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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소개] 이덕주 교수의 인물탐구 1권 "신석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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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2년 03월 16일 (금) 23:24:50
최종편집 : 2012년 03월 16일 (금) 23:36:13 [조회수 : 5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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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과 교회를 위한 치열한 고난의 삶,
그 진지한 신앙고백이 담긴 감동의 책”

   

 

신석구, 이덕주 교수의 인물탐구 1권

/이덕주 지음,

/신앙과지성사,

/15,000원

 

 



<간행사>

3 / 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분이며 한국감리교회의 목회자로 민족의 역사와 교회 속에 큰 자취를 남기신 신석구 목사님 평전을 간행하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신석구 목사 기념관’의 건립이 추진되고 있는 가운데 이 평전을 펴내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변방에서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으셨기에 역사가 흐를수록 더욱 향기롭고 모범이 되어주시는 신석구 목사님의 생애를 널리 알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국교회사 연구자로 많은 성과를 쌓고 있는 이덕주 교수의 집필과 신석구 목사 기념관 건립에 주축이 되고 있는 충북연회의 노고에 다시금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신석구 목사님은 일제치하, 해방 그리고 6 / 25전쟁으로 이어지는 한국근현대사의 굴곡 속에서 흔들림 없이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목사님은 신앙으로 민족을 품었으며, 교회와 사회의 경계를 넘어서서 목회와 사회참여를 조화시킨 목회자요 민족 운동가이셨습니다.

3 / 1운동이 일어났을 때 신석구 목사님은 수표교감리교회의 담임목사로 민족의 현실에 침묵하지 않았습니다. 민족대표로 3 / 1운동에 참여한 것은 신앙의 결단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으면서도 “우리나라가 독립이 될 때까지 독립운동을 계속하겠다”라고 단호하게 대답할 수 있었고 기꺼이 옥고를 치르셨습니다. 일제 말기 한국교회가 신사참배 강요에 굴복한 때에도 목사님은 굴복하지 않으셨습니다. 신사가 설치되어 있지 않은 외딴 곳 평안남도 용강군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목회하셨습니다. 일본군의 승리를 비는 예배를 거부하셨고 물론 일장기 게양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해방을 맞이한 것은 감옥에서였습니다.

해방 후에는 북한의 교회 재건 및 민주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하시다가 공산정권과 대립하게 되면서 여러 차례 탄압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주위에서는 북한 탈출을 권면하였으나 목사님은 끝내 거절하셨고 결국 반공비밀결사대를 조직했다는 이유로 10년형을 받고 평양형무소에 수감되었습니다. 옥중에서도 공산당의 회유와 협박에 굴하지 않고 신앙을 지켜 많은 이들을 감동시키고 위로하였습니다. 그러나 한국전쟁 중인 1950년 10월 10일 후퇴하는 공산군에 의해 총살당하심으로 안타깝게 그의 올곧은 십자가의 길을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목사 신석구! 그의 생활은 늘 외롭고 궁핍하였습니다. 곤핍한 생활 중에 번민하던 차에 “내가 네게 좋은 옷을 주지 아니하고 내가 지던 십자가를 주었다”는 음성을 듣고 감격하여 울었습니다. 이후 신석구 목사님은 무수한 가난과 고독의 아픔을 십자가로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그의 교훈은 입술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온 몸으로 온 삶으로 실천하는 것이었으며 자신의 잘못을 주저함 없이 간증하며 눈물로 설교하던 목회자였습니다. 목사님은 일생 동안 무명옷으로 된 한복만을 입으시며 검소하게 사셨고 청교도적인 청렴함과 결백함으로 목회하셨습니다. 동양고전에 대한 풍부한 지식으로 기독교를 해석하여 뜻 깊은 한시를 많이 남겼으며, 한편 자신의 삶을 한시를 지어 노래하며 유유자적한 삶을 지향하기도 하셨습니다.

신 목사님의 생애를 돌아보면서 너무나 큰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오늘날 혼란한 사회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오히려 지탄의 대상이 된 교회의 모습을 볼 때 교회를 지도한다는 우리들로서 너무나 송구하고 면목이 없습니다. 그러나 늦게나마 이와 같이 그분의 전기를 펴내고 그 교훈을 되새기고자 함은 이제 다시 시작하기 위함입니다. 신 목사님의 삶을 거울삼아 새롭게 걸음을 내딛고자 함입니다. 이 책이 널리 읽히고 많은 사람들이 의로움에 목마르게 되고 신 목사님의 올곧은 길을 따라나서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2012년 2월
서 울 연 회 김종훈 감독
서울남연회 김인환 감독
중 부 연 회 가흥순 감독
경 기 연 회 정판수 감독
(직무대행)
중 앙 연 회 전용재 감독
동 부 연 회 권오현 감독
충 북 연 회 문성대 감독
남 부 연 회 김용우 감독
충 청 연 회 강일남 감독
삼 남 연 회 금성대 감독


