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포스트모던 이후 또는 글로컬 세계관

포스트모더니티가 근대성을 비판함에 따라 기존의 여러 개념들이 재정립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내용인즉, 과학, 정치적 의제, 민족성, 민족주의, 종교 등과 같은 것들은, 선을 위하든 악을 위하든, 사회와 개인에게 권력을 행사하는, 인위적으로 구성된 이데올로기라는 것이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티는 전 세계적으로 점증하는 인간의 필요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책도 내놓지 않는다. 그러면 이 포스트모던 비판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이안 바버, 휴스턴 스미스(1982), 래리 로던(1996)과 같은 학자들은 빨라지는 지구화(세계화)의 추세에 맞추어, 인식론적이고 기호학적이며 세계관적인 새로운 기초를 부지런히 찾고 있다. 스미스는 이처럼 새로 출현하는 패러다임을 “포스트모던 이후”시대라고 부른다.

많은 학자가 지구화(세계화)를 근대성이 온 세계로 퍼지는 현상으로 본다. 다른 학자들은 그것을 새로운 탈산업화, 탈서구화 시대로 본다. 또 다른 학자들은 포스트모더니티가, 근대성을 해체한 뒤에 도래한 새 시대의 여명이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꼭 염두에 둘 사항은, 지구화는 정적인 상태가 아니라 계속 변하는 과정이라는 점과, 각 지역과 나라가 그것을 달리 경험하고 그에 대해 달리 반응한다는 점이다. 더 나아가, 지구화 이론들은 학계의 엘리트들의 손으로 만들어 지고 있다. 그래서 주변부로 소외된 가난한 사람들의 삶에 비추어 그 이론들을 검토하는 일이 꼭 필요하다. 또 하나 중요한 사항은 두 종류의 지구화를 구별하는 일인데, 한편에는 시장 세력, 범국가적 인적 유통, 지구적 기관들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이런 자료들을 설명하려는 이론으로서의 지구화가 있다는 사실이다.

끝으로 지구화 이론들을 미래를 예측하는 데 사용할 때는 지극히 조심할 필요가 있다. 르웰렌이 언급하듯이, 20세기가 시작될 무렵 많은 학자들이 미래에 일어날 일을 예측했지만, 결과적으로 가장 의미심장한 변동들은 놓치고 말았기 때문이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식민주의의 몰락, 원자력 에너지 컴퓨터 인터넷의 발달, DNA구조의 발견 등이 그 가운데 일부다.

지구촌 백성을 하나로 묶는 근대성의 위력(2003, 하가이 리더쉽 세미나, 29개국 50명 참석)

새로운 지구화의 핵심요소 하나는 대규모 시스템들-대도시, 지구적 정치기구, 지구적 기업-의 등장이다. 또 하나의 요소는 갈수록 빠른 속도로 사람들과 정보가 세계 전역으로 퍼져가는 움직임이다.

새뮤얼 헌팅턴은 민족국가 시스템이 이미 세계 전역에 여덟 개의 이데올로기적이고 정치적인 “문명들”로 대치되었다고 주장하면서, 후자는 국경을 초월하는 문화 패턴-주로 종교-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한다. 여기에는 서양,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 이슬람, 힌두, 중화, 일본, 정교회 문명이 포함된다. 서양이 다른 문명들에게 근대화를 촉구하는 바람에, 후자는 오히려 내부 지향적으로 돌아서서 다른 문명들과 대치 국면에 들어가게 되었다. 헌팅턴은 앞으로 이런 문명들이 서로 마찰을 일으킴에 따라 문명 사이의 “단층선”에서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한다.

종교가 문화적 정체성의 기초로 부상했다는 점이 특히 중요하다. 인도의 경우, 근대성은 범국가적인 힌두교 근본주의 운동을 불러일으켜서, 그들이 권력을 장악하여 인도를 힌두교 국가로 만들려고 애쓰게 했다. 이슬람교는 갈수록 중동 민족국가들의 주요한 정체성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고, 근대화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지방 조직체를 형성하자고 촉구하고 있다.

우리가 “글로컬화(glocalization)” 현상을 이해하려면, 이와 같은 지방의 국가 연맹체, 범국가적 기업들, 지구화 세력에 대한 그들의 반응 등을 고려하는 일이 반드시 필요하다.

지구화/지역화

세계가 지구촌을 이루는 방향으로 빠르게 움직이자, 과연 어떤 공동체가 형성되고 있는지를 놓고 많은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한편에는, 지구적 동질화를 추구하는 세력들이 있고, 다른 편에는, 지역과 지방의 다양성을 부활하려는 세력들이 있다. 따라서 세계관 사이에 충돌이 일어난다.

오늘의 중심 문제는 통일성과 다양성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한편으로, 동화 모델은 안정성을 가져오는 대가로 세계 곳곳의 풍부하고 다양한 문화를 상실하게 된다. 다른 한편, 문화 근본주의 운동은 자기들만의 독특한 문화적 정체성을 지키려다보니 지구적 조화를 깨뜨리고 만다. 이 둘 사이에서 통일성을 바탕으로 다양성을 유지하려는 시도는 불안정성이라는 긴장에 직면하게 된다.

종교/세속주의

후기 근대성이 세계 전역으로 퍼지면서, 지방의 공동체들이 전통 문명에 비추어 그들만의 고유한 문화적 정체성을 유지하려고 애씀에 따라 하위지구화가 출현했다. 이로 인해 합리화와 세속화를 재촉하는 지구화 과정과 흔히 종교를 중심으로 하는 지방의 특수한 문화양식 사이에 긴장이 발생한다.

이슬람 편에서는 근대성을 유입하되 일차적 정체성은 이슬람교에서 찾는 흐름, 즉 신정주의 국가를 세우려는 분위기가 갈수록 강해지고 있다. 이와 비슷한 싸움이 인도에서도 벌어지고 있는데, 거기서는 힌두교 근본주의가 부활하여 힌두교 국가를 세우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이는 중이다.

미국에서 종교는 사적인 부문에 국한된 것으로 대체로 간주되어 왔다. 하지만 최근에는 종교가 정당들과 공적인 운동들과 손잡으면서 공적인 부문에서도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도덕적 주제들

근대성은 지식에 초점을 두고 포스트모더니티는 감성에 초점을 둔다. 글로컬리즘은 심대한 도덕적 물음을 제기한다. 세계의 한 부분에 사는 사람들은 다른 부분에 사는 사람들에게 무슨 책임이 있을까? 우리는 세계 도처에 즐비한 가난, 억압, 폭력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최근에는 이런 의문들이 공적인 광장과 학계에서 주고받는 담론의 일부가 되었다.

개발

개발 프로젝트는 양면을 가진 복이었다. 그것은 수명을 연장시키고 문맹률을 줄이며 민주적인 자유를 선사하는 등 많은 이들에게 혜택을 주었다. 하지만 동시에 문화를 말살하고, 생태계를 파괴하고, 변두리 인생들의 힘을 빼앗고, 군사독재를 창출하였다.

뿌리 신화들

지구화를 긍정적으로 보는 이들은 지구화가 일거리를 창출하고, 중산층을 키우고, 무역을 증대시키고, 개발을 도모하고, 관련된 모든 사람에게 혜택을 주는 지구적 동반자 관계를 촉진한다고 주장한다. 다른 이들은 자본주의적 지구화를 하나의 재난으로 본다. 이것은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극빈자와 특히 여성과 가난한 나라들을 더욱 소외시키고, 노사 분쟁을 가져오며, 지구 환경을 파괴한다고 주장한다.

