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의 신앙, '감성'의 영성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1. 나이가 들면서

어느새 내 나이 만 쉰 다섯. 경찰의 단속을 피해 다니던 무성한 장발머리는 아련한 옛일이 되고 이제 눈썹마저 날로 희어지고 있다. 세월이 참 빠르기도 하지. "세월은 쏜살같이 흐른다"는 속담이 실감난다. 지금껏 무엇 하나 제대로 이룬 게 없고 솔직히 아직 인생이 뭔지 잘 모르겠는데 벌써 중년의 고개를 훌쩍 넘고 있다니 섬뜩하다. 

이따금 삶이 참 허무하다는 생각도 든다. 제철을 따라 눈부시게 피었다가 한순간 덧없이 지는 꽃 한 송이, 바람에 흩날리며 지상으로 낙하하는 한 장 낙엽, 서산마루로 뉘엿뉘엿 지는 석양이 문득 예사롭지 않게 보인다. 머잖아 지상에서 총총 사라질 내 목숨을 말없이 예시하는 듯하다. 

나이가 들면서 아니나 다를까 깜빡깜빡 건망증도 생겼다. 세수를 하느라 잠시 한구석에 벗어둔 안경을 못 찾아 이리저리 장님처럼 헤매는 것은 이제 일상사가 되었다. 집중력이 떨어지면서 지갑이나 열쇠를 분실하고 속상할 때도 가끔 있다. 전철에 두고 내린 우산만 해도 벌써 몇 개인지 모른다.      

하지만 나이 먹는 걸 마냥 슬퍼할 일은 아닌 것 같다. 하나가 비워지면 다른 하나가 채워진다는 말이 있듯이, 나이 들면서 사람이 한세상 사람답게 살아가는 데 정말 소중한 게 뭔지 조금씩 깨달아지는 것도 있으니 말이다.

2. 다시 '감성'으로

나는 원래 다분히 감성적 기질을 타고났다. 비록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내 고향은 지금의 '서울시립대학교' 캠퍼스 안이다. 당시는 서울시립농업대학이었는데, 학교 이름 그대로 농촌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곳이었다. 야트막한 산과 연못들이 있고, 논과 밭과 과수원이 펼쳐지고 철 따라 가지각색의 꽃들이 피고 지는 캠퍼스 안에서 태어나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자라면서 나의 기본 정서가 형성된 것 같다.

대학에서 영문과를 다녔는데 지금 내 책꽂이에는 영문학 관련 책이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하다못해 영문학의 진수로 불리는 셰익스피어 책도 없다. 셰익스피어에 관해 이것저것 배운 건 틀림없는데 머릿속에 남아 있는 건 달랑 한 구절, 『햄릿』에 나오는 주인공 햄릿의 유명한 독백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To be or not to be, that's the question)뿐이다. 내 자신도 믿어지지 않지만 정말 그렇다. 참 기막히고 부끄러운 일이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얼떨결에 신학에 발을 들여놓은 지 30년 가까이 되었다. 강산도 바뀐다는 10년의 세월이 세 번이나 지나간 셈이니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다. 이 긴 세월 동안 내가 신학을 통해 배우고 깨우친 게 얼마나 될까?

신학 서적을 열심히 읽고 또 1980년대와 90년대의 사회적 분위기에 휩싸여 소위 사회과학 공부에 재미를 불이면서 두루뭉실하고 건조한 이성과 관념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노란색 형광 사인펜으로 한 줄 한 줄 밑줄 그어가며 읽은 책이 꽤 많아 보통 2년 단위로 전세 계약이 끝나고 이사할 때마다 책을 옮기느라 애먹었다. 이제 버려도 될만하다고 여겨지는 책들을 몇 차례에 걸쳐 여러 박스 정리하고도 아직 책꽂이에 7-8백 권 가량의 책이 꽂혀 있다. 대략 신학 서적과 소위 사회과학 서적이 반반 가량이다. 그런데 지금 지난날을 돌아보면서 아쉬움이 크게 남는 부분이 있다. 문학을 등지고 신학과 사회과학에 발목이 잡히면서 나의 감성이 메말라 가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일이다.      

