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결심
                                                                                   
1
  
신년 첫날  케롤에게
"올해의 결심(resolution) 이 무엇이냐?" 고 물었다.
그녀는
"올해는 한국드라마 를 보는 시간을 줄이고
잠을 더 자고 싶다" 고 대답했다.
신년결심치고는 너무 시시하게 느껴졌다. 그런 결심이라면
아예 하지를 말지. 마음속으로  
"평소에도 나보다 1.5배는 잠을 더 자는 잠퉁수이면서..." 하고
생각하며 피식 웃어넘겼다.   
 
벌써 새해 두번째 달 첫주다.
세월의 속도는 자신의 나이에 비례한다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요즈음 나의 세월의 속도는
流水, 화살를 넘어서 총알보다 빠르다.   
 
그녀의 지난 한 달 동안 삶을 옆에서
유심히 지켜보아왔다. 신년결심을 지키려고
그녀는 무진 애를 썼다. 그렇다고 수면시간을
별로 늘인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노력을 하느라고
스트레스 만 더 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혹을 떼려다가 혹을 하나 더 붙이고 돌아 온
욕심쟁이 영감의 신세다.
그렇게 간단한 미래에 대한 자신의 약속
하나도 제대로 지킬 수 없는 것이
우리 인간들이다.   
 
하늘을 걸고도, 땅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라고 했던 예수의 가르침을 생각하니
마음이 씁쓸하기만 하다.
 
2
 
희랍신화에 유명한 판도라상자 이야기가 나온다.  
정치판에서 정치인들의 예상치 못한 온갖 부정부패,
비리들이 쏟아져 나올 때마다 언론인들이 자주
인용하는 이야기다.
 
그러나 판도라상자가 말해 주려는 진짜 의미는
그런 것이 아니다.
인간들이 목을 매고 있는 희망에 관한 교훈이다.
 
다른 불행들처럼 날개가 없었던지,
아니면 거북이 처럼 행동이 느렸던지
판도라 상자 속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것은
희망뿐이었다고 한다.
 
문제는 그 희망이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는
야누스의 얼굴의 주인공이라는 점일 것이다.  
앞면에는 찬란한 희망이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희망의 그림자 실망이 새겨져 있는 두 개의 얼굴이 희망의
진짜 모습이다. 희망있는 곳에는 반드시 실망이 따른다.   
 
"인간은 결코 행복할 수 있도록 창조되지 않았다"라는
프로이트의 주장도 그런 의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3
 
케롤의 잠에 대한 신년결심은 분명히 소박하고
또, 아름답기까지 했다. 결코 무리한 욕심이 아니다.
그러나 그 작은 결심이 결국 케롤에게
실망을 안겨준 것은 사실이다.
 
나는 그 사실을 두고 진정한 행복이 과연 무엇일까? 하는
의문으로 고민해 보았다. 아직껏 그 수수께끼에 대한 해답을
내 머리로는 풀지 못했다.
 
다만 내가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 언제였던 가는
기억해 낼 수가 있었다.  
"천국은 어린이 마음이 아니고서는 맛볼 수 없다" 는 예수님의
말씀이 100 % 맞았다.
내가 가장 행복했던 시절은 국민학교를 졸업하기 전
어린 시절이었다.  그 시절에는 과거나 미래에 대한 아무런 두려움이
없었다. 매일매일이 가슴뛰는 삶의 연속이었다.
  
거의 매일처럼 동네 친구들이 학교수업을 마치면
우리집 마당에 모여들었다.
그 당시는 지금처럼 호화스럽고 다양한 장난감들을
구경조차 할 수 없는 시절이었다.
구슬치기, 딱지치기, 팽이치기, 땅따먹기, 자치기,
연날리기, 공차기, 제기차기, 눈싸움..등  ,
그날그날 날씨와 기분에 따라 종목을 번갈아가며
선택했다.
 
구슬치기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종목이었다.
유일하게 돈은 주고 산 장난감이 유리구슬이기도 해서
그랬을 것이다. 안에 색깔을 넣어 아름답게 만든
유리구슬들 , 지금 생각해 보아도 가슴이 뛴다.
 
구슬치기는 땅바닥에 몇 개의 작은 구멍을 파놓거나
그려 놓고 그 구멍에 먼저 들어가는 사람이 승자가 된다.
상대 구슬이 구멍 가까이에 접근하면
엄지손가락과 검지손가락 사이에 넣고 있는
구슬을 엄지손가락으로 힘차게 튕겨 상대편
구슬을 맞혀서 물리치곤 했다.
 
