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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사느냐고 물으신다면한국 교회 교우님들께 드리는 류상태의 주일편지 - 2013년 4월 7일
류상태  |  sham5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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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3년 04월 06일 (토) 09:11:53
최종편집 : 2013년 04월 06일 (토) 14:01:27 [조회수 : 2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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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한 주간 잘 지내셨는지요. 사순절과 부활절을 지내오면서 너무 무거운 주제로 편지를 드린 것 같아 교우님들께 죄송한 마음이 듭니다. 하여 오늘은 교리 문제는 잠시 덮어두고 우리 삶의 문제로 돌아와,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 앞에 행복하게 잘 사는 것인지 생각을 나누고 싶습니다.


1. ‘~ 위하여’ 사는 삶에 대하여

누군가 교우님에게 왜 사느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어떻게 살 거냐고 물으면 쉽게 대답할 수 있겠지만 왜 사느냐고 물으면 얼른 대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한참 생각하다 먹기 위해 산다거나 그냥 태어났으니까 산다고 대답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요즘에는 죽지 못해 산다는 분들이 많더군요. 살기 싫은데, 살맛도 없고 사는 재미도 별로 없는데, 매인 게 많아서 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아내나 남편이 있고, 자식이 딸려 있으니 죽을 수도 없다는 것이지요.

제가 교직에 있을 때 <왜 사느냐고 물으면?>이라는 주제로 학생들에게 발표를 시킨 적이 있었습니다. 많은 학생들이 이 물음에 대해 ‘(무언가를) 하기 위해서…’ 라고 대답했습니다. “(좋은) 대학가기 위해서, 성공하기 위해서, 돈 벌기 위해서, (이런 저런 것을) 이루기 위해서…”라는 대답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학생들의 발표를 듣고 나서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대학가기 위해 산다는 학생은 대학가면 죽어야 되겠네요. 대학가기 위해 사는 거라면, 대학에 갔으니 더 이상 살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성공하기 위해 산다는 학생은 좀 더 오래 살 수 있겠군요. 인생의 성공이라는 건 대학가는 것 보다는 좀 더 시간이 걸릴 테니까. 그러나 이 학생 역시 자기가 바라는 성공을 이루면 죽어야 하는 건 마찬가지겠네요.”

왜 사느냐는 물음에 대해서 ‘(무언가를) 하기 위해서…’라는 대답을 하게 되면 우리 인생은 그 무언가를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많은 교우님들, 특히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시는 독실한 교우님일수록 곡해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이유는 가치 있는 무언가를 이루게 하기 위해서다.”라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예수님의 가르침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의 목숨을 무엇과 바꾸겠느냐?”하고 물으셨습니다. 우리의 삶 자체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이 소중하다는 뜻인데,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해서 일어나는 비극이 우리 주위에는 너무나 많습니다.


2. 우리 인생은 무언가를 이루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며칠 전, 신문을 통해 안타까운 소식을 접했습니다. “중학교 성적이 석차 상위 2% 안에 들어야 입학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진 경북지역 자율형사립고에서 전교 1등도 했던 고교생이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입니다. (한겨레신문, 2013.03.28.)

위의 기사를 보도한 신문은 4월 2일자 기사에서 “서울에서 일반 고등학교를 다니다 그만두는 학업중단 학생이 강남·서초·송파 등 강남 3구에 집중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 3구의 학업중단 학생은 계속 늘고 있어 대책 마련이 요구된다.”는 내용의 기사도 내보냈습니다. 이 기사의 일부를 조금 더 소개하겠습니다.

“1일 입시업체 하늘교육이 2009~2011년 3년간 서울시내 일반 고교 학업중단자를 분석한 결과, 전체 학생 가운데 학업중단 학생이 차지하는 학업중단율은 강남구가 2.4%(1408명)로 1위를 기록했다. 서초구는 학업중단율이 2.3%(825명)로 2위였고, 송파구는 1.9%(1183명)로 공동 5위였다.”

앞길이 창창한 젊은이들이 공부와 성적에 대한 중압감을 견디지 못하여 학업을 중단하거나 스스로 생을 접는 안타까운 일들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무언가 이루어내지 않으면 우리 삶에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우리 사회의 업적주의가 낳은 결과가 아닐까요?

