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꿈인가? 생시인가!

10월 17일, 수요일

인천공항에서 오전 8시 10분 발 필리핀 항공기를 타고 마닐라 아키노 공항에 내리니 오전 11시 10분이 되다. 시차 1시간을 감안하면 정확히 4시간이 걸린 셈이다. 아침 비행기는 처음이다. 잘 알지도 못하는 곳에 밤에 내려 주소만 들고 호텔을 찾아 가던 때보다 훨씬 기분이 좋다. 곧 공항택시를 잡아타고 빅토리아 라이너 터미널을 가다. 인천공항에서 1000페소 바꾸어 온 것이 너무도 정확히 맞아 떨어져 여유 페소가 전혀 없다. 바기오 행 버스표를 끊고 나니 겨우 점심 먹을 금액만 남다. 매점 앞에 서서 간단히 필리핀식 1식 1찬으로 점심을 때우다.

내 스마트폰이 최근에 나온 갤럭시S3 인지라 심카드가 맞는 것이 없어 교체를 하지 못하는 바람에 바기오에서 기다리는 전선생에게 연락을 하지 못하여 망설이는데, 버스 안에서 친절한 한국 젊은이가 전화를 빌려 주어 가까스로 통화되다.

현재와 과거가 공존하는 세상, 첨단과학과 미개문화가 공존하는 나라 필리핀의 드럭스 버스에선 와이파이가 터지고 한국으로부터 카톡이 오는 휘파람소리가 들린다. 카톡을 열어 드럭스 버스 내부를 찍어 보내다. 차가 상당히 멋있다는 리플이 돌아온다. 차 안에 화장실까지 있는 버스는 처음 타 본다. 구경도 할 겸 볼일을 보러간다. 기내의 화장실 보다는 좀 못하지만 그런대로 쓸 만하다. 문제는 손잡이를 꼭 잡지 않으면 흔들리는 버스로 인해 언제 이마를 천정이나 벽에 부딪칠지 모른다. 차창 밖 들판에 넓게 펼쳐진 하얗게 핀 갈대숲이 너무 아름다워 카톡으로 보내려고 사진을 찍어본다. 버스의 빠른 속도가 촬영을 방해한다.

어느덧 해가 떨어지고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다. 목 베개를 베고 눈을 감고 잠을 청해본다. 잠이 오지 않는다. 드럭스 버스가 컴컴한 밤을 헤치고 계속 산속으로 힘겹게 달려 올라간다. 해발 1500미터 가까이 올라가니 멀리 산속 숲속에 묻힌 집들에서 새어나오는 전등 불빛들이 마치 하늘의 은하수처럼 반짝거린다. 까만 산은 하늘로 변하였고 수많은 집들은 은하수로 변하였다.

6시간 15분 만에 바기오 터미널에 도착하니 전선생이 나를 픽업하기 위하여 기다리고 있다. 충주 집에서 떠난 지 30여 시간 만에 전선생네 집에 여장을 풀고 밤 8시는 되어 늦은 저녁을 먹고 나니, 이곳에 오기 전부터 며칠 동안 이런 저런 문제로 피곤이 겹쳐 등허리에 담이 결려오던 것이 심하게 도져 몸을 가눌 수도 없게 되다. 미안함을 무릅쓰고 전선생에게 부탁하여 뜸을 뜨고 잠을 청하다.


10월 18일, 목요일

바기오에서의 아침.
담이 여전히 풀리지 않고 너무 피곤하여 오늘 하루 쉬고 싶다.
그러나 방학이 되어 세르반테스 친정에 먼저 가 있는 전선생 부인 쉥이 오늘 중으로 꼭 와야 한다고 어제 밤부터 계속 전화를 하다. 쉥의 큰 아버지가 나를 시장에게 소개시키려고 이미 약속을 해 놓았기 때문에 오늘 꼭 와야 된다고. 쉥의 큰아버지는 세르반테스의 시의원이다. 3년 전만해도 바기오 대학에서 교수로 지낸 엘리트 공무원이다. 정년퇴임을 하고 민선에 의하여 시의원이 되었다. 그 분은 지난 4월, 내가 세르반테스에서 의료봉사를 할 때 치료를 받고 침뜸면역요법에 상당한 매력을 가진 분이다.

