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실용과 체면
   10월 25일, 목요일

비간시에서 간호조무사 보수교육의 강사로 온 교수가 어깨가 결려 지난 월요일 치료를 받은 후 매우 좋아졌다며 이번엔 허리도 치료해 달라고 어제 밤부터 간호사를 통하여 부탁을 하더니 아침 7시에 아직 출근준비도 안했는데 찾아왔다. 강의가 시작되면 시간이 없어 오전 강의가 시작되기 전에 치료를 받으려는 심산이다. 이어서 그의 아들도 골이 아프다하여 두 명을 치료 해 주다 보니 숙직 간호조무사가 바빠서 내 아침밥 차려줄 시간이 없었다. 간호조무사가 뜸을 떠 주는 사이 혹시 먹을 것이 있나하여 1층에 내려가니 벌써 간호사들이 출근하여 오전 업무준비를 하다가 바쁜 중에도 나의 아침을 차려주다.

나의 힐링미션을 적극적으로 도와 주는 현지인 간호사들

오전에 1층 보건소 담당의사에게 찾아 온 환자들이 많이 몰려 밖에서 접수를 받을 지경이다. 그런데 나에게 오는 환자들은 한 명도 없다. 갑자기 한명도 안 오다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환자가 없어 민속시장을 돌아보고 커피 한잔 얻어 마시려고 간호사 덴을 데리고 시청 시의회 사무실에 들르니 내게 치료를 받은 시청직원들이 반가워하며 맞이하다.

1층 담당의사에게 오는 환자들은 거의 모두 가난한 사람들이 와서 돈을 내고 진료를 받고, 나에게 찾아오는 사람들은 시청직원들을 비롯하여 거의 살만한 사람들이 찾아와 무료로 진료를 받고 간다. 거꾸로 되어가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기 위하여 이 먼 곳까지 찾아왔는데 정작 그들은 침뜸에 관하여 잘 모르기 때문에 찾아오질 않고, 서양에서 공부 꽤나 하고 돌아와 공무원이 된 분들이 서양의학에 매력을 잃고 면역요법을 선호한다. 어찌되었든 선교 차원에서는 공무원들과 친근해 진 후 가난한 자들을 만나는 것이 더 효과적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다.

시청직원들에게 커피를 얻어 마시고 잠시 쉬었다가 다시 예정에도 없는 오후 진료를 하게 되다. 연세 많이 드신 부시장님이 어제 치료해 주어 고마웠다며 오지에서 직접 채취한 야생토종꿀 한 병을 선물로 들고 오셔서 치료를 받고 가셨다. 시장님이 어제에 이어 다시 오셔서 세르반테스 로고가 인쇄된 티셔츠를 선물로 주시고 치료받고 가시고, 시장님 친구와 시의원들이 치료받고 가다. 그리고 다른 지역에서 간호조무사 교육을 받으러 온 분들이 교육을 마치고 밀려와 여섯 명의 간호사들이 붙어서 바쁘게 환자들을 돌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오전에 나에게 환자가 없었던 것은 오후에 시청 직원들이 받으려고 일반 환자들을 아무도 나에게 안 보냈던 거였다. 이들은 약을 먹지 않고도 치료가 되는 침구요법을 매우 기이한 의술로 생각하는가 보다.

오후에 쉥의 모친이 내 세탁물을 정성껏 세탁하여 가지고 오다. 아이들도 두 명 데리고 와서 용돈 조금씩 주다. 수간호사가 섭씨 600도의 고온의 스팀 소독기로 소독한 침을 가지고 오다. 비록 오지이지만 이곳은 보건소인지라 분만실을 비롯하여 웬만한 의료장비는 다 갖추고 있다. 의료봉사사역을 하기엔 매우 만족한 시설이다. 하나님이 예비해 두신 줄로 믿고 날마다 감사하다.

10월 26일 금요일

지난밤 무척 추워 자다가 두꺼운 옷을 껴입고 자다. 수술을 많이 받고 나이가 드니 추위도 남보다 더 타게 되다. 필리핀은 아열대의 더운 나라이지만 이곳은 산악지역이라 밤이 되면 제법 춥다. 그러나 아침에 햇살이 피고 나면 금방 차가운 기운은 사라지고 적당한 가을 기후가 되니 다행이다.