<차례>

머리글 / 17

1장 고향, 아버지의 집을 떠나다 / 25
1. 고백록 같은 자서전 / 26
2. 부모님의 ‘효’ 이야기 / 29
3. 갯골의 어린 시절 / 34
4. 젊은 날의 방황과 결혼 / 39
5. 청년의 꿈과 좌절 / 45
6. 고향을 떠나다 / 47


2장 나를 찾는 것이 나라를 구하는 길 / 53
1. 친구의 전도 / 54
2. 1907년 교회와 민족 상황 / 59
3. 심중전 / 62
4. 개종 직후 받은 시련 / 73
5. 정춘수와 만남 / 76
6. 의사인가, 전도사인가? / 81

3장 전도인 되어 가기 / 85
1. 개성북부교회 권사 / 86
2. 신앙의 번민과 중생 체험 / 90
3. 전도사 면접에 떨어지고 받은 은혜 / 97
4. 홍천읍교회 목회 / 104
5. 시작하였으면 끝까지 할 것 / 108
6. 파송 목회 / 113
7. 신학 수업과 수표교교회 부임 / 118

4장 3.1운동 / 125
1. 3 / 1운동 준비와 참여 / 126
2. 태화관 독립선언식 / 135
3. 재판장 앞에서 / 141
4. 중형을 언도받고 / 144
5. 감옥 은혜 / 152
6. 감옥 목회 / 158
7. 감옥 훈련 / 164
8. 감옥 환상과 석방 / 169

5장 파송의 명령을 따라 / 177
1. 원산 목회 / 178
2. 1년에 한 번씩 이사 / 188
3. 경찰의 감시를 받으며 / 195
4. 남 / 북감리교회 합동과 이안지방 감리사 / 202
5. 못난이 목회철학 / 214
6. 천안 목회 / 220
7. 오직 사랑으로 / 225

6장 십자가를 지고 / 235
1. 십자가 은총 / 236
2. 신사참배 거부 / 241
3. 마지막 감리사 보고 / 247
4. 진남포 신유리구역 / 251
5. 혁신교단의 반역과 친구의 변절 / 254
6. 은퇴하지 못한 은퇴 목사 / 260
7. 세상 나라와 하나님 나라 사이에서 / 269

7장 마지막 투쟁 / 281
1. 8 / 15해방과 서부연회 수난 / 282
2. 3 / 1절 기념 방송 사건 / 286
3. 광량만교회 부임 / 295
4. 서부연회 사건 / 301
5. 맏손자의 결혼 / 307
6. 마지막 목회 / 311
7. 유언 같은 가르침 / 316

8장 무덤이 없는 사람 / 325
1. 진남포 4 / 19사건 / 326
2. 남기고 간 조각 글 / 329
3. 마지막 재판 / 340
4. 옥중 사랑 / 344
5. 6 / 25전쟁 그리고 마지막 면회 / 347
6. 그의 죽음, 십자가 사랑 / 352
7. 순교, 그 이후 / 356

신석구 연보 / 367
주 / 375


<머리글>

신석구 목사님에 대한 전기를 처음 썼던 11년 전(2000년)처럼, 이번에도 원고를 새롭게 정리하고 난 후 찾아온 느낌은 간단하면서도 강렬했다.

“그것은 감동이었다. 그리고 아픔이었다. 쓰고 싶은 것을 쓰게 된 감동이었고 쓴 글에 비추어 제대로 살지 못하고 있는 나에게 견디기 힘든 채찍이었다.”

자료를 통해, 그리고 전기 작가로서 신석구 목사님과의 만남은 말 그대로 감동이자 채찍이었다. 신석구 목사님은 내가 한국 교회사를 공부한 30년 세월 중에 만난 위대한 한국 기독교 위인 중에도 상위 3위 안에 드는 분이다. 충청도 가난한 선비 가정에서 출생해서 6 / 25전쟁 중 평양형무소에서 순교, 순국하기까지 교회와 민족을 향하여 ‘올곧은’ 신앙과 지조로 일관했던 신석구 목사님의 75년 삶은 변절과 훼절, 오류와 왜곡의 사례들이 적지 않았던 한국 기독교 125년 역사에서 밤하늘의 별빛처럼 찬연하였다. 그런 목사님이 순교 직전 직접 쓰신 자서전을 바탕으로 해서 그분의 일생을 재구성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는 것 하나로도 내게는 영광이요, 또한 감격이었다. 그래서 글을 쓰다가 밀려오는 감동을 억제하지 못하고 쓰기를 중단하고 허공을 바라보며 감격의 한숨을 내쉬기도 여러 번 하였다. 그것은 그분께 “이처럼 멋있고 훌륭하신 분을 한국 교회에 세워 주셨음을, 그리고 그분에 대한 글을 내가 쓸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심에 감사합니다” 하는 기도이기도 했다.

