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림 > 신간 소개
[신간소개] 목회자를 위한 <설교자노트> 2012년 7·8월호
정연복  |  pkom5453@hanmail.net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입력 : 2012년 06월 15일 (금) 17:40:18
최종편집 : 2012년 06월 16일 (토) 01:17:46 [조회수 : 2244]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텔레그램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

 

<신간 소개> 목회자를 위한 <설교자노트> 2012년 7·8월호 
 
                                             정연복(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저는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으로 일하면서 1997년부터 격월로 나오는 <설교자노트>라는 책을 번역해 왔습니다.

지금까지 97권이 나온 <설교자노트>는 '교회력에 맞춘' 설교 본문에 대한 성서 주석, 그리고 그 본문에 따른 미국의 실력 있는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의 최신의 설교를 번역하고, 아울러 설교 내용에 적합한 기도문과 예화 자료를 풍부하게 제공하여 목회자들의 설교 준비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책입니다. 특히 <설교자노트>에 실린 설교들은 설교자들에게 성서에 충실하면서도 독창적인 설교 아이디어를 제공합니다.

그런데 이 <설교자노트>는 시중 서점에서는 팔지 않고 신청하시는 목회자들에게 직접 우송합니다. '영성적이며 공동체적이며 생태학적인 신앙 공동체를 위한 자료'인 <설교자노트>를 구입하기 원하는 분들은 한국기독교연구소(전화: 031-929-5731)로 연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설교자노트>는 격월로 나오며 두 달치 분량의 설교 자료를 담고 있는데, 2012년 7·8월호 중 8월 셋째 주 설교 자료를 참고로 첨부합니다.


설교 제목: 권력자들에게 진리 말하기 

* 성경 본문: 마가 6:14-29
* 성경 주석

헤롯이 세례 요한을 죽이는 보도를 담고 있는 오늘 본문은 '열두 제자의 파송'(6:7-13)과 '열두 제자의 돌아옴'(6:30-32) 사이에 샌드위치되어 있다. 세례 요한의 운명은 예수 자신과  그를 따르는 자들의 운명을 예시한다는 점에서, 이 이야기들은 합쳐서 전체를 이룬다. 세례 요한은 예수의 사역을 선언함에 있어서 주님의 길을 예비할 뿐만 아니라, 또한 예수의 운명, 즉 그 자신의 운명인 죽음과 유사한 것을 선언한다는 점에서도 그 길을 예비한다.

헤롯 대제의 아들인 헤롯 안티파스는 오늘 본문에서 언급되듯이 보통 사람들에 의해 아마 왕으로 불리었을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그는 왕이 아니라 기원전 4년부터 기원후 39년까지 갈릴리와 베레아를 통치한 영주였다.

14-16절에서 예수의 정체에 관한 소문들은 마가 8:27-30에서 상세히 보도하는 추측과 유사하다(6:3 참조). 예수가 행한 기적적인 행동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가 다시 살아난 세례 요한이나 엘리야가 아닐까 생각하게 한다. 그러한 추측들은, 많은 사람들이 요한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난 구약의 예언자들과 동일시했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그들의 추론은 세례 요한 자신이 부활했고 그 결과 그러한 행동들을 행할 수 있었다는 생각을 포함할 만큼 확대되었다. 더욱이, 예수는 엘리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엘리야가 재림하여 주님의 날의 도래를 알릴 것이라는 예수 당시의 생각과 부합한다(말라기 3:1-2; 4:5-6).

그러나 요한복음 서언(1:1-18 참조)과 앞서의 설화들로부터, 독자는 예수의 정체를, 그리고 그의 정체에 관한 그 추측이 부정확함을 알고 있다. 그런데 예수의 정체에 관한 의문은 마가복음의 여러 곳에 등장한다(6:3; 8:20-27; 11:27-28; 15:2, 39). 예수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세례 요한이라는 헤롯의 믿음은 플래시백(flashback·똑똑히 회상되는 과거사)을 구체화할 기회를 독자에게 제공한다.

자기 형제의 아내와 연애 행각을 벌이고 뒤이어 결혼한 못된 통치자인 헤롯을 세례 요한은 날카롭게 비난한다. 꼴사나운 연애 행각에 대한 그의 준엄한 거부는 그것이 간음과 근친상간 법을 어겼기 때문일 것이다(레위기 18:16; 20:21). 여기에서, 헤롯의 "형제"(17절)는 로마에 있는 의붓 형제 빌립이다. 그는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을 통치하는 영주였던 빌립(누가 3:1 참조)과는 다른 인물이다(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 『유대인 고대사』 참조).

헤롯이 예언자 요한을 죽이기에 앞서 감옥에 가둔다. 요한은 헤롯의 여름 궁전이 있었던 마케루스, 즉 베레아 남쪽과 사해 동쪽의 한 요새에 갇혔다고 요세푸스는 기록한다. 흥미롭게도, 이 이야기 속의 각각의 등장인물은 구약성서나 신구약 중간기 속의 대응물을 가지고 있다. 요한이 헤롯 안티파스를 비난하는 것은 외경(外經)인 마카베오2서 6:18-31과 마카베오4서 5:1-7:23 속의 엘르아살과 비슷하다. 헤로디아의 행동은 열왕기상 19:1-3에 나오는 사악한 왕비 이세벨의 행동과 비슷한 반면, 자기 아내의 정신 나간 소원에 맞서지 못하는 헤롯의 무능력은 열왕기상 21:1-16에서 이세벨의 남편인 아합왕의 행동을 반영한다.