그러다가 우연히 6년 전부터 1주일에 한두 번 벗들과 정기 산행을 시작하면서 오랜 세월 까맣게 잊고 있었던 감성의 영역이 조금씩 되살아나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함께 산행하는 벗들에게 틈틈이 액자에 담아 선물하는 재미에 시를 4백 편 가량 쓰다 보니 그 자체가 나름대로 꾸준한 감성 훈련이 된 모양이다. 그래서 이제는 산과 바다, 하늘의 구름과 별과 달과 해, 철 따라 피고 지는 꽃들과 나무들과 꽤 친해졌다. 그리고 뜻밖에도 이 자연 풍경과 계절의 순환 속에서 드문드문 하나님의 얼굴을 뵙고 그분의 음성을 듣는 듯하다.

3. 특수계시와 일반계시

신학에 갓 입문해 신학의 기초들을 하나 둘 배우던 시절이 아련히 떠오른다. 조직신학 수업 시간에 '계시'에 관해 배웠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교수님께서는 참 편리하게도 계시를 '특수계시'와 '일반계시'로 딱 잘라 구분하는 것이었다. 특수계시는 글자 그대로 특수하고 특별한 계시,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계시이고, 나머지 모두는 일반계시의 범주에 속한다는 식의 이분법적 구분이 아니었던가 싶다.

나더러 믿음이 좋으냐고 물으면 자신 있게 "네, 저는 믿음이 좋아요"라고 말할 엄두는 도무지 안 나지만, 그래도 '예수'의 존재에 관해서는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하고 또 오랜 세월 정신적으로 방황하면서 늘 '화두'(話頭)처럼 붙들고 있지 않았나 싶다. 그래서 예수에 관해서는 나도 더러 내 자신이 느끼고 깨달은 만큼 소소한 얘깃거리가 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특수계시에 못지 않게 일반계시도 중요할 거라는 느낌이 점점 강해진다. 특수계시에 관해서는 교회에서 귀에 따갑도록 듣는 편이어서 어쩌면 식상한 구석도 있다. 하지만 우리 주변에 널려 있는 무수히 많은 것, 자연과 사회와 역사와 그 안에 살고 있는 다양한 사람과 사물을 통해 신을 발견하고 느끼고 만나는 일반계시는 신자들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은 거대한 처녀림 같다. 보석 같이 소중한 것들을 무궁무진하게 담고 있는 처녀림!

아쉽게도, 신학에서는 '거룩성'과 '세속성', '특수'와 '일반', '비범성'과 '일상성'을 이분법적으로 도식화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오래 하고 성경을 많이 알고 신학 지식이 깊은 사람일수록 자신이 몸담아 살고 있는 세속적 삶과 주변의 일상적인 것들을 은연중에 하찮게 여기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된다.      

과연 그럴까? 아닐 것이다. 세속성을 등진 거룩성은 교만하고 편협한 종교적 배타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고, 일상생활 속에 구현되지 못하는 비범한 신앙과 신학은 복음서에서 예수가 몹시 질타했던 바리새파 종교로 전락할 게 거의 틀림없다.    

4. 신앙 여행

영성이 참 깊고 성숙해지면 한 송이 꽃에서도 하느님의 얼굴을 발견하고 모래알 하나에서도 드넓은 우주를 느낄 수 있다고 했던가. 특별히 인디언들의 기도문을 보면 주변 사물과 자연스럽게 감정이입 할 줄 아는 그들의 선하고 맑고 깊고 고결한 영성에 깜짝 놀라게 된다.     

이 점은 몹시 중요하다. 모든 인간은 어떤 방향으로 신앙 생활을 하고 영성 훈련을 하기로 마음먹느냐에 따라 그런 영성에 접근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왕에 하는 신앙 생활인데 틀에 박힌 교리나 메마른 성경 지식에 스스로를 가두지 말고 마음과 정신과 영혼의 창문을 활짝 열어 크고 깊은 영성의 세계에 들어서는 멋진 경지까지 가 닿아야 하지 않을까. 이것은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지금 당장이라도 떠날 수 있는 '신앙 여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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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깊다
낙엽은 더욱 깊다

황홀한 봄날
불타는 여름의

푸르던 한 생(生)
고이 접고

온몸이 나래 되어
온 마음이 무(無) 되어

한마디 말없이
한치 미련도 두지 않고

훌훌 떠나는
저 비범한 낙하.

문득
나는 듣네

작고 여린 것이
툭 던지는 무언의 화두(話頭)

너는 얼마나 깊니?
(정연복, '성(聖) 낙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