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섭의 '이 사람을 보라'

2013-03-26(화)

이정섭의 비아돌로로사 십자가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는 고통의 길이란 라틴어로 예수님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의미한다. 빌라도의 법정부터 부활하신 빈 무덤까지 14곳의 지점을 지정하여 십자가의 길을 순례하도록 한 것이다. 예로부터 예루살렘 방문객들은 사형 선고를 받은 곳부터 성 밖 골고다에 이르는 800미터의 길을 따르며 십자가의 흔적을 묵상하였다.

성지를 순례하면 누구나 십자가의 길을 답사할 수 있다. 비좁은 아랍 시장을 통과하는 이 길은 손님을 부르는 기념품 가게 상인들과 난장에 벌려놓은 음식들 때문에 남대문 시장을 연상케 한다. 십자가의 의미를 더듬고, 슬픈 마음을 유지하는 것은 순례자 스스로가 책임질 몫이다. 장사 속으로 보이지만 20달러를 내면 1처소에서 9처소 성묘교회 입구까지 십자가를 짊어지고 걸을 수 있다.  

10처소부터 14처소는 성묘교회 내부에 있다. 성묘교회는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의 어머니 헬레나가 주후 335년에 세웠다. 12세기에 십자군은 성묘교회를 재건하였다. 성묘교회뿐 아니라 성지 곳곳에서 신의 자취를 확인하려는 시도는 무모하게 느껴졌다. 단지 수백만의 관광객들이 뒤섞여 혼란스럽다.

예수님의 무덤은 경건한 러시아인들이 대리석으로 치장하였다. 성묘교회 내부도 그리스정교회, 로마 가톨릭교회, 시리아교회 등 6개 교회가 분할하여 관리를 하고 있다. 서로 다른 방식의 예배의식을 보면 마치 종교전시장을 방불케 한다. 분명한 것은 무덤의 나무문에 쓰여있는 익숙한 성구였다.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마 28:6).  

▲ 파울 레딩의 판화. '함께 골고다로 나아가라'

비아 돌로로사는 오랜 전통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교회 정원이나 예배당 안뜰에 ‘고난의 길’을 설치해 두고 침묵 기도의 장소로 삼았다. 유명한 “보라 이 사람이로다”(요 19:5)는 빌라도가 법정에 선 예수 그리스를 가리켜 한 말이다. 이곳은 제2처소에 해당한다.  

▲ 왜관 베네딕토 수도원 대예배실에 있는 '비아 돌로로사'의 부분

작가 이정섭은 ‘비아 돌로로사’를 십자가 안에 재현하려는 시도를 한다. 그동안 조형물이나 회화작품으로 표현한 것은 많지만, 규모가 크고 동선이 길어 웬만한 공간에서 접하기는 어려움이 많았다. 이정섭은 한동안 상업미술을 그려왔다. 여러날 미친 듯이 초대형 캔버스를 향해 대담한 붓질을 하면 커다란 벽면 여러 개를 너끈히 채울 작품들이 나왔다. 그렇게 예술에 대한 갈증으로 목말랐다. 

이번에는 반대의 도전을 한다. 작은 십자가는 그동안 작업하던 화판에 비해 너무 작고, 좁았다. 그가 표현하려는 예수님의 수난은 예리하여 피부에 직접 느껴졌다. 그는 여러 달 단 한 점도 그리지 못하였다. 이정섭은 고통의 깊이에 집중하고, 너비를 확장할 방법을 고민하였다. 고난이란 주제의식을 14가지로 잘게 나누는 작업이다. 그 중 하나가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이다.

▲ 독일 멜랑히톤 교회의 정오의 교회 프로그램 중 하나인 '십자가의 길'

독일 복흠의 멜랑히톤교회는 예배당 전면에 ‘십자가의 길’(Kreuzwege)을 설치하였다. 로제마리 호제-블리스는 단 네 개의 유화작품으로 슬픔, 고난, 아픔 그리고 죽음을 강조하였다. 노랑, 푸름, 보라, 빨강의 배열은 상징색의 경향과 의미를 상기 시켜준다. 작가는 십자가와 가까운 지점부터 먼 지점으로 눈의 시야를 옮겨가며 바라보라고 주문한다. 십자가 순례자들은 푸름(불길한 전조), 보라(슬픔), 빨강(고난) 그리고 노랑(희망)의 순서로 눈동자를 옮겨다녀야 한다.

▲ 독일 바이에른 주 종교교육의 고민, '새로운 세대에게 십자가의 길을 어떻게 이해시킬수 있을까'

십자가의 길은 보는 눈에 따라 다양하다. 그 길을 걷는 사람들은 자기 방식으로 십자가를 재현한다. 저마다 부르심을 자신의 귀와 가슴으로 듣기 때문이다.

“이에 예수께서 가시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고 나오시니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이로다 하매”(요 1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