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섬에서 들려오는 소리
1 
"여보세요... ?"  "쫘쫘.... 쉬쉬..." 
희미한 파도소리, 바람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돌섬에 사는 L 목사였다. 그는 뉴욕 돌섬바닷가를
가슴에 품고 사는 살아있는 헤밍웨이다.
그의 허스키 목소리에서는 짠 바다냄새와 싱싱한 돌상어
비린내가 늘 베어 나온다.

그와 헤밍웨이와 다른 점이 하나 있다. 그는 매사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무리 복잡하고 미묘한 것들도
그의 머릿속을 통과하고 나오면 파도처럼 간단하고 단순해진다.
또, 그는 뛰어난  靈力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숲 속에 살고 있는 내가
바다에 대한 그리움으로 목말라할 때마다 신통하게 알아차리고
전화를 걸어오곤 한다. 실로 신통방통한 사람이다. 
그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헤밍웨이처럼 자살을
생각할 사람은 아니다. 설령 저승사자가 동반자살을 하자며
물속으로  잡아끌고 들어가더라도 뿌리치고
거센 죽음의 파도를 혼자서 헤엄쳐서 나올 수 있는 사람이
바로 그다.
 
"목사님! 혹시 공자가 말했던 樂山樂水 라는 말의 의미를
아세요?"하고 내가 물었다.
"공자도 무슨 말인지나 알고 한 소리겠어?
그냥 해본 헛소리겠지."  역시 그 다웠다.
 
내  본심은 은근히
"바다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지혜롭고 산을 좋아하는 사람은 인자할 수 밖에 없다.
지혜는 바다처럼 단순함 속에 있고
仁은 산처럼 다양함 속에 있기 때이다" 하고
유식한 체를 좀 해보고 싶었는데.
 
뒤통수를 맞고  또 한 차례 으쓱해질 수 있는
아까운 기회를 놓친 셈이다.
 
그의 말이 맞다. 공자의 그 말에 무슨 의미심장한
뜻이 숨어있겠는가? 또, 설령 그렇다고 치자,
2천여 년 전의 공자의 속마음을
우리들이 어떻게 정확히 알 수 있겠는가.
공자의 말이 헛소리가 아니라 우리들의 해석이
헛된 짓들이지.
 
2
 
그런 그가 지난 일월에 지인들의 죽음을 알리는
우울한 소식을 몇 차례 이메일로 나에게 실어 날렸다.
내가 알고 있는 평소의 그답지 않게 심각해 보였다.  
항상 힘차고 즐겁기만 했던 돌섬 파도소리들도 왠지
슬프고 쓸쓸하게만 들려왔다.
 
그도 결국 도사도, 별난 통뼈도 아니었다.
나처럼 얼굴 한 쪽으로는 과거를 바라보고,
다른 한 쪽으로는 미래를 바라보는 야누스 얼굴의
소유자였고, 또 밤과 낮에 따라서 천국과 지옥의
사닥다리를 오르내리고 있는 지킬 박사였다.
 
몇 년 전에 서울대 김난도 교수의
"아프니까 청춘이다" 는 베스트셀러에 이런
젊은이들에 대한 충고가 실려있었다.
 
"시작하는 존재는 늘 아프고 불안하다.
하지만 기억하라! 그대는 분부시게 아름답다." 
 
아직 살아보지 않는 미래를 바라보는
젊은이들의 얼굴은 눈부시게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
찬란한 미래에 대한 꿈과 소망들이
얼굴에 투영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러시아의 시인 푸시킨이
이렇게 노래하지 않았던가.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슬픈 날을 참고 견디면 즐거운 날은 오고야 말리니.”
 
반면 지난 과거를 바라보는 늙은 얼굴은
검고 어둡다. 회한과 실망으로 점철된
과거가 얼굴에 투영되기 때문이다.
 
내가 알고 있는 미국최초의 억만장자 PAUL GETTY 는
그의 회고록에서 이렇게 뉘우쳤다.
그는 나이 24살에 이미 백만장자의 꿈을 이루고 돈버는 일에
실망하고 잠시 조기은퇴를 경험했던 사람이기도 했다.
 
"나는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면 결코 돈 버는 일에
인생을 허비하지 않겠다. 차라리 플로리다 해변에서
색소폰을 부는 방랑객으로 살 것이다."
 
어찌 그 뿐인가?
 20 대 약관의 나이로 세상을 재패했던
알렉산더 대왕은 통속의 철인 디오게네스 에게 무어라고
고백했던가?
 