지구화 세력과 지역적 문화가 만나는 양상은 지역 공동체에 따라 차이가 많고, 심지어 지역 공동체 안에서도 아주 다양하기 때문에, 우리는 폭넓은 글로컬화 이론에 대하여 건강한 회의주의를 유지해야 한다. 어느 이론이라도 모든 다양성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몇 가지 사실은 분명하다. 우리는 현재 인류역사상 여러 발전 양상의 바탕에는 세계관의 충돌이 있다는 것, 이처럼 다양하면서도 서로 연결된 세상에서 평화와 정의에 이르는 길을 안내하려면 이런 충돌의 본질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것 등이다.

그리스도를 존중하며 배우고 싶어하는 어린 불자들(2004년 미얀마)

인도-유럽 세계관에서는 천사, 마귀, 다른 영들이 하나님과 함께 하늘에 존재한다. 성경은 천사들과 인간들을 이 창조세계의 일부로 보고 있으므로, 우리는 그 존재들과 그들의 일을 일상에서 진지하게 여겨야 한다.
아울러 이 세계관은 물질세계를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의 일부로 진지하게 고려할 것을 요청한다. 이 세계는 인간의 역사가 펼쳐지는 한시적인 무대가 아니다. 이곳도 하나님이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실 때 모두 구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창조주

우리가 우주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모든 창조세계를 주관하는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함께 시작해야 한다. 그분은 우주와 우주 역사의 주인이시고, 그분이 통치하신다는 사실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분은 모든 힘의 원천이시기에 그분께 도전할 만한 힘은 없다.

하나님은 또한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을 비롯한 창조세계가 하나님께 반역하자, 그분은 구속의 사랑을 밝히 보이신다. 그분은 타락한 창조세계를 파괴하고 새로운 우주를 창조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풀어 잃어버린 자들을 구속하고 회복하신다.

창조세계

인류역사는 획기적인 세 가지 사건으로 그 단계를 나눌 수 있다. 창조, 성육신, 그리스도의 재림이다. 각 경우마다 하나님은 역사상 유례없는 놀라운 방법으로 직접 활약하신다.

첫 번째 행위는 창조였다.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셨고, 그 창조세계는 완전했다. 이 완전한 세계가 타락으로 손상을 입었다. 하나님의 천사 중 일부가 그분께 반역했고, 이 반역행위가 인간들에게도 퍼져서 그들도 공범으로 가담했다. 그러므로 죄는 존재론적으로 영원한 것이 아니다. 다만 죄는 의와 동등하지도 않고 공존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창조주에 대한 반역으로 말미암아 창조세계에 들어온 것일 뿐이다. 궁극적으로 죄는 관계가 파괴되는 것을 일컫는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기를 거부하고 우리 자신을 신으로 만들려는 시도다.

인류역사상 하나님이 놀라운 방법으로 일하신 두 번째 사건은 그리스도의 오심이다. 그분은 인간으로 성육하신 하나님으로서 이 땅을 구속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회복하기 위해 오신 분이다.
인간 역사의 중심에는 성육하신 하나님이 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악을 이기고 승리하신 그 십자가가 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현 시대의 역사에 세 번째로 개입하시는 경우는 역사의 종점, 곧 그리스도가 재림하고 우리가 아는 이 세상의 끝이 도래하는 때다. 하지만 우리의 현 세상이 미래의 유토피아로 이어지는 직선적인 길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그분의 의롭고 평화로운 왕국을 세우시기 위해 인간 역사 속으로 뚫고 들어오시는 사건이다.

계시/인간의 지식

창조주/창조세계의 의존적 이원론의 중심에는 신의 계시와 인간의 지식 사이의 관계에 대한 물음이 놓여 있다.

신의 계시

전통적으로 일반 계시와 특별 계시를 서로 구별해 왔다. 일반 계시는 하나님이 창조세계를 통해 스스로를 계시하신 것을 뜻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권능과 통치를 우주의 장엄하고 질서정연한 모습에서 보게 된다. 이 세상에 죄인들과 죄가 존재하지만 그들을 구속해서 자기 신부로 만들려고 창조사역을 계속하시는 모습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된다.

이런 일반 계시를 배경으로, 하나님은 특정한 상황에서 특별한 방식으로 스스로를 계시하셨다. 그분은 아브라함, 모세, 다윗 등 여러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그분은 이사야, 예레미야, 호세아 등 여러 사람에게 예언의 말씀을 주셨다. 또 환상과 꿈을 통해 그리고 홍해를 가르는 것과 같은 기적들을 통해 자신의 말씀을 계시하셨다. 무엇보다도, 그분은 친히 예수 그리스도로 오셔서, 유한성을 가진 인간의 능력 안에서 스스로를 우리에게 계시하신 분이다. 이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결정적인 계시가 우리에게 주어졌으므로, 이것을 기준으로 다른 모든 계시들을 시험해야 마땅하다.

인간의 지식

신적 계시와 그 계시에 대한 인간의 이해를 서로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게 해 주시는 것이다. 인간의 지식은 우리가 우리의 특정한 상황에서 그 계시를 해석하는 방식이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위험을 피해야 한다. 먼저, 우리의 신학을 계시와 동등시하면 안 된다. 우리의 이해는 언제나 부분적이고, 우리가 처한 상황에 영향을 받는다. 또 다른 위험은 성경에 계시된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진리를 참조하지 않고, 우리 마음대로 계시를 생각할 자유가 우리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거울로 보듯이 희미하게 볼 수밖에 없을지 모르지만, 어쨌든 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첫째 위험은 실증주의를 인식론적 기초로 삼았던 계몽주의 시대에 가장 두드러지게 노출되었다. 당시는 과학지식을 실재에 대한 객관적이고 정확한 사진으로 간주했으며, 지식과 실재 사이에 일대 일의 상응관계가 있다고 믿었다. 실증주의자들은 인간의 정신이 순전히 객관적인 관찰을 통해 자연에 관한 사실들과 보편적 법칙들을 완전히 발견할 수 있다고 믿고, 완전히 객관적이고 경험적인 지식 위에 과학을 구성하는 작업을 착수했다. 그들의 목표는 내적으로나 논리적으로 일관된-그래서 외적인 요인이 불필요한-이론들에 의거하여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대통일 이론을 구성하는 것이다.

기독교 학계도 이런 인식론의 영향을 받은 나머지, 신학을 객관적으로 정확한 진리의 진술로 보게 되었다. 즉 신학자가 처한 상황과 당시에 교회가 당면한 문제들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바른 신학은 성경과 직접 상응하는 것이고, 신학자가 가진 정신의 영향을 받지 않는 보편적이고 초시간적인 진리였다. 이처럼 인간의 지식을 근사치가 아닌 완전한 진리로 보는 견해는 성경 텍스트에 대한 다양한 신학적 해석들을 둘러싸고 많은 논쟁과 분열을 불러 일으켰다. 날카로운 선을 그어 놓고 그 선에 따라 사람들을 정통이나 이단으로 분리했다. 궁극적 권위는 디지털적이고 본질적인 범주들과, 그리스식 추상적이고 연산논리적인 논리를 사용하는 이성이었다. 이런 인식론을 갖고 있으면, 우리는 성경적 세계관을 확실히 이해하고 있다고-하나님이 보듯이 세계를 본다고-주장하게 되고, 그 세계관을 정확히 또 완전히 이해하고 있다고 주장하기 마련이다.

