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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소개] 목회자를 위한 <설교자노트> 2012년 3·4월호
정연복  |  pkom545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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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2년 02월 26일 (일) 22:29:40
최종편집 : 2012년 02월 27일 (월) 21:02:03 [조회수 :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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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소개> 목회자를 위한 <설교자노트> 2012년 3·4월호  
 
                                                                           정연복(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저는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으로 일하면서 1997년부터 격월로 나오는 <설교자노트>라는 책을 번역해 왔습니다.

지금까지 95권이 나온 <설교자노트>는 '교회력에 맞춘' 설교 본문에 대한 성서 주석, 그리고 그 본문에 따른 미국의 실력 있는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의 최신의 설교를 번역하고, 아울러 설교 내용에 적합한 기도문과 예화 자료를 풍부하게 제공하여 목회자들의 설교 준비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책입니다. 특히 <설교자노트>에 실린 설교들은 설교자들에게 성서에 충실하면서도 독창적인 설교 아이디어를 제공합니다.

그런데 이 <설교자노트>는 시중 서점에서는 팔지 않고 신청하시는 목회자들에게 직접 우송합니다. '영성적이며 공동체적이며 생태학적인 신앙 공동체를 위한 자료'인 <설교자노트>를 구입하기 원하는 분들은 한국기독교연구소(전화: 031-929-5731)로 연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설교자노트>는 격월로 나오며 두 달치 분량의 설교 자료를 담고 있는데, 2012년 3·4월호 중 4월 넷째 주 설교 자료를 참고로 첨부합니다.


설교 제목: 둔바의 숫자, 하나님의 숫자 

* 성경 본문: 요한일서 3:1-7
* 성경 주석

요한1서 3장은 채택해야 할 행동들에 관해 서간의 청중에게 권고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 권고들 중의 첫째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완전한 무한함을 주목하라는 단순한 명령이다. "사랑"(love)이라는 명사는 신약성경을 통틀어 매우 일반적인데, 특히 겨우 다섯 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서간인 요한1서에서 14번이나 등장한다. 그러나 이 매우 일반적인 단어를 사용하면서도, 저자는 또한 이 사랑을 묘사하기 위해 (신약성경에서 여기 말고는 여섯 번만 더 나오는) 훨씬 더 드문 단어인 potaphn을 사용한다. 요한1서 3장에서 "사랑"이라는 단어의 반복적인 사용은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사랑의 거대한 크기를 넌지시 암시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저자가 단언하게 하는 것은 바로 이 엄청난 사랑이다. 특히, 여기에서는 "그 하나님의 자녀들"(the children of God)보다는 "하나님의 자녀들"(children of God)이 사용된다. 이것은 "우리"(the "we")가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는 칭호에 속하는 유일한 집단이 아님을 저자가 주장하려 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같은 맥락에서, 저자는 그의 청중을 "자녀들"(2:14, 18)과 "어린 자녀들"(2:1, 12, 28; 3:7, 18; 4:4; 5:21)이라고 자주 부르는 반면, "아들"(Son)이라는 용어는 예수에게만 사용한다(1:3, 7; 3:23; 4:15 등).

예수에 관한 언급들은 서간을 통틀어 일반적이지만, 1절 끝에서 "그"(him)가 가리키는 것이 아들 예수인지 하나님 아버지인지 하는 것은 여전히 불분명하다. 만일 요한1서 저자가 요한복음 저자와 공통의 신학을 공유한다면, 세상이 "그를 알지 못했다"는 주장에서 "그"는 아버지일 수도 있고 혹은 아들을 가리킬 수도 있다. 왜냐하면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를 알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요한 10:15). 마찬가지로, 2절에서, "우리도 그와 같이 될" "그"가 아들인지 아버지 하나님인지 불분명한데, 문맥상 아들이 더 그럴 듯해 보인다. 그러나 둘을 정확히 구별하려 애쓰는 것은 불필요하게 세심한 것일지도 모르며, 그래서 요한1서 저자가 별로 필요를 느끼지 않았던 구별로 귀결될 수도 있다. 요한1서 저자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가 몹시 유동적이어서 둘을 분명히 구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이런 맥락에서, 아래 주석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을 명확히 구분하지 않고 다소 모호한, 즉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한 "그"를 계속 유지한다.)  

3절에서, 요한1서 3장에서 지금까지 지배적이었던 1인칭 복수 "우리" 진술들로부터 3인칭 단수 "그"로의 특징적 변화가 있다. 그런데 이 변화는 단순히 수사학적인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문법적 인칭과 무관하게, 결과는 다소간 동일하다: 서간의 청중에게 깨끗함(purity)을 추구하라고 고무하는 것. "그에게 소망을 두는 사람은, 그가 깨끗하신 것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합니다"라는 생각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게 되어야 한다"(레위기 11:44; 19:2; 20:7)는 레위기의 반복 어구를 연상시킨다.

