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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근심과 번민에 싸인 겟세마네의 예수님이 좋다한국 교회 교우님들께 드리는 류상태의 주일편지 - 2013년 3월 17일
류상태  |  sham5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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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3년 03월 16일 (토) 09:14:20
최종편집 : 2013년 03월 16일 (토) 12:35:35 [조회수 : 76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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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에 애타게 기도하셨던 ‘겟세마네 동산’으로 교우님들과 함께 찾아가 생각을 나누어 보고 싶습니다.

1. 십자가의 길을 피하고자 번민하시는 예수님

예루살렘 입구에 있는 겟세마네는 하나님과 대화하기 좋은 한적한 동산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 거기서 밤을 지새우며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이때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우셨는지 “근심과 번민에 싸여” 함께 간 제자들에게 “지금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라고 호소하시며 깨어 중보기도해줄 것을 당부하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은 땅에 엎드려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하시고자만 하시면 무엇이든 다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주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6:38~39, 공동번역). 어찌나 간절히 기도하셨는지 같은 사건을 기록한 누가복음에는 “땀이 핏방울같이 되어서 땅에 떨어졌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22:43~44, 표준새번역. 공동번역에는 이 부분이 본문에는 없고 관주로 설명되어 있음).

어쩌면 이런 겟세마네의 예수님께 실망하신 교우님도 계실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좀 더 의연한 모습을 보여주셨으면 좋았을 텐데.”라는 마음이 드실 수 있겠습니다. 죽음을 앞두고 초연한 모습을 보여준 위인들이 역사에는 수없이 많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사형을 앞두고 제자들이 피신하라고 간청했지만 악법도 법이라면서 의연하게 독배를 마셨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니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라며 십자가 고난을 피하고 싶어 하시는 예수님의 연약한 모습은 우리를 충분히 당혹스럽게 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렇게 연약하신 예수님이 참 좋습니다. 34년 전 어느 날, 대학 졸업반이었던 저는 목회자의 길을 가야할 것인지 심각하게 고민하며 기도했습니다. 여느 한국의 기독교인처럼 저 역시 보수적인 신앙공동체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기에 평생 복음을 전하며 사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삶은 없어보였습니다. 하지만 목사로서의 삶을 제가 감당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때 성경을 묵상하며 기도하던 중 겟세마네의 예수님을 새롭게 만났습니다. 너무나 친숙한 말씀이었지만 그때는 전율을 느낄 만큼 큰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절망감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시는 한없이 의기소침해지신 예수님, 그 예수님이 저에게 얼마나 큰 위로와 용기를 주셨는지요...

그렇게 겟세마네의 예수님을 새롭게 만나고 나서, 저는 비로소 목회자의 길을 갈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예수님도 이렇게 연약하실 때가 있었구나. 그렇다면 내가 약해지거나 지치고 쓰러져도, 절망감에 사로잡혀 투정을 부려도 크게 야단치시지는 않겠구나. 오히려 더 잘 이해하시고 도와주시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때 저에게 목회자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아주신 분은 물 위를 걷는 기적의 예수님이 아니라, 수천 명을 먹이고 병든 자를 일으켜 세우시는 위대한 예수님이 아니라, 심히 고민하며 기도하시는 겟세마네의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거기서 멈추지는 않으셨습니다. 날이 밝으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셔야 할 처절한 상황이었지만, 피하고 싶고 도망가고 싶지만, 심히 고통스럽고 겁도 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라고 의탁하시는 주님의 기도는, 진정 믿음의 기도가 무엇이며,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제 마음 깊이 새겨주었습니다.

교우님들도 살다보면 힘드실 때가 있겠습니다. 그 때 우리 예수님처럼 그렇게 기도해 보십시오. 우리 하나님께 투정도 부려보십시오. 제가 만난 하나님은, 유창한 기도보다, 담대한 믿음의 기도보다, 비장한 헌신의 기도보다,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드리는 기도를 좋아하는 분이십니다.


2.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는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일까요?

성경 66권(개신교에서 사용하는 성서의 경우이며 가톨릭은 외경이 포함되어 조금 더 많습니다) 가운데 원본이 일부라도 남아 있는 책은 하나도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한글 성서들은 고대 사본들을 서로 대조하여 최대한 원본에 가깝게 만든 히브리어(구약)와 헬라어(신약) 원문 성서를 다시 우리말로 번역한 것입니다.

그런데 고대 사본 중에는, “땀이 핏방울같이 되어서 땅에 떨어졌다.”는 누가복음 22장 43~44절의 기록이 없는 사본도 있습니다. 인쇄술이 발달하지 못한 그 시절에는 사람이 일일이 손으로 베껴서 복사본을 만들었는데, 복음서 기자들의 기록이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되거나 자신의 생각을 보충하고 싶어서 누군가 적어 놓은 것이 본문과 섞여 함께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이렇게 하나의 완전무결한 경전으로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사람의 손을 거쳐 기록되었을 뿐 아니라 보존된 원본이 하나도 없기에, 본문비평과 전승사비평 등 성서비평을 통해 최대한 원본에 접근하려는 신학적 연구 작업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앞선 누가복음의 기록을 다른 번역본들과 표준새번역은 본문에 포함시켰고 공동번역은 제외하는 등의 차이가 발생하는 것도 이런 신학적 해석과 선택의 결과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국 교회에서는 이런 열린 신학을 위험하게 여기는 분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정작 위험한 것은 성서비평이 아니라 성서에 기록되었다고 하여 그대로 흠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어버리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고자 하시는 분은 저의 1월 13일자 주일편지 <성경에는 신화와 전설, 역사가 함께 담겨 있다>와 1월 20일자 주일편지 <성경에 담긴 사람의 말과 하나님의 말씀>을 참조해 주십시오.)

그러므로 우리가 성서의 세계를 바르게 알고 올바른 신앙을 갖기 위해서는 신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기록된 글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찾아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작업이 결코 쉬운 것은 아니지만, 어쩌면 고통스러울 수도 있지만, 그래야 생동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 안에 가두는 오류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제 교우님들과 함께 만만치는 않지만 그 작업을 함께 해보고 싶습니다.

복음서에는 고뇌하고 번민하시는 겟세마네의 예수님과는 대조적으로 매우 엄격하고 확신으로 가득 차 있는 예수님도 등장합니다.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오셨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과 사흘 만에 부활하실 것을 암시하고 예언하시는 예수님은 겟세마네의 예수님과는 달라도 너무나 다릅니다. 다음은 그 중 한 구절입니다.

그 때에 비로소 예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받고 원로들과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버림을 받아 그들의 손에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시게 될 것임을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셨다.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명백하게 하셨던 것이다. 이 말씀을 듣고 베드로는 예수를 붙들고 그래서는 안 된다고 펄쩍 뛰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신 다음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시며 꾸짖으셨다. (마가복음 8:31~33, 공동번역.)

자신의 예언을 이해하지 못하는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고 거침없이 말씀하시는 예수님과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가 괴로워 죽을 지경”이라고 그토록 번민하고 괴로워하시며 제자들에게 (거기엔 베드로도 있었습니다) 중보기도를 부탁하시는 예수님을 교우님은 아무런 마음의 불편도 없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으신지요?

이 말씀 외에도 복음서에 나타나신 예수님은 한없이 자비로우신가 하면 지나칠 정도로 엄격하기도 하시며,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는 반면에 격하게 분노를 표출하기도 하셨고, 특히 당시 종교지도자들에 대해서는 입에 담기 어려운 폭언을 퍼붓기도 하셨습니다. 이런 다양한 예수님상은 복음서가 기록되기 전에 예수님에 대한 서로 다른 시각이 있었고 그런 대조되는 전승들이 복음서 기자들에게 함께 수집된 결과임을 반증합니다.

복음서 중에서 가장 빨리 기록된 마가복음의 기록연대는 서기 70년경입니다. 예수님 사후 40년이 지나서야 기록되었고 그 전에는 많은 단편적인 전승과 기록이 있었을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합니다. 다행스럽게도 복음서 기자들은 상이한 기록들을 억지로 꿰어 맞추려 하지 않았으며, 예수님에 대한 다양한 견해를 함께 복음서에 담았습니다.

복음서 기록자들이 그렇게 솔직하게 기록할 수 있었던 이유는 성서무오설이라는 후대의 교리부터 자유로웠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단지 예수님의 고귀한 삶과 가르침을 후세에 전할 의도가 있었을 뿐이며, 자신들의 기록이 나중에 성서라는 책으로 또한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 기록된 ‘거룩하고 흠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간주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복음서가 ‘예수님에 대한 여러 전승의 집합’임을 나타내는 사례의 하나로 예수님의 탄생설화에 담긴 족보를 비교 분석해보고 싶습니다. 탄생설화는 마가복음에는 없으며, 그보다 십여 년 늦게 기록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등장합니다. 하지만 두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족보는 다른 전승에 의존해 있기에 매우 다를 뿐 아니라 서로 아귀가 맞지 않아 어느 한 쪽이 틀리거나 양쪽 모두 틀리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다음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나타난 족보를 비교하여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표로 만든 것입니다. (이름은 개역성경의 표기를 따랐으며, 저의 책 <한국 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에서 가져왔습니다.)

   

 

마태복음의 족보는 아브라함부터 예수님의 아버지인 요셉까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고, 누가복음에서는 요셉에서 시작하여 아담까지, 그 위로는 하나님까지 거꾸로 올라가며 기록되어 있지만 양쪽의 차이는 이것만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에서 다윗까지의 계보는 두 복음서가 거의 일치하나 그 다음부터는 후손의 이름이 거의 일치하지 않습니다. 이름이 같은 사람이 몇 사람 등장하지만 세대가 다르고, 무엇보다 아담에서 요셉까지의 계보가 마태복음에서는 60대인데 누가복음에서는 75대까지 이어집니다. 혹자는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아버지인 요셉의 족보, 누가복음은 어머니인 마리아의 족보를 따른 것이기에 서로 다르다고 주장하지만 그런 암시는 복음서 어디에도 없습니다.



3. 십자가의 의미는 ‘교리적 대속’이 아니라 ‘불의에 굴복하지 않은 위대한 정신’에 있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 교우님들은 대부분,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죄를 지고 대신 죽으셨기에,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이 씻어주시고 구원해 주신다는 믿음, 이른바 ‘교리적 대속신앙’을 갖고 계십니다.

하지만 저는 교리적 대속신앙을 갖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극복하고 넘어서지 않으면 부활신앙도 왜곡될 수밖에 없고, 그 배타적 교리로 인해 발생하는 무서운 갈등과 폭력이 우리 기독교와 지구마을의 미래를 덮게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교리적 대속신앙은 예수님만을 유일한 구세주로 믿는 신앙형태 이외의 어떤 구원의 가능성도 인정할 수 없는 배타적 속성을 안고 있으며, 결국 기독교 이외의 모든 종교를 부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그것이 옳다면 그 ‘배타적 진리’를 받아들여야 하겠지만, 그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아니라 예수님 사후 한참 세월이 흐른 뒤에 만들어진 교리입니다.

자신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예언하시는 예수님의 말씀도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믿고 고백하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해지다가 예수님 사후 40년이 지나서 비로소 복음서에 기록된 ‘전승’이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복음서 기자가 직접 들었거나 정확한 자료 조사를 통해 객관적 증거를 확보한 후에 기록한 ‘역사적 사실의 기록’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유일하신 참 아들이며, 본질상 하나님과 동일한 분이시기에, 인류의 죄를 대속할 유일한 구세주로서의 예수, 그것은 로마제국의 안녕과 통일을 절실히 원했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제국의 이념적 구심점을 세우기 위해 서기 325년 니케아에서 회의를 열고 참석한 주교들에게 예수님에 대한 통일된 의견을 내놓도록 압력을 가해 만들어진 결과입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예수님을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을 가지신 분으로 선포하고 다른 해석을 차단하기 전까지 약 300년 동안은 오늘날처럼 예수님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신앙이 공존했으나, 니케아에서 태동된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기독론이 이후 천여 년 동안 중세 암흑기를 지배하는 기독교의 중심교리가 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으신 교우님은 저의 책 <소설 콘스탄티누스>를 참조해 주십시오.)

하지만 르네상스 이후, 유럽에서는 많은 학자들에 의해 전통 기독론이 재해석되었고, 이제는 열린 신학을 통해 대부분의 교회들이 배타 교리에서 벗어나 포용주의를 거쳐 다원주의 신학을 받아들이게 되었으며, 불교를 비롯하여 이웃종교와도 자유롭게 교제하며 소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미국 근본주의 신학의 영향을 받은 한국에서는 여전히 다원주의 신학이 이단으로 배척되고 있습니다.

지금 저에게 예수님의 십자가가 의미 있는 이유는, 우리의 죄를 교리적으로 대속한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 고난의 길을 능동적으로 선택하신데 있습니다.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하늘 아버지의 뜻을 저버릴 수 없다는 그 의로운 선택 말입니다.

죽지 않고 살기 위해서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비위를 거스르지 말고 적당히 타협하며 지내야 했지만, 정복자 로마의 정치체계에도 순응해야 했지만, 주님은 그렇게 하실 수 없었습니다. 그건 잠시는 살아도 결국은 영원히 죽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잠시 죽음으로 영원히 사는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주님의 그 선택이, 영혼의 눈이 멀었던 제자들의 눈을 뜨게 해주었고, 정신적 영적으로 장애를 겪으며 살았던 수많은 사람들을 자유와 생명의 길로 인도해 주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십자가 사건의 진정한 의미는, 이처럼 불의와 타협하지 않은 예수님의 위대한 정신이 뚜렷한 본이 되어 그를 따르는 제자들의 삶을 의와 생명의 길로 이끈다는 점에 있습니다. 이제는 주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이, 어떻게 사는 것이 참다운 삶이며 생명의 길인지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 뚜렷이 알게 되었고, 예수님처럼 하늘 아버지의 뜻을 선택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구원입니다.

바로 그런 의미로, 저는 주님의 대속을 믿으며 예수님을 저의 구세주로 고백합니다. 주님을 알지 못했을 때, 저는 자신의 욕망만을 채우기 위한 이기적인 삶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부족하지만 하늘을 우러르며 사는 새로운 삶의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저의 옛사람이 주님의 십자가 위에서 죽고, 새사람으로 다시 살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저를 구원해주셨고, 지금도 제 마음과 삶 가운데 살아계십니다.

이렇게 주님의 아름답고 찬란한 삶과 말씀은 그를 따르는 수많은 제자들의 마음과 삶 가운데 다시 살아나 세상을 뒤바꾸는 힘이 되고 생명이 되어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졌습니다. 겟세마네의 예수님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 지금도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천 년 전, 나는 처절한 자신과의 싸움 끝에 하늘 아버지의 뜻을 선택했다. 너는 어떤 선택을 하려느냐?”

아무리 선하고 바르게 살아도,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 없이 살아도, 교회에 나와 예수님을 영접하고 주님의 피로 죄 사함을 받지 않으면 지옥에 갈 수밖에 없다고 믿는 교리적 대속신앙은 우리 주님께서 지신 십자가와는 너무나 다를 뿐 아니라, 모든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아무 전제 없이 하늘 아버지의 자녀로 선포하신 예수님의 삶과 뜻을 크게 배반하는 것입니다.

또한 교리적 대속신앙은, 그렇게 믿는 사람을 ‘예수의 사람’이 아니라 ‘교리에 종속된 노예’로 만들어 자주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박탈할 뿐 아니라, 다양한 신념과 문화 속에 살아가는 이웃들의 삶과 문화를 부정하고 갈등을 일으키기에, 이제는 우리가 반드시 극복하고 넘어서지 않으면 안 될 한국 교회의 과제입니다.



4. 사람이 교리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교리가 사람을 위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안식일에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는 규율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절대계명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다.”고 말씀하시며 병든 사람을 고쳐주시고 배고픈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자르는 것도 묵인해주셨습니다. 예수님에게 율법은 절대계명이 아니라 사람의 행복을 위해 존재하는 수단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눈에 율법의 절대성을 부정하는 예수님은 사악한 이단자로 보였습니다.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는 무례한 자이며, 거룩한 유대공동체에 흠집을 내는 위험천만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준 건 당연한 귀결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과 타협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십자가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안식일로부터 사람을, 율법으로부터 사람을, 그리고 마침내 종교조직으로부터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 오늘 우리 한국 땅에 다시 오신다면, 배타 교리를 하나님의 말씀처럼 여기고 그것에 매여 우리 자신과 이웃들의 삶을 옥죄는 한국 교회에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을까요? “사람이 교리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교리가 사람을 위해 있다.”

사순절 한가운데 있는 지금, 우리가 어떻게 해야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며 이 사순절을 의미 있게 보낼 수 있을까요? 절대계명처럼 되어 있는 기독교의 주요 교리가 사람의 행복을 위한 수단으로 재해석될 때, 또한 성서의 문자 안에 갇힌 하나님의 말씀이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성서비평에 의해 되살아날 때, 그때 비로소 예수님께서 받으신 십자가의 의미도 되살아나 한국 교회가 진정한 부활의 아침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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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진 (42.82.105.143)
2013-03-17 10:23:11
왜?
예수님의 번민과 죽으심이
‘교리적 대속’이 아니고 ‘불의에 굴복하지 않은 위대한 정신’에만 있다면
왜 그분이 지난 교회 역사에서 신앙의 대상이었을까요?

불의에 굴복하지 않는 위대한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인류 역사에 얼마나 많은가?
도데체 그들과 예수님이 무엇이 다르다고 예수님만 유독 신앙의 대상이라고 하늘 것일까요?
그것도 그 당시를 생각할 때에 너무나도 부분적인 모습-로마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자기 동족에 대해서만 나타내었을 뿐인-이었을 뿐인데 말입니다.

도데체 왜?
아주 지엽적이었을 뿐인 그 정신을 가진 사람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살았던 것일까?
그들이 정신적으로 너무나 미숙해서.
그분을 그리스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모두 정신적으로 미숙하였을 뿐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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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진 (1.220.135.107)
2013-03-28 12:12:47
참빛님 질문 한가지요.
아주 오랫만에 들어왔는데, 아직 이 글이 있네요.
그래서 아래에서 지속된 논증 중에서 한가지에 대해 다시 한번 질문드릴께요.

대속 교리가 무엇인지를 잘 모르는 것 같은데요.
대속 교리는 아담의 범죄 이후로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모든 사람이 죄 아래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상태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리심이 모든 사람의 죄를 위한 대속이고 그 대속을 받아들임으로 그분 안에서 하나님께 죄를 용서받고 그분과의 관계가 회복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며 진리라고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대속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다고 고백하는 신자랍니다.

이게 진리가 아니라는 님의 입장에서 말입니다.
님은 신자라고 말하고 있으니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상태라는 것인데, 대속이 아닌데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였다는 것인지를 밝혀주시지요.
물론 스스로가 신자가 아니라거나 신자라고 하더라도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라는 없다는 입장이라면 굳이 그럴 필요가 없고요.

기다릴께요.
회피가 능사는 아니지 않겠습니까요?
그런 특기는 버리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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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0
참빛 (24.141.4.52)
2013-03-29 00:11:03
오랫만입니다. ^^

진정성이 보이는 질문 같기에 소신껏 답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대속 교리가 무엇인지를 잘 모르는 것 같은데요.
대속 교리는 아담의 범죄 이후로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모든 사람이 죄 아래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상태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리심이 모든 사람의 죄를 위한 대속이고 그 대속을 받아들임으로 그분 안에서 하나님께 죄를 용서받고 그분과의 관계가 회복된다는 것입니다.

==> 대속론은 교회 6개월만 다니면 그 기본은 다 알게되는 겁니다. 저는 평생을 대속교리에 매어 살아온 사람이기에 그 쯤 모를리야 없지요.


저는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며 진리라고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대속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다고 고백하는 신자랍니다.

==> 저도 그렇게 생각해 왔습니다. 그리고 목사로서는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셔야지요.


이게 진리가 아니라는 님의 입장에서 말입니다.

==> 이게 진리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솔직하게 말합니다. 아무리 보아도 이는 진리가 아닌것 같습니다. 진리라면 스스로 드러냄 바 되어야 하고 개인에게는 자유함 세상에게는 평화를 주어야 하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대속교리가 우리에게 자유를 허락했다고 생각합니까?
세상에 평화를 가져왔습니까?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알 수 있듯이, 나는 현상을 보고 말합니다.
대속교리가 예수님의 피흘림을 통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다라고 단정하며
그럼으로 인해 다른 종교를 배타하고 우리 스스로 우월감에 도취하게 하며
강압적 전도 및 사회적으로 많은 우려와 무리를 끼치고 있어
개독이라는 말까지 듣고 있는 현재의 상황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면 다 진리인가? 라는 질문에 도달하겠지요.
저는 성경이 말하는 말은 다 진리라는 데에 반대하고자 합니다.
성경은 그 안에 진리를 담고 감추고 있는 원광석이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대속론을 개인적으로 받아도 상관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의 선배들의 고백적 산물이고 또 신앙의 자유는 헌법으로 보장하는 것이니까요.
그러나, 목사님을 포함한 기독교가 진정한 개혁을 도모할 의지가 있다면
우리는 반드시 배타적인 교리 특히 대속론부터 수정 또는 폐지되어야 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배타적인 교리의 개혁없이는 피상적인 개혁에 불과합니다.


님은 신자라고 말하고 있으니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상태라는 것인데, 대속이 아닌데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였다는 것인지를 밝혀주시지요.
물론 스스로가 신자가 아니라거나 신자라고 하더라도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라는 없다는 입장이라면 굳이 그럴 필요가 없고요.

==> 대속론은 정의와 사회적 평화와 개인의 자유를 위하여 우리 스스로 폐지하여야만 할 교리라고 생각합니다. 왜 신자라고 생각하느냐는 건 대속론과 관계없습니다. 저는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그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것이지 예수가 죽어서 우리죄를 대속했다고는 믿지 않습니다. 그것이 진실과 사실이 될 수가 없고 설사 사실이라 할 찌라도 나는 다시 말하지만 그런 대속의 신앙 따위로 사람을 노예로 만드는 데에 반대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나는 목사님과 대화할 의사가 언제든지 있습니다.
기본적 예의를 갖추고 지금처럼 확실한 내용을 들고 오시면...
이 분분에 대해서 할 말이 많지만 내 여기까지 하고 끝마치지요. ^^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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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빛 (207.210.3.147)
2013-03-23 03:41:56
글쓰기 특강
강사: 참빛
학생: 박창진, 임빌립
일시: 2013년 3월 00일 오후 00:00
장소: 당당뉴스, 류상태 목사 글방

제군들!
안녕하셨는가?

첫째로, 글을 잘 쓰려면 말이야, 내가 무슨 글을 쓸까하는 전체적인 구상을 해야한다. 오케이, 서론은 이렇게 접근하고 본론에서는 이러이러한 내용을 말하고 끝부분에 가서는 이렇게 막을 내려야겠다 라는 전체적인 흐름을 우선 찬찬히 구상하란 말이지. 물론 어떤사람들은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도 글을 재미있게 잘 쓰지. 도끼 같은 경우에... 그런 사람들은 머리가 엄청 좋은 사람들이거든. 이미 하고자 하는 말들을 무의식 가운데에서도 정리가 다 되어 있거든. 그리고 책을 많이 읽은 사람만이 초안없이도 할 수 있는거고. 또 그런건 글 많이 써 본 사람들만 할 수 있는 거다. 제군들은 마음만 앞섰지, 머리가 나쁘다 보니까, 하는수없이 초안을 대충 잡아야 할 수 밖에 없다 이 말이다.

둘째, 글을 잘 쓰려면 독해력을 키워야 돼!
남이 써논 글을 읽고 그 글의 주제가 무엇인가를 파악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거야. 남의 글에서 사용되어진 단어, 그 자체는 크게 신경쓸 필요가 없다. 단어는 그 쓰임의 용도에 따라 뉘앙스가 다 달라지기 따문에 단어의 정의 같은 것에 매이지 말고 문맥을 보라는 것이다. 문맥의 뒤에 감추어진 글쓴이의 뜻 즉 그가 어떠한 배경으로 이런 말을 하는가 그리고 이런 말을 하는 의도는 무엇이며 이루고자 하는 목적은 무었인가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두번째 독해력 문제는 창진군이 특별히 잘 메모해서 다음에는 이런면이 많이 보강되었으면 한다.

세째, 글쓰는 실제적 목적은 의사전달이거든. 무슨 말이냐면... 글쓰기를 할 떄는 괜히 유식한 척 하면 않된다는 거야. 단어사용은 가급적이면 순수하고 간결하게 간단한 단어를 사용해야 하거든. 본인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어려운 단어를 일부러 골라서 쓰려하니까 본인도 힘들고 읽는 독자도 짜증이 나는 것이거든.. 버트란드 러셀이 누군지는 알지? 몰르면 할 수 없고. 자연계는 아인스타인이라면 인문계는 러셀이라고 할 정도로 무지 똑똑하신 양반이셨거든. 이 분은 수학자이고 철학자이자 교수였는데 노벨문학상도 받은 글을 아주 잘 쓰시는 분이셨거든. 그 분이 "How I write" 라는 글에서 뭐라고 하는 줄 아니? 문장은 최대한 간단하고 명확하게 써야 한다는 거야. 어떻게 하면 가장 쉬운 단어로 가장 짧게 표현할 수 있는가에 염두를 두고 글을 쓴다는 거지. 그러니까 제군들도 제군들의 글에 어려운 단어는 될수있으면 단순하고 다 알아듣는 단어를 사용하도록 해. 어려운 단어 골라 써봐야 독자들은 웃고 만다.

다음, 넷째로는 글의 문장마다 다양성을 주어야 해.
이건 뭔 말이냐고?

하늘은 파랍니다.
구름은 하압니다.
들판은 푸릅니다
무지개는 칠색입니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제군들이 참 착한 학생들이라는 건 알지만, 이런식으로는 어쩔수 없이 F 학점 줄 수밖에 없거든..

