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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는 구원받기 어려운가?한국 교회 교우님들께 드리는 류상태의 주일편지 - 2013년 4월 14일
류상태  |  sham5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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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3년 04월 13일 (토) 09:16:10
최종편집 : 2013년 04월 13일 (토) 13:44:57 [조회수 : 50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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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제가 기독교에 입문했던 초기에, 제 마음에 큰 부담을 주었던 성서 본문을 하나 선택하여 교우님들과 생각을 나누고 싶습니다.

제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따르겠다고 서약한 때는 35년 전이었습니다. 당시 대학 2학년이었던 저는 기독학생회 겨울수련회에서 예수님을 만나 매일매일 찬송하고 기도하며 성경말씀을 묵상하면서 ‘주님과의 데이트’를 즐겼는데, 몇 달 지나지 않아 감당키 어려운 말씀을 만났습니다.


1. “네 재산을 모두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복음서에는 가끔 예수님께서 자신을 찾아와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들에게 모진(?) 말씀으로 좌절감을 안겨주는 글이 등장합니다. 아래 본문도 영생의 길을 묻는 젊은이에게 주님께서 감당하기 어려운 말씀을 하셔서 근심하며 돌아가게 하는 이야기인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내용은 공관복음서에 모두 나와 있으므로, 시간을 내실 수 있는 교우님들은 마태복음 19:16-30, 마가복음 10:17-31, 누가복음 18:18-30을 모두 읽어보시면 더욱 도움이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 길을 떠나시는데 어떤 사람이 달려와서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선하신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왜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선하신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시다. ‘살인하지 마라.’ ‘간음하지 마라.’ ‘도둑질하지 마라.’ ‘거짓 증언하지 마라.’ ‘남을 속이지 마라.’ ‘부모를 공경하여라.’ 한 계명들을 너는 알고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이 “선생님, 그 모든 것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를 유심히 바라보시고 대견해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니 내가 시키는 대로 하고 나서 나를 따라오너라.”

그러나 그 사람은 재산이 많았기 때문에 이 말씀을 듣고 울상이 되어 근심하며 떠나갔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둘러보시며 “재물을 많이 가진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른다.” 하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 놀랐다. 그러나 예수께서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 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제자들은 깜짝 놀라 “그러면 구원받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며 서로 수군거렸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똑바로 보시며 “그것은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느님은 하실 수 있는 일이다. 하느님께서는 무슨 일이나 다 하실 수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 때 베드로가 나서서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또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의 복도 백배나 받을 것이며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그런데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마가복음 10:17-31, 공동번역).

그리 길지 않은 이 본문에는, 지금까지 교회 역사에서 많은 논란을 불러왔던 교리와 신학의 여러 주제들이 담겨있습니다. 예수의 신성과 인성, 원죄, 구원의 길 등 다양한 주제들을 담고 있는 복잡한 본문이지만, 여기서는 재산 문제에 집중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본문의 이야기는 재산이 꽤 많은 한 젊은이(마태복음에는 ‘청년’, 누가복음에는 ‘어떤 관리’라고 되어 있음)가 예수님을 찾아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지 여쭙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그런데 젊은이의 물음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너무나 평이했습니다. “십계명 후반부의 계명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젊은이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을 것 같습니다. 그는 그 계명들을 어려서부터 모두 지켜왔노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젊은이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며 “네 재산을 모두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리고 나서 나를 따르라.”고 하셨고, 젊은이는 “울상이 되어 근심하며 떠나갔다.”고 본문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네 재산을 모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이 말씀은 율법의 문자가 아니라, 그것이 의미하는 중심내용의 실천을 엄격하게 요구하는 초창기 예수운동이 얼마나 공정한 사회를 목표로 하고 있었는지, 또한 그 목표를 실현하고자 하는 의지와 열망이 얼마나 강렬하고 과격했는지를 보여주는 단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성서에 이런 기록들이 나타나기에, 복음의 원형은 종교적이기보다는 과격한 사회적 성격의 운동이었을 것이라고 보는 학자들이 많습니다. 특히 부자에 대한 극도의 거부감과 가난한 이웃들에 대한 깊은 애정은 그로부터 2천년 후에 발생한 공산주의 운동을 연상케 하며, 예수는 급진적인 빨갱이였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본문을 세심히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부자들을 무조건 싫어하시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계명을 모두 지켰다고 자신 있게 대답하는 젊은이를 예수님께서 “유심히 바라보시고 대견해하셨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2. ‘살부살조’와 ‘살예살서’

불교에서는 수행자에게 ‘살부살조’ 정신을 가르칩니다. 부처님이라도 수행을 방해하면 죽이고 조사(또는 선사, 앞서 깨달은 선생)가 방해하면 그도 죽이라는 뜻으로, 온전한 깨달음을 얻으려면 이전의 그 어떤 전제에도 매이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불교의 살부살조 정신을 본받아 우리 기독교도 ‘살예살서’(예수님이 방해하면 예수님을 죽이고, 성서가 방해하면 그것을 넘어서는) 정신을 꼭 가져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성서에 ‘기록된 예수님’이 ‘실제의 예수님’을 정확하게 반영하지 못하거나 왜곡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건이 전달 과정을 거쳐 기록될 때는 필연적으로 전달자와 기록자의 시각과 해석이 작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서에 기록된 예수님도 ‘실제의 예수님’이 아니라 ‘기록자에 의해 해석된 예수님’입니다. 하여 우리가 성서를 읽을 때, 기록자의 의도를 정확히 읽어야 하며, 때로는 기록자의 한계와 해석을 넘어서야 될 때도 있습니다.