4절은 3절과 동일한 구조로 시작되지만 근본적으로 다른 감정이나 의미를 표현한다. "불법"(anouia)과 "죄"(amartia)가 쌍을 이루는 것은 70인역 성서(Septuagint·그리스어역 구약성서)에서도 아주 잘 입증되기 때문에(특히, 시편 32:1[70인역 31:1]과 51:2[70인역 50:4] 참조), 그 둘은 사실상 교환 가능하다. 그러나 요한1서 저자가 이 관계를 자세히 설명할 필요를 느낀다는 것은, 그가 이 서간을 쓸 무렵에는 그 단어들의 동의어적 특성이 실종되었을 가능성이 있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죄를 불법과 동등시함에도 불구하고, 요한1서에는 율법에 관한 언급이 없음을 감안하면, 여기에서 불법이라는 용어의 정확한 의미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불법과 죄를 동등시함은 "그는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셨다"는 5절에서의 그 다음의 요점으로 옮겨가게 해준다. 여기에서의 어휘는 요한복음에서 세례 요한이 예수를 "세상 죄를 제거하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한 1:29)으로 선언하는 것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죄를 제거하는 예수의 역할에도 불구하고 예수 자신은 죄가 없음을 요한1서 저자는 분명히 한다. 여기에서 사용된 현재시제 동사("is", estin)는 죄 없음의 영구한 특성과 상태를 반영하는 지속적 의미를 전달할 수도 있다.
   
3절과 4절의 서두에서 사용된 문법 구조는 여기 6절에서도 재등장한다. 그러나 이전의 절들과 달리, 6절은 다소 중요한 해석상의 문제를 제기한다. 표면상, 6절은 단순한 사실의 진술처럼 보인다: 그(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사람은 죄를 짓지 않는다. 그러나 1:8에서, 저자는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우리는 자신을 속이는 것이요"라고 이미 진술했었다. 만일 독자가 1:8을 보편적 죄의 진술로 받아들인다면, 3:6으로부터의 자연스런 결론은 "그 안에서는 누구도 실제로 죄를 짓지 않는다"처럼 보인다. 이 결론의 터무니없음은 또 다른 해석이 더 선호될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6절은, 여전히 사실적 진술로 읽혀질 수도 있지만, "그의 안에 머물러라! 죄짓지 말라!"는 이중 명령을 암시하는 권고의 색채를 띠고 있는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7절에서, 저자는 의(righteousness)라는 관점에서 사람의 특성을 결정짓는 것은 사랑의 행동이라고 특별히 언급한다. 그의 깨끗함 때문에 청중에게 깨끗함을 고무한 3절에서처럼, 여기 7절에서도 저자는 그가 의롭기 때문에 청중에게 의로움을 권고한다. 따라서, 여기에서의 저자의 주된 목적은 기독교 공동체로서의 적절한 행동을 청중에게 가르치려는 것처럼 보인다. 

* 설교 본문

제한 없는 사랑을 경험하는 것이 가능한가?

고어텍스(GORE-TEX) 설립자는 최적의 종업원 숫자는 한 단위 공장에서 150명이 아닌가 하는 예감이 들었다. 옥스퍼드 대학 진화인류학 교수인 로빈 둔바가 실시한 연구는 그의 예감을 확증하는 것처럼 보인다. 게다가, 그는 이 연구에 의거하여 우리는 150명 이상의 의미 있는 친구들을 가질 수 없다고 추정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인간의 한계에 갇혀 있는가?

당신은 얼마나 많은 친구들이 있는가? 어떤 사람들은 친구는 아무리 많아도 불충분하다고 생각한다. "허용되는 페이스북 친구들의 숫자를 최대한으로 올려라"는 제목의 한 페이스북 페이지가 있다. 그만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한 얼마 안 되는 5천 명의 친구들에게 그 청원자는 만족하지 않는다. 작가는 가급적 더 많은 친구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깊이 있는 대화 혹은 삶의 의미에 관한 자기 성찰적 생각들의 교환을 위해서는 아니다. 더 많은 친구들이 필요한 것은, 그것이 마피아 전쟁(Mafia Wars)과 팜빌(Farmville) 같은 게임을 더 재미있게 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더 많은 사람들, 함께 게임을 할 더 많은 "친구들"이 있다면, 게임들은 더 많은 변화 속에 더 오래 지속될 것이다. 더 많은 친구들은 더 좋은 오락 시간을 의미한다.