그러나 감동은 곧 아픔으로 변했다. 신석구 목사님의 ‘올곧은’ 삶과 신앙은 현실과 타협하고 진리 앞에서 훼절하기를 별로 두려워하지 않고 안일과 쾌락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오늘 나에게 채찍이고 질책이었다. 같은 고향(충북), 같은 교단(감리교), 같은 신학교(감리교신학대학교) 출신으로 그분과 같은 감리교 목사의 길을 걷고 있는 내게 신석구 목사님은 변칙을 용납하지 않는 ‘엄한 훈장’의 손에 들린 회초리처럼 날카롭고 예리했다. 더욱이 목사님께서 1910년대 신학을 공부하실 때 머물렀던 신학교 옛 기숙사 건물에 연구실을 두고 있는 나로서는 저녁 늦은 시각 홀로 연구실(卍甫齋)에 남아 글을 쓰다 보면 낡은 벽돌 틈새에 묻어 있던 그분의 기도소리가 새어나오는 듯 두렵기도 하고, 때로는 내 곁에 다가와 “이보시게 이 목사, 그 정도밖에 못하겠나?” 엄한 훈계로 내 게으름을 깨우치기도 했다. 그것은 바로 오토(R. Otto)가 말했던 가장 원초적인 종교 경험, ‘신비로운 두려움’(tremendum mysterium)이었다. 두렵지만 멀리할 수 없는 그런 묘한 경험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처음엔 두려움이고 아픔이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부드러운 사랑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어렴풋이나마 고통 가운데서 평안을, 어둠 속에서 빛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했다! 그것은 바로 신석구 목사님이 생애 말기에 터득했던 신앙의 최고경지, 가난을 은총으로, 고난을 축복으로 받아들였던 ‘십자가 은총’(gratia crucis), 그것이었다. 신석구 목사님을 통해 이런 십자가 은총의 꼬투리나마 맛보게 된 것이 그분 전기를 쓰면서, 또 쓰고 난 후 내가 받은 최고의 축복이었다.

그리하여 전기를 쓰고 난 후 신석구 목사님을 감히 내 멘토(mentor)로 모시기로 했다. 지금 나에겐 멘토가 두 분 있는데 목사로서의 멘토는 신석구 목사님이고 신학교 교수로서 멘토는 정경옥 교수님이다. 그런데 두 분 멘토의 특징은 모두 ‘돌아가신’ 분들이라는 점이다. 나도 한때 살아계신 선배 중에서 멘토를 모시려 했던 적도 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내가 ‘아, 저 분을 내 멘토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접근할 할 즈음이면 그분에 대한 실망스런 소문과 소식이 들려왔다. 옛 분들의 “사람은 관 뚜껑을 덮어봐야 안다”는 말이 맞았다. 그래서 생각을 바꾸어 ‘더 이상 실수를 할 수 없는, 평가가 이미 끝난’ 작고인물 중에서 멘토를 모시기로 하고 신석구 목사님을 내 멘토 1호로 삼았다(그분이 허락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그랬더니 생존인물 중에서 멘토를 구한 것보다 훨씬 편리하고 효과적이었다. 우선 생존한 멘토를 만나려면 미리 약속을 하고 교통비를 들여 찾아가야 하는데 빈손으로 갈 수 없기에 경제적 지출도 감수해야 한다. 그런데 작고 인물을 멘토로 하니까 언제, 어디서든 만나고 싶으면 만날 수 있어 좋았다. 육신으로 내가 그분께 가는 것이 아니라 영으로 그분이 내게 오실 수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더욱이 얼굴과 몸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혼으로 만나는 것이기에 대화의 깊이도 더했다.

두 세대 앞서 사셨던 신석구 목사님이 오늘 감리교 목사로 살아가고 있는 나에게 해주시는 멘토링(mentoring)은 세 가지였다.

첫째, 감리교 목회자로서 정체성(methodist identity)을 회복하고 견지하라는 것이다. 감리교 목회자라면 모름지기 감리교 창시자 웨슬리의 신앙과 신학 전통에 충실해야 한다. 옥스퍼드대학 시절의 신성구락부 경험에서 시작하여 실패로 끝난 아메리카 인디언 선교, 그리고 그의 신앙과 목회의 전환점이 된 올더스게이트 체험, 그 이후 “세계를 나의 교구로” 삼아 목회와 전도에 헌신했던 웨슬리의 삶은 전통 유교 선비 집안에서 출생하여 윤리 실천을 최고 가치로 여기며 살다가 사업 실패로 고향을 떠나 고랑포에서 개종한 후 목회자가 되어 감리교 특유의 ‘파송 목회’에 순종으로 일관했던 신석구 목사님의 삶으로 재현되었다. 그리고 웨슬리 신학의 핵심인 회개와 중생, 성화와 완전은 순교로 끝난 마지막 순간까지 신석구 목사님의 삶과 목회의 기본원리로 작용하였다. 그런 면에서 신석구 목사님은 참으로 ‘한국의 웨슬리안’이었고 그를 멘토로 삼고 있는 나 또한 그러해야 할 것 아닌가?