둘째 위험은 이러한 지식관을 근거 없는 것으로 일관하는 포스트모더니티와 함께 생겼다. 과학자들이 과학자들을 연구한 결과, 과학자는 바깥에 서 있는 객관적인 관찰자가 아니라는 점이 분명해 졌다. 그들도 엄연히 자신이 묘사하는 내용의 일부다. 게다가, 그들이 만드는 지식이 부분적으로 외적인 사실에 기초해 있다 해도, 그것은 그들의 이론, 인격, 사회문화적이고 역사적인 상황에 큰 영향을 받고 또 그런 것에 비추어 해석된다. 여기서 지식은 세상에 사는 인간의 정신 안에 있다. 지식은 인쇄된 종이 위에 있는 추상이 아니다. 더 나아가, 과학 지식은 도덕적으로 중립적이지 않다. 그것은 큰 권력을 갖고 있고, 권력 놀이는 엄연히 과학적 연구과정의 일부다.

포스트모던 인식론의 반응은 도구주의였다. 지식은 우리가 개인적으로 또 공동체적으로 구성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그것은 완전히 주관적이고 상대적이다. 외적인 실재와 상응하는 면이 약간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로서는 이것을 증명할 길이 없다. 뿐만 아니라 서로 다른 논리와 범주 형성 시스템들이 존재하고 있으며, 그 모두가 타당성을 지닌다. 게다가, 우리는 이성을 사용하여 이성을 진리의 최종적 잣대로 정당화할 수는 없는 형편이다. 끝으로, 우리가 대안으로 떠오른 이론들을 논의할 때, 지식이 권력이라는 점을 인식할 필요도 있다. 요컨대, 지식은 콜라주와 비슷하다. 각 사람이 동일한 사물을 보면서도 자기 눈에 비친 이미지를 그릴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즉 공적인 진리는 없고 주관적인 개인적 진리만 무성할 뿐이다.

세계관 이론을 이런 식으로 생각한 결과, 세계관적 보편자도 없고 공동체의 세계관도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단지 개인적인 “미로들”만 존재할 뿐이다. 같은 문화에 몸담은 사람들조차도 세계를 같은 방식으로 보거나 해석하지 않으며, 그들로 하여금 서로를 이해하게 할 인지적 다리를 놓을 길도 없다. 따라서 이것은 전적인 상대주의로 귀결되고, 진리의 존재를 부인하게 되거나, 설사 그런 진리가 있다 해도 그것을 알 수 있는 길이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단지 개인적인 “진리들”만 있을 따름이다.

기독교 학계에서, 도구주의는 포스트모던 신학들과 종교적 상대주의를 발흥시켜서, 구원과 하나님께 이르는 다양한 길이 있다고 주장하게 만들었다. 진리-보편적이고 초역사적인 진리-에 대한 추구는 각 개인의 구체적 필요에 맞춘 개인적 신학들, 이성적 추론만큼이나 정서와 가치에 바탕을 둔 신학들을 만들어야 한다는 입장에 밀려나고 말았다. 선교에서는 이러한 발전은 대상이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토대로부터 복음을 분리하고, 복음전도와 문화적 변형은 제국주의와 억압의 형태로 간주하는 근본적인 상황화를 요구하게 되었다.
인식론은 우리 인간이 만든 창조물이다. 즉 실재가 무엇인지에 대한 우리의 성찰과 그 실재를 어떻게 알 수 있는지에 관한 해석학을 일컫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인식론이든 신적 계시와 동일시할 수는 없지만, 그 가운데 일부는 다른 것들보다 계시와 더 잘 양립한다. 그중 하나가 비판적 실재론으로, 이는 우리가 앞서 언급한 두 가지 위험을 피하는 이론이다. 한편으로, 실증주의와 달리 계시와 신학을 동등시하지 않고, 다른 한편으로는, 도구주의와 달리 이 둘을 완전히 분리하지도 않는다. 뿐만 아니라, 복음과 진리에 대해 초기 교회의 지도자들, 아니 성경 전체가 이해하고 있는 방식과도 잘 양립하는 이론이다.

비판적 실재론의 중심에는 해석학적 공동체가 있다. 어떤 연구전통 안에서, 만일 각 개인이 실재를 부분적으로밖에 즉 자신의 주관적인 구성에 의해 볼 수밖에 없다면, 학자들의 공동체가 어떻게 진리를 알 수 있을까? 그들이 서로간의 대화를 통해 서로의 편견을 찾아낼 때, 진리에 더 가까운 근사치에 도달할 수 있다. 비판적 실재론은, 인간의 지식은 결코 정확하거나 완전하지 않고, 다만 제기된 물음에 관하여 본질적인 부분에서만 참일 수 있다는 입장이다.

이런 상황에서 비판적 실재론은 성경적 세계관의 추구와 관련하여 여러 가지 함의를 갖고 있다. 첫째, 우리의 이해는 인간 공동체들에 의해 문화적으로 구성된 것임을 주목하는 일이 필요하다. 세계관은 한 민족의 언어, 산물, 의식, 관행, 신념과 같은 기호들에 담겨 있다. 그것은 사람이 사는 이 세상을 이해할 수 있도록 이 모든 것을 다 함께 연결해 주는 기본적인 패턴이요 게슈탈트다. 그러므로 성경적 세계관을 묘사하는 어떤 시도라도, 그것을 완전하고 전적으로 정확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성경과 우주 역사에 깔린 심층적 질서를 이해하려는 우리의 시도일 뿐이다. 우리가 진리에 관해 논할 수 있고 실제로 논하고 있지만, 진리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부분적이고 제한된 것일 뿐이다.

둘째, 세계관들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역사적 특수성을 지닌 우리의 많은 인생 경험에서 추출되는 것임에 틀림없다. 성경에서 우리는 아브라함, 모세, 다윗, 예수 등 많은 인물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우리는 이런 역사적 사실들로부터 그들의 내적 성품을 분별하기 시작한다. 세계관은 큰 그림과 같은 것으로서, 많은 특수한 사실들 배후에 있는 패턴을 우리가 인식해서 구성하는 일종의 몽타주다. 달리 말하면, 인간의 지식은 콜라주와 비슷하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모양을 반영하므로, 수천 명의 신자들의 얼굴 안에서 그리스도의 얼굴이 드러나게 된다. 세계관은 문화적 부분들의 총합이 아니다. 세계관은 우리가 그런 부분들을 해석할 때 기준으로 삼는 전반적인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셋째, 비판적 실재론은 교회를 해석학적 공동체, 곧 모든 교인이 그 안에서 진리를 깨닫고 진리를 그 배경에서 적용하려고 애쓰는 장으로 본다. 진리에 대한 다양한 신학적 이해들은 신앙 공동체 안에서 시험되어야 한다.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통찰력과 고칠 점을 더해 줄 수는 있지만, 일상에서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는 교회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교회에 의해 결정된다. 교회는 그런 것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간절한 마음으로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

넷째,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세계관은 늘 변하고 있다. 아브라함의 세계관은 모세, 다윗, 예수의 세계관과 동일하지 않았다. 하지만 전자를 기초로 후자들이 세워졌다. 하나님의 실재관이 우리에게 결정적으로 계시된 것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였다.

마지막으로, 인지적 실재론은 진리를 완전히 객관적인 것으로 만들려고 지식으로부터 정서와 도덕을 제거하는 입장을 배격한다. 이 이론은 관찰자도 본인이 관찰하는 장면의 일부이고, 관찰자도 자기의 지성뿐 아니라 감정과 도덕적 판단도 가져온다는 점을 인정한다. 더 나아가, 지식은 권력이기 때문에, 관찰자들은 자기가 연구하는 민족에 대해 그리고 그들이 발표하는 연구결과에 대해 도덕적 책임이 있다. 성경은 진리뿐 아니라 아름다움과 거룩함도 아주 중요시한다. 이 셋은 서로 분리할 수 없다.

