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선교사를 포기하고
    2012년 11월 5일

J선생이 나를 빨리 오라고 부른 목적은 건물주인 할머니의 마음을 좀 달래기 위해서였다. 내가 할머니를 만나는 것이 그의 위기를 모면할 가장 좋은 방법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J선생은 바기오에 오기 전에 나의 고향 내가 섬기는 교회 바로 옆에서 장로교회를 섬기던 신실한 목사였다. 젊은 사람이 성품도 온유하고 성실하게 목회를 잘 하여 교회를 부흥시켜 확장하려던 계획을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 다음부터 소식을 모르다 약 10년 만에 바기오에 와서 만나게 되었다.

해발 2200미터, 산토 토마스 산에서 바라 본 일출 - 바기오

오랜만에 만나 그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는 8년 전에 선교사로 필리핀에 파송 받아 왔다가 1년 후 선교사의 직을 포기하게 되었다. 후원을 약속한 후원자들로부터 지원이 끊어져 더 이상 선교사역을 감당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기 때문이다. 가족을 먹여 살리기 힘들어 호구지책으로 시작한 것이 바기오로 단기 어학연수를 오는 한국학생들을 위한 영어 학원이었다. 생각보다 학원이 잘 안되어 월세는커녕 선생들 월급주기도 힘들었다. 매월 90만원 씩 내는 월세를 갚아보려고 필리핀인들을 위한 한국어 강좌를 개설하면서 그나마 교사들 월급과 공과금을 낼 형편은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월세를 낼 형편은 못되어 요즘 들어 3개월이나 월세가 밀리게 되었고, 참다못한 주인으로부터 최후통첩이 날아왔다. 학원을 중지하고 그만 건물을 비워달라는 주문이다.

전에 J선생이 사용하던 학원건물 - 지금은 비용절감을 위해 할머니 건물로 옮기다.

건물주인은 전문 변호사를 고용하여 건물임대업을 하는 큰 부자 할머니였다. 결혼도 하지 않은 70세나 되신 할머니가 65세 된 여동생과 함께 살며 부친에게 물려받은 건물로 임대업을 하시는 분이다. 그 할머니 소유로 대도로 변을 끼고 큰 빌딩건물이 몇 채나 되어 할머니는 매월 1천만 원 이상의 임대 수익을 올리는 부자이다. 필리핀 바기오에서 그 정도의 수입이면 서울 강남에 빌딩을 갖고 있는 분과 같은 부자이다. 그러나 아무리 부자라고 돈 없는 외국인 학원운영자를 위하여 건물을 무료임대해 줄 이유가 없다. 3개월이나 참은 할머니는 이제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이 그에게 냉정하게 건물에서 나가 줄 것을 요구한 것이다.

이런 와중에 J선생이 해결책을 모색하다가 세르반테스 산속에서 의료봉사 하고 있는 나를 생각하게 되다. 노인들이 다 그렇듯이 건물주인 할머니 역시 건강에 문제가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한 그가 조심스럽게 할머니의 건강상태를 여쭤본 결과 역시 여기저기 아픈 데가 많았다. 바로 그거다 생각한 그가 나를 불러 할머니에게 침술외교를 시도하였다.

J선생의 간절한 부탁으로 침구치료 도구를 준비하여 맘에도 없는 부잣집 할머니네 집을 방문하였다. 평소의 하던 습관대로 반가운 모습으로 할머니에게 인사를 하였다. 선교현장 어디를 가든지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모습이 몸에 배어서 할머니에게도 그렇게 다정하게 대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의외로 나를 맞이하는 할머니 얼굴에서 도도한 냉기가 뿜어 나오며 인사를 받지 않는다. 필리핀에 수없이 와서 수없는 사람들을 만나보았지만 이런 도도한 사람은 처음이다. 지난 번 세르반테스에서 시장을 처음 만났을 때 좀 거만하긴 했지만 이렇게 인사도 안 받을 정도로 냉랭하진 않았다. 내가 목사이며 치료사이기 때문에 나를 만나는 사람들은 거의가 존중하는 마음으로 나를 맞이한다. 그런데 이 할머니는 나를 빚을 갚지 않고 떼를 쓰는 사람의 한 패거리로 보는지 그렇게 냉랭하고 거만하게 대할 수가 없다. 내 자존심이 막 무너져 내린다. 젊은 사람도 아니고 70세나 되신 힘없는 할머니가 나를 우습게 여기는 태도에 기분이 더욱 불쾌해지다. 그러나 J선생을 봐서 모든 걸 참다.

할머니는 우리를 자기 집 거실로 안내하지 않고 손님을 접대하는 별채로 맞이하곤 시종일관 거만하고 냉랭하게 대한다. 치료를 받는다하여 정성껏 준비해 갔더니, 치료를 해 주는 대신 임대료를 안낼까봐 그러는지 당신은 치료를 받지 않겠다며, 별로 원하지 않지만 이왕 왔으니 동생이나 한번 해 줘 보라는 식이다. 65세 된 여동 생 역시 결혼을 하지 않고 언니네 집에서 함께 사는데 중풍이 걸려 걸음걸이가 시원찮다. 침 하나 들고 와서 사람을 치료하겠다는 내가 가소롭다는 듯이 중풍 걸린 동생이나 한 번 치료해 보라는 식의 태도에 기분이 더욱 나빠지다.