오늘은 필리핀의 국경일이라 당직 근무자 두 명만 나오는 바람에 오전 중 평소보다 좀 바빴다. 점심시간이 가까워 질 무렵 간호사들이 성당에서 결혼식을 하는 데 함께 가잔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 결혼식에 가느냐고 물으니, 신부가 시청 직원이므로 모두들 간다고. 나도 시청에 소속되어 있으니 함께 가야 된단다. 물론 우스갯소리다. 그들의 성화에 못 이겨 따라 갔더니 결혼예식은 이미 끝났고, 시장님을 비롯해 부시장, 시의원들이 모두들 필리핀 전통의상을 입고 와서 축하를 해 주고 기념사진을 촬영하는 중이다. 거만한 시장님이 그동안 나에게 두 번이나 치료를 받아 잘 아는 사이라고 내 옆으로 다가오더니 악수를 청하며 나를 데리고 결혼하는 커플에게 소개를 한 후 사진을 함께 찍잔다. 졸지에 알지도 못하는 신혼 커플과 사진을 찍다.

주례를 마친 천주교회의 젊은 신부가 내게 다가오더니 지난 주일에 한 번 본 경험이 있다고 나에게 악수를 청하고 반가워하다. 부시장과 그 외 다른 직원들도 모두들 나를 만날 때 마다 아는 체를 하다. 시청 직원들의 권유로 승합차를 타고 축하연에도 함께 가다. 그들 거의 모두가 금번에 나에게 치료를 받은 분들이다. 금번에는 본격적인 선교봉사를 하러 온 것이 아니고, 리서치를 온 것이므로 산속 원주민들 마을에 들어가지 않고 시청 측의 배려로 보건소에서 기거하는 바람에 이곳의 공무원들을 거의 모두 알게 되다.

시장님의 권유로 신혼커플과 기념사진을 찍다.

결혼 축하연은 신부의 집에서 하였다. 전통인지 모르지만 신부의 집 앞에 대형 천막을 세 개씩이나 설치하고 온 동네 마을 잔치로 벌인다. 아마 200여명 이상이나 되는 사람들이 모인 것 같다. 이렇게 잔치를 벌이려면 상당히 많은 돈이 들겠다. 가끔 한국 남자들이 필리핀 여자와 결혼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들도 신부 집에 와서 이렇게 잔치를 베풀었다면 상당한 돈이 들었을 것이다.

하객들이 붐비는 거실에서 부시장님과 식사를 막 마치는 중인데,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청바지에 줄무늬 티셔츠를 입은 젊은이가 바지주머니에 양 손을 찔러 넣고 까불거리는 모습으로 내게 다가와 아는 척을 한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좀 전에 성당에서 주례를 한 주임신부다. 그는 지난 주일에 예배 집례자 대열에 줄을 서 있다가 나를 보고 넌지시 “강남 스타일” 아느냐고 질문하였듯이 이번엔 마치 건달처럼 청바지를 입고 나타나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위에서 아래로 찔러 넣고 사람들로 붐비는 잔칫집을 이리 저리 다니며 두런두런 살펴보는 모습이 마치 건달 같다. 그래도 그런 그의 모습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미처 잔치집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이 밖에서 기다리다.

천주교 신부의 이런 꾸밈없고 자연스러운 모습을 접하며 마음속으로 이상한 묘한 감정이 생긴다. 민망스럽다고 표현해야 할까? 뭔가 가식적이며 위선적인 내 모습을 들킨 것 같아 창피하고 부끄러운 마음이 들기도 하다. 체면보다는 실용적인 면을 중요시하는 이들의 생활문화를 접하며 ‘권위’와 ‘자유’그리고 ‘진실’에 대한 개념들을 생각해 본다.

세속 사회에서의 ‘권위’는 지위와 직분에서 이루어진다. 사람들은 이를 이루기 위해 온힘을 다해 출세를 하려 노력하고 또한 많은 부를 축적하려든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의 권위는 그렇지 않다. 세상의 권좌를 버리고 사회의 후미진 곳을 찾아가 긍휼과 자비의 마음으로 불쌍한 사람들에게 사랑을 실천하시던 예수의 모습이 우리에게 모본이 되는 권위의 모습이다. 영적인 권위는 내가 주장해서 이루어질 일이 아니고, 헌신하고 희생하고 섬기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남들에 의하여 이루어지며 그렇게 살다 죽은 다음에나 이루어지는 권위이다.

예배가 끝나자마자 빨리 형식적이고 권위적인 성의를 벗어던지고, 결혼축하연에 평범한 한 청년으로 나타나 청바지를 입고 서성거리는 천주교 신부의 모습을 보며 예수님이 모친과 함께 가나의 혼인잔치에 가셨던 모습을 상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