그러면 비판적 실재론에 대한 기독교적인 접근은 세속적 학자들과 어떻게 다른가?
첫째, 우리는 지식의 토대가 되는 성경을 인간이 하나님을 찾는 내용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계시로 믿는다. 달리 말하면, 성경은 인간 역사에 대한 기록일 뿐 이니라 그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이해도 우리에게 제공한다. 우리는 계시 자체와 우리 인간의 지식을 결코 동등시하면 안 된다.

둘째, 우리는 진리가 성경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졌다고 믿을 뿐 아니라, 자기 백성이 성경을 올바로 해석하도록 성령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속에서 일하신다고 믿는다. 그리스도인들은 전통적으로 인간의 이성이 타락의 영향을 받았다고 인정해 왔다. 하지만 동시에 인간의 이성이 성령의 도움으로 순수해지고 계시의 조명을 받으면, 거울로 보듯이 희미할지라도 실재의 모양을 파악할 수 있다고 믿는다.

셋째,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의 자기 계시가 펼쳐지는 책이고, 구약성경은 모든 성경을 이해하는 토대로서 중요한 책이며, 그리스도는 하나님 자신과 그분의 목적을 드러내는 결정적이고 최종적인 계시라고 믿는다.
넷째, 우리는 인간의 지식이 언제나 제한성을 지닌 불완전한 것임을 인정하고, 그것을 하나님이 보시는 진리와는 동등시 할 수 없다고 믿는다. 우리는 신적인 신비에 둘러싸여 있으며, 그것을 완전히 깨닫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의 지식은 부분적이고, 기껏해야 실재의 근사치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우리가 부분적으로도 진리를 알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받은 지성을 사용할 수 있지만 지성에는 한계가 있고, 우리가 타락한 상태를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진리의 근원과 기준으로서 이성과 계시를 상반된 것으로 보면 안 되고, 인간의 이성을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종속시켜야 마땅하다.

다섯째, 우리는 성경 해석이 주님의 진리, 아름다움, 거룩함을 깨닫고 그에 따라 살려고 애쓰는 신앙 공동체인 교회에 속해 있다고 믿는다.


하나님나라/이 세상의 나라들

복음의 중심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창조세계를 다스리는 왕과 주님으로 오셨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구원자와 주님으로 선포한다는 것은 그분의 백성의 삶에 이루어지는 그분의 통치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인간에게 패배로 보였던 그의 죽음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자들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그분의 도구였다는 사실이다. 마지막 때가 되면, 하늘과 땅에 있는 이들 모두가 그 왕 앞에 무릎을 꿇을 것이다(빌2:9-11)

하나님 나라

하나님 나라는 왕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왔고, 장차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그 완전한 모습이 드러날 터인데, 우리가 그때를 기다리는 동안에는 그분의 몸인 교회를 통해 그 면모가 드러나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변이 ‧ 투쟁 ‧ 자연선택이 발전을 낳는다고 주장하는 근대의 구속적 폭력의 신화 아래 깔려 있는 세속적인 “진보” 개념과 동등시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이 신념은 자본주의의 진보 철학, 인종과 혈통을 따지는 나치 철학, 마르크스주의의 유물론적 역사 해석들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 이 신념은 또한 두 차례의 세계대전 사이에 출현하여, 무지와 죄는 인간의 삶에서 서서히 제거될 수 있고, 인간들이 조화롭게 사는 날이 올 것이라고 믿은 자유주의 신학의 밑바탕에 깔려 있기도 하다.

인간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할 수 없다는 말이, 우리가 그 나라의 실현을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그리스도인의 행동은 그 나라의 도래를 위한 기도이고 ---- 그러한 행동은 하나님이 그분의 나라를 앞당기도록 그분께 드리는 일종의 기도이다”라고 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 나라가 임하면 완전한 사랑과 의가 실현될 것으로 확신하면서 그 나라의 도래를 갈망하고 그것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 시대가 이미 동텄다. 그분을 좇는 사람들은 그 나라의 영역 안에 있다. 그들은 이 땅 위에 사는 나그네 된 백성인 셈이다. 그들은 진정한 고향에서 추방된 망명객들이요 길을 가는 순례자들이다.

교회는 언제나 하나님 나라를 세상의 나라들과 동등시할 위험을 안고 있다. 특히 기독교가 지배하던 나라들을 그런 식으로 생각하곤 했다. 이것은 충성심의 분열현상을 낳는다. 즉 공식적으로는 우리가 그리스도께 충성한다고 선포하면서도, 우리의 생활방식은 사실상 우리나라를 숭배하는 모습을 지니는 것이다. 이보다 더 큰 두 번째 위험은 하나님 나라를 바로 우리나라와 동등시 하는 것이다. 이럴 경우 세상은 우리나라의 활동에 나타나는 그리스도가 진정한 그리스도라고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이러한 위험을 이른바 서양의 기독교 국가들의 식민지 팽창에서 본다. 오늘날에는 기독교를 미국과 동등시하는 현상에서, 또 미국이 스스로 신적인 운명을 갖고 있다고 믿는 모습에서 드러나고 있다.

교회

교회는 하나님의 새로운 질서로, 비록 이 시대의 죄와 어두움에 물든 인간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복음을 전할 뿐 아니라 거룩함과 화해의 삶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공동체로서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 교회는 이 세상의 나라들 가운데 존재하지만, 그 나라들에 속해 있는 것은 아니다. 교회가 하나님 나라를 자기가 몸담은 지상의 나라와 동등시할 때는 하나님이 주신 예언자적 목소리를 잃고 만다.

교회는 나름대로 사적인 종교와 신앙생활 하는 개인들이 모인 집합체가 아니다. 또 그리스도인이 본질적으로 누구인가 하는 것에 비추어, 정통 교리나 실천에 의해 규정된 뚜렷한 경계선이 있는 인간 조직도 아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자 구원자로 좇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교회는 본질적 범주가 아니라 관계적 범주에 의해서, 즉 자신이 무엇인지 또는 무엇을 갖고 있는지가 아니라 자신과 주님과의 관계에 의거해서 규정된다. 더 나아가, 우리가 사람들의 마음속을 꿰뚫어 볼 수 없기 때문에,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교회가 “퍼지”범주에 해당한다. 우리는 사람들을 판단해서는 안 되고, 증언을 통하여 그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려고 애써야 한다. 인간의 마음을 통찰하시고 누가 자신의 것인지를 아시는 하나님, 오직 그분께만 누가 구원을 받았고 누가 멸망을 받았는지 양자 사이의 뚜렷한 경계선이 존재한다.

성경은 교회를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진, 신앙의 언약 공동체로 묘사한다. 이처럼 교회가 공동체라면 어떤 모습을 지니게 될까? 어떤 클럽이나 회사 또는 군중과 같은 모습은 분명히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근본적인 대안 공동체일 것이다. 즉 개인들의 열망은 집단의 비전과 안녕에 종속되는 언약 공동체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서로를 대하는 것을 뜻한다. 말하자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것처럼-섬김과 겸손의 자세로-서로 서로 대하는 것이다.

교회의 교인들은 같은 주님을 따르기 때문에 서로에게 헌신되어 있다. 그들을 다함께 묶어 주는 내적인 끈과 삶의 본질은 다름 아닌 사랑이다. 각 지체가 스스로 내어주는 섬김의 자세로 다른 지체를 위해 “거기에 있기”로 헌신하는 것이다. 이 사랑은 인간 사회를 나누는 사회적 ‧ 경제적 ‧ 성적 ‧ 인종적 구분을 모두 뛰어넘는다(갈3:26, 골3:10-11)

하나님 나라의 시민

세상은 그리스도인들과 비그리스도인들을 가르는 뚜렷한 선에 의해 둘로 나누어진다. 회심은 그 선을 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아 반드시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님이요, 구원자로 따르는 사람이다.
회심이란 우상에게 등을 돌리고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우리 삶의 중심으로 삼는 것이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러나 믿음이란 먼저 우리 자신에 대해 죽는 것을 뜻하고, 이어서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은혜가 필요한 죄인으로서 한 길 가는 순례자가 되는 것이다. 죽은 뒤에 우리는 새 생명으로 부활하여, 하나님과 더욱 친밀하고 그분께 충성하는 삶을 살게 된다.