본문의 기록 안에 담긴 ‘실제의 예수님’은 어쩌면 이렇게 말씀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네가 율법을 모두 지켰다면, 그 안에 담긴 실제 정신을 삶으로 살아내야 하지 않겠느냐?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그 뜻을 너의 삶 전체로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굶고 있는 네 이웃을 위해 네가 가진 재산을 조금이라도 나누어 줄 수 있겠느냐?”

제가 감당할 수 있는 예수님은 여기까지입니다. 만일 그게 아니라, 정말로 재산을 모두 처분하고 빈털터리가 되어야만 나를 따를 수 있는 것이라고, 본문에 기록된 그대로 확실하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면, 저 역시 본문의 젊은이처럼 예수님 따르기를 포기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저는 ‘기록된 예수님’ 안에서 더욱 따뜻하고 넉넉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있습니다. 근심하며 떠나가는 젊은이에게 달려가 그를 부둥켜안고 “그 정도도 훌륭하다. 부족한 부분은 나를 따르며 더 배워라. 네가 가진 재산보다 더 크고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내가 너에게 알려주겠다.”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 말입니다.

제가 이렇게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는 이유는, 제가 만난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 잔을 내게서 피하여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고뇌하며 기도하신 너무나 인간적인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렇게 소심하기까지 하신 예수님이 너무나 좋습니다.

그런 저의 예수님은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복음 11:28~30)고 지금도 항상 저에게 말씀해주고 계십니다.

하지만 저의 해석에 교우님께서 반드시 동의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교우님들께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이렇게 문자에 매이지 않고 그 문자 안에 담긴 속뜻을 읽으려 노력하면 우리는 더욱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열린 신앙과 진지한 탐구를 계속 하신다면, 제가 본문에서 찾아내지 못한 더 깊고 중요한 뜻을 교우님께서 읽어내실 수도 있습니다.

어쨌거나 본문에서 계속 이어지는 제자들과의 대화를 통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중심은 분명합니다. “자신과 가족은 사랑할 줄 알면서 이웃의 고통을 외면한다면 계명을 모두 지켰다 하더라도 그것은 형식에 불과하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고자 한다면 가족이기주의에 매몰되지 말고 이웃과 더불어 누리는 행복을 추구하여라. 그래야 진정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다.”


3. 본문을 헌금 강요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거짓 목자들을 조심하십시오.

본문에서, 오늘날 일부 설교자들이 교회의 재산 증식과 증축을 위한 수단으로 자주 인용하여 우리 교우님들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부담을 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본문의 결론에 해당되는 다음 구절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또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의 복도 백배나 받을 것이며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이 말씀이 과거나 지금이나 여전히 우리에게 갈등을 주는 이유는 “신앙이 가정보다 우선한다.”는 전제를 지지한다는 데 있습니다. 지난 이천년 동안 복음서에 기록된 이런 말씀들에 근거하여 우리 기독교는 “교회는 가정 뿐 아니라 민족이나 국가 등 그 어떤 조직체보다 우선한다.”고 가르쳐왔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마가복음이 기록된 서기 70년 당시의 정황 아래에서 읽어야 합니다. 로마제국에 체계적으로 저항했던 유다민족의 독립운동이 결국 실패로 돌아가, 복음서 기자가 예수님의 입을 빌어 표현한 대로 예루살렘 성전이 “돌(기초석) 위에 돌(건축물) 하나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 파괴되었고, 유대 독립군이 최후의 저항을 벌이던 마사다 요새까지 점령되어 유다공동체 자체가 붕괴될 위기에 처한 극한 상황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공동체가 붕괴되면 그 공동체 내에서 시작된 예수운동 역시 공동체와 함께 궤멸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위기상황에서 어떻게든 예수님의 가르침을 유지하고 계승하기 위해서는 개인이나 가정보다 예수공동체를 중심으로 하나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것은 마치 일본 제국주의 시대에 개인의 안락과 가정의 행복을 유보하고 독립운동에 나섰던 애국지사들의 선택에 비견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극단의 선택이 극한상황에서는 아름다운 선택일 수 있지만, 평화의 시기에도 변함없이 강조되면 가정과 사회가 설 자리가 없어집니다. 개인의 꿈과 공동체의 이상이 함께 존중받아야 평화롭고 건강한 사회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건 두말 할 나위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위의 본문이 이런 특수한 상황의 산물임을 이해하지 않고 그냥 문자 그대로 읽게 되면 우리의 신앙은 너무나 무모하고 맹목적이 되어 우리의 소중한 가정과 사회를 송두리째 무너뜨릴 수도 있습니다.

더욱 기가 막히고 가슴 아픈 일은, 본문을 인용하는 설교자 중에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라.”는 말씀에서 “가진 것을 다 팔아”라는 앞부분만 인용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뒷부분을 “교회를 위해 아낌없이 헌금하라.”는 논리로 바꾸어, 교회를 새로 건축하거나 부흥회를 열 때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교우님들에게 큰 부담을 안기는 사람이 적지 않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때로는 ‘살예살서’ 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기록자의 의도와 당시의 사회적 정황을 이해하지 않고 무조건 문자 그대로 믿는 신앙이 이렇게 무모하고 위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여 문자 자체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기는 문자우상숭배와 ‘기록된 예수’를 넘어서지 않으면 참 예수님을 만날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서 본문을 이용하여 무리한 헌금을 요구하거나 교우님들께 감당하기 어려운 희생을 요구하는 설교자는 거짓 목자입니다. 그런 자는 우리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사기꾼일 뿐이니 잘 분별하여 교회에 발을 들이지 못하게 해 주십시오. 가정에 무리가 될 정도로 경제적인 희생을 강요하는 교회도 예수님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교회입니다.