둘째, 나라와 민족을 위해 봉사하는 교회(nationalistic church)의 전통을 회복하고 견지하라는 것이다. 신석구 목사님은 개인 구원이 사회 구원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웨슬리 신학전통에 충실했다. 그는 한말과 일제시대, 우리민족이 외세(일제)의 침략과 지배로 인해 시련을 겪던 시기에 목회자로 살았다. 그는 위기에 처한 나라와 민족 현실을 외면하고 “나만 구원받아 죽어서 천국 가면 된다”는 식의 이기적이고 현실 도피적인 신앙을 경계하였다. 개종 당시부터 그에게 기독교 복음은 ‘나라를 구하는 길’이었다. 그는 참 믿음이 나라와 민족을 구할 수 있다는 구국신앙에서 3 / 1운동 때 민족 대표로 참여하였고 이후 일제 말기 배반의 시절에도 훼절하지 않고 신앙과 민족을 향한 충성과 지조를 꺾지 않았다. 신석구 목사님은 8 / 15해방으로 당신 세대의 시대적 과제였던 ‘민족의 자주독립’을 보기는 했지만 곧바로 이어진 민족 분단의 비극적 현실을 목격하였고 그 분단의 필연적 결과물인 전쟁 중에 순교로 생을 마쳤다. 분단의 희생제물이 된 신석구 목사님은 전쟁 후 세대인 내게 ‘민족의 평화통일’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넘겨주었다. 그분을 멘토로 삼고 있는 내가 작으나마 학교 안에 한반도평화통일신학연구소를 차리고 ‘통일이후 한반도 신학’을 모색하는 작업을 추진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셋째, 위기에 처한 오늘 한국 교회를 살리기 위해 목회자 영성(pastoral spirituality)을 회복하고 견지하라는 것이다. 자타가 공인하듯, 오늘 한국 교회는 125년 선교 역사에서 최대 위기에 처했다. 한말이나 일제시대, 전쟁 시기에도 위기는 없지 않았으나 그때는 위기 요인이 외부로부터 온 것이어서 교인들이 신앙으로 단결함으로 교회 발전과 성숙의 계기로 삼을 수 있었지만 오늘 한국 교회 위기는 내부 타락과 부패로 인한 것이기에 그 심각함이 더하다. 무엇보다 교회 지도자, 특히 목회자들의 윤리적 타락과 영적 권위 상실은 한국 교회 위기상황을 몰고 온 직접적인 요인이 되었다. 그런 면에서 목회자의 영적 권위 회복은 더 이상 미루어서는 안 될 시대적 과제가 되었다. 남 탓하기 전에 나부터 해야 한다. 영적 권위 회복은 영성 회복으로 이루어짐은 당연하다. 여기서 신석구 목사님의 영성이 오늘 나에게 과제와 희망으로 다가온다. 신석구 목사님은 개성에서 목회를 시작하여 평양형무소에서 생을 마치기까지 위기와 고뇌의 순간마다 들려오는 ‘하늘 음성’(vox divina)으로 위기를 극복하고 지혜와 용기를 얻어 한평생 ‘올곧은’ 목회자의 길을 걸을 수 있었다. 온갖 잡소리로 혼탁한 요즘 세상에 정작 내가 들어야 할 소리가 이런 ‘하늘 음성’이 아닐까? 신석구 목사님과 같은 경지의 영성에 미치지 못한 처지라 그런 ‘하늘 음성’을 직접 듣지 못하기에 목사님의 증언을 통해서라도 그런 음성을 들으려는 심정으로 이 책을 썼다.

결과적으로 이 책은 나의 멘토용 교재(mentoring text)로 쓴 것이라 할 수 있다.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멘토를 찾아가 상담을 받는 심정으로 이 책을 펼쳐 읽겠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제1 독자는 바로 나이다. 그래서 가급적 그분이 직접 기록하신 자서전 내용에 손을 대지 않고 요즘 말로 옮기는 방식으로 글을 썼다. 나의 해석이나 평가를 절제하고 그분의 말씀과 음성을 직접 듣고자 노력했다. 이런 나의 노력과 의지가 얼마나 성공했는지는 전적으로 독자들의 평가에 달렸다. 다만 몇 명이라도 나와 같은 고민을 안고 이 책을 읽다가 교훈과 답을 얻는 목회자들이 나온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다.

