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갑자기 들어 닥친 경찰관
    (2012년 5월 3일)

오전 봉사를 마치고 숙소에 가서 점심을 먹고 오니
마을회관 운동장에 백차와 두 대의 승용차가 서 있고
덩치 큰 젊은이들 십여 명이 서서 웅성거립니다.
경찰서 같은 것은 있지도 않을 조그만 마을인줄로 알았더니
모든 집들과 건물이 숲속에 묻혀 보이질 않았던 거였습니다.

‘웬일일까?
무슨 사고라도 났을까?
아니면 여기 오기 전 바기오에서 만난 선교사의 말처럼
영양가 없는 일이 벌어진 건가!
선교사에게 우리들이 봉사할 곳은 소개해 달라고 하니
부정적인 어투로 정부의 허가 없이 의료봉사하다 들키면 큰일 난다고
자기가 직접 우리를 소개해 주는 걸 꺼려하지 않았는가!’

이렇게 해외봉사 다닌 지도 어언 10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러나 가는데 마다 우리를 환영하고 맞이하였지
우리의 봉사활동을 곤경에 처하도록 한 곳은 아무데도 없었습니다.
심지어 지난 1월에는 옥시덴탈 민도로의 산호세 시장이
우리를 1주일간 초청하여 바닷가 비치 호텔에서 묵게 하고
모든 숙식을 제공하고 최고의 대우를 해주며
산호세 시청직원들을 치료해 주도록 배려한 적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외국인은 의사면허가 있다하더라도
타국에 가서 해당국가의 허락 없이
의료행위를 하는 것은 엄연히 불법입니다.
꼬투리를 잡을라치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정말 선교사의 말대로 그런 불상사가 벌어진 걸까?
무엇보다 순수한 선교열정으로 나를 따라 온
봉사자들이 어려움을 당할까봐 걱정이 됩니다.
그러나 책임자로서 담대해야 합니다.
여차하면 내가 총 책임을 지고 봉사자들의 보호막이 되어야 합니다.

‘아픈 사람 고쳐주며 좋은 일 하다가 잡혀가면 그것도 순교다!
두려워 할 것 없다!’

조금도 마음 흔들리지 않고, 정문을 늠름하게 들어서서
운동장을 지나 봉사실을 향하여 담대하게 걸어 들어갑니다.
선교사역은 어디에서든 위험이 도사리고 있고
어떠한 위험도 감수할 마음의 자세가 돼 있어야 합니다.
좋은 일만 기대하고 편안하기만을 바라서는 이 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선교사역은 항상 죽음을 염두에 두고 하여야 합니다.
오지에는 독충이나 코브라 등이 항상 위험의 대상이고
외국인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항상 표적의 대상입니다.
식수는 대부분 정수되지 않아 주의하지 않으면
수인성 대장염이나 콜레라에 걸릴 수도 있습니다.
그 무엇보다 낯선 이방인과의 인간관계가 더욱 조심스럽습니다.
항상 긴장하지 않을 수 없으며 순간순간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남자 봉사실에 웬 덩치큰 사람들이
오전엔 보지도 못한 침대를 가져다 놓고
그 위에 웃통을 벗고 즐비하게 누워 있습니다.
순간 이들이 우리를 잡으러 온 사람이 아니란 생각이 듭니다.
체어맨이 가까이 다가와 자세한 설명을 해 줍니다.
이들은 우리를 잡으러 온 사람들이 아니고
“저희들을 좀 잡아 주시오” 하고
스스로 찾아 온 경찰관들이었습니다.
모두 옷을 벗고 침대에 엎드려 있는 모습이
죽일 테면 죽이고 살릴 테면 살리라는 식으로
곤장을 맞으려고 엎드리고 있는 죄인들 모습 같습니다.