생일 경축은 이 무렵에는 유대 전통이 아니라 주로 희랍·로마 전통이었다. 헤롯 안티파스가 그 일부인 유대의 귀족정치는 한 유대인 "왕"에 의한 이 생일 연회에 대한 묘사를 있음직한 것으로 만드는 희랍 문화의 다양한 측면을 종종 채택했다. 고대의 일부 사본에서는 헤로디아의 딸에게 헤로디아(24절)라는 이름이 붙여지기도 하지만, 요세푸스에 따르면 딸 이름은 살로메이다. 헤롯 안티파스가 이 사치스런 연회에서 하는 엉뚱한 맹세는 에스더 왕후의 미모에 홀딱 반해 페르시아 왕이 하는 맹세를 상기시킨다(에스더서 5:3, 6; 7:2). 마케루스에서 발굴된 유적들은 헤롯의 요새에 여자를 위한 식당과 남자를 위한 식당이 따로 존재했음을 입증하는데, 이것은 딸이 "바깥으로 나가서" 무엇을 청해야 할지 엄마에게 물은 이유를 설명해 준다(24절). 엄마인 헤로디아는 딸이 춤추는 것을 목격하거나 왕의 약속을 듣는 자리에 있지 않았다.

당시에는, 천민 계층은 십자가에 처형하고 로마 시민들과 지위 있는 개인들은 참수형에 처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 경우, 지하 감옥에 갇혀 있는 세례 요한을 참수형에 처하고 아울러 그의 처형된 머리를 쟁반에 담아서 달라는 요청은, 연회가 벌어지는 장소에 대한 소름 끼치도록 섬뜩한 아이러니를 제공한다(25-28절).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서 자신에게 달라는 살로메의 요청은, 그녀가 그것을 연회 메뉴의 일부로 써먹고 싶어함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소름 끼치는 비웃음의 어조이다"라고 역사적 예수 연구자인 크레이그 키너는 말한다. 더욱이, 헤롯의 약속이 비록 구속력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그가 자신의 맹세를 대수롭지 않게 어기는 것도 부적절했을 것이다. 덧붙여, 고대 유대의 유대인 통치자들은 사형을 집행하려면 로마 총독 빌라도의 허락을 받아야 했는데, 헤롯 안티파스는 그런 제약을 전혀 받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통치 지역에서 사형을 집행할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 무렵의 관습에 따르면, 한 남자에게 여러 아들이 있다면, 장남이 아버지를 매장했다. 그런데 오늘 장면의 끝에서는, 요한의 제자들 자신이 아들의 역할을 떠맡아 자신들의 지도자를 매장한다(29절). 아이러니컬하게도, 요한의 제자들의 행동은 예수의 제자들의 행동과 대조된다.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된 후, 예수가 선교에 파송했던 제자들 중의 어느 누구도 예수를 매장하러 오지 않는다. 마가복음에서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 언급되지 않는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를 매장하는 힘든 일을 떠맡는다. 요셉의 이 행동에서 입증되는 것은, 그는 열두 제자 중의 하나는 아니었을지라도, 그 또한 죽음과 위기의 때에 더 명백한 헌신적 모습을 보인 예수의 한 제자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마가복음은 요한의 시체를 거두어다가 무덤에 안장한 요한의 제자들의 행동(마가 6:29)을 마가 15:46의 아리마대 요셉의 행동과 나란히 놓고 있는지도 모른다. 더욱이 희랍어 본문에서, 이 두 개의 매장 장면에서는 공통된 단어가 사용된다: eqhkan auto en mnhmeiw(그들은 그것을 무덤에 안치했다), 그리고 eqhken auton en mnhmeiw(그는 그를 무덤에 안치했다).    

이 주석의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세례 요한 이야기는 예수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위한 길을 예비한다. 두 사람 모두 그들의 선함을 보지만(15:9-10, 12, 14) 결국 대중의 압력에 굴복하는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한다. 메시지의 위험 천만인 결과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와 요한 둘 모두 용감하게 그들의 메시지를 선포한다(14:58, 60-62; 8:31; 9:31; 10:33-34 참조).

그런데 가장 의미심장한 대조들 중의 하나는, 요한의 제자들이 가져다가 매장한 시신은 매장된 상태로 머물러 있는 반면, 예수는 매장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은, 세례 요한은 길을 예비하는 반면 길 자체는 아님을 예증한다(요한 14:6의 "나는 길이요"라는 예수의 말씀 참조).

그러나 이 두 이야기의 뒤섞임은 마가복음을 통틀어 등장하는 제자직이라는 주제를 더욱 부각시킨다. 제자직은 죽음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즉, "나를 따라오너라"(마가 1:17; 2:14)는 예수의 부르심은 심지어 죽기까지 그를 따르라는 부르심을 의미할 수도 있다. 따라서, 제자직은 열두 제자가 악령을 내쫓고 병자를 치유하는(6:7, 13) 그들의 사명 수행에서 뭔가 굉장하고 기적적인 일들에 참여하는 것만이 아니다. 제자직은 또한 그 부르심의 모든 측면에 참여하는 것, 즉 기적뿐만 아니라 복음을 위해 글자 그대로 우리 자신의 목숨을 잃는 위험한 일에 참여함을 의미한다(마가 8:34-35 참조).    