이런 배경에서 쓴 글을 선뜻 책으로 내준 신앙과지성사의 최병천 장로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처음 썼던 난해한 한문투 원고를 읽기 쉬운 한글 문장으로 다듬어 준 제자 홍민기 목사(일본 칸사이학원대학 대학원 박사 과정)에게도 감사할 뿐이다. 또한 11년 전, 신석구 목사님에 대한 책을 처음 쓸 때도 그러했지만 이번에도 귀중한 사진자료를 선뜻 제공하여 책의 무게를 더하고 귀중한 서문까지 써 주신 신석구 목사님의 장손, 대구제일교회의 신성균 장로님께 다시 한 번 감사의 뜻을 표한다. 15년 전 나를 찾아와 할아버지 전기를 써달라고 부탁했던 신성균 장로님이 아니었으면 나는 지금의 소중한 멘토 신석구 목사님을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의 출판을 계기로 기독교대한감리회 충북연회에서 신석구 목사 기념관 건립을 비롯한 기념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겠다는 소식을 접하였는데, 참으로 고맙고 감사한 일이다. 신석구 목사님의 고향인 청주에 본부를 두고 있는 충북연회는 7년 전부터 매년 3월 1일 청주 삼일공원에서 3 / 1절 기념예배를 드리면서 신석구 목사님을 비롯한 청주 출신 감리교 독립운동가들의 업적을 기리고 있는데 이런 충북연회의 노력에 이 책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2011년 10월 감신대 만보재에서
이덕주