무엇보다 본문 말씀은 개인의 욕심에만 갇혀있지 말고, 다 함께 누리는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가자는 말씀이지 개인의 행복 자체를 부정하는 말씀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은 종교 조직에 휘둘려 신음하는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 자유와 행복을 주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교우님들의 행복한 삶을 위해 봉사하지 않는 교회, 교우님들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교회는 이 땅에 존재해야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런 교회들이 회개하고 예수님께로 돌아오도록 채찍을 들어주십시오. 그래도 돌이키지 않으면 우리 사회의 안녕과 질서를 위해 퇴출될 수 있도록 힘을 모아 주십시오.


4. 개인의 기부도 아름답지만, 공정하고 따뜻한 세상을 만들어가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말씀하셨다”고 기록된 구절이라 하더라도 비판적으로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신학자들 중에는 성서에 예수님의 말씀이라고 기록된 구절 중에서 실제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그리 많지 않고, 전달자나 기록자, 또는 후대의 교회 공동체가 예수님의 입을 빌어 말한 것이 더 많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뛰어난 혜안을 갖고 우리에게 천금 같은 가르침을 주셨지만, 예수님 역시 완전한 인간으로 오셨기에, 당신께서 사셨던 시대의 한계 뿐 아니라 개인의 편견이나 유한성에 갇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예수께서 편협하고 극단적인 생각의 결과로 그렇게 말한 것이라면 그 부분에 대해서는 비판하고 넘어서기를 망설이지 말아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부자 청년이 근심하며 돌아간 후에 본문의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 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개인의 한계와 연약성을 잘 알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거기서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면 구원받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고 걱정하는 제자들의 장탄식에 예수님은 이렇게 시원하게 답변해주셨습니다.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무슨 일이든 하실 수 있다.”

이 말씀을 저는 이렇게 읽습니다. “부자가 재산을 내놓아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기는 매우 어렵다. 하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이 뜻과 힘을 합하면 정의롭고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다.”

종교 강요가 없는 세상과 전쟁 없는 세상을 꿈꾸는 한 젊은이의 말이 생각납니다. “혼자 꾸는 꿈은 이루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함께 꾸는 꿈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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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 (84.101.163.12)
2013-04-18 08:46:31
부자와 천국에 대하여
부자가 천국에 대하여
성경을 잘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 어렵다 그랬습니다.
들어가냐 못들어가냐가 아니란 말씀이죠,,
.
기가 막힌 표현입니다.
.
대체적으로
천국이 어느 공간에 있다는 전제하에 이 구절을 생각하면 오류입니다.
.
예수께서는 세례요한은 천국에서 작은자,,,천국에서는 작은자라할지라도 그(세례요한)보다는 크다 말씀하셨습니다..
.
예수께서는 천국, 하나님의 나라는 여기있다 저기있다 할것이 아니라 너희가운데 있다라고 말씀하셨지요.
.
세례요한이 보고있는 임박한 ,.오고있는 ,, 심판의 나라 ,,천국을 예수님은 천국을 그렇게 보지 않으셨습니다.
천국은 너희가운데 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 라는 말씀은
부자는 자신의 재물로 하나님나라를 이루기 어렵다 라는 말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말은 자신의 재물을 나누어서 천국을 이루는 하나님의 공동체, 통치의 하나님의 섬김의 ,,,너희가운데 있는 하나님나라를 만들기 어렵다는 뜻으로 풀이해야 한다는 뜻이지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타율적으로 어느 일정액을 기부해야 한다는 공로가 충족이 되어야 하나님나라에 들어간다는 통과의례에 대한 말씀으로 보면 해석이 어려워지며,
.
.하나님나라는 저쪽에 있는 것으로 자꾸 개념을 그쪽에 두고 있는 것이지요.
그럴때에 정말 들어갈수 있는 건지.. 지나친 말씀이 아닌지..얼만큼 나누어야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인가? 라는 식으로 생각하게 되며
하나님은 부자의 마음속에 들어가서 헌신하게 하신다 어쩐다 라는 식으로
타율적인 수동형 인간을 만들기만 할 뿐이지요.
.
.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는 말씀은
부자는
너희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나라 .... 공동체,, 를 자신의 부 보다 더 귀한 가치로 여기기 어렵다는 말씀으로 읽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나 자신의 부를 지키기 보다는 사람의 사랑과 평화 기쁨의 가치를 깨달았을때 그는 부를 쫓지않고 하나님 나라의 가치로 전향하게 되는 거지요.
리플달기
1 0
Philip Im (70.62.49.64)
2013-04-18 02:39:31
어떤 사람들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맞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덧붙여야 할 것이 있습니다.
가난한 자도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한 이유가 가난한 자들에게 베풀지 않았고 자기 자신만을 위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가난한 자들은 잘 베풀까요?
부자나 가난한 자나 사람은 모두 똑같습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할 수 있는 것처럼
가난한 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막10:17-31의 말씀의 핵심은 공동체를 위하여 베풀어라는 것이 아닙니다.
애초의 질문 자체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이고
예수님께서는 상대가 부자 청년이기에 더욱 예를 극대화하기 위하여 재물에 초점을 맞춘 것입니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재물에 목적을 두는 것은 우상숭배와 같으므로 영생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람은 누구나 할 것없이 재물에 욕심이 있습니다.
어떻게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습니다.

