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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성전 꼭대기, 그 위에서도 시험은 있다사이비이단집단 신천지의 성경 오남용에 대한 경계
김명섭  |  kimsubwa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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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2년 11월 19일 (월) 22:56:57
최종편집 : 2012년 11월 21일 (수) 16:14:40 [조회수 : 1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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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절 또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 내리라 10절 기록되었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하였고 또한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시리라 하였느니라 (누가복음 4장 9절~13절)

 

누가 하나님의 자녀인가?

단 한번 뿐인 인생을 어떤 존재로 살 것인가? 어떤 사람은 천사처럼 살고 어떤 사람은 짐승처럼, 아니 짐승만도 못한 삶을 살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로 살지만 어떤 사람은 탐욕의 노예로 하루하루를 산다. 어떤 사람은 정욕에 이끌려 살고, 어떤 사람은 거룩한 말씀에 이끌려 살아간다. 어떤 사람은 자신을 희생해서 수많은 사람을 살리기도 하는데 어떤 사람은 수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켜서 자신의 이기적인 탐욕만을 채우기에 급급하다. 우리는 삶에서 매순간 <하나님의 자녀로 살 것인가>,< 탐욕의 노예로 살 것인가>에 대한 선택을 피할 수 없다. 이러한 선택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던 예수님께 심각한 도전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 산다는 것이 이토록 힘들고 어렵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오늘날 수많은 기독교인들과 교회지도자들이 먹고사는 문제나 매력적인 유혹에 걸려 넘어져서 하나님의 자녀된 삶을 포기한채 탐욕의 노예로 전락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예루살렘 성전의 꼭대기

9절 또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 내리라.

예수께서 받으신 세 번째 시험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는 동일한 질문으로 시작된다. 마지막 시험이 이루어진 장소는 거룩한 예루살렘 성전이다. 사단의 시험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교회 안에 있다고 해서 거룩한 선교사업이나 교회 일을 한다고 해서 사단의 시험에서 예외일 수 없다. 탐욕은 삶의 전영역에서 도사리고 있는 까닭이다. 해서 많은 사람들이 거룩한 교회 일을 하다가 시험에 걸려 넘어진다.

   

교회건축을 하다가, 선교와 봉사활동을 하다가, 목회를 하다가 유혹에 걸려 넘어진다. 감리교회의 감독직은 본래 섬김을 위한 거룩한 성직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오늘날 감독제도는 명예욕과 권력욕을 앞세운 감투싸움의 도구로 전락해 버렸다. 이처럼 거룩한 일을 하다가 탐욕으로 열매 맺게 되는 일이 그다지 이상스럽지 않다.  마치 냉장고 안에서도 음식이 부패하고, 병원에서도 사람이 목숨을 잃는 것과 같은 이치다. 바울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통해서 아무리 외적으로 거룩한 성직이나 교회사역 일찌라도 얼마든지 탐욕에 붙들릴 수 있다는 사실을 엄히 경계한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갈 3:3) ,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롬7장 8절)  본디 계명은 거룩한 것이지만 죄는 계명을 통해서도 탐심을 이루게 할 만큼 집요하다. 한마디로 겉으로는 섬김을 말하지만 속으론 탐욕을 채우는 격이다.

10절 기록되었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하였고 또한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시리라 하였느니라.

 

   
“기록되었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마귀의 말은 ‘시편 91편 11절~12절’ 말씀의 인용이다. 놀랍게도 마귀는 성경을 사용해서 예수를 시험하고 있다. 거룩한 말씀이라고 할찌라도 오용하고 잘못 적용하면 심각한 독이 될 수 있다. 단편적인 진리를 전부로 알고 전가보도(傳家寶刀)처럼 함부로 적용하는 요절신앙의 위험성을 보여 준다. 아무리 좋은 약도 용도에 따라서 쓰지 않으면 독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예전엔 항생제(일명 마이신)를 만병통치약 처럼 여기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항생제의 오남용은 정작 항생제가 필요할 때 약효 낼 수 없게 하는 치명적인 문제를 일으킨다. 이와 마찬가지로 제 아무리 진리를 담고 있는 성경말씀일찌라도 전체적 의미를 파악하지 않고 자기 멋대로 잘못 해석하거나 잘못 적용하면 항생제의 오남용과 같은 위험한 일이 될 수 있다.

