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영겁과 찰나에서
   10월 20일 토요일

토요일은 근무하지 않는 날이지만 숙직직원은 물론이고 비번들도 나와서 책상에 앉아 밀린 일처리 하느라 바쁘다. 한국도 그런지는 모르지만 이곳의 보건소 공무원들은 실제적인 일 보다도 보고하는 자료가 더 많아 매우 힘들어 하는 모습이다. 지난밤 숙직 근무자도 밤새도록 자지 않고 책상에 앉아 바쁘게 일하였다. 조무사 16명이 24시간 동안 교대로 대기 근무를 하여도 아기 낳으러 오는 산모를 한 명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이들은 무슨 보고를 그렇게 할 것이 많은지 며칠씩 밤새도록 앉아서 보고 자료만 작성한다.

토요일은 휴무일이라고 환자들이 오지 않는 바람에 직원과 직원 가족 세 명만 치료를 해주고 오전 일과를 마치다. 오후에 너무 지루하여 이곳에 가 볼만한 곳이 없느냐? 여러분은 휴일이 되면 무얼 하느냐고 간호사들에게 물으니, 가볼만한 곳은 없고 휴일이 되면 집안일 하든가 논이나 밭에 가서 일한다고! 이곳 산속읍내엔 쇼핑센터나 음식점도 없고, 특별한 관광지도 없고, 즐길만한 오락시설이나 운동시설도 없어 시간나면 일하러 밭에 가는 것이 유일한 여가생활이다.

갑자기 한 간호사가 가볼만한 곳이 있다고 무릎을 친다. 가까운 강에 큰 다리를 세우고 있다고! 하여 셋이서 트라이씨클을 타고 한 10분 정도 가니 강이 나온다. 전에는 나무로 만든 출렁다리였는데 그 옆에 시멘트로 새로 다리를 놓느라고 공사 중이다. 이 산골에도 이제 문명의 세력이 이 다리를 넘고 들어 설 모양이다. 아직 완공되지 않아 위험스러운 교각이 드러나 있는데 그것이 볼만한 것이라고 자랑스럽게 구경시켜주려 온 것이다. 다리 길이도 약 50m 정도 밖에 되지 않아 우리네 시골 계곡에 놓는 다리보다도 짧아 보였다. 얼마나 보여 줄 것이 없으면 다리 공사하는 것을 보여주려 하였을까! 우리나라 인천앞바다에 놓은 다리는 그 길이가 장장 18km나 된다고 이야기 해주다. 그런데 그들의 반응이 별로 놀라지도 않고 신통치 않은 느낌이다. 너무 큰 다리를 소개하여 기가 죽었는지 아니면 지나치게 뻥을 치는 것으로 여겼는지 별 대단한 반응이 없다. 어린 사람들 앞에서 괜한 자랑을 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어 잠시 후회하고 자숙하다.

별로 여가를 즐길만한 장소가 없어 휴일이 되면 밭에 가서 일하든가 집에서 밀린 일 하는 것이 이들의 일상이라니! 도시문화에 익숙한 나로서는 아무 소일거리도 없이 하루를 그냥 보내기가 너무 지루하다. 그러나 루손 섬 북쪽 산악지대 한 가운데 하늘만 빠끔히 보이는 분지에 사는 이들은 단조로운 삶을 전혀 지루하게 생각하지 않고, 일하고 먹고 자고 생육하고 번성하는 원시부족시대의 삶을 부지런히 살아내고 있다. 어느 산골짜기를 가든지 아이들이 바글바글하다. 숲속에 가려 별로 집이 많아 보이지 않는데도 이 분지에 약 2만여 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다. 이곳의 인구는 점점 늘어날 추세이다.

요즈음 발전된 도시국가에서 인구감소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도시국가의 빠른 인구감소는 도시국가의 쇠퇴를 예고한다. 그러나 도시의 소멸이 지구촌 전체의 멸망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수 세기의 시간이 흐르면 번성했던 도시는 자연히 소멸되어 소아시아의 갑바도기아 지하 도시처럼 관광유적지로 변하고, 시골이 다시 도시모습을 갖추며 발전하게 된다.

내가 사는 충주만 해도 약 천년에 갈쳐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약 천 년 전 계명산 밑 남쪽을 바라보고 앉은 양지바른 곳은 옛 충주고을의 중심지로서 번화한 곳이었다. 그러나 내가 성장하던 시절 그곳은 황량한 산이었다. 20여 년 전부터 그곳은 다시 개발되어 양지마을이 들어섰고, 요즈음 충주의료원도 들어섰다. 이처럼 도시는 환경에 적응하며 수세기에 걸쳐 소멸되었다 다시 생성하기도 하며 변화와 발전, 생성과 소멸을 반복한다. 이는 우주생태계의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농경사회시절 오랜 동안 경작한 땅을 쉬게 하고 새 땅을 찾아 마을이 이동하듯이, 야생동물들이 먹이를 찾아 이동하며 살아가듯이, 속도는 다르지만 사람들도 지구환경변화에 적응하며 수세기에 걸쳐 지구촌을 서서히 이동하며 살아간다. 그 긴 순환역사의 한 지점에서 한 점의 구름조각처럼 왔다가 사라지는 것이 ‘나’라는 존재의 미약한 모습이다. 영겁의 세계에서 볼 때, 한 인간의 일생은 찰나에 그칠 뿐이다. 그 찰나를 사느라고 인간들은 허덕인다.

‘나’라는 인격체가 참으로 미약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원토록 없어지지 않을 영원한 존재로 사는 방법이 있다. 예수처럼 사는 것이다. 2천 년 전에 예수께서 세상에 오셨다가 약 30년 정도의 짧은 인생을 사시다가셨지만 그분은 지금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 살아서 역사하신다. 예수처럼 살고 예수처럼 죽는 자는 예수처럼 영생 하게 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런 영생의 삶을 동경하며 사는 것이며, 선교는 정처 없이 살아가는 인간존재를 영생의 삶으로 이끄는 구원의 과정이다. 선교는 대접받으러 가는 것이 아니고 대접하고 영접하러 가는 것이다. 그들과 함께 구름처럼 살다가 구름처럼 사라지는 것이다. 나의 모든 것을 우리 것으로 살다가 너희 것으로 남겨주고 미련 없이 한 점 구름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예수님처럼 영겁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은 찰나만 바라보고 사는 사람과 생각과 삶의 방식이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