<신석구 연보>

1875년 5월 3일(음) 忠北 淸州郡 米院面 介洞(현 충북 청원군 미원면 금관리)에서 아버지 신재기(申在綺)와 어머니 청해 이씨(靑海 李氏) 사이에서 2남 3녀 중 차남으로 출생
평산 신씨(平山申氏) 시조 신숭겸(申崇謙)의 30세손. 중시조 사간공파(思簡公派) 15세손. 자(字)는 윤재(允哉). 호(號)는 은재(殷哉), 죽촌(竹邨), 춘정(春汀)
1881년(7세) 어머니(청해 이씨) 별세
1882년(8세) 한문 수학
1884년(10세) 할아버지(申光紹) 별세
1886년(12세) 양부였던 큰아버지(申在周) 별세
1887년(13세) 무릎 꿇고 《소학》 공부
1889년(15세) 아버지(申在綺) 별세. 한 달 후에 할머니(全州 崔氏) 별세
1892년(18세) 인근 시골로 이주하여 유부녀와 동거생활
1893년(19세) 율곡의 《격몽요결》을 읽고 불륜 생활 청산
사숙(私塾)을 차리고 훈장으로 아이들을 가르침
1897년(23세) 조치원 거주 전주 이씨(全州李氏) 치헌(致獻)의 딸과 결혼
1899년(25세) 군수 집에 들어가 아들을 가르치다가 물질 유혹으로 10개월 만에 사직
형(申錫奎) 별세
1900년(26세) 농업에 종사
1901년(27세) 친구 김진우와 전당포 사업 시작
1905년(31세) 1월 29일 맏아들(申泰華) 출생
1906년(32세) 전당포 사업 망하고 친구 대신 3개월 옥살이
병보석으로 풀려난 후 거짓 사망 신고를 내고 고향을 떠남
1907년(33세) 서울에 도착하여 친구(김규홍) 소개로 윤자정 도사의 자제들을 가르치게 됨
친구 김진우를 따라 장단 고랑포에 약국을 차림
친구 김진우에게 전도를 받음
6개월 동안 ‘심중전’을 거쳐 개종을 결심하고 7월 14일(주일)에 고랑포교회에 출석
남감리회 순행전도사 정춘수의 안내로 개성으로 이주. 선교사 리드(이위만) 어학교사
7월 6일 맏딸(申泰惠) 출생
1908년(34세) 3월 29일 개성남부교회에서 왓슨(왕영덕) 선교사에게 세례받음
4월 감리교협성신학교 입학
7월 5일 개성남부교회 주일학교 교사
12월 6일 개성남부교회 주일학교 교장
1909년(35세) 2월 1일 홍종숙의 추천으로 개성북부교회에서 전도 사역 시작
5월 19일 개성북부교회 권사로 임명됨
7월 29일 화장사 산기도 중 중생을 체험
1910년(36세) 3월 20일 둘째아들(申泰獻) 출생
9월 남감리회 송도지방회 전도사 면접 때 ‘부채 60원 고백’하고 낙방
10월 11일 홍천구역으로 파송
홍천으로 부임하던 중 서울에서 백만명구령 전도회 참석
1911년(37세) 인제교회 부흥회 인도
9월 30일 〈그리스도회보〉에 “시작하엿으면 끗까지 볼 것” 기고
1912년(38세) 5월 15일 번역서 《빌립보서 주석》(동양서원) 간행
7월 15일 〈그리스도회보〉에 “신쟈의 거듭남” 기고
9월 12일 남감리회 매년회에서 전도사 직첩을 받음
1914년(40세) 8월 24일 가평구역으로 파송
1915년(41세) 10월 4일 춘천지방 순행 전도사로 파송
1917년(43세) 6월 13일 〈기독신보〉에 한시 “질경이와 진달래의 문답” 발표
9월 24일 남감리회 매년회에서 집사 목사 안수
11월 협성신학교 기관지 〈신학세계〉에 논문 “信으로 得救하는 道理” 발표
1918년(44세) 11월 4일 남감리회 한국연회에서 서울 수표표교회로 파송
1919년(45세) 2월 20일경 오화영 목사에게 독립운동 참가 요청을 받고 기도 시작
2월 27일 새벽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서명에 동참
3월 1일 태화관에서 선언식 참여하고 경무총감부에 연행됨
3월 14일 기소되면서 서대문형무소로 이감
5월 5일 경성지방법원 예심 신문
8월 1일 경성지방법원 예심 종결
8월 26일 고등법원 특별형사부 예심 신문
1920년(46세) 3월 22일 고등법원 특별형사부 예심 종결
7월 12일 경성지방법원 민족 대표 ‘48인’에 대한 공판 시작
8월 9일 경성지방법원 공소불수리 결정
9월 20일 복심법원 항소심 공판 시작
9월 22일 복심법원에서 신석구 신문
10월 12일 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 구형
10월 30일 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 선고. 상소 포기
형 확정 후 마포 공덕동 경성형무소로 이감
1921년(47세) 11월 4일 만기 출옥
11월 15일 원산 남촌동 상리교회(후의 원산중앙교회)로 파송
1922년(48세) 1월 31일 자교교회에서 “吾人의 最急務”란 제목으로 설교
2월 3일 종교교회 특별강연회에서 “時代의 참 要求”란 제목으로 설교
3월 감리교협성신학교 졸업(8회)
5월 〈신학세계〉에 논문 “우리의 罪” 발표
7월 《宗敎界 著名士 講演集》에 설교 “기독교와 사명” 수록
11월 원산 산제동에 목사 사택 건축
1924년(50세) 9월 1일 남감리회 연회에서 보아스 감독에게 장로 목사 안수 받음
맏아들(申泰華) 결혼
1925년(51세) 9월 8일 고성구역으로 파송
1926년(52세) 5월 10일 맏손자(申聖均) 출생
7월 28일 연희전문학교에서 개최된 장 / 감 연합 목사수양회 강사로 참여
8월 25일 〈기독신보〉에 수양회 발표 논문 “교역자의 필요한 것” 게재
9월 6일 춘천읍교회로 파송
10월 20~26일 서울 승동교회 부흥회 인도
1927년(53세) 7월 서울 중앙전도관 전도 집회 인도
8월 10일 〈기독신보〉에 논문 “하나님과 동사함” 발표
9월 13일 가평구역으로 파송
9월 11일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YMCA)에서 “생의 기초”란 제목으로 주일 설교
1928년(54세) 2월 14일 맏손녀(申玉均) 출생
9월 9일 서울지방 부흥 및 보성(保成)사업 주관자로 파송
9월 30일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에서 “그리스도 안에 자유”란 제목으로 강연
1929년(55세) 9월 9일 철원교회(동구역) 파송
아들 내외는 서울에 남고 손자만 데리고 철원에 부임
태화는 개성으로 친구 사진관 도와주러 감
12월 10일 총독부 경무국에서 정치범 카드 발급
1930년(56세) 4월 8일 둘째손자(申榮均) 출생
황해도 한포구역 파송
연회 성서와 종교서적위원회 위원장
김화와 평강 부흥회 인도
12월 3일 남감리회 목사 대표로 기독교조선감리회 창립총회 참석
1931년(57세) 6월 19일 강원도 이천(伊川)교회 파송
