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늘의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체제가 무엇이냐고 물을 때 '미국이 주도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 (globalization)임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만큼 미국에 의해 주도되고 있는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세계화 추세는 보편적인 것으로 정착되어 있다. 냉전 체제가 끝나면서 시작된 세계화는 그만큼 미국과 서구 유럽의 국가들은 물론, 동방의 고요한 나라 한국이나 세계의 약소국가에 이르기까지 그 국가의 존립을 밑바닥으로부터 흔들며 맹렬한 기세로 침투하고 있다.

자본의 힘 앞에 불가능은 없다는 신조로 온 세상을 본격적으로 지배하기로 작정한 다국적 초국가적 자본의 위력을 자랑하는 미국을 지탱하고 있는 것은 자본만이 아니다. 미국은 전 세계 120개국 745개 군사기지에 대량 살상무기를 배치하고 전 세계를 통제하고 감시하면서 그들 중심의 세계화를 추구하고 있다. 막강한 부와 무기, 그리고 거기에 기독교의 교리를 단일화하여 강력한 정치종교이데올로기로 삼았던 4세기 로마황제의 전례를 그대로 답습함으로써 오늘날 미국은 사상 초유의 초강대 제국의 영화를 누리며 세계지배의 야욕에 광분하고 있다.

  그렇다고 미국을 일방적으로 매도하기에는 간단치 않다. 미국 내에는 노엄 촘스키, 하워드 진, 브루스 커밍스와 같은 지성들은 물론 일군의 ‘예수세미나’ 신학자들처럼 기독교 이전의 본디 예수 정신을 올바로 계승하려 노력하고 있는 신학자들이 제국주의를 반대하며 변혁운동을 지향하고 있음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더욱이 요소요소마다 혁신적이고 진취적인 대중지성이 두껍게 자리하고 있는 것은 오늘의 미국이 내적으로 크게 동요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외견상 현상을 유지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같은 현상 앞에서 깊은 우려를 표명하고 있는 사람들은 비단 평생을 사회변혁운동에 몸바쳐온 사람들 뿐 만이 아니다.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개의 초강대국의 세력 균형에 의해 유지되었던 세계가, 급기야 동구 사회주의 진영의 몰락으로 그 견제력이 사라지자, 세계가 미국의 초강대 군사력과 자본에 의해 일방적으로 지배되고 있음을 우려하는 자성의 목소리는 미국 내부로부터도 강력히 제기되고 있다. ‘월가를 점령하라’는 구호 아래, 1% 재벌에 의한 99%의 지배를 종식시키려는 미국시민들의 시위가 전세계로 확산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2.
  자본주의 체제의 성장으로 물질문명의 혜택을 받은 사람이 전에 비할 바 없이 광범위하며 그 삶이 훨씬 편리해진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정책으로 인해 공장이나 일터에서 쫓겨나 내일이 없는 암울한 나날을 보내는 사람들이 훨씬 많아졌다.

일방적인 전쟁도발행위로 네이팜탄이 작렬하고 집중포화 속에 힘없는 사람들이 시체로 나뒹굴며 어린이와 여자와 노약자들이 가족을 잃고 방황하며, 번영을 노래하는 1%의 행복한 사람들의 이면에는 극한의 빈곤과 비참에 처한 사람들이 과거보다 월등히 많은 수십억에 달하고 있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것은 이들이 고통에 맞서 싸울 기력을 상실하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의 절망의 늪에 빠져 있다는 사실이다. 과연 이들에겐 내일이 있는가. 희망은 아무 데서도 찾아볼 수 없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망하기엔 아직 이르다. 세계는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만큼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 좌절의 아픔을 딛고 우리의 시선을 조금만 다른 데로 옮겨 살펴보면 절망적인 현실은 반면의 진실에 불과하다는 것을 곧 알게 된다. 인간을 억압해온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종교란 거의 절대적으로 무너뜨릴 수 없는 영구불변한 철옹성으로 느껴졌고 , 그렇기 때문에 이에 도전하는 일은 바위에 계란을 던지는 일로 알려져 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멀리는 프랑스 혁명, 미국독립혁명, 러시아혁명을 비롯하여 가까이는 우리의 3.1독립운동, 4.19혁명, 광주민주화운동, 6월항쟁 등 식민 제국주의와 군사독재에 맞서 빛나는 성과를 일구어 낸 역사가 있다. 비록 더욱 잔인하고 포악한 보복적 압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겐 막강한 권력체제를 변혁시킬 수 있다는 증거가 있다.

