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림 > 신간 소개
<신간 소개>목회자를 위한 <설교자노트> 2011년 11·12월호
정연복  |  pkom5453@hanmail.net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입력 : 2011년 10월 25일 (화) 17:59:11
최종편집 : 2011년 10월 26일 (수) 14:07:43 [조회수 : 2162]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텔레그램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

 

<신간 소개> 목회자를 위한 <설교자노트> 2011년 11·12월호 
 
                                                                    정연복(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저는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으로 일하면서 1997년부터 격월로 나오는 <설교자노트>라는 책을 번역해 왔습니다.

지금까지 93권이 나온 <설교자노트>는 '교회력에 맞춘' 설교 본문에 대한 성서 주석, 그리고 그 본문에 따른 미국의 실력 있는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의 최신의 설교를 번역하고, 아울러 설교 내용에 적합한 기도문과 예화 자료를 풍부하게 제공하여 목회자들의 설교 준비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책입니다. 특히 <설교자노트>에 실린 설교들은 설교자들에게 성서에 충실하면서도 독창적인 설교 아이디어를 제공합니다.

그런데 이 <설교자노트>는 시중 서점에서는 팔지 않고 신청하시는 목회자들에게 직접 우송합니다. '영성적이며 공동체적이며 생태학적인 신앙 공동체를 위한 자료'인 <설교자노트>를 구입하기 원하는 분들은 한국기독교연구소(전화: 031-929-5731)로 연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설교자노트>는 격월로 나오며 두 달치 분량의 설교 자료를 담고 있는데, 2011년 11·12월호 중 11월 둘째 주 설교 자료를 참고로 첨부합니다.


설교 제목: 뱀의 눈, 종의 눈 

* 성경 본문: 시편 123편
* 성경 주석

4개의 절로 이루어진 자비를 비는 외침인 시편 123편은 시편집(psalter)에서 가장 짧은 시편들 중의 하나이다. 단 2개의 절로 된 시편 117편이 가장 짧고, 시편 131, 133, 134편은 3개의 절로 되어 있다. 

이 시편은 사회적 불명예로부터의 구출을 비는 공동체의 탄원이다.

대부분의 시편들은 사실 현대의 독자들이 예언서들의 두드러진 특징으로 간주하는 정의의 문제들을 다루는 사회적 차원을 가지고 있음을 잊고서, 시편들을 단순히 개인적인 짧은 기도들로 읽는 것은 유혹적이다. 시편 123편은 "평안하게 사는 자들"(those who are at ease)과 "오만한 자들"(the proud)의 "조롱"과 "멸시"(4절)로부터의 구출을 비는 울부짖음의 한 실례이다. 구약성경의 문맥 속에서, 두 용어 모두 주관적인 태도들뿐만 아니라 외부의 사회적·경제적 상황을 또한 함축하고 있다. 시편들의 관심사가 단지 사적인 경우는 매우 드문데, 시편 123편도 예외가 아니다. 시편 123편이 지금은 한 개인에 의해 시작되고 인도되는 한 공동체적 예배의식 시편임에도 불구하고, 아마도 그것은 원래는 전적으로 한 개인적인 비탄이었을 것이다. (1절의 "나"라는 일인칭 단수가 2절에서 "우리"라는 복수로 바뀌면서 시편의 나머지 부분에서 "우리"라는 표현이 반복되는데, 이것은 이 시편이 전달되는 과정에서 상당한 변화를 겪었음을 알려주는 표지들 중의 하나이다.)

시편 123편은 시편 120-134편의 수집물인 "성전에 올라가는 순례자의 노래들" 중의 하나인데, 그것들 중 몇몇은 간결하며, 그리고 시편 123편처럼 그것들 대부분은 여기에서 발견되는 것과 비슷한 관심사들을 표현한다: 거만한 자들에 의한 압제와 주님 안에서의 구출에 대한 소망. 수집물 중의 두 개의 시편은 가족을 지향한 지혜를 표현하며(시편 127, 128편), 그리고 시편 123편은 지혜문학의 영향도 받았다는 언어학적 단서들이 있다. 학자들은 "성전에 올라가는 순례자의 노래"(Song of Ascents)라는 표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둘러싸고 논쟁을 벌이는데, 많은 학자들은 그 시편들이 예배자들이 예루살렘과 성전으로 올라가면서 불렀던 순례자의 노래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시편 122편 참조). 그러한 "삶의 자리"(Sitz im Leben)는 시편 123편의 내용과 딱 들어맞는다.

