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목요 장터

(2012년 1월 12일)

 
언제부터인지 원주민들의 삶의 현장에 가면
자연스럽게 그들처럼 살고 싶어집니다.
 
그들과 함께 할 땐,
시계도, 핸드폰도, 라디오나 신문의 뉴스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일부러 세상과 차단하려는 것도 아닌데
저절로 탈도시문명화가 되어 버립니다.
 
시계가 없으니 몇 시인지 알지도 못하고,
해시계에 맞춰 일상을 보냅니다.
가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옆 사람에게 시간을 물어 볼 경우가 있지만
내가 구태여 시계나 핸드폰을 챙기고 다니진 않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항상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분이 있습니다.
내 곁에서 늘 나와 동행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난 철저하게 그 분 한분에게만 초점을 맞추고
모든 사적인 세상일은 염두에 두지 않습니다.
그분이 정하여 주시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과가 됩니다.
하여 가끔 나와 함께 하는 이들이
선교사역 이외의 일에 열중하면 막 짜증이 납니다.
 
나와 그분과 채널을 맞추고 그분과의 긴밀한 관계 속에서
그 분이 사랑하시는 백성들과 함께할 때 가장 마음이 평안합니다.
이는 나와 하나님과의 은밀한 관계에서의 영적사건이므로
내 주위의 사람들은 전혀 눈치 채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위사람들과 함께 일하고, 함께 밥 먹고,
함께 잠자고, 농담도 하고, 일상을 늘 함께 지내므로
그들과 똑 같은 마음으로 생활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생활은 똑 같이 하지만
내 속 사람은 미시오데이(Missio Dei)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산 속 망얀족 마을 들어가는 입구에 도시인들이 와서 장을 서다.

 
이곳에서 나의 미시오데이는 망얀 족들과 함께 이루어집니다.
이 나라에선 내가 지금까지 도시에서 살아온
시간개념, 문화개념, 문명의 개념이 모두 무시되고
철저하게 현장의 삶에 동화되어 현지인으로 살아갑니다.
 
지난날 내가 살아온 과거의 어린 시절이
지금 현재로 다시 재연되는 경우도 있고
현재는 이곳에서 아직 미래로 남아 있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읍내에 나가면 다시 도시문화속의 나로 돌아옵니다.
원주민들과 가까이 하며 하루에도 몇 번씩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갔다가 현재로 돌아오는 일을 반복합니다.
이런 일은 부족민들과 함께할 때만 느낄 수 있는 특별한 체험입니다.
 
이 곳의 사람들은 시간이 필요 없기 때문에 바빠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김선교사가 가끔 불평하듯 말합니다.
필리피노들에게 논농사를 맡기면 하루면 끝내는 일을
망얀 족들에게 맡기면 사나흘은 걸린다고!
 
그건 망얀 족들이 게을러서가 아니고
그들은 현대 도시인들의 시간 개념에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겐 빨리 일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빨리 일해야 하는 것은 도시문명이 만들어 논 굴레입니다.
그래야 돈도 벌고, 자녀 교육도 시키고, 맛있는 것도 먹고,
좋은 집도 사고, 자동차도 살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도시 문명이 만든 굴레이며 멍에입니다.
 
도시사람들은 스스로의 욕심에 의해 스스로 멍에를 메고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죽어라 일을 해야
집이라도 하나 마련하고 자식들을 먹여 살리고 교육 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도시인과 전혀 다른 상황과 다른 삶의 개념으로 사는
이들에겐 그런 멍에가 필요 없습니다.
돈을 벌어 쌓아둘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에게 돈은 신선한 나무열매나 뿌리 열매인데
더운 나라에서 이것들을 많이 거둔들
어찌 그것을 상하지 않게 오래도록 쌓아 둘 수가 있으리오.
그들에겐 매일 일용할 양식만 필요할 뿐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선 일용할 양식만 있으면 됩니다.

망얀족을 기다리는 상인

 
그들은 또한 집을 지을 걱정도 없고, 자녀교육을 시킬 필요도 없습니다.
맛있는 것을 먹으려고 슈퍼에 갈 필요도 없고, 슈퍼도 없습니다.
집이 낡으면 나뭇가지 꺾어다 그 옆에 하나 다시 지으면 되고
자식이 결혼하며 집 옆에 대나무 갈라 한 평짜리 꾸버 하나 뚝딱 지어
살림 차리면 그만입니다.
산속 오솔길에 자동차가 필요할 이유가 없습니다.
농토가 없으니 농사지을 걱정도 없고,
누가 세금 내라 할 사람도 없습니다.
그저 이 산 저산 뿌리고구마나 캐고 열매나 따면 됩니다.
그 일은 매일 할 수 없습니다.
열매가 익을 때 까지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들에게 있어 서두른다고 되는 일이 없습니다.
일을 이루는 때가 있습니다.
 