* 설교 본문

하나님을 대변하는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피를 보는 것에 익숙해져야 한다.

짧은 예화나 일화가 아니라 감동적인 이야기로 우리의 논의를 시작해 보자. 우리는 당신이 도로시에게 관심 갖기를 원한다.

첫눈에 보기에, 74살 먹은 미국 수녀이며 빈민·환경 운동가인 도로시 스탕(1931-2005)은 자신의 목숨을 걸 전형적 부류의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키가 작고 할머니 같은 회색 머리카락에, 무더위 속에 코 아래로 미끄러져 내린 안경을 쓰고 있었다. 그녀는 무기를 휴대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성경을 충실히 읽었다. 그녀는 많은 친구들에게 "수녀 도로시"(Sister Dorothy)로 알려져 있었다. 그렇다. 즉, 그녀가 말하기까지는, 그녀는 어느 누구에게도 위협이 될 부류의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오하이오주 데이턴 출신인 도로시는 젊어서 신시내티의 성모 마리아 수녀회에 가입했다. 그것은 "가장 버림받은 곳들에서 가난한 사람들, 특히 여자들과 어린아이들 편에 서기"를 사명으로 삼은 수녀회였다. 도로시는 브라질 서부 파라 주(州) 아나푸의 가장 가까운 작은 마을로부터 정글 속으로 30마일이나 떨어져 있는 세계에서 가장 버림받고 외진 곳에 있는 자신의 모습을 이내 발견했다. 그곳에서, 그녀는 우림 속에서 자급 농업을 하여 근근히 생계를 유지하는 토지 없는 영세 농민들과 함께 30년 이상을 보내면서 자신의 목회 소명을 불태웠다.

그러나 땅도 없고 정부 요직에 아무런 목소리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은 착취당하기 쉬운데, 브라질의 이 지역에서 그것은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불법 벌목꾼들과 대농장 주인들은 우림으로부터 거대한 구획들, 즉 그 지방의 160만 에이커의 광활한 우림 중의 약 20%를 베어내고 있었다. 황야의 파괴는 가난한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이 사람들에게 생활방식의 파멸을 의미했는데, 그들은 온갖 위협과 협박, 심지어 폭력으로 땅에서 내쫓기고 있었다.

수녀 도로시는 이런 심각한 불의의 한복판에서 침묵하기를 거부했다. 그녀는 지역 농민들에게 무차별 삼림 벌채 없이 농사 짓는 법을 계속해서 가르쳤고, 동시에 불법적 토지 강탈에 목청 높여 반대하는 운동을 펼쳤다. 그녀는 브라질 정부에 압력을 가하였고, 그녀가 보호하고 섬기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과 땅을 착취·강탈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밝혔다. 그 결과, 이 왜소하고 나이 지긋한 수녀는 벌목꾼들과 대농장 주인들에게 위험 인물로 낙인이 찍혔다.

도로시는 이것을 알았지만 도망치기를 거부했다. 그녀는 말했다: "나는 도망치고 싶지 않다. 나는 숲에서 아무런 보호 없이 살아가는 이 농부들을 편드는 싸움을 포기하고 싶지도 않다.  그들은 환경을 존중하면서도 위엄 있게 살고 일할 수 있는 땅에서의 더 나은 삶을 열망할 신성 불가침의 권리를 가지고 있다." 포르투갈어로 "숲의 죽음은 우리 삶의 끝장"이라고 적힌 티셔츠를 입은 그녀 모습이 종종 눈에 띄었다. 자신의 죽음에 대한 예고를 몇 차례 받았지만, 그녀는 사람들 속에서 "최선의 것"을 보려는 희망을 계속 간직했고, 한 사람의 수녀로서의 그녀의 지위가 자신을 보호할 수 있기를 바랐다.

2005년 2월 12일, 도로시는 "새 희망의 농장"(Boa Esperanca) 촌락에서의 모임에 참석하려고 걸어가고 있었다. 이 모임에서, 그녀는 브라질 정부가 농민들에게 양도했지만 불법 벌목꾼들이 탐내는 곳에 새로운 거류지를 세울 계획을 논의할 예정이었다. 그녀가 근처의 한 마을로부터 두 농부와 함께 그 모임을 향해 걸어가고 있을 때, 두 명의 총잡이가 길 양편의 덤불 속에서 불쑥 나타났다. 그들은 그녀가 무기를 휴대했는지 물었다. 그녀는 "나의 유일한 무기는 나의 성경뿐"이라고 말하고 성경을 펼쳐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복이 있다.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는 구절을 읽기 시작했다. 잠시 후, 총잡이들 중의 하나가 사격을 개시하여 그녀의 복부에 한 방을 쏘았다. 도로시가 숲 바닥에 넘어지자, 그 총잡이는 그녀의 등에 한 방을, 그녀의 머리에 대고 네 방을 더 쏘았다.