이미 다 알고 있는 당연지당한 말은 쓰지 말아야 해.
그리고 '입니다'를 반복해 대면 무지 지루해 지거든...
좀비가 뭔지는 알지?
똑 같은 모습과 행동으로 밀어도 넘어 뜨려도 때려도 죽여도 계속적으로 덤벼드는 스타일 이거든.
그런식으로 글을 쓰면 사람들이 제군들 보고 좀비라고 생각할 거거든. 그러니까, 지금부터는 문장에 다양성을 좀... 알았지? ^^

다섯째,
논리를 펼칠때는 말야. 객관적인 증명자료를 토대로 펼쳐나가는 일이 매우 중요해.
예를 들어서, 신약에 있는 어떤 내용의 확실성 가부를 두고 토론 또는 논쟁을 할 때
그에 대한 증명을 위한 증거는 외부에서 부터 가지고 와야 한다는 거다.
신약 안에서 추려가지고 증거물로 제시하면 너희들은 그것이 증거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객관적인 눈으로 보는 사람들에게는 그건 증거물이 전혀 될 수 없는 것이거든.
이걸 순환논리 라고도 하잖니..
이런 오류를 범하지 말아달라는 것이지.


한가지만 더 말하고..
참. 끝나고 요앞에 있는 순대집으로 모여.오랫만에 막걸리 한잔 같이 하자구~
.
.
마지막 부탁할 것은, 글을 잘 쓰려면 책을 많이 읽어야 돼.
성경과 신학책 보는 만큼 이상으로 인문학과 자연과학 서적도 많이 보라고...
그래야 지경이 넓혀지고 남들이 하는 말을 제법 잘 알아듣게 되거든..


자 그럼 정리하자.

1. 초안잡기
2. 독해력 키우기
3. 단어와 문장은 간단하게
4. 문장의 다양성
5. 객관적 증명
6. 다독



...

제군들!
다독, 잊지마!!

다독, 이거 않하면 너희들 진보라고 하는 애들 절대 못이겨~~
부탁한다 ^^


-이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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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진 (1.220.135.107)
2013-03-28 11:58:37
뭘 하나를 알게 되면 어디까지 적용 가능한 지를 알아야 하는데...
순환논리라는 게 말이야.
무조건 잘못된 것이 아니거든.
순환논리일 수밖에 없는 것들이 있거든.
조선왕조실록의 어떤 내용에 대해 다른 자료로 검증이 불가능하면 그것은 그대로 받아들이단다.
그것이 순환논리인 것은 맞지만 그것은 그 자체로 잘못이 아니란다.
뭘 좀 알게 되면 그 다음엔 막무가내로 갖다붙일 것이 아니라 생각, 분별을 하여야 한단다.
적용에 있어서 어떤 한계가 있는지...

다른 내용들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견이 없음.
자신에게 적용하기만 한다면...
삼단논법의 개념도 제대로 잡혀 있지 않은 스스로를 돌아보고 말입니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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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1
천주교신자 (61.72.191.153)
2013-03-21 20:51:40
읽고 나서 몇가지 개인적인 느낌과 생각입니다
저는 천주교 신자로서 유아세례를 받고 지금까지 천주교신자로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만 류상태님의 글을 읽을 때 마다 저의 시야가 넓어지고 마음의 포용성도 커지는 느낌을 가지게 됩니다. 글을 읽으면서 저의 생각과 느낌 몇가지를 적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천주교 교리에서는 하느님은 창조주이시고 창조의 절정으로 당신을 닮은 존재 즉 인간을 창조하셨는데 첫인간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 열매를 먹고 하느님을 거스르는 죄를 지어 죽음이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고(죄의 결과는 죽음) 첫조상 아담과 하와의 원죄가 후세의 자손들에게도 이어지게 되어 후세 인간 역시 죄와 죽음의 고통속에 살아가게 되었지만 인간을 사랑하시는 창조주 하느님께서는 인간들을 죄사함과 생명의 나라로 인도하실 구세주를 약속하셨고 그 구세주는 바로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신 예수님이시라고 가르칩니다.

그렇게 인간세계로 들어오신 예수님은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이시며 세상의 모든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천주 성부께 대속의 희생제물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지만 사흘만에 부활하셨고 마침내 하늘에 올라 전능하신 천주 성부 오른편에 앉으시어 산이와 죽은이들의 심판자로 계신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창조된 존재인 인간은 무릇 우리 가운데 오신 하느님, 곧 예수님을 믿고 죄사함을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구원의 기쁨을 누리고 살아가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저는 천주교회의 가르침이 위에서 읽은 류상태님의 '교리적 대속신앙'과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교리적 대속신앙'관점에서 보면 예수님을 믿지 않는 타종교인들은 죄의 용서를 받을 수 없고 결국 구원받지 못한다는 등식이 성립되게 됩니다. 복음서에서도 유일한 구원의 문으로서 예수님 자신의 말씀이 나오고 있지요. 류상태님의 글을 읽으면서 제가 '교리적 대속신앙'을 믿는 것은 '예수님은 하느님'이시라는 믿음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물론 이 믿음은 교회가 가르쳐온 교리요 그 교리를 당연한 것으로 교육받아온 결과이겠지요.

'대속신앙'이 잘못된 교리요 잘못된 계시인가?를 생각해 봅니다.
저의 믿음안에서는 참진리라는 것이 명백합니다. 그런데 류상태님의 글을 읽으면서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되는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믿어온 하느님의 계시진리가 황제의 압력에 의한 것인지, 류상태 님의 책을 한번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순교의 역사안에서 계시진리를 지켜온 초세기 교회가 과연 '대속신앙'을 황제의 압력으로 공포했을런지 의아스럽습니다.

사실 저는 어리석은 죄를 지을 때 죄인인 인간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시고 새로운 기회를 주시고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대속신앙에 비추어보면 저를 위해 대신 아파하시고 희생되신 하느님, 인간을 사랑하시어 인간에 대한 무한한 사랑의 책임을 다하신 하느님을 생각하며 죄송함을 느끼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리라고 다짐하면서도 번번이 어리석은 죄인으로 또다시 살아가는 저 자신을 보게 되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속신앙'은 죄에 걸려 넘어지는 약한 인간들에게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주고 참된 믿음의 자녀로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된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대속신앙'의 깊은 의미와 체험이 흐려지고 가벼워져 클릭한번 하고 나서 새창을 띄우는 식의 컴퓨터의 마우스같아진 느낌이 듭니다. (다만 천주교에서는 죄의 고백을 사제앞에서 고해해야 한다는 것이 엄청난 고통과 회개와 결심과 용기가 요구되는 신앙행위이기에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류상태님의 글중에서 "제가 생각하는 십자가 사건의 진정한 의미는, 이처럼 불의와 타협하지 않은 예수님의 위대한 정신이 뚜렷한 본이 되어 그를 따르는 제자들의 삶을 의와 생명의 길로 이끈다는 점에 있습니다. 이제는 주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이, 어떻게 사는 것이 참다운 삶이며 생명의 길인지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 뚜렷이 알게 되었고, 예수님처럼 하늘 아버지의 뜻을 선택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구원입니다."라는 부분에서 예수님의 그 투철함을 우리 인간도 진정 본받아야 한다는 굳은 결심이 마음에 전달됨을 힘있게 느끼게 됩니다.

류상태님의 글을 읽으면서 사순절을 보내는 한 크리스챤으로서 좋은 묵상과 반성의 기회가 되었다는 감사의 글을 올리면서 아직 읽어보지 못한 류상태님의 글을 다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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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빛 (24.141.4.52)
2013-03-21 15:32:49
참빛은 그럼 누구인가..
도끼님이나 피키님은 그래도 목적의식이 분명하시니 참 좋겠습니다.
근데 저는 여기서 뭐했던 거죠??

류목사님 글의 내용이 좋아서 자꾸 오게 되었는데..

난 류목사님 글 바람잡아주는 사람으로 앞으로 있으면 되겠네요 그죠?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그렇게 해 온것 같으네요 ^^.

여기서 그동안 남에게 보이지 않았던 나름대로의 배움과 깨달음
나누고 또한 받을 수 있어 좋아요.

사실 저와 방향이 비슷하신 분들 말고도
다른 분들도 저에게는 참 소중하게 느껴졌습니다.
싸우면서 정든다고 요즈음 개혁본부님의 소식도 궁금하고요
어디가서 밥은 굶지 않고 잘 지내는지...
그 분의 특유의 어투가 생생하게 기억나고요. (류상태씨? 백팔배는 어디가 잴 힘들어?)
늙어가면 옛날이 그리워 진다더니만
그렇게 징그럽개 느껴지던 개혁본부님도 요즈음 보이지 않으니
보고싶고 마음이 짠 합니다.

근데 저는 딜레마에 빠져 살고 있습니다.
저는 유신론자입니다.
저는 교회 (교리적인 것이 아닌) 공동체가 너무 좋습니다.
사람들이 순진하고 진실되고요 서로 위할줄 알고...

그런데요..
교회에서 목사들이 하는 소리는 하나도 들어오지 안습니다.
이유를 모르는 사람들은 뭐 교만한 놈이다 라고 할 수 있겠죠.
사실은 저의 머리가 너무 커버린 것이죠.
Calculus 푸는 재미에 폭 빠져 있는데
산수문제 들고서 거품 물어가며 쪼아대는 목사의 설교가 들어오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개독과 무신론자와의 사이에
이것도 저것도 아니게 되어버린 소속불분명의 사람입니다.
교회에서 말하는 독선적인 그런 해악한 교리에 반대하고 싶은 사람이죠.
교회가 지금과 같이 추락한 상태로 버려지게 된것은 다름아닌 바로 교리에 그 이유가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교리만 바꾸면 되는데...
그것을 개독들은 죽어도 못 바꾸겠다는 것이죠.
예수님은 바꾸라는데...
그래서 너~~~무 힘들어요.
나가려하니 아쉽고 남으려니 한심하고...

언젠가 도끼님이 그런 말했죠.
목사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던지 아니면 맘대로 살다가 죽기전에 영접하고 죽으려고 작정한 사람들이라고
전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 사람들 예수 않믿어요 제가 볼때는 전혀요.
믿는 척 하는 것이죠. 말로만..
사는 꼴은 그들이 지적하고 욕해대는 세상사람만 못하니깐요.

그리고 하나님 보호근성은 뭐 그리도 강한지.
이건 맹견도 아니고...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지 않다 하면 난리가 납니다.
다행히 온라인이까 별 탈이 없는 것이죠
만약 교회안에서 그런 이야기 했다가는 뼈도 못추리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겠죠.

기독교인들의 문제는 사실 생각을 않하는데 있습니다.
기독교가 생각을 터부시 해 온 것이죠. 일부러요.
그래야 백성들이 혹 머리가 커서 반발하고 대들고를 안할테니까요.
창의력도 없구요. 문제이죠.
주입식이예요. 믿어라 그리고 묻지도 말라 식의


믿음의 내용은 나의 안에 숨어있는 비밀스러운 것이라고 봐요.
이런걸 까발리면서 간증이다 하며 돌아다니는 것도 꼴불견이고..
또 박창X라는 사람처럼 너는 무슨 믿음을 가지고 있냐 밣혀 내라 면서 안달을 떠는 것도 꼴사납고
참 왜 다들 이런식으로 되었는지...

버나드 쇼어가 그러죠.
사람은 무엇인가는 믿어야 된다고요.
그래야 소망이 생기고 삶의 희망이 넘치니까요.
하지만...

잔소리 엄청 했네요
내일을 위해서'이제 이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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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0
박평일 (72.196.234.24)
2013-03-22 02:25:39
선생님의 말씀은 결코 잔소리 아닙니다.
뼈와 살이 될 값진 내용들입니다.
용기를 잃지마시고 계속 외치싶시요.
언제가는 아무리 높고 두꺼운 관념의
성벽들도 결국 무너져내리고 말것입니다.

저는 그것이 바로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리플달기
3 0
Ismail-x (112.222.123.131)
2013-03-21 14:16:52
당당에 글 쓰는 이유...
.

요즘 공부가 통 안 된다.

올해 초 치른 시험은 고득점을 받아 목표 이상을 이루었는데

지난 달 시험 역시 최소한의 득점으로 목표를 이루었고

지난 주 시험은 좀 별로였다.

평균 92.5 를 받아야 하는데 아무래도 미치지 못 한다.


요즘 왜 이리 공부가 안 되지?



피키 님에 이어 좀 쓸게...


몇 년 전 일이야.


내가 다니던 교회에 젊은이들에게 식사 대접을 가끔 했어.

사실 난 잘 살지도 않는데 순전히 전문직이란 이유로

내가 많이 샀어.


그런데 이 젊은이들이 '뇌'라는 기관을 스스로 없애고 살더라는 거지.

아무 생각이 없어.

얼핏 보면 착하고 순해보이는 아이들이지만 사고능력이나 판단능력은
빵점에 가깝더라는 거지.


누가 이 아이들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난 그랬어.

아이들에게...


예수를 믿더라도 예수가 누군지는 좀 알고 믿어라.

그래서 청년들에게 지금까지 자신들이 알던 것 말고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게 신학을 소개했어.

몇몇은 강한 거부감, 몇몇은 끄덕임, 몇몇은 내가 준 책을 읽어보더군.

그런데 책을 읽고는 강한 충격에 빠졌나봐.



우리나라는 말이야...


박*진 과 같은 무지하고 무식한 목사들이 넘쳐 나.

내가 약 4년 전에 목사들을 상대로 강의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 중 어느 여자 목사가 2년 후에 내게 연락을 해 왔어.
목사 그만 뒀다고...


그 때는 이해 못 했지만 이제서야 '도끼'님이 어떤 뜻으로 그런 말들을
했는지 알 것 같다고...



사실...

말이야 바르게 해야지.

우리나라처럼 목사들이 무식하고 무지한 나라가 어디 있냐?



.





















참 말이 나온 김에...

당당담당자 님께 건의 하나 합니다.

제발 여기 글 쓰는 사람들...

댓글자 말고 자기 이름 걸고 글 쓰는 사람들.

글쓰기 교실 졸업 시킨 다음에 글 쓰게 하십시오.

진짜 짜증납니다.


글의 내용도 엉망이지만 주어와 술어 관계 엉망으로 쓰기, 단어나 어휘의 적절한 사용 하지 않기, 단락과 단락의 연계성 무너뜨리기, 국어사전에는 없는 단어 쓰기, 비논리적 논거 마구 쓰기 이런 거 좀 안 하게 단속 좀 하시죠.


이게 글입니까, 장난입니까?


아, 내가 정체만 밝힐 수 있다면 글쓰기 교실 열텐데...

돌겠다.


하지만 난 여전히 도끼로 남을거야...


.
리플달기
2 5
박평일 (72.196.234.24)
2013-03-21 22:55:25
제발 여기 글 쓰는 사람들...

댓글자 말고 자기 이름 걸고 글 쓰는 사람들.

글쓰기 교실 졸업 시킨 다음에 글 쓰게 하십시오.

진짜 짜증납니다.

저도 그 중 한 사람 같아서
몇 마디 변명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칼럼이나 댓글도 실명을 쓰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저의 한국어 실력은 자타가
공인하는 무식에 가깝습니다. 영어실력은 더
억망입니다
그래도 지금은 예전에 비해 많이 향상된 셈입니다.
몇 년 전에 잡필을 써서 인터넷으로 지인들과
글을 교환할 때는 매번 철자와 문장이 틀렸다고 교정해
주시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한글교정 프로그렘을 보내주시는 분들도
여려명 있었습니다.
저는 아직도 한글자판을 한 손가락 한 손라락으로
두들겨 글을 쓰는 사람입니다. 이글을 쓰면서도
한 시간 이상을 소비해야 합니다..
이점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모르는 것은 죄도 부끄러운 것도
아니다. 오히려 모르는 사실을 감추고 숨기는 것이
죄고 부끄러움이다" 하는 것이 저의 개인적인
신념이고 믿음입니다.

하나 밖에 없는 아들에게도 잔소리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리 가르칩니다.

" 하늘에 숨길 수 없는 일이라면
자신이나 세상에도 숨기지 말라.
인생을 누가 봐도 볼 수 있도록
투명하게 살아라.
거짓은 만들 수가 있다.
그러나 시실은 하나님도 만들 수가 없다"

저는 실제 삶 속에서 모르는 사실을 두고
전혀 부끄러워 하지 않습니다.
모른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배우려고
노력합니다.
배움을 위해서는 운전을 하거나
배행기를 타고 수백마일을 직접 찾아가기도 합니다.

직업적으로 모르고 저질러진 실수가
몇 개월 후에 밝혀지면 전화나 이메일을 통해서
그 사실을 밝히고 용서를 구합니다.
대부분의 경우 상대 쪽에서
이미 처리된 문제라며 더이상 개염치 말라 합니다.
그러나 나로써는 해결이 된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가족들이나 지인들과 다른 의견으로 다투고
싸울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뒤늦게라도
나의 오해나 실수가 밝혀지면 반드시
찾아가서 사과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상대가 이미 잊고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입장에는 그대로 덮어두고 넘어가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는 나 자신를 살아있는 한 생명체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생명체는 변화와 성장이 멈추는
순간에 죽은 시체로 변해버립니다.

헛소리가 좀 길어졌군요.

저는 선생님의 댓글을 아주 좋아하고
즐깁니다.
정도는 다르지만 다른 분들의 의견도
마찬가지 입니다. 선생님의 글이나
다른분들의 글이나 나에게는 선물이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그 선물을 받고 거절하고 즐기는 것은
필자가의 몫이 아니라 독자인
나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이란 즐기는 것디다. 삶은 매 순간순간이
축제다" 하는 것이 저의 삶에 대한 이해입니다.

삶이 하나의 축제가 되려면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다.
이것도 틀리고 저것도 틀렸다" 하고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가슴의 눈이 필요합니다.

그점이 제가 개인적으로
이성적이고 지적인 머리보다는
직감적이고 통찰력적인 가슴을 더 신뢰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통찰력에서 나온 선생님의 재미있고
유익한 댓글들 늘 깊은 깨달음으로
즐기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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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0
Picky (76.23.169.116)
2013-03-21 13:55:29
내가 당당에서 댓글을 쓰는 이유
얼마 전에 내가 왜 여기서 난타전을 벌이는지 궁금해 하는 질문을 본적이 있다.

왜 개독들을 상대하는 유일한 방법은 조롱과 무시라는 것을 아는 내가 그들을 상대하면서 여기에 댓글을 쓰고 때로는 논쟁을 벌이는지 궁금하다는 뜻이다.

나는 이렇게 하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기독교에 미련이 있다거나 개독들을 교화하고 그들에게 무슨 변하ㅗ를 바래서 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누구보다 더 잘 안다.

그래서 그들이 읽으라고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내가 글을 쓸 때에 내 글을 읽어주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고개를 갸우뚱하면 생각을 한번이라도 더 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따로 있다.

그들은 내 조카나 자식벌이 되는 젊은 친구들이다.

이런 곳에 젊은이들이 기웃거리지는 않는다는 것은 잘 안다. 그래서 오프라인으로 젊은이들을 가르치고 있기는 하지만 가끔 그것도 아주 가끔 이런 공간을 통하여 개인적으로 연결이 되는 경우가 있다.

여기에서는 댓글정도만 쓰지만 다른 곳에서는 정식으로 실명을 가지고 학문적인 글을 쓴다. 그곳을 통해 젊은이들과 많은 교류를 가지지만 그런 교류는 인간적인 고민을 가지고 이루어지는 교류가 아니기 때문에 나는 여기에서 사람 냄새를 맡는다. (이전의 뉴조가 재미있었는데)
블로그를 통해 많은 젊은이들을 만나고 가르쳤다. 그런데 거기는 너무 다양한 사람들이 드나들기 때문에 나름대로의 문제가 있고 집중이 되질 않는다.


나는 그들에게 세상을 보는 법을 가르치거나 성경과 기독교의 역사를 가르친다. 학문을 통해 이성적인 사고를 지니는 법과 눈을 작게 뜨고 보이는 것이 아닌 보이진 않는 것으로 세상을 보는 법을 가르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가 이런 곳에 글을 쓰는 이유는 자신의 이성이 마비된 것을 그나마 감지하며 발버둥치려는 젊은이들을 돕기 위함이다. 그들도 내 자식이요 조카이고 아직은 세상을 살아 온 날보다 살아갈 날들이 더 많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이제 죽을 날만 기다리는 자들은 그렇게 살다가 죽는게 행복한 것이니 그들을 염려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이제와서 바뀐다고 해도 지난 시절에 대한 미련과 후회 때문에 오히려 남은 생이 괴로와질 뿐이다.

죽어가는 자에게는 독주를 먹이라는 말대로 하는 것이다. 포도주를 마실 자들은 따로있다.

세상을 보는 법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는 편견이고 무지이다. 무식은 배우지 못함이나 무지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결과이다. 신을 인간위에 군림시킴으로 인간의 야욕을 정당화시키는 종교는 유사 이래로 지식을 독점함과 동시에 대중의 지식으로의 접근을 차단하고 대중의 무지를 추구하며 종교적 권력자의 손 아래 모든 것을 장악하면서도 이 모든 사실을 정당화하였다.

어느 시대나 어디에서나 대중의 무지는 권력가의 수면제이다.

권력가가 두 발 뻗고 잘 수있는 이유는 대중의 무지때문이다.

부패한 종교는 그 종교에 발을 들여놓는 어떤 대중이라도 무지로 가는 길로 인도한다. 때로는 입과 눈을 막지만 세련된 종교일수록 머리를 쓰레기로 채우는 일에 온갖 노력을 다한다.

지난 세기까지는 물리적 폭력을 통하여 이런 무자비함에 대항하는 자들의 목숨까지 앗아갔지만 이제는 대중을 선동하며 극도의 물질주의에 빠진 자본주의 국가의 멍청이들에게 이성을 상실케하는 환각제를 먹이고 있다.

한 인간이 종교에 발을 들여놓으면 세상을 깊고 넓게 보여주고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고 그래서 자신이 발을 들여놓은 종교가 지닌 가치를 스스로 인정하여 수용할 수 있는 자발적이고 지성적인 능력을 키워주어야 하는데 대한민국의 기독교는 그 머리속에 온갖 쓰레기 같은 지식 아닌 지식과 왜곡된 역사와 미화된 거짓과 사실의 은폐를 통하여 뿌리도 모를 전통 아닌 전통을 앞세우고 종교로서의 제도적 기준조차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찾지도 못할 정도의 정신적 미로속으로 인도하면서 싸구려 웃음만 가득한 축제를 연다.

이런 교회를 평생을 다녀봐라. 네 자신이 누구인지 고민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평생을 다람쥐 쳇바퀴 돌듯 그 자리에서 맴돌다가 흰머리가 나고 늙어 병들어 죽는 것으로 인생을 마감할 것이다.


예수가 잘못되서 그런 것이 아니라 개독이 잘못되어서 그렇단 말이다.

성경이 가치없는 고대의 헛소리라서가 아니라 그것을 읽을 줄도 이해할 줄도 모르는 자들이 만들어낸 종교의 교리니 신학이니 하는 쓰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애초부터 예수를 죽인 것은 기독교라는 종교라는 것을 보고 생각하고 이해한다면 용기가 없어서 외치지는 못할지라도 개독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의 무지속에 남아있지는 않을 것이다.

인간이 왜 인간인가?

생각을 하는 존재가 아닌 이상에야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럼 생각은 무엇인가? 우리가 왜 생각을 하는가? 생각의 끝에는 언제나 판단과 선택이라는 최후의 과정이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보다 가치있는 삶을 위해 판단과 선택이 필요하고 그 과정을 거치면서 옳은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 생각을 하는 것인데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기준이 아니겠는가?

옳고 그름, 최선과 차선, 바름과 구부러짐, 분명함과 희미함, 그리고 개독들이 좋아하는 선과 악을 구분하기 위한 잣대가 있어야 하는것이 아닌가?

그런데 개독들이 말하는 잣대는 무엇인가? 성경이다. 성경에 최고의 권위를 두고 있다.

그래서 나는 성경이 무엇인지 젊은이들에게 바로 이해할 수 있는 눈을 열어주려는 것이다.

개독, 먹사라고 부르며 기독교를 모욕하는 것처럼 보이는 내가 왜 하필이면 성경을 그들에게 가르치려하는가?


그 이유는 성경에는 인생의 경륜을 깊게 경험한 옛 사람들의 생각과 깨달음이 있기 때문이다. 불경도 마찬가지이고 동양의 고전도 마찬가지이다. 성경만 가르쳐서는 안된다. 금강경도 화엄경도 주역도 천부경도 노자, 장자, 공자, 맹자 모두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물어보라 눈이 열리는 지 아닌지. 최소한 뭐라고 정확하게 말은 못하겠지만 감이 오기 시작한다는 말은 할 것이다.

이 점은 개독도 마찬가지이다. 불경도 가르치고 동양의 고전도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먼저 세상을 보는 눈부터 키워주란 말이다. 성경도 다양한 해석과 지난 시절 기독교에 나타났던 여러 사상들을 고루 보여주면서 인간이 세상을 어떤 시각을 가지고 보아왔는지 그 다양함을 알려주란 말이다.

왜 그렇게 하지 않는데?
왜? 교회를 떠날까봐? 그만큼 개독들은 자기들의 것에 대하여도 자신이 없다는 말이다.


나는 내가 이런 것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우선 내 자식들을 위해 그리고 나머지 젊은이들을 위해.


그리고 적으나마 성과를 얻었다. 지난 10년간.


그 가운데는 목사지망생도 있었고 신학자를 꿈꾸던 학생도 있었고 교회 전도사도 있었다.

심지어는 60이 넘은 장로도 있었다.


세상은 이런 식으로 나누며 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질은 물질이 많은 자로부터 흘러나가고 지식은 지식이 많은 자로부터 흘러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성경이 가르치는 것이 또 그것이다.

예수가 신이라고? 그래서 예수를 믿으면 천국에 간다고?

그래 천국에 가라. 기도 많이하고 이해하지도 못하며 앵무새 같은 소리만 지껄이면서 성경 많이 읽고. 그래야 천국에 가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큰 그렇게 함으로 행복부스러기라도 얻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하라.


성경은 읽고 깨달음이 있다면 쓰레기통에 넣어도 상관없다. 깨달음은 마음에 있는 것이지 종이 쪼가리에 있는게 아니다.

개독들은 평생을 성경을 끼고 산다.

읽고서 이해도 못하니까 평생을 끼고 사는 것이다. 허기야 이해를 못하니 평생을 보는 것이지만.

예수가 진리가 자유케한다고 했는데 왜 그다지도 자유할 줄을 모르는가?

예수의 그 한마디만 깨달아도 세상이 보이는데 더 이상 성경이 왜 필요한가? 자유함을 깨달았으면 자유해야 하는 것 아닌가? 오히려 개독들은 성경의 노예가 되고 성경이 멍에가 되지 않는가?