로빈 둔바는 그렇게 서두르지 말라고 말한다. 이상적인 친구들의 한계는 사실상 150명이다. 그 이상이면, 친구들과 친밀한 유대 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 150명이 모두 당신의 이웃에 살고 매일 그들을 본다고 해도, 혹은 당신이 전 세계적으로 많은 친구들, 이웃들, 친척들과 관계를 맺고 있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숫자가 150명을 초과하면, 관계는 나빠지기 시작하고 의미 있는 접촉은 보다 우발적이 되기 시작한다. 점차, 관계는 시들해질 것이고, 그들은 우리의 "친구들" 중의 하나로 더 이상 계산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진정한 친구 목록을 150명의 사람들로 자연스럽게 줄일 때까지, 이런 일은 반복해서 일어날 것이다. 인간은 본래 한번에 의미 있는 친구들의 일정한 숫자를 유지하도록 되어 있는 것 같다. 둔바는 이것을 아주 철저히 조사했고, 그래서 "둔바의 숫자"(Dunbar's number)는 의미 있는 친구들의 측근 그룹을 형성하는 이 150명의 사람을 가리킨다.

둔바의 이 연구는 부분적으로 스쿠버다이빙용 잠수용 고무옷, 등산화, 그리고 판초 제조 회사인 고어텍스 설립자인 빌 고어의 경험들에 기초했다. 그 회사는 뛰어난 성능과 감각적인 아웃도어 패션에 대한 고어의 열정으로 1958년 시작되었다. 그는 자신의 뒤뜰에서 초라하게 시작했는데, 그곳에서 그는 아웃도어에 열광하는 사람들을 위한 양질의 제품 생산에 심혈을 기울였다. 신뢰할 수 있고 기능성 등산 장비들과 의류를 제조하는 이 회사는 소문이 퍼지면서 날로 성장했다. 친밀한 가족적 작업 환경에서 소수의 직원으로 조촐하게 조업을 개시했는데, 긴장된 비인간적 분위기 속에 노동하는 200명 가량의 종업원을 가진 커다란 제조 공장으로 발전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고어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한 장소에서 일하면 관계 단절이 생긴다는 것을 경험했다. 그는 이제 큰 공장을 걸어다니면서 자신이 이름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는 그들과의 친밀한 접촉 상실, 그리고 색다른 작업 환경을 만들겠다는 자신의 원래의 꿈에서 멀어져 있음을 느꼈다.

고어는 독특한 해결책을 생각해냈다. 더 많은 종업원을 수용할 수 있도록 작업장 규모를 확장하지 않고, 그 대신 그는 한 장소에 고용될 수 있는 노동자 숫자의 상한선을 정했다. 수요가 늘면서 공장 규모를 확대할 필요가 생기면, 그는 또 다른 공장을 지었다. 한 단위 공장의 노동자 숫자의 한계는? 150명. 그것은 함께 일하면서도 여전히 가족적 분위기를 유지할 수 있는 사람들의 최대한의 숫자처럼 보였다. 둔바는 이 사업 모델에 호기심을 느껴 탐구하기로 결심했다. 둔바는 말한다: "한 회사가 커지면 커질수록, 그 회사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고 서로를 도울 가능성은 훨씬 더 적다는 것이 그의 직감적 본능이었다."

사람들이 서로를 알 때, 즉 최고 관리자부터 말단 직원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이 서로의 이름을 부를 수 있을 때, 모든 것이 원활히 돌아간다는 것을 고어는 발견했다. 직원들은 공장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마치 자신의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 일처럼 느꼈다. 그들이 투입하는 노력이 그 다음 부서의 사람에게 직접적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그들은 깨달았다. 그리고 그들은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어쩌면 그들은 그날 낮에 함께 점심을 먹거나 회사 체육관에서 얼굴이 마주칠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일(business)이 아니라 개인적·인격적인(personal) 것이었다.

물론 우리는 150명 이상의 사람들을 알고 지낼 있다. 사실, 과학자들은 사람들이 인식하고 기억할 수 있는 사람들의 최대치를 1,500명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 많은 숫자의 사람들과 관계를 제대로 유지할 수 없다. 한 번에 너무 많은 사람들과 의미 있는 관계를 유지하려고 애쓰면, 우정의 질이 떨어진다. 제한된 숫자 이상의 사람들과 동시에 깊은 관계를 가질 시간, 돈, 혹은 자원이 우리에게는 없다. 해답은, 페이스북에서 나날이 늘어가는 숫자의 친구들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 관계의 질, 깊은 이해, 그리고 심층적 관계에 관한 한, 숫자가 많다고 더 좋은 것이 아니다. 사실은 정반대이다. 적을수록 더 좋다.

하나님의 숫자는 둔바의 숫자가 아니다.

