관계에 있는 게 아니라 상호 협력의 파트너 관계에 있다는 시인 목사와 예수의 말씀은 저 먼 "하늘 나라"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던 우리의 무책임한 내세 지향적 신앙 생활에 내리꽂히는 매서운 죽비(竹 )가 아니겠는가.      


4. 천국의 문 앞에서

세상의 종말이 왔다
이 지상에서 제일 소중한 것 하나씩만 가지고 저 세상에 가도록 허락했다

어떤 자는 무거운 황금 뭉치를 낑낑대며 지고 간다
어떤 자는 애인의 손을 잡고 시시덕거리며 간다
어떤 농부는 씨앗 주머니를 소중히 안고 가기도 하고
어떤 어부는 큰 그물을 메고 가기도 한다
말을 타고 가는 자도 있고
수레를 끌고 가는 자도 있다

당신은 무엇을 가지고 가겠는가?

그런데
천상의 입구에 이르렀을 때
한 사람에게만 문이 열렸다

그는
병든 노모를 업고 온 가난한 등대지기였다.
(임보, '천국의 문門')

시인은 1940년 생, 그러니까 올해 만 일흔 셋이다. 몇 해 전부터 시인의 시들을 좋아하게 되었는데, 어느 시를 읽어보아도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이 쉽고 절제된 언어 속에 녹아 있다.

시인이 크리스천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설령 시인이 크리스천이 아니라고 해도 상관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시인이 인생에 대한 무르익은 성찰에 다다르게 된 것이 기독교 신앙 때문이든 혹은 다른 이유 때문이든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원숙한 삶의 경지에 이른 시인을 통해 하나라도 더 배워 내 자신의 삶과 믿음이 좋은 방향으로 변화되는 게 더욱 중요하기 때문이다.  

"병든 노모를 업고 온 가난한 등대지기"에게만 천국 문이 열렸다는 이 비유적인 시를 통해 시인은 무엇을 말하는 걸까? 늙고 병든 어머니에 대한 지극히 착한 마음, 즉 인간이라면 당연히 가져야 할 순수한 사랑이 바로 천국 문을 여는 열쇠라는 걸 시인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나는 이 시를 읽으면서 신구약을 통틀어 심판에 관한 가장 상세한 보도인 마태복음 25:31-46의 '최후의 심판' 이야기를 떠올리게 된다.

심판을 주관하는 임금은 천국에 들어갈 사람들에게 말한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40절). 또, 임금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사람들에게 말한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 이 사람들 가운데서 지극히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다"(45절).

이 '최후의 심판' 이야기에서, 천국행과 지옥행을 판가름하는 것은 종교적 믿음이 아니다. "믿음"이라는 표현은 길게 늘어진 이야기의 그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자에게 마실 것을 주고, 나그네를 영접하고, 헐벗은 자에게 입을 것을 주고, 병든 자를 돌보고, 감옥에 갇힌 자를 찾아주는 작고 착한 행동을 실천했느냐 여부가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형벌"(46절)을 결정짓는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오직 믿음만을 강조할 뿐 그 믿음의 당연한 결과물이어야 할 착하고 인정(人情) 많은 행실, 혹은 사람으로서 마땅히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윤리·도덕은 등한시하는 이 땅의 기독교와 교회들에 대한 준엄한 비판이다.      


5.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위로하실 것이다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땅을 차지할 것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배부를 것이다

자비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비롭게 대하실 것이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느님을 볼 것이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느님이 그들을 자기의 자녀라고 부르실 것이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태 5:3-10)

저 유명한 '산상수훈'(마태 5-7장) 서두를 장식하는 말씀이다. 여기에서도 초점은 "하늘 나라"가 어디에 존재하느냐 하는 것에 있지 않다. 이 '팔복'(八福) 말씀을 주의 깊게 읽어보면, 그 나라는 믿음 유무(有無), 교회 출석 여부가 아니라 내가 어떤 "사람",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과 전적으로 관련된다.    

'유신론적' 실존주의 철학자인 키에르케고르의 시가 이 말씀의 적절한 주석이 될 것 같다.

삶의 끝에 서면
너희 또한 자신이 했던 어떤 일도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중요한 것은 그 일을 하는 동안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가 하는 것뿐이다.

너희는 행복했는가?
다정했는가?
자상했는가?

남들을 보살피고 동정하고 이해했는가?
너그럽고 잘 베풀었는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랑했는가?

너희 영혼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이 무엇을 했는가가 아니라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알게 되고,
마침내
자신의 영혼이 바로 '자신'임을 알게 될 것이다.
(키에르케고르, '천국으로 가는 시')

철학자 시인은 말한다. "삶의 끝에 서면.... 중요한 것은 ....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가 하는 것뿐이다."  