말씀은 이것입니다.
누구도 하나님 없이는 영생을 얻을 수 없다.

재물을 베푸는 자 가운데 하나님 믿지 않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들도 영생을 얻습니까?

하나님 믿고 영생 얻은 자로서 베푸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리플달기
4 4
목사 (84.101.163.12)
2013-04-18 09:00:42
가난한 자가 뭐가 똑같습니까?
성경을 잘 못 보고 계십니다.
부자가 천국에 가기 어렵다는 말씀은 가난한 자를 대상에 두고 하시는 말씀이지요,

오히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그러셨습니다 누가복음 4:18

님께서 성경을 인용하시는 논리는
천국을 어떤 시간과 공간의 한쪽영역에다 두고
종교적으로 죽은다음이든지 일정한 시간뒤에 진입하는 장소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렇게 보편적인 종교적인 천국(극락처럼)을 신약성서의 예수님은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어떠한 논리에 반증하기 위해
가난한 자도 역시 천국에 들어가기 어려운것은 마찬가지다 라는 논리는
이미 기본전제가 성경과(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것)는 다른 말씀입니다.

또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영생을 거론하시는 것은 위의 천국과는 좀 다름니다.

위의 천국은
너희가운데 있는 하나님나라 ,,, 여기있다 저기있다 가 아닌 '너희 가운데 있는' 하나님 나라의 ,,(관계속에) 말씀을 하시는 것으로 그 하나님나라를 위해 자신의 부를 덜 귀한 것으로 느끼고 전향하라는 말씀이고,,,,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영생을 말씀하시는 그 '영생'은 다분히 요한복음에서 사용하고 자주 등장하면서 표현하는 요한의 신학적 표현인 개인의 '영원한 생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느끼려면, 소유하려면)재물로는 안된다는 뜻이라 생각합니다.

천국은 타인과 관계적 개념이고
영생은 개인적인 '영원한 생명'적 개념이라고
풀이할 수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가진자가 천국을 이룰수 있지요... 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리플달기
3 0
PhilipIm (172.4.101.176)
2013-04-18 22:25:45
다른 곳에서도 말씀 드렸듯이
천국 혹은 하늘나라,하나님 나라에 대한 개념이 달라
해석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리플달기
0 0
개혁본부 (61.108.182.10)
2013-04-16 15:22:30
질문 : 첫 인사말에 늘~ 교우님, 교우님 하는데...

누가 당신 과 교우 인가요?
리플달기
2 6
이사야 (121.129.19.190)
2013-04-16 17:03:33
웬....착각
개악본부는 확실하게 빼고
리플달기
1 1
참빛 (24.141.4.52)
2013-04-16 15:28:25
앗, 개혁본부님!

오랜만이오.
반가와요~~ ^^
어디가서 굶지는 않고 잘 댕기는 거요?

류목사님과는 전생의 인연이 우뜨게 꼬였길래 이리도 고약하신 말씀을 하신당가?

제 갈길대로 가면 되는 것이여~
뭐 그리 못잡아 묵어 난리를 치시능감?
리플달기
2 4
Ismail-x (112.222.123.131)
2013-04-16 13:53:20
도킨스를 모르는 사람도...
.

글을 쓸 수 있는 당당이 참 아름답습니다.^^


도킨스를 모른다는 것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과 같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무슨 주장을 할 수 있을까요?^^



그냥 궁금해서...


ㅋㅋㅋ.



.
리플달기
6 7
이사야 (121.129.19.190)
2013-04-16 07:17:43
너무괴상한 이땅에 기독교
이땅에 목사들과 교회를 말해야 할때 마음이 괴로운것은 마음 아픈 일입니다..조용기.김홍도.김국도.오정현.전병욱.이사람들이 건제한것이 바로이땅에 기독교의 수준 입니다...최근에 오정현이는 자신의 퇴임약속도 안지키고 잘못을하고도 조사한분들을 모함하는 도저히 상상할수없는 죄악을 저지르고 전병욱이는 많은 여신도를 성추행하고도 교회에서7억의 돈을받아 퇴임후 홍대 쪽에 교회를 설립후 온갇 자신을 합리화하는 미친짖을 하고있습니다...예장합동 참 이상한교단 입니다...이런쓰레기들이 이땅에 기독교 주류로 둥지를틀고 하느님갖고 장난치고 예수님을 장사하며 희롱하고 거룩한영을 조롱하고 있는것입니다....이런 먹사나 막사는 건제하고 예수를 닮은 류상태 목사는 광야에 외치는소리 입니다....가슴에 손을 언고 십자가 예수를생각하며....다시한번 생각합시다....이땅에 기독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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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121.129.19.190)
2013-04-16 06:46:49
귀있는자들은 들으시요
류 상태 목사님은 청빈한 삶을살고 계시며
세속화된 논리의 기독교 교리에 저항하며..십자가를 지신분 입니다..예수를 죽인자가 빌라도나 황제가 아닌 바로 하느님을 믿는 지도자였다는것을 유념해야 하듯..류상태 목사를 정죄한 예장 통합측 인사들은 지금이라도 잘못을 인정하고 그분을 교단에 세워야 할것 입니다
하느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의 입장에서 다시한번 생각해보십시요 류목사님의 생각과 삶을 죄로규정한자들은 안주하는 삶을살며 죄로 규정한자들이 스스로 자유할수있을까요...이땅에 개신교가 더이상 관념화를 거부하고 가식과 위선의 회칠한 무덤이되여 독사의 자식들이 되는것일에서 자유해야 할것 입니다 하느님이 예수님이 거룩한 영이 당신들이 돌이키길 원하십니다...그날을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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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ip Im (70.62.49.64)
2013-04-16 03:45:22
살예살서?
살부살조는 우상을 제거하라는 뜻입니다.
불교에서는 자신이 득도하여 해탈합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발견한 진리를 부처가 가로막으면,
혹은 부처로 인하여 진리를 발견하기 어려우면
그 부처가 우상이므로
부처를 죽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발견한 진리가 참진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발견한 진리도 언젠가는 짓밟힐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절대 진리가 없습니다. 불교에는.
저들은 순환하는 인생처럼 진리에서도 늘 순환하다가 끝납니다.
시지프스의 돌같은 인생을 살다가 가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에게서도 이같은 모습을 봅니다.
세상에 절대 기준이 없고
절대 옳고 그름이 없으며
다양함 속에서 예수 정신대로 살아가면 된다고 주장합니다.