기쁜 소식은? 하나님의 숫자는 둔바의 숫자가 아니라는 것, 즉 하나님의 사랑에는 한계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가족 속의 자녀들의 숫자에는 한계가 없다. 사도 요한은 말한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사랑을 베푸셨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기의 자녀라 일컬어 주셨으니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요한1서 3:1). 그는 "하나님의 자녀" 됨이 바로 우리의 존재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우리의 현재의 모습 그대로 받아주신다는 것, 우리를 그분의 가족으로 기꺼이 받아들인다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당신은 여러 명의 부모 없는 아이들을 입양하여 대가족을 이루고 아이들에게 사랑이 넘치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부부들에 관한 슬쩍 언급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인간의 그런 관대함에는 엄연한 한계가 있다. 그러한 훌륭한 부부들도 이 세상의 모든 궁핍한 아이들을 받아들이지는 못한다. 그러나 우리를 사랑하고 돌보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무한정이다. NIV 성경에서는 요한1서 3:1을 번역하면서 "아낌없이"(lavish)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낌없이 베푸신 위대한 사랑을 보라...." 하나님의 사랑은 아낌없이 퍼부어 주는 사랑이다.

하나님은 그분이 품어 주실 수 있는 사람들의 상한선을 정하지 않으신다. 고어텍스는 150명을, 그리고 페이스북은 5천 명을 상한선으로 정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비틀거리고, 곧고 좁은 길보다는 굽은 길을 선택하고, 이따금 하나님에게 몹시 실망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그분께 용서와 새 삶을 간청할 때, 하나님의 문은 언제나 활짝 열려 있다. 하나님은 늘 우리를 반갑게 맞아들일 준비를 하고서 기다리고 계신다. 예수는 다음과 같은 말로써 이것을 강조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마태 11:28).

말하자면, 하나님은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을 개인적으로 알고 계신다. 그분은 우리의 이름을 알고 계신다. 하나님은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듯이 우리를 아낌없이 사랑해 주신다고 사도 요한이 말할 때, 그는 이 "부모"가 자식을 알고 있음을 암시한다. 자식을 끔찍이 사랑하는 부모가 어떻게 자식의 이름을 모를 수 있겠는가? 부모는 아이가 자신을 이해하는 것보다도 더 잘 아이를 알고 이해한다. 아이들은 완전한 자기 이해를 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모는 자식을 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아신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진실로 우리를 아신다.

점점 더 많은 관계들이 개인적·인격적이기보다 "가상적인"(virtual), 즉 컴퓨터를 매개체로 하는 세상에서, 하나님은 우리들 각자의 이름을 알고 계신다는 고무적인 소식을 우리는 듣는다. 우리는 단순히 하나의 숫자 혹은 스크린상의 이름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분명하게 식별된다.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하나님은 우리를 그분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자녀로 받아들이신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쓴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만,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와 같이 될 것임을 압니다. 그 때에 우리가 그를 참모습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3:2). 이 구절에 깊이 담겨 있는 종말론은 잠시 잊어라. 놀라운 소식은, 이 절이 우리 안에 있으면서 우리를 서서히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시키는 어떤 종류의 신적 DNA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아이가 성장하면서 부모의 모습을 닮아가듯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날로 그분의 모습을 닮아간다.

우리가 어떤 나라, 어떤 부족, 혹은 어떤 대륙 출신인지가 전혀 문제되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피부색, 문화, 언어, 그리고 사람들을 생각할 때, 그것은  창조주께서 세상을 위해 갖고 계신 사랑의 폭과 깊이를 넌지시 암시하는 것이 틀림없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아무런 한계도 없다. 지구 행성의 제한된 자원을 걱정하면서, 우리는 나날이 더 만원인 지구상의 인구 폭발을 예방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의 우물이 고갈될 것을 우리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돌아가기에 충분한 음식과 자원이 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들 모두와의 관계를 유지할 만큼 충분히 크다. 고어텍스의 빌 고어는 그의 9,500명의 직원들과 그렇게 할 수 없다. 그의 각각의 단위 공장의 150명의 "동료들"은 다른 곳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을 거의 알 수 없다. 페이스북 사람들은 5천 명의 "친구들"과 성장 가능하고 진정한 관계를 도저히 유지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잘못을 저지를 때에도 우리를 덮어줄 만큼 크다. 사도 요한은 말한다: "여러분이 아는 대로,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셨습니다"(3:5a). 핵심 사항은 이것이다: 이따금 우리는 꼬마 녀석들처럼 행동한다. 아이들은 이기적이고, 버릇없고, 무뚝뚝하고, 우는소리를 하고, 불평하고, 짜증나는 불평분자들이 될 수 있다. 특히 남들의 자녀들을 보면 그렇다. 우리 자신의 모습을 정직하게 직시하자. 이따금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와 비슷한 부류이다.

우리가 그런 상태에 있을 때, 성경은 그것을 "죄"(sin)라고 부른다. 부모는 그것을 "부적절한 행동", "자기 표현", "짜증 부리기" 등으로 부를 것이다. 아무래도 좋다. 하나님은 그것을 죄라고 부르신다. 우리가 억압된 감정 등을 무의식적으로 행동으로 나타낼 때, 예수는 이 잘못된 행동들의 결과를 제거하기 위해 죽었음을 사도 요한은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다. 사도 요한의 목적은, 삶이 어긋나고 우리가 그릇된 길로 갈 때를 대비하여 하나님은 구제책을 제공하심을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상기시키는 것이다. 그것이 기쁜 소식이다.