시편은 "눈"이라는 주제에 기초한 신뢰의 표현으로 시작된다(1-2절). 눈을 들어올리는 것은 단순히 뭔가를 찾고 있음을 의미하는 이미지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창세기 13:10, 14; 18:2 참조). 더욱 중요하게는, 그것은 동등하지 않은 힘(power) 사이의 관계를 나타낸다. 많은 문화들에서와 마찬가지로, 고대 근동에서는 시선을 어디에 두느냐 하는 것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의 성격을 반영하였다.

이스라엘의 문화와 같은 가부장제 문화에서는, 남자가 자신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여자를 스쳐 지나가며 우연히 힐끗 보는 것 이상으로 지켜보는 것은 사회적 규범들의 한 심각한 위반이었다. 여자를 호색적인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에 관한 예수의 말씀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사람은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를 범하였다"(마태 5:28). 실제로, 사회적으로 열등한 사람들은 그들보다 사회적으로 우월한 사람들로부터 시선을 돌릴 것이 기대되었다. 그리고 우월한 사람이 열등한 사람을 똑바로 쳐다보는 것은 호의의 최초의 표시로 간주되었다(삼하 9:8; 아모스 5:22; 마카베오 2서 8:2; 마카베오 3서 6:3 참조),  이 시편과 시편 121편 서두의 절은 시편집에서 "내가 눈을 든다"(I lift up my eyes)라는 표현이 나오는 유일한 곳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보좌의 위치에 대한 문학적인 묘사에는 어떤 모호함이 있었다. 고대 근동의 대부분의 다른 문화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의 신이 하늘 위에 거주하며 당연히 그분의 [보좌가 있는] 공식 알현실(throne room)은 하늘 궁전에 위치한다고 생각했다(1b절; 시편 2:4; 이사야 66:1 참조). 다른 한편으로, 이스라엘의 특징을 잘 드러내는 묘사들에서는, 야훼는 성전 안의 지성소에 있는 [하나님을 섬기며 옥좌를 떠받치는 천사인] 케루빔(cherubim) 위에 앉아 계셨다(출애굽기 25:17-22; 삼상 4:4; 삼하 6:2; 열왕기하 19:15), 이스라엘의 종교 사상에서는, 이 두 개의 이미지가 동시에 양립할 수 있었음을 의심할 이유는 전혀 없다.

2절의 이미지들은 이 시편에 독특하다. 자신들의 주인 혹은 여주인의 호의를 기대하는 종들에  대한 묘사는 평범하지만, 주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묘사하기 위한 그런 직유법 표현은 다른 곳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사실, "종"(maid)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 shiphchah는 시편집에서 오직 여기에서만 발견되며, 그리고 성문집에서는 드물게 발견된다. 그것의 동의어인 'amah는 신에게 직접 말을 걺에 있어서 겸손을 의미하기 위해 이따금 비유적으로 사용되기도 하지만(예를 들어, 삼상 1:11), shiphchah는 그런 목적으로는 결코 사용되지 않는다.

2b절을 글자 그대로(literally) 어떻게 번역해야 할지는 불분명하다. 이 2b절은 탄원자들이 "속죄판"(mercy seat, 출애굽기 25:17; 26:34 등)으로 번역된 계약궤의 순금 뚜껑에 놓여 있는 케루빔 보좌를 향해 끊임없이 기도를 드리는 성전에서의 철야 기도를 의미할지도 모른다. 다른 한편으로, 2b절은 단순히 흔들림이 없는 평생의 헌신적인 신앙심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시편집에서 오직 여기와 이사야 33:2에서만 나오는 복수형보다는 단수형("나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시편 4:2와 그리고 다른 17곳에서 나옴)이 훨씬 더 빈번하지만, 3a절의 자비의 요청은 시편집에서 일반적이다. 여기에서처럼, 신적 자비의 증거는 보통은 시편 기자의 고통을 야기하고 있는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다. 오만한 자들의 "멸시"(3b, 4b절)와 "평안하게 사는 자들"의 조롱(4a)은 시편 기자의 괴로움의 원인인데, "멸시"(contempt)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 buz는 거의 전적으로 시문학과 지혜문학에서 발견된다. 이것은 이 시편이 지혜 집단들의 영향을 받았다는 또 다른 단서인데, 이 단어가 예외적으로 등장하는 한 가지 경우는 창세기 38:23이다. 성경의 문맥에서, 멸시는 교만과 사악함(욥기 31:34; 시편 31:19), 혹은 번영과 평안함(욥기 12:5)에서 솟아나는 감정이다.