인간의 실존을 심미적, 윤리적, 종교적 실존의 세 단계로 나누어 설명하면서 종교의 중요성을 역설했던 키에르케고르도 "사람", 즉 사람 됨됨이를 궁극적으로 중요한 걸로 보았다는 의미가 아닐까?  

이 점에 비추어 보더라도, 한국교회의 기독교 이해는 문제가 참 많다. 믿음에 잇대어 사람이 사람답게 되는 것이야말로 가장 단순하면서도 핵심적인 것인데,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예수를 내 영혼의 구세주로 믿고 고백하기만 하면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이 땅에서 살아가는 날 동안 온갖 축복과 은총을 받고 죽어서도 천국에 들어가 영생 복락을 누린다'는 식으로 믿음을 천박한 마술적·주술적 수준으로 떨어뜨렸다.  

"하늘 나라"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사람"들의 것이라고 예수는 분명히 말하고 있는데도, 한국교회는 그 나라를 믿음만 있으면 누구라도 들어갈 수 있는 하찮고 이상한 나라로 만든 것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삶과 인격의 근본적이고 질적(質的) 변화 없이 형식적인 신앙생활과 허울 좋은 신앙고백만으로도 손쉽게 들어갈 수 있는 "하늘 나라"가 과연 존재할까? 아니, 나는 하느님의 자녀인가? 나는 "하늘 나라"를 차지할 자격이 있는가?
    
  
6. 천국을 꿈꾸는 나

어머님이 한평생 독실한 크리스천이셨고 아내도 대물림하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고, 자신도 한때 교회에 나갔던 내 친구가 하나 있다. 이슬같이 맑은 영혼을 가진 친구는 이따금 기독교 신앙에 관해 짧고 진지한 질문을 던지는데, 언젠가 내게 정말 천국이 있는 건지 물었다. 십여 년 가까이 된 일이라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대략 이렇게 답해 주었던 것 같다. "천국이 정말 있는지 없는지 나도 잘 모르겠어. 하지만 예수를 믿기만 하면 들어갈 수 있는 신비한 나라가 저 하늘 어딘가에 있을 것 같지는 않아."

사십 년 가까이 신앙생활을 했으면서도, 이렇게 내 믿음은 엉성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가끔 이런 생각이 든다. '내가 죽어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감히 천국을 꿈꿀 수 있을 만큼 내가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려고 애쓰는 게 중요한 거다. 사후의 천국은 결국 희망적 사고(wishful thinking) 혹은 신비의 영역으로 남겠지만, 내가 이 땅에서 실천해야 할 천국의 몫이 있다. 그리고 천사같이 착한 아내가 철석같이 믿는 천국의 존재, 고단한 삶 속에서도 아내에게 큰 힘과 위로가 되어 주는 그 천국에 내 마음도 활짝 열어 놓아야겠다.'    
      
............

+ 천국(天國)

천국은 언제나
나의 주변에서 살랑살랑 맴돌고 있다.

사랑의 눈빛으로 바라보면
길가의 이름 없는 풀 한 포기도 어여쁘고

이 세상에 미워할 사람
하나도 없으리니

나의 사랑이 깊어지는 그 만큼
천국은 지상으로 내려오더라.

사랑하는 이들과 손목 한번 마주잡고
다정한 눈길이 스치는 한순간이

지상에서 영원까지
나의 행복한 천국이기를!
(정연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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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빛 (207.210.3.147)
2013-05-10 03:50:12
로빈 마이어의
최신작 '지하교회 (The Underground Church, 2012)' 영문본 읽기를 조금 전에 마쳤습니다.

책의 내용이 어찌나 좋은지, 만약 이 책이 한국어로 번역이 아직 않되었다면 내가라도 한번 한국어로 번역해 볼까 하는 욕심까지 생기게 하는 책입니다.

망각해서는 아니될 구절 하나 소개합니다.

<어떻게 하면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에서 이제는 어떻게 하면 천국이 이 땅으로 내려올 수 있을까 로 우리의 사고가 전환되어야 한다>
.
리플달기
1 0
목사 (84.101.163.12)
2013-05-10 01:29:36
귀한글 잘읽었습니다.감사합니다.
리플달기
1 0
포이멘 (183.109.98.59)
2013-05-09 14:39:01
아직 이 땅에 천국을 꿈꿉니다.
20년전 꿈꾸었던 협동조합을 통하여 지상의 천국을 꿈꾸었습니다.
사람이 이룰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경륜은
지금도 이 땅에서 그것을 이루어 나가고 있음을 느낍니다.

참된 목사들이 더 많겠지요. 삯꾼목사들보다는

다시 하나님의 교제를 통해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을 배웁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일에 동참합니다.

이번에는 나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먼저 입니다.
다만 따라가겠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리플달기
2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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