 

십계명 가운데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말씀에 등장하는 ‘망령’이란 단어는 ‘오용(miss use)’과 ‘남용’을 뜻한다. 성경을 인용한다고 해서 모두 진리의 말씀은 아니다. 얼마전 국회에서 성추행 발언으로 사회에 지탄을 받던 국회의원을 제명시키는 자리에서 또 다른 의원이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는 말로 면죄부를 제공했던 일은 성경 오남용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말할 수 있다.


한 데나리온에 밀 한되와 보리 석되에 담긴 뜻

오늘날 한국교회를 위협하는 대표적인 사이비 이단집단 신천지의 포교전략은 소위 ‘무료성경공부’다. 그들은 성경을 가르치면서 성경이 본래 전하는 복음의 왜곡을 일삼고 있다. 대표적인 일예가 계시록 6장 6절에 대한 해석이다. ‘한 데나리온에 밀 한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되로다, 또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 말라 하더라’ 신천지는 이 말씀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밀 한되’는 자신들의 교주이며 ‘보리 석되’는 신천지의 몇몇 지도자들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또한 감람유와 포도주는 신천지 추종자들을 가리키고 있다고 터무니 없는 주장을 한다. 하지만 이 말씀은 본 뜻은 결코 특정인을 지칭하는 예언 따위가 아니다. 계시록은 시종일관 환란에 대처하는 참된 믿음의 자세를 증거하는 책이다.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다. 한 데나리온으로 밀 한되와 보리 석되 밖에 구입할 수 없다는 것은 혹독한 경제적 ‘인플에이션(inflation)’을 뜻한다.

마치 오늘날 세계적인 경기침체로 인한 물가상승과 같은 심각한 경제위기상황을 가리킨다. 감람유(올리브유)는 전통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를 상징하며 포도주는 기쁨을 의미하는 대표적인 상징이다. 해서 이 말씀이 증거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인간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극심한 심판으로 인해 벌어지는 환란 가운데서도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감람유)와 삶에서 누리는 기쁨(포도주)만은 결코 빼앗기지 않게 되리라. 다시말해, 어떠한 형편과 처지에서도 참된 믿음의 사람들은 은혜의 감람유와 기쁨의 포도주만은 빼앗기지 않으리라는 것이요,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위로를 증거하는 말씀이다.

믿음이라고 다 같은 믿음이 아니다. 맹신과 광신의 위험에서 벗어나는 길은 바른 앎에서 시작된다. 루터의 종교개혁 구호는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말씀'이었다. ‘오직 말씀’을 주창했던 루터가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 하는 작업을 종교개혁의 중요한 과제로 여긴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라틴어로 기록된 성경이 사제들만의 전유물이었기 때문에 성경 전체의 메시지가 사제들에 의해 오용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독일어 번역을 통해서 평신도가 스스로 성경 전체를 읽게 해서, 사제들이 단편적으로 성경을 인용함으로 성경이 증거하는 본래적 메시지를 왜곡하는 악습을 막아내기 위함이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5년 앞두고 있는 지금, 제2의 종교개혁은 최우선 과제는 신학자들이나 목회자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는 성경해석의 권한을 평신도들에게 나눠 주는 것이라 여긴다. 그래서 평신도들에게도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는 힘과 분별력을 키워주는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왜냐하면, 오늘날 잘못된 신앙이 판을 치는 까닭은 바로 일부 목회자들에 의해서 성경이 전하는 본래적인 메시지가 왜곡되고 멋대로 해석하는 잘못된 성경해석에 기인한다. 신앙인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올바르게 행하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누구나 말씀을 바르게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될 때 비로소 말씀대로 살아가는 길이 열리게 될 것이다.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12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말씀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마지막 시험은 마귀가 예수를 성전꼭대기로 데리고 올라가서 그 위에서 뛰어내려 보라는 내용의 시험이었다. 물질과 탐욕에 대한 앞의 두 가지 시험과 달리 세 번째 시험은 그 의미를 쉽게 이해하기 어렵고 실로 난해하기만 하다. 하지만, 성경의 난해구는 언제나 더 깊고 중대한 메시지를 증거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본문에 집중해보자.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하나님이 하시는 일, 하나님의 뜻)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영광은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이 아니라 반드시 하나님의 방법으로 드러내야만 했다. 왜냐하면 그래야 하나님이 하신 일임이 확실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한 좋은 예가 창세기에 등장한다. 아브라함은 건강한 애굽여인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아서 자신의 후사를 이어가려고 했다. 늙은 돌처녀 사라보다 젊은 애굽여인 하갈이 생산이 용이한 것은 상식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달랐다. 하나님의 방법은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사라를 통해서 이삭을 낳아 후사를 이어가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역사는 내 계획 내 계산과 달리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식으로 이루신다. 왜냐하면, 단순히 후사를 잇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이 일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하나님의 하시는 일, 곧 하나님의 뜻)을 확실히 드러내기 위함이다.