민주주의와 인권이 단숨에 성취되는 것은 아니지만 여기에 뿌려진 고귀한 피는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역사는 분명하게 증언한다. 구소련이나 중국, 그리고 미국에 의해 현재까지도 무참하게 짓밟히고 있는 약소민족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나라들이 식민 제국에서 독립해왔으며 중동이나 아프리카 등지에서도 민주화는 계속 진행되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이제까지 마치 존재하지도 않은 사람처럼, 아무도 그 고통의 절규를 들을 수 없었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하나 둘, 날이 갈수록 새롭게 힘을 얻어 크게 들려오고 있다. 오랜 세월, 어둠속에 묻혀 있었던 여성들과 어린이들의 목소리는 말할 것도 없다. 신자유주의 체제에 억눌려 온 노동자들의 목소리, 광장을 메운 촛불들의 침묵의 소리, 종교적 세습체제에 짓밟혀온 불가촉천민들의 목소리는 하나의 하모니가 되어 지구촌을 울리고 있다.

김진숙의 한진중 85호 크레인 고공농성 투쟁, 정리해고로 이미 23명의 목숨이 희생돼 진행 중인 쌍용차 노동자 투쟁, 천막 장기농성 1650일이 지나고 있는 재능교육 해고 노동자 투쟁, 자연 훼손 및 미·중과의 외교적·군사적 마찰 등을 염두에 둔 제주해군기지 반대투쟁과 같은 민중들의 분노를 보라.   

억압에 저항하며 평화를 지향하는 이들이 핸드폰과 컴퓨터의 자판을 두드리며 트위터와 페이스북을 통해 전국적인 개미군단들의 연대를 이뤄내지 않는가. 이들은 이제 자신들이 더 이상 연약한 사람들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의 젊은이들, 한국의 노동자들의 투쟁은 이미 세계의 주목을 받은 지 오래며, 한국은 민주혁명의 성지로 자리매김 되고 있다.

  이게 무슨 이야기인가. 오늘날 정의를 위해 싸우고 있는 사람들의 힘이 결코 만만히 넘길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싸우는 장소, 싸우는 때와 사람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향하고 있는 목표는 한결같다는 이야기다. 하나하나를 떼어놓고 보면 극히 연약한 보잘 것 없는 사람들로 볼 수 있지만, 이들이 향하고 있는 목표는 한결같이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맞선 민중들의 ‘아래로부터의 세계화’이다.

이들의 투쟁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미국이 신자유주의 제국건설을 시작하기 훨씬 전부터 시작되고 있다. 그것은 그 사례를 일일이 다 밝힐 수 없을 만큼 광범위하고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유난히도 빈번히 일어나는 지구상의 참사를 겪을 때마다 때로는 NGO 등 시민단체의 형태로, 종교단체의 이름으로, 노동단체의 이름으로, 순전히 개인의 자격으로,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빈곤과 재난과 분쟁이 일어나는 고통의 현장에서 보여준 따뜻한 인간애와 연대의 모습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아무도 강제하는 이 없는 가운데 자발적으로 일어난 연약한 이들의 연대, 폭력과 억압에 항거하며 진정한 인간다운 삶을 향한 이름 없는 이들이 보여주는 헌신적인 사랑과 소망, 그것은 인류사상 어떤 거대한 체제도 무너뜨린 ‘아래로부터 일어나는 세계화’의 도도한 물결이다.

