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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소개] 목회자를 위한 <설교자노트> 2012년 5·6월호
정연복  |  pkom545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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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2년 04월 23일 (월) 13:25:00
최종편집 : 2012년 04월 23일 (월) 13:53:32 [조회수 : 2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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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소개] 목회자를 위한 <설교자노트> 2012년 5·6월호

정연복(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저는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으로 일하면서 1997년부터 격월로 나오는 <설교자노트>라는 책을 번역해 왔습니다.

지금까지 96권이 나온 <설교자노트>는 '교회력에 맞춘' 설교 본문에 대한 성서 주석, 그리고 그 본문에 따른 미국의 실력 있는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의 최신의 설교를 번역하고, 아울러 설교 내용에 적합한 기도문과 예화 자료를 풍부하게 제공하여 목회자들의 설교 준비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책입니다. 특히 <설교자노트>에 실린 설교들은 설교자들에게 성서에 충실하면서도 독창적인 설교 아이디어를 제공합니다.

그런데 이 <설교자노트>는 시중 서점에서는 팔지 않고 신청하시는 목회자들에게 직접 우송합니다. '영성적이며 공동체적이며 생태학적인 신앙 공동체를 위한 자료'인 <설교자노트>를 구입하기 원하는 분들은 한국기독교연구소(전화: 031-929-5731)로 연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설교자노트>는 격월로 나오며 두 달치 분량의 설교 자료를 담고 있는데, 2012년 5·6월호 중 5월 첫째 주 설교 자료를 참고로 첨부합니다.


설교 제목: 하나님이 사랑이기 때문에

* 성경 본문: 요한일서 4:7-21
* 성경 주석

요한일서 서간의 대부분처럼,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개념, 그리고 이 서간의 수신인인 요한 공동체에 있어서 그 사랑의 함축적 의미들에 주로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서간의 저자는 청중에게 "사랑하는 여러분"(beloved)이라고 직접 말을 거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것은 그가 서간 전체에 걸쳐 자주 사용하는 애정이 듬뿍 담긴 용어인데(2:7; 3:2; 3:21; 4:1; 4:11), 이 구절의 핵심 주제인 사랑을 예시한다. 사실, 저자는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의 한 가지 시금석은 사랑하는 능력이라고 주장한다: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압니다"(7절). 사랑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으로 인도한다는 주장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비밀스런 정보 습득을 통해서만 올 수 있다고 주장하는 영지주의 경향들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한다.

그러한 영지주의 개념들과 달리, 이 서간의 저자는 8절에서 신적인 것의 본질인 사랑을 청중과 공공연히 공유한다: "하나님은 사랑이다"(God is love)라는 이 분명한 진술은 1:5에서의 "하나님은 빛이다"이라는 저자의 앞서의 독특한 진술과 비슷하다. 두 경우 모두에서, 저자는 하나님에 대한 포괄적 정의를 내리려고 애쓰기보다는 하나님의 어떤 속성들에 대해 암시하려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명확한 단정적 진술은, 하나님이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심은 그분의 사랑의 증거 역할을 한다고 저자가 주장하는 9절을 포함한 뒤따르는 본문의 대부분을 뒷받침하는 역할을 한다.

그 아들이 외아들이라는 개념은 요한복음 독자에게 낯익은데, 요한복음에서도 동일한 용어가 예수를 묘사할 때 자주 사용된다(요한 1:14; 1:18; 3:16; 3:18). 서간의 저자는 10절에서 이 외아들이 어떤 종류의 역할을 감당하였는지 구체적으로 명시한다: 우리의 죄를 위한 "화목제물"(atoning sacrifice, ilasmon)의 역할. 이 "화목제물"이라는 단어는 신약성경을 통틀어 여기와 요한일서 2:2 두 곳에만 나온다.

11절에서, 저자는 서간의 청중에게 대하여 "사랑하는 여러분"이라는 애칭을 되풀이한다. 7절에서와 마찬가지로, 저자는 청중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권고한다. 그들이나 혹은 어느 누구도 지금까지 하나님을 본 적이 없지만, 그들은 서로 사랑함으로써 그들 한가운데 하나님의 내주(內住)를 보증함을 저자는 청중에게 다시금 확신시킨다.

더욱이, 이 상호적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의 완성을 허락한다. 하나님의 사랑이 완성된다는 개념은 그분의 사랑이 지금까지는 불완전한 것이었음을 의미할 수도 있다고 일부 주석가들은 우려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사용된 단어(teteleiwmenh)는 종종 "완전"(perfection) 그 자체보다는 오히려 기대되는 목적의 성취를 가리킨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에서, 동일한 단어가 성경의 성취를 언급하기 위해 사용된다(요한 19:28). 따라서, 여기에서 이 단어의 사용은 하나님의 사랑의 그 무슨 불완전함보다는 오히려 그 사랑의 성취를 암시한다.

13절에서는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고, 또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언급된 "이것"(this)이 그것에 선행하는 것(즉, 하나님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시고, 우리 안에서 그분의 사랑을 완성하심)을 가리키는 것인지, 아니면 그것에 뒤따르는 것(즉, 하나님이 그분의 영을 우리에게 나누어주심)을 가리키는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저자가 전하려는 메시지가 분명한 한, 이 애매함은 문제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사람들 안에 거하신다. 15절에서, 저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사람들 안에도 거하심을 분명히 밝힌다. 이것은 요한 공동체와 [그러한 고백이 불필요하거나 부정확하다고 간주하는] 다른 공동체들 사이의 불화를 암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17절에서, 저자는 "심판 날"에 대한 언급과 함께 종말론적 요소를 끌어들인다. 심판이라는 주제는 요한복음에서 비교적 자주 등장하는 주제이다(요한 5:22-30; 7:24; 8:16; 12:31). 그러나 사랑이 핵심 주제인 요한일서에서 심판이라는 주제의 등장은 다소 부적합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7절 서두에서, 심판은 [앞서 요한일서 2:5뿐만 아니라 4:12에서도 이미 탐구한] 하나님의 사랑의 완성 혹은 완전함이라는 주제와 잘 연결된다. 더 나아가, 18절에서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이나 징벌과 무관하다고 설명할 때, 서간의 저자는 종말론적 심판과 사랑 사이의 연결을 탐구한다.