제가 교직생활을 시작한 첫 해, 고입연합고사 성적 발표를 며칠 앞두고 목숨을 끊은 학생이 있었습니다. 벽제화장터에서 한 줌 재가 되어 나오는 기막힌 모습을 보며 대답할 수 없는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공부 때문에 네가 산 거냐? 네 인생을 위해 공부를 한 거냐?” 아이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선생님들이, 부모님들이, 어른들이, 세상을 그렇게 만들었잖아요.”

학생들이 친구의 생일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장난삼아 부르는 노래가 있습니다. “왜 태어났니? 왜 태어났니? 공부도 못하는 게 왜 태어났니? 왜 태어났니? 왜 태어났니? 얼굴도 못생긴 게 왜 태어났니?” 사람을 외모와 성적으로 평가하는 세태에 짓눌린 자신들의 슬픈 현실을 억지웃음으로 푸는 것 같아 가슴이 아팠습니다.

누군가 저에게 왜 사느냐고 묻는다면 “삶 자체의 가치 때문에 산다.”고 답하고 싶습니다. 제가 지금 여기서 하나님께서 주신 삶을 향유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소중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무언가를 이루어야만 제 삶이 의미 있어지는 것이 아니구요.

“(좋은) 대학가기 위해 산다.”는 대답이 진실이라면 원하는 성적이 나오지 않을 경우 살고 싶지 않은 게 당연합니다.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야 내 인생이 가치 있고 그렇지 못하면 별 볼일 없는 인생으로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학생에게는 입시 실패가 자살의 이유가 될 수 있겠지요.

학교공부가 재미있고 노력할수록 성적도 오르는 학생이라면 학업을 계속 하여 자신의 꿈도 이루고 사회에도 봉사하며 축복받는 삶을 살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누구나 노력한다고 다 성적이 무한히 오르는 건 아닙니다. 한 학급에 30명의 학생이 있을 경우, 모두가 열심히 공부해도 성적으로 산출하면 일등 하는 학생과 30등 하는 학생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노력을 해도 한계가 있고, 분명히 재능과 관심은 다른 분야에 있는데, 이놈의 사회가 오로지 성적과 학벌로 사람을 평가하기에 어쩔 수 없이 공부를 하지만 성적은 오르지 않고 괴롭기만 하다면, 대학으로부터, 또한 성적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도록 아이들을 놓아주는 건 어떨까요?

이스라엘의 지혜서 탈무드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능력을 비교하면 다 죽고 개성을 비교하면 다 산다.” 대학도, 돈도, 명예도, 결국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한 수단의 하나일 뿐인데, 어쩌다 이렇게 우리 모두 수단과 목적이 뒤바뀐 사회에서 고통을 받게 되었을까요?

성적 때문에 고민하며 학업에 대한 부담으로 힘들어하는 자녀를 두신 부모님께 부탁드립니다. 사랑하는 아들딸의 손을 잡고 “엄마 아빠에게 중요한 건 성적이 아니라 너 자신”이라고, “네가 엄마의 아들로, 아빠의 딸로 이렇게 커가는 것 자체로 엄마 아빠는 기쁘고 행복하다.”고 웃으며 말씀해 주십사 부탁드리고 싶은데, 그렇게 해주실 수 있겠는지요?


3. ‘내 모습 이대로’ 소중하게 받아들이기

현대인은 아이나 어른이나 할 것 없이 많이들 지쳐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교우님들 중에 “나는 이룬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다. 그래서 허무하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혹 계신지요? 그렇다면 한 가지만 더 생각해 보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인생을 책임감 없이 막 살아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게 살기 위해 노력해왔으나 우리 사회가 교우님의 정직하고 성실한 삶을 받아내지 못해서 그런 것인지...

게으르고 나태하게 살아왔기에 아무 것도 이룬 것이 없다면 더 이상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건 개인의 책임이고 당사자가 부끄러워해야 할 문제이니까요.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정직하게 열심히 살았는데도 불구하고, 때로는 오히려 그렇게 살았기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는 개인의 책임이 아니라 사회의 책임이며, 국가의 도덕성과 경영능력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룬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고, 자식들에게 남겨줄 것도 없지만, 나는 하늘 아래 부끄러움 없이 살아왔다.”고 회상하실 수 있다면, 인생을 훌륭하게 잘 사신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도 그렇게 사셨고, 세속적인 기준에서 볼 때는 실패한 인생일 수 있겠지만, 우리 하나님께서 분명히 그 삶을 귀하게 여기실 것이므로 기뻐하고 즐거워하십시오.