절대 기준이 없으므로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거기에 그럴듯하게 종교적인 의미를 덧붙이면 금상첨화
자신의 생각이 절대(?) 옳은 것인 양 합리화하게 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절대 진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면벽부좌하여 진리(절대 진리가 아닙니다.)를 찾는 것이 아니라
성경 말씀을 통하여 계시하시는 진리를 알아가는 것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계시하신 만큼만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알게 하신 자들만입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는 성경 말씀처럼 계시하신만큼만 압니다.

그리스도인 앞에 놓인 성경을 찢고 예수를 죽인다는 것은
참 진리를 버린다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의 정신을 살자는 사람들이 예수를 죽인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진리는 버리고 껍데기만 행하겠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유대 율법주의자들과 다를 바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율법주의자들을 책망하신 이유가
율법적인 행위에 치우친 나머지
하나님의 원래 뜻 곧 진리를 저버렸기 때문입니다.


물론 핑계를 댈 수도 있겠지요. 교리를 없앤다는 말이라고.
그러면 예수를, 성경을 죽인다는 표현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이 참 진리를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그외는 진리가 없음을 말씀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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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명수 (69.203.221.114)
2013-04-15 13:33:55
여시아문 (나는 이렇게 들었다.)
내가 신앙생활에 매력을 못느끼고 있는 이유중의 하나는, 목사님들의 설교가 영 마뜩하지 않은데에 커다란 이유가 있다.

예수께서 생명을 사는 삶, 기쁜 삶, 사는 것같은 삶을 선포한 복음말씀을 100% '행위'에 중점을 두고 설교하는 것에 강한 거부 반응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위 복음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 적당한 구라를 섞어서 그럴듯하게 설교하는 목사들조차, '자기들도 안믿는 복음을 우리(성도들)더러 믿으라고 강요하는 것 밖에 더 되는가?

예수가 정말 문자 그대로 행하라고 말씀하셨을까?
나는 알거지가 되서 남(가난한자)를 돕고, 남들도 알거지가 되어서 가난해진 나를 돕고.... 킥! 킥! 이렇게 하는 거냐?
이런 넌센스가 어디있느냐?
이성이란 걸 들먹이지 않더라도 조금이나마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게 얼마나 웃기는 작태냐?

이런 해석이, 이런 설교가 2,0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대한민국 교회에서 뻔뻔히 선포된다는 것에 자괴감을 느낀다.

묻는다.
당신들의 해석대로 알거지가 되도록 남을 도운 사람이 한사람이라도 있는가?
특히, 목사들 중에 그런 인간이 있는 가?
있다면 그는 병신중에 상병신이지만 실제 있다면 지금이라도 내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줄 용의있다.

정말, 류목사말마따나, 이 본문을 가지고 교회재산 증식하거나, 목사 치부의 수단으로 사기좀 그만치고, 성도들은 아무 비판없이 '아멘!', '할렐루야!나 외치며 주머니 털리는 바보짓 그만하기 바란다.


나는 이렇게 들었다.

그대 재산이 얼마나 많은지, 얼마나 부자인지를 차치하고...
그대가 남을 위해 내 놓을 수 있는 양(量)이 그게 그대의 <전부>다.

예를들어,
그대가 오늘, 은행에서 새돈으로 백만원을 찾아 지갑에 넣고 나오는데,
은행문 앞에있는 '걸인'을 보고 안 된 마음이들어 - 이것만이라도
대단한 측은지심의 발로이다. 그냥 못본척 지나가는 사람이 부지기 수 이지 않은가? - 주머니를 뒤져 잔돈 1,000원을 건네주고 갔다고 치자.

이게(1,000원) 그대가 베풀수 있는 <전부> 아닌가?
그대가 얼마나 부자이던, 그대 호주머니에 얼마가 들어있던 그대가 건네준 1,000원이 그대가 베풀 수 있는 <전부>다.