이들은 크로노스의 시간을 살지 않고 카이로스의 시간을 삽니다.
카이로스의 시간은 얼마든지 줄였다 늘였다 할 수 있습니다.
시간을 카이로스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시간의 노예가 아니라
시간의 주인이 되어 가치와 효과를 창출해 냅니다.
 
하늘나라의 시간 개념은 카이로스입니다.
여기에선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기도 합니다.
 
도시인들은 물가가 비싸 경제난으로 살기가 매우 힘들어
열심히 살아도 자식 하나 나아 기르기 힘들지만
산속 부족인 들은 어렵게 살아도 보통 자식을 열 명씩은 나아 기릅니다.
요즘 도시문명국가에선 자녀들이 모두 도시로 나가 살든가
직장을 잡아 이 고장 저 고장 혹은 이 나라 저 나라 흩어져 살아
일 년에 한두 번 만나기도 힘들어 고독한 노년의 삶을 사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산속인 들은 손자 손녀 외손자들까지
한 마을을 이루어 함께 모여 살므로
어른들은 아이들의 재롱을 보면서 날마다 즐겁고 행복합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자녀는 신의 선물이며 신의 소유입니다.
내가 낳기 싫다고 낳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신이 점지해 주시면 생기는 대로 다 낳습니다.
그리고 모든 양육은 자식의 주인인 자연(정령숭배)에 맡깁니다.
하여 이들은 항상 자녀들이 번성하고 자녀들로 인해 즐겁고 행복합니다.
 
이들을 도시문명화 시키려는 욕구는 도시의 무거운 멍에를 씌워
도시인들처럼 정신없이 바쁘게 살게 하려는
우매한 자선행위가 될 지도 모릅니다. 

망얀족이 도시 장삿꾼들에게 물건을 팔려고 야채를 펴 놓고 있다.

 
선교사 부인이 된 망얀족 로이다 사모가 그 한 예입니다.
그는 산속 부족인으로서 대학까지 나오고
영어를 구사할 줄 아는 엘리트 현대여성으로 변신하였습니다.
그는 지금 선교단체에서 세운 초등학교의 교사로서
교무업무까지 도맡아 일하는 매우 바쁜 일상을 보냅니다.
 
매일 정장을 해야 하고, 일주일에 몇 번씩 서너 시간 차를 타고
교육청에 들려 볼일을 보아야 합니다.
어제는 일거리가 많아 밤새도록 잠도 못자고
교육청에 보고할 자료를 정리 하였습니다.
또한 그녀는 도시인이자 외국인이며 35세나 연령차이가 나는
고령의 남편과 결혼하여 살면서
너무도 서로가 다른 문화와 환경 속에서 자라온 관계로
지독한 문화갈등과 세대차로 인하여 매일 다투기도 합니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해 떨어지면 자고, 해 뜨면 일어나는
평범한 망얀 족의 일상을 살 수 없는 고단한 도시인이 되었습니다.
 
살며시 그녀에게 다가가 물어 봅니다.
산속 생활이 좋으냐? 도시 생활이 좋으냐?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산속 생활이 좋다 합니다.
하여 지금은 망얀 초등학교 아이들 가르쳐야 된다는 명분을 내세워
아예 그녀의 고향인 산속 하윌리 마을 친정부모 옆에서
어린 두 딸을 키우며 살고 
남편 선교사는 로하스 읍내에서 유치원 다니는 큰 딸과 지냅니다.
그녀는 지금 도시인의 멍에를 쓰고 도시생활에도 적응하지 못하고
산속 부족생활도 예전처럼 편안하게 느끼지 못하며
망얀 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도시인들은 그녀가 산속의 미개한 망얀 부족 출신으로서
상당히 출세한 여인이라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전통 망얀 족들의 자유분방한 삶의 입장에서 보면
그녀는 무거운 인생의 멍에를 짊어지고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하윌리 산속 마을에 목요장터가 서는 날이고
내일은 아나플라 마을에 금요장터가 서는 날입니다.
 
누구의 요구에 의해서 장터가 서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도시의 필리피노들이 차로 도시물품을 싣고 산속에 와 풀어 놓으면
산속사람들이 내려와 물물교환을 하든가 돈을 받고 팔기도 합니다.
 
심히 염려가 되는 것은, 이러한 시장거래행위를 하는 사이에
산속 부족인 들이 도시의 문명을 모방하려 한다던가,
도시의 필리피노들이 산속인 들을
문명화시키려는 의도는 없을까 염려가 됩니다.
 
산속인 들이 도시의 문명을 모방하게 되면
저들은 세면블록의 집도 지어야 되고,
대학교도 다녀야 되고, 직장도 잡아야 되고, 차도 사야 될 텐데,
돈도 없는 가난한 자들이 그렇게 되려면
돈을 모으기 위해 도시인들의 하인 노릇을 해야 될 텐데 염려가 됩니다.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백성들을 구원해 내신 하나님은
저들이 도시인들의 노예가 되는 걸 원치 않으실 것입니다.

아버지와 딸이 다정하게 시장 구경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