혹 학력이나 재력 등 외부적인 조건으로 교우님을 평가하고 무시하는 사람이 있으면 호쾌하게 비웃어주십시오. 사람 자체의 소중함을 모르고 외적인 조건으로 평가하는 사람은 스스로 속물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인격 자체를 비난하거나 미워할 필요는 없지만 그 사람의 속물성, 즉 그 천박한 말과 행동거지에 대해서는 마음껏 비웃어주셔도 괜찮습니다.

늘 소외된 사람들의 친구로 사셨던 우리 예수님도, 사회적 약자로 살아가는 이웃들을 품어 안아야 할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이 오히려 외부적 조건으로 그들을 평가하고 무시하며 정죄하는 것을 보시고는 “독사의 자식”이라고, 또한 “겉은 번지르르 하지만 그 속은 회칠한 무덤과 같다.”고 수많은 제자들 앞에서 그들을 호쾌하게 비웃어주셨습니다.

‘타타타’라는 제목의 노래에 이런 가사가 나옵니다. “산다는 건 좋은 거지. 수지맞는 장사잖소. 알몸으로 태어나서 옷 한 벌은 건졌잖소.” 타타타라는 말은 산스크리트어로 ‘본래 그러한 것’이라는 뜻인데, 한자로는 여여(如如, 같을 여)라고 표기합니다. 인생이란 본래 그런 것이니 순리를 거스르지 말고 살라는 뜻입니다.

우리 인생은 무언가를 이루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삶 자체가 소중하기에, 그 귀한 삶을 향유하라고 우리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지금까지 사시면서 무엇을 이루셨건, 또한 얼마나 가지셨건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주신 삶 자체로 우리는 모두 귀합니다. 소중한 삶을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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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cky (76.23.169.116)
2013-04-07 13:28:02
류 목사님 그동안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건필하시고 건강하세요.

그런데 갈수록 당당도 기사나 댓글이나 점점 뉴앤조를 닮아 가네요.

저도 이제 그만 들락거릴랍니다.

아무리 봐도 한국의 개신교는 무너지는 수밖에 달리 뽀족한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종교란게 원래 부패하기 시작하면 개혁이나 회생이 불가능한 것이 거든요.

가르칠 중생들이 많아서 그 일이나 열심히 하렵니다.


예수의 정신을 살리시는 삶이 앞으로 계속되시기를 바랍니다.
리플달기
5 4
박평일 (72.196.234.24)
2013-04-07 20:46:51
케토릭 도미니코 회원들 위한 문헌 중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대화는 서로 다른 세계에 공존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 .

저도 이에 동감합니다.
일부 글이나 댓들에 실망하시지 마시고
계속 좋은 댓글들을 당당뉴스에 올리십시요.
부탁입니다.

저는 당당뉴스르 통해서 평소 주위에서
접할 수 없는 선생님의 글과 같은 좋은 글들을
읽으며 많이 기뻐하고 행복해 합니다,

어제 어떤 테레비 방송 프로그렘을 시청한
처가 저에게 이런 내용을 전하더군요.

한 기자가 유태인 학생들에게
"왜 교육을 받느냐?" 하는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자 학생들이
"서로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 교육을 받는다" 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

공감이 가는 말입니다.
삶이란 관계이고,
그 관계는 대화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가끔 댓글들은 읽으면서 실망할 때가 있습니다.
한국신학교나 교회에서는 대화에 대한 교육은
전혀 시키지 않고 있구나 하고.

댓글들이 대화가 아니라 모두 일방통행일
경우가 많거든요.
나는 하나님편인 빛에 속하고
너는 사탄편인 어둠에 속한다는 식의...
예수님 자신도 잘 모른다고 고백한 하늘에서의
옳고 그름, 크고 작음을 그렇게 쉽게 단죄하고
판단할 수 있는지.. . 궁금합니다.
무슨 기준으로
"불쌍하다" 는 말까지 서슴치 않고 사용하면서.

저는 평소에 맹신교도들과는 종교나 철학에 대한
대화를 가급적 나누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는 그 분들은 서로 다른 세계나 의견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둘째는 대화의 내용이 실제의 삶과는 전혀 무관한 사변적, 관념적일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셋째는 서로 의견이 다르면 미워하고 증오하는
원수로 취급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입니다.

가끔 사업차 저의 집을 방문하시는
장로, 안수 집사님들이 있습니다.

그 때마다 커피를 마시면서
잠시 그분들의 신앙이야기를 듣곤 합니다.