이 <전부>라는 것은 정해져있는 것이 아니다.
그대가 이웃을 정말 내형제처럼 생각할 수록 변할 수 있는 <전부>다.

그것.. 그 <전부>라는 것을 가난한 사람에게 줘봐라.
그때 네 마음이 어떤지.....

네가 이웃, 특히 가난한 이웃을 측은히 생각하고 베풀고 난 다음
네 마음을 한번 돌아봐라!
뭔가 뿌듯하지 않느냐? 뭔가 사는 것같은 삶이 아닌가?

그동안 너는 재산증식을 위해 얼마나 많이 탐욕스럽게 살아왔느냐?
얼마나 오랜세월을 모으고 쌓고 축적하는 삶을 살아왔느냐?

그동안 네가 잊고있던, 외면해왔던 '나눔의 삶', '베품의 삶'을 맛보니 어떻더냐?
거기에 천국이 있다, 거기에 영생의 삶이 있다.

그 맛을 맛본 다음... 나를 따르라!


나의 가르침은 '행위'(doing)에 있지않다.
나의 가르침은 그대가 그런 사람이 되는 인간'됨'(being)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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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평일 (72.196.234.24)
2013-04-15 20:24:40
저도 그리 이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인 진리안에서 자유도
그런 의미가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성경의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
율법으로 받아들에게 되면
인간들이 율법의 노예가 되어버리지요.

그리고 자유인이 아니라
죄인, 위선자 중 하나가 됩니다.

가까운 예로 십일조가 그 좋은 예입니다.
이름만 십일조일 뿐, 실제로 과연 어느 누가
십일조를 정확히 계산해서 내고 있습니까?
직업에 따라서 전문회계사들에게
맡겨야 할 만큼 계산이 복잡하지요.

또, 수입에 대한 정의가 국가나, 지방정부에
따라서 다르기도 하고.
미국에서는 직업적으로 50불 이상 값어치의
선물을 받게 되면 수입으로 보고를 해서
세금을 내야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목사님들이 개인적으로 받는 접대를 그리
계산해서 십일조를 내고 있습니까?

그렇지 못하다면 하나님과 자신을 속이는
결과가 되지요.
헌금은 일률적 율법의 적용이 아니라
개인적인 믿음의 정도에 맡겨두어야지요.

그리고 부자들이 천국에 가기가 그렇게
어렵다면서 왜들 물질적인 축복을 그리 강조하고
있습니까?
북한같은 비기독교국 가난한 백성들이나
갈 수 있는 곳이 천국은 아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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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심 (61.73.84.27)
2013-04-20 18:49:46
?
부자는이루기위해선 율법안에 자유롭지 못할뿐이지못가는게아닌듯
재물이란 우상에 빠지기 쉽겠조 내것을 내려놓음으로 천국과세상과 소통할수있을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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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주 (220.79.149.230)
2013-04-15 09:51:21
좋은 의견 잘 봤습니다..
만..말씀하신것 처럼 의견이고 동의까지는 아니네요^^
기존 보수적인 해석을 옳다고 믿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입니다.
해석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은 이런것이다...라고 단정짓기는 참 조심스럽다는 걸 알기 때문이죠.

글쓰신 님 또한 조심스럽게 이런 의견을 비추신것으로 생각되지만, 인터넷기사라는 매체 자체가 글을 조금 과격하게 만드는 듯 싶습니다.^^
물론 글쓴님의 의견이 정말 사실일 수도 있겠죠.
예수님 당시 시대상이 이랬고 저랬고, 예수님은 다른 본문에서는 어떤 분이고 그러므로 이 본문은 이렇게 봐야하고 나는 부담 느낄 필요가 없다....라는 식이라면 일종의 타협으로 보여질 수도 있습니다..

성서를 읽다보면 비슷한 부분들이 종종 있죠..
도대체 빠져나가려고 해도 빠질 틈이 없고 여지없이 마주쳐야 함을 깨달을 때 참으로 난감합니다.
이럴 때에.. 저도 그저 저의 의견을 적어보자면..
"그저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이지 싶습니다.
이건 조금 다릅니다.

부담스러운 말씀이 주어졌을때..예를 들어서 십일조가 있겠죠.
저는 십일조가 현시대 신앙인의 의무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맘 편하게 "십일조는 안해도 되"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십일조의 의미, 즉 분깃이 없는 레위지파를 위한 기부의 의미에서 현시대에도 필요한 부분이 있다고 봅니다. (물론 일반적인 중대형 교회 목사를 지칭한다기 보다는 선교사, 미자립교회 등을 말씀 드리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을 도우라는 말씀도
"이건 그런 뜻이 아니니 부담 느끼지 않아도 되" 보다는..
"내가 전 재산을 팔 수는 없지만,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야 하지 않겠나" 정도의 부담감은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게 제 의견입니다.
조금 다르죠..

글쓰신 님도 그런 뜻은 아닌걸로 압니다. 가난한 자들 도우며 사시겠죠..^^
다만 쓰신 글 자체가 풍겨오는 뉘앙스가 조금 과격해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것 같아 이런 글을 써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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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빛 (24.141.4.52)
2013-04-14 17:05:33
구원은 오직 하나님만이...
낙타와 바늘귀에 대한 다른 재미있는 설명들이 있습니다.

