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세르반테스와 돈키호테
   (2012년 5월 1일-3일)

『돈키호테는 에스파냐의 라만차 지방의 한 시골 귀족으로 가정부, 조카, 하인과 함께 살고 있었다. 그는 기사 이야기를 탐독하다가 이성을 잃고, 스스로 방랑의 기사가 되어 모험 길에 나서서, 천하의 사악한 것을 쳐부수어 공을 세우기로 작정하였다. 그는 말라비틀어진 자기 말에 로시난테라는 이름을 붙이고,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낡은 갑옷을 입었다. 기사의 신분에 어울리는 귀부인으로는 둘시네아 델 토보소라는 그럴듯한 이름을 멋대로 붙인 농갓집 딸을 마음속으로 정하였다.

집을 나선 돈키호테는 저녁때에 어떤 여인숙에 도착하였는데, 그 곳을 성으로 잘못 알고 여인숙 주인을 성주라고 부르기도 하고, 옆방의 매춘부를 공주로 대접하기도 한다. 밤중에 기사 서임식을 열고 있던 돈키호테는 물 길러 온 마부와 시비가 붙어 큰 소동이 일어났으나 주인의 주선으로 수습되고, 새벽에 여인숙을 나온 돈키호테는 상인들과 시비가 벌어져 혼이 난다. 마을 사람들에 의해 간신히 자기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그는 두 번째 여행길에 나선다. 이번에는 이웃에 사는 농민 산초 판사를 설득하여 종자로 삼았는데, 섬을 하나 점령하여 그 곳 태수로 임명해 주겠다는 돈키호테의 말을 곧이듣고 처자식을 버려 둔 채 따라 나선다.

그들이 들판에 내려서자 커다란 풍차가 여러 개 있었다. 돈키호테는 이것들이 거인의 무리들이라고 판단하여 다짜고짜 공격을 감행하였다. 산초 판사가 말려도 막무가내였다. 때마침 바람이 세게 불어와 돈키호테는 말과 함께 풍차에 말려 들어가 건너편으로 내동댕이쳐진다.

피스카이아인과의 1대 1 결투, 양치기 오두막의 환대 등을 거쳐 수없이 우스운 짓을 당하지만, 본인은 정의를 위해 싸우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를 찾아 나선 마을 사람들 꾀에 넘어가 자기 집으로 돌아왔지만, 건강을 되찾게 되자 다시 모험 길에 나서게 된다.

3차 여행에도 산초 판사는 동행을 하는데, 이번에도 먼저와 같은 실수와 소동을 되풀이한다. 그러나 어느 공작 저택에 초대되어 기사로서의 정중한 대접을 받고 마음이 들떴으나, 공작 부처의 장난이었음을 알고 낙담하게 된다. 돈키호테의 여행도 종말에 가까워지자 꿈은 스러지고, 자신의 어리석음에 눈을 뜬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다시 시골 신사가 되어 병상에서 조용히 눈을 감는다』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의 저자이며 ‘돈키호테’는 또한 작품속의 주인공입니다.
소설속의 주인공이 저자를 만나는 경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상상으론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가끔 상상은 현실이 되기도 하고,
현실은 풍부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발전하기도 합니다.
세르반테스는 인명이었지만 필리핀 루손 섬에서 지명으로 쓰입니다.
세르반테스를 아끼는 에스파냐 사람들이 필리핀을 정복한 후
그의 이름을 지명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입니다.
돈키호테가 실존인물로 환생한다면, 루손 섬 세르반테스를 방문할 것입니다.

지나고 생각해보니 나는 마치 환생한 돈키호테처럼 세르반테스를 방문하였습니다.
이는 계획적이거나 의도적인 방문이 아니고
마치 연어가 회기본능으로 자기가 처음 태어난 곳을 무의식중에 찾아 가듯
세르반테스라는 지역에 대하여 생각한 적도 없고 어디에 있는지 알지도 못하다
우연히 그곳을 방문하게 됩니다.

어쩌면 내가 정말로 환생한 돈키호테 같다는 엉뚱한 생각을 해봅니다.
나는 소설속의 돈키호테처럼 말을 타고 칼을 차고 병정을 거느리고
늠름한 모습으로 세르반테스를 방문하진 않았습니다.
일행과 함께 승합차에 몸을 싣고 갈 뿐입니다.
그러나 비록 소설속의 돈키호테와 서로 외모가 다르고 처한 환경이 다를지라도
때로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한 일을 계획 한다든가
이억 만 리 이국땅에 혼자 가서 정의와 사랑에 불탄 마음을 몸소 실천하는 정신은
스스로 생각해도 돈키호테와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바기오에서 새벽 5시에 출발하여 북쪽 산악지대 세르반테스로 향하는
꼬불꼬불하고 아슬아슬한 산악 길은
마치 네팔의 카투칸두에서 랑탕계곡을 가기 위하여
샤프루벤시로 가는 산악 길처럼 험난합니다.
필리핀에서 네팔을 체험하려면 이 길을 가보면 됩니다.
바기오에는 승마용 말들이 많이 있어 언제든지 말을 탈 수 있습니다.
차들이 많지 않고 도로가 한산하다면
돈키호테와 같은 호연지기로 이곳을 말을 타고 달렸을 것입니다.