그분들의 대화는 주로
"하나님을 믿느냐? " "구원의 확신이
있느냐?" 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제가 국민학교 때 들은 수준 정도의
성경지식을 가지고 나를 일방적으로 교육시키려 듭니다.
내 반응이 별로 신통치 않으면
"불쌍하다. 안탑갑다" 로 대화를 끝내시면서
나의 구원을 위해서 계속 기도하겠다는
약속을 남겨두고 떠납니다.

그분들이 인간적으로 주위 지인들로부터 그리 좋은
평을 들는 분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소문을 통해서
나중에 듣기도 합니다.

금년 년초에 교회에 열심인 한 지인의 초청으로
몇 가정과 어울려 떡국을 함께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그 중 한 분이 대화중에 구원의 확신의 중요성,
해외전도의 필요성을 계속 강조하시더군요.
그분의 말을 듣고 있던 부인과 함께한 분들의 얼굴표정이
왠지 불편해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 분이 자리를 떠나고 나서 남아있는
몇 분들이 그 분은 가정생활에도 문제가 많고
주위에서 인간적으로 그리 좋은 평을 받고 있는 분이
아니라고 소근거리더군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의 평화기도는
"주님, 저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십시요" 로
시작됩니다.
전도나 대화의 목적도 바로 평화가 아닐지요?

세상을 빛과 어둠으로 나누어,
그 것도 자기자신만 진짜 빛에 속한 사람이라고 믿고 있는 분들......

하나님과 예수님도 성경으로 교육시키려 드는 분들...

참으로 재미있는 분들이라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리플달기
4 3
ooo (71.234.154.98)
2013-06-06 09:28:27
보다 보니
읽을만 하네요
리플달기
0 0
자재 (223.207.61.89)
2013-04-21 18:05:58
좋은 글
목사님.. 가끔 글을 대하는데 마음에 와닿아 참 좋습니다.. ^^
리플달기
0 0
이사야 (121.129.19.190)
2013-04-07 18:51:12
정직한 신앙 행복은 만드는신앙
오늘은 제가 교회에서 하늘뜻 나눔을 했습니다

집에 돌아와 목사님 글을 대하니....참 행복합니다

평화가 함께하소서
리플달기
4 1
감사하기 (61.72.191.153)
2013-04-07 13:49:14
가슴에 와닿네요
류상태 목사님의 글에 공감합니다.
늘 좋은 글 감사합니다. 글을 읽을 때마다 생각의 폭이 넓어 지는 것 같고 마음도 한결 여유로와 지고 사람을 더 넓게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얻는 느낌입니다.
리플달기
6 8
Picky (76.23.169.116)
2013-04-07 13:28:02
류 목사님 그동안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건필하시고 건강하세요.

그런데 갈수록 당당도 기사나 댓글이나 점점 뉴앤조를 닮아 가네요.

저도 이제 그만 들락거릴랍니다.

아무리 봐도 한국의 개신교는 무너지는 수밖에 달리 뽀족한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종교란게 원래 부패하기 시작하면 개혁이나 회생이 불가능한 것이 거든요.

가르칠 중생들이 많아서 그 일이나 열심히 하렵니다.


예수의 정신을 살리시는 삶이 앞으로 계속되시기를 바랍니다.
리플달기
5 4
박평일 (72.196.234.24)
2013-04-07 20:46:51
케토릭 도미니코 회원들 위한 문헌 중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대화는 서로 다른 세계에 공존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 .

저도 이에 동감합니다.
일부 글이나 댓들에 실망하시지 마시고
계속 좋은 댓글들을 당당뉴스에 올리십시요.
부탁입니다.

저는 당당뉴스르 통해서 평소 주위에서
접할 수 없는 선생님의 글과 같은 좋은 글들을
읽으며 많이 기뻐하고 행복해 합니다,

어제 어떤 테레비 방송 프로그렘을 시청한
처가 저에게 이런 내용을 전하더군요.

한 기자가 유태인 학생들에게
"왜 교육을 받느냐?" 하는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자 학생들이
"서로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 교육을 받는다" 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

공감이 가는 말입니다.
삶이란 관계이고,
그 관계는 대화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가끔 댓글들은 읽으면서 실망할 때가 있습니다.
한국신학교나 교회에서는 대화에 대한 교육은
전혀 시키지 않고 있구나 하고.

댓글들이 대화가 아니라 모두 일방통행일
경우가 많거든요.
나는 하나님편인 빛에 속하고
너는 사탄편인 어둠에 속한다는 식의...
예수님 자신도 잘 모른다고 고백한 하늘에서의
옳고 그름, 크고 작음을 그렇게 쉽게 단죄하고
판단할 수 있는지.. . 궁금합니다.
무슨 기준으로
"불쌍하다" 는 말까지 서슴치 않고 사용하면서.

