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교회를 묵상함 - 고경숙의 시 '배롱나무성당'

  공중전화부스 안으로 배롱나무 긴 그림자 끌고 들어와  무릎을 꿇는다 고해성사하는 그림자가 벗어놓고 간 배롱나무의 몸이 하얗게 꽃문을 연다 미사보 쓴 이 나무 아파트와 함께 컸으니 열일곱 성녀다 놀이터 아이들 정오 미사에 빠지지 않는 거룩한 일원이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이 성당엔 문이 없다 유치원 버스 기다리는 꼬맹이들의 바람막이인가 하면, 지친 이들 들어와 비 피하고 눈물 닦는 곳이다 은촛대 가슴에 품고 쪼그려 잠든 장발장의 마지막 피신처이다 세월을 잊고 떠돌던 시간이 탕진한 부피만큼 부수기를 반복해도 기꺼이 말간 얼굴들어 자신을 비춰보게 만드는 곳, 주머니 탈탈 털린 너와 내가 산뜻한 동전 한 닢의 헌금 갖다바쳐도 신과의 경쾌한 교신을 허락하곤 하는 곳, 시계탑 비둘기떼 한 차례 빵조각을 쪼아먹으며 마지막 성가를 부르고 바람이 강론하다 열어놓은 전화번호부 한 쪽, 지척에 두고도 서성이다 돌아선 간절한 발길들이, 찾다 만 이름들 낙서로 얼룩으로 남겨놓는 한낮,

   배롱나무성당 입구, 관리사무소에서 붙여놓은 '공중전화부스 철거안내문'이 근엄하다.
(고경숙·시인, 19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