제한 없는 사랑.

물론 하나님은 어떤 일이든지 행하실 수 있다. 하나님은 제한 없이 사랑하신다는 성경의 놀라운 축복의 말씀을 우리는 믿음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무조건적 사랑의 도전은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가능성을 상상하고 믿지 못하는 우리의 불완전한 능력에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그리고 그분의 사랑스러운 자녀라는 것은 어쩌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제기하는 가장 도전적인 생각일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감히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소중한 자녀로 인정하도록 할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의 길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의 또 다른 형제자매로 간주하게 한다.

하나님의 가족은 진정 그렇게 크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풍성한 식탁에 둘러앉을 여지가 있다. 물론 우리 주변을 둘러볼 때, 그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회사 식당을 어질러놓은 채로 떠나는 상대하기 어려운 직장 동료? 뿌루퉁한 편의점 점원? 시끄러운 음악을 틀어놓는 이웃, 자기 중심적 십대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우리가 그들을 반드시 좋아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각각의 사람을 하나님이 먼저 우리에게 베푸시는 존경을 가지고 대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우리는 모든 축복의 근원인 하나님을 예배한다. 우리는 자비와 은총의 헤아릴 수 없는 근원으로부터 이익을 얻는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그 사랑과 은총의 일부를 우리가 매일 만나는 사람들에게 베풀 수 있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께로 돌아서서 "제 본분을 다했어요", "오늘 내가 돌볼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을 돌보았어요", "제 한계에 도달했어요"라고 말하게 되지 않는다. 돌봄에는 "둔바의 숫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청하시는 것은, 예수처럼 우리도 그것을 나눌 수 있도록, 이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는 예수를 따르고, 예수를 섬기고, 예수가 살았던 것처럼 살기 원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예수가 행한 것은 사랑을 베푸는 것이었다. 예수가 그랬듯이 자유롭게 사랑하도록 우리는 요청받고 있다.

<가능한 설교 주제들>
* "자녀 된 이 여러분, 아무에게도 미혹을 당하지 마십시오"(7절)는 우리를 속이려 드는 우리 주변의 목소리들과 영향력들을 숙고하라는 요청이다. 상업·광고 방송들로부터 온라인상의 신용 사기들과 정치에 이르기까지, 이 모두는 우리가 기독교인들로서 조심스럽게 분별해서 귀기울여야 할 목소리들로 간주될 수 있다.
* 4-6절은 죄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로서의 죄라는 폴 틸리히의 정의를 사용하라. 생명을 주는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우리를 분리시키는 행동들, 말들, 혹은 습관들은 무엇인가?
* 하나님은 그분의 사랑 안에서 "인류 가족"을 만들기로 결정하셨다. 이것은 많은 종류의 인간 가족, 즉 입양에 의한 가족, [재혼 부부와 과거의 결혼에서 얻은 자녀로 구성되는] 혼합 가족, 조부모가 손자·손녀를 기르는 가정 등을 논의할 가능성을 열어 준다. 필수 구성요소는 사랑이다.     
 
* 예화

+ 사랑의 씨앗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우리 또한 하나님을 닮은 사랑이다.
하나님은 아버지시다.
우리 또한 하나님을 닮은 부모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의 주님이시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의 관리자일 따름이다.
우리는 깊은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창조사업을 완성해야 한다.
깊은 신앙을 가지고 우리는 사랑한다.
우리는 우리 안에 진정한 사랑의 씨앗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은 이기심과 욕심에 사로잡혀 살라고
우리를 지으신 게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사랑의 씨앗을 심어 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사랑의 씨앗을 다시 심어 주고
자라게 하려고 오셨다.
우리가 모든 인간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머나먼 길에 들어서려면,
그런 근원적인 낙관론이 필요하다.
(후안 루이스 카라비아스)

+ 하나님의 가족사진

로버트 레인즈는 그의 저서 『기쁨에 입맞추라』에서 한 감동적인 사건을 언급한다:

“나의 한 친구가 얼마 전 유고슬라비아의 한 목사 집에서 목사의 부인과 세 아들과 함께 밤늦도록 시간을 보낸 적이 있었습니다. 그의 두 아들은 잘 생기고 건강한 청년이었고 대학에 다니고 있었는데 아주 전도 유망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스무 살 먹은 셋째 아들은 방 한구석에서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있었습니다. 내 친구가 그들 부부와 정상적인 두 아들만을 의식하고 그들에게 가족사진을 찍어도 괜찮냐고 질문하자 목사는 그에게 말했습니다. ‘저 아이를 준비시킬 때까지 잠깐만 기다려주십시오.’ 사진은 중앙에 정박아 아들이 있는 모습으로 찍혔습니다. 나는 그 아버지에게서 가족에 속한다는 것의 의미를 깊이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어느 자녀도 그 사진에서 빠지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한 가족에 속하며 누구도 그 사진에서 빠지지 않는다. 때때로 우리는 자신이 추하고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으리라고 여기지만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으며, 하나님의 가족사진 중앙에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가 찍혀 있다.
(듀안 쿠드버슨, 『작은 목소리로 키우라』)

+ 가장 소중한 보석 
 
로마의 명사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아내 코르넬리아는 훌륭한 교양을 갖춘 현부인으로 소문이 자자했다. 그녀는 남편이 죽은 뒤 주위에서 권하는 좋은 조건의 청혼도 뿌리친 채 혼자 지내며 자녀 교육에 헌신했다.