찾아 온 성의가 고마워 정성껏 치료해 줍니다.
이들도 역시 어디 특별히 아픈 데가 없고 허리 아프다는 게 일색입니다.
허리 아픈 건 바지를 내리고, 꼬리뼈 밑
장강에 장침을 깊게 찔러주는 게 가장 좋은 치료방법인데
여러 사람들이 보고 있는 터라 아랫도리까지 모두 벗길 수 없어
그리 하진 못하고 다른 부위를 대신 정성껏 치료해 줍니다.
치료해 주다 생각해보니
우리의 봉사 목적이 이런 잘나가는 권력자들 치료해 주는 게 아니고
불쌍하고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을 치료해 주는 건데
권력 있다고 힘없는 사람들을 제치고 자기들이 먼저 받겠다고
넙적 드러누워 있는 모습들이 왜 그리 건방진지!
누워 있는 경찰관들을 향하여 한마디 합니다.

“여기에서 제일 높은 분이 누구십니까”

덩치 큰 한 중년 신사가 옷을 벗고 누웠다 일어서며 응대합니다.

“접니다.”

“아 그러세요. 먼저 이렇게 찾아와 주신 것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다름이 아니고,
실은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과 희생정신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돌봐주기 위하여 온 기독교 선교단체입니다.
여러분처럼 권력 있고 돈 있는 분들을 위하여
자비를 들여 먼 이곳까지 온 것이 아닙니다.
한국에서는 이렇게 침과 뜸을 온 전신에 한 시간 동안 받으려면
미국달러로 100달러 정도는 지불해야 합니다.
이 비싼 것을 공짜로 받는 대신
무슨 대가라도 지불하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아, 네 알겠습니다. 어떤 대가를 지불해야 하나요?”

“그냥 서로간의 우정을 위해서 ‘감사장’이나 하나 만들어 주십시오.”

“아! 네. 물론 만들어 드리지요.”

“내일 새벽 4시에 여기를 떠나는데 어떻게 만들어 줄 수 있습니까?”

“아! 네, 염려 마십시오. 오늘 중으로 만들어다 드리겠습니다.”

이곳 경찰서의 경찰관 전체 인원 25명중
여자경찰관 1명을 포함하여 15명이 치료를 받았고
이들은 해가져 어둑어둑할 즈음 우리가 퇴근하려고 할 때
경찰관 한 명을 보내어 감사장을 들고 와 전하며 기념사진을 찍습니다.

오늘은 주로 공무원들이 많이 와서 치료받았습니다.
시장 비서실 직원들도 받았고,
치료받은 여자 경찰관은 시장님의 처제였습니다.
이들은 모두 하나같이 다음번에 또 오시면 특별 경호를 하여
우리를 보호해 드리겠다며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시장님께도 보고하여 시청에서도 협력할 수 있도록 하겠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들은 모두 한 통속이었습니다.
주민투표로 시장과 시의원 그리고 체어맨과 그의 스텝들을 뽑습니다.
하여 모두가 서로서로 정치적인 관계로 맺어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시장을 중심으로 모든 관료들이 한 통속이었고 친척관계였습니다.
그래서 체어맨이 치료 받고 좋아지자,
입소문으로 금방 도시 관료들에게 소문이 퍼지게 된 거였습니다.
이런 사회구조에서는 한 번 잘못하면 금방 매장당하고
한 번 잘하면 금방 좋게 소문이 나게 되어있습니다.

이곳은 깊은 산중에 자리 잡은 작은 도시라 약 10분만 벗어나도
매우 어려운 환경에 사는 산속 부족민들을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만약 이 곳에서 시청과 경찰관의 특별 보호를 받으며
이 지역 산골짜기의 가난한 부족민들을 돌보게 된다면
상당히 효과적인 선교봉사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를 선교현장에 데려 가기도 전에 힘들다는 이런저런 이유로

동행하길 꺼려하던 선교사의 모습이 생각납니다.
그 선교사가 우리들의 치유사역현장에서
환자들의 변화가 일어나는 모습을 보았더라면
그런 염려를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를 데려가려고 애썼을 것입니다.

오만과 교만과 욕심 앞에 법적제재가 가해지는 것이지
희생과 헌신과 사랑 앞에 법은 고개를 숙입니다.