"나는 이미 세상을 정복한 대왕이다. 그러나
죽으면 내가 묻힐 땅 한 평도 소유할 수 없는 가난한 존재다.
나는 벌거벗은 몸으로 온 세상을 가슴에 품고 사는 네가 부럽다.
만약 내가 다시 이 세상에 태어나면 너처럼 살고 싶다"
 
3
 
나이를 먹어가면서 야누스의 얼굴은 앞뒤가
서로 바뀐다. 젊은이들 앞 얼굴은 미래를 바라보고
늙은이들 앞 얼굴은 과거를 뒤돌아본다.
 
그래서 죽음에 가까워 올수록 후회하고
뉘우치는 횟수가 늘어난다. 죽기 9개월 전 쯤이 되면
그 징후를 주위 가까운 지인들도 감지할 수 있다고 한다.  
9 개월이면, 신이 어머니 자궁 안에서 태아를 생명의
양수로 키우고, 지키고 있던 기간이다.
 
명심하라.
까마득하게 잊고 있던 옛일을 두고
이유도 없이 사과를 하고 용서를 구하며,
갑자기 친절해지고 온화해지기 시작하면  
자신의 마지막이 가까워 오고 있음을.
 
그때가 되면 주위 지인들로 부터  
" 왜 갑자기 이러지?  혹시 죽으려고 마음먹은 것은
아니겠지?" 하는 힐난을 자주 듣게 될 것이다.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고 있는 사람들을 두고
"욕을 많이 얻어먹어서 명줄은 길겠다." 고 하는 것처럼.      
   
평생 죽기 직전의 사람들 수백 명을 인터뷰하며
죽음을 연구했던 "인생수업" 작가, 정신의학자인
엘리자베스 퀘불러 로스 는 이런 말을 했다.
 
임종 전 대부분 사람들이 지난 삶은 되돌아보며
가장 많이 뉘우치는 말은 
 "인생을 그렇게 심각하게 살지 않았어야 하는 건데" 라고.   
 
4
 
몇 달 전에 한 가톨릭 신부님과
점심을 함께 나눈 적이 있었다.
식사 중에 내가 농담반 진담반으로
 
"신부님 저는 되도록 빨리 죽어 하늘나라에
가고 싶습니다."라고 말을 꺼냈다
 
정색을 한 신부님이
"왜요?" 하고 그 이유를 물었다.
 
"내가 사랑하는 예수님을 만나 직접 해답을
듣고 싶은 질문들이 아주 많습니다."
  
그러자,
"나는 예수님과 똑같은 대답은 해 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평생 성경만 공부해 온 신부로써
예수님의 견해와 비슷한 대답은 해 드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답은 “예수님을 뵙고 직접 들으십시오."라고
대화의 문을 열었다.
 
마음속으로
"비슷? 진리에 비슷이 어디 있어?" 하면서
  
"예수님의 첫 산상설교에 나오는 마음이 가난한
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가난한 마음이요?  완전히 깨어지고 부서진
마음, Hopeless한 절망이지요." 하고 대답했다.
 
가난한 마음은
어머니 자궁 속 양수에서 살고 있는
태아 같은 마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5
 
운전을 하고 집에 돌아오는 차 속에서
문득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하는
찬송가 소리가 들려왔다.  
어린 시절 교회만 가면 밤낮으로 지겹고,
귀가 시리도록 들어 본 찬송가다.
차라리 눈물을 짜며 통곡하는 장송곡이라고
불러야 맞은 표현이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 가난한 시골농부들이야 말로
마음이 부서지고 깨어진 사람이었다.
 
집에 돌아 왔다. 자동차 시동을 끄고
차에 내렸다. 나의 따뜻하고 포근한 집,
그런데 엉뚱하게도 이런 에피소드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한 신실한 신부가 폐암말기에 의사를 찾아갔다.
의사가 "당신은 당장 모든 일을 집어 치우고
산속에 들어가서 약을 먹으며 요양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 6개월 이상을 살 수가 없습니다." 하고
조건부 사형선고를 내렸다.
 
그러자 "저 같은 가난한 성직자가 그런 목돈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럴
시간적 여유도 없고요." 하고 신부가 머리를 아래로
떨어뜨리고 시무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다면 할 수 없지요.  6개월 후에 신부님이 그토록 그리워하고
사모하는 천국에 갈 수밖에는...,"
 
의사의 그 말이 입에서 떨어지자마자,
 
"무슨 말씀을 그리 섭섭하게 하십니까?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당신의 권고를 따르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저더러 6개월만 살고 천국에 가라는 처방만은
내리지 마십시오."하고 황급히 병원 문을 열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아직은 나의 마지막 때가 당도하지는 않았겠지?
내 호흡의 박동 수가 빠르고 가파르지 않는 것을 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