만일 마귀의 말대로 예수께서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고 천사들이 떠받들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상상해보자. 아마도 놀라운 광경을 지켜 본 사람들이 '저분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아'라고 추앙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효과적이고 손쉬운 방법일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방식은 아니었다. 하나님의 뜻은 영광스러운 성전꼭대기가 아니라 수치스런 십자가의 꼭대기였기 때문이다.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깜짝쇼가 아니라 도리어 사람들의 멸시와 조롱과 핍박을 받는 참혹한 죽음이었다.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예언한대로 '고난 받는 종의 모습'을 통한 십자가의 구원이었다. 하나님의 뜻인 ‘십자가’가 아닌 다른 방식을 유혹하는 사단의 시험은 그후로도 계속되었다. 십자가를 지지 말라는 베드로의 유혹과 ‘이잔을 내게서 옮기시 옵소서’라는 겟세마네 기도를 통해 아마도 손쉬운 방법에 대한 시험은 마지막까지 예수님께 유혹이 되었다는 사실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세속적인 영광인가, 험한 십자가인가

유대인들은 지금도 영광으로 임하실 메시아를 기다린다. 유대인들이 고대하는 메시아는 칼과 창으로 군림하는 다윗과 같은 위대한 영웅의 도래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대표적인 이단종파인 통일교의 문선명은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는 실패자요, 세속적인 성공을 거둔 본인이 진정한 구원자라는 터무니 없는 주장을 한다. 오늘날 고난 없는 영광과 십자가 없는 구원을 강조하는 일부 타락한 목회자들의 메시지들도 이러한 마귀의 달콤한 유혹과 다르지 않다. 예배당을 건축할 때도 이런 유혹을 종종 받는다. 로또복권이 당첨되거나, 누군가의 전폭적인 헌납으로 단번에 이루어지길 바라곤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방식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나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교회가 성도들의 눈물의 기도와 기쁨의 헌신을 통해서 이루시길 원하시는 까닭이다. 건물과 함께 성도들이 거룩한 성전으로 함께 지어져 가길 원하신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건물이 아니라 그 과정을 통해서 변화와 성숙을 바라시기 때문이다. 교회건축을 위해서 축복을 빌미로 해서 헌금을 강요하거나 억지로 작정시키는 행위는 하나님의 방식이 아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내게 예물을 가져오라 하고 무릇 즐거운 마음으로 내는 자에게서 내게 드리는 것을 너희는 받을찌니라.”(출애굽기 25장 1절~2절)

'맥아더의 자녀를 위한 기도문'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원하옵나니, 그를 평탄하고 안이한 자리로 인도하지 마시고, 고난에 직면하여 인내하고 분투할 줄 알 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폭풍우 속에서 용감히 싸울 줄 알고 패자를 관용할 줄 알도록 가르쳐 주옵소서” 이런 기도를 올리는 아버지의 바람은 힘들고 어렵지만 더 소중한 것을 얻게 되길 바라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알 수 없는 환란과 원치 않는 고난의 길로 그 자녀들을 기꺼이 인도하신다. 그것은 사랑하는 자녀들이 고통 가운데 죽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시련을 통해서 성숙하게 되길 원하시는 까닭이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내 생각 보다 높고, 내 뜻 보다 크신 하나님의 계획과 방식을 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을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없는 내 방식대로 내 욕망을 채우는 도구로 이용하려고 한다. 내 뜻대로, 내 계획대로 되지 않으면 불평하고 원망한다. 하나님을 부르면서도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을 깨닫지 못하고 쓸데없이 방황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맛사의 시험