도로시는 권력자에게 줄곧 진리를 말해 왔다. 그리고 그녀 이전의 많은 예언자들처럼, 그녀는 온갖 박해와 역경, 순교의 대가를 치렀다. 그녀는 외딴 광야에 뚝 떨어져 살면서 혹독한 역경을 견디고 있지만 깊은 소명감에 따라 희생을 개의치 않고 왕들과 권력자들에게 진리를 말하는 임무를 수행한 세례 요한과 여러 면에서 닮았다.

세례 요한을 만나라.

마가복음은 세례 요한의 끔찍스런 운명 이야기를 예수에게 일어날 일의 전조로서 제시한다. 예수는 방금 제자들을 회개를 선포하고 악한 귀신을 내쫓고 병자를 고치는 선교에 파송했다(마가 6:7-13). 예수의 명성이 사람들 사이에서 점점 높아지자 헤롯 안티파스는 예의 주시하게 된다. 사람들 사이에 소문이 도는 대로, 그는 예수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난 세례 요한"이 아닌가 의아해하기 시작한다 예수는 요한처럼 설교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권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6:14). 헤롯은 요한을 두려워했던 것과 똑같은 이유로 예수를 두려워할 이유를 가지고 있음을 마가복음은 암시한다. 둘 모두 "옛 예언자들"처럼 말하고 행동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15절).

그런 다음, 마가복음은 헤롯과 요한 사이의 대결로 순식간에 되돌아간다. 헤롯은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가 이웃한 아랍 왕의 딸이었다고 말하는 자기 아내와 이혼했고, 그리고 그와 형제간인 빌립이 아직 살아 있는데도 빌립의 아내와 재혼했다. 세례 요한은 통속적인 멜로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보이는 헤롯의 사악한 행동에 정면으로 맞섰다. 그것은 도덕성의 문제, 또한 하나님의 법의 문제였기 때문이다(18절). 헤롯왕은 합법적으로는 도저히 그의 것이 될 수 없는 것, 즉 "형제의 아내"를 제멋대로 취했다.   

왕과 예언자 사이의 이 대결은 열왕기상 21장의 비슷한 대결을 연상시킨다. 그곳에서, 엘리야는 나봇 소유의 포도밭을 나봇을 무차별 살해하고 빼앗은 아합 왕과 대결한다. 아합은 사악한 아내인 이세벨의 재촉과 간청에 못 이겨 수동적으로 행동한다. 그녀는 아합을 궁지에 몰아넣어 양심에 반해 행동하게 했다. 나봇은 궁중 연회에서 거짓 고발을 당해 살해된다. 이  비극은 율법 규정에 따라 당연히 자기 소유인 그의 조상의 땅을 유지하는 것과 관련해서 진리를 말했기 때문이었다(열왕기상 21:3).

이 나봇의 포도밭 이야기와 오늘 본문 사이의 유사점들은 돋보인다: 예언자인 세례 요한은  아내를 불법으로 취한 왕과 대결한다. 아합 왕의 아내와 마찬가지로, 헤롯의 아내도 예언자를 제거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그녀는 왕의 호기 부리는 맹세를 빌미로 왕을 궁지에 몰아넣고, 사치스러운 연회가 벌어지는 동안 아무런 죄도 없는 요한을 고발하여 죽인다(마가 6:22-28). 복음서 작가들이 요한을 엘리야와 동일시함은 전혀 이상할 게 없다! 세례 요한은 권력자들에 맞서 진리를 말하기 때문에 죽임을 당한다. 똑같은 일이 앞으로 예수에게도 일어날 것을 마가복음은 독자에게 상기시킨다.

권력자들에게 진리 말하기의 위험.

진실로, 바로 그것이 권력자들과 대결하는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이다. 권력자들이 예언자들에게 폭력적으로 반응할 때, 도로시 스탕, 세례 요한, 예수처럼 무고한 사람들이 죽임을 당한다. 대개는 권력자들이 그들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요한의 예언자적 권위가 사람들 사이에서 점점 더 높아지는 것이 헤롯은 몹시 두려웠다. 불법 벌목꾼들과 농장주들은 수녀 도로시를 두려워했다. 그녀는 그들의 불의한 행동에 제약을 가하려 했기 때문이다.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를 두려워했다. 그는 참된 힘과 권위를 가지고 그들의 위선을 가차없이 고발했기 때문이다. 권력자들은 자신들이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제거하기 위해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행할 것이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바로 이것을 경고한다: 권력자들에게 진리를 말하는 사람들, 그리고 권력자들과 가난한 농부들 사이의 크나큰 격차 가운데 서는 사람들은 박해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 박해는 사실상 축복의 한 형태이다. 예수는 말한다: "너희가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터무니없는 말로 온갖 비난을 받으면, 복이 있다. 너희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하늘에서 받을 너희의 상이 크기 때문이다. 너희보다 먼저 온 예언자들도 이와 같이 박해를 받았다"(마태 5:11-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글쎄, 오직 실제로 박해받는 예언자들만이 정말로 알 것이다. 그들은 기뻐한다. 박해받을 가치가 있는 뭔가를 행하는 것 때문에 그들은 박해받기 때문이다. 그들은 기뻐한다. 그들은 예수, 세례 요한, 도로시 스탕, 그리고 역사를 통틀어 많은 다른 사람들, 심지어 오늘날에도 진리를 말하기 때문에 대가를 치르는 사람들의 발자취를 직접 따라 걸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기뻐한다. 그들의 예언자적 증언과 평화 만들기가 그들로 하여금 혹독한 희생을 치르게 할지라도, 그것은 변화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인도에서 50년 이상을 보낸 감리교 선교사 E. 스탠리 존스가 언젠가 말했듯이,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과 예언자들은 그들 자신의 피를 보는 데 익숙해져야 한다."