여기에서 징벌에 대해 사용된 희랍어 단어(kolasin)는 신약성경을 통틀어 마태 25:46에서 단 한 차례 더 등장할 뿐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한 형벌로 들어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갈 것이다"(마태 25:46). 마태복음의 문맥에서, 형벌은 "영원한" 성격을 띤다. 요한일서 저자는 자신이 언급하는 징벌이 그 성격상 영원하다고 명시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또한 여기에서 영원한 징벌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고 가정해도 무방해 보인다.

19절은 번역자들에게 어려움을 제기한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사용된 "사랑"(love, agapwmen)이라는 동사는 [NRSV와 많은 다른 영어 번역들에서처럼] 직설법 동사("우리가 사랑한다")로 번역될 수도 있고, 혹은 권고적인 가정법 동사("우리가 사랑하자")로 번역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전자의 번역은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 사이의 인과 관계를 암시한다. 후자는 7절에서 이미 언급된 낯익은 "사랑하라는 명령"(imperative to love)을 채택한다. 여기에서는 둘 중 어느 번역도 잘 들어맞을 수 있기 때문에, 저자가 어느 쪽을 의도했는지를 결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둘 중 어느 번역을 선택하는가 하는 것과 무관하게, 저자의 기본적 핵심은 여전히 동일하다: 인간의 사랑과 신적 사랑은 긴밀한 관련이 있다.

마지막으로 20절에서, 저자는 사랑에 대한 모든 논의의 결론을 제시한다. 만일 그의 청중인 기독교인들이 눈에 보이는 사람들을 사랑할 수 없다면, 어떻게 그들이 앞서 12절에서 얘기했듯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겠느냐고 저자는 날카롭게 반문한다. 따라서, 저자는 요한 공동체 내부의 상호적 사랑의 필요에 대한 그의 주장을 설득력 있게 확실히 마무리짓는다.

* 설교 본문

상이한 믿음들의 사람들은 세상에 더 많은 사랑이 필요하다는 사실에 이구동성으로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랑이라는 것에 그들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가?

이슬람교와 기독교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고는 아무도 주장하지 않을 것이다. 이슬람교도들과 기독교인들이 동일한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모든 사람이 동의하지는 않는다. 진실로, 이슬람교도들과 기독교인들은 일부 공동의 확언들을 공유한다. 그러나 이 자료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제안하는 것이 자신을 기독교인으로서 부를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리트머스 시험이라는 것을 고찰한다.

11명의 기독교인과 한 명의 이슬람교도.

이 12명의 미국 남자들은 Youth for Christ 캠프, 한 크리스천 기숙학교, 그리고 산꼭대기의 진료소에서 일주일 동안 함께 일할 목적으로 중앙 아메리카의 공화국인 온두라스로 향하는 비행기에 탑승했다. 매일의 건축 일 이외에도, 그들의 스케줄에는 매일 밤의 성경 공부와 기도가 포함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무슨 성경을 함께 토론할 수 있었을까? 그 팀은 11명의 기독교인과 한 명의 이슬람교도로 이루어졌다. 그들을 한데 묶는 공동의 기반은?

이슬람교도들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간주하지는 않지만 예언자로서 존경한다. 이 때문에, 그 그룹의 일주일 동안의 성경 공부는 예수의 비유들에 집중되었다. 그의 신적 본성을 논쟁하기보다 팀은 그의 가르침들을 파고들었다. 그들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는 예수의 말에 귀기울였고, 그리고 남들이 그들의 선한 일들을 보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남들 앞에서 그들의 빛이 드러나게 하는 방법을 숙고했다(마태 5:14-16 참조).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응답하면서, 그들은 어떻게 하면 자신들의 삶에서 토양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는지에 관해 말했다(마태 13:1-9). '잃어버린 양'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에게 더없이 소중하여 어느 한 사람도 희생될 수 없음을 그들에게 가르쳐 주었다(마태 18:10-14). '달란트' 비유에 관해 묵상하면서, 위험을 무릅쓰고 세상에서 하나님의 일을 확장하기 위해 그들의 시간과 능력을 지혜롭게 사용하는 것의 중요성을 발견했다(마태 25:14-30). 그리고 예수가 자신은 세상의 굶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병든 자들 속에서 발견될 수 있다고 말했을 때, 그들은 온두라스 사람들 속의 그 어디에서 자신들이 예수의 얼굴을 보았는지에 관해 말했다(마태 25:31-46).

그들 사이에 의견 차이가 있었는가? 물론이다. 갈등은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 규범적인 것이다. 특히 해외 여행의 스트레스를 경험하는 동안, 강렬한 개성과 육체 노동의 긴장으로 인한 충돌은 일반적이다.

그러나 예수의 지혜는 그 남자들이 갈라서지 않고 결합할 수 있게 했다. 11명의 기독교인들과 한 명의 이슬람교도가 하나의 공동체를 이룬 것이다. 예수 안에서, 그들은 서로 사랑할 수 있었다.

요한은 기원 후 1세기 교회의 기독교인들에게 말한다: "사랑하는 친구들이여,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며, 또한 하나님을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요한일서 4:7). 이것은 오늘날의 분열된 세계가 필사적으로 들을 필요가 있는 말씀, 특히 9·11 이후의 세계에서 기독교인들과 이슬람교도들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절실히 필요한 말씀이다. 요한은 계속해서 말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8절).