이안지방 감리사 겸임
1932년(58세) 1월 20일 〈기독신보〉에 수필 “送舊迎新의 感” 발표
8월 17일 〈기독신보〉에 “「예수와 자연」에 대한 반문”을 발표하여 신학 논쟁
1933년(59세) 1월 3일 둘째손녀(申貞均) 출생, 1년 만에 사망
10월 24~27일 이천읍교회에서 이안지방 교역자 수양회 개최
12월 7일 오후 8시 막내아들(申泰獻) 결핵으로 사망
1934년(60세) 2월 16~20일 안협읍교회 부흥 사경회 인도
2월 21~25일 안협구역 하수회리교회 부흥 사경회 인도
5월 21일 낙양구역 노전동교회 봉헌식 집례
11월 20~22일 낙양구역 지하리교회에서 이안지방회 개최
11월 21~30일 이안지방 선교 50주년 기념 부흥 사경회 인도
12월 14~20일 가여주교회 창립 50주년 기념 전도대회 인도
12월 29일 셋째손자(申大均) 출생
1935년(61세) 3월 6일 〈기독신보〉에 수필 “大愚主義者를 要求” 발표
한포교회에서 개최된 개성북지방 사경회 인도
5월 1일 연회에서 천안교회 파송. 천안지방 감리사 겸임
11월 6일 〈기독신보〉에 논문 “설교의 중요성” 발표
1936년(62세) 4월 11~13일 서울 죽첨정 연합감리사회 참석
6월 21일 천안읍교회에서 ‘신석구 감리사 성역 30주년 기념식’ 거행
11월 30일~12월 2일 감리교신학교 수양회 인도
1937년(63세) 3월 〈신학세계〉에 수필 “十字架에 대한 명상” 발표
5월 2일 천안 지역 감리회 성결교 구세군 연합 야외예배 주최
1938년(64세) 3월 10일 천안주재 선교사 베어(배의례) 뇌암으로 별세
7월 신사참배 반대로 천안경찰서 구류(2개월), 등창으로 석방
맏아들(申泰華)도 ‘비행기 추락 사건’ 보도 사건으로 경찰에 연행되어 조사받음
9월 4일 천안읍교회 청년회 고문으로 추대
10월 1일 총리원에서 ‘20년 이상 시무 교역자’로 선정되어 표창
11월 24~25일 서울 죽첨정 연합감리사회 참석
1939년(65세) 2월 28일~3월 8일 천안지방 사경회 개최
3월 8일 천안읍교회에서 ‘채핀 부인 성역 25주년 기념식’ 집례
3월 8일 천안지방회 ‘신석구 감리사 사은회’ 개최
3월 9일 베어 선교사 1주기 추도식 집례
3월 9~10일 천안지방회 김종우 감독 참석 치사
5월 1일 〈조선감리회보〉에 수필 “하나이 되자” 발표
5월 10일 진남포지방 신유리교회로 파송
1940년(66세) 4월 8~11일 진남포중앙교회에서 진남포지방회 개최, 정춘수 참석
5월 조선예수교서회 발행 《희년기념설교집》에 “奉仕와 犧牲” 수록
1941년(67세) 3월 10일 ‘혁신교단’ 창립과 함께 ‘정년 은퇴식’ 거행
은퇴 후에도 신유리교회에 ‘대리 교역자’로 파송
12월 하와이 공격 때 예비 검속됨
1943년(69세) 양주삼 / 홍현설 / 김광우 / 문창모 / 이윤영 / 전희철 등의 ‘반 혁신교단’ 운동에 동참
1944년(70세) 3월 정춘수 감독이 진남포에 내려와 교회 통폐합 조치 발표
4월 일본기독교조선교단에서 목사직 면직 통보
신유리교회 교인들이 교단 명령에 불복하자 유사리교회로 임시 파송
해주 남본정교회 부흥집회 인도
정춘수 목사를 방문하고 설득했으나 실패
1945년(71세) 5월 전승 기원 예배 및 일장기 게양 지시를 거부하고 용강경찰서에 구금
8월 16일 용강경찰서에서 해방을 맞아 석방됨
9월 유사리교회에 복귀
1946년(72세) 3월 1일 평양중앙방송 3 / 1절 기념 방송 사건으로 정치보위부에 연행됨
10월 평양중앙교회에서 재건된 서부연회에서 광량만교회로 파송
서부연회 인사들과 기독교민주당 창당 작업에 참여
12월 평양 성화신학교 학생 부흥회 인도
맏아들(申泰華)이 진남포에 도정공장 경영
1947년(73세) 2월 15일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감리교의 기독교민주당과 장로교의 기독교자유당 인사들이 회합하여 기독교자유당 창당 결의
2월 북조선인민위원회 고위층에 공산당 정책을 비판하는 〈감상문〉 제출
3월 1일 진남포 도립극장에서 3.1절 기념 강연을 하고 정치보위부에 연행됨
6월 기독교자유당 사건으로 투옥된 서부연회장 송정근 목사와 이피득 윤창덕 목사 석방을 위해 현병찬 목사와 함께 소련군 사령부 항의 방문
서부연회장으로 회무 처리
연회 직후 정치보위부에 연행됨
1948년(74세) 5월 20일 맏손자(申聖均)가 조윤승 목사의 딸(趙明淑)과 결혼
6월 서부연회에서 문애리교회로 파송
1949년(75세) 4월 19일 ‘진남포 4 / 19사건’ 주모자로 문애리교회 사택에서 연행됨
평남재판소(재판장:허정숙)에서 사형 선고
최고재판소(재판장:김두봉)에서 10년 징역 선고
형 확정 후 평양 인민교화소에서 복역
7월 10일 증손녀(申鉉福) 출생
1950년(76세) 6월 25일 6.25전쟁 발발
7월 진남포상공학교 재학 중이던 둘째손자(申榮均)가 공산당에게 살해됨
9월 초순 가족들이 평양 인민교화소에서 마지막 면회
9월 26일 평양 인민교화소에서 마지막 ‘차입 통보’ 엽서 배달
10월 10일경 평양 인민교화소에서 살해된 것으로 추정
10월 19일 평양 수복 후 인민교화소에서 시체를 확인하려 했으나 실패
12월 4일 부인만 남고 가족 월남
1963년 3월 1일 대한민국 정부 건국공로훈장(복장) 추서
1968년 7월 9일 국무회의에서 신석구 목사 국립묘지 의관장 의결
9월 18일 동작동 국립묘기 애국선열 묘역에서 의관장 거행
1978년 3월 1일 감리교신학대학교 본관에 ‘3 / 1운동 민족 대표’ 5인 흉상 제막
1980년 8월 15일 청주시 삼일공원에 ‘청주 출신 민족 대표’ 6인 동상 제막
1985년 4월 5일 기독교대한감리회 100주년 기념식에서 공로 표창
1987년 1월 〈기독교대한감리회 원로목사회보〉 ‘신석구 특집’ 발행
1988년 3월 신석구 목사 유품(인장, 친필 자서전, 유묵, 번역서, 정치범 카드, 인민위원회 감상문, 인민교화소 차입 통지 엽서 등)을 독립기념관에 기증 전시
3월 1일 김재황 지음 《거성 은재 신석구 목사 일대기》(대구제일교회) 발행
1989년 3월 1일 일본어판 《巨星 殷哉 申錫九 牧師 一代記》(木村勉 監修, 橫手聖書學會) 발행
1990년 2월 10일 《민족 대표 삼십삼인의 일인 신석구 목사 자서전(친필)》(한국감리교회사학회) 발행
1996년 3월 1일 국가보훈처 / 문화공보부 / 광복회 공동 “이달의 독립운동가” 선정 발표. 독립기념관에서 특별전시회
1999년 6월 25일 김요나 지음 《순교자 신석구 목사》(대한예수교장로회순교자기념사업부) 발행