우리는 금번 바기오에 선교답사를 오며
누구보다도 선교사들이 선교하는 선교현장의 환자들을
먼저 돌보아 주길 원하였는데 선교사가 거부하는 바람에
아무 선교사도 찾아가지 않은 선교미개척지에서
새로운 선교적 비전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도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도우시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매우 성공적인 선교답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봉사하던 첫째 날 저녁엔 시청 카운슬러가
우리를 저녁에 초대하였습니다.
그분은 바기오에서 대학교수를 정년퇴임하고
고향에 돌아와 투표에 의하여 카운슬러가 되신 분입니다.
카운슬러가 무슨 일을 하는지는 자세히 모르지만
이들의 소개에 의하면 시청에서 세 번째로 높은 분이랍니다.
지난 1월과 2월, 옥시덴탈 민도로 시청에서 봉사할 때에도 카운슬러를 만났는데
아마 우리는 카운슬러와 인연이 있는가봅니다.

이곳의 카운슬러는 혼자 사는 게이라고 주위 사람들이 소개합니다.
여기서 게이의 삶은 우리가 여기는 것처럼 그렇게 부끄럽게 여기지 않습니다.
이분이 혼자 사는 집은 마치 여자가 사는 집처럼
아기자기하고 예쁘게 꾸며놓았습니다.
정성스레 가꾼 화초, 집안을 장식한 벽걸이와 조각품, 깨끗한 화장실 등
집안엔 향긋한 화장냄새도 풍기고
마치 아름다운 여성이 혼자 사는 집 같습니다.
62세나 되신 분이 우리를 위해 손수 저녁을 준비하였습니다.
이분은 점잖으신 분이며 그리고 게이라서
남들 앞에서 옷 벗기가 쑥스러워 집으로 우리를 초대하여
치료를 받으려는 것 같았습니다.
실은 낮에 환자들을 치료할 때, 이분이 여자 치료실을 들어오고 싶어서
기웃거린 적이 있습니다.
내가 안 된다고 하니 쑥스러워 하였고
주위 사람들은 웃으며 ‘게이’이므로 여자 방에서 해도 된다고 하였습니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르겠습니다.

저녁 먹기 전에 치료를 해 드리고 이분이 손수 차린 저녁을 함께 먹으며
침뜸 면역요법에 관한 이런 저런 이야기도 나누고 자료도 드립니다.
교수를 하셨던 분이라 앞으로의 침뜸교육에도 지대한 관심을 보입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 저녁은 마을 체어맨과 저녁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체어맨이 마을 운영에 관한 비전을 이야기합니다.

“앞으로 마을센터를 3층으로 증축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3층에 게스트 하우스도 만들고 봉사실도 만들겠습니다.
다음에 꼭 다시 오십시오”

“언제쯤 증축할 예정입니까?”

“금년 내로 증축할 예정입니다.”

내년에 선거가 있는 해라 표를 의식해서
금년에 주민들의 복지를 위한 사업을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겉보기에는 필리핀이 후진국처럼 보이지만
미국 민주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풀뿌리 민주주의가 정착된 곳입니다.
경제가 우리보다 못할 뿐이지
국민들의 의식수준은 결코 우리보다 뒤지지 않는 민족입니다.

우리가 돈을 들여 선교병원을 지으려면
경제적으로 많은 금액도 필요하지만
행정적으로도 많은 제약을 받습니다.
그러나 금번 봉사를 통하여 아주 자연스럽게
마을 주민과 행정관료들의 협조로 자기네들 스스로
모든 봉사시설을 갖추고 우리를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선교봉사 현장에서 날마다 함께 하시고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항상 선교지에 와서 체험하는 사실은
선교는 내가 하는 게 아니고, 그냥 결단하고 나서서 헌신하면
하나님이 이루어 주심을 깨닫게 됩니다.

치료를 마친 경찰서장(맨우측)과 보건소 간호원, 체어맨, 봉사자들과 한 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