온두라스에서, 열두 명의 남자는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은 이슬람교도들과 기독교인들이 동의할 수 있는 명령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 이슬람교 지도자인 바더 말렉은 마호메트(A.D. 570-632)와 예수 둘 모두의 도덕적 가르침은 "우리가 약한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그들을 존경하고, 우리의 최선을 다해 그들을 섬기고, 하나님으로부터의 보상을 제외하고는 어떤 보상도 결코 요구하지 않도록 강제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이다"라는 요한의 단언과 관련해서는 어떠한가? 그것은 다른 이야기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에 놓여 있는 것은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대담한 단언이다. 하나님은 단지 사랑할 뿐만 아니라 그분 자신이 사랑이다. 그것은 이슬람교 경전인 코란에는 나오지 않는 하나님의 본질적 성격에 관한 주장이다. 신학자인 미로슬라브 볼프는 오랜 연구를 통해 기독교인과 이슬람교도가 동일한 하나님을 예배하는가 아닌가 하는 주제에 관한 글을 썼다. 그들은 동일한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그는 말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에게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이슬람교도는 달의 신 메카(Mecca)를 숭배하는 반면, 유대인과 기독교인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훼를 예배한다고 미국의 극우파 복음 전도자인 팻 로버트슨은 줄곧 말해 왔다. 달의 신과 야훼, 이 둘은 전혀 다르다.

공통점과 차이점.

미로슬라브 볼프의 말에 귀기울여 보자. 2011년 10월 예일 신학대학교 강연에서, 그는 "우리의 하나님들(Gods)은 동일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다른 방식들로 이해한다"고 주장했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독특한 견해들 속에는 네 개의 의미심장한 유사점과 두 개의 중요한 차이점이 존재한다:

첫째,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한 분 하나님"(One God)이라고 믿는다. 이슬람교도들도 똑같이 믿는다. 둘째,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세상을 "무(無)로부터" 창조했다고 믿는다. 이슬람교도들도 마찬가지이다. 셋째,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세상과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믿는다. 창조자인 하나님과 그분의 피조물인 세상을 혼동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슬람교도들도 동의한다. 넷째,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의롭고 자비로운 분이며 계명들의 수여자라고 믿는다. 이슬람교도들도 매우 동일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확실히 이것들은 의미심장한 유사점들이다. 우리는 11명의 기독교인들과 한 명의 이슬람교도가 한 팀을 이루어 온두라스로 가서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함께 건축 일을 할 수 있었다는 것에 놀라서는 안 된다. 그들이 굶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병든 사람들을 돕는 것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에 동의할 수 있었음에 우리는 충격을 받아서도 안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하나님께 이르는 아주 동일한 길이라고 생각하는 함정에 빠지지는 않도록 하자. 최소한도 두 중요한 차이점이 존재한다:

첫째, 우리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삼위일체라고 믿는다. 우리는 일신론자들이 아니라 삼위일체론자들이다. 그러나 이슬람교도들은 하나님이 삼위가 아니라 완전히 하나라고 믿는다.

둘째,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사랑이라고 믿는다(요한일서 4:8). 이슬람교도들도 어느 정도까지는 여기에 동의하는데, 이슬람교에서도 하나님의 자비는 엄청나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God is love)이라는 표현은 이슬람교에서 하나님을 일컫는 99개의 이름들 속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믿음에 대한 동의가 가능한지 알아보기 위해, 기독교인들과 이슬람교도들은 사랑에 관한 정직한 대화를 가져야 한다. 그러나 대화를 시작하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의 본성에 관한 우리 자신의 신념들을 아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사랑은 "하나님의 존재"(who God is)이다.

사랑으로부터 떼어놓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 안에 아무것도 없다. 요한일서 저자는 단순히 "하나님은 사랑하신다"(God loves)고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사랑하신다"는 것은, 그분이 분노, 질투, 기쁨 따위의 많은 다른 가능한 감정들과 함께 사랑을 표현하심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저자는 말하는데, 이것은 사랑이 하나님의 존재의 확고한 중심이라는 것을 뜻한다.

요한일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이것을 뒷받침한다: "하나님은 그의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심으로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을 보여주셨으며, 그를 통해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9절). 이것은 요한복음의 고전적 구절을 반영한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려는 것이다"(요한 3:16). 하나님은 사랑이심을 우리는 알고 있다. 하나님이 그것을 말씀하기 때문이 아니라 행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안다. 우리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을 수 있도록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심으로써, 하나님은 그분의 사랑을 보여주신다.

그러나 "사랑"(love)이라는 단어로 우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따뜻하고 놀라운 감정 에 대한 인간적 묘사에 불과한가? 전혀 그렇지 않다고 요한일서 저자는 주장한다. 그는 말한다: "진실한 사랑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위해 화목 제물이 되게 하셨습니다"(요한일서 4:10). 하나님은 사랑의 원천이고, 이 사랑은 예수의 십자가 죽음, 즉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한 거룩한 희생에서 가장 분명히 드러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분의 존재 바로 그 핵심에서 사랑이다. 우리에게 죄의 용서와 새 생명을 가져다주려고 자신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심으로써, 하나님은 자신이 사랑의 원천임을 드러내신다. 그런 놀라운 사랑을 받은 사람들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하게 가능한 반응은 서로에게 사랑을 보여주는 것이다. 요한일서 저자가 권고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사랑하는 친구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처럼 우리를 사랑해 주셨으니 우리 역시 서로를 사랑해야만 합니다"(11절).

사랑은 "기독교인들의 존재"(who Christians are)이다.

이것들은 도전적 단어들이다. 결국, 여기에서 요한일서 저자는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변형적 효과를 가질 수 있는 의지적 행동에 관해 말하고 있다. 그는 약속한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안에서 완전해질 것입니다"(12절). 친구, 적, 흑인, 백인, 동성애자, 이성애자, 이슬람교도, 기독교인 모두를 사랑하는 대담한 행동을 우리가 취한다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시고, 우리 안에서 그분의 사랑이 완전해질 것이다.