피곤하지만 기다리는 사람을 생각하여 아침 일찍 전선생의 승합차를 타고 서둘러 세르반테스를 향하여 가다. 바기오에서 그곳까지의 길은 마치 네팔의 산악지대를 가는 것 같은 꼬불꼬불한 산길이다. 이곳은 필리핀의 작은 네팔이라고 불러도 좋겠다. 높고 가파른 산에 조그마한 공간만 있으면 일구어 밭을 만들었다. 특별히 라이스테라스에 가 볼 필요도 없이 보이는 산이 모두 라이스테라스처럼 계단식 밭으로 가꾸어져 있다. 가끔 가파른 산허리를 돌아갈 때도 있다. 그러나 이제 그 정도엔 놀라지 않을 정도로 익숙해 졌다. 아니 무디어졌다는 표현이 더 적당할 것 같다. 안전벨트라는 것은 아예 할 생각도 않고, 혹시 있더라도 끊어놓은 무벨트 차를 타고 가파른 산길을 다니는 것도 이제 숙달이 되었다.

세르반테스, 일로쿠스 수르, 시청사

이어 아브라함씨가 나를 데리고 시장 댁에 가서 시장에게 소개를 시킨다. 마침 오늘이 시장님 생일이라 많은 마을 사람들이 모여 노래를 부르고 축하파티를 하며 즐긴다. 즐긴다는 말 보다는 시중든다는 말이 더 적당할 것 같다. 시장은 이곳에서 가장 부자이며 동시에 권력자이다. 그는 부로 권력을 장악하였다. 오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젊은 시장이 예상외로 상당히 거만하게 군다. 내가 외국에서 온 손님인데도 불구하고 직원들이 보는 앞이라 그런지 거드름 떠는 모습이 역겨울 지경이다. 순간 잘못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다.
그런 시장의 태도에 나를 소개한 시의원 아브라함씨가 어쩔 바를 몰라 하며 미안해하다. 잠시 시장과 접견을 마치고 아브라함씨의 안내로 봉사할 장소를 가 보다. 이번 봉사 기간에 보건소 2층 건물을 모두 내가 쓰게 되었고, 보건소 직원들이 내일부터 모두 나의 스텝이 되어 도와주기로 하였다고 소개한다.

환자들을 치료 봉사할 보건소를 방문하고 순간 너무나 놀라운 일을 발견하다. 그동안 염려하던 일들이 모두 사라지고, 마음으로 그려오던 그림이 모두 그대로 현실로 내 앞에 놓여있는 게 아닌가!

보건진료소 입구

지금까지 계속 단기 선교만 다니다가, 직접 선교사로 파송받기에 앞서 마음속으로 여러 가지 염려되는 점이 많았다. 물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관 하에 이루어지므로 한편 안심이 되기도 하였지만, 한편으론 인간적인 불안한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 연고도 없는 외국의 척박한 시골 외딴 집을 얻어 혼자 지내게 되면 일찍 찾아오는 캄캄한 긴 밤을 어떻게 보낼까? 텔레비전도 없고, 인터넷도 되지 않고 그리고 볼만한 책도 없는 곳에서 초저녁 7시부터 잠을 청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극성 대는 모기는 둘째 치고 뱀이라도 기어들어 오든가 아니면 독거미나 지내 독나방 등이 들어오면 어쩌나! 지난겨울 민도로 바닷가 마을에서 잤을 때도 원두막집(꾸버) 천장에 커다란 독지내가 기어 다녀 원주민들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위험하다는 말을 한 적이 생각난다. 그리고 망얀족 원주민이 6미터나 되는 큰 구렁이에게 잡아먹혀 마을 사람들이 구렁이를 잡아 시신을 꺼낸 이야기가 생각난다.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현지인들이다. 외국인은 돈을 가지고 다니므로 가난한 현지인들에게는 언제나 표적 대상이다. 외딴 산길에서 죽이고 달아나도 어디 하소연할 때도 없다. 겉으론 다정한 척 하지만 자기에게 도움이 되지 않으면 곧 배신하고 돌아서는 게 가난한 나라 현지인들의 모습 아닌가! 지난 번 민도로의 김선교사도 등에 칼을 맞아 죽을 뻔 하다 간신히 목숨을 구하였지 않은가! 그리고 어느 날은 강도들이 공포를 쏘며 집을 습격하여 서로 총을 쏘며 방어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선교사들이 위험한 곳에 들어가 살지 못하고 도시에서 선교캠프를 운영하는 것이 오늘날 선교현실이 아니던가! 만일 산속에서 강도들과 만나면 내겐 총도 없으니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