인기 문제.

우리가 예수를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참된 제자직을 가로막는 주요 방해물들 중의 하나는 남들에게 사랑과 인정을 받으려는 기독교인들의 집착임을 깨닫기 시작한다. 미국의 대다수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박해로 통하는 것은 사실은 기독교가 "옛 황금 시절"에 그랬듯이 다시 인기 있게 되기를 바라는 것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공립학교에서 공공기도를 드리지 않을 때, 그들은 자신들이 박해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미국의 기독교인들은 많은 걱정을 가지고 있다. 한 가지 실례로, 그들은 문화를 기독교의 적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문화가 자신들을 박해하고 있는 방식들을 끊임없이 생각해낸다.

그러나 예수가 이런 것들에 몹시 마음쓰고 있었다고 믿기는 어렵다. 예수는 정치·종교 권력자들에게 구애하기는커녕 거침없이 진리를 말했기 때문에 박해를 받았다. 그는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에게 무료 진료소를 열어 주고 특히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었기 때문에 박해를 받았다. 그는 세리들과 죄인들처럼 평판이 좋지 않은 사람들과 함께 식탁에 앉기를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기 때문에 박해를 받았다. 그는 원수들의 멸망이 아니라 원수들까지도  사랑하는 폭넓은 평화의 메시지를 전달했기 때문에 박해를 받았다. 그는 심지어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보기에 가장 비참한 사람들조차도 하나님께 화해되고 그들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고 말했기 때문에 박해를 받았다.

예수의 추종자들은 박해를 예상해야 한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그들 또한 그 때문에, 다시 말해 그가 행하고 있었던 것을 행하는 것 때문에 박해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박해를 인위적으로 만들어야만 하는 것은, 우리가 예수가 행한 것을 행하고 있지 않을 때뿐이다. 공립학교에서 확성기에 대고 공공연히 기도하지 않는 것은 박해가 아니다. 그러나 다른 모든 사람이 따돌리는 아이와 함께 점심을 먹는 것 때문에 조롱을 받는 것은 박해받을 자격이 있을지도 모른다. 공립학교에서 창조론을 어설프게 가르치지 못하도록 법으로 규정하는 것은 박해가 아니다. 그러나 수백만의 사람들이 적합한 의료를 받지 못하는 현실과 관련해서 뭔가를 행하는 것은 당신을 박해에 이르게 할 수도 있다. 불의하고 사악한 권력자들에게 어떤 식으로든지 용감히 대항하는 것은 확실히 박해를 가져올 것이다.    

남들의 인정과 존경, 그리고 매사에 늘 합법성을 추구하고 있다면, 당신은 예언자적 평화 만들기에는 참여하고 있지 않다. 만일 모든 사람이 당신을 사랑한다면, 아마도 당신은 십자가를 지고 있지 않다.

도로시 스탕의 죽음의 결과로, 브라질 정부는 파라 주(州)에서의 불법 벌목을 그만두게 하고 취약한 농부들을 보호하는 일련의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땅 없는 농부들을 편드는 것은 아직까지도 매우 힘들고 위험한 일이다. 그러나 변화는 시작되었다. 고대의 교회 지도자인 터툴리안은 말했다: "순교자들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 그것은 또한 변화의 씨앗이다.    

우리는 도로시, 세례 요한, 혹은 예수처럼 우리 자신의 목숨을 무차별 폭력 앞에서 포기하도록 부름을 받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정의와 진리를 위해 가진 자들과 가지지 못한 자들 사이의 틈에 서도록 부름을 받았다. 박해가 닥쳐올 때, 겁먹지 말고 오히려 기뻐하자. 왜냐하면 우리는 박해를 받을 값어치가 있는 뭔가를 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능한 설교 주제들>
* 예언자들의 역할
* 평화 만들기, 그리고 박해
* 예수, 세례 요한, 예언자들 사이의 관계

* 예화

+ 7월의 고백

여린 태를 벗은 초목들의 뿌리는 힘차게 물을 빨아들이고
햇빛에 반짝이는 잎들은 왕성한 화학작용을 하며
대기는 신선한 공기들로 가득 찹니다.
그 나무의 꽃과 열매와 잎을 먹으며
애벌레와 곤충과 새들이 자라고 번성할 때
대지는 소란하고 풍성해집니다.

주님께서 지으신 세상은
풀 한 포기에서 우주 끝까지
탄생부터 그 소멸에 이르기까지
계획되지 않은 것,
아름답지 않은 것
완벽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 속에 앉아
주님 계획대로 아름답게, 완벽하게 지어진
나를 어루만지며 가만히 속삭입니다.
나를 사랑합니다.
나를 사랑합니다.
나를 이루는 너를 사랑합니다.
그 안에 온통 주님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멘.
(김경주·시인)

+ 무명의 순교자 앞에 

박해의 칼 아래
피 흘리며 부서진
당신들의 큰 사랑과 고통이

내 안에 서서히 가시로 박혀
나의 삶은 아플 때가 많습니다
당신을 닮지 못한 부끄러움에
끝없는 몸살을 앓습니다

당신을 통해
주님을 더욱 알았고
영원의 한 끝을 만졌으나
아직도 자주 흔들리는 나를
조용히 붙들어 주십시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거룩한 순교자여!
오래 전에
흙 속에 묻힌
당신의 침묵은
이제 내게 와서
살아있는 말이 됩니다.
(이해인·수녀)

+ 평화

누구라도 그를 부르려면
속삭임으론 안 된다.
자장가처럼 노래해도 안 된다.
사자처럼 포효하며
평화여, 아니 더 크게
평화여, 천둥 울려야 한다.