나를 맞이한 별채의 거실

내가 왜 이런 모욕을 받아야 하고, 왜 이런 사람들의 실험의 대상이 되어야 하나! 괘씸한 생각이 들어 모두 집어 치우고 박차고 나가고 싶다. 그러나 석 달이나 월세를 못 내어 죄송한 마음으로, 성난 고양이 앞에 아무 기력도 없는 생쥐 모습으로 서 있는 J선생을 보니 그냥 박차고 나갈 수가 없다. J선생은 말은 안하지만 어떻게 해서든 할머니를 잘 치료해 주어 할머니의 마음을 달래고 싶어 하는 심정이다. 그렇게 하여 건물에서 당장 쫓겨나지 않고 돈을 모을 때 까지 시간을 좀 벌어 보려는 생각이다. J선생을 봐서 할머니를 치료해 주기로 하다.

별채의 거실에서 할머니의 여동생이 뜸을 받고 있다.

이렇게 하여 꾸준히 4일 동안 두 할머니를 치료해 주고 내일이면 한국에 귀국할 날이 되었다. 주인할머니의 마음이 처음과 다르게 완전히 변하였다. 자존심이 있어 나에게 직접 요구하지는 않지만, J선생에게 말하길, 목사님이 이번에 한국에 돌아가면 언제 또 오느냐 물으며 다음에 오면 또 치료해 달라신다. 그리고 J선생에게는 그동안 밀린 임대료는 학원건물의 지붕수리와 내부 리모델링비로 대신하겠으니, J선생이 알아서 건물을 잘 수리하여 깨끗이 쓰라고 당부한다. 그동안 밀린 3개월 동안의 임대료를 당장 안 내도 되게 되었다. J선생으로서는 숨통이 좀 트이게 되었다.

할머니 댁을 막 나서려는 데, 자존심 많은 주인 할머니가 나에게 직접 말하지 않고 또 다시 거듭 J선생에게 부탁한다. 다음에 꼭 다시 와서 계속 치료해 달라고. 그 말을 들으니 나도 한마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고 냉랭하게 한마디 하였다.

“난 돈을 벌려고 이곳에 온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교회 목사로서 가난하고 병들어 고통스러워도 병원에 가지 못하는 불쌍한 사람들을 돌보기 위해서 온 사람입니다. 요번엔 J선생이 신신 당부하여 치료해 드렸지만, 다음에는 당신 같은 부자들을 치료해 주지 않을 것입니다. 돈 많은데 병원에 가서 치료 받으십시오” 라며 쌀쌀맞게 말하였다.

나의 속마음은 그게 아니었으나 할머니를 떠보려고 한 말이다. 부자의 딸로 태어나 평생공주처럼 호강하며 종을 부리고 어려움 없이 살아오신 분이라 이런 말은 처음 들어 볼 게다. 아마 속이 뒤집힐 것이고 기가 막힐 것이다.

그러자 J선생이 당황하여 중간에서 주인 할머니의 비위를 맞추며,

“목사님이 농담으로 하시는 말씀입니다. 다음에 오시면 꼭 다시 모시고 올 테니 걱정 마십시오.”한다.

그러자 내 말을 듣고 얼굴이 일그러지던 할머니가 J선생의 말을 듣고 처음으로 미소를 지어 보인다. 첫날부터 시종일관 무표정하고 냉랭하고 거만하였던 얼굴에서 갑자기 밝은 미소를 보이다니! 그 미소가 오히려 더 나를 기분 나쁘게 한다. 돈 많다고 사람 우습게 보는 건방진 할머니에게 엄한 경고를 내려주고 싶어 한마디 더 하다.

‘부자들은 천국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기보다 더 힘들다.’는 성경구절을 상기시켜 주며, “나는 가난하고 헐벗고 병든 사람들과 함께 하길 원하지 할머니 같이 그런 부자들과는 어울리고 싶지 않다”고 단호하게 거부하였다. 그러자 할머니가 아무 말을 못하신다. 할머니도 물론 천주교 신자이고 그 말이 성경말씀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리라.

할머니와 헤어지고 집에 와서 J선생에게 들은 말이다. 앞으로 내가 다시 와서 봉사 나가면 할머니도 나를 따라가서 봉사하고 싶다고! 그리고 당신은 그 나이 먹도록 여태껏 여행도 한번 제대로 다녀 본 적이 없다며, 다음엔 우리를 꼭 따라가서 봉사도 하고 여행도 하고 싶다고! 이 말을 들은 J선생이 벌써부터 다음에 내가 다시오면 할머니를 모시고 어디어디 가야겠다고 즐거운 상상화를 그린다. 밀린 월세 때문에 며칠 동안 고민하여 초췌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멋진 힐링미션과 즐거운 여행 계획으로 가슴 부푼 그를 바라보며 귀국길에 오르다.

다음 사역을 구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