사랑은 "기독교인 됨의 의미"의 핵심에 놓여 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사람들 안에, 동시에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들 안에"(15절) 거하신다고 요한일서 저자는 말한다. 서로 사랑하는 것과 예수를 믿는 것은 기독교라는 동전의 양면이다.

그러한 강력한 사랑은 우리 삶을 변화시켜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그 날에 우리가 아무 두려움 없이 서게"(17절) 할 수 있다. 그것은 두려움을 제거한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쫓기 때문"이다(18절). 그것은 또한 우리의 흠 없는 완전함의 시험, 즉 사랑에 관한 우리의 말이 우리의 행동과 조화되는지 보여줄 수 있다. 요한일서 저자는 단언한다: "어떤 사람이 '나는 하나님을 사랑해요'라고 말하면서 그의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의 형제도 사랑하지 못하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20절).

요한일서 저자에 따르면, 가장 중요한 사항은 이것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의 형제자매들도 사랑해야 한다"(21절).

이 기독교적 가르침이 뿌리내리면, 놀라운 열매를 낳는다. 엠멧 틸의 엄마인 마미 모블리는 1955년 그녀의 아들을 살해한 남자들을 향한 비통함을 여전히 품고 있는지에 관한 질문을 받고 대답했다. "나는 그들이 죽기를 바라지 않았어요. 나는 그들이 감옥에 갇혀 있기를 바라지 않았어요. 만일 내가 해야만 한다면, 나는 그들의 네 명의 어린 자식들-그들은 제각기 두 명씩의 자식이 있었죠-을 받아들이고, 그 아이들을 내 친자식처럼 기르고 사랑할 수도 있었을 거예요....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나는 믿어요. 나는 내가 배운 방식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해요."

서로 사랑하라! 미국에서, 온두라스에서, 동료 기독교인들과의 대화 속에서, 이슬람교도들과의 대화에서, 우리는 이 방식에 따라 살아갈 필요가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인종, 신조, 문화, 국적 따위와 무관하게 그들의 형제자매를 또한 사랑해야 한다.

우리의 독특한 기독교적 믿음은 이것이다: 하나님이 사랑이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 사랑한다.

<가능한 설교 주제들>
* 창조부터 심판까지,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것은 "사랑하는 것"(loving)이다.
* 기독교인들이 그들의 이웃들을 위해 가지고 있는 사랑 안에서 하나님을 보는 것.
* 완전한 사랑은 어떻게 두려움을 내쫓나?

* 예화

+ 어린이

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보배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셔서
상으로 보내어 행복의 웃음꽃
피우게 하는 신비로운 보배

이 세상의 희망
우리 나라의 희망
우리 교회의 희망
우리 마을의 희망
우리 집의 희망

알아줘야 하고
믿어줘야 하고
기대를 걸어줘야 하고
기다려줘야 하고
돌봐주고
사랑해줘야지

아, 예뻐라
(임종호·시인)

+ 난 어린이가 좋아

난 어린이가 좋아.

이 세상 모두들
그를 닮았으면 좋겠어
나이 많고 빈 병 같은
어른들은 싫어.

어린 나이에
모르는 걸 배우면서
무럭무럭 자라는 어린이가 좋아.

난 어린이가 좋아.

이 세상 모두들
그를 닮았으면 좋겠어.
나라를 위한다면서
내 주장만 내세우고
내 욕심만 차리는
거짓말투성이 어른들은 싫어.

동무끼리 다정하게 공부하면서
배고픈 동무들을 걱정해 주고
밥 한끼 나눠 먹는 어린이가 좋아.

난 어린이가 좋아.

이 세상 모두들
그를 닮았으면 좋겠어.
걸핏하면 웅성웅성
데모하는 어른들은 싫어.
오순도순 사귀면서
지혜로 자라는 어린이가 좋아.

이 세상 모두들
그를 닮았으면 좋겠어.
두 동강 난 우리 나라
통일 못 이루고
형제끼리 맞서는 어른들은 싫어.

금강산 마을
제주도 섬마을

서로서로 손잡고 노래부르는
어린이가 난 좋아.
(이정훈·아동문학가)

+ 무지개

하늘에 무지개 바라보면
내 마음 뛰노라,
나 어려서 그러하였고
어른 된 지금도 그러하거늘
나 늙어서도 그러할지어다.
아니면 이제라도 나의 목숨 거둬 가소서.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원하노니 내 생애의 하루하루가
소박한 경건의 마음으로 이어가기를.
(월리엄 워즈워드·영국 낭만주의 시인)

+ 대한민국 어린이 헌장

어린이는 나라와 겨레의 앞날을 이어나갈 새 사람이므로 그들의 몸과 마음을 귀히 여겨 옳고 아름답고 씩씩하게 자라도록 힘써야 한다.

1. 어린이는 인간으로서 존중하여야 하며 사회의 한 사람으로서 올바르게 키워야 한다.
2. 어린이는 튼튼하게 낳아 가정과 사회에서 참된 애정으로 교육하여야 한다.
3. 어린이에게는 마음껏 놀고 공부할 수 있는 시설과 환경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4. 어린이는 공부나 일이 몸과 마음에 짐이 되지 않아야 한다.
5. 어린이는 위험한 때에 맨 먼저 구출하여야 한다.
6. 어린이는 어떠한 경우에라도 악용의 대상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
7. 굶주린 어린이는 먹여야 하며, 병든 어린이는 치료해 주어야 하고, 신체와 정신에 결함이 있는 어린이는 도와주어야 한다.
8. 어린이는 자연과 예술을 사랑하고 과학을 탐구하여 도의를 존중하도록 이끌어야 한다.
9. 어린이는 좋은 국민으로서 인류의 자유와 평화와 문화 발전에 공헌할 수 있도록 키워야 한다.