구약성경에서 "평안한"(at ease, 4a절) 누군가에 대한 묘사에는 숨은 저의(底意)가 있다. 보통 사람들은 특히 안식일에 하나님이 주시는 휴식을 통해서만,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의 방식들에 대한 분별 있는 헌신을 통해서만(잠언 1:33 참조) 평안했다. 그렇지 않으면, 평안하다는 것은 축적, 압제, 그리고 사회적 불의를 나타내는 과도한 부(富)를 가리키는 것이었다(예를 들어, 사악한 자들이 "언제나 평안한" 것으로 묘사되는 시편 73:12; 예루살렘의 평안한 여자들이 "걱정거리 없이 사는 딸들"로 묘사되는 이사야 32:9; 아모스 6:1에서 "시온에서 안심하고 사는 자들"에 대한 예언자의 경고; 그리고 스가랴 1:15를 보라.) 시편 기자는 "평안하게 사는 자들"과 "오만한 자들"을 비난함으로써 부자들을 나머지 우리와 갈라놓으며, 그런 다음, 주님으로부터 오는 구원을 찾는다.     

* 설교 본문

수천 년 동안, 우리는 치명적인 뱀들에게 물리지 않으려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제 우리의 눈을 하나님께로 들어올릴 때가 왔다.

인류학자인 린 이사벨에 따르면, 우리의 아득히 먼 친척들은 그들 곁에 그리고 그들 앞에 있는 물체를 보고 식별하는 특별한 능력을 발전시켰다. 이 능력을 가진 사람들은 뱀에게 물리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뱀에게 물리는 것은 인간의 생명에 대한 매우 실제적인 위협이어서, 오늘날에도 매년 15만 명 가량의 사람들이 뱀에게 물려 죽는다.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은 인간 생존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이었다고 그녀는 말한다. 그런데 시편 기자는 우리의 눈을 아래로 떨어뜨리는 것이 아니라 들어올리는 것이 창조주와의 의미 있는 관계를 위한 열쇠라고 말한다.

뱀의 눈(snakes eyes). 그것은 한 쌍의 주사위를 굴려서 1의 눈이 두 개 나오는 경우를 일컫는 말이다. 그것은 많은 게임들에서 실패를 가리키며, 그리고 종종 불운과 연관된다.

우리의 조상들은 뱀의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실로 대단한 행운이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우리의 고대의 친척들은 그들의 생명의 가장 위험한 약탈자, 즉 뱀을 탐지하고 피할 수 있는 눈을 발전시켰다. 이 특질은 그들이 생존하고 번성하여 명실상부한 인간 존재로 발전할 수 있게 해주었다.

창세기에서도 바로 그것을 언급하고 있다고 린 이사벨은 말한다: "뱀이 우리를 인간으로 만들었다."

자신의 곁에 그리고 앞에 있는 물체를 보고 식별할 수 없는 고대의 한 여성을 마음속에 그려 보라. 독사 한 마리가 그녀를 물만큼 아주 가까이 있다. 결국, 독사는 그녀를 물어 죽이고 그녀의 번식 능력을 끝장낸다. 몇 미터 떨어진 곳에 또 다른 여성이 있다. 그녀의 눈은 약간 더 좋아서 독사를 발견하고 피할 수 있다. 이 여성은 계속해서 아이를 많이 낳아 종족을 번식시키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뻗어 있는 연속적인 세대들을 통하여 그녀의 유전자를 전달한다.

그러나 인간 발전의 이 특별한 요소는 더 나은 시력(vision)으로 끝나지 않았다. 인간의 생명을 순식간에 앗아갈 수도 있는 뱀에 대한 고대인들의 경험은 우리로 하여금 뱀을 무서워하게 하였는데, 이것은 에덴 동산의 뱀 이야기, 그리고 호주 원주민의 신화에 나오는 '무지개 뱀'(Rainbow Serpent) 이야기에서 불쑥 나타나는 뿌리 깊은 감정을 만들어낸다.

더 중요한 것은, 뱀을 발견하는 것(snake-spotting)이 두뇌 성장을 촉진하여 언어의 발달을 낳았다는 것이다. 일단 우리의 조상들이 뱀을 분별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들은 남들에게 위험을 알리려는 노력 가운데 그것들을 "가리키기"(point to) 시작했다고 린 이사벨은 주장한다. 이 가리키는 행위는 언어 발달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단계였는데, 그것은 공동체의 이익을 도모하는 정보를 전달하였다.

<설교자노트>는 이사벨의 주장을 옹호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의 발전은 뱀을 내려다봄으로써가 아니라, 만일 이사벨이 옳다면 하나님을 올려다봄으로써 계속되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언급한다. 시편 123편에서는 말한다: "하늘 보좌에서 다스리시는 주님, 내가 눈을 들어 주님을 우러러봅니다. 상전의 손을 살피는 종의 눈처럼, 여주인의 손을 살피는 몸종의 눈처럼, 우리의 눈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길 원하여 주 우리 하나님을 우러러봅니다"(1-2절).