그 인격과 품위
그 아름다움과 평등함
그가 만인의 연인인 점에서도
새 천년 이쪽저쪽의 최고인물인
평화여 부디 오너라고
사춘기의 순정으로
피멍 무릅쓰고 혼신으로
연호하며 불러야 한다.
(김남조·시인)

+ 평화나누기

일상에서 작은 폭력을 거부하며 사는 것
세상과 타인을 비판하듯 내 안을 잘 들여다보는 것
현실에 발을 굳게 딛고 마음의 평화를 키우는 것

경쟁하지 말고 각자 다른 역할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
일을 더 잘 하는 것만이 아니라 더 좋은 사람이 되는 것
좀더 친절하고 더 잘 나누며 예의를 지키는 것

전쟁의 세상에 살지만 전쟁이 내 안에 살지 않는 것
총과 폭탄 앞에서도 온유한 미소를 잃지 않는 것
폭력 앞에 비폭력으로, 그러나 끝까지 저항하는 것
전쟁을 반대하는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따뜻이 평화의 씨앗을 눈물로 심어 가는 것
(박노해·시인)

+ 내 손과 발로 무엇을 할까

세끼 밥 굶지 않고 나 혼자 등 따뜻하다고 행복한 게 아닙니다.
지붕에 비 안 새고 바람 들이치지 않는다고 평화로운 게 아닙니다.
내가 배부를 때 누군가 허기져 굶고 있습니다.
내가 등 따뜻할 때 누군가 웅크리고 떨고 있습니다.
내가 아무 생각 없이 발걸음 옮길 때 작은 벌레와 풀잎이 발 밑에서 죽어갑니다.
남의 허물을 일일이 가리키던 손가락과
남의 멱살을 무턱대고 잡아당기던 손아귀와
남의 얼굴을 함부로 치던 주먹을 거두어야 할 때입니다.

가진 것을 나누는 게 사랑입니다.
사랑해야 우주가 따뜻해집니다.
내 손을 행복하게 써야 할 때입니다.
내 발을 평화롭게 써야 할 때입니다.
(안도현·시인)

+ 하나님의 화살

오랜 세월 복음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지만 그리스도의 수난의 깊은 뜻을 깨닫고 마침내 복음에 굴복한 한 시인이 있었다.

그는 시인 특유의 상상력을 발휘해서 그리스도 수난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그분의 모든 황금 화살을 나를 향해 쏘았다. 하지만 그 화살들은 내 마음을 관통하지 못했다. 그러자 하나님은 이번에는 자기 자신을 활에 재어 나의 가슴속 깊이 발사하셨다."

생각건대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어떻게 다루시는가 하는 것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하나님은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완악한 세상과 싸우시며 사람들에게 수많은 축복을 내려주셨다. 하지만 그 모든 은사들은 별로 소용이 없게 되었다. 그러자 하나님은 마침내 자기 자신을 사람들에게 선물로 주셔서 그분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입증하셨다.

+ 하나님은 지금 어디 계십니까?   
 
수많은 유대인들이 독일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죄 없이 억울하게 죽어가면서 고통스럽게 던진 물음이 하나 있다. "하나님, 지금 어디 계십니까? 왜 이런 비극이 벌어지게 하신 것입니까?"

그러나 연합군이 수용소를 탈환한 후에 한쪽 벽에 적혀 있는 찬송가 가사를 보고 깜짝 놀랐다. 어느 그리스도인이 그의 신앙 고백으로 기록해 놓은 구절이었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 다 형용 못하네."

하나님의 사랑? 이 저주와 이 지옥 같은 수용소에서 하나님의 사랑이라니? 그러나 또 다른 곳에는 이런 글자가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하나님은 여기에 계신다."

+ 나는 왜 기독교인이 되었나?

유명한 마르크스주의자인 독일 대학의 철학 교수인 벨디에브가 기독교로 개종한 일화가 있다. 그는 2차 대전 중 나치 독일에 잘못 보여 강제노동 수용소에 갇혔다. 매일 유대인들이 죽음의 가스실로 들어갔다.

어느 날 독일 군인이 한 여자의 가슴에서 아기를 강제로 떼어놓았다. 아기 엄마만 가스실로 데려가려는 것이었다. 그 순간 한 수녀가 달려나갔다. 그녀의 인자한 기도 소리 때문에 이미 수용소에 널리 알려진 마리아 수녀였다. 하루의 숫자만 채우면 되었으므로 독일 군인은 아기 엄마 대신 마리아 수녀를 수녀복을 벗겨 끌고 갔다.