+ 기독교 어린이 권리 선언문

우리는 주 예수께서 어린이를 높여 천국을 상징하시고 어린이를 영접하여 축복하신 본을 받들어 어린이를 사랑 안에서 자라나게 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그 권리를 선언한다.

1. 어린이는 완전한 인격자로서의 권리를 가지고 있다.

어린이는 말과 행동과 생활 전반에 있어서 어른과 동등한 인권상의 보장을 받아야 한다.

2. 어린이는 배울 권리가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토대로 하여 생활에 필요한 모든 지식을 가르쳐야 한다.

3. 어린이는 양육 받을 권리가 있다.

어린이가 성인이 되기까지 부모를 위시한 어른들은 그들을 바르고 건강하게 키워야 한다.

4. 어린이는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

과중한 육체노동이나 정신노동에서 보호하며 위험과 질병과 굶주림에서 보호하고 모든 편리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

5. 어린이는 평화를 누릴 권리가 있다.

어린이는 크고 작은 싸움의 희생이 되어서는 안 되며 압박과 불안감에서 보호하고 그들의 꿈을 해치지 않도록 내적 외적으로 평화를 지켜 주어야 한다.

+ 먼저 가르쳐야 할 것

나는 내 아이에게
나무를 껴안고 동물과 대화하는 법을
먼저 가르치리라.
숫자 계산이나 맞춤법보다는
첫 목련의 기쁨과 나비의 이름들을
먼저 가르치리라.

나는 내 아이에게
성경이나 불경보다는
자연의 책에서 더 많이 배우게 하리라.
한 마리 자벌레의 설교에 더 귀 기울이게 하리라.
지식에 기대기 전에
맨발로 흙을 딛고 서는 법을 알게 하리라.

아, 나는 인위적인 세상에서 배운 것도
내 아이에게 가르치지 않으리라.
그리고 언제까지나 그를 내 아이가 아닌
더 큰 자연의 아이라고 생각하리라.
(조안 던컨 올리버)

+ 모래 위의 발자국

어느 날 밤 어떤 사람이 꿈을 꾸었습니다.
주님과 함께 해변을 걷고 있는 꿈이었습니다.

하늘 저편에 자신의 인생의 장면들이 번쩍이며 비쳤습니다.
한 장면씩 지나갈 때마다 그는 모래 위에 난
두 쌍의 발자국을 보았습니다.
하나는 그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의 것이었습니다.

인생의 마지막 장면이 비쳤을 때
그는 모래 위의 발자국을 돌아보았습니다.

그는 자기가 걸어 온 길에 발자국이
한 쌍밖에 없는 때가 많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때가 바로 그의 인생에서는
가장 어렵고 슬픈 시기들이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몹시 마음에 걸려 그는 주님께 물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제가 당신을 따르기로 결심하고 나면
항상 저와 함께 동행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보니 제 삶의 가장 어려운 시기에는
한 쌍의 발자국밖에 없습니다.
제가 주님을 가장 필요로 했던 시기에
주님께서 왜 저를 버리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주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나의 소중하고 소중한 아들아,
나는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너를 버리지 않는다.
네 시련과 고난의 시절에 한 쌍의 발자국만 보이는 것은
내가 너를 업고 간 때이기 때문이니라."
(메어리 스티븐슨)

+ 길가의 돌

나 죽어 하느님 앞에 설 때
여기 세상에서 한 일이 무엇이냐
한 사람 한 사람 붙들고 물으시면
나는 맨 끝줄에 가 설 거야
내 차례가 오면 나는 슬그머니 다시
끝줄로 돌아가 설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세상에서 한 일이 없어
끝줄로 가 서 있다가
어쩔 수 없이 마지막 내 차례가 오면
나는 울면서 말할 거야
정말 한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도 무엇인가 한 일을 생각해 보라시면
마지못해 울면서 대답할 거야
하느님, 길가의 돌 하나 주워
신작로 끝에 옮겨놓은 것밖에 한 일이 없습니다
(정종수·시인)

+ 사랑의 빚을 갚는 법

사랑의 빚을 갚는 방법은 또 다른 누군가에게
아름다운 사랑을 넉넉히 나누어주는 것뿐입니다.

어느 젊은이가 매일 통근 기차를 타고 회사로
출근을 했습니다

기차 노선에 경사진 언덕을 오르는 곳이 있었는데
여기를 지날 때면 속력이 떨어져 철로 옆에 있는
집안이 들여다보이곤 했습니다

그런데 수많은 집들 중 어떤 집에 늙은 노인이
항상 누워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매일 그 모습을 본 젊은이는 가슴이 아파 뭔가
도움을 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노인의 이름과 주소를 알아내어
병이 회복되기를 기원하는 카드를 보냈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그저
"날마다 언덕 철길을 통해 출근하는 한 젊은이가"라고
써서 보냈습니다

며칠이 지났습니다

그날도 출근길에 젊은이는 그곳으로 눈길을 돌렸는데
방은 텅 비어 있고
창가에는 램프가 켜져 있었습니다

유리창에는 큰 글씨가 씌어진
종이가 붙어 있었습니다

그 종이에는
"얼굴을 알 수 없는 그대에게 축복을"이란 글이
선명하게 적혀 있었습니다

물질적인 빚은 물질만 준비되면 언제라도
갚을 수 있기에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사랑의 빚은 아무나 갚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의 빚을 갚는 유일한 방법은
또 다른 누군가에게 그 아름다운 사랑을 넉넉히
나누어주는 것뿐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받은 사랑, 그 사랑을
또 다른 누군가에게 온전히 전해주는 일,
그런 일들이 모여
세상을 더욱 맑게 해주는 것입니다.