빨리 갈 수 없는 산악길이라 두 시간 정도 가다가 산허리에서 아침을 먹고
쉬엄쉬엄 또 세 시간 드라이브 하다 산허리에서 점심을 먹습니다.
험한 산길은 놀기 삼아 가야지 빨리 가려면 지쳐서 갈 수 없습니다.
해발 1500미터인 바기오에서 출발하여 1900고지까지 한참 올라가다가
다시 600고지까지 서서히 내려가니 넓은 평지와 논과 들판이 나타나고
조그만 면단위 정도의 숲속의 작은 도시가 나타납니다.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세르반테스에 도착합니다.
우리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주민들이 몇 주일 전부터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현지에 도착하여 말에서 내리는 돈키호테처럼 늠름하게 승합차에서 내려
숙소를 정하고 짐을 정리하고 봉사할 준비를 합니다.

왕의 특별지시를 받고 궁정에서 나온 왕궁 소속의사처럼
마을 사람들의 건강관리를 위해 나름대로 철저한 계획을 세웁니다.
마치 돈키호테처럼, 특별히 오라는 곳도 없고,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그리고 의사도 아닌 주제에 마치 의사인양
스스로 분주하게 준비하며 치유봉사를 위한 진두지휘를 합니다.

짐정리를 마치고 저녁을 먹은 후
내일 있을 의료봉사를 위해 평안한 휴식을 취합니다.

첫 날 밤이 지나고 숲속마을의 새 아침이 새들의 합창과 함께 열립니다.
일행이 식탁에 모여앉아 주일예배를 드리고
봉사처로 사용할 마을회관을 갑니다.
이미 사람들이 몰려와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디가나 환자들은 있게 마련입니다.
병원이나 약국이 있다하더라도
한국보다 더 비싼 의료비를 부담할 수 없어
그냥 지내기가 일쑤입니다.
지역 마을수장인 체어맨의 협력을 받아
지역 보건담당 간호사와 몇 명을 더 간호보조사로 세워
분주하게 환자들을 돌봅니다.
쉴 틈 없이 하루 종일 환자들을 돌보고 지친 몸을 쉬기 위해
일행과 함께 저녁이 되어 숙소로 돌아옵니다.
너무 피곤하여 내일 하루는 쉬기로 합니다.
그냥 쉬기가 아까워 이왕이면 새로운 선교지를 물색도 할 겸
여행하며 쉬기로 계획합니다.
우리 봉사대원들은 봉사도 헌신적으로 하지만 여행을 위한 열정도 있습니다.
돈키호테와 함께 다니던 이들도 여행에 지대한 관심이 있었을 것입니다.

세르반테스에서 둘째 날 밤이 지나고
또 다시 새 날이 동터오기 전 캄캄한 새벽 4시에
우리는 작전명령을 수행하는 군사들처럼
헤드라이트를 밝히며 숙소를 떠나 비간을 향하여 갑니다.
처음엔 라이스테라스를 가려고 하였으나 얼마 전 그곳에서
반군들이 외국인을 살해한 사건이 있었다고 위험하다하여 비간으로 정합니다.
산악지대는 움직였다하면 보통 다섯 시간 이상 차를 타야합니다.
승합차로 서쪽 방향의 꼬불꼬불한 산길을 한 참 오르니 동이 터 오고
산언덕엔 필리핀군과 미군이 합동작전 하여 일본군을 물리친
전승기념비가 보입니다.

우리가 타고 온 승합차가 가스연료를 사용하여 약간 불안합니다.
점심을 먹고 주위를 돌아보기 전에 자동차에 먼저 가스를 채워 놓아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아 인근의 가스충전소를 찾습니다.
이곳엔 차량용 가스충전소가 없답니다.
큰일 났습니다.
가정용 LPG 충전소에 가서 가스통을 하나 구입합니다.
가스를 차에 주입할 줄 몰라 여기저기 다니며 묻다가
시간을 모두 낭비하고 밤을 맞이합니다.
관광은커녕 그냥 돌아가기도 바쁘게 되었습니다.
가까스로 LPG 가스통에 호스를 연결하여 차에 가스통을 달아매고
밤길을 달려 세르반테스로 귀환합니다.
한 참 가다 밤길이 너무 위험해
아무 곳에나 임시로 잠잘 곳을 정하여 약 4시간 정도 눈을 붙이고
새벽에 일어나 승합차에 다시 가스통을 달고 산길을 달려 올라갑니다.
바퀴가 갑자기 펑크가 납니다.
마침 24시간 일하는 펑크 때우는 집이 있어 다행입니다.
다시 한 참 가다가 산 중턱에서 가스가 떨어져 다른 통으로 교체하고
다시 산길을 달려 올라갑니다.
이렇게 돈키호테식 일일 여행은
쓸데없이 길바닥에 시간을 다 쏟아 버리고 막을 내립니다.
그러나 아무도 불평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일행은 여행의 베테랑이 다 되었습니다.
여행길은 목적지에 가는 것보다도 과정이 더 즐겁다는 것을 압니다.
여행은 과정을 즐겁게 생각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가스 채우고 펑크 때우느라고 고생도 많았고 시간도 많이 지체하였지만
지나고 보면 재미난 경험이고 추억입니다. 그것이 여행의 맛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