이런 저런 염려 가운데도 한편 긍정적인 마음으로 좋은 상상도 해 보다.
가난하게 살며 아파도 병원에도 못가는 이들을 돌보며 그들에게 소망을 주어야지!
여유가 되면 가난한 가정에 돼지 한 마리씩이라도 사 주어 형편이 피게 해주어야지!
그리고 모유가 부족하여 배고파하는 유아들에게 우유라도 좀 공급해 주어야지!
루손 섬 산속은 야채가 풍성할 것이므로 유기농 먹을거리 운동을 펼치고, 효소 만드는 것을 보급하고, 면역요법을 실시하여, 몸이 아파 죽을 지경이 되어도 병원에 못 가는 이들에게 면역력을 증대시켜 스스로 질병을 이길 수 있도록 도와야지!
그리고 주일이 되면 그들과 함께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려야지!
가능하다면 공무원들과 협력하여 공공건물을 빌려 환자들을 치료할 수 있도록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공무원들도 경제적으로 병원에 가기 힘들어 아파도 그냥 지내는 편이니 내게 치유를 받고 나면 협조해 줄 것이 아닌가! 이런 저런 긍정적인 생각을 하며 머릿속에 아름다운 상상화를 그리며 스스로 안심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꿈인가 생시인가!
보건소 이층 계단에 올라서니 정면 마주보이는 벽에 평소에 내가 늘 하고 싶었던 치유사역에 관한 내용을 글로 써 놓은 게 아닌가!

Welcome to the Integrative Healing and Wellness Center
(통합치료 건강센터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Traditional Chinese Medicine (전통중의학)
‣ Acupuncture (침요법)
‣ Moxibustion (뜸요법)

보건소 2층 - 침뜸진료소 입구

잠시 붙였다 떼어버릴 현수막도 아니고 아예 페인트로 벽에 진하게 써 놓았다.
내가 환자를 돌보게 될 진료실도 들어가 보았다. 어디서 구했는지 침구 혈자리 괘도가 세 개나 벽에 붙어 있고, 내가 사용할 책상과 환자 침대가 가지런히 놓여있는 게 아닌가!
그리고 옆에 큰 방이 있어 내가 그곳에서 기거해도 되겠느냐고 물으니 얼마든지 사용해도 된다고! 내가 사용할 방까지 마련되다니 정말 상상도 못한 일이다.

지난 번 이 지역 바랑가이 컨셉션에서 봉사 할 때만 해도 침과 뜸을 생소하게 생각하던 이들이 어떻게 이런 준비를 하였단 말인가! 내가 부탁을 한 것도 아닌데 이미 침구 진료실이 마련되어 있다니!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안 간다.

침뜸진료실 내부

요즈음 서양인들도 침에 관해서 많은 관심을 갖고 있지만, 몸에 상흔을 내는 뜸은 한국 사람들도 꺼려하는데 어떻게 이렇게 벽에 광고까지 써 놓았단 말인가! 내가 이렇게 꾸며 달라고 부탁을 한다 해도 전혀 먹혀들어가지 않을 분위기였는데 이런 일이 있어지다니!!

그동안 혼자 근심하고 걱정하던 생각들이 순간 모두 사라진다. 마음으로 그렸던 그림이 모두 그대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는 성경말씀이 지금 내 눈앞에 그대로 실현되고 있다. 내가 상상으로 그리던 그림들이 실상으로 존재하고 있다.

빈집을 렌트하여 밤에 혼자 자면 경호원도 두어야 될 텐데, 16명의 간호조무사들이 아래층에서 혹시 밤에 찾아오는 임산부들이 있을지 몰라, 밤이 되면 두 명씩 교대로 비상근무를 서니 경호원도 필요 없게 되었다.
지난 4월 나에게 치료 받았던 경찰관들의 오피스가 바로 보건소 옆 언덕에 위치하여 내가 잠자는 보건소를 내려다보고 있으니 더더욱 치안문제로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완벽한 경호와 숙련된 간호사들이 나의 치유사역을 협력하게 되었다. 봉사처와 숙소 그리고 나의 신변보호를 위한 경호대책 등 단지 상상만 하던 나의 생각들이 내 눈앞에 현실로 다가와 있으니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사람들이 보거나 안 보거나 혹은 어떤 평가를 하거나 개의치 않고 늘 하나님만 바라보며 내가 할 일을 열심히 연구하고 계획하고 추진하였더니 하나님이 모든 것을 보고 계시다가 때가 되니 도우셨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세밀하고 완벽하게 개입하여 도우실 줄은 미처 생각 못하였다.
“오! 주님 감사합니다. 더욱 열심히 일하겠으니 저를 당신의 도구로 계속 써 주옵소서.”

                                        새벽 1시에 자다가 깨어 벌떡 일어나 앉아 감사하고 또 감사하며 일기를 쓰다.

                                                             자료제공 : 월드 캐어(http://cafe.daum.net/amccm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