+ 자녀는 선물입니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나그네에게 좋은 주인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자녀들이 우리와 같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자녀들이 우리와 얼마나 다른지 발견하고 끊임없이 놀랍니다. 우리는 자녀들을 창조하지 않았고 우리가 그들을 소유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좋은 소식입니다. 그들의 모든 문제들에 대해 우리 자신을 책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물론 그들의 성공 역시 우리 자신의 것으로 주장할 수 없습니다.

자녀들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그들은 환대를 요구하고 얼마 동안 좋은 친구로 지내다가 다시 여행을 떠나는 나그네와 같습니다. 그들은 엄청난 기쁨과 슬픔을 가져다줍니다. 그것은 그들이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녀가 그의 삶을 위해 우리 곁을 떠날 때에 슬픔과 기쁨이 엇갈립니다. 왜냐하면 이때 우리는 '우리의' 자녀가 실제로 '우리의 것'이 아니라 참된 선물이 되기 위해 우리에게 맡겨졌음을 깊이 느끼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 세상에서 자녀에게 자유를 허용하기는 너무 어렵습니다. 우리는 모든 위험에서 그들을 보호하기를 간절히 원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속해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헨리 나우웬)

+ 천국

어떤 여인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하나님, 저를 아버지 계신 천국으로 불러주세요." 이때 천사가 나타나서 말했다. "하나님께서 네 기도를 들으시고 '오냐, 네 기도를 내가 기쁘게 들어주마. 다만 네가 살고 있는 정원을 깨끗이 정리하라'고 말씀하셨단다."

여인은 열심히 정원의 풀을 깎고 나뭇가지를 손질해 놓고 다시 기도했다. "하나님, 이제 저를 천국으로 불러 주시겠습니까?" 그러자 이번에는 천사가 말했다. "네 집 문 밖에 거지가 서 있구나. 그 거지를 배불리 먹일 때까지 하나님께서 네 기도를 들어주기를 보류하고 계신다."

그래서 여인은 문 밖의 걸인과 집안의 남편, 자녀들, 그리고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 이만하면 되었습니까?"

그때 천사가 창문을 열어 보여주니 바로 거기가 천국이었다. 사랑스러운 사람들, 아름다운 정원이 거기 있었다.

+ 어느 심장병 환자의 고백

수술 받기 전 날 간호사가 나를 찾아왔다. 간호사는 내 손을 꽉 잡고 상냥하게 말했다:

"내일 수술을 받으시는 동안 당신의 몸에서 심장이 분리되고 오직 기계의 도움으로 생명이 유지될 것입니다.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면 심장은 새롭게 연결되어 정상 기능을 발휘합니다. 그 다음 당신은 회복실로 옮겨질 것이고, 그곳에서 얼마간 시간이 지나면 의식은 깨어납니다. 의식이 깨어난 후에도 여섯 시간 동안은 전혀 움직일 수 없습니다. 볼 수도, 말할 수도 없고 심지어 손끝 하나 움직이지 못할 것입니다.

바로 그때 나는 당신 곁에서 지금처럼 당신의 손을 잡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 닥칠지 모를 모든 위험을 일일이 점검하고 기록하면서 필요한 조치를 완벽하게 취할 것입니다. 그때 당신은 내가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느낄 것입니다."

다음날 내 운명을 결정할 수술이 시작되었고, 이어서 담당 간호사가 말한 대로 모든 일이 진행되었다. 그때 나는 내 손을 붙들고 나와 함께하고 있는 간호사의 손길을 확인하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안도감과 위로, 생명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내 생애에서 가장 어렵고 중요한 순간에 그녀가 내 손을 붙들고 나의 모든 문제들을 하나하나 처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그녀와 함께하는 그 순간이 내게 얼마나 가치 있고 포근한 것이었는지 다른 사람들은 아마 상상도 못할 것이라고 고백했다.

예수님이 이 땅을 떠나실 때 우리에게 하신 약속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시겠다고 하신 것이다. 성령은 희랍어 원문으로 '파라클레토스'라고 하는데, 그 뜻은 '우리 옆에 와 계시는 분'이다. 또한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전에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고 약속하셨다.

그렇다. 하나님은 나와 멀리 떨어져 있는 분이 아니고 바로 내 곁에 오셔서 내 손을 꼭 붙잡고 나와 늘 함께하시는 분이다.

+ 기독교 신앙의 독특성

비교종교를 주제로 한 심포지엄이 영국에서 열리는 동안,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 전문가들은 만일 기독교 신앙에 독특한 게 있다면 그게 뭘까 토론했다. 그들은 가능성들을 차례차례 제거하기 시작했다. 성육신? 다른 종교들에도 인간의 형체를 한 신들의 출현에 대한 다른 견해들이 있다. 부활? 다른 종교들에도 죽음으로부터의 귀환에 대한 이야기들이 있다. 토론이 얼마간 계속되고 있을 때 이윽고 C.S. 루이스가 훌쩍 방에 들어섰다. 그는 "웬 소란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는 참석자들이 세계 종교들 사이에서 기독교의 독특한 공헌에 대해 토론하고 있다는 대답을 들었다. 그러자 루이스는 대답했다. "오, 그건 쉽지요. 그것은 은총입니다."

토론이 얼마간 더 진행된 후 참석자들은 이제 의견의 일치를 보아야 했다. 하나님의 사랑은 아무런 조건도 달지 않고 우리에게 거저 온다는 개념은 인간의 모든 본능과 모순되는 듯하다. 불교에서는 팔정도를 이야기하고, 힌두교에서는 업(業, karma)을, 유대교에서는 계약을, 그리고 이슬람교에서는 법전을 들먹인다. 이것들 각각은 신의 승인을 얻기 위한 하나의 길을 제공한다. 오직 기독교만이 감히 하나님의 사랑을 무조건적인 것으로 만든다.

