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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요하는 전도는 이제 그만한국 교회 교우님들에게
류상태  |  shalom77@cho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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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6년 03월 19일 (일) 00:00:00 [조회수 : 3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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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 교우님들이여, 강요하는 전도는 이제 그만 하십시오. 말로 하는 전도도 그만 하십시오. 그냥 삶으로 보여주십시오. 이웃들이 우리 기독교인의 삶을 보고, 기독교가 얼마나 생동적이며 매력적인 종교인지 스스로 느낄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어 주십시오.

혹 길거리나 지하철에서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우매한 전도를 하는 분이 아직도 계시면 당장 중지해 주십시오. 집집마다 방문하여 전도지를 돌리는 전도도 이제는 그만 하십시오. 삶이 따르지 못한 채 말로 하는 전도, 비효율적이고 무모한 물량식 전도는 현대 사회에 적절치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역효과만 가져옵니다.

재작년, 대광고 강의석군에 의해 촉발되었던 ‘학교 종교 자유’ 문제 역시 무모한 강요적 선교에 대한 반응으로 나타난 사건이었습니다. 모범 사학으로 자타가 인정했던 대광고는 깨끗하고 투명한 경영, 열정적이고 헌신적인 교사들의 노력으로 명문 사학으로 자리잡았지만, 교리적 독선과 배타성을 극복하지 못한 채, 무리하게 학생들에게 특정종교예식에 참여하도록 강요하여 신념이 다른 수많은 학생들에게 고통을 안겨주었습니다.

우리나라에 종교재단 사학이 많이 있지만, 특정종교예식인 예배를 마치 국어 영어 수학 과목처럼 무모하게 시간표에 넣어서 전체 학생을 강제로 참석하게 하는 학교는 개신교 사학 이외에는 거의 없습니다. 불교나 천주교 등 다른 종교계 사학들도 종교예식이 있기는 하지만, 시간표에 넣어 매주 진행하면서 전체 학생들에게 강요하는 무모한 일은 하지 않습니다.

그런 식의 무모한 선교 활동은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일 뿐 아니라, 효율적인 면에서도 역효과를 내고 있습니다. 과거 1970-80년대에는 그런 식의 강압적 선교활동이 기독교인의 수를 늘리는데 효과가 있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학생들로 하여금 기독교에 대해 반감을 갖게 하고 안티기독교인을 양산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습니다.

차라리 강군의 주장을 전폭 받아들여 (강군의 주장은, 학교에서 예배를 드리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에게 강요하지 말고 참석 여부를 자율적으로 선택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학교에서는 예배와 성경수업의 질을 향상시키는데 심혈을 기울이되 학생들에게는 선택권을 주어, 강요적 요소를 배제하고 내용으로 승부한다면 훨씬 좋은 선교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참고로, 대광고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기독교학교들은 학생들에게 선택권을 주는 것처럼 말하고 있으나, 형식적인 틀만 겨우 갖추었을 뿐 실제로는 학생들이 자율적으로 선택하기 어려운 분위기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어쨌든 이 문제에 대해서는, 강군이 문제를 제기하기 이전까지는 저 자신도 가해자 입장에 있었기에 책임을 피할 수 없는 입장이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저는 속죄하는 마음으로 이렇게 기독교의 독선과 배타성을 고발하는 것이며, 주님께서 진정 우리에게 생명과 자유를 주신 ‘복음의 원형’이 회복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교는 강요에 의해 이루어져서는 안됩니다. 여러분의 가족이나 친척, 친구, 이웃들을 “어떻게든 예수님을 믿게 하겠다”는, 그래야 그 분들을 살리는 것이라는 교리적 사명감에서 벗어나 주십시오. 어쩌면 그들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다른 방식으로 이미 하느님을 섬기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여호와 하느님’이라고 이름지은 그 하느님은, 우리에게는 ‘여호와’라는 이름으로 알려졌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다른 이름으로 알려졌을 수도 있습니다. 이름이 다르다 하여 실체까지 다른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믿는 방식, 우리의 신념체계만이 옳다”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라 무모한 고집에 불과합니다. 그 어리석은 고집으로 옛날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오늘날에도 그 옛날 바리새인들을 그대로 빼닮은 교리주의자들과 ‘성직자’임을 자처하는 전문종교인들은 ‘자기들이 만든 하느님’ ‘자기들이 만든 예수’를 여러분에게 믿도록 강요하고 있으며, 또한 그 예수만을 전도하도록 강요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느님의 무한하심과 자비로우심, 풍요로우심을 제한하는 것이며, 다양한 인류 문화를 훼손하는 신앙적 범죄행위입니다.