하나는 '바늘귀'를 예루살렘성으로 들어가는 '좁은문'으로 보는 해석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밤이 되어 예루살렘의 성문이 닫히게 되면 모두들 사람하나 간신히 지나갈 만한 비좁은 좁은문(바늘귀)을 통하여 출입하였다고 합니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는 말은 '예루살렘성의 그 좁은문을 통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것 처럼 힘들다' 라는 뜻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기독교 교부중에 하나였던 싸이릴의 해석과 주장을 따른 해석입니다. 낙타를 밧줄로 보는 것입니다. 그리스어 성경원문에는 원래는 Kamilos (Rope-밧줄) 이었는데 Kamelos (Camel-낙타)로 잘못 번역되었다는 주장입니다. 번역오류로 인해 그 이후의 모든 성경구절이 밧줄 대신 낙타로 잘못쓰여 졌다는 말입니다. 밧줄과 같이 굵은 줄이 바늘귀로 들어가기 힘든것 처럼 부자가 하늘나라에 가는 일은 '어렵다'라는 해석입니다.


참 재미있는 해석들이고 일리는 있어 보이나, 나는 동의하고 싶지 않습니다.
우선 그러한 주장을 뒷받침해 줄 확실한 증거가 없고요, '좁은문' 이나 '밧줄' 이나 지금의 성경에 있는 '바늘귀' 와 '낙타' 보다 오히려 그 신빙성이 많이 떨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인도에 가면 이런 말이 있다 합니다 - '코끼리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과 같다.'
불가능한 일을 말할때 쓰는 말이겠지요.
인도에서 코끼리가 가장 큰 동물인것 처럼, 예수당시 유대땅에 낙타가 가장 큰 짐승이었음으로, 예수님은 불가능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낙타를 비유로 끌고오신 것으로 보아야 맞을 겁니다. 그리고 낙타와 반대로 가장 작은 구멍으로써 바늘귀를 비유로 역시 끌고오신 것이구요.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을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어렵다' 가 아니라 사실 '불가능하다' 라고 보는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질문이 하나 남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갈 가능성이란 없다 라고 하신 이유가 과연 무었이었을까요?

당시 (지금도 마찬가지 이겠지만요) 유대인들은 부자는 하나님의 허락과 축복을 받아서 부자가 되었다고 믿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부자를 부러워 하였습니다. 부자의 재산과 돈을 부러워 하기도 했겠지만 부자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다는 것을 더 부러워 하였을 겄입니다. 그렇다면 부자는 스스로 어떠했을까요? 그도 역시 같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는 하나님이 축복을 허락해 주셔서 부자가 되었다고 믿고 있었겠지요. 은근히 속으로 우쭐대기도 하고 남을 내려 보기도 했을것 이고요.

예수님은 이러한 부자의 안일한 생각에 낙타와 바늘귀의 비유로써 일침을 가하지 않으셨나 합니다.
그가 부자로서 아니 하나님의 축복을 듬뿍 받은 자라는 생각에서 부터 도래하는 누림의 편안함, 안도감, 여유, 우월감 등의 것들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있는자 에게는 애통해 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부자청년에게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말도 자신이 가진 우월심 자신감 등을 버리고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해 하며 사는 자의 가난한 마음을 가지라는 말씀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다음의 '이는 오직 하나님만이 할 수 있다' 는 말씀도 부자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것은 오직 하나님 뿐이라는 말로 쉽게 풀이되어 집니다.



결론입니다.

예수님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갈 확률은 0% 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오만한 마음을 버리고 가난한 자들의 애통하는 마음을 소유하는 길 밖에 없다는 말이겠지요.

그리고 오로지 하나님만이 그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말라자면, 구원은 아무도 스스로 이룰수 없는 일이라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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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 (98.216.169.112)
2013-05-03 01:3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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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평일 (72.196.234.24)
2013-04-14 22:55:08
선생님 해석에 공감합니다.

저도 낙타와 바늘귀 성경구절을 두고
많은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 의미가 마음 속에 어슴프레 심증은 가나,
솔직히 읽을 때마다 마음이 불편해서
가급적 피해갑니다.

그러다가 가끔 나보다 돈이 많은 사람들이나
성직자들을 비판하기 위한 비장의 무기로
사용할 때가 있습니다. 교회에서는 헌금용으로
사용할 테고...

저는 예수님을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이야기 꾼으로 봅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60 여개의 우화들은
언제 읽어도 쉽고 재미있습니다.

그 이유는
극과극의 은유를 통해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시는 예수님만의 독특한 화술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면에서는 주인공을 천사와 악마로 대칭해서
스토리를 극과 극으로 전개해 나가는
한국의 인기드라마와 비슷하지요.

그 당시 제자들이나 청중들의 지적수준, 의식수준을
고려한 예수님의 사려깊고 섬세한 사랑의 발로였겠지요.

그러니 그런 성경구절들을 이해하려면
시,전설, 동화를 읽듯이 상상력을 동원해야 겠지요.

자본주의사회에서는 모든 길은
돈으로 통합니다. 모든 교회문제들도
따지고 보면 결국 돈과 연결되어 있지요.

저는 성직자들이나 신도들이 돈문제에 대해서
보다 솔직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돈이 지배하고 있는 현실을
부인하지 말고 그대로 인정해야지요.

그리고 난 후, 자신부터
" 네가 부자가 되면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 하는 것 보다 천국행이 어렵다.
그러나 내가 부자가 되면 예외다" 하는 신앙적
위선에서 벗어나야 하겠지요.


그리고 나서 서로 줄 것은 주고 받을 것은
받아내야지요.