예수께서는 마귀의 간교한 시험을 구약성경 신명기6장16절 말씀을 인용하시며 물리치셨다. 본문이 증거하는 참된 메시지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맛사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었는가>에 대한 전이해가 반드시 필요하다. “너희가 맛사에서 시험한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라.”(신6:16)  맛사는 광야의 지명이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이 아니라 광야로 인도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물도 없고 먹을 것도 없는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다. 중요한 사실은 그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불신자들이 아니라, 애굽에서 열 가지 재앙을 직접 목도한 사람들이며, 갈라진 홍해를 두발로 걸어서 통과했던 기적을 직접 체험한 이들이였다. 하지만, 계속되는 문제들 앞에서 그들의 체험한 기적은 소용 없었다. 한마디로 놀라운 기적이 그들에게 온전한 믿음을 주지 못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맑은 물이 흘러 넘치는 가나안을 원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물 한방울 없는 맛사의 광야로 그들을 인도하셨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물이 없는 맛사로 인도하신 하신 까닭은 무엇인가? 바로 그곳에서 바위를 쳐서 물을 내시는 삶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체험하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목이 곧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뜻을 미쳐 깨닫지 못했다. 그래서 원망과 불평 가운데 광야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다. 놀라운 사실은 광야에서 그들의 염려대로 굶어죽거나 목말라 죽은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었다. 그들이 광야에서 소멸한 원인은 단 하나, 하나님에 대한 불평과 원망 때문이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라.”(신8장 2절~3절)

 

오늘날 스스로 제법 믿음이 좋다고 자부 하는 이들도 자신이 원하는대로 되지 않으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고 불평했던 목이 곧은 이스라엘 백성의 전철을 밟는다. 교육전문가들은 자녀를 타락시키는 가장 빠른 방법은 자녀가 원하는데로 모든 걸 다 해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현명한 부모는 절대로 이같은 실수를 하지 않는다. 지혜로운 부모는 자녀가 원하는게 아니라 자녀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만을 해준다. 하물며,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녀된 우리가 원하는대로 모든 것을 들어 주실리 만무하다. 하나님 아버지는 자녀된 우리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시다. 이 사실을 진정으로 깨닫게 되면, 비록 내가 이해할 수 없고 원하지 않더라도, 내 생각과 다르고 이해할 수 없을찌라도 아버지 되신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나에겐 최선임을 안다. 이것을 아는 것이 바로 믿음이다.

이것은 덮어놓고 믿는 무조건적인 믿음이 아니라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이다. 아버지 되신 하나님의 선택과 그분의 뜻을 온전히 존중하고 신뢰하는 믿음이다. 이 믿음은 오직 위기의 순간에만 드러난다. 참된 믿음은 나에게 주어진 상황에 대한 순종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참된 믿음의 사람은 알 수 없는 문제와 원하지 않는 상황을 만날 때 눈앞에 문제가 해결되기만을 간구하기 보다 당면한 상황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뜻을 분별 할 수 있는 지혜를 간구한다. 오늘 내가 두발을 딛고 있는 현장에서 주님이 원하시는 바가 무엇이며, 주님을 위해서 무엇을 행할 것인지를 깨닫게 해달라고 간구한다. 혹, 지금 당신의 삶에서 '물이 없는 맛사'와 같은 일을 경험하고 있다면 “주여, 감당할 수 있는 힘과 지혜와 용기를 주옵소서” 라고 기도해야 할 일이다.


어찌 시험을 기쁘게 여기란 말인가?

13절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

 

   

마귀의 시험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고 그 이후로도 계속되었다. 앞서 언급한대로 '십자가를 지지 말라'는 베드로의 충고와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 옵소서' 겟세마네의 기도를 통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 모든 유혹을 떨쳐 버리시고 마침내 멸시 천대의 십자가 꼭대기 위로 올라가셨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아들 예수를 삼일 만에 부활의 영광으로 마침내 승리하게 하셨다. 하지만 우리가 주목할 것은 부활의 영광으로 나타난 결과가 아니라 십자가에서 부활까지 이어지는 과정이다. 예수께서도 시험을 받으셨다. 하물며 우리랴, 시험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하지만, 믿음이 없는 사람은 넘어지지만 믿음의 사람은 시험을 극복하고 마침내 승리한다.

 

누구나 순탄한 삶을 살아가길 원하지 시험과 고난을 받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없다. 하지만 인생의 여정에서 원치 않는 고난과 시련이 어김없이 찾아온다. 시험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대부분 왜 내게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 원망하고 불평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야고보서는 시험에 대해서 전혀 다른 해석을 하고 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시험을 오히려 기쁘게 여기라니 도대체 무슨 말인가?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약1장 2절~3절)

 

시험은 괴로운 것이지만 믿음(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으로 시험을 견디어 내면 인내를 이루게 된다. 오히려 이전보다 더 강하게 되고 부족함이 없는 온전한 인격으로 우리를 성숙시키는 기회가 된다는 말이다. 실제로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그때는 당장 견디기 힘든 고통이였지만 지내고 보면 나름의 이유와 의미가 있었다는 것을 어려움이 지나고 난 뒤에야 뒤늦게 깨닫곤 한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장13절) 하나님께서는 감당할 시험을 주시고 뿐만 아니라 시험을 당할 때에 시험을 이길 힘을 하나님께서 친히 부어 주신다고 약속하셨다.