먹사들에게 이 말은 꼭 전해라.

성경 많이 읽었다고 사람들 앞에서 상 주는 그딴 짓거리 하지말고 그럴 돈 있으면 주일학교 애들 사탕이라도 하나 더 사주라고.


개독들은 천국에 하루라도 빨리 가거라. 그렇게 좋은 곳에 빨리 가지 않고 여기서 뭘하는가?


개독들 없다고 세상이 돌아가지 않는 것도 아닌데.


이도 저도 아니면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라는 찬송을 부르지 말든지.


나는 살아있는 동안에 산 사람들과 살만한 세상을 만들련다.

최소한 내 자식들에게만은 지금보다는 나은 세상을 만들련다.


이것이 내가 여기서 글을 쓰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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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평일 (72.196.234.24)
2013-03-21 22:46:40
나는 살아있는 동안에 산 사람들과 살만한 세상을 만들련다.

최소한 내 자식들에게만은 지금보다는 나은 세상을 만들련다.

저도 개인적으로 선생님의 주장에
깊히 공감을 하고 가정에서, 직장에서
그리 살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작은 한 소금 알로 이 세상을 살다
가고 싶습니다.

랄프 왈도 에머슨이 이런 비슷한 말을 했지요.
.
"세상을 조금이라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 놓고 떠나는 것
자신이 한때 이곳에 살았음으로 해서
단 한 사람의 인생이라도 행복해 지는 것
이것이 진정한 성공이다.'
댓글들 늘 깊은 깨달음으로 감사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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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 (72.196.234.24)
2013-03-21 21:31:55
본인에 의해 삭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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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빛 (24.141.4.52)
2013-03-21 14:16:16
감동~~~
어... 이거 울컥하네요....
참, 좋습니다.
그래요, 자유합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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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112.222.123.131)
2013-03-21 14:22:50
감동의 쓰나미...
.

홍도가 울고 가겠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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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진 (42.82.105.143)
2013-03-21 12:52:50
정당한 조롱
리차드 도킨스가 언급한 3=1로 삼위일체를 말하는 이들에게는 조롱이 가장 적절한 대응이라는 토마스 제퍼슨의 말이 공감한다.
그 입장은 그가 비판한 모습과 다르지 않는 태도를 견지하는 이들에게 동일하게 해당된다.

성경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성경의 가르침을 난도질하는 재미로 사는 인간들.
성경의 가르침에 대해 잘못 풀이한 경우만을 언급하며 그것이 보수개신교의 모습 전부인 것처럼 부풀리는 인간들.
성경의 진술과 관련하여 정당한 견해 피력에 대해 대응할 말이 없으면 회피하면서 개독이라는 말만 늘어놓는 인간들.

그런 인간들에게 조롱은 정당한 대응이라는 것이 토마스 제퍼슨의 주장을 수용하는 나의 입장이다.
그래서 나는 도끼님을 "돌아 돌아"라고 자신있게 당당하게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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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면서^^ (112.222.123.131)
2013-03-21 13:38:42
잘 된 글쓰기는...
.

어려운 단어나 어휘를 쓰지 않고 되도록 쉬운 단어로 써야 한다.


언급한 ---> 말한

견지하는 ---> 가진

동일하게 ---> 같게

피력에 ---> 말하는 것







.





솔직히 지금까지 나온 한자어 한자로 쓸 줄은 아나?^^


.




.

















제발 우리 양심은 속이지 말자.

자기도 모르는 단어 쓰지 말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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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112.222.123.131)
2013-03-21 13:30:10
애쓴다...
.


성경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성경의 가르침을 자신만의 망상인 '바른 신학' 어쩌고 하면서 난도질하는 재미로 사는 인간.
성경의 가르침에 대해 잘못 풀이한 경우만을 언급하며 그것이 보수개신교의 모습 일부인 것처럼 축소하는 인간.
성경의 진술과 관련하여 정당한 견해 피력에 대해 대응할 말이 없으면 회피하면서 망상병적인 '바른 이해'와 '바른 신학'만을 강조하는 인간.



.













어?

누구랑 닮았네?^^



.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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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mail-x (112.222.123.131)
2013-03-21 10:51:07
박평일 선생님 말씀이 맞습니다. 참빛님은 참고하세요.
.

참빛님까지 골치아픈 민들레가 되실 필요는 없어요.

선생님 근기에 맞게 대하시면 됩니다.


저는 베드로의 방식으로 개독들을 대하는 겁니다.

예수를 잡으러 왔을 때 베드로는 칼을 빼들죠.

예수가 베드로를 나무랍니다.


저는 칼을 빼들죠.

하지만 참빛님은 그러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저같이 행동하시면 제가 곤란해져요.

저와 같은 캐릭터가 또 생기면 희소성이 없어지거든요.

저도 먹고 살아야지요.


사실...


방송국 관계자들에 요구하는 것들 중 가장 힘든 것이

교양과 재미를 같이 녹여서 프로그램을 만들라고 하는 것이랍니다.

말이 쉽지 제일 어려운 것이거든요.


사실 이런 당당이나 뉴조 같은 곳은 종교적 색채를 띠고 있어서

기존 포털같은 곳의 자유토론장보다는 훨씬 부드럽습니다.

각자가 어느 정도 넘는 선에서는 이야기 하지 않거든요.

물론 이 넘들도 포털이나 다른 사이트 가면 개색희들이 되기는 마찬가지에요.


여기서는 무의식적으로 어떤 선을 넘는 표현을 안 하는 것 뿐이죠.

대표적인 넘이 '안*환"이라는 먹사가 있습니다.

궁금하시면 검색으로 찾아보시구요.


생각해보세요.

전에는 뉴조가 당당보다 더 재미있었어요.

왜냐?


제가 있었거든요.


그리고 누군가 어떤 글을 썼을 때는 클릭수가 많아야 그 목적에
부합하는 거죠.

물론 읽고 서로 공감할 수 있는 것이 좋지만 때로는 논쟁도 하고 그러면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겁니다.


그런데?

아예 클릭수 자체가 거의 없다면?

정말 무의미 해지죠.



저는 어쩌면 당당이나 뉴조에서는 필요악입니다.


음악도 강약과 리듬이 필요하듯 색채도 무채색과 유채색의 조화가

필요하듯 당당의 일반 댓글자나 혹은 글을 쓰는 자와 다른 어떤

독특한 캐릭터가 필요하죠.


사실은 이런 캐릭터 때문에 당당의 논조가 다양해지는 겁니다.

같은 논조라면 그리고 같은 서술 방식은 지루하고 단조롭기 그지

없거든요.


이건 제 주장이 아니라 심리학적 문제들입니다.


그리고 이건 변증법이기도 하죠.


저같은 인간이 있어야 개독들도 자극을 받고 저를 내쫒기 위해

그 돌아가지도 않는 돌대가리를 좀 굴리기라도 할 것이고

제가 개독들을 다루는 글을 보면서 또한 웃음도 터질 것이고 재미도

느끼시고 그러면서 또 당당이 굴러가는 겁니다.


물론 뭐 제가 없어도 당당은 굴러가겠지만 재미와 흥미 그리고 흥행의

한 요소가 빠지는 거죠.


당당 편집자나 당당관계자들도 인간들인데 맨날 무슨 성스럽게 보이는 글 선해 보이는 글 참회하고 회개한다고 하는 글만 보고 싶겠습니까?

그런 건 재미없다니까요...


사실 당당은 제게 원고료를 줘야해요.

클릭 수 높이고 댓글자들이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는 촉매제 역할을 하는데 정작 저는 뭐 돈 10원 안 받죠.

그러니까 가끔 나는 예수와 닮았다는 생각을 하죠.

예수가 유월절에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온갖 쌍욕을 다 하고 물리적으로
행패를 부렸잖아요?

따지고 보면 저도 비슷한데 제가 예수보다는 훨씬 온건하죠.

여긴 쌍욕까지는 못하거든요.

물리적으로 행동할 수도 없고...


여하간 예수정신을 가장 많이 따르는 사람이 바로 저 도끼입니다.

솔직히... 개독들은 입만 처 열면 예수를 본받겠느니 따르겠느니 하면서 개조까튼 소리 하는데 왜 세상의 불의를 보고도 예수같이 행동하지 않는지 모르겠어요.

예수는 그저 말없이 가난하고 못배우고 아프고 힘든 사람들 옆에서
그들과 식사하고 같이 웃고 울고 자고 하면서 함께 했는데 왜 개독들은
성경의 내용은 그것이 아니고 이것이니 이것이 바른 신학이니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니 하면서 개조까튼 소리들만 하고 있느냐 이 말이죠.

이 놈들에게 무슨 예수가 있고 하나님이 있겠습니까?

행동은 결코 하지 않고 말로만 선한척 했던 바리새인들보다 더

악질들입니다.

솔직히 바울을 비롯한 바리새인들은 학문적으로는 뛰어나기라고 했지,
도무지 이 당당의 개독들은 무식하기가 이를데 없지 않습니까?

돌대가리도 이런 돌대가리들이 없어요.


.

사실 저요...


예수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 많이 말씀드릴 수 있어요.

아마 여러분들이 듣도 보도 못한 이야기들일겁니다.

이건 저만이 가지고 있는 이론이거든요.

엄청 재미있어요.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완벽한 논거와 근거를 가지고 있다는 거.

그리고 그 논거와 근거는 100% 개독경이라는 거...



제가 당당을 이렇게 재미있게 만드는데 일조했지만 저는 당당에게
10원짜리 하나 요구하지 않습니다. 이것도 예수님의 정신을 본받은거죠.

예수님도 병자를 고쳐주시고 배고픈 자를 먹이시고 마음이 아픈자를 치유하셨지만 그들에게 10원 하나 안 받으셨죠.

하지만 이 개노무 색희 먹사들은 뭡니까?

온갖 악행을 저지르면서 성도들 백성들을 쥐어짜지 않습니까?

사랑에 교회 오*현 같은 색희들이 어디 한 두 넘입니까?


이런 색희들이 홀로 영광을 받으실 예수님 대신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 백성들을 자신의 노예로 만들고 그들의 탐욕을 채우기에 여념이 없는 겁니다. 문제는 이런 색희들이 널리고 널렸다는 거죠.


솔직히 저요...

예수 보면 불쌍할 때가 많아요.

뭔 저런 개색희들을 낳아서 그렇게 고통받냐구요.


예수에게 솔직히 말하면서 예수와 마주 앉아 닭발에 소주 한 잔

기울이고 싶을 때가 많아요.

그리고 가만히 어깨 두드리면서

"그래 c발 니가 고생이 많다"

이러면 왠지 내 어깨에 기대서 막 울거 같아...


졸라 안 돼 보여요...


자기 이름 팔면서 여기에서도 이건 바르니 저건 틀리니 이 해석이 올바르니 하면서 개질할 하는 인간들이 어디 한 둘입니까?

뭐 라이센스비라도 주면서 팔든지 자기 이름 팔아서 성도들 돈 다 빼먹고...


아...


뭐 길게 썼는데


결론은 오늘은 중구난방이네...


참빛 님 힘내시고

박평일 선생님 좋은 글 많이 주셔서 감사하고

피키님은 제가 존경하는 분이고



.


































뱀발 : 니들 두 넘은 나한테 좀 맞자~!

예수가 니들 졸라 패도 된단다.


써글너므 색희들...


언제까지 부모 욕 보일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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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mail-x (112.222.123.131)
2013-03-21 10:17:20
참빛님의 문제는...
.

실전 전투 경험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책으로 전투 전술 전략을 공부한 사람이 실제 전장에서 적군과

마주치면 상당히 당황합니다.

책은 모든 상황을 다 망라할 수 없거든요.

기준 틀을 모두 암기하고 이후에 응용을 하는 것입니다.


개독교인들을 대하는 유일한 방법이 '조롱'일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저들은 일관된 방식을 쓰는데 참빛님을 비롯한 상대자들은 거기에

휘말리기 때문입니다.


저들의 일관된 방식이란 일관되지 않는 방식을 말합니다.

쉽게 말해 저들은 상황에 따라 전략과 전술을 바꾸며 논리와 합리성을

넘나들며 기준과 원칙을 전혀 지키지 않습니다.

바로 그런 일관성이죠.


저들은 일관되게 기준, 규칙, 방식 등을 마음대로 바꾸고 잣대를

수십 수백개를 가져다 씁니다.

이런 저들의 방식에 일관되게 논리적 이성적 합리적으로 대하다보면

그만 지쳐서 쓰러지게 되죠.

화도 나고 회의도 생기고...



잘 보세요.


개독들을 대하는 유일한 방법은 '조롱'이다.

하는 명제와

의로운 분은 오직 하나님 뿐이다

라는 명제는 가치명제로서 완벽한 등가를 이루죠.


하지만 개독들은 후자만 진리라고 주장할 뿐이죠.


이런 것을 논리적으로 말하면 되는 겁니다.


그리고 빌립이 말하기를

누군가 위악을 한다면 선하다는 전제가 필요하다고 했는데

이것이 망상적인 주장임을 밝혀주면 되죠.

왜냐하면 나는 선하다는 주장을 한 적이 없거든요.

단, 있다면 개독들에 비해서 선하다고 한 것이지 어떤 절대적인

기준을 가지고 선하다고 한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위악을 하기 위해서는 선해야 한다는 어떤 전제도 필요하지

않죠.


그냥 위악을 하는 거지, 거기에 무슨 선이 필요합니까?


이런 개독넘들의 대가리 속에는 이분법적인 사고방식

기원적으로는 조로아스터교의 영향부터 헬라의 영향까지 받아

지금까지 내려오는 거죠.


얘들의 대가리 속에서는 다른 가능성은 없죠.


저처럼 개독과 같은 방식으로 대하면 되는 것을

그러지 못하니 참빛 님과 같은 심리 상태를 겪는 거죠.


아...



물론 어쩔 수 없긴 하죠.

시간이 필요하고 경험이 필요하니까...


개독은요...


손오공의 분신술과 같아요.

언제든지 어떤 잣대로 어떤 기준으로 마음대로 상대와 싸우죠.

이 잣대로 싸우다가 휙 사라지고 다른 잣대로 싸우고

상대가 결코 이길 수 없어요.

허깨비와 싸우거든요.


논리학에서는 '허수아비의 오류'라고 합니다.

물론 허수아비의 오류는 개독들이 아주 쉽게 또한 자주 범하는 것이죠.



눈을 크게 뜨고 허수아비와 허깨비를 골라 내세요.

참빛 님만 지칠 뿐입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얘들과 싸워서는 안 돼요.

얘들을 그렇게 만든 예수와 야훼를 조져야 해요.

예수는 이런 돌대가리들을 만든 책임이 있거든요.



그러니까 빌립이든 창진이든 개독들은 자기들의 주장은 진리이고

남의 주장은 그냥 주장이다 이런 개조까튼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어요.


그리고 논리적으로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 불합리한 것들은 아예

건드리지도 않고 질문을 해도 받지도 않아요.

그저 자기들이 하고 싶은 말을 할 뿐이죠.

혹은 대답이라고 하는 것들이 전부 정신병원에서 탈출한 것들이나

할 수 있는 말을 해 놓고 나는 다 밝혔다고 질할들을 하죠.


이런 이 놈들의 대가리 속 메커니즘을 이해해야 대응책이 나오죠.

애초 같은 인간이라고 보면 안 된다고 몇 번이나 말씀 드렸습니까?


문제는 이 놈들이 아니라니까요?

이런 놈들과 상대하는 참빛님의 방식이 잘못 된거에요.

저와 같은 방식은 담대하지 않고는 못 써요.


그냥 님의 성향대로 안 대하면 알력 때문에 힘들어져요.

이런 저런 경험을 거치시면 님 만의 독특한 또한 효율적인

개독처리방식을 깨닫게 됩니다.


좀 시간이 필요할 것 같네요.


.


힘 내시고...


전투 경험을 많이 쌓아야...


저처럼 10단계 개독들과 전투를 해 보면 빌립이나 창진군은 뭐 그냥

동네 꼬마 아이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죠.

아니면 좀 더 악랄한 개독들과 대화해 보시면 여기는 아주 쉬운 곳이라는 것을 아시게 될 겁니다.


상급자 코스에서 스키 타면 초급자 코스는 심드렁해지죠.^^


자...


심기일전 하시고...


오늘도 저런 돌대가리들을 만드셔서 마음에 짐을 얹고 사시는
우리 주님께 위로의 말씀을 드리면서

이만 글을 맺습니다.


할렐루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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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5
Philip Im (70.62.49.64)
2013-03-21 03:03:53
위악이란 위선입니다.
누군가와의 대화가 불가능하다하여 오직 "조롱"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다 보니 본의(?) 아니게 악한(?) 말을 사용하게 되는데 이를 일컬어 "위악"을 한다고 말합니다.

"위선"은 예수님께서 책망하신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선한 척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악한 행동을 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자신은 선하지만 조롱하기 위하여 악한 척(위악)하는 것 또한 잘못된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자신이 선하다는 전제하에서 이루어지는 것인데
근본적으로 선한 분은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악한 자입니다.

"어떤 관리가 물어 이르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눅18:18,19)

위악이란 위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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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2
참빛 (24.141.4.52)
2013-03-21 03:21:24
그만하쇼~
그럼 근본적으로 악한 임빌립?
그러니 지옥행이지...

하늘은 파랗습니다..
구름은 하얗습니다..
들판은 푸르릅니다..
무지개는 칠색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근본적으로 악한 자입니다..

이건 완전 좀비 스타일....

논리를 전개하셔야지,
허구헌날 이런말 천번을 떠들어 보아야 아무런 진척이 없습니다.

위악이고 위선이고.. 조롱만이 개독에게는 약이더라..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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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ip Im (70.62.49.64)
2013-03-21 04:05:06
처음 댓글 다실 때 참빛님의 모습 기억합니다.
자신의 잘못된(지금보다는 훨~씬 양호한) 댓글에 대하여 잘못을 인정하시던 분이셨죠.

그러나 지금의 모습은?

논리를 전개하라시는데 윗글에서 논리 전개가 잘못되었습니까?
그것을 지적해 주시면 알고서 고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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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빛 (207.210.3.147)
2013-03-21 09:06:51
죄송~
사실 어제 오늘 심기가 좀 편치 안아서요.
죄송합니다.. ㅠㅠ
꾸~~우~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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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이멘 (183.109.98.59)
2013-03-20 16:14:05
바로 그런 의미로, 저는 주님의 대속을 믿으며 예수님을 저의 구세주로 고백합니다. 주님을 알지 못했을 때, 저는 자신의 욕망만을 채우기 위한 이기적인 삶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부족하지만 하늘을 우러르며 사는 새로운 삶의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저의 옛사람이 주님의 십자가 위에서 죽고, 새사람으로 다시 살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저를 구원해주셨고, 지금도 제 마음과 삶 가운데 살아계십니다.

류상태 형제님의 믿음에 경의를 표합니다.

교리라는 것은 인간이 만들어 낸 것입니다.
자신들의 이득을 위해서...
천주교라는 이단이 만들어지고
천주교라는 이단은 정치권력을 가지고
초대교회의 성도들을 오천만명이 넘게 학살하였습니다.
초대교회의 삶을 사는 성도들에게 마녀사냥을 통하여
이단이라고 정죄하였고 학살하였습니다.

개신교에는 이런한 천주교의 교리를
그대로 전승하여 전통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천주교의 DNA를 가진 목사들이
교황이나 사제의 흉내를 냅니다.
자신들이 제사장이고
자신들을 통하여서 하나님을 만날수 있다고 합니다.
(이런점에선 이만희하고 똑같습니다.)
또한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대언자이고 설교권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축복권도 오직 자신들에게만 있다고 합니다.
복을 받기 위해서는 자신들에게 돈을 바치라고 합니다.
그러면 복을 받는다고 합니다. 마치 무당처럼...

이제는 이단 천주교는 종교를 통합하기 위해 에큐메니칼을 외칩니다.
적그리스도 천주교가 기독교가 될 수 있습니까?
교황제도, 마리아 숭배사상, 등 사람이 만든 교리를 다 버리면
기독교와 에큐메니칼이 될 것입니다.
종교 다원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습니다.

다른 종교를 존중할 수 있지만
그것을 통해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통합의 대상이 아니라
진리의 예수님을 전할 포교의 대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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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mail-x (112.222.123.131)
2013-03-20 15:15:08
진중권 교수가 지만원과 토론 중에 이런 말을 하죠.
.

"한국어를 못 알아먹으니 당최 이길 수가 없다."


개독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한국어를 표면적으로 쓰고 있지만 실은 자신들만의 언어(그것도 또 자기들끼리도 서로 이해 못해서 싸우고 지지고 볶는)를 쓰는 것입니다.

한국어를 했는데 상대는 알아듣지 못하죠.

그럼 대화가 안 되는 겁니다.

노력할 필요가 없는거죠.


사실 개독들의 언어가 자기들 끼리라도 소통이 되면 그걸 인정을 하겠는데 문제는 자기들 끼리도 전혀 소통이 안 돼요.


진짜 웃기잖아요?^^


자기들 끼리 막...


이게 진리다. 저게 성경적이다. 요것이 바른 신학이다.

저것이 바른 이해다 하면서 질할들 하지만 또 서로를 인정 하지 않죠.

그러니 이런 미치광이들 놀음에 신경 쓰면 놀아나는 것 밖에 안 되죠.


그냥 그렇거니 하고 웃어주고 즐겨주면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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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빛 (207.210.3.147)
2013-03-20 07:31:57
도끼님, 잘 알았습니다.
저는 개독들이 조금이라도 이성이라는 걸 가지고 있는 사람들로 착각했습니다.
문론 가끔씩은 임빌립님과 같은 그래도 대화를 시도해 보려고
노력하시는 분들도 더러 계신것 같은데요.
님의 말씀대로, 창진이라는 개독은 좀비더군요.
나름대로 공손히 대해 드리려 했었는데 ㅉㅉ

지난번 메일을 한장 날려달라 했던 이유도
님은 왜 조롱만 즐기고 진지한 면이 없는가를
사적으로 물어 보려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참 순진했던 거죠.

결국 개독의 교화는 커녕 대화 자체도 불가능!!!!
이렇게 (((대화 불가능))) 이라는 결론에 다다를 수 밖에 없는 냉정한 현실을 맞이하는군요. ㅠㅠ
참 무섭네요...

지금부터 저도 이성을 버리고 개독들처럼 헐뜻고 물어뜯고 해야할 듯합니다.
그러다 심신이 지치면 당당에 다시는 오지 않올 것이고 (이걸 개독들은 학수고대하고 있겠지만..)

앞으로는, 개독들에게는 이성적으로 절대 대하지 않을 것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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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진 (42.82.105.143)
2013-03-20 12:31:15
어이가 없네요
왜 자기 문제의 책임을 남에게 돌릴까나.
자신이 성경의 가르침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고
성경의 가르침을 왜곡시키며
엉뚱한 소리를 하기에 그것을 알려주는 것이건만.

기껏 해야 성경의 가르침을 잘못 이해하고 잘못된 주장하는 신학 사상이나 비판하고 있는 것이었을 뿐이건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잘못되었다고 한 적이 없고.
다만 그것이 그와 관련된 성경의 진술에 대한 전 신학 사상이 아니라고 한 것이고.
근데 그 말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자신이 가진 이해력의 문제였건만.

자신의 문제를 직시하세요.
괜히 남에게 책임을 돌리지 말고요.
그거 정신 건강에도 안 좋아요.

누가 헐뜻고 물어뜯고 했다고요?
자기의 엉터리 주장을 수용하지 않고 반박하면 다 헐뜻고 물어뜯는 것으로 생각하나 본 데, 착각에서 벗어나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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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빛 (24.141.4.52)
2013-03-20 13:58:21
개독의 소리는 개소리로 밖에는 않들려~~
((창진군과 앞으로 정상적인 대화를 하면 내가 성을 간다))


그럼, 슬슬... 시작해 볼까나~



창진군!
자네.. 난독증 증세에는
차도가 좀 있으신가?

오늘 또 발견한 건데
창진군 이제 기억력 쇠태증까지 보이던데 ㅉㅉ
거~ 뭐야
기억력 쇠태증 방지에는 모닝커피가 참 좋답니다~

.
.
.
아!
그리고, 거짓증언하는 버릇까지 생긴 모양이던데
이걸 어쩌나~

어느교회 먹사인겨?
거짓말하는 창진군에게 돈 좀 보태주러 그의 구멍가게로 나오는
바보 성도가 하나라도 있긴 허당가?
ㅋㅋㅋ




도끼님. 저 안떨고... 잘하고 있쪄?? ㅋㅋ 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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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진 (1.220.135.107)
2013-03-20 16:56:00
에효, 불쌍한 인간
닮을 걸 닮아야지. 쯧쯧쯧.

끼리끼리 잘 노네요.

참 신기해요.
어찌 그렇게도 닮은 꼴이 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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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끼 (112.222.123.131)
2013-03-20 15:06:28
근데 문제는...
.

이게 부작용이 커요.

자신의 성향과 맞지 않으면 안 하시는게 좋을 듯.

제퍼슨의 말을 깊이 새기되, 방법은 선생님의 영혼을 망치지 않는

방향으로 하세요.


조롱은 하지만 그들을 불쌍히 여겨야지요.

저는 수준 낮은 조롱이구요, 좀 더 멋있게 유머있게 할 수도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그럴 능력이 있으세요.


저들은 자신이 거짓을 하는 지도 모릅니다.

뇌에서 필터장치가 고장나 있거든요.

저들도 어쩔 수 없습니다.


제가 전에 말했잖아요.

박창진 씨는 이미 다른 곳에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난독증' 인증을

받은 사람이라고...



이게 박창진 씨의 문제라면 좋겠지만 99.9%의 개독님들은 같아요.

사실 박창진 씨는 착한 쪽에 속합니다.

임빌립 씨 역시 착한 쪽에 속하죠.


제 생각인데 참빛 님께서는 정말 기독교인의 모습을 아직 못 보셔서

그래요.


임빌립이나 박창진씨 같은 경우는 개독 중 겨우 1~2 단계 밖에 안 됩니다.

솔직히 이 정도 개독들만 있어 준다면 세상은 그다지 폭력적이지 않을 겁니다.

여긴 순둥이 개독들만 있어요.

상상을 초월하는 개독들을 경험하고 싶다면 얼마든지 소개시켜 드릴 수 있습니다.

.

여하튼 저처럼 조롱하시면 마음이 힘들어지구요.