상대적으로 돈이 많은 사람들은
더 베풀고,
돈이 상대적으로 적은 사람들이라도
부족한 중에 이웃과 조금이라도 나누고....

주의 종이라 돈을 모른다거나
또 돈을 모르고 일방적으로 희생해야 하는 것이
주의 종이다 하는 위선적 망상에서도
서로 벗어나야지요.

그리고 월급이 많은 목사들의 월급은 깍고,
가난한 목사들의 월급은 올려주어야지요.

병적 믿음의 기준에서가 아니라
상식적인 순리에 따라서.

나는 믿음으로
배에서 뛰어내려 태평양 물위를 걸으려거나,
비행기에서 뛰어내려 구름을 타고 나를 생각은
감히 엄두 못내면서

남들에게는 의심치 말고 그리 시도해 보라고
요구할 수는 없는 일이지요.

상식으로 돌아가는 신앙이
하느님 앞에 솔직한 신앙입니다.

그런면에서
"저 역시 본문의 젊은이처럼 예수님 따르기를 포기하고 싶습니다." 는
말씀은 솔직한 신앙고백입니다.

천국에 쉽게 갈 수 있는 부의 커트라인이 얼마나 되느냐
하는 것도 문제가 되겠지요.
부는 절대적인 개념이 아니라
상대적인 개념이기 때문이지요.

잘못 했다가는 기독교를 믿지 않는 나라들의
가난한 사람들이나 거지들에게 천국을 송두리 채
빼앗길 수도 있겠지요.

아니면 천국이 텅텅 비어 가던지.
걱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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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0
참빛 (24.141.4.52)
2013-04-15 01:16:47
정확히 보셨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예수님은 인류역사상 가장 훌륭하신 이야기꾼 (story teller) 이셨습니다. ^^
정말 요즈음 드라마도 극적인 반전없이는 밋밋해서 시청자 인기를 끌수 없듯이 예수님께서도 극적인 정반의 대립을 이용하여 극적인 표현을 즐겨 쓰셨습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를 액면 그대로 받으면 큰 일이 날 수도 있겠지만, 지혜롭게 해석한다면 빛나는 금이되고 생명을 살리는 묘약이 되겠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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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0
공부 (211.229.247.2)
2013-04-14 15:03:36
당신은
그러면 당신은 얼마나 나누고 살아오셨습니까 방향제시가 잘못 되었습니다."정 그렇다면 목사직 내려놓고 나도 가난하게 살련다"가 맞습니다..글로는 대한민국 목사님들 전부 성자의 수준들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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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
맑음 (121.152.154.171)
2013-04-14 09:32:22
이것이 정말 복음입니까?
이것이 정말 복음입니까? 강연과 다를바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를 인간적인 나약함정도의 표현으로 바라보는 것이 성경의 견해입니까? 스데반의 죽음보다 못한 죽음입니까? 주님의 그 괴로움의 기도는 우리 인간이 받아야할 하나님의 진노가 무엇인지 알고 계셨기 때문이 아닌가요? 그것이 인간의 영적 실존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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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7
익명 (174.114.60.109)
2013-04-13 23:42:50
신앙의 물타기를 하지 마십시요.
본인에 의해 삭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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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1
박평일 (72.196.234.24)
2013-04-14 01:46:53
제가 감당할 수 있는 예수님은 여기까지입니다. 만일 그게 아니라, 정말로 재산을 모두 처분하고 빈털터리가 되어야만 나를 따를 수 있는 것이라고, 본문에 기록된 그대로 확실하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면, 저 역시 본문의 젊은이처럼 예수님 따르기를 포기하고 싶습니다.

이 본문문장을 읽지 않으시고
넘긴 오해에서 비롯된 비판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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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0
포이멘 (183.109.98.59)
2013-04-13 16:19:14
예수님은 완전한 사람으로 오셨지만 하나님의 아들, 즉 신(God) 입니다.
불교는 수행을 통해서 득도를 함으로 윤회의 고리를 깨뜨려야만 신이되겠지만,

기독교은 예수님을 영접하면 신이 됩니다. 즉 성도(saint)가 됩니다.
교회(에클레시아)는 이러한 성도들의 모임인데.
감히 목사들이 성직자라는 계급으로 나타나서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니골라당의 예언을 실현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자 교인은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당연히 부자 목사도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신 이후,
313년에 만들어진 부와 권력에 결탁한 천주교에게 핍박을 받았으면서
지금까지 기독교인들은 가난하게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앞으로도 기독교인들은 가난하게 살아갈 것입니다.

번영을 부르짖는 거짓목자에게 속지마시기 바랍니다.
그렇다고 인간에 의한 지상천국을 부르짖는 거짓목자에게도 속지마시기 바랍니다.

성도들은 전쟁을 하지 않습니다.
그냥 목숨을 내 놓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품으로 용서합니다.

이러한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을 전하지 않는 것은
진리를 덮는 오만한 이기주의입니다.

삶과 생활을 통해서
진리이신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을 전하는 사역에
이제는 성도(saint)들이 나서야 합니다.

요한복음 10장

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31.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32.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로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
33.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로 말미암아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신성모독으로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율법에 기록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35.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36.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신성모독이라 하느냐
37.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하지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38.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시니
39. 그들이 다시 예수를 잡고자 하였으나 그 손에서 벗어나 나가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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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 (112.184.172.236)
2013-04-13 14:2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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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상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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