  우리는 이 같은 ‘아래로부터의 세계화‘ 물결 속에 우뚝 서 있는 한 인물을 잊을 수 없다. 2천 년 전 팔레스타인의 갈릴리 좁은 골목길에서 병든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 그 당시 흔히 죄인으로 낙인찍힌 창녀나 세리들 틈에 끼어, 함께 식사를 나누며 하느님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던 한 젊은이, 분명 우리가 역사에서나 배우는 거대한 로마제국의 군사정치체제와 배타적인 유대종교체제라는 이중의 고통을 온몸으로 겪고 있던 젊은이를 우리는 기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것은 마치 안중에도 없는 듯이 평온한 모습으로 민중들 속에서 그가 담담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것은 로마와 유대종교라는 체제의 한계를 꿰뚫어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비록 자신은 빈털털이에 초라한 떠돌이였지만, 양대 체제가 그 당시로서는 막강한 힘으로 온 세계를 억누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으로는 결코 이 세계가 움츠러들거나 더 이상 파괴될 수 없는 해방의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고 확신했을 것이었다.

물론 예수의 행적이나 메시지는 그 뒤 서양 사람들의 뇌리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고, 그 영향은 서양에만 머물지 않고 경계를 넘어 온 세계에 퍼져나갔다. 그 영향을 받은 점에서, 이 글을 쓰는 사람도 예외가 아님을 고백한다.

  그러나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 속에 깊은 영향을 끼친 이는 비단 예수만이 아니란 것도 잘 안다. 서양의 전통밖에 있는 동양이나 기타지역에도 사람들에게 정의와 자비심을 갖도록 영향을 준 사람들은 그밖에도 무수히 많다. 나는 민중들의 영원한 벗인 그 분들께 깊은 감사의 뜻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세계에 자유와 평화와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날이 올 때, 우리는 서로 손을 붙잡고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이 분들이 함께 있었다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 
   

3.
  일찍이 세계는 로마로 통한다며 ‘로마의 평화’를 구가했던 로마제국은 지금 어디 있는가. 자신들에게는 해지는 곳이 없다며 그 강대함과 융성함을 자랑했던 ‘대영제국’은 어디 있는가.

이러한 폭력적인 위로부터의 세계화는 외부로부터의 도전을 받기 전에 극심한 빈곤, 빈익빈 부익부 등 불평등이 심화되어 내부로부터 스스로 와해하는 길을 걸었다. 그것은 지금 내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이 작은 저항의 몸짓이 무슨 소용이 있는지 회의하며 좌절하는 이들이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적 교훈이다.

우리는 자본과 군사력의 힘으로 ‘위로부터 지배하려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종말이 멀지 않음을 믿는다. 동시에 우리는 이와는 비교할 수도 없이, 더 크고 부드러운 세계화, 곧 정의와 평화를 사랑하는 가난하고 연약한 이들의 연대 움직임인 ‘아래로부터의(밑바닥으로부터의) 세계화’에 대한 믿음을,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암울한 절망적 현실에 부딪칠 때마다 다시 한번 되새기며 꼬옥 붙들어야 한다.

눈물 없이는 걸을 수 없는
하루하루 가시밭길을 순례하는 투쟁의 삶속에서
누룩처럼 자라는 변혁의 세계를 바라보면서!    

[글쓴이 소개] 전 영 철

새로운기독교운동연대(새기운) 대표, 우석대학 명예교수(영문학), 마음사랑교회 목사.
전영철은 2011년 5월, 인류의 역사에서 제국주의 기독교의 시발점이 된 1차 니케아공의회(325년)를 현지 답사차, 공의회가 열렸던 오늘날의 터어키 이즈닉(Iznik)을 방문했다. 전영철은 니케아공의회에서 비롯된 종교적·정치적 야합과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종교간 적대를 극복하기 위해 진보적인 기독교인·무슬림·유대교인들과의 진솔한 소통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으며, 이를 위해 2011년 11월에는 메카 순례(Hajji)에도 참가하는 등 국내외 무슬림과도 직접 대화를 진행 중이다. 아울러, 불교에서 세상을 보는 관점인 인드라망 정신을 변혁적인 원형의 예수정신과 연계하여, 가난한 이웃들이 스스로 그 사회의 주체로 성찰하고 네트워크화 할 때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보고, 이에 부합하는 새로운 사회운동과 참된 종교운동의 하나됨을 제안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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