땅거미가 내리면 바지주머니에서 철렁거리는
구슬들의 즐거운 노래소리들을 들으면서
집으로 달려왔다.
희미한 등잔불 아래서 방바닥에 구슬들을 쏟아놓고
몇 번이고 거듭해서 구슬을 세곤했다.
샐 때마다 번쩍거리는 기쁨과 환희들...
감히 그 무엇과 비교할 수 있었으리오.
 
가끔은 코피가 터지고, 박이 터질 정도로 서로
다투고 싸우기도 했다.
"나쁜놈! 다시는 너와는 놀지 않겠다" 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헤어지기도 자주 했다.
그러나  잠을 자고나면 그 전날의 불쾌했던 기억들은
머리 속에 말끔히 자취를 감추었다.
 
아침이면 동산에 떠오르는 태양처럼 나도
새롭게 태어나곤 했다.
우리들에게는 어제도 내일도 존재하지 않았다.
현재 뿐이었다.  
 
4
 
그러면서
어른들이 사는 모습을 점점 배워가기 시작했다.
 
종종 우리들 사이 싸움판이 커져서
어른들이 끼어들 때가 있었다.
그때마다 어른들은  
"저 나쁜 친구와는 절대로 다시 놀지 말라" 고
우리들을 욱박질렀다. 그리고 실제로 부모들간에
원수가 되어 지내곤 했다.  
우리 어린이들은 그런 부모들의 태도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부모들의 부당한 듯한
명령을 묵묵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
거절할 경우 십중팔구 처벌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나는 어른들은 아주 사소한 일에도
쉽게 원수관계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한번은 조용한 시골 동네를
아주 시끄럽게 한 대형사고를
내가 저지르고 말았다.  
 
내가 국민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는
자나깨나 반공으로 세상이 요란했다.
동네 어디를 가도 "자수해서 광명찾자!" "간첩잡아
애국하자" 는 포스터가 여기저기 벽에 붙어 있었다.
가끔은 간첩을 신고하면 30만원을 보상금으로 준다는 포스터가
나를 유혹하기도 했다. 30만이 얼마나 큰 돈인지
그 당시 내 머리로는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아주 큰 돈일거라는 것쯤은 어슴푸레 잠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크리스마스 때마다
이승만 대통령 할아버지에게 꼬박꼬박 편지를 쓰는
애국어린이이기도 했었다.
  
어느 여름 한 장날 저녁무렵이었다.
밀짚모자를 깊숙히 눌러쓰고 우리집 뒷산을 오르고 있는
수상한 사람의 모습이 내 눈에 띄었다. 아주 수상했다.
나는 슬금슬금 그 사람의 뒤를 따라가며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면밀히 관찰했다.
그 사람이 주위를 여러 차례 두리번거리고 살피더니
큰 소나무 아래서 몸을 숨기고 주저앉는 모습이 보였다.
 
"옳거니!  다른 간첩들과 무전연락을 취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숨을 헐떡거리며 경찰서로 달려가 간첩신고를 하고 말았다.
 
칼빈 소총으로 무장한 경찰관 두 명이 긴급히
뒷산으로 출동했다. 그리고 그 어른을 경찰서로 연행해서
조사를 벌였다.  조사결과는 혹씨 부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꿈으로 들떠있던 나를 여지없이 실망시키고 말았다.
그분은 이웃 동네에 사는 농부로 장에 왔다가
급한 대변을 보기 위해서 산에 간 것으로 판명이 났다..
그 당시에는 범죄신고자들에 대한 신변보호법같은
것이 없었다.
 
경찰들이 그분을 간첩으로 신고한 사람이 바로 나라는
사실을 밝히고 말았다. 당연히 그분은 대노했다.
거의 이 주 이상을 나에게 보복을 하겠다고
찾고, 쫓아다니며 나를 괴롭혔다.  
 
그때 어른들은 어린이들의 순진한 실수에도
관용을 베풀지 못하고
복수를 해야 직성이 풀린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닫게 되었다.
 
5
 
내 나이도 이제 耳順을 넘겼다. 옛날같으면
어른이 아니라 영감이라는 칭호를 받을 나이다.
 
耳順의 나이가 무엇일까? 귀뿐 아니라 눈, 코, 입으로
들어오는 어떠한 것에도 흔들리지않는 나이가 아닐까?
어떻게 생각해 옳고 그름의 선택을 버려야 할 나이일
지도 모르겠다.
 
어린애들처럼.. 

  

▲ 박평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