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퍼빌립필 가는 길


그 길이
험난한 것 알지만

한 걸음
한 걸음

온 몸에
땀방울 맺힐 때마다

주님 생각하며
기쁨으로 가네.

산악마을 아퍼 빌리필을 다녀와서
2013년 4월 14일

빌립필 마을은 읍내에서 바기오 방향으로 난 메인 도로를 오토바이로 약 20분 정도 가면 도착할 수 있는 가까운 거리다. 이 마을 뒷산을 올라 산을 하나 넘으면 원주민 마을이 있는데, 위에 있다고 하여 아퍼 빌립필이라 부른다. 이 마을은 가깝지만 오지여서 외부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곳이고, 지금은 마을 사람들이 거의 산 아래로 이사 나와 살고 노인들만 몇 분 사는 곳이다. 이곳은 읍내에서 가까우면서도 오지를 체험할 수 있는 곳이라 금번에 제일 먼저 이곳 방문을 계획하였다.

오전 일찍 출발하였는데도 강열한 아열대의 햇빛은 민둥산 고개를 달구어 우리의 몸을 태운다. 약간의 그늘만 좀 있으면 조금씩 쉬어가며 약 1시간 걸려 온 몸이 땀범벅이 되어 산등성이를 타고 올라가 고갯마루를 넘어서니 개들이 꼬리를 치며 달려온다. 마을이 가까이 있다는 신호다. 마을에 들어서니 우리를 맞이하는 자는 오직 강아지들 뿐 텅 빈 낡은 빈집들이 기운 없이 우리를 바라볼 뿐이다. 빈집이 사람 사는 집보다 더 많다. 두 칸짜리 초등학교는 폐교되어 교실 안에는 여기저기 낡은 의자가 먼지 속에 흩어져 나뒹굴고, 운동장의 녹슨 농구대는 옛날을 추억하며 쓸쓸히 서 있다. 하지만 운동장 옆 울창하게 자란 망고 나무는 여전히 힘차게 잎을 날리며, 인적이 드문 곳이지만 혹시라도 손님이 찾아올까 열매를 익히고 있다.

사람은 떠나도 자연은 늘 변함없이 제 자리를 지킨다. 우리가 모두 죽어도 자연은 그 자리를 지킬 것이다. 인간이 내 땅이다 네 땅이다 싸우며 사용하다 마구 흐트러트리고 간 지구촌을 자연을 말없이 깨끗이 정화하며 다음 세대를 또 기다릴 것이다. 대지는 모든 것을 품고 용서하고 사랑하고 다시 만들어내는 자연의 어머니이다. 가이아이다.

적막한 산촌에 외롭게 혼자 사시는 할머니가 문 옆에 시름없이 앉아 계시다가 다가오는 이방인을 보자 실신하듯 반가이 맞이하신다. 사람을 그리워하고 기다려 본 적이 있는가? 사람을 그리워하고 기다리다 사람을 만나면 얼마나 반갑고 눈물겨운지 경험해 본 적이 있는가! 인생살이에 가장 힘든 일은 외로움이다. 병든 것보다 더 마음 아픈 것이 외로움이다. 사랑하는 자녀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여운 손주들을 모두 멀리 떠나보내고 깊은 산속에서 늙은 남편조차 없이 혼자 매일 하늘만 쳐다보며 외로움을 달래는 할머니의 그 심정을 누가 헤아릴 수 있으랴!

지팡이를 짚고 간신히 걸어오신 꼬부랑 할머니를 치료해 드린다. 사실 할머니는 치료받기보다 사람을 만나는 것이 더욱 감격적이다. 사람을 만져보고 사람에게 만져진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할머니의 등을 어루만질 때마다 너무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신다. 빈집과 폐교와 녹슨 농구대와 노곤한 노인들 모두가 더 이상의 목표와 꿈이 없이 스스로 사그라져 없어질 날만 기다리다가 새로운 사람을 만나니 참으로 반가운가보다. 이제 얼마 안남은 인생, 도시에서 힘들게 사는 자식들에게 폐 끼치기 싫어 그냥 이렇게 살다가 가려고 빈 마을에 남아 모진 생명을 버티고 있다. 아, 이것이 이들의 인생말년의 모습이다. 아니 우리 미래의 모습도 별 도리가 없다.

젊은이의 손이 노인의 몸에 닿자 노인들의 눈과 몸에서 그동안 숨어있던 엔트로피가 막 발산되는 느낌이다. 실은 이분들에게 약은 별 효과가 없다. 약도 어느 정도 면역력이 있을 때 효과를 발휘한다. 이제 곧 사그라져 없어질 고목과 같은 노인들에게 무슨 병원과 약이 소용 있겠는가. 고령의 연세에 약을 먹으면 얼마나 더 오래 살 것이며, 오래 살면 무슨 낙이 있겠는가. 약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고 대화이다. 그리고 영혼을 위로하는 말씀이다. ‘새 하늘과 새 땅’에 관한 비전은 이분들에게 마음의 큰 보약이 된다. 나도 어느덧 보약을 먹을 나이가 되었다. 이 외로운 노인들을 만나는 것은 어쩌면 노인들보다 나에게 더 큰 보약이 될지도 모른다.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더 행복하기 때문이다.

의료선교를 마치며 노인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이곳에 자주 와야겠다고 동행한 간호사들의 의향을 물으니 모두들 이제 다음부턴 절대 안 온단다. 올리비아는 이곳 가까운 앞산 밑에 살며, 스스로 자원하여 나를 이곳에 소개하고 동행하였지만, 빌리필 산마을 길이 이렇게 험한 줄 몰랐다며 다리가 아파 죽겠다는 시늉을 한다. 아무 볼거리도 놀 거리도 일거리도 없어 자식들조차 버리고 떠난 폐허가 다 된 깊은 산속을 젊은 아가씨들이 또다시 올 이유가 뭐 있겠는가. 내가 너무 무리한 부탁을 하였다. 이곳 간호사들은 어릴 때부터 열악한 환경에서 강인하게 자랐어도 꼬박 한 시간 걸려 올라온 무덥고 가파른 민둥산 산길이 무척 힘들었나보다. 게다가 하산하다가 뱀을 만나 놀라기도 했으니 더 정떨어질 일이다.

처음 만났지만 얼마나 사람 만나는 것이 그리웠으면 헤어지기 아쉬워 눈물을 감추지 못하시는가. 서운해 하는 노인들과 작별을 고하고 더 늦기 전에 서둘러 어스름한 가파른 산길을 더듬어 내려온다. 한 아주머니가 무언가 머리에 이고 더 어두워지기 전에 가려고 서두르며 산을 올라오다 우리를 보고 무척 반가워한다. 사람을 만나는 것이 그리 즐거운 일인가! 자기 마을을 다녀온다니 더욱 좋아한다. 한 참 내려오니 술 취한 할아버지가 컴컴한 오솔길 길목에 꺼진 플래시를 한 손에 들고 앉아 잠시 숨을 고르고 있다. 읍내에 나갔다가 기분 좋아 한잔 하셨나보다. 이분도 역시 우리를 보자 반가워한다. 이들은 모두 사람을 만나면 반가워한다. 도시에선 수많은 사람들이 스치고 지나쳐도 마네킹처럼 무표정이다. 간혹 사람에 밀려 어깨를 스치면 까칠한 눈으로 바라본다. 실수하여 젊은 여인의 몸을 스쳤을 경우 고발당하여 유치장에 가는 수도 있다. 도시인들은 사람과의 만남이 얼마나 소중하고 행복한 일인지 관심 가질 시간이 없이 바쁘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사랑할만한 거룩한 존재인지 생각할 여지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