그녀의 아이들이 어렸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코르넬리아의 집에서 명사 부인들의 정기 모임이 있었다. 부인들은 코르넬리아가 정성껏 준비한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웠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가던 중에 한 부인이 자기 손을 내보이며 끼고 있던 반지를 자랑하기 시작했다. 커다란 보석이 박힌 그 반지는 언뜻 보기에도 매우 값비싸 보였다.

다른 부인들은 모두 반지에 관심을 보이며 아름답다고 칭찬하더니 곧 제각기 자신들의 몸에 지니고 있던 반지, 목걸이, 귀고리, 팔지 등을 하나씩 내보이기 시작했다. 부인들이 자랑하는 보석들은 하나같이 번쩍거리는 고급 물건이었다.

그런데 유독 집주인 코르넬리아만은 남의 보석들을 구경할 뿐 자신의 보석을 자랑하지 않았다. 그러자 다른 부인들이 가만히 앉아 있는 코르넬리아에게 말했다. "부인, 어서 부인의 보석도 보여주세요. 구경 좀 합시다." 부인들은 자꾸만 그녀를 재촉했다.

처음엔 사양하던 코르넬리아도 결국 성화에 견디지 못해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나더니 방안으로 들어갔다. 다른 부인들은 코르넬리아가 가지고 나올 멋진 보석을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

잠시 후 코르넬리아는 양손에 두 아들의 손목을 꼭 잡고 방에서 나왔다. 그리고는 부인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여러분, 이 아이들이 나의 가장 소중한 보석입니다."

+ 하나님이세요?

한겨울, 어느 날의 일이었다. 밖은 벌써 어두웠고 몹시 추웠다. 예닐곱 살 된 조그만 사내아이가 상점 창문 밖에 서 있었다. 신발도 신지 않았고 옷은 걸레나 마찬가지였다.

그 옆을 지나가는 젊은 여자가 아이를 보았다. 그리고 아이의 창백한 파란 눈에서 굶주림을 읽었다. 여자는 아이의 손을 잡고 상점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새 신발과 따뜻한 옷을 사주었다. 다시 밖으로 나와서 여자는 아이에게 말했다. "자 이제 집으로 가서 즐거운 명절을 보내라."

아이는 여자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아주머니는 하나님이세요?" 여자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니다. 그저 하나님의 가족 중 한 명이란다." 작은 아이가 말했다. "아주머니가 하나님의 가족인 줄 저는 벌써 알았어요."
(잭 캔필드 외 3인, 『여자들의 마음이 열리는 101가지 이야기』)

+ 당신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얼마나 큰가?

H. N. 러셀이라는 프린스턴 대학 천문학자가 은하수에 대한 강의를 마쳤을 때, 한 여자가 다가와서 물었다. "우리가 사는 지구가 무한한 우주에 비해 그렇게 작다면, 하나님이 과연 우리에게 큰 관심을 갖고 계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러셀 박사는 대답했다. "그것은 말이죠, 전적으로 당신이 하나님을 얼마만큼 믿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 크고도 작은 하나님

영국의 유명한 사상가 안토니 콜린즈는 『자유 사상에 대한 강화』의 작가로도 잘 알려져 있다.

어느 날, 콜린즈는 교회로 가던 길에 허름한 옷차림의 노동자를 만났다. 그 노동자 역시 교회에 가는 길이라고 했다. 콜린즈는 그 노동자를 좀 당혹스럽게 할 생각으로 물었다. "당신의 하나님은 큰 하나님입니까? 작은 하나님입니까?"

콜린즈는 다소 장난스러운 기분으로 그 노동자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그는 아주 완전한 대답을 듣게 되었다. "하늘 중의 하늘도 그분을 품을 수 없을 만큼 그분은 큰 분입니다. 또한 그분은 내 마음속에도 거하실 만큼 그렇게 작은 분이십니다."

훗날 콜린즈는 이 간단하고도 빼어난 대답에 대해 이렇게 고백했다.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사람에게서 들은 이 대답은 내가 전에 호감을 가지고 탐독했던 방대한 양의 종교 서적들보다도 내 마음에 더 큰 감동을 주었다."