우리는 우리 조상들의 이야기를 믿어야 한다. 그들은 뱀의 눈, 즉 독사를 발견하고 그것을 남들에게 가리킬 수 있게 하는 눈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 참으로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종의 눈(servant eyes), 즉 우리의 참된 주인이신 주님께 시선을 돌리고 그분의 길을 식별할 수 있는 눈을 발전시켰는가?

미래의 인간의 성숙은 우리의 눈을 땅으로부터 들어올려 하나님께 집중할 것을 우리에게 요구할 것이다. 영적 시력의 영역에서, 우리의 시각적인 날카로움은 계속 발전해야 한다.

시편 123편은 우리에게 하나님, 즉 우리의 최고 주권자이신 분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다. 우리가 완전히 독립적이고 자기 의존적이며 우리 자신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서, 우리는 그분이 우리의 주권자라는 사실을 종종 망각한다. 우리의 눈이 하나님에게서 벗어날 때, 뱀은 우리를 되풀이하여 문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가 절실히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들이 모두 우리 스스로 야기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너무나도 많은 멸시를 받았고"(3절) "평안하게 사는 자들의 조롱과 오만한 자들의 멸시가 우리의 심령에 차고 넘치기"(4절) 때문에,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다는 것을 시편은 또한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시편 기자의 삶을 비참하게 만드는 교만한 압제자들의 정확한 정체는 알 수 없지만,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서성거리는 그들의 후손들을 볼 수 있다: 가난한 자들의 투쟁에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라틴 아메리카의 부유한 지도자들, 기독교인들을 공격하는 파키스탄의 이슬람교도 폭도들, 사람들보다는 이익에 훨씬 더 많이 집중하는 미국 실업계의 거물들....

전 세계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은 교만한 자들의 멸시와 평안하게 사는 자들의 조롱을 여전히 견디고 있다. 우리 혼자만의 힘으로는 이러한 잘못을 바로잡을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더 높은"(higher) 힘이 필요한데, 우리의 눈을 들어올려 "하늘 보좌에서 다스리시는 주님"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우리가 종의 눈을 가지고 하나님께로 시선을 돌릴 때 진정한 변화가 시작된다. 

좋은 시력은 우리가 변화를 위한 기회들을 볼 수 있도록 도와준다. 영적 시력의 발전은 사회에 심원한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역사는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그리스도 이후 처음 몇 세기 동안, 로마 제국은 계급 의식이 강하고, 소수를 학대하고, 약한 것을 싫어하는 사회였는데, 이것은 오늘날 우리 자신의 사회와 별로 다르지 않다. 그러나 수백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유대교의 한 아주 작고 하찮은 종파에 불과했던 기독교는 도망친 노예들과 주부들로부터 유력하고 문벌이 좋은 귀족들에 이르기까지 세상의 기존 질서에 점점 더 불만을 품은 그리스인들과 로마인들을 위한 한 영적 피난처로 성장했다.

왜 그런가? 토마스 카힐은 그의 책 『중세 시대의 신비들』에서 말한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고 그분께 똑같이 소중하다는 기독교의 주장은 그리스-로마 사회를 관통하며 거센 물살처럼 흘렀다. 기독교는 늘 그늘 속에 갇혀 있었던 여자들에게 피난처였고, 전에는 한번도 사회적 존엄이나 정치적 중요성을 인정받았던 적이 없는 노예들에게도 그랬다. 귀족들조차도 예수 운동에 가담하였다. 그들은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 그들 자신의 길에서 벗어난, 신실하고 용기 있는 진리의 구도자들이었다."

기원 후 4세기에 이르러, 기독교가 그리스-로마 세계에 너무 많이 스며들었기 때문에, 로마 황제 콘스탄틴은 마침내 기독교를 합법화하였다. 그리고 기독교는 신속히 로마 제국의 지배적인 종교가 되었다. 사람들이 그리스와 로마의 신들 대신 예수에게로 그들의 눈을 들어올렸기 때문에, 세계는 다른 곳이 되었다.

물론, 콘스탄틴이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세상이 완전하게 된 것은 아니었다. 에덴의 옛 뱀은 여전히 주변에 도사리고 있었다. 그 뱀은 오늘날에도 계속해서 소동을 일으키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들 모두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고 그분께 똑같이 소중하다는 사실을 발견할 때, 상황은 개선된다. 사람들이 예수, 즉 종 되신 주님(servant Lord)을 따르고 종의 눈으로 하나님께 시선을 돌릴 때, 우리의 세계는 더 나은 곳이 된다.