저는 평소에 맹신교도들과는 종교나 철학에 대한
대화를 가급적 나누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는 그 분들은 서로 다른 세계나 의견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둘째는 대화의 내용이 실제의 삶과는 전혀 무관한 사변적, 관념적일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셋째는 서로 의견이 다르면 미워하고 증오하는
원수로 취급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입니다.

가끔 사업차 저의 집을 방문하시는
장로, 안수 집사님들이 있습니다.

그 때마다 커피를 마시면서
잠시 그분들의 신앙이야기를 듣곤 합니다.

그분들의 대화는 주로
"하나님을 믿느냐? " "구원의 확신이
있느냐?" 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제가 국민학교 때 들은 수준 정도의
성경지식을 가지고 나를 일방적으로 교육시키려 듭니다.
내 반응이 별로 신통치 않으면
"불쌍하다. 안탑갑다" 로 대화를 끝내시면서
나의 구원을 위해서 계속 기도하겠다는
약속을 남겨두고 떠납니다.

그분들이 인간적으로 주위 지인들로부터 그리 좋은
평을 들는 분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소문을 통해서
나중에 듣기도 합니다.

금년 년초에 교회에 열심인 한 지인의 초청으로
몇 가정과 어울려 떡국을 함께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그 중 한 분이 대화중에 구원의 확신의 중요성,
해외전도의 필요성을 계속 강조하시더군요.
그분의 말을 듣고 있던 부인과 함께한 분들의 얼굴표정이
왠지 불편해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 분이 자리를 떠나고 나서 남아있는
몇 분들이 그 분은 가정생활에도 문제가 많고
주위에서 인간적으로 그리 좋은 평을 받고 있는 분이
아니라고 소근거리더군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의 평화기도는
"주님, 저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십시요" 로
시작됩니다.
전도나 대화의 목적도 바로 평화가 아닐지요?

세상을 빛과 어둠으로 나누어,
그 것도 자기자신만 진짜 빛에 속한 사람이라고 믿고 있는 분들......

하나님과 예수님도 성경으로 교육시키려 드는 분들...

참으로 재미있는 분들이라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리플달기
4 3
Philip Im (70.62.49.64)
2013-04-07 07:12:03
교리 이야기만 무거운 주제가 아닙니다.
인생 이야기는 얼마나 무거운지요?

동물처럼 살아갈 삶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삶이기 때문입니다.

주어진 삶에 충실히 살아가는 모습은
사람보다도 동물들에게서 더 잘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 동물들의 삶보다도 사람의 삶이 더 값진 것은
무언가를 추구하면서 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삶이 값진 것은 무언가를 추구하면서 살라고
하나님께서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추구하는 것이 헛된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마16:26)
고 말씀하셨습니다.

육적인 차원에서 볼 때
가령 용병들이 수백억을 받는다 하더라도 오늘 전장터에서 죽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우리가
(세상에 집착하기 때문에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하여)
세상살이에서도 죽음 때문에 목숨을 내놓지 않는데
하물며 영생을 위하여 세상의 하찮은 것에 목숨 걸지 말라는 것입니다.

귀한 삶이기 때문에 자존감을 갖고 사는 것이 아니라
귀한 삶을 세상 것이 아닌
하나님 기뻐하시는 일을 위하여 살 때에
비로소 귀한 삶이 되는 것입니다.

잠시 하나님을 떠나서 생각해보더라도
남을 위하여 희생했다는 소식은
우리의 가슴을 뭉클하게 합니다.
그 삶을 우리는 귀하게 평가합니다.

그러나 오직 자신의 삶이 귀하다고
남에게 피해는 주지않더라도
도움까지도 인색하다면
그 삶을 귀하다고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귀한 까닭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삶이기 때문이며
그 삶을 가치있는 일에 사용할 때
귀한 삶이 겉으로 드러나며 온전하여 집니다.

귀한 삶이지만 가치없는 일에 사용한다면
천한 삶이 됩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주셨다 할지라도.

그러므로 우리의 귀한 삶이
진정으로 건강하고 행복한 삶이 되려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가치있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지금 행복한 삶을 누리고 계십니까?
리플달기
4 11
박평일 (72.196.234.24)
2013-04-06 23:03:52
자살문제의 심각성은 미국도 예외가 아닙니다.
자살율도 점점 높아 가고 있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너 죽고 나 죽자 식의
집단살인행위입니다.