은총에 대한 인간의 뿌리 깊은 저항을 인식한 예수는 종종 그것에 관해 말했다. 그는 하나님의 은총이 가득한 세계를 묘사했다: 선인과 악인 모두에게 햇빛이 골고루 내리쬐는 곳, 새들이 쟁기질을 하거나 수확하지 않고서도 거저 씨앗들을 모으는 곳, 바위투성이의 언덕받이에 돌보는 사람이 없어도 야생화들이 활짝 피어나는 곳.

본토민들이 간과하는 것을 알아차리는, 한 낯선 나라에서 온 방문객처럼, 예수는 도처에서 은총을 보았다. 그러나 그는 은총을 분석하거나 정의하는 법이 결코 없었다. 그리고 사실 그는 은총이라는 단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우리가 비유들로서 알고 있는 이야기들을 통해 은총을 전달했다.
(빌립 얀세이)

+ 하나님을 신뢰하라

속박의 종교는 항상 자기를 높인다. 나의 노력, 나의 투쟁, 나의 신실함을 내세운다. 그러나 자유의 종교는 자신에게는 아무런 자랑거리가 없으며 모두 그리스도께서 이루시고 그리스도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어린아이는 자기를 자랑하지 않고 아버지와 어머니를 자랑하듯이, 우리의 영혼도 자유의 생활에서 주님을 자랑하게 된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우리의 모든 필요를 충분히 공급하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당연히 그분의 상속자다.

나에게는 일찍이 한 친구가 있었다. 기독교인으로서 그녀의 삶은 곧 속박의 삶이었다. 그녀는 노예가 자유를 얻기 위해 일하는 것보다 훨씬 더 열심히 구원을 얻으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그녀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온갖 크고 작은 일들과 씨름하며 여러 가지 일들을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녀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유혹들과 싸워 이기지 못하면 그날 하루가 무의미하게 흘러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느 날 신앙생활의 고충과 속박에 관해 나랑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녀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문제의 해결책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한나 W. 스미스, 『그리스도인의 행복한 삶의 비결』)

+ 진정한 성장이란?

1916년 마하트마 간디는 알라하바드 대학 학생들에게 강연하는 도중에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경제 성장이 진짜 성장입니까?" 그 주제를 토론하면서 간디는 말했다. "경제 성장은 제한 없는 물질적 진보를 의미하고, 진정한 성장은 도덕적 성장을 의미한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경제 성장이 이루어져서 가난한 사람들이 그들의 일상적 욕구들을 충족시킬 수 없다면 아무런 도덕적 성장도 있을 수 없다고 경제학자들은 지적한다. 이런 논법에 대한 간디의 답변은, 물론 극도의 빈곤은 도덕적 타락을 낳을 뿐이라고 주장한 사람은 지금까지 없었지만, 모든 인간은 고상하게 살아갈 권리가 있고, 따라서 그들 자신이 의식주(衣食住)의 수단을 발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간디는 해설을 덧붙였다. "우리는 경제학이나 그들의 법률로부터 아무런 도움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간디는 강연을 계속하면서 요점을 말했다. "나는 세계의 종교 경전들이 현대의 많은 경제학 교과서들보다 경제 법칙들에 관한 훨씬 더 안전하고 건전한 논문들이라고 감히 생각합니다.... 나는 예수가 그의 시대의 가장 위대한 경제학자였다고 믿습니다."

간디는 청중에게 그들의 삶에 큰 영향력을 행사해왔고 수많은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틀지은 것은 예수와 부처처럼 자발적으로 가난을 껴안은 사람들, 즉 이슬람교 창시자인 마호메트나 성(聖) 프란시스 같은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세상 속에 살아감으로 말미암아 세상은 더욱 부유해졌다고 간디는 덧붙여 이야기했다.
(캄라 차우드리, "이것이 발전인가?")

* 예배 자료

+ 예배에의 부름

당신은 바람처럼
우리의 발걸음에 앞서 가십니다.
당신은 비둘기처럼
우리를 하늘로 날아오르게 하십니다.
당신은 물처럼
우리의 영혼을 맑게 하십니다.
당신은 구름처럼
우리의 시험을 막아 주십니다.
당신은 이슬처럼
우리의 무기력함을 소생시키십니다.
당신은 불처럼
우리의 찌꺼기들을 제거해 주십니다.
(크리스티나 로제티, '성령께')

+ 어린이가 바치는 기도

이 빵과 우유를 축복해 주세요
제가 따뜻하게 잘
이 푹신한 침대를 축복해 주세요.
내일 창가에 아침이 찾아올 때까지
어두운 밤에 자는 동안
무서운 일이 생기지 않게 해 주세요.
제 친구 장난감들을 축복해 주세요.
제가 여기저기 돌아다닐 때
신는 신발을 축복해 주세요.
제 작은 의자를 축복해 주세요.
전등 불빛과 난로의 불꽃을 축복해 주세요.
지칠 줄 모르고
사랑으로 키워주시는 손길을 축복해 주세요
친구들과 가족을 축복해 주세요.
아빠와 엄마를 축복해 하시고
저희 가족이 더 사랑하게 해 주세요.
먼 나라, 가까운 나라에 사는
어린이들을 축복하시고
걱정 없이 안전하게 살게 해 주세요.
그래서 제가 평화롭고 건강하게
잠들고 깰 수 있게 해 주세요.
(레이첼 필드)