선생님에 맞게 온유하게 대하셔도 됩니다.

안 맞는 거 하려면 힘들어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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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 가게 ... (112.222.123.131)
2013-03-20 13:24:51
손님 너무 없어요.
.

내가 어떻게 마수는 했는데...

사람이 너무 없어요.

다음부터는 그냥 댓글 전문 하시고 가게는 열지 마셔요.

장사가 안 돼도 너~~~~~~ 무~~~~~~!!!! 안 돼...


.


어떻게 해봐요.

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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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가지 팁을 가르쳐 드릴게요. (112.222.123.131)
2013-03-20 09:33:47
위선 말고 위악을 하세요.
.

개독들이 정신병자(실제 정신과 전문의들이 밝히는)나 망상병자
혹은 사이코패스가 압도적으로 많은 이유는요, 이들이 억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메커니즘은 간단해요.

야훼랑 예수랑 개독들에게 하는 말들이 가관이거든요.

이거하지마라 저거하지마라 이거하면 죽는다 저거하면 뒤진다


이런 상태에서는요 내부의 알력으로 견디지 못해요.

우리가 아이들 기를 때 칭찬하고 세워주고 함께 해주면 아이가 바르게
성장하겠죠.

하지만 뭘 하려고만 하면 이거 안 돼 저거 안 돼 그거 하면 혼나
여기서는 얌전히 있어 이런 식으로만 말하면 아이는 위축되고
감정적인 억압이 생기죠.


게다가 왜 해서는 안 되는지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서 어떤 설명도 없이
행한다면 아이는 부정적으로 자라기 쉽상이죠.


몇 달 전 힐링캠프에 '김정운' 박사가 나와서 김제동에게 위선을 하려니까
힘든거다. 위악을 하면 마음이 편할 것인데...


라고 말합니다.


누군가에게 착하다 선하다 올바르다 라는 평가를 받고 싶어하는 사람은
거기에 맞는 삶을 살아야 하기에 무척 힘들죠.

이게 하루이틀이 아니라서 마음에는 알력이 생깁니다.


제가요. 재미있는 이야기 아니지 재미없을 수도 있겠다.

교회 나간지 얼마 안 될 때...

교회 봉고차 타고 어디를 가는데 남자만 저를 포함해서 5명 정도 탔어요.
근데...

지나가면서 전부 여자들 다리나 뒷모습 보고 한 마디씩 하는 겁니다.
저는 안 그러거든요.

솔직히 놀랐습니다.

그런 생각이야 하는 건 당연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이야기를 하다니...


사실 교회에서는 자신이 가진 가장 온화한 모습만 보일 뿐이죠.
너도 나도...

하지만 그들도 실제 할 거 다 합니다.


그리고 개독들 뇌 mri 찍어보면 분명 폭력적 감정에 해당하는 부분이
많이 활성화 되어있을 겁니다.

이건 추측이지만 전 확신합니다.
표본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확실하겠지요.

혹시 시간 있으시면 범죄학 읽어보세요.
거기서 극강의 포스를 자랑하는 싸이코패스들 보면 거의
기독교인들입니다.

뭐 다른 예를 들 것도 없어요.

쥐새끼 MB를 비롯해서 고소영 중의 '소'에서 내각을 하거나 관료를
하려는 사람들 한 번 기록 보시죠.

기도 안 찹니다.

그 '소'가 아닌 자들도 대부분 개신교인들이죠.
이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보세요.


'스케이트'를 훈련해야 하면 고되고 하기 싫죠.

하지만 우리는 돈을 내고 웃으면서 탑니다.

이건 좋아서 하는 것이죠.


마찬가지로 참빛 님은 어떤 목적(물론 순수하고 정의감이 있는)으로
개독들 상대하니까 그렇게 힘든 겁니다.


'좀비'를 피해다니고 이들을 고치려고 애를 쓰니까 힘이 드는거지
영화에서와 같이 이들을 사냥하는 사람들을 이런 상황을 즐깁니다.

이들과 상대할 때 심신이 지친다는 것은 여기에 에너지를 쏟기 때문이죠.
에너지 쏟을 이유가 없다니까요.

그냥 즐기세요.

재미있어요.


예전에 뉴조에서 박창진 씨와 다른 분들이 막 싸울 때 얼마나 재미있었는데요.

저는 가끔 들어가서 촉매제 역할만 하면 되는거에요.

사실 이것들 말도 안 되는 개소리들 지껄이거든요.

그게 중요합니다.

의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이들이 지껄이는 개소리를 봐야해요.

그래야 '아, 기독교인들이 이런 존재들이구나'하고 깨닫게 되죠.

전염 안 된 사람들에게 기독교인의 독단성 폭력성 무지 등을 확인시키는데
좋은 자료가 되는 겁니다.

이런 곳에 글을 쓰는 이유는 이미 전염된 좀비들을 되돌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전염이 안 된 정상인을 보호하려고 하는 것이죠.

정상인들이라면 생각이라는 것을 할 수 있으니 얼마나 개독들이 한심한지
알 수 있으니까요.

정상인들이라면 기독교에 대한 편견이 별로 없으니 있는 그대로 볼 확률이
많죠.



전에 그런 비유를 자주 했는데

산타클로스가 있다고 믿는 5살 짜리 아이에게 서울대 철학과 교수가
그런 것은 실재할 수 없음을 아무리 논리적 합리적으로 설명을 한다
해도 아이를 설득할 수는 없습니다.

사실 참빛 님과 같은 분은 마치 서울대 철학과 교수가 하는 수고를
되풀이 하는 셈이죠.

아이가 설득 안 되고 대화가 안 된다고 짜증내면 아이 잘못이 아니죠.

설득이나 설명을 시작한 쪽이 잘못이죠.

그냥 이 아이에게는 동화책을 같이 읽어주면 되고 플라스틱으로 만든
칼로 놀아주면 됩니다.

왜 상황에 맞지 않는 짓을 해 놓고 상대방을 탓합니까?^^


자...

인생은 즐길만 합니다.


살면서 온갖 악행을 저지르고 성폭행을 하고 살인을 해도 죽기 전에만
회개하면 천국 보내준다는 든든한 종교가 있는데 이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입니까?


저는 기독교의 마력, 매력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마약이죠.


자...


그러니 즐기세요.


인조이 유어 라이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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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평일 (72.196.234.24)
2013-03-20 22:24:19
찔래꽃은 아무리 정성을 다해서 기르고
가꿔도 장미꽃으로 변하진 안습니다.
그것이 바로 자연법칙이지요.

"얼마전에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는 목사들은
어떤 분야에서 일해도 존경을 받을 인격자들이다"는 말씀을
PICKY 님이 하시더군요. 저도 그분의 경험에서 나온
주장에 공감을 합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것들은
있는 그대로를 현실로 받아들이고
차라리 즐겨라" 하는 말이 있지요.
어떤 분이 정원잔디밭에 하도
빠른 속도로 번식하는 민들레가
눈에 거슬려서 별별 방법을 다 동원해서
없애보려고 노력했답니다.
몇 달 지나고 나면 결과가 마찬가지였지요.
그래서 지쳐서 결국 양손을 들고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그 집주인의 하소연을 들은 전문정원사가

"그렇게 어쩔 수 없은 민들레꽃라면
차라리 즐기십시요" 하는 조언을 했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자기자신까지 골지아픈 민들레로 변할 필요는
없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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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ip Im (70.62.49.64)
2013-03-20 05:11:39
참빛님, 질문
님께서 다음의 삼단논법을 제시하셨는데 무슨 종류의 삼단논법인가요?

"1. 아담이 선악과를 먹음으로 범죄하였다
2. 그래서 그 후손들은 모두 원죄를 안고 태어난다.
3. 그 죄를 씻는 방법은 오로지 예수의 피흘려 죽음의 대속뿐이다.

1항은 대전제, 2항은 소전제, 그리고 3항이 결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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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빛 (207.210.3.147)
2013-03-20 09:08:13
모든 삼단논법이 전부 100% 맞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먼저 알려드리고 싶군요.

그러나, 두가지의 전제가 (PREMISE)가 거짓이면 결론은 결코 참이 될 수 없습니다.

아마도 님의 질문은 저의 전제가 사실적인가, 가상적인가, 아니면 선언적인가를 묻는 것으로 이해 하는데요. 그러한 견지에서 보면 저의 삼단논법은 선언적인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떤 종류이던 간에 두가지의 전제가 맞아야만 결론이 틀리고 맞고의 타당성을 추론하는 것이지
두가지의 전제가 모두 틀릴 경우는 참된 결론에 다다를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좋은 질문에 감사 드립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음으로 범죄하였다는 성경에 쓰여져 있지만
저는 그것을 액면 그대로는 믿지 않습니다.
신화적인 내용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이 죄라는 가르침에는 기본적으로 동의 하지만
실재적으로 아담이 있었고 선악과가 있었고 이런 환상적인 내용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고로 저는 제 1 PREMISE가 틀렸다고 보는 것이죠.

두번째의 전제도 역시 제가 여러차례 댓글을 통해 말씀드렸다시피
죄라는 것은 관념입니다.
이것은 한세대에서 다음세대로 옮겨간다고 결코 생각하지 않습니다.

고로, 2번 역시 저는 틀렸다고 보는 겁니다.

그렇다면, 결론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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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0
Philip Im (70.62.49.64)
2013-03-21 01:26:11
물론 삼단논법이라 해서 형식은 맞아도 내용은 잘못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형식도 내용도 잘못된 경우입니다.
님이 제시하신 삼단논법의 경우 내용면에서보다 형식면에서 파격적이라 어떤 종류의 삼단논법인가 질문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람은 죽는다.
임빌립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임빌립은 죽는다"에서
"죽는다"가 매개념이라할 때
님의 논법에서 매개념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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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빛 (24.141.4.52)
2013-03-21 03:51:24
논법은 제가 쓴 것이지만
내용은 정통기독교에서 수백년간 늘상 주장해온 그대로 입니다.

형식에 치우치지 마시고..
각각의 전제들이 맞다고 생각하시면
왜 맞는지를 논증으로 증명하시기 바랍니다.

각 전제들이 우선 맞는 말이어야
다음으로 결론이 맞던 틀리던 알아 볼 수 있는것 아니겠나요.

이미 박창진씨도 그의 댓글에서 유전론은 틀렸다고 인정하였습니다.

지난번 임선생과 제가 한참 대화했던 진실과 사실에 대하여 상고해 보시고 원죄론이 진실인가 사실인가 부터 알아 보셔요. 역시 유전론도 마찬가지구요. 만약 유전론이 틀린 것이라면 유전론의 약점을 커버하기 위해 고안해 낸 대표론은 왜 틀릴 수 밖에 앖는 것인가도 생각해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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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ip Im (70.62.49.64)
2013-03-22 04:04:54
아담이 선악과를 먹음으로 범죄하였다에 대한 저의 의견
일단 논법은 님께서 자유롭게 쓰신 것으로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위에서 제시하신 내용은 삼단 논법을 떠나 각 문장마다의 내용에 대하여 "왜 맞는지를 논증으로 증명하시기 바랍니다."는 말씀대로 하라는 것이군요.
더불어 "형식에 치우치지 마시고.."에 유념하여 논증을 하라시니 그리 해보도록 하지요.

"1. 아담이 선악과를 먹음으로 범죄하였다"에 대하여 말씀드리지요.

이 부분에 대하여 신화적인 차원에서 접근을 해 봅니다.
사실을 떠나 진실의 차원이지요.

창세기 2장 17절에 보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이 알씀을 신화적인 차원에서는 어떻게 해석할까요? 사실 신화적인 차원을 떠나 선악과가 무엇인지, 그것을 먹는 행위가 무엇인지, 죽는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도 다양하기 때문에 제가 ㄱ으로 알고 설명을 드려도 님은 ㄴ으로 알고 틀렸다고도 할 수 있으니 그런 점에 대하여 구구히 설명하지 않음을 양해바랍니다.

아예 사실이 아니므로 잘못되었다고 하지 않는다면 진실은 아담이(존재하든 하지 않든) 곧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여 죽음을 맞이했다고 보는 것이 신화적인 해석일 것입니다. 그것이 진실이겠지요. 이것이 신앙적 도약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해석 외에 다른 해석들이 무수히 많다는 것입니다. 정통적(?)인 해석 외에 신화적인 관점에서 각각 다양하니 어느 것이 딱히 옳다고 할 수 없지요.

그러나 굳이 정리하자면
첫째 그 사건을 실제로보는 것
둘째 신화적인 사건으로서 진실이 있는데 그것은 사람이 범죄했다는 것
셋째 그 사건은 실제도 아니고 진실도 없다는 것
으로 압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셋째는 논외로 할 것은 아예 성경 자체를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남은 것은 첫째와 둘째인데 성경의 말씀이 사실이든 신화 속의 진실이든 사람은 범죄했다는 것이 저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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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mail-x (36.38.199.252)
2013-03-19 23:16:23
왜 글 쓰냐건 웃지요.
.


인간이라면...
이런 과정을 거칩니다.

처음에 보수신학을 접하죠. 사실 보수신학이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그냥 자기가 나가는 교회가 보수교회일 확률이 99%가 넘으니까요. 나중에 어떤 계기로 진보나 자유신학을 접하면서 패러다임의 전환을 맞습니다. 그러면서 우매한 개독 성도들을 일깨워야겠다는 어떤 사명감 같은 것이 생기죠. 그래서 뭐 당당이든 뉴조든 혹은 안티사이트건 혹은 기타 기독교 사이트에 글을 올리곤 합니다.

이 과정에서 정중한 어법을 쓰고 예의도 지키기도 하고 논리적 합리적 이성적으로 접근하면서 상대에게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고 설득하려고도 하지요. 그러나 결국 그 어떤 인간의 노력으로도 폭력이 아닌 이상 개독들을 되돌릴 수 없다는 깨닫게 됩니다. 이 과정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저 같은 경우는 약 5개월 걸렸죠. 제가 목사가 되겠다고 결심한 그 때 이미 개독들은 무엇으로도 되돌릴 수 없는 좀비와 같은 존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니까요.

생각해보시면 알게 됩니다.
많은 위인들이 기독교에 대해서 쓰신 글들을 음미해 보십시오.
과연 그들이, 참빛 님이나 피키 님 보다 지력이 부족해서 한결같은 결론을 내고 있을까요?^^
저는 <천주실의> 읽어보고 나서 지금의 개독들이 400년 전의 개독들 보다 훨씬 무식하고 비논리적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천주실의는요, 마테오리치가 당대의 중국학자들을 상대로 대담했던 글이라서, 지금 참빛 님이 보시는 여기 개독들의 수준과 비교하시면 안 됩니다. 정말로 뛰어난 당대의 석학들이었습니다. 리치가 대담한 사람들은요... 지금 여기 무식한 개독놈들 말고 우리나라 웬만한 신학자들도 범접하기 어려운 수준의 분들이죠.

당당이든 뉴조든 이슈가 되는 논의들의 해석능력을 보면 참 솔직히 그저 웃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렇게 글을 쓰는 이유요?^^

저는요...

솔직히 개독교 때문에 엄청 공부를 많이 한 경우입니다.
제가 읽은 신학 철학책만 해도 쌓아두면 끝이 없을 겁니다.
그렇게 읽어야 하는 줄 알았어요.
그러던 어느날 신학 공부를 완전히 손뗐죠.
무의미 하거든요.

제가 보기엔 피키님은 개독들을 교화시키려고 글을 쓰시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개독들은 결코 교화시킬 수 있는 존재가 아니거든요.
저 역시 개독들의 개화를 위해 글 쓰는 것이 아닙니다.

특정 인물을 찍어 이야기해서 좀 그렇습니다만 박창진 씨는 여러 사람들이 대화불능자라고 이미 결론을 내린 상태입니다. 물론 개인적인 감정은 없어요. 이게 뭐 저한테 칼을 겨누거나 송곳으로 찌르는 것이 아니잖아요? 사실 박창진 씨가 참 안됐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아요.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아요. 단지 무식하고 고집이 셀 뿐이지...

문제는 보수기독교인은 거의 대다수가 박창진 류입니다.
오십보 백보에요.

잘 보세요...
이전의 모든 선각자들이 참빛님보다 못해서 개독들을 교화시키지 못한 것 같나여?^^

이건요, 개독들을 무시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원래 그런 겁니다.
인간의 노력으로는 개화가 불가능한 존재들이라구요.
이미 전염이 되어버린 좀비들이라구요.

이들이 차분하게 글을 쓴다고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고 여기는 그 순간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됩니다. 솔직히... 도무지 이런 착각에서 다들 벗어나지 못 하시는 것 같습니다.

저는 글 쓸 때 상대가 인간이라는 생각 안 합니다.
그게 안 돼요.
이건 상대를 무시하거나 함부로 대하는 것이 아니에요.
인간이 아니니까 그렇게 대하지 않는 것 뿐입니다.
제 말이 심하다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건 심하고 안 심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냥 이게 사실이기 때문이죠.

얼마 전에 말했지만
‘모든 까마귀는 검은색이다’
라는 명제가 거짓이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는
단 한 마리의 흰 까마귀를 보여주면 끝나죠.
더 이상 어떤 것도 필요없습니다.

참빛님 바퀴벌레 잡으실 때 뭘로 잡으세요?
레이드? 에프킬라? 파리채? 공책?
혹시 박격포나 m16 소총을 쏘지는 않으시나요?

놀이터에서 모래성 허물 때 굴삭기를 쓰시나요?
그냥 손으로 툭 치면 되는 거죠.

시간이 흘러야 알게 되겠지만 개독들을 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조롱’이라는 것을 결국 깨닫게 되죠.^^

‘이해 불가능한 명제에 맞서는 유일한 무기는 조롱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유일한’ 이라는 단어죠.^^

‘가장 좋은’ 혹은 ‘가장 효과적인’이란 표현 대신에 왜 ‘유일한’이라는 단어를 굳이 사용했을까요?^^

이런 거 궁금하지 않으세요?^^
저는 이런 글을 쓴 제퍼슨의 심리를 읽는 것이 재미있던데요.^^

제퍼슨이 봤을 때 ‘조롱’이외의 어떤 방법도 결국 효과가 없을뿐더러 시간낭비라고 봤기 때문입니다. 제퍼슨의 주장은 현대 심리학이 확실하게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사실 제퍼슨을 대표적으로 이야기했을 뿐 다른 위인들도 결국 비슷한 이야기만 하시는 거죠.

여기서 있는 논의들이나 신학적 논쟁들은 저 역시 이미 오래전에 공부 다 한 내용들이죠.
물론 뭐 다 안다고는 못합니다. 제가 공부 못한 부분도 있고 또 하도 오래되어서 기억이 가물한 부분도 있지만 적어도 토할만큼 공부를 했었기에 낯선 것은 없어요.

저는 실은 여기 글들 잘 안 읽어요.
이미 이런 식의 논의는 수없이 반복되어 왔고 달라진 것은 혹은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거든요.

여긴 마당놀이와 같아요.
그냥 재미있게 놀면 되는 겁니다.

개독들이 인간인 척 하면 그래 뭐 그러자 하면서 맞춰주시구요.
심심하면 억울해서 방방 뛰는 척 하구요.
또 귀여워도 해주고...

뭐 그런 겁니다. zz^^

말뚝이와 광대들이 정치인들과 종교권력자들과 부자들을 조롱할 때 뭐 논리적 이성적 합리적인 고발기사를 쓰나요?^^

좀비들은 다룰 존재지 이해하거나 토의하거나 대화할 상대가 아닙니다.

제가 초등학교 5학년 이상의 글을 잘 안 쓰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사실 워낙 개독들과 오래 관계 맺고 맞춰 놀다보니 어느새 이 개독들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게 된 이유도 있어요. 사실로 고백합니다.

야훼가 6일 만에 세상을 만들고 흙으로 사람을 만들고 홍수를 일으켜 노아와 동물들을 살렸다는 정말 딱 5살짜리 유치원생 수준의 믿음을 가진 놈들에게 무슨 초등학교 5학년 이상의 지식이 필요합니까?

개독들과 대화를 하겠다고 하면 인생이 피곤해지는 거구요, 그냥 이건 놀이에요. 스포츠.
임빌립 씨도 인정했잖아요. 평생 교회 다니며 돈 내고 몸 바쳐, 여성도들은 빤스내리고 남자 성도들은 집문서 땅문서 바치면서 천국 가는 거나 나 도끼같이 실컷 악행을 저지르다가 죽기 전에 천국 가는 것이나 똑같다구요.

이런 상황에서는 이런 신학적 논의가 완전 무의미 하죠.
신학 다 없어도 됩니다.

사실 제가 볼 때는 참빛 님을 비롯한 여기 분들의 논의는 구구단도 못 외면서 미적분 푸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여기 개독들 보니까 연역법이 어쩌고 좋아하던데 진짜 웃기잖아요.
연역법에서는 가정이 틀리면 그 후의 어떤 논의도 무의미 하다는 것을요.

왜 무의미한 논의들을 하시죠?
저는 그게 이해가 안 될 뿐입니다.

제가 당부드리고 싶은 말씀은

그냥 즐겨라!
개독과의 대화는 그저 스포츠로 생각하라.


.














뱀발 : 세상에 얼마나 재미있는 학문이 많습니까?

심리학, 철학, 역사학, 민속학, 수학, 물리학, 미학, 경제학, 경영학, 행정학, 정치학, 미술사학, 미디어학 등 사실 이루 말할 수 없죠.

세상이 얼마나 재미있습니까?
저런 흥미있는 학문들을 개독들은 배설물로 여긴다는 것이 말입니다.^^

그러니 박창진을 비롯한 빌립 등등...
무식할 수 밖에요.


.








개혁본부 넌 좀 빠져라.

어른들 이야기 하는데 끼는 거 아니다.

말 안 들으면 졸라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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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진 (42.82.105.143)
2013-03-20 12:24:24
아, 한가지
난 네 댓글 다 읽고서 내 의견을 개진하는 것은 아니란다.
그냥 한번 훑고 눈에 들어오는 내용이 있으면 그에 대해서만 글을 적는 것이란다.
그러니 내가 언급한 부분 외의 내용들은 수긍한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 꼭 알아주렴.
나머지 글의 수긍으로 생각하면 아니 아니 아니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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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장 (112.144.1.108)
2013-03-20 16:34:43
박창진 님
몇번이나 망설이다가 댓글 답니다.
가능하다면 독자들과의 대화시 감정을 드러내거나 반말사용 등 공격적 언어를 삼가해 주셨으면 합니다.
익명의 독자들이야 그럴 수 있다하지만 책임있게 글쓰기 하는 당당필진이 같은 방법으로 대응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여겨집니다.

감사합니다.
운영자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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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진 (1.220.135.107)
2013-03-20 17:12:10
알겠습니다.
다만 한가지 토마스 제퍼슨이 삼위일체를 3=1로 설명하는 목사들에 대한 대응은 조롱 밖에 없다고 하였지요.
전 그것에 대해 인정합니다.

동시에 이곳의 토끼와 같은 이들에게도 마찬가지로 해당된다고 생각하지요.
조롱...

그래도 존중하여야 한다는 지적을 따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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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든지 말든지 (112.222.123.131)
2013-03-20 13:05:12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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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진 (42.82.105.143)
2013-03-20 12:21:32
돌아 돌아 ~ 돌아
성경의 진술에 의하면
"심리학, 철학, 역사학, 민속학, 수학, 물리학, 미학, 경제학, 경영학, 행정학, 정치학, 미술사학, 미디어학 등"을 배설물로 여겨야 한다고 했고
그래서 개독들이 그것들을 배설물로 여긴다라고 하면
말이 성립되고
그것을 배설물로 여기는 개독들의 모습에 대한 책임은 성경에 있겠지.
즉 그렇게 기록한 기자 나아가 영감으로 그것을 기록하게 한 하나님께 있겠지.

그런데 말이야, 돌아 돌아.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빌 3:8).
여기에서 배설물로 여긴다는 모든 것은 일반 학문을 가리키지 않는단다.
그 앞뒤의 구절들을 제대로 한번 읽으나보렴.
공부 좀 하고 글을 적으렴.
그 구절들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배설물을 일반 학문이라고 하는 목사가 있다면 그건 그의 문제지.
그게 모든 목사의 문제는 아니란다.

내가 항상 네게 말하잖니.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고.
뭐에 하나 꼽히면 그게 전부인 양 생각하지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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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끼 (112.222.123.131)
2013-03-20 13:22:36
박창진 목사님
.

저는 천국에 갈 수 있을까요?

목사님은 그 어떤 사람보다 바른 신학을 알고 있는 분 같은데...

내가 교회 안 다니고 마음대로 방탕하다가 죽기 전에 회개하면

천국 갈 수 있나요?


답변 부탁드립니다.


긴 설명해서 헷갈리게 하지 마시고

-사실 님의 긴 설명은 다른 사람도 잘 못 알아듣잖아요-


단답형으로

그렇다 / 아니다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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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진 (1.220.135.107)
2013-03-20 17:07:09
단답형으로요.
네 회개가 십자가의 한 편 강도와 같은 회개로 주 예수님께 인정을 받으면 천국가지요.
당근 주 예수님께서는 네 회개의 진정성 여부를 정확하게 판단하실 것이고요.

내가 보기에 네가 지금과 같이 사는 한에는 네 회개에 진정성이 없을 것이기에 천국갈 수 없지요.
하나님이 네 손의 손오공과 같이 네 마음대로 요리할 수 있는 분이 아니시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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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빛 (24.141.4.52)
2013-03-20 21:08:15
간만에 바른말 하셨소이다
본인의 말 그대로라면,
창진군이 천국갈 확률은 현재로선 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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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진 (42.82.105.143)
2013-03-21 13:07:59
고건 그대 생각이고요
뭔 제대로 된 근거를 가진 주장을 하여야지요.
그 상태에서 벗어나야 한답니다.
제대로 된 근거가 뒷받침된 주장을 하셔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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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할까봐... (36.38.199.252)
2013-03-19 23:27:28
도끼가...
.

피키님이나 참빛님보다 지식이 낫다거나 똑똑하다는 거 아닙니다.

두 분이 저보다 훨씬 학문적 깊이가 있으세요.

다만 적어도 '조롱'에 있어서는 제가 앞선다고 감히 자부하기에 글

올립니다.


글 보면 알 잖아요.

수준.



피키님 >>>>>>>>>>>> (넘사벽) >>>>>>> 도끼 >>>>> (넘사벽) >>>>> 개독들


.