구원받은 자와 멸망 받는 자를 가르는 경계선은 어떻게 되는가? 우리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께는 “그리스도인”이란 범주가 디지털적이다. 그분은 누가 정말 자기를 좇고 있고, 누가 다른 신을 숭배하는지를 알고 계신다. 그러나 우리 인간에게는 그 경계선이 모호한 경우가 많다. 우리는 마음을 볼 수 없고 외모만 본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을 수도 있고, 멸망할 것으로 생각되는 사람들이 실제로는 그리스도의 제자일 수도 있다. 시금석이 되는 것은 그들이 무엇을 믿는지 또는 무엇을 행하는지가 아니라, 누가 그들 삶의 주인인가 이다.


하나님나라, 교회, 선교

하나님 나라의 심장에는 선교가 있다. 교회는 만민을 하나님 나라로 초대하라고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공동체다.

우리가 하나님, 곧 선교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때, 우리로서는 동료 인간들의 곤경을 무시할 수도 없고 또 가만히 앉아서 그들을 불쌍히 여길 수만도 없다. 우리는 악과 절망에 빠진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과 희망의 좋은 소식을 나누지 않을 수 없다.

교회는 교제의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크라우스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신앙 공동체로서 스스로를 보양하고 유지하기 위해, 보다 큰 사회질서로부터 새로운 종교 사회를 형성한다고 선언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또 그분을 위해 존재한다. 교회는 그분의 몸이요, 그분의 가족이며 그분의 식민지다. 교회의 사명은 이 땅의 모든 민족에게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는 일이다.

교회와 신자들은 하나님께 예배하고, 서로 교제하고, 잃어버린 세상에서 복음을 증언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이 셋-예배, 교제, 선교-가운데 앞의 두 가지는 교회와 신자들이 천국에서 더 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이 땅에서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은 세 번째 것뿐이다. 우리를 선교로 이끌지 않는 예배와 교제는 참된 예배와 교제가 아니다. 하나님은 이 타락한 세상에서 그분의 증인과 대표자가 되도록 교회와 그분의 자녀들을 이 땅에 남겨두신 것이다.

피나투보 화산재가 계곡을 메꾸어 길이 되다                    (2004년, 필리핀 피나투보 화산, 아이따 족을 만나러 가다)

교회의 선교는 자기가 알고 믿는 내용을 증언하는 일이다. 이것은 다른 실재들과 완전히 대조되는, 하나의 새로운 실재를 손으로 가리키고 보도하고 긍정하는 일이다. 이는 남들을 회심시키고 세상의 방법을 사용하여 복음을 증명하려고 애쓰는 하나님의 변호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남들에게 자기가 받은 메시지를 이야기해 주는 것이다. 진리를 찾는 이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분은 성령이시다.

유기적/기계론적

성경에 나오는 뿌리 은유는 유기적이다. 태초에 에너지, 물질, 카르마, 또는 다른 어떤 비인격적인 기초적 존재가 아니라 살아 계신 존재인 하나님이 계셨다.

하나님의 걸작품은 바로 그분이 자신의 형상을 따라 지으신 인간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구속 사역의 중심에 놓여 있다. 기독교적 세계관은 사람들을 기나긴 사건의 사슬이 낳은 우연한 산물, 곧 어떤 부수적인 산물로 보는 환원주의를 배격한다. 그들은 실로 창조세계의 중심이다. 이 세계관은 또한 사람을 영원성이 없는 사회문화적이고 심리학적인 존재로 환원하는 자연주의적 견해도 배격한다.

근대의 기계론적 세계관은 인간을 연구와 이용의 대상으로 본다. 인간은 탈인격화되고 개체화되어서, 개인의 이득을 위해 사용될 수 있는 별 볼일 없는 상품으로 간주된다. 반면에, 성경의 유기적 세계관은 인간을 살아있는 존재로 존중하고, 각각 나름의 이야기가 있고 사람들 가운데서 서로 관계를 맺고 있는 존재로 중요시 여긴다.


집단/개인

근대, 포스트모던, 포스트모던 이후 세계관이 모두 비인격적인 관계와 관련된 자율적이고 자기성취적인 개인을 강조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성경적 세계관은 인격 상호간의 깊은 관계와 공동체의 우선성에 초점을 맞춘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은 한 민족으로서의 이스라엘과 함께 일하기로 작정하셨다. 그분은 아브라함, 모세, 다윗 등 여러 인물을 사용하셨는데, 그들의 중요성은 궁극적으로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에 기인한 점에 있었다. 신약성경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오셔서, 그들을 한 새로운 몸, 그분의 한 신부로 빚어내셨다.

인간과 개인에 대한 성경적 견해는 무엇인가? 데카르트-칸트식의 자율적 개인이라는 관념은 히브리 사상과 성경의 가르침에 나타나지 않는다. 가족, 지파, 이스라엘 백성 등이 그 구성원들의 사회적 교류뿐 아니라, 그들의 삶에 의미를 준 영적인 이야기의 중심이었다. 성경적으로 보면, 관계성과 공동체가 복음의 심장에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인격 상호간의 관계성은 하나님의 본질에 속한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관계성을 떠난 구원이란 있을 수 없다.

성경에 나오는 구원은 개인적이지만, 동시에 공동체적이고 우주적이며, 하나님이 교회를 자신의 신부로 준비시키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성경적 세계관은 타자와 타자성을 어떻게 보는가? 먼저, 모든 민족이 공통된 인간성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성경은 우리를 깜짝 놀랄만한 결론으로 이끈다. 인간 정체성의 가장 심층적인 차원에서는 타자가 존재하지 않고, 오직 우리만 있다는 것이다. 표면적으로 보면 남자와 여자, 흑인과 황인과 백인, 부자와 가난한 자, 늙은이와 젊은이가 있지만, 그 저변을 보면 우리는 모두 동일한 인간이다. 인류의 하나 됨은 창조기사(창1:26)에 선언되어 있고, 구약 성경에 함축된 보편주의에 의해 확증되고 있다.(창12:3, 시67편, 72:17-----)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온 세상의 창조주요 주님이시다. 이런 이유로 이스라엘은 자기 역사를 하나의 동떨어진 역사로서가 아니라, 열방의 역사와의 연속선장에서만 옳게 파악할 수 있다.

우리가 다른 인간들을 타자로 보는 한, 그들은 잠재적인 원수인 셈이고 결국 우리는 그들과 전쟁을 하게 될 것이다. 전쟁은 우리에게 원수를 미워하고 그들을 타자로 낙인찍을 것을 요구한다. 우리가 타자와 원수를 우리로 보게 될 때에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이 허물어질 수 있다.

선교에 있어서 우리는 공통된 인성을 지닌 존재로서 선교지 주민들과 우리 자신을 동일시하여야 한다. 우리는 모두 창조주와 마주하고 있는 창조세계의 일부요, 타락했으나 구속될 수 있는 존재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인간들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인성을 입고 우리와 동일시되신 것처럼, 우리도 구원의 필요한 사람들과 하나가 되도록 부름을 받았다. 이처럼 오직 가난한 자, 억압받는 자, 잃어버린 자와 하나가 될 때에만 성육신적 선교의 본보기를 보일 수 있을 것이다.