<앞날개>
�신석구(申錫九, 1875~1950)
3 / 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 충북 청주 출생. 호는 은재(殷哉). 1907년 7월 개성 남부감리교회에서 미국 선교사 왕영덕에게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되었으며, 서울의 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감리교 목사가 되었다. 서울 / 개성 / 춘천 / 원산 / 남포 등지에서 목회활동을 하면서 신앙을 통한 민중계몽에 힘썼다. 1919년 민족대표로 3 / 1독립선언서에 서명했다. 일경에 구금되어 2년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는데, 재판과정에서 조선독립에 대한 열렬한 의지를 표명했다. 1930년대 중반 일제의 신사참배에 반대하다가 천안에서 검거 / 투옥되었다. 병보석으로 석방된 뒤에는 신사가 없는 평안남도 용강군 신유리교회에서 시무했다. 1945년 2월 일제의 태평양전쟁에서의 승리를 기원하는 ‘전승기원예배’를 거부하여 용강경찰서에 3개월간 구금되었다. 해방 후에는 북한정권에 반대하여 반공운동을 전개했는데, 3 / 1절 기념방송사건과 기독교민주당 비밀결사사건 등으로 구금되었다. 1949년 남포에서 반공비밀결사의 고문으로 추대되었다는 이유로 구속되어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1950년 11월 평양 교외 비류강 강변에서 총살당했다. 1963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이덕주(李德周)
감리교신학대학교 및 동 대학원 졸업(신학박사). 감리교 목사로 서울 신암교회와 광서교회에서 목회하였고 기독교문사 편찬실장을 역임했다. 현재 감리교신학대학교 교수로 한국교회사와 아시아교회사 강의를 담당하고 있으며, 감신대 부설 한반도평화통일신학연구소 소장으로 동료 교수들과 함께 ‘통일 이후 한반도 신학’을 모색하고 있다.
지금까지 쓴 책으로는 한국 초대교회사 관련 저술로 〈초기 한국기독교사 연구〉, 〈한국 토착교회 형성사 연구〉,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개종 이야기〉,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고백〉, 〈신석구 연구〉, 〈사랑의 순교자 주기철 목사 연구〉, 〈한국교회 처음 이야기〉, 〈한국교회 처음 여성들〉 등이 있으며, 통사 성격의 〈쉽게 쓴 한국교회 이야기〉, 한국교회사 유적 답사기를 정리한 〈눈물의 섬 강화 이야기〉, 〈개화와 선교 요람 정동 이야기〉, 〈충청도 선비들의 믿음 이야기〉, 〈남도 영성과 광주 선교 이야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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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과노트 (119.50.161.157)
2012-04-13 14:19:16
감사합니다.
필독서 하나 늘었습니다.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신석구 목사님 일대기를 통해 그의 정신과 신앙을 전수 받는 시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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