뉴조든 당당이든 딱 초등학교 5학년 수준만 되면

'왕' 해먹습니다.

그 이상의 지력은 아무리 봐도 쓸데 없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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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빛 (24.141.4.52)
2013-03-20 22:51:42
질문!
당당에서 처음 보는 단어들을 접할때가 종종 있습니다.
넘사벽이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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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도끼 (112.222.123.131)
2013-03-21 11:06:06
참빛 형제님...
.


궁금하시면 500원을 제게 주시든가 아니면

주님께 기도하십시오.

주님은 님의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전심전력으로 기도하시면 주님은 들어주십니다.


.




















하지만 ...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이 없으시면




.

































다음이나 네이버에서 검색하세요.



다음과 네이버 님께서 주님보다 빨리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응답 받으셨으면

저 도끼에게 내공 100 정도 주시는 것 잊지 마시구요~!^^


오늘도 좋은 하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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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빛 (207.210.3.147)
2013-03-19 08:47:12
족보가 다른 이유는 무었일까요?
류목사님의 본문에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저자들은 서로가 다른 예수의 족보를 말합니다.
본문을 통해 말씀하신 다음의 내용에 제가 보충설명을 드리고자 합니다.

[마태복음의 족보는 아브라함부터 예수님의 아버지인 요셉까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고, 누가복음에서는 요셉에서 시작하여 아담까지, 그 위로는 하나님까지 거꾸로 올라가며 기록되어 있지만 양쪽의 차이는 이것만이 아닙니다. ]

[아브라함에서 다윗까지의 계보는 두 복음서가 거의 일치하나 그 다음부터는 후손의 이름이 거의 일치하지 않습니다. 이름이 같은 사람이 몇 사람 등장하지만 세대가 다르고, 무엇보다 아담에서 요셉까지의 계보가 마태복음에서는 60대인데 누가복음에서는 75대까지 이어집니다. 혹자는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아버지인 요셉의 족보, 누가복음은 어머니인 마리아의 족보를 따른 것이기에 서로 다르다고 주장하지만 그런 암시는 복음서 어디에도 없습니다. ]




먼저 집고 넘어가야할 사실은, 구약에서 누누히 명시한 대로 메시아는 반드시 그리고 예외없이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저 천한 백성중에 한 분이셨고, 실재로는 다윗왕의 후손이 아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렇기 때문에, 두 기자는 예수를 메시아화 시키려 시도하였던 것은 아닐까요? 그러려면 족보가 필요했을 겁니다. 예수가 다윗의 후손이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 합당한 족보 말입니다. 불행히도, 두 기자는 서로 다른 연대에 다른 장소에서 각자의 복음서를 썼었죠.

결과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서로 다른 내역의 가짜 족보가 만들어 지게 된 것입니다.
마태의 족보나 누가의 족보 둘 다 짜집기하여 만들어 낸 족보이지
실재적인 다윗왕가의 족보는 아닌것 같습니다.

더하여, 분명히 예수님은 요셉의 피를 받지 않고 성령으로 잉태 하였다 합니다.
이는 더더욱 예수가 메시아가 아니라는 주장에 불을 지펴주는 꼴이 되고 맙니다.
설사 요셉이 다윗왕의 후손이라고 하더라도,
예수가 요셉의 피를 한방울 받음이 없이 태어났으니 다윗의 후손이 될 수가 없지요.

마리아 쪽이 다윗의 후손이라고 한다 할찌라도,
마리아는 남정네의 정액없이 예수를 잉태하였음으로
이러한 경우 예수는 완전한 하나님이자 완전한 인간이었다는 말을 무색하게 해 버립니다.

완전한 인간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DNA를 다 받아야만 완전한 인간인 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잉태(?) 되었다 한다면 성령은 남자의 정액을 가졌다고 볼 수 없음으로
마리아 쪽의 DNA만 받고 태어났다는 말이 됩니다.
이게 생물학적으로 가능합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이 아니라 반쪽만 인간이라는 말이 되는데요.

만약 반쪽 인간의 예수가 참이라면,
다음으로 대속론에 인간이 아닌 어떤 반쪽이 인간의 죄를 사할 수는 없는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연줄연줄되는 일이 벌어 지는 것이겠죠.

어떻게 된 것일까요?
무엇이 진실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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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cky (76.23.169.116)
2013-03-20 14:12:06
한 가지 힌트를 드리지요.
마태와 누가의 족보는 영적 계보입니다. 히브리어를 이해하기 전에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구약에 보면 어떤 인물을 소개할 때에 "누구의 아버지이며 누구의 손자이고 누구의 아들인 누구 누구...'라고 소개를 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하느 경우가 많습니다. 신학자들은 이런 경우를 가지고 유대인은 족보를 중요시 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인물을 소개한다고 하지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구약시대에는 그런 족보의 개념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은 모계사회입니다. 부계사회가 아닙니다.

하지만 신학자들이 이런 착각을 한 이유는 히브리어에 대한 이해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어는 모든 이름과 지명이 다 의미가 있는 말입니다. 모세는 역사적인 물이 아닙니다. 모세라는 인물을 통해 출애굽의 역사가 나타난 것이 아니라 출애굽이라는 상징적 사건을 구약의 기자가 쓰기 위해 물에서 건져낸 자라는 의미의 이름을 생각해 낸 것이고 그것이 모세입니다.

다른 인물들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강이나 호수나 그 이름에는 다 의미가 있습니다. 그 사건의 의미를 부각시키기 위해 그런 이름이 있는 지명이나 인물을 등장시키면서 사건을 구성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갈릴리 바다는 바다가 아니라 호수입니다. 고대인들이라고 호수와 바다를 구분 못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바다가 지니는 상징적 의미를 부각시키기 위해 호수를 바다라고 부른 것입니다. 그리고 갈릴리란느 이름도 '둥글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즉, 갈릴리 바다라는 말을 히브리 사람이 들으면 둥근 세상이라는 뉘앙스를 느낍니다. 바다는 세상을 상징하기 때문이죠. 따라서 예수가 둥근 세상의 중심이 아닌 그 주변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상대로 복음을 가르친 것이 머리속에 그림으로 그려지는 것입니다.

예수가 바다위를 걸어가는 장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을 기적이니 어쩌니 말하는 교회의 먹사들의 소리는 귀에 담을 필요도 없습니다. 예수가 바다위를 걷는 장면은 예수가 바다로 상징되는 이 세상을 벗어난 것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예수를 좇아 베드로가 몇 걸음 물위를 걸어보지만 금새 빠지는 것 또한 상징적 의미를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아무리 수제자라고 하지만 인간인지라 세상에 빠지기 쉽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죠.

님은 제가 상징적인 해석을 할 때에 많은 거부감을 보이시지만 저는 그냥 '대강 이럴 것이다'라고 상상하면서 이런 해석을 연구한 것이 아닙니다. 매우 과학적이고 고대 언어학분야에 권위가 있는 전문가와 함께 십년 가까이 연구하면서 여러가지 언어학적 분석과 문헌학적 자료에 근거해서 얻은 결과입니다. 이 분야의 연구는 이제 막 시작했기 때문에 심지어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아직은 세상에는 이런 연구가 진행되는지도 잘 모릅니다. 더군다나 신학과느 관계없어 보이는 분야에서 이런 연구가 진행되기 시작했으니까요. 제가 지금까지 아주 드물게 성경의 한 두 구절만 가지고 성징적 해석을 언급하였기 때문에 별로 설득력이 없어 보일 것이라는 것은 잘 압니다. 십년이 넘게 연구한 결과를 말씀 드린다면 성경의 전체의 해석 가운데 컴퓨터로 분석하는 과정이 약 75%는 진행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얼마전까지의 자료만 가지고 보아도 기독교가 말하는 성경의 이해는 정말 아이들 수준의 이해입니다.

이것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예를 들겠습니다.

아주 오래 전의 중국이나 한국 그리고 인도의 사상을 보여주는 고전들을 아실 것입니다. 공자나 노자나 장자 그런 사람들의 책 말입니다.불경도 마찬가지구요. 그런 사람들이 지니고 있던 우주관이나 철학을 볼 때에 우리가 이해를 하지 못할 정도의 깊이를 느낍니다. 고대인이 보는 이 세상의 이치와 원리가 과학을 소유하고 있는 우리의 눈으로는 감히 따라가지 못할 정도의 깊이를 실감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을 쓴 고대 사람들은 어땠을까요? 그 사람들도 구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구약과 동양고전의 차이는 문학적 표현과 언어의 구조의 차이일 뿐입니다.

중국어 한자는 상형문자로서 그 글자의 모습만 보아도 어느 정도 의미가 상상이 갑니다. 그래서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예를 들어 주역의 기본개념이라고 할 수 있는 무극, 태극, 황극의 개념을 설명할 때에 極이라는 한자만 보면 지붕 아래 사람이 있고 집 옆에는 나무 하나가 있는 형상을 그린 것입니다. 따라서 극이란 작게 보면 집의 맨 위쪽이고 우주로 보면 우주의 지붕 꼭대기 입니다. 이것은 기하학적인 모양을 보여줍니다. 또 무극이라 할 때의 무는 없을 無입니다. 이 글자는 원래 화려한 옷을 입고 춤을 추는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소매에 뭔가 주렁주렁 달린 무희가 춤을 추는 모습입니다. 즉, 춤을 추며 무아지경에 빠지는 무희의 모습을 보면서 고안해 낸 글자입니다. 우리가 보통 아는대로 그냥 없다(void)는 의미를 넘어선 철학적인 글자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듯 해탈과 무아의 경지라는 철학적 개념이 들어가 있는 개념입니다. 인도의 열반도 이와 유사한 개념이구요. 따라서 무극이란 글자를 한자로 보면 그 의미가 형상적인 글자에 투영되어 읽는 사람은 희미하나마 그 의미에 다가갈수 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어는 한자와 같은 상형문자가 아닙니다. 그 대신에 이름이나 지명등에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고대 히브리인들은 사람의 이름이나 지명을 들으면 우리가 한자를 보면서 의미를 추정하는 것과 유사한 인식을 머리에 떠올리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 현대인은 말할 것도 없고 예수 당시의 히브리인들도 구약을 보면서 고대에 구약의 기자가 구약을 쓸 당시의 히브리어가 보여주는 숨겨진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요즈음 젊은이들이 자기 이름 석자를 한문으로 쓰는 것도 글자를 그리는 것인지 아니면 쓰는 것인지 모를 정도로 개발 새발 쓰면서 버거워하는데 하물며 글자 하나 하나의 훈과 또 그 글자가 원래 어떤 의미를 지니고 만들어졌는지를 알기나 하겠습니까?

1-2세기의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은 헬라화되어버렸기 때문에 구약도 Septuagint를 읽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구약을 이해했겠습니까? 예수가 죽고나서 3-4백년 뒤의 교부나 신학자들은 말할 것도 없구요. 아시겠지만 어거스틴은 심지어는 헬라어도 읽지 못해서 제롬이 헬라어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을 해주어서 성경을 읽은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의 신학이 지금 기독교 신학의 골격을 이루고 있죠.

그렇다면 구약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는 우리가 어떤 방법으로 접근해야 하겠습니까? 그들이 그들의 언어를 가지고 느꼈던 방법을 먼저 발견하고 그것을 지금 시대에 그현하는 방법만이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런데 언어학적으로 인간은 언어를 사용하면서 여러 방법적인 다양함에 열린 존재가 아닙니다. 쉽게 말하면 영어를 구사하는 방법은 몇가지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다 성징적 언어구사입니다. 그래서 상징적 혹은 알레고리적 해석이 구약을 이해하는 열쇠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기독교의 해석학에서 시도한 상징적 방법은 과학적 근거도 없고 또 고대의 히브리어가 지닌 특징이나 언어적 구조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시도한 것이어서 같은 알레고리 혹은 메타포어라고 해도 요즈음에 시도되는 것과는 아주 다른 것입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님에게 성경을 해석하시려는 노력이 많이 보이지만 님도 어차피 기성 기독교가 가르쳤던 성경의 해석방법에 많이 오염되어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그것을 완전히 벗어버리지 않는 한 시간 낭비하시는 것이라는 것을 말씀 드리기를 워하기 때문입니다.

기성 기독교의 성경 해석과는 많이 다른 해석을 하면 사람들의 거부 반응이 심한 이유가 바로 사람들은 이미 머리속에 고정적으로 성경 전체의 주제나 단어들에 대한 이해를 심어놓았기 때문입니다.

사고의 전환은 고정관념의 탈피로부터 시작합니다.

한 가지만 말씀 드리죠.

구약의 율법에서 여호와가 유대 백성들에게 굽이 갈라지고 되새김질을 하는 동물은 먹어도 좋다고 규례를 정합니다. 이것이 정말로 종교적 행위의 규례라고 생각하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럼 이것이 뭘까요? 최소한 이 안에는 어떤 영적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여호와는 완전히 미친 신이죠. 무슨 신이 이건 먹고 저건 먹지 말라고 하는 법을 줍니까? 안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굽이 갈라졌다는 것은 좀 어려운 이야기이니까 여기서는 생략하고 되새김질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요? 한번 되새기며 생각을 해야 한다는 얘기죠. 지금 힌트만 드리는 것입니다. (자세히 설명을 할 공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 뭘 되새기죠? 성경의 여호와의 말씀입니다. 그럼 왜 되새기라고 할까요? 이게 교회에서 얘기하는 묵상인가요? 율법이 종교적인 제사법과 정결법이 전부이고 백성들은 글도 읽지 못하는 문맹이 대부분이고 성경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은 제사장이나 서기관이었을텐데 뭘 다시 읽고 또 다시 읽으며 묵상을 하라는 건가요?

한번 듣고 그것을 곰곰히 생각하면서 그것의 숨은 의미를 알아차리라는 말이 아닌가요? 그러려면 어떤 식으로 성경이 쓰여야 하는가요? 이야기의 시작 부분에 '누구의 아들이요 누구의 손자이며 누구의 아버지인 누구 누구가 어느 땅에서 어디를 가다가 상수리 나무 옆에 앉았 쉬는데...'라는 식으로 애야기가 전개되어야 그 이름들이 지니고 있는 의미들이 머리속에서 팍 팍 떠오르고 그 지명이 가지고 있는 의미들이 연결이 되면서 이야기가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이 들지 않을까요? 그래야 성경을 눈으로 보지 않고 다른 사람이 이야기를 읽어주어도 이해를 하기 쉬운 것이겠죠.

이런 상황을 성경의 기자는 당연히 잘 알고 있었을테구요.

그렇다면 성경의 기자는 어떤 식으로 글을 썼을까요? 이야기의 시작은 알아듣기 쉽게 그러나 정작 그 내용은 머리속에서 되새김질을 하면서 오래 생각을 해보아야 본래의 의도를 알아차릴 수 있게...


다시 말씀 드리지만 저는 과학적 방법을 가지고 해석한 것이지 그냥 추정을 하거나 상상을 한 것만은 아니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족보 이야기는 기회가 되면 설명을 하지요.

마태가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이딴 짓을 할 리가 없습니다. 다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매우 논리적으로 타당한 이유입니다.

공자나 노자가 바보가 아니듯, 아니 그 반대로 매우 깊은 통찰력을 가지고 세상을 이해하였듯, 마태나 누가도 깊은 고민과 그들 나름대로의 이 세상에 대한 이해를 조심스레 고민하며 예수에 대하여 썼습니다.

그들을 바보로 만든 것은 기독교이지 그들이 바보가 아니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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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빛 (24.141.4.52)
2013-03-20 22:13:26
성경에서 바다는 통상적으로 세상을 의미한다는 것은 알고 있던 것이고요.

의사 프로이드가 쓴 책중에 기독교에서는 졸작이라 평가하는 모세와 유일신을 읽고
성경에서의 모세라는 사람은 가상적 인물이었음을 눈치챘었습니다.
모세라는 말 자체도 물에서 건져내다 라는 뜻.
다시말해 세상으로 부터 자유(구원)하다 라는 뜻이겠지요.

모세라는 사람은 원래 이집트인으로 실존하였던 사람이었는데 구약기자는 히브리인들의 구원자로서 그 이집트인의 이름을 도용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보면 프로이드의 이런생각은 천재적인 발상인데도 불구하고 이를 뒷바침해 줄 객관적 증거가 부족하여 빛을 못보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집트에서의 노예생활, 출애굽과 광야 40년, 가나안정복 등 실재사건으로 보기에는 무리이다라는 것만 남아있을 뿐이죠. 그 어떠한 객관적인 과학적 근거가 현재로선 없으니까요.

원래의 히브리 사상은 헬라적인 면보다는 동양적 사상에 더 가깝다는 님의 말에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암튼 시시때때로 금과 같은 좋은 말씀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부분은 밝혀낼 수 있을지 궁궁하고 기대도 됩니다.

노자의 도덕경을 참 좋아해서 자주 읽는 편입니다.
보아도 보아도 심오함이 더 함은 말할 수 없습니다.
근데 이건 한국말로 보면 이해가 오히려 어려워요.
영어로 된 것이 이해하기에 훨씬 쉽게 번역이 잘 되어 있더라구요..



암튼, 도덕경 이야기가 나왔으니 사담 조금 하지요..

어느날 어느 교회 목사가 저를 찾아 왔더랬습니다.
커피한잔 나누며 이런저런 이야기 중에
요즈음 무슨 책을 주로 보느냐고 물으시길래
노자의 도덕경을 보고 있습니다 라고 했지요.
그랬더니 얼굴이 갑자기 상기되고 굳어지더니만
기독교는 도덕을 절대 말하지 않는다는 둥
도덕은 세상사람들이 말하는 것이지
중요한 건 우리가 은혜를 받아야 한다는 둥...

속에서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 참느라고 혼났죠.
참, 먹사라는 양반들이 이런 수준입니다.
더 말씀 안드려도 아실 겁니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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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평일 (72.196.234.24)
2013-03-20 03:42:28
무엇이 진실인가요??" 하는 질문에
선생님께서 해답은 이미 주셨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족보가 서로 다르다는 것이
진실이 아니겠습니까.
문제는 진실이 아니라 이 다름에 대한
해석이겠지요.

게셋마네 동산에서 하신 예수님의 기도만 해도
그렇지요.
성경상 예수님께서 피눈물을 흘리시며
밤세워 기도를 하셨다는 것은 사실이겠지요.
마찬가지로 이 기도에 대한 해석이 중요하지요.
기도는 미래에 일어날 일과 그 결과를
이미 확실하게 알고 있을 때는 할 필요가
없겠지요. 음식이 잔뜩 차려진 식탁 앞에서
감사기도는 할 수 있어도 음식을 배부르게 먹게해
달라고 기도하는 사람은 없지요.
자신이 그 식탁위의 음식에 대해서
전지전능하기 때문이지요.

성경에 빌라도가 예수에게
네가 정말 왕이냐고 물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네 말과같이 내가 왕이로다
내가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하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러자 빌라도가
"진리가 무엇이냐?" 하고 다시 물었습니다.
예수는 이 질문에는 침묵으로 응했습니다.

예수의 이 침묵을 두고도 여러가지로
다른 해석이 가능하겠지요.

첫번째 진리는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두번째는 내가 설명을 해도 진리에 눈을 뜨지
못한 너는 알아들을 수가 없다.
세번째는 나도 진리가 무엇인지 모른다.

저는 첫번째 해석에 공감을 합니다. 진리는
설명이 불가능한 개인적인 체험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저는 바로 그런 솔직한 점이 예수님과
그 당시 대사장들이나 랍비들과 다른 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 당시 성경학자들은 자신들이 직접 체험하지도
못한 진리를 머릿 속 지식을 가지고 논리적으로
이해하고 궤변으로 합리화 시켰지요.
.
예수님을 가이사 모독죄로 몰아 처벌하려는
로마관리들이 로마동전을 예수께 내밀며
"이 동전이 누구 재산이냐" 하고 물었습니다..
예수는 동전을 들여다 보고
"가이사 것은 가이사 것이고 하나님 것은 하나님 것이다"
라고 엉뚱한 듯한 대답을 하셨지요.

"동전의 소유권여부가 예수님이
증거하시려는 진리와는 무관하다" 는 의미였겠지요.

성경에 기술된 족보만 해도 그렇지요.
우리인간들은 누구나 하나님께서 창조한
우주와도 바꿀 수 없는 귀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러니 족보에 대한 논쟁은 하나님의 창조목적이나
의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한국성으로 박씨입이다. 신라를
건국한 박혁거세 왕의 후손인 셈이지요.
저의 어머님은 김수로 왕의 후손인 김씨입니다.

그런 혈통적인 족보가 현재의 나의 삶에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까? 또, 내가 그런 혈통때문에
부모들을 존경하고 공경합니까? 아니지요.
예수는 길 모퉁이에 버려진 돌 하나로도 기존의
우상적인 교회를 헐어버리고 삼일만에 새로
세울 수 있다고 말씀하셨지요.
신앙에서 중요한 것은 성경지식에 기초한 우상이 아니라
현재 우리들의 삶이라는 뜻이겠지요.

"성경은 논리나 지식이 아닌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어있다" 고 주장하면서
한편으로는 성경에 나오는 일자일획을
논리나 지식으로 설명하고 증명하려는 시도.
저는 이것이야 말로 족보처럼 모순이라고
생각합니다.에덴동산에 나온 지식의 열매가 주는
교훈이기도 하고요.
그런점에서 저는 일부 근본주의적 신앙인들은
반교회적은 아니지만 반성경적, 반예수적일 수 있다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영감은 증명하고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체험하고 깨닫는 것이지요.
.
선생님의 성경에 기록된 모순된 족보에 대한 문제제기에
정직한 논리로는 설명이 불가능 하지요.
그 모순을 궤변으로 합리화 시키는 것 보다는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이 오히려 신앙적인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차리리
"그 모순된 족보와 예수를 개인적인
구세주로 믿고 따르는 것과는 상관이 없다" 고
고백하는 것이 솔직한 신앙인들이지요..

족보가 모순된다는 사실때문에 예수을 믿고
믿지 않을 수는 없기 때문이지요.

저는 개인적으로 선생님의 주장을 그리 이해하고 있습니다.
많은 신앙인들의 복음의 본질적인 문제가 아닌 껍대기들을
복음의 본질로 착각하고 있다는 선생님 주장에 공감합니다.
그 중 하나가 구약에 나오는 율법에 대한 이해겠지요.

"주일날이 하나님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을 위해서 존재한다" 는 예수님의 말씀이
그런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솔직히 저는 성경에 나오는 족보를 단 한 번도
관심을 가지고 읽어 본 적이 없습니다. 선생님의
댓글을 읽으며 처음으로 족보에 대한 성경지식을 배웟습니다.

선생님의 의도는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믿음은 이성적인 설명이나 설득으로
불가능 하다는 것이 저의 지금까지의 이해이고 신념입니다.

아주 오래전 이야기입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가깝게 지내는 선배 한 분이 미국탁구선수들을 이끌고
통역관으로 미북간 탁구경기를 위해서 북한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북한정부의 주선으로 어려서 헤어졌던 어머님과
상봉을 했습니다.
서로 헤어지기 전 어머님은
아주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선배님이
" 아직도 성경을 읽고 있느냐"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 옛날에는 성경을 읽었지만 김일성 아버지
말씀을 접한 후부터 성경을 버렸다.
김일성 주석말씀이 성경말씀보다 훨씬 더 좋다"
하고 대답하셨다고 합니다.
북한 공안원들이 옆에서 지켜보는 중에
나온 말이니까 그말의 진심여부는 확인할 수가
없겠지요.
다만 그런것이 바로 이성적으로 쇠뇌된
믿음의 한 단면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김일성 어록이 성경보다 진리라고 굳게
믿고 있는 사람을 향해
성경이 진리하고 이성적으로 아무리
논하고 설득한 들 무슨 변화가 일어나겠습니까.
예수님처럼 침묵을 지키는 편이 낫겠지요.

도사들 앞에서 주제넘게
또, 괜한 헛소리를 했나봅니다.
암튼 고맙습니다. 박목사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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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진 (1.220.135.107)
2013-03-19 15:36:40
딱이네요
제가 '진보신학 따르미에 대한 단상'에서 지적한 그대로요.
성경의 주인공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에 대한 인식이 없는 성경 읽기의 결과.
그리고 자신에 대한 우월의식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안쓰러운 모습.
보수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을 일반 사람과 똑같다고 생각하면서 성령으로 잉태되었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건만.
요셉의 피를 받아야만 다윗의 후손이 된다고 주장하고 있으니.

성령으로 잉태되었으니 남자의 정액을 가졌다고 볼 수 없다?
왜?
하나님께는 그것이 가능하다는데, 그 말을 왜 그렇게 이해하지 못하는지...

예수님은 아담 이후의 모든 사람들과 달리 하나님과의 관계가 근원적으로 단절된 상태가 아니었기에 그분의 대속이 인류 구원의 길이 된다는 것이고.

성경의 진술에 무슨 문제가 있다는 것이지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본인의 의식에 문제가 있구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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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진 (42.82.105.143)
2013-03-18 18:47:17
일부를 전부인 것처럼 침소봉대하는 참빛님
죄가 DNA의 줄기를 타고 부모를 통해 자식에게로 유전된다?
누구 주장이지요?
모든 근본주의자들이 그렇게 주장하는가요?
그렇게 생각한다면 황당하기 그지 없지요.

참빛님은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지요?
원래부터 의인이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죄인이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원래부터 의인이었다고 생각하신다면 할 말이 없습니다.

원래는 죄인이었다고 생각하신다면 지금은 어떠신가요?
여전히 원래 죄인이었던 것과 같이 죄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지금은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십니까?
전자라면 역시나 별달리 할 말이 없습니다.
후자라면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지요?
님의 논리에 의하면 말입니다.

님의 주장에 대해 아무도 논리적인 반발이 없었다고요?
글을 본인이 읽고 싶은 것만 읽나 보네요.

님의 주장이 맞다고 생각하고서 이제라도 논리적인 응대를 해드릴테니 답변을 해보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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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빛 (24.141.4.52)
2013-03-19 01:33:28
박 목사님!
일부가 무엇이었고 전체가 무었이었기에
일부를 전체인 것처럼 말했다는 건가요?
이런식으로 함부로 밀어 부치기나 왜곡하기를 좋아하는 먹사이셨나?
논리정연하게 증명을 하시던지 원~


다음,
그대의 독해력에 심각한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나의 DNA 언급은 관념적인 죄라는 것이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해진다고 한다면 어떻게 그렇게 되느냐를 묻는 말입니다.
독자에게 공개적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생각할 화두를 제공해 주는 것이란 말이오.