+ 하나님의 자유재량권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에 관해 참으로 많은 것을 듣는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 인정이 많으신 하나님, 참으로 위대하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세상에서 가장 힘이 세신 하나님, 초월적인 하나님,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생명의 수여자이신 하나님, 죽음의 창조자이신 하나님,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 의인과 악인을 심판하시는 하나님...... 이로써 내가 의미하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에 관해 아주 많은 것을 듣고 또 알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설령 우리가 하나님에 관해 속속들이 알고 있다고 해도, 하나님은 그분 나름의 자유 재량권을 갖고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에 관해 다 알고 있다는 자만심으로 하나님을 우리의 인간적인 생각에 예속시키거나 제한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밥 딜런)

+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가가와 도요히코는 일본이 낳은 유명한 종교가다. 그의 글을 읽고 많은 사람이 감동을 받았다.

그는 시장 아버지와 첩이었던 기생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아버지 집에서 자라기는 했지만 첩의 아들이라고 눈칫밥을 먹어야 했다. 본처의 자식들로부터 온갖 멸시와 천대를 받았다. 얼마나 저주스러운 생이었을까? 그는 ‘왜 나를 낳았느냐?’고 부모를 원망하며 성장했다.

그러던 어느 날, 담 모퉁이에 우두커니 기대어 서서 역시 자신의 생을 비관하고 있을 때, 그는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며 지나가는 구세군 전도대를 만났다. 그들은 전도하면서 힘차게 외쳤다. “하나님은 누구든지 사랑하십니다 !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가가와 도요히코는 그들 가까이 다가서서 물었다. “하나님은 기생의 아들도 사랑하나요?” “물론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어떤 죄인이라도 사랑하십니다.” 이 말을 듣고 그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한다.

그가 쓴 여러 글들 중에는 “나는 기생의 아들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이다”라는 구절이 종종 나온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그 확실한 의식, 그 놀라운 감격이 가가와 도요히코를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게 한 것이다.

+ 거룩한 끈
 
오래 전의 이야기입니다. 스코틀랜드의 한 숲속 동네에 강아지 한 마리가 나타났습니다. 강아지는 아주 더럽고 못생겼습니다. 오랫동안 길을 잃고 헤맸던지 강아지는 굶주림에 거의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강아지 목에 달린 이름표를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이 나라 왕에게 속해 있습니다."

사람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것은 바로 왕의 강아지였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곧바로 경찰에 알렸습니다. 강아지는 사람들의 극진한 보호를 받다가 이윽고 주인에게로 돌아갔습니다. 왕은 에딘버러 성에 휴가를 왔다가 실수로 강아지를 잃어버린 것이었습니다. 강아지는 왕궁으로 돌아가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왕과 강아지를 연결시켜 준 것은 바로 이름표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신자들에게도 큰 교훈을 줍니다. 우리가 그 어디를 헤매더라도, 우리에게 확실한 이름표만 붙어 있으면 즉각적인 보호를 받고 주인에게로 확실히 인도될 수 있습니다. 온 우주의 왕인 그리스도에게 속했다는 이름표만 확실하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두려울 게 없습니다.

강아지가 보호를 받은 이유는 단 하나, 왕의 소유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신자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우리의 참된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그 무엇도 우리를 우리에게 대한 그분의 지극한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 하늘에 계신 아버지

성 프랜시스의 아버지는 큰 포목상을 경영해서 돈을 많이 벌었다. 그는 아들이 자기 사업을 훌륭하게 이어 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프랜시스의 삶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난 후 완전히 변했다. 그는 아버지의 사업을 계승할 생각은 하지 않고 그저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주님을 섬기는 일에만 몰두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자신의 옷가지들과 또 값이 나가는 물건들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일에 열심이었다. 그의 부모가 새 옷을 해 주면 그 즉시 가난한 사람에게 자선을 베푸는 것이었다.

참다못한 그의 아버지가 몇 번이나 심하게 나무랐다. 그러나 소귀에 경 읽기였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그의 아버지가 그를 끌고 법관에게로 가서 요구했다. "이제 이 놈은 내 아들이 아니니 호적에서 이름을 지워 주시오!" 이리저리 달래던 법관도 어쩔 수 없이 이렇게 선언했다. "이제 프랜시스는 아무개의 아들이 아니다!"

그때 프랜시스는 자기가 입고 있던 옷가지를 벗어 아버지 앞에 내려놓으면서 조용히 말했다. "이것 받으세요. 앞으로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를 돌보아 주실 것입니다!"

과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프랜시스를 버리지 않고 끝까지 인도하셔서 ‘성 프랜시스’라는 역사상 위대한 인물이 되게 하셨다.