운이 좋게도 수용소에서 살아 나온 벨디에브 교수는 훗날 이렇게 간증했다: "내가 예수를 믿고 기독교로 개종하게 된 것은 누구의 설교나 학설 때문이 아니었다. 철두철미한 마르크스주의자였던 내가 기독교인이 된 것은 남을 위해 대신 죽는 마리아 수녀의 거룩한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나는 수용소에서 예수의 십자가를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 그리스도인의 커밍 아웃

자신의 내면을 솔직하게 밖으로 표현하는 것을 커밍 아웃(coming out)이라고 한다. 누구보다도 그리스도인은 자신 있게 자신을 나타내야 한다. 믿음의 구체적인 삶은 자신을 드러내는 데서 시작된다.

아리마대 요셉은 자신 있게 자신을 드러낸 사람이다. 그는 불이익을 당할까봐 은밀하게 예수를 따랐던 사람이다. 그는 예수 사후 결정적인 시기가 왔을 때 모든 불이익을 감수하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커밍 아웃해서 나타낸 사람이다. 그래서 예수의 시체를 인수해서 자신의 무덤에 장사를 지냈다. 모든 제자들이 도망간 시간에 홀로 말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자세다. 그리스도인은 직장에서, 학원에서, 사회에서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밝히 나타내야 한다. 그러면 자신감이 생기고 확신 있는 믿음의 자세가 주어진다.
(이정익·목사)

+ 10분 동안의 묵상    

언젠가 놀란드 헤이즈라는 흑인 가수가 독일 베를린에서 독창회를 가졌다. 독창회에 모여든 사람들은 모두 백인이었다. 그런데 헤이즈가 노래를 시작하려고 할 때 누군가가 소리쳤다. "흑인의 노래는 들을 수 없다! 검둥이의 노래를 집어치워라!"

욕설과 함께 물건이 날아왔다. 얼마나 치욕스러운 일인가? 가수 자신도 이에 맞서 욕설을 내뱉었다. 그렇게 맞받아 욕하고 돌아서는데 그의 앞을 가로막는 환상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빌라도의 법정 앞에 서 계신 예수님이었다. 예수님은 온갖 모욕을 당하면서도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헤이즈는 그 환상을 보고 청중을 향해 돌아섰다. 고개를 숙이고 묵상에 잠겼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다. 눈에서는 말없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소란스럽던 청중도 그 모습을 보고 태도가 바뀌었다. 모두들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10분쯤 시간이 흘렀을까, 헤이즈는 목소리를 가다듬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깊은 감동을 받았다.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훌륭한 독창회가 되었다. 노래가 끝났을 때,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터져 나온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여러분, 잊지 말라. 그 흑인 가수가 가졌던 10분 동안의 묵상은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럽고 아픈 것이었음을.

+ 평화를 위한 악대장
 
가끔 나는 우리가 죽음이라고 부르는 모든 인생의 마지막 명령자에 의해 우리가 희생당할 그 날에 대해 우리 모두 현실적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추측합니다. 우리 모두는 그것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따금 나는 나의 죽음, 나의 장례식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 병적으로까지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가끔 나는 나 자신에게 "내가 듣고자 하는 이야기는 무엇일까?"라고 질문해 봅니다. 오늘 아침 이 말을 여러분에게 남기고 싶습니다.

내가 죽는 날 여러분 중 누군가가 내 주변에 있다면, 나는 장례식을 길게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또한 누군가에게 조사를 부탁한다면, 너무 길게 하지 말라고 이야기하십시오.

가끔 나는 그들에게 무엇을 말할까 생각해 봅니다. 바라건대 내가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는 것을 언급하지 말도록 하십시오.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수백 개의 상을 받았다는 것을 언급하지 말도록 하십시오. 그것은 중요한 게 아닙니다. 내가 어떤 학교에 다녔는지도 언급하지 말도록 말하십시오.

그 날 마르틴 루터 킹 2세는 그의 삶을 타인에게 봉사하는 데 바치려고 노력했다고 누군가가 말하는 것을 듣고 싶습니다. 그 날 나는 전쟁 문제에서 올바른 입장을 가지려고 했다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 그 날 나는 내 평생 헐벗은 자들을 먹이고 입히려고 애썼다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 그 날 나는 내 평생 감옥에 갇힌 사람들을 방문하려고 애썼다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 나는 인간을 사랑하고 섬기려고 애썼다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악대장이었다고 말하려 한다면, 여러분은 내가 정의를 위한 악대장이었다고 말해 주십시오. 내가 평화를 위한 악대장이었다고 말해 주십시오. 

다른 피상적인 것들은 아무런 문제도 아닙니다. 나는 죽어서 남길 어떤 돈도 원하지 않습니다. 나는 죽어서 남길 훌륭하고 사치스런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후세의 기억 속에 남는 삶을 원합니다.

그것이 내가 말하고자 하는 모든 것입니다. 내가 사는 동안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면, 글이나 노래로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면, 누군가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을 때 그것을 지적해 줄 수만 있다면, 나의 삶은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기독교인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나의 의무를 수행할 수 있다면, 내가 타락한 이 세상에 구원을 가져올 수 있다면, 내가 주님께서 가르치셨듯이 복음을 전파할 수 있다면, 나의 삶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여, 그 어떤 이기적인 속셈에서가 아니라 단지 당신의 오른편이나 왼편에 있기를 바랍니다. 나는 당신의 오른편이나 당신의 최고의 자리에 있기를 바랍니다. 그 어떤 정치적 권좌에 대한 야망에서가 아니라, 단지 사랑과 정의와 진리가 타인을 향한 헌신 속에 주님 곁에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이 낡은 세상을 새로운 세계로 변화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 킹 목사가 1968년 2월 4일 암살된 4월4일 두 달 전에 에벤에셀 침례교회에서 한 설교)

* 예배 자료

+ 예배에의 부름

찬미 받으소서.
전능하신 하느님, 찬미 받으소서.