정서적 주제들

근대적 세계관은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인지적 진리를 강조하고 진리를 감정과 도덕에서 분리시키는 데 비해, 성경은 이 세 차원-인지적 ‧ 정서적 ‧ 도덕적-을 서로 떼어 놓지 않는다는 점을 반드시 유념해야 한다. 이 셋은 인간의 모든 경험에 함께 들어 있다. 셋 모두 복음 메시지의 중심요소들이기도 하다.

두려운 신비
인간의 경험 가운데 가장 심대한 것은 기쁨이나 평안이나 흥분이 아니다. 그것은 두려운 신비, 곧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들어갈 때 직면하는 거룩한 경외심이다.

성령의 열매
성령의 열매는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을 보여주는 정서적 표지다.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온유 등(갈5:22)이 그렇다. 어두움의 열매 없는 행위는 교만, 미움, 호전성, 질투, 정욕 등이다.

사랑
에로스적 접근은 자신의 노력과 자신의 공로로 신에게 도달하려고 애쓰는, 자기 구원이다. 핵심 단어는 몸부림이다. 아가페는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구원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은혜로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신다. 핵심 단어는 항복이다.

에로스는 자기가 얻을 수 있는 것을 사랑한다. 이 사랑은 모든 것을-하나님까지도-우리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변모시킨다. 우리는 보답으로 받을 것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을 사랑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무언가 보상으로 기대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아가페 사랑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 사랑은 타인의 안녕을 도모하려고 무조건 헌신하는 것이다. 이 사랑은 희생적이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친절하고 관대하고 자발적이고 기쁨으로 충만하다. 통제하려 들지 않고 능력을 부여한다. 선한 자와 악한 자 모두를 대상으로 삼는다. 즉 자기 원수와 친구 모두를 위한 사랑이다. 그것은 징벌적이 아니라 구속(救贖)이다. 원수를 자기편으로 만들려고 노력하지, 그를 파괴하지 않는다. 평화를 도모하지, 현상황을 구속하겠다는 미명하에 폭력을 휘두르지 않는다.

아가페가 낳는 결과는 긍휼이다. 즉 “함께 고통을 느끼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보통 말하는 친절한 태도와 온유한 마음 이상의 것이다. 이것은 마치 그리스도께서 우리 인간의 본성을 취하실 때 우리와 완전히 동일시하신 것과 같이, 우리 자신에게 가난하고 굶주리고 억압받고 잃어버린 자들과 완전히 동일시하라고 요구하는 철저한 요청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할 때만, 참된 아가페 사랑을 깨닫고 삶으로 그것을 반영하기 시작할 수 있다(요일4:1)


통시적 주제들

성경적 세계관은 하나님의 우주적 이야기와 인간 역사에 대한 견해를 그 중심으로 삼는다. 성경에는 일련의 신학적 주제들이나 신앙적 묵상들도 있지만, 그런 것이 중심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성경은 하나님에 관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관한 이야기다. 이로부터 몇 가지 핵심적인 통시적 주제들이 나온다.

우주적 이야기/인간의 역사

성경은 일차적으로 창조세계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활동을 담은 이야기지, 종교적 교리들이나 신앙적 글을 모아 놓은 모음집이 아니다. 성경은 우주 역사에 대한 독특하고 포괄적인 해석과, 인간을 역사의 무대에서 활약하는 책임 있는 배우들로 보는 독특한 관점을 제공한다.

뉴비긴은 이렇게 말한다. “성경이 종교 경전들 가운데 아주 독특한 이유는, 인간 역사와 우주 역사를 총괄하는 역사 전체에 대한 하나의 해석을 제공한다는 점과, 인간의 삶을 이 역사와 동떨어진 것으로 보지 않는다는 점 때문이다. 그 관심의 초점은-이렇게 표현해도 좋다면-사람이 이 세상에서 도피하여 다른 세상으로 들어갈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하는 데 있지 않고, 하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이 땅을 구속하고 그 시작한 일을 완성하실 것이라는 그분의 약속에 있다” 성경적 세계관은 공동의 역사를 구성하는 실제 세계와 실제 사건들의 존재를 긍정한다. 아울러 모든 것을 아우르는 이야기도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만일 어떤 이야기나 플롯이 없으면, 엄청나게 많은 사건들의 배열만 있을 뿐 그 모든 것을 하나로 묶는 것이 불가능하다.

성경 이야기는, 대부분의 소규모 사회와 힌두교와 불교 같은 공식 종교들에서 볼 수 있는 거대내러티브들과는 달리, 순환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한 사회와 종교들은 자연세계가 탄생 ‧ 성장 ‧ 성숙 ‧ 쇠퇴 ‧ 죽음의 끝없는 순환을 거치고 있다고 생각하고, 종교가 이 순환과정으로부터의 해방을 제공한다고 본다. 성경이야기는 진화와 진보가 이어진다고 보는 근대적 견해 곧 인간이 계속해서 자연을 정복해 가는 이야기와 달리, 직선적이지도 않다. 또한 성경이야기는 포괄적인 거대내러티브는 무엇이든 억압적인 것으로 배격하고 어떤 참된 보편적 역사나 윤리의 가능성을 부인하는 포스트모던 관점과도 다르다.

이와 같은 역사 해석들과는 대조적으로, 성경의 역사는 U자 모양을 갖고 있다고 뉴비긴은 주장한다. 성경의 역사는 완전한 창조와 함께 시작하지만, 죄가 무대에 들어와서 그 창조세계를 망친다. 그런 뒤에 하나님이 소수의 개인이나 성인들이 아니라, 창조세계 전체를 완전한 새 창조로 회복하려는 자신의 계획을 실행에 옮기신다. 모든 창조세계가 이 패턴을 따라야 한다. 개인으로서 우리는 순전한 은혜로 말미암아 존재하기 시작하지만, 우리는 죽음과 지옥행으로 운명 지어진 죄인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완전한 새 존재가 되는 것을 미리 맛보게 된다. 성경의 역사는 타락의 이야기와 새로운 세계의 재창조에 관한 이야기다.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단언하시는 바는, 목적이 분명히 있고 그것이 좋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완전한 창조세계의 회복이 목적이다. 그 종말론적 미래는 그리스도 안에서 맛보기 형태로 현재화 되었고, 그분을 따르는 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영역에 들어가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은 옛 시대에 살면서도 장차 완전히 임할 새 시대에도 몸담고 있다.

인간의 역사가 하나님의 우주적 이야기와 연결되어 있다는 주장은 “이미(already)” 와 “아직(not yet)" 사이의 긴장, 우리가 살고 있는 현 역사와 우리가 바라보는 우주적 목적 사이의 긴장을 낳는다. 선교적 책임과 종말론적 희망 사이에 있는 이 긴장이 세상을 향한 교회의 증언의 심장에 있다.

뉴비긴은 이렇게 말한다. “이미 맛 본 것을 완전히 소유하기를 갈망하는 지상의 전투적 교회와, 교회가 갈망하는 완전한 성취, 곧 어린양의 혼인잔치 사이에 미완성된 선교의 과제가 놓여 있다. 교회가 ‘오십시오, 주 예수님’ 하고 기도를 드리면, 첫 번째 응답은 ‘너희는 온 세상으로 가라’는 그분의 위임령과 ‘보라, 내가 너희와 함께 있다’는 말씀이다”

샬롬/전쟁

영적 실재에 대한 성경의 이미지들은 근대성의 바탕이 되는 인도-유럽의 이미지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 이미지들은 우리가 관여하고 있는 우주적인 영적 전쟁에 대해 아주 다른 견해를 제공한다.