+ 아이들을 위한 기도

당신이 이 세상을 있게 한 것처럼
아이들이 나를 그처럼 있게 해주소서
불러 있게 하지 마시고
내가 먼저 찾아가 아이들 앞에
겸허히 서게 해주소서
열을 가르치려는 욕심보다
하나를 바라게 가르치는 소박함을
알게 하소서
위선으로 아름답기보다는
진실로써 추하기를 차라리 바라오며
아이들의 앞에 서는 자 되기보다
아이들의 뒤에 서는 자 되기를
바라나이다
당신에게 바치는 기도보다도
아이들에게 바치는 사랑이 더 크게 해주시고
소리로 요란하지 않고
마음으로 말하는 법을 깨우쳐주소서
당신이 비를 내리는 일처럼
꽃밭에 물을 주는 마음을 일러주시고
아이들의 이름을 꽃처럼 가꾸는 기쁨을
남 몰래 키워가는 비밀 하나를
끝내 지키도록 해주소서
흙먼지로 돌아가는 날까지
그들을 결코 배반하지 않게 해주시고
그리고 마침내 다시 돌아와
그들 곁에 순한 바람으로
머물게 하소서
저 들판에 나무가 자라는 것처럼
우리 또한 착하고 바르게 살고자 할뿐입니다.
저 들판에 바람이 그치지 않는 것처럼
우리 또한 우리들의 믿음을 지키고자 할뿐입니다.
(김영호·시인)

+ 어느 아버지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아이들의 마음을 상하게 한 것을 용서하소서.

저는 가난한 집에서 자랐기 때문에 크고 좋은 집이
아이들을 편안하게 해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중요한 건 사랑이라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습니다.

돈으로 아이들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그 때문에 아이들은 사람보다 물건을
더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매를 들면 아이들이 강해져서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게 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저는 아이들을 훈계하고
가르칠 수 있는 지혜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에게 간섭하지 않으면
독자적인 사람들이 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장남이
동생들의 아버지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가정의 모든 문제들을 가볍게 넘기면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결과 제가 아이들에게 가르친 것은
이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달아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완벽한 가정처럼 보이게 하면
존경을 받게 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결과 제가 아이들에게 가르친 것은
거짓말하며 비밀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되기 위해 내가 해야 할 일은,
돈을 벌고 가정을 유지하고 가족들의 물질적 필요를
채워 주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지금에서야 제가 깨달은 것은
아버지가 되기 위해서는
아이들은 진정한 아버지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저 추측만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당신께서 이 기도문을
잘 읽으실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제 눈물로 많은 글자가 번지고 말았군요.
(존 엘리스)

+ 십대들을 위한 기도

하늘의 별, 땅의 꽃
자기의 마음속을 들여다볼
한 치의 여유도 없이
피곤하고 숨가쁘게 살아가는
오늘의 십대들에게
우리는 늘 미안하고 할 말이 없는
힘없는 어른들이지만
변함없는 사랑으로
가까이 다가서고 싶은 마음을
가끔은 기도 안에 접습니다

우리의 십대들이 언제나
우울의 늪에 빠지지 말고
햇살 같은 웃음 속에 살게 해 주십시오
그들의 웃음 속에 담겨 있는
희망과 기쁨으로
우리의 삶 또한 밝아질 것을 믿습니다
그들이 미래의 꿈과 이상에
항상 설레는 시인의 가슴으로 살되
허황한 욕심이나
병적인 자기도취에 빠져
오늘의 시간을 낭비하지 않게 하십시오
날로 발전하는 전자 문화, 영상 매체
물질 문명의 혜택을 즐기며 살되
책을 멀리하지 않고
독서와 사색으로
내면의 뜰을 가꾸어 가는
지혜로운 사람들로 성숙하게 해 주십시오
생각하는 능력과 정서를 잃어버린
기계인간이 될까 우리는 두렵습니다

부모, 형제, 친구, 스승들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사랑하며
감사의 표현을 할 줄 아는 십대
자기자신을 아끼고 사랑하되
다른 이의 필요에도
선선히 마음의 창을 열어
도움의 손길을 펴는
"작은 천사"들이 되게 해 주십시오
세상엔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불행 속에 아파하고 있음을
좀더 자주 기억하게 해 주십시오

성급함을 다스려 나가는 인내의 힘
충동적인 감정을 제어하는 절제의 힘
지루하지만 꼭 필요한 기다림의
긴 과정과 용기 없이는
누구도 인생의 승리자가 될 수 없고
빛을 누리는 자유인이 될 수 없음을
더 늦기 전에 깨우치게 하십시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우리의 소중한 십대들이
어리지만 당당하고 단호한 의지
양심에 충실하여
더욱 맑고 총명한 눈빛으로
매일을 살아가게 하십시오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
남의 핑계를 대지 않고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는 겸허한 사람
끈질긴 유혹에도 굴하지 않고
몸과 마음의 순결을 지키는 사람
문장에 매듭을 지어 주는 마침표처럼
인간관계의 뒤끝이 깨끗한 사람
그래서 더욱 아름답고
매력 있는 젊은이로
우리의 길잡이가 되게 해 주십시오

어른들의 나태한 적당주의, 안일한 편리주의
교만한 이기주의에 끝없이 도전하며 전진하는 십대
내일을 위해 오늘을 충실히 사는
살아 있는 십대, 빛나는 십대로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게 하십시오
(이해인·수녀 시인)

+ 믿음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돈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늘 가난하고 추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권세를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늘 힘없고 약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명예나 지식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늘 외롭고 쓸쓸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는 믿음을 주셨습니다.
인생을 괴로워하거나 슬퍼하지 말라고
나는 언제나 너와 함께 있다고 그래서
나에게는 언제나 희망과 용기가 있었습니다
(김요한)

+ 헌신에 대한 묵상기도

나는 늘 내 자신을
하느님의 손에 쥐어진
몽당연필이라고 말합니다.

그분은 생각하시고
글을 쓰시고
모든 일을 하십니다.

그리고 가끔
연필을 부러뜨리기도 하십니다.

그러면 다시
연필을 깎아야 할 것입니다.

그분이 당신을
언제 어디에서나 사용하실 수 있도록
자그마한 도구가 되세요.
(마더 테레사·수녀, '몽당연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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