기독교는 가치있는 여러 종교 가운데 하나이지, ‘유일한 진리의 종교’가 아닙니다. 하느님은 분명히 기독교를 통해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지만, 유대교나 이슬람교, 불교 등의 세계종교는 물론이고, 천도교와 대종교, 원불교 등의 우리 민족종교를 통해서도 구원받을 수 있도록 자유롭게 역사하십니다. 그 하느님의 섭리를 제한하고 가둘 수 있는 ‘인간의 신념체계’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어떤 특정 종교만이 하느님의 뜻을 독점한다는 무모한 고집과 독선은 역사상 무수히 많은 갈등을 만들어 냈습니다. 13세기 인류 역사를 피로 물들인 십자군 전쟁에서, 예루살렘을 점령한 십자군은 예루살렘에서 평화롭게 살고 있던 유대인과 이슬람교인들을 “사탄의 종교를 믿는 악의 무리”라 하여 보이는대로 모두 죽였습니다.

당시 살육당한 사람들의 피가 무릎까지 차올랐다는 말이 전해질 정도로 ‘주의 군사들’은 ‘사탄의 자식들’을 증오하고 있었으며, “악을 처단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기꺼이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지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교도들의 신앙도 존중해야 내가 믿는 종교도 존중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당시 이슬람 군대의 총지휘관 ‘술탄 살라딘’은 예루살렘을 재정복할 때, “복수를 해야 한다”는 장교들의 건의를 물리치고, 민간인 신분의 기독교인 뿐 아니라 십자군에 참여했던 군인들까지 모두 고향으로 돌려보내주었습니다.

또한 유색인종, 특히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사람과 원숭이의 중간 존재’라고 생각했던 백인 기독교도들은 아메리카 인디언을 짐승 죽이듯 살상하여, 백인이 발을 들여놓기 전까지 6천만명에 이르던 인디언들은 그들의 땅을 뺏기고, 종교와 문화도 거의 말살당한 채, 지금은 25만명 정도만 남아 겨우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실상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의 이름으로 인류와 역사 앞에 저질러진 범죄가 얼마나 크고 무서운지 제대로 알고 있는 기독교인이 우리나라에는 의외로 많지 않습니다.

십자군 전쟁과 아메리카에서 일어난 반인륜적 학살의 원인을 파헤쳐보면, 피부색과 문화적 편견도 한몫을 차지했지만, “하느님은 샘, 햄, 야벳의 후손이 살고 있던 당시 근동 지방과 유럽에만 당신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사람을 두셨다”는, 성서 문자에 매인 독선적 사고가 깔려 있습니다.

다행히도 이런 식의 독선과 배타성이, 오랜 기간에 걸쳐 자신들의 신념체계를 냉철하게 돌아보고 반성해온 서구 기독교 세계에서는 거의 사라졌지만, 오늘날 세계 최첨단의 문명을 자랑한다는 미국과, 그 영향을 깊이 받은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있을 뿐 아니라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한 술 더 떠서, 한국의 주류 개신교 목사들 대부분이 눈에 보이는 결과만 보고 “서구 교회는 몰락했다”고 섣부른 판단을 내리고 있지만, 자신을 여전히 크리스찬이라고 고백하는 유럽의 기독교인들은, 교회라는 건물과 물리적인 모임, 교리적 틀로부터 자유하여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복음의 정신을 따라 사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들의 신앙과 삶의 내용은 보지 못하고 교회 수와 건물에 몰려드는 사람의 수치로 ‘하느님의 교회’를 제멋대로 판단하고 재단하는 한국 목회자들의 한심한 수준을 놓고 볼 때, 영성을 강조하는 한국 교회가 사실은 ‘영적’이 아니라 매우 ‘세속적’이며, ‘실상’은 보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현상’에 함몰되어 있는 슬픈 현실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불상을 파괴한다든지, 단군상의 목을 자르는 행위가 우리나라에서 자주 발생하는 것도 바로 한국 교회가 얼마나 유치하고 원시적인 독불장군식 신앙에 머물러 있는지를 잘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피해를 입은 이웃종교인들에게 엎드려 사죄드립니다.)

그리스 신화에, ‘프로쿠루스테스’라는 괴물이 등장합니다. 그는 자신의 침대와 똑같은 키를 가진 사람만 살아야 세상이 아름다워진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아 침대에 눕혀 키가 큰 사람은 다리를 자르고, 키가 작은 사람은 억지로 늘려 침대 크기에 맞추어 놓았습니다. 불행하게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사회에도, ‘프로쿠루스테스’들이 매우 많습니다.

한국 교회 교우님들이여, 자신의 신념 체계에 맞지 않는 사람은 모두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2천년 전의 원시 신앙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 주십시오. 혹 아직도 그것이 옳은 것이라고 믿는다면, 본인은 그렇게 믿더라도 제발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자신과 같은 신념을 갖도록 강요하는, 무모하고 어리석은 폭력적 전도행위는 삼가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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