그런데 나의 그런 말을
누가 그러더냐 누구한테 들었느냐는 식으로
물으시는 님의 독해수준이 어느정도 되는지 의아스럽습니다.

그대가 나와 진정한 논쟁을 원한다면
우선 ((독해력))부터 한참 키우고 오셔야 합니다.
정말입니다.

저의 문장마다 일일히 뜻을 의역해 드릴 시간적 여유가 없거든요.



어쨌던, 저와 논쟁의 준비가 만약 되셨다면,
내가 삼단본법으로 내놓은 그 내용만을 가지고 논하세요.

공은 그대의 코트에 있으니
그대가 휘둘러야 할 차례...
내 쪽에는 없는데 대체 왜 또 뭘 소리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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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진 (42.82.105.143)
2013-03-19 11:01:10
혹시나 해서리
제가 님은 스스로에 대해 의인이라고 생각하는지 죄인이라고 생각하는지 물었는데 왜 답변이 없지요?
혹시라도 그게 대속론에 관한 논의라는 것을 모르고 있는 건가요?

제가 제 문장을 일일히 뜻을 의역해 드려야 하나요?

저는 시간적 여유가 없지 않아서 가능한데, 어떻게 해드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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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빛 (24.141.4.52)
2013-03-19 12:25:29
목사님...
내가 답변을 하지 않을때는
답변할 가치가 없어보여 답변할 의지가 없음을 아셔야지...
내가 이런것 까지도 일일히 설명해 주어야 하는가요?

내가 의인으로 생각하는가 아닌가를 묻는 그대의 취지는 익히 압니다만
나는 그런식의 질문에 대한 답변은 거부 하겠소.

그대는 내가 무슨 사상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아낼
그 어떠한 권리도 법적으로나 인권적으로 없다는 것 조차도
모르는 계시는 것인가요?

무슨 관제공산당 만들려고 선량한 사람잡아다가 윽박지르며 공갈치는 것도 아니고
보채시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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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진 (1.220.135.107)
2013-03-19 15:25:42
사상요?
제가 왜 님의 사상에 대해 알고 싶어할 것이라고 생각하시죠?
독해력의 문제는 제가 아니라 님에게 있는 것 같은데요.

그 질문은 대속론에 관한 것이랍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상태의 인간.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상태의 인간.
스스로를 신자라고 하셨으니 여기에 해당된다는 것인데요.

제 질문은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였다는 것이냐는 것입니다.
다음부터는 좀 더 친절하게 풀어서 질문을 하겠습니다.
님의 입장을 충분히 고려하여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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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진 (1.220.135.107)
2013-03-19 15:03:32
오우 대단하셔라
자신이 한 말에 대해 아무도 답변이 없다고 하다가
문제가 일깨우기 위해 답을 하니
답변할 가치가 없어 보여 답변할 의지가 없음을 알아야 한다.

뭘까?
이 정도면 뭐라고 평가하여야 할까?

자기 세계에 빠져서 도취 가운데 사는 사람. 그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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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빛 (207.210.3.147)
2013-03-20 06:35:52
자넨 죄에 대한 나의 생각을 그렇게도 듣고 싶은가?

나의 생각을 가르쳐 주지 그럼.

나의 태어날태 부터 죄를 안고 태어 났다고는 절대로 생각하지 않아.
인생을 살아가면서 욕심도 생기도 욕정도 발생하고 하여
이런 마음을 죄로 스스로 여기는 것이지

난 아직도 박백년 이상을 살아오면서 특별히 나쁜짓을 해 본적이 없어

죄는 내안에 내가 감정으로 느끼는 관념에 불과한것이지...
죄가 누가 범죄해서 세상으로 들어오고 그런 물질적 실체가 아니라오.

그러니 죄가 관념적인 것인데 어떻게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옮겨 가는가?
죄란 박창진 같은 개독들에게나 있는 실체로 존재하는 것이여~
지옥도 네놈같은 인간에게나 Reserve되어 있는 것이라고..
자유하는 자에게는 죄가 적용되어지질 않어..
죄가 무슨 유전을 하는 것인줄 아시는가?

또 무었을 알려 하는가?

내 다 가르쳐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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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진 (42.82.105.143)
2013-03-20 12:09:22
그렇게 말해야지 처음부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성경이 어떻게 기록되어 있든지 간에.

그러면 이해하지 암...
평양 감사도 지가 하기 싫으면 어쩔 수 없는 일이거든.

그런데 성경에는 태어나면서 죄인이라고 기술하고 있다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는 표현에서 모든 사람은 말 그대로 모든 사람이거든요.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내가 볼 때 그대는 본문의 하나님의 사랑과는 무관혀. 아무 상관 없어.
"죄인되었을 때"라는 진술과 같이 죄인되었던 사람에게만 해당되거든.

앞으로도 글을 적을 때에 항상 그렇게 글을 적으삼.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그게 마치 성경의 진술인양 구라치지 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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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빛 (24.141.4.52)
2013-03-20 12:50:30
ㅎㅎㅎ
내 언제 성경의 진술인양 말 했던가?
목사 맞어?
거짓말 까지 하려는가?

이제는 독해력 부족에 기억력 부족 거짓말까지... ㅉㅉ

창진군은 근본주의 개독의 대표주자..

이미 악명 나 있더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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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 (84.101.163.12)
2013-03-27 04:41:13
창진님,
창진님은 로마서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 의인은 없나니..' 등을 가지고 그렇게 대답하라고 강요를 하시는 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사람이라는 창세기의 말씀은 생각하지 않으시는 것 같군요.
참빛님께서 사람인 이상,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을 터
바울이 쓴 성경구절의 표현을 가지고 모든데다가 똑같은 방식의 표현을 요구하는 것은 강요지요...
목사욕 먹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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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진 (42.82.105.143)
2013-03-19 10:58:51
너무 티를 내시네요
죄 문제와 관련하여
유전설만 있는 게 아닌 것도 모르세요.

대표설도 있답니다.
아담이 인류의 대표로서 범죄하였고
모든 인류는 그의 허리에 있으며
그의 범죄 이후로 모든 인류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상태에서 태어난다.
그 관계가 회복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식으로만 가능하다.

뭐가 문제란 말이지요?

화두였다?
그렇다면 내가 오해했네요.

님의 답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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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빛 (24.141.4.52)
2013-03-19 12:17:56
목사님!
저는 이미 정통교리를 남이 알만큼은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구차한 정의나 논하지 마시고..
다시 말씀드립니다.
저의 삼단 논법에 준하여 반박을 가하시기 바랍니다.

다시 적어 올립니다.

1. 아담이 선악과를 먹음으로 범죄하였다
2. 그래서 그 후손들은 모두 원죄를 안고 태어난다.
3. 그 죄를 씻는 방법은 오로지 예수의 피흘려 죽음의 대속뿐이다.

1항은 대전제, 2항은 소전제, 그리고 3항이 결론입니다.


정직한 눈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대전제와 소전제 모두 틀렸습니다.
그런데 그 결론은 과연 맞겠습니까?


원죄론은 누구에 의해 시발이 되었죠?
그가 유전설을 말했나요 대표설을 말했나요?
수백년간 유전설로 우매한 백성을 울겨먹다가
개독들은 왜 오랬동안 신주단지 모시듯 했던 유전설을
대표설로 급기야 바꾸려고 하는 건가요?

정직하신 답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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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진 (1.220.135.107)
2013-03-19 15:09:50
자기 세계 안에 갇혀서는
아담이 선악과를 먹음으로 범죄하였다. 오케이.
모두 원죄를 안고 태어난다.
어떻게 설명하느냐에 따라 차이가 있다.
죄라는 인자를 사람이 지닌다는 차원이라면 잘못이다.
아담 이후로 모든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다는 것이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이 말이 그렇게도 어려울까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모든 사람은 그 관계를 회복하여야 한다.
스스로의 능력으로 불가능하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뿐이다.
뭐가 문제란 말이지요?
아무런 문제가 없구만.

전제가 틀렸다는 자신의 관점이 틀렸다는데 왜 엉뚱한 소리만 하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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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빛 (207.210.3.147)
2013-03-20 07:07:53
그렇게 능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넘어가려 하지말고
내가 이미 물었잖소이까.
원죄론은 누가 어떻게 시작했으며
그가 원래부터 관념적인 대표속죄론을 말했느냐고

왜 기독교가 수백년동안 신주단지 처럼 모셔온 유전론을
갑자기 대표 속죄론으로 바꾸어야만 했을까?



어느 엉터리 엔지니어가 자동차 엔진을 새로 개발하였는데
엔진이 시동도 안건리고 작동을 아애 않하는 것이라
이 엔진은 철물점에서 모아온 고철을 녹여서 만들었거든
녹도 엄청 잘 쓸어 이건 완전 깡통이거든

그래서 그 다음 엔지니어가 그 처음 엔지니어의 설계는 그대로 쓰고
몸체만 고철이 아닌 합금으로 다시 만들었거든
이제 녹은 안쓰는데..
어라?
엔진은 아직도 작동을 안네??

여보세요!
유전론의 명백한 틀림을 감추기 위해 개독들이 대표론을 개발하여
그것으로 허물을 덥으려 하나
겉모양만 바꾸었을 뿐!
본래의 의미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는 눈가리고 아웅격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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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진 (42.82.105.143)
2013-03-20 12:04:01
이거야 원...
자기가 왕이네요.
자기가 판단하면 그것으로 끝.
그래서 받아들여야만 해...
웃겨요.
유전론을 주장한 이들이 있었고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 이들이 있었고
그렇다면 뭐냐라는 연구 가운데 대표론이 나왔는데.
틀린 것을 틀렸다고 인정하는 것도 문제다?
제기한 내용이 뭐가 어떻게 틀렸다고 주장해야지요.
논증의 수준이 영 수준 이하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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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빛 (24.141.4.52)
2013-03-20 12:57:12
ㅎㅎㅎ
아~하
이제야 인정하시네..
잘못되었다고

근본적으로 잘못된 디자인을 바꾸지 않고
다른 물질로 맨날 만들어 봐라
작동하지 않기는 매 한가지

오~
자네가 제기한 대표설?
그거?

자넨 이미 유전론이 틀렸다고 인정했으니
이젠 대표설도 틀렸다고 하는수 없이 인정할 수 밖에 없을 걸 ㅎㅎㅎ

더 듣고 싶은가?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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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0
영은 (123.142.33.60)
2013-03-18 14:12:10
보혈을 지나
사순절에 이런 글을 올리는 것이 진정으로 겟세마넷 동산의 고뇌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의 바른 자세인지 묻고 싶네요 . 신학적 역사적 비평을 넘어 개인적으로 십자가의 수난과 피흘리심의 산 체험후에 글을 한번 더 올리시면 어떠한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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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ip Im (68.92.239.88)
2013-03-18 11:05:36
겟세마네 기도와 죽음
죽음을 앞두신 예수님의 기도에 대하여 고작 "연약하고 의기소침해지신 예수님의 기도"라고 평가하는 것은 글쓴이의 성경관을 드러냅니다.

이어지는 내용에서 보듯이 예수님의 그 대속적인 죽으심을 하나의 연약한 인간으로서의 죽음으로만 보기 때문입니다.
글쓴이는 예전 글에서도 밝힌 것처럼 예수님을 (신으로:이것은 제가 판단할 때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냥 한 명의 사람일 뿐이지요.



예수님은 성경에 기록된대로 사람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갈1:4)

그 방법은 나무에 달려 피흘리시고 죽으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9:11,12)

왜 피를 흘리셔야만 하셨는가? 피흘림 없이는 죄사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9:22)

그러면 신성을 가지신 예수님이 무슨 고민이 있어서 그토록 간절히 기도하셨습니까?
한갖 인간으로서 나약한 정도만 보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죽음 앞에서 의연한 사람들보다도 못하다면 어떤 분이 말씀하신 것처럼 굳이 예수 따를 필요가 뭐가 있습니까?

십자가의 죽음이 강도와 같은 죽음이라면 연약한 분이라 평가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십자가의 죽음은 온 인류의 죄를 짊어지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죄만으로도 힘들어 하는데 온 인류의 죄임이랴!
이 정도면 능력의 예수님은 또 힘들어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참으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잠시지만 단절 때문입니다.
창세전 삼위일체께서 단 한번도 단절된 적이 없으신 분이 찰나의 단절이란!
사랑하는 사람이 얼마후 다시 만날 것을 알면서도 잠시 헤어짐에 대하여 슬퍼함이란 겪어본 사람들이 압니다.
하물며 하나님과의 단절은 사실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멸망을 뜻하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양심에 화인 맞는 자들은 전혀 슬퍼하거나 괴로워 하지 않습니다.
우리 주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런 사실들을 아시기 때문에 잠간의 단절을 피하고 인류를 구원하실 수 없는가 간구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뜻에 그대로 순종하신 것입니다.


성경관이 다르니 결국 예수님의 죽음도 여타 사람들의 죽음과 같이 취급하고 하나의 인간으로서 따를만한 자로 여기게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믿음의 대상이지 단순히 본받을 삶을 사신 분이 아니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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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빛 (207.210.3.147)
2013-03-18 08:11:13
교리중심에서 이제는 생명중심으로..
세계적으로 기독교 (캐톨릭과 개신교)의 세력은 점점 줄어들고
그 중에 특히 개신교는 더욱 그러합니다.
영국이나 노르웨이 스웨덴과 같은 북유럽을 보십시요.
교회가 전멸하다시피 했습니다.

이런 현상을 두고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매우 우려한다'라고 말하나,
사실 저는 바람직한 현상으로 이해하려 합니다.
북유럽 사람들은 교회는 나가지 않지만
사람을 위한 사람에 의한 사람의 정치를 하고 있고
평화와 인도적 차원에서도 앞장을 서고 있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교회는 없어질수록 좋을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할수록 그리스도 예수의 정신은 더 빛나게 될것으로 보았던 것이죠.
그는 독선적인 교리를 가르치는 교회에 반대하고
실족적인 삶에 더 큰 가치를 두었던 혜안적인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저는 그 분과 같은 철학자의 근처도 못가는 사람이고
그저 평범한 교인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기독교 안에서 말도되지 않는 이론과 설론 교리 등은
과감히 수정보완하여 개혁하기를 외치는 사람입니다.

아래 댓글을 통해 내가 내놓은 원죄론과 대속론에 대한 글을
한 명도 논리적으로 반발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저 감정적으로만 떠들고 있는 것 뿐이죠.
만약 나의 논리에 상식적으로 이성적으로
논리를 전개하시려는 분하고는 얼마든지 대화를 할 것이며
그들의 논리가 맞다면 언제든지 나의 뜻을 접을 것입니다.

교리란 사람을 위해 있는 것입니다.
사람을 구속하고 죄의식에 가두어 두는 것이 좋은 교리일까요?
인간에게는 누구를 막론하고 두려움이 내재해 있습니다.
그 두려움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교리...
사람이 만든 그런 나쁜 교리는 단호하게 파해야지요.

나는 기독교 세력이 줄어드는 것이 자유주의자들의 영향으로 그렇게 되었다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독교의 전통적 교리 자체가 과학적인 현대사람으로서는 도무지 받을수 없는
독선적이고 해악적인 교리이기 때문에 수용하지 못하고 마지못해 교회를 떠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지금은 2013년입니다.
화성까지 인간을 보내려고 하는 첨단과학의 시대에
무슨 중세기적 원죄론과 대속론에 얽매이고 있겠습니까.
양심을 걸고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먹사들은 얼마나 더 이러한원시인적 사고방식과 교리로써
성도들을 우롱하며 그들의 배를 불릴것인가요?
그 교리가 우리 삶에 무엇하나 유익한 점이 있나요?
자기의 죄는 예수의 이름으로 회개만 하면 된다 라는 방종의식만 기독교인들에게 만연하게 하였을 뿐인것을요...

원죄론 대속론 등은 무익한 교리입니다.
이 무익한 교리를 이용하여 먹사들이
일반 성도들도 함부로 못할 나쁜짓은 다 골라가며 하는거죠.
그들은 면상에 철면피를 깔고서
그 교리를 믿으니까 그렇겠죠?
그들의 죄는 하나님이 전부 용서해 줄 것이고
천국은 따놓은 당상이기 때문에
굳이 많은 사람앞에서 쪽팔리게 참회하고
치사하게 용서를 구하고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고 있겠죠.

그야말로 파렴치한 사람들이지요.




물이 한방울 두방울 떨어져 급기야는 바위에 구멍을 뚫듯이
저를 통한 지극히 작은 소리..
저의 말이 지금은 이단들이 하는말 처럼 보일런지는 모르겠으나
이 소리가 언제가는 조용한 울림으로
여러분들의 가슴속을 잔잔히 만질 날이 반드시 옵니다.

믿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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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도사 (220.255.1.32)
2013-03-18 07:17:21
몇가지 생각들....
몇가지 의견들....
1번에서....
필자의 의견은 묵상 중 받은 은혜임을 존중하며, 그 은혜를 통하여 예수님의 한 면을 보게되어서 너무 감사합니다.

2번에서.....
마지막 즈음한 달락
"이 말씀 외에도 복음서에 나타나신 예수님은 한없이 자비로우신가 하면 지나칠 정도로 엄격하기도 하시며,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는 반면에 격하게 분노를 표출하기도 하셨고, 특히 당시 종교지도자들에 대해서는 입에 담기 어려운 폭언을 퍼붓기도 하셨습니다. 이런 다양한 예수님상은 복음서가 기록되기 전에 예수님에 대한 서로 다른 시각이 있었고 그런 대조되는 전승들이 복음서 기자들에게 함께 수집된 결과임을 반증합니다"
이 내용이 무슨 문제가 됩니까?
핅자는, 그리고 인간은....
때로는 어떤 중요하고 본질적인 문제들 앞에 폭언에 가까울 수도 있고, 때로는 그런 모습들이 불쌍해 보일수도 있는....것 아닐까요?

부모로서 자녀에게 우리는 안그러는지요?

또 구약에 등장한 많은 하나님의 모습도 단편적으로 보면, 이방인들에게 왜 이렇게 까지... 심하게 전멸하는 등? 인간의 뜻 특별히 나의 뜻, 그리고 당신의 뜻...과 다른 모습이 있다고 해서 그것들이 하나님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을 간과한것 같습니다.

이와 같은 내용들이 과연 필자가 2번 타이틀로 이야기하는 것들을 풀어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을 현혹하는 타이틀 아닌가요?

3번에서...
필자의 신앙의 삶에 존경과 경의를 표합니다.
십자가의 삶을 살아가려는데도 그렇게 살아내지 못한 저의 모습 속에서 늘 안타깝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아무리 선하고 바르게 살아도,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 없이 살아도, 교회에 나와 예수님을 영접하고 주님의 피로 죄 사함을 받지 않으면 지옥에 갈 수밖에 없다고 믿는 교리적 대속신앙은 우리 주님께서 지신 십자가와는 너무나 다를 뿐 아니라, 모든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아무 전제 없이 하늘 아버지의 자녀로 선포하신 예수님의 삶과 뜻을 크게 배반하는 것입니다."
단락에서 처럼, 예수님의 삶의 모습을 따라갔던 성령의 인도하심을 경험했던 부활하신 예수님을 최후에 만났다고 스스로 고백하는 사도 바울은 교리적 대속신앙에 대해서 명확하게 증언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만한 근거가 되지는 못하다고 봅니다.
특별히 아버지께로 나아갈 유일한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되심을 비롯한 예수님의 다른 이야기들을 위의 필자의 해석이 완전히 부인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 보완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닐까요?
십자가의 대속적 진리가 중세의 암울한 기독교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결국 기독교라는 종교성 속에서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많은 종교인들의 모습과 같은 모습으로 등장한 안타까움을 회개해야할 부분이지, 그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적 진리를 부인할 부분이 아닌 것 같습니다.
특별히 다원주의로 가고있는 서구의 신학적 흐름을 미국의 근본주의와 근본적으로 다른면을 강조하는 필자의 신학은 결국 필자의 신학적 단면인데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한국 기독교인들이(물론 많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모두 그런 것처럼 생각하는 부분은 아닐 수 있다는 것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즉 이 말은 예수의 사람이 아니라, 교리에 종속된 노예라고 표현한 말들을 조심해야 할 듯 합니다.

원래 댓글을 안다는 스타일입니다.
그럴수도 있기때문에....
그런데 이렇게 장문의 글을 단 이유는... 필자의 신학적 소견과 한편의 설교에서 나름 은혜를 받았다고 해야하나요,
그러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과 구속의 의미가 신학적 자유로 하나의 정신을 넘어선 가치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혹 그렇다고 한다면, 그런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가 하나의 정신을 초월한, 말그대로 그렇지 못한 자유와 타종교인들, 아니 그것보다 더한 보수의 사람까지도 품을 수 있는 사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God bless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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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mail-x (112.222.123.131)
2013-03-17 22:59:41
참빛님 죄송한데...
.

기독교는 안 무너집니다.

누가 그랬더라?

요즘은 신학책 본지도 아주 오래고 그래서 기억도 가물한데

기독교가 2,000년 동안 온갖 넌센스와 죄로 가득 차도 여전히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인간 자체에 있습니다.

안티들이나 기독교를 안 좋게 보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 기독교가 쇠퇴하거나 없어질 것이라고 보는데 절대 그럴 일은 없습니다.

기독교의 위대성은 여기에 있습니다.
기독교는 비상식 몰상식 비합리 몰이해 비합리 비과학 비윤리 비도덕
등 인간 사회가 가질 수 있는 가장 저질스럽고 악랄한 것을 갖추었다는 것이 오히려 역설적이게도 강점입니다.

예레미야는 절규합니다.

'이 땅에 무섭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렘 5:30-31>

'그러므로 여호와의 분노가 내게 가득해 참기 어렵도다. (중략) 이는 그들이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탐욕을 부리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하나 평강이 없도다. 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했느냐,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않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지는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렘 6: 11-15>


인간은 이성적인 동물이라는 명제는 인간을 제외한 다른 동물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것이지 인간의 사고 생각 감정 등을 전체적으로 놓고 볼 때 이성적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심리학자들은 너무나 당연히 알고 있지만 인간은 결코 이성적이지
않습니다.

간단한 예로 '리마 증후군' 혹은 스톨홀름 증후군' 등이 대표적이죠.

몇 년전에 자신을 강간하고 매춘부로 팔아넘긴 남자를 도리어 옹호하는 유럽 아가씨들의 기사가 난 적이 있습니다.

정직하고 소박한 목사는 성도가 없고 거짓말하고 폭력적이고
악랄한 목사들이 대부분 성도가 많은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약간의 예외는 있습니다만...

괜찮아 보이는 목사도 각종 마케팅 기법을 쓰지 않으면 성장 시킬 수 없죠.


여하튼 ...


중요한 것은 참빛님이나 혹은 좀 깨어있는 자들이 아무리 외쳐도
예레미야건 호세아건 심지어는 예수가 외쳐도 결국

유대인들은 돌이킬 수 없었던 것처럼

우리의 귀염둥이 개독들도 결코 자신이 망상을 끊지 못할 것입니다.


혹시 가능하시면 기독교인이 어떤 글이나 다른 강력한 증거로 마음을
돌려 기독교를 그만 둘 확률이 어느 정도인지 궁금하시면 논문들이나
관련 책들을 찾아보십시오.

독일의 어느 저명한 학자는 로또복권에 당첨되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라고 했습니다.

합리적이고 분석적인 독일 학자가 연구를 한 끝에 내린 결론입니다.

혹은 종교심리학 공부해 보시면 알죠.

선생님도 공부를 이모저모 하신 것 같은데...


결론은

결코 개독교는 사라지거나 위축되지 않는다.
그렇게 보일 뿐이다.


여기에 개독교의 위대성이 있다.


이게 제 결론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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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고보니.. (24.141.4.52)
2013-03-19 02:21:34
갑자기
두려움이 몰려 오네요.
그럴 수도 있겠다 싶네요.

교화 불가능한 개독들이라...
참 무섭네요..

왜 내가 여기서 돌팔매질을 하고있나 싶어요 ㅠㅠ

그렇다면, 무슨 미련이 남았길래
피키님이나 도끼님은 여기에서
계속 난타전을 벌이고 계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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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cky (76.23.169.116)
2013-03-19 03:37:02
ㅎㅎㅎ 참빛님이 한번 맟혀 보세요.
왜 여기에서 내가 난타전을 벌이는지.

최소한 미련이 있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한트를 드리자면 저는 개독들이 읽고 깨우치고 이해하라고 글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절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럼 누구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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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cky (76.23.169.116)
2013-03-17 14:19:16
족보라...
유대인들에게 족보라는게 있나요?

제가 알기로는 우리민족처럼 체계적으로 문서화되어 몇십대까지 자기 혈통에 대한 기록을 남긴 민족은 전 세계 어디에도 우리민족 외에는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마태와 누가가 기록한 족보가 서로 다른 점이 있다는 것은 둘째치고 이들은 도대체 어디서 예수의 족보를 발견하였을까요? 게다가 수 천년 동안 이 나라 저 나라 떠돌며 살던 민족인데 말이죠.

백번 양보해서 마태 복음의 저자가 예수의 제자 마태라고 가정하면 그는 예수가 죽은 후에 마리아나 야고보등을 통해 여기저기 물어보면서 어찌어찌해서 대강 4-5대 정도까지는 알아내었고 그 이후는 대충 어림잡아 구약을 훑어가며 끼워맞추었다고 칩시다.

그럼 누가는 또 누구를 귀찮게 하며 예수의 족보를 캐내었다는거죠?

참 대단들 하시네요...저 멀리 애굽으로 갔자가 팔레스타인으로 갔다가 가나안으로 갔다가 다시 아르랏산까지 갔다가 바벨론으로 갔다가 예루살렘으로 다시 왔다가 ...족보만 캐다가 인생 다 갔을텐데.

예수의 족보...

참 재미있는 얘기네요.

왕도 아닌 사람을 족보에 끼워넣으면서까지 예수를 왕이라고 말하고 싶었을까?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었을까?



마태와 누가가 왜 다르게 썼을까?





다 이유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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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 (24.141.4.52)
2013-03-18 14:23:11
족보라..
본인에 의해 삭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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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7
Picky (76.23.169.116)
2013-03-18 21:53:54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이라...
하지만 그 반면에 메시아는 제사장이어야 하기 때문에 레위지파의 혈통을 이어야하는 문제는 성경의 마태나 누가가 어떻게 해결을 하려고 했을까요?