성경의 증언에 따르면, 선은 영원하고 악은 우발적이다. 성경이 분명히 밝히는 점은, 하나님과 사탄, 선과 악은 영원 전부터 공존해 오던 각기 독립된 실재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계셨고, 하나님은 선한 분이셨다. 죄는 성경 이야기에서 나중에 등장한다. 사탄과 졸개들은 타락한 천사들이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죄 많은 반역자들이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창조세계는 그분께 의존된 상태로 계속 존속하고 있다. 하나님은 자기와 별도로 존재하는 우주를 창조하지 않으셨다. 모든 창조세계와 마찬가지로, 사탄과 죄인들도 우주를 지탱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존해 있다. 반역했음에도 아직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증언한다.

복음의 심장에는 샬롬이 있다. 샬롬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로 시작되며, 예배와 거룩함과 순종을 내포하고 있다. 인도-유럽 신화에서는 기도가 신들을 조종하거나 통제하는 수단이다. 성경적 사상에서는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복종이다. 기도할 때 우리는 예배와 경배로 시작한다. 그럴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인생의 주인이심을 새롭게 다진다.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이 우리의 뜻이 아니라 그분의 뜻대로 행하시도록 허락하게 된다. 또 그분이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가운데, 우리 자신과 우리의 자원을 사용하시도록 하락한다. 잃어버린 자를 위해 기도할 때는, 우리도 기꺼이 보냄을 받을 각오를 한다. 가난한 자를 위해 기도할 때는, 우리의 소유를 내 놓을 준비를 갖춘다. 정의를 위해 기도할 때는, 민중과 함께 하겠다고 마음을 먹는다. 기도는 값비싼 대가가 따르는 것이다.

샬롬은 조건 없이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고, 상대방의 반응에 관계없이 그에게 스스로를 헌신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목표는 원수를 이기고 평화와 샬롬을 가져오는 것이다. 예수는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쳤는데, 그렇게 하면 그들이 더 이상 원수가 아니가 때문이다(마5:44; 눅6:27-35). 우리가 원수를 두고 있는 한 평화는 있을 수 없다. 사탄의 목표는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향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다. 우리는 모든 타락한 인간을 타자가 아니라 우리와 같은 존재로 보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

가장 심층적인 수준에서 보면,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서로 사랑하도록 부름 받은 한 인류다. 하나님의 방법은 사랑, 진리, 평화, 생명, 빛의 능력이다. 사탄의 방법은 속임, 두려움, 폭력, 어두움, 죽음이다. 우리는 우리의 원수를 미워하지 말고 사랑하라는 부름을 받았다. 그들도 ‘우리’이고, 그들도 구속될 수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싸움에 임할 때 공평함이란 이름으로 불의한 수단을 사용해서는 안 되는데, 그럴 경우에는 원수들과 하나가 되는 데 실패하기 때문이다.


11장
세계관은 어떻게 변화되는가

성경은 변형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히브리 사상의 근본은 외부적 또는 관계적 집합이다. 이 사상은 사물이 본질적으로 어떤 존재인가보다, 그것이 다른 사물과 역사와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강조한다. 예를 들면, 히브리어 단어 ‘슈브(shuv)'(구약성경에 1,056 번 나온다)는 반대 방향으로 돌아서는 것을 뜻하며 방향을 돌림, 떠나감, 되돌림 등의 개념을 담고 있다. 한 사람이 자기가 걷던 길에 등을 돌리고 정반대 방향으로 나간다. 슈브는 또한 이전 장소나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신약성경에서 회심을 지칭하는 단어, ‘메타노에인’과 ‘에피스트레페인’도 ‘방향을 돌림’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감’을 의미한다.

문화적 변형의 차원들

그리스도께로의 회심은 문화의 세 가지 차원-행위와 의식, 신념, 세계관-을 모두 아우를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물론 그리스도인이므로 다르게 살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그들의 행위가 주로 자기 문화에 바탕을 두고 있으면, 그것은 죽은 전통이 되고 만다. 회심은 신념의 변화를 포함해야 하지만, 거기에만 그치면 그것은 거짓 믿음에 불과하다(약2장). 회심은 행위와 신념의 변화를 수반해야 하지만, 만일 세계관이 바뀌지 않으면 나중에 복음이 거꾸로 뒤집어져서 그 지역 문화의 포로가 되고 만다. 결과적으로, 기독교의 모양만 있고 알맹이는 없는 혼합주의적인 기독교라는 이교주의를 낳는다. 기독교는 새로운 주술로 변하고, 보다 교묘한 새로운 형태의 우상숭배로 변질된다. 행위의 변화가 초기 개신교의 초점이었고 믿음의 변화가 20세기의 초점이었다면, 세계관의 변형은 21세기의 교회와 선교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세계관 변형의 핵심에는, 우리 눈에 비치는 세계와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 사이에 정합성을 찾으려는 인간의 탐구가 있다. 인간은 질서, 패턴, 대칭구조, 정합성, 통일성, 비모순성 등을 찾음으로써 의미를 추구한다. 배움이란 “의미를 만드는 행위”다. 즉 우리의 경험에 의미 또는 정합성을 부여하는 작용인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우리의 신념 체계를 종교, 과학, 의료, 요가, 요리, 자동차 정비 등 여러 부문으로 나눔으로써 그런 노력을 기울인다. 한편으로 우리는 더 깊은 세계관의 차원에서, 종종 무의식적으로, 실재에 의미를 부여하는 정합된 구조와 이야기로 이런 것들을 통합하려고 애를 쓴다. 다른 한편에서는, 이로부터 나오는 심층적인 패턴이나 질서가 표면적인 문화의 영역들을 형성하게 된다.

선교사와 목사로 일하는 우리는 이런 변형이 먼저 우리 속에서 시작되어야 함을 기억해야 한다. 먼저 우리 자신과 우리 교회가 변형을 경험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 우리는 복음의 진실한 증인이 될 수 있고, 누구나 본받아야 할 변형을 예시할 수 있을 것이다.

세계관의 변형

우리는 어떻게 세계관을 변형할 수 있을까? 세계관이 변형되는 방식은 두 가지다. 통상적인 변화는 의식적 차원인 신념과 관습의 변화가, 시간이 흐르면서 세계관 차원의 변화를 가져 올 때 비로소 발생한다. 패러다임 또는 세계관 전환은 표면 문화와 세계관 사이의 긴장을 줄이려고 세계관 자체의 내적 형태가 근본적으로 재구성될 때 발생한다. 거꾸로, 이런 패러다임 전환은 표면 문화를 개조시킨다. 즉 양자는 쌍방적 관계다. 의식적 신념은 세계관을 개조하고, 세계관은 의식적 신념을 빚어낸다.

일반적으로 회심이라는 말을 들으면, 근본적인 패러다임 전환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회심은 예전의 신념과 관습의 집합을 새 집합으로 대체한다. 이는 옛 길에 등을 돌리고 새 길에서 새 출발을 하는 것이다. 세계관의 차원에서는, 실재를 보는 우리의 관점이 근본적으로 바뀌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세계관의 변형은, 개인이든 사회든, 계속 진행되는 하나의 과정이다.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개발되고, 새로운 경험을 접하고, 새 아이디어가 제기될 때, 이 모든 현상은 밑바탕에 깔인 세계관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우리는 세계관의 변형을 하나의 지점, 곧 회심으로, 그리고 하나의 과정, 곧 계속 진행되는 심층적인 제자양육으로 보아야 한다.

세계관의 검토

세계관을 변형하는 한 가지 방법은 “그것을 표면으로 떠올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품고 있는, 미처 검토되지 않은 심층적 가정들을 의식적으로 검토하고, 이로 말미암아 암시적인 것을 명시적으로 만드는 일이 필요하다.