당신의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이름으로 세운
당신의 이 집을
생명에로 부름 받은 사람으로
생명에로 부름 받은 백성으로 채워주소서.

단지
이 집만이 아니라
온 세상 곳곳의 모든 교회를
생명에로 부름 받은 사람으로
생명에로 부름 받은 백성으로
가득 차게 하소서.

그들을 온갖 분열에서 지켜주시고
당신의 온전한 평화 가운데 거느리소서.

언제나 당신 집이
생명에로 부름 받은 사람들로
더욱 더 가득 차게 하소서.
(이집트의 세누디, 5세기, '생명에로 부름 받은 백성')

+ 기도

주님, 우리 눈을 열어주시어
형제자매들 안에서 당신을 보게 하소서.

주님, 우리 귀를 열어주시어
춥고 배고픈 이들, 짓눌려 겁먹은 이들의
울음소리를 듣게 하소서.

주님, 우리 가슴을 열어주시어
당신이 우리를 사랑하시듯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게 하소서.

우리 안에 당신의 영을 새롭게 하시어
주님,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고
하나 되게 하소서.
(마더 테레사·수녀)

+ 더 깊이 내려가기 위한 기도

오 함께 계시는 하느님,
저 혼자서는
더 깊은 내면 속으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주님은
저를 보호하고 지도하는 안내자로서
저를 안아주고 지지해주는 사랑의 동반자로서
도전하면서 위로해 주는 지혜로운 분으로
저와 함께 언제나 그곳에 계십니다.

오 함께 하시는 하느님,
제가 제 뿌리를 찾으려고
더 깊이 들어가려 할 때,
주님의 사랑으로 저를 감싸주십시오.
두려움과 불안정에 직면할 때
제게 힘을 주시고
제 안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는
숨겨진 보화에 놀라게 해주소서.

오 함께 하시는 하느님,
제가 저를 찾아 헤매다가
흔들림과 불확실함을 느낄 때,
제가 언제나 주님 사랑에 뿌리내리고 있음을
자주 자주 확인시켜 주소서.
제가 제 마음의 집을 향해 찾아가는 길을 잃을지라도
주님의 사랑은 결코
저를 떠나지 않는다는 것을
종종 상기시켜 주소서.

오 함께 계시는 하느님,
주님은 제가 온전하게 되기를 갈망하십니다.
주님은 저를 멸망할 곳으로 결코 데려가지 않으십니다.
여기 제 인생이, 삶이 있습니다.
더 깊이 들어가는 일에 투신하며
제 삶을 주님의 보호하심에 맡겨드립니다.
(조이스 럽·수녀)

+ 오늘을 위한 기도

잃어버린 것들에 애달파하지 아니하며
살아있는 것들에 연연해하지 아니하며
살아있는 일에 탐욕하지 아니하며
나의 나됨을 버리고
오직 주님만
내 안에 살아 있는
오늘이 되게 하소서

가난해도 비굴하지 아니하며
부유해도 오만하지 아니하며
모두가 나를 떠나도 외로워하지 아니하며
소중한 것을 상실해도 절망하지 아니하며
오늘 살아있음에
감사하고 격려하는 하루가 되게 하소서

누더기를 걸쳐도 디오게네스처럼 당당하며
가진 것 다 잃고도 욥처럼 하느님을 찬양하며
천하를 얻고도 다윗처럼 엎드려 회개하는
넓고 큰 폭의 인간으로
넉넉히 사랑 나누며
오늘 하루 살게 하소서
(김소엽·시인)

+ 헌신에 대한 묵상기도

한 장의 나뭇잎이 흔들리는 것은
우주가 흔들리는 것과 같습니다.

나뭇잎은 가지를 의지하고 있으며
가지는 뿌리를 의지하고 있습니다.

뿌리는 대지를 의지하고 있으며
뿌리는 하늘과 땅을 순환하여
땅속을 흐르는 물을 흡수합니다.

한 사람의 깨끗한 마음은
징검다리처럼
이 모든 것을 건너고 건너서
세상을 맑게 합니다.
(문윤정·시인, '세상을 맑게 하는 마음')


정연복의 다른기사 보기  
기사를 추천하시면 "금주의 좋은 기사" 랭킹에 반영됩니다   추천수 : 3049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의견나누기(0개)
 * 100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최대 20000byte)
 * [운영원칙] 욕설, 반말, 인신공격, 저주 등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지 않은 글과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올린 글은 통보 없이 삭제합니다.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우)120-012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2가 35 기사연빌딩 401호 ☎ 02-393-4002(팩스 겸용)   |  청소년보호책임자 : 심자득
제호 : 당당뉴스  |  등록번호 : 서울아00390  |  등록연월일 : 2007.7.2  |  발행인 겸 편집인 심자득(010-5246-1339)
Copyright © 2005 당당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dangdang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