얼마전에 나이가 75살 된
미국친구와 전화대화 중에 이런 말을 하더군요.

"오늘날 보다 직장이 구하기 힘들었고
경제적생활이 어려웠던 옛날에는
이처럼 자살문제로 미국사회가 시끄러운 적이 없었다."

미국의 경우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들 보다는'
부유한 사람들의 자살율이 훨씬 높은 걸로
알려져 있습니다.
자살의 원인이 경제적 생활고가 아니라
고독감, 소외감, 외로움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집단살인행위를 벌이는 사람들의 경우
가정파괴로 불우한 가정환경 속에서 자랐거나
현재 그런 가정적불행을 겪고 계시는 분들이 대부분입니다.

저는 직업상 하루에도 여러명의 미국인들과 만나
행복에 대한 대화를 나누곤 합니다.
.
그 때마다
"당신은 옛날보다 행복합니까" 하는
질문을 내가 건내곤 합니다.

미국백인들은 대부분
옛날에 비해 사회적 경제적면에서 현재의 생활이
상대적으로 월등하게 낫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그러면서도
"옛 어려운 시절보다 더 불행감을 느낀다" 고
고백하시는 분들이 99 % 입니다.

반면, 외국에서 이민 온 이민자들은

"경제적으로 미국에서 사는 것이 본국에서의 생활보다
훨씬 풍요롭다.
그러나 정신적인 면에서는 본국생활 보다
불행하다" 고 고백하시는 분들이 대부분입니다. .

그 이유야 많겠지요. 저는 개인적으로
그 주원인이 현대물질문명 자체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경제적풍요에 필요한
능률, 생산성, 편리함, 경쟁, 속도...를 위해서
행복에 필요한
여유, 사랑, 대화, 나눔, 이해심, 관용. 타협...
같이 소중한 것들을 지나칠 만치 희생시키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얼마전에 한국인들의 자살율이 세계에서 1위,
2위가 피란드, 3위가 일본이라는 기사를 읽고 놀랐습니다.
보다 놀라운 것은 한국인들의 자실율이 필란드나 일본보다
두배가까이 높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필란드나 일본은 국민들의 정직성, 청렴성, 사회질서
면에서 세계에서 1-2위를 다투는 나라들로 알려져 있습니다.
개인의 정직성이나 청렴성이 자살과 관계가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고기가 맑은 물 속에서는 살 수 없는 것 처럼말입니다.

그러나 한국사회는 그런면에서 세계 중하권에 속하는 걸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사회가 세계에서 일위를 내놓을 수 없는 것은
단연코 입시지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를 포함해서 한국인들은 모두 남과 비교하며 목숨을 걸고
경쟁하면서 살아 온 입지지옥 출신들입니다.
사둔네 팔촌이 아니아 형제가 논을 사도
배가 아파서 견디지 못하는 것이 한국인들의 입시지옥
문화이고 정서지요..

한국인들의 그런 병적인 입시지옥 경쟁문화를 심화시킨
가장 큰 원흉은 1960대 이 후 경제제일주의 가치관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한국인들이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한강의 기적이 낳은 부작용이고 중병이지요.

종교계, 정치계, 교육계, 문화계...가릴 것 없이
돈면에서는 예외가 있을 수 없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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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7
Ismail-x (36.38.199.252)
2013-04-06 20:10:01
빌립이와 창진이가 여기에서 또...
.


분탕질을 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랍니다.

주님의 은혜와 사랑이 두 개독님들에게 함께 하기를 기도합니다.

할렐루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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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2
박창진 (42.82.105.143)
2013-04-07 10:39:03
돌아 돌아 ~
난 류상태 목사님 팬이여.
난 강의석 군과 연관된 류상태 목사님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다만 성경관과 교리에 대한 시각이 다르고 그것에 대해 밝힌 것이지.
팬이라는 게 무조건 찬성하고 지지하여야만 하는 것은 아니거든.

난 다른 곳에서 류상태 목사님을 지지한다고 비난을 듣고 있기도 하단다.

이왕에 적은 글이니 한 자 더.
난 류상태 목사님과 개인적으로 만나서 이야기도 하였단다.
지금은 내가 부산에 내려왔기에 불가능하지만.

돌아 돌아.
제발 분별력 좀 가지고 살렴.
주님의 은혜안에서 돌아 돌아에게 그러한 능력이 갖추어지기를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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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상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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