기독교적인 변형은 패러다임 전환을 요구하는데, 내용인즉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알려지신 분이며, 그분은 우리 삶의 중심에 있는 것-우리 자신이든 다른 어떤 신이든-을 밀어 내고 그 자리에 앉기에 합당하신 분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실로 근본적인 전환이 아닐 수 없으며, 이에 따른 작업은 평생 동안 계속된다. 하지만 우리는 먼저 그리스도를 우리 삶의 주님이자 중심으로 삼는 일부터 시작할 수 있다. 이 결단과 옛 세계관 사이에 있는 많은 불협화음은 하나씩 풀어 가야 한다. 부자는 모든 것을 내어주고 그리스도를 따라야 하며, 가난한 자는 오랜 피해의식을 벗어 버리고 그리스도처럼 사는 일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힌두교인들의 아침공양 모습(2011년, 네팔-박타푸르)

다른 세계관에 노출되기

세계관을 변형하는 두 번째 방법은, 우리 문화 밖으로 나가서 바깥에서 우리 세계관을 바라보고 외부인이 그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지를 경청하는 것이다.

우리가 세계를 타자의 눈으로 보는 법을 배우고 나서 우리 자신의 문화로 돌아올 때, 우리는 “외부인”으로 돌아오는 셈이고 우리 문화를 새로운 눈으로 보기 시작한다. 이런 이유로 서양 문화에 대한 기독교적 비판은, 외국에서 오래 머물면서 그 지역의 문화와 깊이 동일시되었던 선교사들과 그들의 자녀들이 주도했다.
선교현장에서, 사람들을 세계관의 차원에서 회심시키고 제자로 양육할 때 우리는 새로운 회심자들의 세계관뿐 아니라 선교사인 우리 자신의 세계관을 검토해야 한다. 과거에 우리 선교사들이 종종 복음보다는 근대성에 더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선교사들은 이중적인 회심을 경험한다. 한편으로는 타인의 눈으로 세계를 보는 법을 배우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배워왔던 현실을 보는 방식을 보는 법을 배운다. 두 세계관 모두 복음의 정밀 진단을 받아야 하고, 둘 다 복음에 의해 변형 되어야 한다. 이 두 집합의 눈을 통해 세계를 보게 되면 양자 모두를 상대화 하는 일이 가능하고, 선교지의 세계관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세계관도 크게 변화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더 잘 깨닫게 된다.

또 다른 차원으로 보면, 교회가 지구적 차원에서 성경적 세계관을 분명하게 표현하는 일이 중요하다. 어느 한 문화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작업을 해 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한 집합의 눈만 가지고 세계를 조망하기 때문이다. 선교사와 신학자와 교회 지도자들이 서로 만나 대화함으로써, 그들 자신의 세계관과 다른 기독교적 대안들을 인식하는 법을 배우고, 우리가 가진 모든 세계관을 성경이 변형시킬 수 있다는 새로운 빛에서 성경을 읽는 것이 중요하다. 이 대화에서, 우리 서구인은 비서구인이 우리를 어떻게 보는지 그들의 말을 귀담아들어야 한다. 물론 처음 그런 말을 들을 때는 그들이 우리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반응하기 쉽다. 그러나 더 깊이 성찰해 보면, 그들의 견해가 우리 자신을 더 명료하게 볼 수 있게 해 주고, 성경에 비추어 우리 자신의 세계관을 검토하게 도와준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는 사랑 안에서 그들의 세계관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그들과 나누어야 하며, 성경에 비추어 그것들을 재검토하도록 그들에게 권유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갖고 있는 특정한 세계관들에 대해 믿을 만한 성경적 대안을 다함께 개발하는 일이 필요하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초문화적 사람들로 구성된 초문화적 공동체가 된다. 즉 우리는 다른 문화에서도 얼마든지 살 수 있게 되지만, 그 어떤 문화에서 살든지 우리의 진정한 정체성은 갈수록 그 모든 문화에서 외부인이자 내부인인 정체성으로 변모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 땅에서 소금과 같이 되어, 하나님 나라를 반대하는 인간 시스템을 전복할 책임이 있다.

살아있는 의식 만들기

변형을 촉진하는 세 번째 방법은 살아 있는 의식(ritual)을 만드는 일이다. 서양의 개신교인들은 반의식적인 경향이 강하다. 우리에게는 의식이라는 용어 자체가 이미 사장된 무의미한 형식, 우상숭배, 주술과 같은 부정적인 함의를 가져온다. 그런데 우리는 기호로부터 실재와 형식과 의미를 떼어 놓고, 이런 요소들을 단순한 구두적 의사소통으로 환원하는 잘못을 범하기 쉽다.

살아 있는 의식은 담론의 범주를 벗어난다. 의식은 언어로 환원될 수 없는 초월적인 것-우리의 마음속 깊이 있는 신념, 정서, 가치관-에 관해 말한다. 의식은 신비, 뿌리 신화, 은유, 근본적인 충성심을 가리키고, 우리의 가장 깊은 정서와 도덕 질서를 표현한다.

우리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인 회심과 같은 사건을 뚜렷이 표시하려면, 신성한 것을 가리키고 그 사건의 중요성을 부각시키는 살아 있는 의식이 필요하다. 이런 것이 없으면, 그 중요한 사건이 한갓 평범한 일상적인 경험으로 전락하게 된다.

많은 살아있는 의식들은 또한 공연의 성격도 갖고 있다. 그것을 상연함으로써 우리 자신이 변형된다. 판사가 “당신은 유죄입니다”라고 선고를 내리는 것은 단순히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피고를 범죄자로 변형하고 있는 중이다. 목사가 “내가 이제 그대들을 남편과 아내로 선언하노라”라고 말할 때, 그는 당사자들의 사회적 ‧ 법적 신분을-우리의 경우는 종교적 신분까지-독신에서 기혼자로 바꾸어 놓는다.


결 론

복음은 결국 변형된 삶에 관한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증언한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이전의 삶을 조금 수정하도록 권유하는 정도가 아니다. 그들을 완전히 새로운 삶으로 초대하는 것이다. 이 변형은 근본적이고 총체적이다. 그것은 그들의 세계관을 비롯하여 문화의 모든 차원이 변하는 것을 뜻한다. 아울러 물리적 ‧ 생물학적 ‧ 심리적 ‧ 사회적 ‧ 영적으로 그들을 변화시킨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을 따르기만 하면,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서 이루시는 변형이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지만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다. 우리는 복음의 능력으로 변화를 받아서 세상에 새로운 세계관을 보여주는 사람들, 영원한 구원을 가져오고 사랑, 기쁨, 평화, 온유, 증언의 향기를 풍기는 그 세계관을 선전하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세상에 대항해서 싸우거나 세상에서 도피하라는 부름을 받지 않았다. 오히려 세상에 변화를 자져오는 소금과 누룩이 되라는 소명을 받았다. 참으로 위험한 것은, 뒤로 물러나서 세상에 아무 영향도 주지 못하는 기독교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다. 또 다른 위험은, 우리 문화의 포로가 되어 복음이 맛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개인적으로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반영하는 삶을 살고, 공동체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제자다운 대항문화적 공동체로 살아가도록 부름을 받았다.

                                                                                                                      - 끝- 

 
도서명 : 21세기의 선교와 세계관의 변화
저자 : 폴 히버트
역자 : 홍병룡
출판사 : 도서출판 복 있는 사람
발행일 : 2010년 12월 20일 초판 2쇄 발행
쪽수 : 700쪽
가격 : 29.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