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빠진 날에 스쳐가는 잡상들
 
1
 
내 생일날이다.
흔히 이 세상에 태어난 날을
귀빠진 날이라고 한다.
우리 조상들의 숨은 지혜가 가슴 속 깊이
느껴지는 말이다.
 
산모들이 아기를 분만하는 과정에서
아기의 귀가 빠지는 순간이 가장 고통스럽다고 한다.
그때 산모들은 피를 심하게 흘리게 되고
고통을 이겨내려고 이를 악물고
소리를 지르게 된다.
그래서 귀가 빠졌다는 말을
가장 힘든 인생의 고비를 넘겼다는 의미로
사용하기도 한다.

 2
 
공자는 육십 세를 귀가 순해지는 이순(耳順)의 나이라고
칭했다. 그리고 사십 세를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불혹(不惑)의 나이,
 오십 세를 하늘의 뜻을 아는 지천명(知天命)의 나이, 칠십 세를
마음 따라 사는 종심(從心)의 나이라고 했다.
나는 아직껏 단 한  번도 공자의 정의처럼
인생을 살아 본 경험이 없는 사람이다.
아니 그 언저리에도 가본 적이 없었다고 해야 솔직한 표현일 것이다.
그래서 그가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 건지
도대체 머리가 헷갈린다.

또, 인생을 경제개발 십계 년계획처럼 칼로 두부자르 듯
구분해서 정의하고 판단하는 공자의 사고방식이 좀처럼
이해가 가질 않는다.
그러면서도 이 나이가 되고 보니 그가 말 한
耳順의 의미를 자꾸 되씹어 보게 된다.    
 
3
 
얼마 전에 한국의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른 혜민 스님의
저서 "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을
읽어 보았다. 몇 년째 은퇴를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는 나에게는 무엇보다 우선 책 제목이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몇 해 전 한참 일에 미쳐있을 때는 류시화 시인이
현각, 무량 등 외국스님들의 설법을 편집한
"공부하다 죽어라"  라는 책을 이번과는 전혀 다른 이유로
책 제목에 끌려 읽어 본 적이 있었다. 가치관, 철학, 신앙은
나이와 처지에 따라 바뀌기 마련이다.
그때의 내 상황과 지금의 내 상황은 책 제목만큼 다르다.
지금의 나는 모든 것을 멈추고 내려놓아야 할 나이다. 
 
책을 읽고 난 후에 책 제목을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을
"멈추면, 비로소 들리는 것들 "로
바꾸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나름대로 해 보았다.
 
4
 
예수는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으라 "하며
설교를 시작하곤 했다. 또 영서로 알려진 성경 요한복음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로 첫 장이 시작된다.
  
예수에게 우주는 색이 아니고 소리다.
그 깨달음으로 보면
붓다의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을
성즉시공(聲卽是空) 공즉시성(空卽是聲) 으로
바꾸어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의 지나친 논리의 비약일지는 모르지만
예수는 귀로, 붓다는 눈으로 진리를 깨달았을 것이다.  
  
5 
 
눈과 귀의 차이, 자비와 사랑의 다름 같다는 생각이 든다.
 눈은 뜨고 감을 수가 있는 의지와
자동반사 보호기능을 가지고 있다.
반면, 귀는 항상 열려있다. 그런 자동보호기능도 없다.
눈이 능동적이고 남성적이라면,
귀는 수동적이고 여성적이다.
눈이 주관적이라면 귀는 객관적이다.
또, 눈의 일차적 역할이 나를 위한 것이라면
귀는 나와 너를 위한 것이다.
 
그런 면에서 눈이 자신을 지키는 성벽이라면
귀는 나와 너가 소통하는 문이요 통로다.
 
6
 
나도 이제 耳順의 나이가 넘었다.  
고목처럼 딱딱해 진 구닥다리 귀를
부드럽고 연한 어린이들의 귀로 개비(改備)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개비(改備) 해야 할 것이 어찌 귀뿐이겠는가 ?
눈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고철처럼 녹슬고 일그러진 구닥다리 눈을
부드럽고 따뜻한 어린이들의 눈으로 개비해야 할 때다.
     
이순의 나이란,
어린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마음으로
돌아가는 나이이다.
 
"천국은 어린이 마음이 아니면 맛볼 수 없다"는
예수의 가름 침을 묵상해 보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