복음서의 기자는 예수가 유다지파와 레위지파의 혈통을 동시에 이어야 하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려 했는지 아십니까?

이 문제는 정통신학에서는 은근슬쩍 구렁이 담 넘어가듯 다루면서 넘어가는 문제입니다.

혹시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신지...

복음서보다 나중에 나오는 히브리서 같은 책을 가지고 설명해보았자 소용없다는 것은 아실테지요.

어떻게 한 사람이 두 혈통을 가지고 태어날까?

참 궁금하네요.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이런 이유 때문에 유대인이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기도 합니다만.

하여튼 교회를 다니면 뭣 좀 제대로 알아보기도 전에 생각할 여유를 주지않고 마구 믿으라고 해대니 온통 잡동사니들이 가득한 교리를 껴안고도 도무지 풀어헤쳐볼 엄두가 나지 않는게죠.

정신 차리고 좀 요모조모 따지기 시작하면 류상태 목사님이나 도끼님 그리고 저 같은 꼴이 나는게죠.

안 그런가요?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이라....








그럼 예수는 어떻게 제사장의 혈통을 이어가나?


"누구든 애비 에미를 아는 자는 창녀의 자식이라 불리우게 하라"


예수가 한 이 말을 누가 이해할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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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3
참빛 (24.141.4.52)
2013-03-19 14:32:23
누구든 애비 에미를 아는 자는 창녀의 자식이라 불리우게 하라
도마복음은 참 어려운 부분이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애비 애미를 아는자..
창녀의 자식이라...

님은 예수의 제사장 혈통을 말한 후에 이 말을 꺼냈습니다.
필시 연관을 지으려 그러셨을 것으로 사료되오나
이 두가지를 연관짓기가 만만치 않군요.

대신, 전 이부분을 이렇게 해석했으면 합니다.

나를 따르려거는 쟁기를 태우고 따르라 든가
나를 따르려거든 부모를 부인하고 따르라는 말씀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합니다.

한번 나를 따르려고 했으면 부모라도 잊으라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창녀의 자식'은 말 그대로 욕으로 보면 어떨까요.

요즈음 말로 바꾸어 해석하자면.
나의 제자가 되려고 맘을 굳힌 너희들은 이제부터 집생각일랑 아애 말아라
양다리 걸친다면 너희들은 다 X새끼들이다

뭐 이런 맥락이 아닌가 한데요.

이런 뜻이 아니라면 답을 알려 주시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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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cky (76.23.169.116)
2013-03-19 22:40:56
도마복음은 어려운 게 없습니다.
복음서의 예수의 비유중 여러 부분이 도마복음에도 나옵니다. 그리고 표현만 다르지 복음서에서 말한 비유나 의미들을 그대로 전달하는 내용도 상당히 많이 나옵니다. 그리고 도마복음의 114구절 가운데 동일한 의미를 중복적으로 보여주는 구절들도 많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복음서의 비유를 제대로만 이해하고 있다면 도마복음은 누워서 떡먹기 식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정통주의 기독교가 복음서의 비유부터 문자적으로만 해석을 했기 때문에 도마복음의 비유의 내용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입니다.

"누구든 애비 에미를 아는 자는 창녀의 자식이라 불리우게 하라"라는 구절도 이미 복음서에 나와있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는 자신이 화평을 주려 온 것이 아니라 검을 주려고 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비와 자식이 싸우고 어미와 딸이 싸운다고 합니다.

도마복음의 이 문장도 동일한 의미입니다.

여기서 아비와 어미는 영적 아비와 영적 어미입니다. 부패한 유대교의 가르침을 가지고 자신을 키운 유대교의 지도자들입니다. 자신의 영적 부모를 안다고 말할 수 있는 자는 유대교의 가르침을 부패한 유대교의 지도자들로부터 배운 자들입니다. 랍비나 바리새인들로부터 베운 것이죠.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영적) 부모를 말할 수 있는 자들입니다.

제대로 배운 적이 없는 자들은 부모가 누구인지 말을 할 수 없으니까요.

그래서 그들은 창녀와 같이 영적 간음을 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예수는 그들을 창녀라고 부르라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도마복음의 이 문장을 꺼낸 이유는 예수의 메시아적 사역 어쩌고 저쩌고 하는 정통신학이라는 것 자체가 성경의 해석에 문제가 한 두 가지가 아니라는 것을 언급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가장 기초적인 문제부터 봅시다.

구약은 히브리인이 쓴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도 히브리인입니다. 히브리인은 동양적 사상과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구약을 보아도 이 세상은 불교의 윤회설처럼 계속 순환된다는 사상을 발견할 수 있고 그 외에도 많은 부분이 동양적 사상과 유사합니다.

그런데 동양적 사상과는 완전히 반대로 이원론적 사상에 철저한 뿌리를 갖춘 헬라철학에 물든 사람들이 기독교를 세워나가면서 유대인들을 기독교의 중심에서 몰아내고 성경을 해석하면서 기독교의 신학을 세워나가고 교리를 만들어갔습니다.

당시의 종교의 각축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들은 변증법이라는 논리적 방법을 가지고 기독교를 변론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세상 어느 종교가 자신이 담고 있는 진리를 방어하기 위한 논리적 방법을 지니고 있습니까?

진리는 그냥 스며들듯 듣는자가 깨달으면 그만이고 못 깨달으면 사라지는 것이지 그것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무슨 학문적 방법을 도입해서 증명을 하고 어쩌는 그 짓거리부처 벌써 유치하기 짝이 없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들에게는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성경을 특히, 구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니까 상대 종교나 다른 기독교의 분파가 엉터리 해석에 대하여 공격을 하고 따라서 그들이 쓸 수 있는 무기라는 것은 헬라철학에서 배운 논리적 변증법뿐이니까요.

쉽게 말해 신학이라는 것이 성경의 바른 이해를 가로 막고 있는 것이지 그것을 대단한 것으로 여겨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서구 신학자들이 자신들이 지금까지 지녀온 신학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는 이제는 완전히 그 방향을 틀어보려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님이 전에 언급한 과정신학이라는 것도 시도해 보고 열린신학이라는 것도 시도해 보는 것이 아닙니까?

저는 도마복음의 쉬운 구절 하나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는 한심한 수준의 사람들이 먹사니 신학자니 하며 어깨에 힘을 주는 그런 세태를 꼬집으려는 것뿐입니다.

서구의 신학은 성경에 대하여는그들이 가진 우수한 분석학적 방법을 통해 많은 것을 밝혀낼 수 있고 또 그렇게 밝혀냈지만 성경을 펼쳐 보여주지는 못한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영어로 표현하자면 facts about Bible을 우리에게 보여줄 수는 있어도 what Bible tells us는 보여줄 수 있는 사상적 기제위에 형성된 학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금강경을 읽고 그 의미를 서양인이 깨닫고 그 깊이를 머리속으로 이해하겠습니까?

못하죠.

성경도 마찬가지예요.

그래서 유대인 랍비들이 신약을 거부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신약, 특히 복음서의 요한복음 같은 부분은 헬라철학적 사고에 물들어 있는 사람이 쓴 것이 너무도 뻔하게 드러난다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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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빛 (207.210.3.147)
2013-03-20 10:15:03
피키님의 예지력은 과연...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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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129.105.63.211)
2013-03-19 05:47:14
질문입니다.
님께서 언급하신 메시아가 제사장이어야 한다는 것은 어떤 입장에서 말씀하신건가요? 유대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것 같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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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cky (76.23.169.116)
2013-03-19 08:07:06
정말 놀랍네요.
이런 질문을 하는 기독교인도 있다니요.

제가 대답을 하기 전에 질문부터 하겠습니다.

예수가 메시아라는 증거는 무엇이죠? 구약에 메시아의 자격 조건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부분이 있습니까? 만일 없다면 구약시대의 유대인들이 지니고 있던 메시아관을 가지고 볼 때에 그들은 어떤 인물을 메시아라고 생각하였지요? 기독교쪽의 주장이 아니라 유대교의 주장을 가지고 설명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왜 유대인들은 예수를 메시아라고 생각하지 않지요? 그들이 바보는 아니지요. 그렇다면 유대교 신학을 가지고 볼 때에 구약에 나타난 논리적인 사실은 예수가 메시아의 조건을 갖추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를 메시아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인 것이죠. 이에 대한 반박으로 기독교는 나름대로의 논리를 가지고 있을 것이구요. 그러나 그 기독교가 내세우는 논리를 그들의 신학적인 차원에서도 인정할 수 없는 논리적 결함이 있기 때문에 유대교는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지요.

그럼 누가 옳은가요? 최소한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하여 아직은 결정이 나지 않은 상태라는 결론외에는 딸리 어떤 결론이 없다는 것을 알지요.

그러나 역사는 옳고 그름에 따라 흐르지 않다는 것을 아신다면 지금 우리가 기독교에서 말하는 예수의 메시아성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취하여야 할지는 답이 나온 것이 아닌가요?

현대의 유대인들이 지니고 있는 메시아관을 가지고 보지 마시고 예수 당시에 유댜교의 지도자들은 율법과 메시아 사상을 어떻게 연결하였는지를 보셔야 합니다.

질문하신 분이 평신도라면 대단한 질문을 하신 것이락 칭찬할만 합니다. 만일 그렇다면 신학교에서 예수의 메시아적 자격에 대하여 어떤 식으로 가르치는 지를 한 번 자세히 연구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거기에는 논리가 없습니다.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에서 성경을 해석하면서 주장과 추측과 유추와 왜곡되고 편향된 역사적 사실들이 범벅이 되어있습니다.

심지어는 이미 다수의 학자들의 동의를 얻은 학문적 연구결과도 무시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게 우리나라에서 정통을 운운하는 개신교의 신학입니다.

학문이라고 다 같은 학문이 아닙니다.

다시 질문합니다.

성경 어디에 메시아의 자격이 구체적으로 혹은 상징적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그것을 입증하는 내용은 신약 어디에 있는가요?

그리고 그 조건을 만족했다는 증거는 신약 어디에 있지요? 그리고 그런 증거를 기술하는 신약의 내용이 있으면 그것은 정마롤 신롸할만한 역사적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까?

간단한 예로 본 기사에서 다룬 것처럼 예수가 다윗의 혈통이라는 마태나 누가의 족보를 신뢰할만한 역사적 정보라고 말할 수 있나요? 앞에서 말한대로 족보라는 것이 존재하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말이죠.

백보 양보하여 만일 신뢰할만하다면 예수는 자기가 뭘길래 제사장의 역할을 하려는 것일까요? 제사장이 아닌 다음에야 어떻게 타인의 죄를 사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죠? 예수의 입으로도 율법이 폐히여진 것이 아니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제사장직은 무엇을 위한 것이며 법을 만든 여호와가 아닌 이상에야 누가 자기 마음대로 제도적인 제사장직을 레위지파로부터 유다지파로 옮길 수 있는냔 말이죠.

유대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요?

유대인들도 상당히 많은 사람이 그냥 대강 유대인인척만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도 구약을 잘 몰라요. 랍비 가운데에도 날라리 랍비도 많구요. 개독이나 유대교인들이나 성경에 대하여 모르는 것은 매일반입니다. 그냥 종교적 제도를 열심히 따를 뿐이지요.

이제 님의 차례이니 대답을 해 보세요. 그러면 제가 자세히 설명해 드립니다. 왜 메시아가 제사장의 역할까지 감당해야하는지. 그리고 그것을 구약 어디에서 언급하고 있으며 개신교의 신학은 그 부분에 대하여 성경적인 근거를 보여주지 못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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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129.105.63.211)
2013-03-19 08:37:24
또 간단한 답변이지만
유대인들의 메시아사상을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렵겠지만 제가 생각컨대 일반적으로 다윗의 혈통을 따라 난 이가 이스라엘의 흩어진 열지파들을 회복한다는 예언서의 말씀에 의존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레위지파에서 나와야 한다는 부분을 위에서 잠깐 언급했지만 유대인의 관점에서 이사야의 기록과 같이 고난받는 메시아로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얼마나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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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cky (76.23.169.116)
2013-03-19 14:08:24
성경 전체의 주제를 기억하시면서 제가 드리는 질문을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여호와가 왕을 먼저 세웠습니까 아니면 제사장을 먼저 세웠습니까?

여호와가 왕을 세울 때에 자신의 뜻에 따라 세웠습니까?

왕이 하는 일이 무엇이고 제사장이 하는 일이 무엇이지요?

왕만 있고 제사장이 없다면 구약 시대에 인간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구약에서 속죄의 중보자는 제사장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속죄의 개념은 신약시대에는 사라진 것인가요?

만약 그렇다면 왜 기독교는 중보자로서의 예수를 강조하는지요?

중보자로서의 예수는 무엇을 중보한다는 말입니까?

그렇다면 예수는 영적 제사장직을 맡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아닙니까?

예수의 영적 제사장직은 무엇으로 증명이 되지요?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강조하고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 나라를 통치하는 왕으로서의 예수에 촛점을 맞춥니다. 그러나 신약을 보면 하나님 나라를 언급할뿐만 아니라 영적 제사를 말하고 있고 그 영적 제사는 여적 속죄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영적 대 제사장은 누구이죠?

예수가 메시아로서 영적인 왕임과 동시에 영적인 대제사장이라면 어느 직분이 더 중요하지요? 구약을 통해 이미 답은 나와있지요? 그리고 목사들이 별로 강조를 하지 않아서 그렇지 복음서 이후의 신약은 영적 제사장으로서의 예수를 더 강조하는것을 알 수 있지 않나요?

왜 기독교는 다윗으로부터 내로오는 혈통만 가지고 예수의 메시아적 정당성만 강조하지요?

왕이 없이 제사장만 있어도 한 개인의 속죄는 가능하고 따라서 구원도 가능하지 않나요?

따라서 한 개인이 구원을 받는 길이 이처럼 영적 제사장을 통해 열려 있다면 하나님의 나라를 통치한 왕이 있든 없든 그것이 나완느 무슨 상관이 있지요? 그것은 하나님의 문제가 아닌가요?

결국 구약시대에 인간들이 원해서 세운 왕이 없던 때에도 신정정치를 통해 세상이 돌아갔는데 예수가 신이라면 굳이 왕으로 와야할 필요도 없고 단지 제사장의 직분을 이행하는 역할을 가지고 세상에 왔어도 문제가 될 이유는 없지 않나요? 왕이라는 직분 자체가 원래부터 여호와의 계획에 있던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나라도 어차피 인간이 통치 할 것도 아닌데 왜 왕이 제사장보다 더 중요한 것처럼 가르치나요?

지금 사람들의 시선을 하나님의 나라로 이끌어 간것이 성경의 주제를 가지고 볼 때에 바른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결국 신앙은 지극히 개인의 문제를 다루어야 하는 것이고 따라서 기독교인 한 사람 한 사람에게는 구원으로 가는 속죄의 문제가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닌가요? 그리고 기독교에서도 십자가의 죽음을 대속이라는 가장 중요한 교리를 보여주는 사건으로 그리고 있지 않나요?

그럼 왜 왕으로서의 예수에만 스포트 라이트를 비추는 것인가요? 제사장인 예수의 문제는 별책부록인가요? 이게 주객이 전도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초기에 기독교의 신학을 세워나간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이런 구도를 세워간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세요?

만일 그랬다면 어떤 이유 때문에 이와 같은 구도를 세웠을까요?

왕과 제사장 - 평범한 사람들이 보기에 누가 더 파워를 가진 것으로 느껴질까요?

게다가 예수의 영적 제사장됨을 입증할만한 문서는 가진 것이 없었으니 달리 뾰족한 방법이 있었을까요?

아~하!

답이 나오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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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129.105.63.211)
2013-03-19 08:29:15
질문을 하시니 짧게 답해보겠습니다.
유대인의 관점에서 메시아는 당연히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자로 이해했으리라 봅니다. 그 관점에서는 기독교의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저는 두번 오시는 예수님으로 이해합니다. 회복의 시작과 회복의 마지막으로요. 어쩌면 이것이 유대인들의 한 시각중 하나인 고난받는 메시아와 연결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신학을 전공한 사람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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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cky (76.23.169.116)
2013-03-19 12:59:17
평신도라고 하시니 평신도가 이해할 수 있는 말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신학의 메시아론과 기독론의 골자들을 간추린 내용을 가지고 보겠습니다. 기독교 교리의 가장 즁요한 핵심을 다루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당시의 유대인이 염원하는 메시아가 정치적 메시아였다고 추측하든지 아니면 종교적이고 인류를 구원하는 메시아였다고 추측하든지 아니면 님처럼 회복의 시작과 끝을 담당하는 이중적 메시아관을 생각하든지 심지어는 성경을 떠나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전통적으로 유대인이 지니고 있던 왕통을 이어갈 수 있는 왕의 가문 출신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든지 그 어떤 메시아관을 언급한다고 해도 가장 중요한 것은 구약이 메시아에 대하여 어떻게 기록하고 있느냐 입니다.
특히 유대인이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려면 유대교와 기독교가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구약을 가지고 메시아관을 추출해야 하며 현 기독교의 구원론을 가지고 보더라도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적 구원의 완성이 예수를 통해서 이루진다는 이론적 기틀에 의한 추론도 구약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런 의미에서 신약은 구약의 메시아적 조건을 예수가 충족한다는 변증을 제시하는 변증서가 될 수는 있지만 그것이 변증론적 증거 자체가 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순환논리가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원래 제가 언급한 제사장적 메시아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는 것이지만 신약을 가지고 예수가 제사장의 직분도 받았다느니 아니면 신약에서 만인제사장설이 나타나느니 하면서 신약의 내용을 근거로 논증을 만들어가며 변론을 하는 개신교 신학자들의 주장이 얼마나 논리적으로 한심한 소리인가를 먼저 밝혀두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구약에서 보여주는 메시아 상과 예수를 비교하였을 때에 예수가 구약에서 말하는 메시아상을 만족하는 것이 가장 큰 교리적 문제가 됩니다.

아시다시피 구약에는 메시아라는 단어 자체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메시아 개념을 짐작할 수 있는 내용들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런 내용들은 예언이라고 여겨지는 내용속에 들어있습니다. 기독교에서 구속론을 설명하는 가운데 구약과 신약의 관계를 놓고 구약은 앞으로 나타날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며 신약은 그 예언의 성취를 기록한 것이라는 얘기를 들어보신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기독교가 주장하는 그 내용이 맞다고 주장하려면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1) 메시아에 관한 구약의 예언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분석하고
2) 그렇게 분석된 구약의 예언의 내용과 예수가 얼마나 일치하는가부터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마치고 나면 가장 중요한 문제가 남습니다.

기독교는 유대교와는 달리 신약을 신의 계시로 인간에게 주어진 또 하나의 책으로 여기고 따라서 구약과 동일한 권위를 가진 정경으로 여깁니다. 따라서 기독교는 신약의 기록을 가지고 위의 두 가지 과정을 통해 나타난 결과를 입증합니다. 그런데 유대교에서는 신약을 신의 계시에 의한 책으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기독교측에서는 먼저 신약이 신의 계시로 쓰여진 책이라는 것부터 증명해야 하는데 신약은 처음부터 끝까지 유대교가 인정하지 않는 예수에 관한 이야기를 적은 책이기 때문에 이 문제는 또 다른 순환논리의 모순을 안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신약을 가지고 설명하지 마시라고 한 것입니다.

그럼 구약만 봅시다.

구약에는 메시아적 예언이 예언서에서 나타납니다. 우선 한 가지 예를 보면 스가랴 4장입니다. 기름부은 자 둘이 다스리는 왕국을 예언한다고 기독교는 해석합니다 (물론 저의 해석은 아닙니다). 그리고 이 예언을 메시아적 예언의 하나라고 기독교 신학에서는 말합니다.
기름 부은 자는 왕과 제사장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메시아의 조건을 왕과 제사장이라고 생각한 것은 기독교입니다. 유대교가 아닙니다. 그런데 신약에는 예수의 혈통을 가지고 복음서에 나타난 다윗의 족보를 이용해서 예수의 메시아적 조건이 증명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본 기사에서도 말하듯, 이 족보는 진짜 혈통을 적은 내용이 아닙니다. 마태의 경우에는 유대인으로서 자신이 그리는 메시아의 영적 족보를 만들어서 적은 것 뿐입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이 신약의 첫번째 책인 마태복음을 열어서 한 페이지도 채 읽지 않고는 '한심하군'이라고 말하면서 덮어버린단 말입니다.

마가복음이 복음서 가운데 가장 먼저 쓰여진 책이고 또 요한복음이 초기 정통주의자들의 입맛에 가장 맞는 복음서인데도 마태복음이 신약의 가장 앞에 배열된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족보 때문입니다.

그럼 그 다음은 무엇을 해야지요?

하다못해 기독교에서는 마태복음의 영적 족보를 마치 육적 족보처럼 착각하여 예수의 메시아성을 광고하고 다녔지만 그런 식으로 따지자면 메시아가 되기 위해서는 제사장의 족보도 적혀있는 복음서 하나 정도는 만들었어야 했는데 그것을 할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이죠.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한 사람이 어찌 두 족보를 가지고 태어난단 말입니까? 유다 김씨가 레위 박씨가 될 수는 없지요.
이런 이야기를 하면 신학자들은 참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기가 바쁩니다. 어떤 이는 구약의 예언은 메시아가 왕이나 제사장 혹은 그 둘의 위치로 온다는 것이 아니라 王的 그리고 祭祀長的 권위를 동시에 가진 위치로 온다는 것을 말한다고 변명합니다. 그럼 뭣하러 예수의 혈통을 가지고 예수가 메시가 될 자격이 있다고 증명하는 것입니까?

그리고 말입니다. 그런 식으로 확대해석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습니다. 그리고 사실 기독교의 교리 자체가 적절하게 확대해석, 유추해석, 순환논리, 엉터리 해석, 짜투리 해석 (문맥은 무시하고 짜투리 텍스트만 가지고 하는 해석), 자의적 해석을 통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비록 신학이라고 말하면서 學이라는 글자를 사용하고 있지만 그 뿌리에 가면 學이 아니라 信자를 이용하여 논리나 사실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라 종교적 신념에서 시작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과는 어차피 논쟁같은 것을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피하든 내가 피하든 둘 중의 하나는 먼저 피하게 되어있습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하여튼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 상대를 하지'라는 말을 하며 피하든가 신학자나 먹사들은 '믿음이 없으니 저딴 소리를 하지'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제가 말하는 신학자나 먹사는 한국에서 정통운운하는 근본주의 신학자들과 먹사들을 말하는 것이니 오해 마시기를.

생각해 보세요. 먹사들이 듣기 좋은 말로 뭐라고 해도 결국은 성경의 문제입니다. 성경에서 메시아를 뭐라고 하나요? 예수가 그것을 충족한다면 기독교인보다 열배는 더 구약에 대하여 잘 알고 있는 유대인은 예수를 메시라고 왜 생각하지 않죠?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구약이 분명하게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구절에 대하여 유대교가 가지고 있는 해석과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해석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자신들이 유리한대로 해석을 한거죠. 제사장으로서의 메시아에 관한 부분은 은근슬쩍 넘어가구요.

유대인이 왜 예수를 안 믿을까요?
믿음이 없어서요?
유대인이 믿음이 없어요?

지금도 정통주의 유대교인들은 안식일을 지키느라 금요일이면 해가 지기도 전에 퇴근하는 그런 자들인데 그런 사람들을 보고 믿음이 없어서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는다고요?

참...
예수가 메시아라...
신이 된 인간 예수...

그냥 예수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만 제대로 가르쳤어도 세상은 이렇지 않았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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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99.111.60.193)
2013-03-19 14:48:09
피키님의 의견 잘 읽었습니다만 제가 아직 이해력이 부족하여 피키님이 과연 어떤 차이를 그렇게 크게 보시는지 정확히 잘 모르겠습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님께서 말씀하셨듯 메시아에 대한 구약의 예언과 당시 유대인들의 이해의 관점이 중요한데 이는예레미아23장과 에스겔 39장에 명시되어 있고 유대인들은 이에 따라 이스라엘의 회복을 염원하는 다윗의 후손인 정치적 메시아를 기대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메시아의 종말론적 구원자로서의 모습을 그린 부분도 많습니다만 제사장의 역할로서의 메시아는 구약에서 예언된 것이 있는지는 확실치 않아보입니다. 죄를 감당하는 고난의 메시아를 이와 연결시킬 수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최소한 일반적인 구약의 메시아적 견해이거나 당시 유대인들의 이해범위에 쉽게 들어가 있는 개념은 아니었다고 봅니다.
따라서 마태복음을 비롯한 다른 신약의 많은 부분에서 다윗의 혈통인 예수님을 강조하여 유대인들이 바라던 메시아가 바로 그 분이다는 것을 말하고 있고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다윗의 혈통을 강조한 족보를 말하고 있지만 유대인들에게 그러한 메시아적인 위치를 말하기 위해 굳이 제사장혈통의 족보가 필요한 것은 아니지 않겠느냐는 것이 처음 저의 질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기독교가 메시아의 제사장적 역할을 더 강조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앞서 말씀드렸듯이 유대인들의 주된 이해는 아니었지만 고난의 메시아로 예언된 구약의 부분과 십자가를 지고 대속의 삶을 사신 예수님의 생애등을 바탕으로한 신약의 십자가 신학입니다.
저는 왕과 제사장으로서의 메시아인 예수님을 구약도 말하며 또 신약에서도 강조하고 있다고 봅니다. 기독교가 의도적인 구도를 세워가거나 제사장적 메시아를 슬쩍 넘어갔다는 생각보다는 오히려 유대인들이 간과한 부분을 예수님이 재해석하셨고 증거하셨으며 초기기독교가 이를 받아들여 계속 강조했다고 받아들입니다.
조금 다른 내용일 수 있는데.. 예수님이 유대사람들이 이스라엘의 회복자로서의 메시아를 거부한 것은 아닌것처럼 보입니다(행1:6) 그렇다고 또 다윗의 혈통이기에 메시아의 자격이 있다고 말하지도 않는 것 같습니다(막12:35). 그리고 다윗의 아들이 아닌 요셉의 아들로서의 메시아상도 유대인의 전통에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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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cky (76.23.169.116)
2013-03-19 22:52:24
제가 성경만 가지고 생각해 보시라고 했습니다.
교회에서 어떻게 가르쳤든 그리고 기독교가 뭐라고 하든 머리속에 지금까지 배운 것을 다 내려놓고 구약만 꼼꼼히 보시면서 구약 안에 있는 구원관과 그것을 통해 님이 당시의 유대인이었다면 구약의 예언에 나오는 메시아를 어떻게 그려 나갈 것인지를 생각해 보세요.