땅에 있는 육신의 아버지는 우리를 버리기도 하고 또 우리와 영원히 함께 있지 못하지만, 우리에게는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으로 함께 계시는 하늘 아버지가 있음을 기억하자.
(박상훈, 『그가 찔림은』)

+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시기 전에 천사들을 창조하시고 그들과 대화를 나누셨다. "내가 세상을 창조하고 그 세상에서 으뜸가는 피조물로 인간을 창조하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의(義)의 천사가 대답했다. "하나님, 인간을 창조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온갖 불의로 이 세상을 더럽힐 것입니다." 거룩의 천사가 대답했다. "하나님, 인간을 창조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온갖 더러움으로 이 세상을 더럽힐 것입니다." 빛의 천사가 대답했다. "하나님, 인간을 창조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온갖 어둠으로 이 세상을 더럽힐 것입니다."

그때 긍휼의 천사가 대답했다. "하나님, 인간을 창조하셔야 합니다. 인간을 창조하시면 이 세상은 불의와 더러움과 어둠 속에 잠길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할 것이며,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새 사람이 되도록 그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온 세상이 그들을 포기해도 하나님은 결코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려줄 것입니다."
(유대인 우화)

+ 강도의 마음을 녹인 소녀 

프랑스의 어느 조그만 마을에서 일어난 일이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추운 겨울 밤, 이 집 저 집을 기웃거리던 한 낯선 사내가 동네에서 외떨어진 집 앞으로 가서 잠시 머뭇거리다가 결심한 듯 그 집 현관문을 두드렸다. 잠시 후 13살 가량 되어 보이는 한 소녀가 문을 열며 "누구세요?" 하고 물었다.

사내는 말없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래도 천진난만한 소녀는 비에 흠뻑 젖은 사내에게 친절을 베풀었다. "이 추운 겨울에 얼마나 추우세요? 여기 난로에 옷을 말리세요. 제가 뜨거운 커피를 준비하겠어요."

소녀는 사내의 손목을 다정히 잡아당겨 난로가로 안내하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따뜻한 커피를 들고 나온 소녀는 사내에게 건네고 옆에 앉아 계속 이야기했다. "저는 지금 혼자 있어요. 엄마와 아빠는 아랫마을에 가셨어요. 아저씨는 어디를 가세요?"

사내가 커피를 마시면서 물었다. "얘야, 너는 내가 무섭지도 않니?" 소녀는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왜 무서워요? 우리 모두는 한 분 하나님의 자녀인데요." 사나이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지난 세월 동안 이 소녀처럼 나를 믿어 주고 따뜻하게 대해 준 사람이 있었던가?'

그는 지금 탈옥수로서 도망하던 중 먹을 것과 돈을 강탈하려고 이 집에 들어왔다. 하지만  소녀의 뜻밖의 따뜻한 대접에 그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는 커피를 마신 뒤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집을 떠났다. 

* 예배 자료

+ 예배에의 부름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꼭 물어보아야 하는 질문이 있다.
하나님을 향한 영혼의 갈망이 있는가?

마침내 죽음과 무덤을 이기고
영원히 하나님의 얼굴로부터
빛을 받게 될 때까지
하나님을 알아가고 또 더욱더 알기를
점점 더 노력하는가?

나는 진정 하나님을 알고 싶다!
(마틴 로이드 존스, '하나님을 향한 영혼의 갈망') 

+ 4월의 일기

말문을 그만 닫으라고
하느님께서 병을 주셨다

몇 차례 황사가 지나가고
꽃들은 다투어 피었다 졌다
며칠을 눈으로 듣고
귀로 말하는 동안
나무 속에도 한 영혼이 살고 있음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허공에 가지를 뻗고
파란 잎을 내미는 일
꽃을 피우고
심지어 제 머리 위에 둥지 하나
새로 허락하는 일까지
혼자로는 어림없는 일이다

파란 하늘에서 떨어진 별처럼
주먹만큼 빛나는 새 한 마리가
잠시 머물고 간 뒤
사월의 나무들은 일제히 강물 흘러가는
소리를 뿜어내고 있다

말문을 닫으라고
하느님이 내린 병을 앓고 있는 동안
(나호열·시인)

+ 헌신에 대한 묵상기도
 
나 아닌 그 누군가가
먼저 나서서 해주길 바라고 미루는
사랑과 평화의 밭을 일구는 일
비록 힘들더라도
나의 몫으로 받아들이게 하소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참됨과 선함과 아름다움의 집을
내가 먼저 짓기 시작하여
더 많은 이웃을 불러모으게 하소서

우리가 배불리 먹는 동안
세상엔 아직 굶주리는 이웃 있음을
따뜻한 잠자리에 머무는 동안
추위에 떨며 울고 있는 이들 있음을
잠시도 잊지 않게 하소서

사랑에 대해서 말하기보다
먼저 사랑을 실천할 수 있도록
생명에 대해서 말하기보다
먼저 생명을 존중할 수 있도록
우리 모두를 변화시켜 주소서
(이해인·수녀, 우리를 흔들어 깨우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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