시험 후에 임하는 권능

14절~15절 예수께서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매 뭇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시더라.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이 말씀은 우리에게 참으로 중요한 사실은 가르쳐 주고 있다. 시험을 받을 때, 고난만 있는게 아니라, 동시에 하나님의 놀라운 권능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시험을 당할 때 비로소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까닭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모진 시련과 시험을 허락하시는 까닭은 시험을 통해서 하나님만이 참된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하시길 원하신다. 경제적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이 물질의 주관자이심을, 육체적 질병으로 하나님께서 생명의 주관자이심을, 가정의 문제를 통해 인생의 주관자이심을 몸소 깨닫게 하신다. 뿐만 아니라, 나와 같은 시험으로 고통을 당하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시험을 견디고 마침내 승리한 나를 통해서 위로할 수 있게 하신다. 예수께서 사십일간 광야에서 시험을 당하셨다.

시험 후에 예수께서는 파김치가 돼서 무기력해지신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성령의 권능으로 돌아오셨다고 누가복음은 기록한다. 시험 후에 예수의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칭송을 받게 되셨다는 것이다. 지금 삶의 광야 같은 시험을 통과하고 있는가? 가정의 시험을 당하고 있는가? 건강의 시험인가? 자녀로 인한 시험인가? 두려워하거나 원망할게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해야 할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시험을 이길 힘을 주시고 승리하게 하신다. 그리고 마침내 시험을 이겨 낸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권능을 부어 주신다. 그래서, 시험을 이겨낸 우리 자신을 통해서, 시험으로 고통 받는 또 다른 이들에게 새희망과 구원을 전하게 하실 것이다.

 

   

 

<뜻으로 읽는 누가복음, LUCAS> 중에서

‘Lucas’ is the Latin form of the Greek first name Loukas (Λουκᾶς) This name is given to honor Luke the Evangel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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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명호 (110.70.31.58)
2012-11-25 01:54:58
신천지가 문제이긴 한데??
참으로 좋은 말씀 잘 보았습니다. 신천지가 문제이긴 문제입니다.

그런데 요즘 한국의 교회들이 교인들의 수가 왜 이렇게 줄어가는지 이유가 무엇인지? 왜 이렇게 교회마다 다툼이 많이 일어나는 것인지? 금권선거, 목회자 성추행, 교회세습, 목회자와 교인들간의 고소, 고발, 왜 이렇게 문제가 많은 것인지??

그런데 우리가 이단이라 알고 있는 신천지는 왜 그렇게 날이가면 갈수록 그 수가 늘어나고 발전하는 것인지 그리고 신문을 보니 달마다 수천명씩 수료를 하던데 이건 어찌된 일인지??? 왕 궁금,,

어느 신문에 보니 교회에서 빠져 나간 인원이 일부는 신천지로 일부는 천주교로 일부는 절로,,,정말 이렇게 가다가는 교회는 끝나고 우리가 그렇게 이단이라 하는 신천지에 우리 교인들이 다 가는 것은 아닌지 걱정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시면 이렇게 신천지가 흥할 수는 없는 것인데 혹시 우리가 잘 못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의심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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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풍 (124.28.157.187)
2012-11-28 05:38:11
예수님이 소경의 눈을 띄워주니 유대인들이 하나님께는 영광 올려드리라 하고는 눈을 띄워 준 예수님을 죄인이라고 했다. 그럴 때 눈을 뜬 소경이 하는 말 창세 이후로 소경의 눈을 뜨게 한 것은 하나님께로 왔다는 증거이다(요9장). 예수님이 마귀의 시험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겼듯이 사람들이 신천지로 가는 것도 말씀 때문에 간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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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병혁 (116.124.1.31)
2012-11-21 11:22:22
말씀을 통하여 온전히 시험을 이기게 하옵소서
주여! 오늘도 말씀으로 우리를 온전한 신앙인으로 양육케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구세주 예수님께서 시험받으신 사건을 통하여
우리 모두(교역자, 평신도 등) 겸손히,
또한 자기의 영광을 드러내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자가 되지 않기를 간구합니다.
자기의 영광을 드러내고 사탄의 종 노릇하여 패망한 무리(문선명, 박태선, 이만희)들을 바로 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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