거기에 정치적인 해방을 가지고 오는 메시아의 모습이 있다면 그것은 현실과 성경을 섞어서 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구약에서 끝없이 다루고 있는 속죄의 문제의 중요성이 희석될 수는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유대교가 부패한 이유 중에 하나가 구약의 의미를 자꾸 현실의 문제와 연결하면서 이해를 도모한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와의 공의라는 개념을 자꾸 사회의 정위와 결부시키는데 종교적 진리라는 것은 시공간을 초월한 진리를 선포할 때에 진리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의 적용은 인간세계의 현실적 문제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적용이 진리는 아닌 것입니다.

미국의 복음주의라는게 아주 골 때리는 기독교 정서를 만들어 놓아서 요즈음의 기독교인들은 정말 뭐가 뭔지 제대로 볼 수 있는 눈을 오나전히 상실했습니다.

종교가 사회구원을 해요? 웃기지 말라고 하세요.

사회구원이라는 그럴듯한 말로 사회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그 숨은 의도를 일반사람들이 잘 보지를 못한다는 사실을 이용하려는 복음주의의 속셈을 많은 학자들이 기분 나쁘지 않을 정도의 표현을 통해 30년 넘게 지적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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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진 (42.82.105.143)
2013-03-17 13:03:27
나는 류상태 목사님의 의식과 태도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 예수님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지...

제가 볼 때에 류목사님의 관점에 입각한다면 예수님보다 간디 선생이 훨씬 월등하다고 여겨집니다.
간디 선생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그를 본받기 위해 살겠다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여겨집니다.
우리가 세계 역사를 온전히 파악하지 못해서 그렇지 아마도 예수님보다 더 나은 이들이 아주 많으리라고 여겨집니다.

그런데 왜 굳이 예수님을?
과거에 유대 땅에서 바른 말 좀 하였고 불의에 부분적으로 굴종하지 않은 모습으로 살았을 뿐인 한 사람을 말입니다.
그래도 우리보다는 더 높은 수준의 삶을 살았으니 본으로 삼겠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왜 그를 신앙하며 스스로를 신앙인으로 규정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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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진 (42.82.105.143)
2013-03-17 12:55:48
입은 비뚤어져도 말은 바르게 하라고 했지요
아래 참빛님이 말하는 개혁은 개혁이 아니라 일탈이라는 것입니다.
그가 말하는 변화는 변화가 아니라 변질이라는 것입니다.

중병에 걸린 어머니와 같은 교회.
진단과 처방이 중요합니다.
정확한 진단과 가장 적절한 처방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전혀 엉뚱한 진단과 엉터리 처방을 합니다.
돌팔이 의사와 별반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위가 나쁜데 간이 나쁘다고 하면서 아예 피의 순환을 막아버리는 처방전을 주는 것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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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5
박평일 (72.196.234.24)
2013-03-21 10:35:19
중병에 걸린 어머니와 같은 교회.
진단과 처방이 중요합니다.
정확한 진단과 가장 적절한 처방이어야 합니다"

저도 목사님 주장에 공감을 합니다.

참빛 님은 목사님과 전혀 다른
새로운 진단과 처방을 내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목사님과 같을 것입니다.

그분의 주장은 실제 실험을 통해서 그 효력이
증명된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목사님 주장처럼
엉뚱한 진단과 엉터리 처방일 가능성도
배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어떠한 효력과 결과가 나올지는
누구도 속단할 수 없는 미지수입니다.

반면, 목사님이 주장하시는 것과 유사한
진단과 처방법의 대분분들은 루터의 종교계혁이래
400년 이상 사용되어 왔습니다.
그러면서도 목사님 주장처럼 아직도
교회들이 중병을 앓고있습니다.
그런 진단과 처방이 별로 효력이 없다는 사실이
증명된 셈입니다.

의학계에서는 아무리 이론적으로 완벽한
처방법이라도 임상실험을 통해서 실제로
증명이 되지 않으면 환자들에게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예상치 않는 치명적 부작용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목사님의 진단과 처방법도 예외는 아닙니다.
목사님의 의견에 따라 교회들이 앓고 있는 중병을
완전히 치료되었다는 사실이 아직 증명된 적이 없습니다.
그런면에서 목사님의 의견과 주장은 실제로
증명된 적이 없는 이론적가정에 불과합니다.

가장 바람직한 방법은
목사님이 직접 그런 대안교회를
운영하시면서 실제성공사례를 세상에
보여주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때에 침빛님에 대한 단정적인 비판과
비난이 설득력을 갖게 될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리플달기
2 0
박창진 (42.82.105.143)
2013-03-21 13:04:53
제 의견이 언제 적용되기라도 했는가요?
증명된 적이 없는 이론적 가정이라고 하셨는데, 언제 적용된 적이 있었는가요?

실제 성공 사례가 있어야만 이론이 뒷받침된다는 것은 성경 풀이와 관련하여서는 적절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제가 참빛님에게 하는 비판과 비난은 제가 성공 사례를 만드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성경 본문에 대한 이해 문제를 말하는 것이니 말입니다.
그가 제기한 문제들은 하나님이시기에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불가능하다면 그의 문제제기가 정당하지만 그렇지 않으니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배제하고서 성경을 읽은 결과이니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태도의 파급 효과에 대해서도 저는 알고 있기에 차단하려는 것입니다.

이제까지의 댓글 내용들을 한번 잘 보십시오.
전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그의 주장 자체에서 어떤 부분이 잘못이라고 지적하였을 뿐입니다.
그 지적에 대해 제대로 된 답변이 없이 같은 이야기를 되풀이하는 것이 반복되었고요.
나중에는 회피하였지요.
그래서 그 태도의 문제를 지적한 것입니다.
그러자 도끼님의 조언을 따라 대응을 하기에 어이가 없어 닮은 꼴이라고 한 것입니다.

전 언제든지 환영합니다.
정당한 논증이라면요.
치열하다고 여겨질 정도로 하여야 한다는 것이 제 입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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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1
박평일 (72.196.234.24)
2013-03-21 20:54:45
실제 성공 사례가 있어야만 이론이 뒷받침된다는 것은 성경 풀이와 관련하여서는 적절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
"신학을 학문이다. 그러나 다른 학문과는 달리
논리적, 과학적 증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바로 그런 믿음이 신학이 안고 있는 학문으로써
한계가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다르게 생각하면 신학은 학문이 아니라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신념이라는 의미지요. .

일정한 가정에 바탕을 둔 학문적 이론들이나
과학적 발견들은 끊임없이 변하고 폐기처분 됩니다.

좋은 예로 뉴톤의 이론은 아인슈타인에 의해서
아이슈타인의 이론은 다른 새로운 이론으로
대체되었습니다.

정치, 경제분야에는 보수적 이론에 기초한 정책들이
효력이 없다고 증명되면 이와 대치되는
진보적 정책들을 선택합니다.

변증법적으로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
사회과학분야의 세계지요.

의학계에서는 처방이나 약이
효력이 없거나 부작용이 발견되면
아예 폐기처분합니다.

그런면에서 객관적인 학문과 과학세계는
끊임없이 발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주관적인 신앙세계는 그와는 다릅니다.
변화는 인정해도 발전은 용납하지
않는 것이 일부 기독교 신앙인들의 믿음세계입니다.

6천년 전, 혹은 2천년 전 시대 사람들의 사고와
인식의 범위, 지식, 과학주준을 그대로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라고 강요합니다.

아마 입시를 준비하는 자신이나
자녀들에게는 그런 무식한 강요는 하지 않을겁니다.
그런 믿음으로는 학문을 연구하고 배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학문분야나 현실세계에서
학위를 따고 출세할 수도 없지요.

또 기도나 믿음으로 물위를 걸을 수 있다며
목숨을 내놓고 실행하는 사람들도 없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지난 2천 동안 그런 무식한 믿음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은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성경해석은 절대적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적인 해석상 다름의 문제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믿음의 다양성을 서로 인정할 때만
하나님 창조의 원리인 사랑과 자유,
평등과 평화가 이 땅위에 실현될 수가 있다 고
개인적으로 믿고 있습니다.

목사님과 다른 신앙적 신념이지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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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빛 (24.141.4.52)
2013-03-21 13:48:41
박창진씨...
언제든지 환영한다...
정당한 논증이라면??

그 말 전엔.. 무슨 '파급효과' '차단(?)' 등을 운운하였으렸다.

그대 스스로 여기서 뭔지는 몰라도 뭔가 차단하려는 의지가 있었음을 설토했은즉
그렇게 이미 이실직고한 자가 무슨 정단한 논증을 하려 했다는 말인가?

자네는 처음부터 논쟁할 의사가 없었지..
나를 오로지 묵사발내려는 그 의지 밖에 없었지..

정당한 논증??

내가 얼마나 공손히 수차례 부탁을 했는가?
내가 내놓은 주장에 반박을 가하려면 주장의 핵심내용을 들고 반박를 하라고...

자넨 논쟁의 핵심적 내용을 들고 오지 않았고
내가 죄인으로 생각하느냐 아니냐라는 논쟁의 핵심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사적인 내용가지고 질기게 물고 늘어 졌었지!! 그치?
나는 거기에 답변을 거부하겠다고 알려주었고 그리고 왜 그런 질문에는 거부하겠는가 명확한 이유를 대며 밝혀 주었다.

그리고 이 논쟁전에 당신은 나에게 엄청난 실수를 이미 범했소!!.
당신은 나 개인의 어록을 함부로 맘대로 절취하여 당신의 그 하급 글에다 실었지..
무슨무슨 단상 이라는 제목의 글에다 말이지.

근데 거꾸로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봐...
내가 그대를 개독의 대표로 하여 그대의 이름을 거론해 가며 그대가 당당에서 한 말들
모두 리서치해서 모아다가 내가 원하는 목적의 글을 달성하고자
자네를 도마위에 올려놓고 'xxx 단상'식으로 하여 당당의 본글로 올린다고 생각혀봐...
당신 그것보고 가만히 있겠나?

나는 그래도 꾸~욱 참았다.
내가 짜샤 니가 무서워서 피한줄 알어?
한심한 친구.
쪼다같은 시애끼 똥이 더러워서 피해주려 하였다
그래도 무식한 니놈은 내 맘도 모르고 집요하고 질기게 달려들데...

그러구도 니가 목사냐? 아니... 인간이야?
사람이 되고 봐야 논쟁이고 뭐고 자시고이지...
당장 십자가 앞에가 무릎꿇어!!!!

긴 말할 것 없어요.
내친김에 지금부터 바로 정당한 논증을 시작 하자구!!
심판은 당당 운영자님이 보시면 돼고...




자...
내가 내놓은 삼단논법의 내용에 반박을 하시려거든 그 내용을 가지고 반박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럼 답변을 기다리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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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진 (1.220.135.107)
2013-03-22 16:24:36
얼마든지 환영합니다요.
논증만 뒷받침된다면야 내 이름을 거명하여 글 적는 것에 대해서요.

내가 쓴 글에 대해 누군가가 그 내용을 가지고 말하는 데에 그게 왜 기분 나쁜 일이라는 것이지요?

그게 기분나쁘면 글을 안 적으면 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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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빛 (207.210.3.147)
2013-03-23 06:01:00
기분이 나쁘면
글을 적지 말라.
음 맞는 말인..... 것 같지?

잘 들으소.

남의 글을 NEUTRAL 하고 객관적인 차원에서 비평은 할 수 있다고 보지만,
이름과 어록을 동시에 사전의 어떠한 언지도 없이 올려서 자기 맘대로
자기의 목적 달성을 위해 쓴다는 건 법적인 면을 떠나 도덕적인 문제이거든요.
그리고 목사님은 내가 현재 이곳에 자주 온다는 것도 알고 있는데, 기본적인 예의도 없나요?

특히 당신은 일반 사람이 아니예요.
이곳 당당에서 여러 사람들이 주목하는 공인이고 또 목사라는 타이틀이 있는 사람이요.
박목사는 목사가 자기 뜻을 이루기 위해 성도를 그의 정식 글에 올려서 맘대로 요리해도 된다고 진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요?? 하나님 앞에서 정직할 수 있는 부분인 거요 이거?

내가 미운거지. 그지?
나는 당신을 잘 모르고 미워할 이유도 전혀 없걸랑~

하는 행동이 하도 괫심했을 뿐이지.

그대가 이미 이실직고 했지만서도
'파급' 뭐 또.. '차단'이라는 단어를 썻거든..
당신 속내가 다 들여다 보이는데 뭐.
그대가 그런 권한이 있나?
파급... 차단 이런 단어를 쓰게?
그대는 무슨 다이아 몬드를 숨기고 있고
나는 그 다이라몬드를 뺴앗으려 달려드는 강도로 보이는가요?
도대체 뭘 차단한다는 것이요?
그런 마음가짐의 사람과 무슨 토의나 논쟁이 가능한가?


마지막으로, 나도 그렇게 하면되지 않느냐고?
한심한 친구네..
당신이 똥 밟았다고 나도 같이 밟기를 바라시는가?
난 그런 시간은 없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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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진 (1.220.135.107)
2013-03-22 16:22:33
이거야 원 도데체...
이미 몇차례 그 되지도 않은 삼단논법에 대해 반박하였건만...
무슨 생각으로 글을 읽는 것인지 모르겠네요.

다시 한번 더.
아담이 선악과를 먹음으로 범죄하였다. 오케이.

모두 원죄를 안고 태어난다.
어떻게 설명하느냐에 따라 차이가 있다.
죄라는 인자를 사람이 지닌다는 차원이라면 잘못이다.
아담 이후로 모든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다는 것이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모든 사람은 그 관계를 회복하여야 한다.
스스로의 능력으로 불가능하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뿐이다.
뭐가 문제란 말이지요?

본인이 아무런 대답도 못하고서는 같은 주장만 되풀이하고서는 이제와서 엉뚱한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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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지 더 (207.210.3.147)
2013-03-23 09:39:25
모두 원죄를 안고 태어난다.
어떻게 설명하느냐에 따라 차이가 있다.

==> 원죄를 안고 태어나나? 아니나? 뭐~ 이라도 흐리멍텅해..
확실하게 집어 보라고!! (y/n)
그리고 그에 따른 이유를 설명하고...



죄라는 인자를 사람이 지닌다는 차원이라면 잘못이다.

==> 아 감사. 이 부분은 틀림없이 거듭 인정하시는 군요.



아담 이후로 모든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다는 것이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 이건 뭐요? 이건 둘러대는 말이지. 내가 자꾸 말했잖습니까. 원래의 원죄론과 대속론이 어떻게 되느냐고? 드리고 예를 들어 가면서 설명했는데.. 모양새만 버꿨지 근본적으로 같은걸?



아담의 원죄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면 하나님과의 단절이고 뭐고 없을 진데..
설사 있었다 하더라도, 그건 아담에 한계되는 것이지 (유전설 부인하였기 때문에)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요.

ㅎㅎㅎㅎ

속시원한 답변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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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빛 (207.210.3.147)
2013-03-23 05:34:50
좋아요~ ^^
님의 주장대로 라면,

1. 왜 예수만이 대속자가 되어야 하나요?

2. 왜 대속해야 하나요?

3. 죄라는 것은 관녕적인 것인데 관념을 위해 죽었다?
관념이라는 것은 실체가 아닌 생각 즉 허상인 걸..
그리고 유전론이 틀렸다면 원죄의 의가 그래도 그대로 살아았나??
그럼 예수는 우리의 자범죄를 위해 죽었나?
아니잖아. 원죄를 위해 대속했다고 기독교에서는 말 하잖나?
실체도 없는 것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분이 왜 죽어야 하나??
(이미 유전설은 그대도 부인하였음)

4. 입빌립이 살인한다면
박창진 잡아다 족치고 죽이는 것이
정당한가? 이게 윤리적인가?

5. 대속론이 기독교인들에게 방종을 심어주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가?

6. 만약 그렇다면 좋은 것인가 나쁜것인가?

입빌립은 좋아서 웃겠지..
자기대신 박창진을 잡아 죽였으니까...

박창진씨의 설명을 들어 보도록 하죠.
자, 설명 좀 해보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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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빛 (207.210.3.147)
2013-03-23 05:40:04
그리고
'아담이 선악과를 먹어서 범죄하였다'라는 주장은 개독들의 주장이고 나의 주장이 아닌데 '오우케이는' 또 뭔 소리인가??
그러니, 다들 자네보고 난독증환자라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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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빛 (24.141.4.52)
2013-03-21 03:10:46
당당뉴스 운영자님께!
박창진씨와 제가 요즈음 약간의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것에 대해
죄송한 마음 그지 없습니다.

먼저 저의 신학적 견해가 많이 앞서가고 튀는 것이기도 하여
여러분들께서 반대하고 또 반박하시고 하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반박에는 전 별로 개의치 않으려 합니다.
저도 역시 저와 다른 신학적 견지에 대한 반반을 하고 있는 건 마찬가지이니까요.

박창진씨는 모릅니다 왜 제가 논쟁을 피하려고 했는지를...

그는 처음 그의 댓글에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박창진 (42.82.105.143)
2013-03-17 10:17:56

답변을 기대하며
제가 님을 대표로 하여 '진보신학 따르미들에 대한 단상'이라는 제목을 글을 하나 올렸습니다.
당연히 읽으실 터이고 답변도 기대하겠습니다.

교회 역사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알면 님과 같은 주장을 하지 않을텐데...)


기분이 무지무지 나빴습니다.
저의 허락도 없이 저 개인을 거론하는 공개적인 글을 목사가 올리다니오.

그래도 와 보라고 하여, 박창진씨가 올린 xxx 단상이라는 글을 보러 갔습니다.
저의 '참빛'이라는 이름까지 거론하며 그 동안 제가 당당에서 올렸던 댓글 중에서
본인의 글 목적에 맞는 것들만 추려 오려서 사용하였더군요. ㅎㅎ

그래도.. 참고, 저는 다음과 같은 간단한 댓글을 공손히 남겼습니다.

(박목사님!
목사님은 저를 모릅니다.)

그런데 거기에 한번 가서 보십시오.
얼마나 험담을 해 놓았는지를요...


이게 목사입니까?
저는 박창진씨를 잘 모릅니다.
그래도 목사라 하길래 존중해 드리려고 말의 시작마다 '목사님'으로 시작하여
최대한의 예우를 갖추어 드리려 애썻습니다.
하지만...



어쨋던, 좋지 않은 분위기를 만들어 낸 사람들은 결국 우리 둘이기 때문에
저의 댓글과 박창진씨의 댓글을 함께 공동책임으로 모두 지워주시기를 제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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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빛 (24.141.4.52)
2013-03-21 02:40:27
껄껄껄껄...
그래도 입만 살아가지고서는,,,
자네가..
정녕 이런말 할 자격이나 있다고 생각하시는가?

박목사!
정신차리시오.
내가 웬만하면 그 쯤에서 끝내려 했는데..
참는 것도 한계가 있는 것이여.
내 머뭇거리다가 조언 한마디 꼭 하야 쓰것소.

다음에 나도
네가 했던 그대로
'박창진 개독에 대한 단상' 이라는 제목으로
개독을 대표하는 박창진의 댓글을 다 끌어 모아서
내 맘대로 난도질해서 올려 볼까나?

그때 꼭 와서보고 댓글을 올려 주시기를?
기대하겠습니다~?
정신나간 놈이 아닌 이상, 이게 목사라는 자의 입에서 나올 소리인가?

마태복음 18장 15절에서 16절 좀 읽어봐~
뭐라고 쓰여있는지 똑똑히 보라고.

성도를 도마위에 올려 놓고 멋대로 난도질 해 놓고..
이게 목사란 놈이 할 짓인가?

미안하지만, 네 놈같은 한심한 개독은 나의 논쟁의 대상조차 되질않아~~

이래도 창진군이 목사라는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너의 두목 예수라는 자가 그렇게 버릇없게 하라고 가르치더냐?

한심한 친구 같으니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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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5
참빛 (207.210.3.147)
2013-03-17 02:56:33
원죄론이 대속론을 낳았고...
이 부족한 사람이 한 말씀 올립지요.

기독교의 대속론을 들여다 봅시다.

1. 아담이 선악과를 먹음으로 범죄하였다
2. 그래서 그 후손들은 모두 원죄를 안고 태어난다.
3. 그 죄를 씻는 방법은 오로지 예수의 피흘려 죽음의 대속뿐이다.

1항은 대전제, 2항은 소전제, 그리고 3항이 결론입니다.


정직한 눈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대전제와 소전제 모두 틀렸습니다.
그런데 그 결론은 과연 맞겠습니까?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것은
객관적 사실이 아닌 신화적 산물입니다.
아담이 실재 인물인가요?
6천년 전에 처음 인간?
실재상의 인물입니까?
타임머시인 타고 과거로 돌아간다면 아담을 직접 만날 수 있나요?
정직하게 스스로에게 물어 보세요!!

호모사피엔스는 지금으로 부터 약 20만년 전에
지구에 출현했는데 그럼 이건 어떻게 된 것이죠?
학문과 과학이 모두 다 사기인가요?
그렇다면, 아이들은 왜 기르치려 애쓰시고 고생하십니까?

어거스틴의 실수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의 원죄론은 대단한 신학적 고찰이었지만,
그는 창세기가 신화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다만 실재상의 사건으로만 알았던 거죠.

두번째 소전제도 틀립니다.
사람은 부모의 DNA를 받고 태어납니다.
죄라는 것은 개념적인 것인데
어떻게 생물학적인 DNA의 줄기를 타고
부모를 통해 다음 세대로 옮겨 갑니까?
이런 우매한 논리가 어디 있겠습니까.

논리적인 면을 떠나서라도..

대속론은 윤리적으로, 사회적으로, 법률적으로도
받을 수 없고 이해해서도 용납해서도 아니되는 개념입니다.

저를 이단으로 삼단으로 보고 마음껏 욕해도 상관없습니다.
입이 비뚤어 졌어도 피리는 바로 불라는 말처럼
할 말을 해야겠다 싶어 저의 정직한 마음을 전하는 것 뿐입니다.

아!, 그리고 한가지 더하여..
대속론은 양을 죽이고서
그들의 죄를 양에게 전가하여 신에게 죄를 빌었던
고대 유목민족의 종교행위적 풍습에서 가져온 발상인 것입니다.

근본주의 먹사들..
황당무개한 교리가지고
우매한 성도들 노예삼아 부려먹고
그동안 먹고 마시고 잘 놀았지요?

그대들의 밥줄을 지켜주었던 난공불락 철오성 같은 그 교리!
변화하지 않고 개혁하지 않으면
곧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견고한 바벨탑이 무너지고 바벨론이 그러하였듯이..
리플달기
5 12
익명 (122.34.1.201)
2013-03-17 19:02:31
대단함 한국신학과 교회의미래에 바람직한 안내자가되시기바랍니다.할렐루야. 미흡한점있거나 참빛님 의도에맞지않은부분있으면 이원로는 그렇게목회하다 끝냈구나하세요 안녕
본인에 의해 삭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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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4
참빛 (24.141.4.52)
2013-03-18 10:53:33
목사님!!
대단히 감사합니다.
우려의 목소리 격려의 목소리
잘 담아 듣겠습니다.

근데 저는 신학자가 아닙니다.
먹사는 더더욱 아니고요.
바른 신앙과 신학을 위해
작은 목소리를 내는 평신도랍니다.

꾸우~~벅
리플달기
0 0
박창진 (42.82.105.143)
2013-03-17 10:17:56
답변을 기대하며
제가 님을 대표로 하여 '진보신학 따르미들에 대한 단상'이라는 제목을 글을 하나 올렸습니다.
당연히 읽으실 터이고 답변도 기대하겠습니다.

교회 역사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알면 님과 같은 주장을 하지 않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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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진 (42.82.105.143)
2013-03-17 10:03:45
참 안스러워요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음으로 범죄하였다가 신화이다?
전혀 객관적인 증거가 없는 자신이 받아들이는 신학의 주장일 뿐인 것을 절대시하고 있으니...

원죄를 안고 태어난다.
아담의 범죄 이후에 모든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상태에서 태어나고 그 관계가 회복되어야 하는 존재가 되었다고 하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음.
그 관계 회복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유일한 길이라는 것이 성경의 일관된 진술임.
예수님에 의해 완성된 새 언약에서는.

그 이전에는 제사가 그 방법이었음.

황당무개한 교리?
변화하지 않고 개혁하지 않으면 곧 무너지고 말 것이다?
웃고 말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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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222.112.166.228)
2013-03-16 17:12:02
이래서 감리교 교리를 위험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래 말씀처럼 대속의 십자가 의미는 성경 내적으로 바울이 말한 것이며, 다른 해석의 여지가 없는 분명한 내용입니다. 어떻게 이런 글을 쓸 수 있는지 답답하기만 합니다. 불행하게도 보수주의가 당신의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요? 그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감리교 신학이 자유주의이며, 성경에서 결국에 벗어나는 모습은 당신이 직접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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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엘 (175.210.97.213)
2013-03-16 16:23:41
십자가의 교리는 성경에서 나온 교리입니다
바울서신에서 강조하는 복음의 핵심에는 십자가의 구속의 면면히 흐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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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진 (42.82.105.143)
2013-03-16 14:12:03
편파적인 한 관점
십자가의 의미는 ‘교리적 대속’이 아니라 ‘불의에 굴복하지 않은 위대한 정신’에 있다면 예수님은 로마의 압제에 대항하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로마가 유대인들을 압제하여 얼마나 많은 유대인들이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까? 높은 세금, 강제 노동 등등으로 말입니다.
불의에 굴복하지 않은 위대한 정신이라면 저항하여야지 왜 그냥 죽을까요? 무저항의 저항을 한 간디와 같이 저항하여야지요.
유대인 종교지도자들의 행태가 불의이고 그들로 인해 서민 유대인들이 고통을 겪었다고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그의 말과 행동 그리고 죽음이 불의에 굴복하지 않는 위대한 정신이라고 말하기에는 어폐가 있습니다. 더 강하고 명백한 로마의 불의에 대해서는 침묵하였으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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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112.222.123.131)
2013-03-17 23:02:12
선생 가게에 손님이 없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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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서 '마수' 했수다.

장사는 해야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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