오늘날 미국의 많은 교회들에서, 기독교인들은 국제적인 선교 여행을 통해 봉사의 힘을 배우고 있다. 버지니아 주에 있는 Fairfax 장로교회에서, <온두라스 선교 여행을 하는 중년 남자들>이라는 단체는 매년 진료소, Youth for Christ camp, 그리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크리스천 기숙학교를 지원하고 있다.

해마다 이 선교 여행에 참가하는 남자들 중에는 다양한 분야에서 전문가로 활동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 중에는 에너지 회사 사장, 국제무역 변호사, 그리고 광산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는 엔지니어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온두라스 선교 여행을 할 때, 그들은 세상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힘(power), 즉 하나님의 종이 되는 데서 나오는 힘을 활용한다.  

온두라스에서, 그 중년 남자들은 아이들에게 투자함으로써 하나님을 섬긴다. 아이들은 온두라스의 미래이다. 그리고 그 단체가 그 아이들을 위해 행하는 모든 것은 앞으로 강력하고 긍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다. 그 남자들이 Youth for Christ camp에서 큰 식당을 지으면서 몇 날을 보낸 것은 그 때문이다. 그들이 기숙학교에서 발전기를 돌리려고 땀을 뻘뻘 흘리며 열심히 일한 것은 그 때문이다. 그들이 아이들과 어른들을 돌보는 진료소에서 약품을 전달하고 힘든 건축 일을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Compassion International> 회장인 웨스 스태포드는 교회들이 영적 노력과 가난에 반대하는 일에 집중할 것을 권고한다. "가난은 궁극적으로 하나의 메시지"라고 그는 말한다. "한 어린아이의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심적 태도는 말한다. '포기하라. 너는 중요하지 않다, 아무것도 소용이 없다. 너는 종종 아프다. 너는 학교에 다니지 않으며, 그리고 네가 학교에 간다고 해도 공부를 잘하지 못한다. 너에게 변화를 가져올 것은 아무것도 없다. 포기하라.'" 이러한 부정적인 메시지는 아이들의 마음속으로 파고든다. 그리고 그들이 자신들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거짓말을 믿을 때, 그들의 눈에서 생기가 사라진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종들은 전혀 다른 메시지, 즉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은 똑같이 소중하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아이들이 다음의 사실을 깨달을 때, 그들은 가난에서 벗어나기 시작한다는 것을 웨스 스태포드는 줄곧 보았다: "하나님은 나를 아신다! 그분은 내 이름을 알고 계신다. 그분은 내 머리에 머리카락이 얼마나 많이 달려 있는지 알고 계신다. 그분은 내 손가락 지문의 무늬를 알고 계신다. 그분은 나를 활짝 웃게 하셨으며, 그리고 그분의 아드님을 보내셔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셨다. 어쩌면 나는 참으로 중요하다." 아이들이 자신들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발견할 때, 그들은 가난에서 벗어나는 길 위에 있다.

종의 눈을 가지고 주님을 우러러 볼 때, 우리의 영적 발전은 오늘날에도 계속된다. 우리가 단순히 뱀에게 물리는 것을 피하는 것만으로는 더 이상 불충분하다. 그렇게 소극적이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인간의 필요들을 보고, 그리고 그리스도의 추종자들로서 물질적 및 영적 가난 둘 모두를 경감시키도록 협력해야 한다.

오직 그런 때에만, 우리는 눈과 눈을 맞대고 하나님을 본다.

<가능한 설교 주제들>
*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가 절실히 필요하다.
* 주인인 동시에 여주인이신 주님(시편 123:2)
* 남들의 멸시와 조롱에 올바로 반응하기
 
* 예화

+ 11월의 시         

텅텅 비워
윙윙 우리라

다시는
빈 하늘만

가슴에
채워 넣으리
(홍수희·시인)

+ 가을 들녘에 서서

눈멀면
아름답지 않은 것 없고

귀먹으면
황홀치 않은 소리 있으랴

마음 버리면
모든 것이 가득하니

다 주어버리고
텅 빈 들녘에 서면

눈물겨운 마음자리도
스스로 빛이 나네.
(홍해리·시인)

+ 나목(裸木)

칼바람 눈밭에서도
나무는 당당하다

꽃을 피워내며 몸을 낮추고
잎을 거느리며 가지를 늘어뜨리고
열매를 키우며 몸을 숙이던
나무는
잎도 열매도 모두 내려놓고
겨울날부터
차가운 바람
살이 터지는 추위에도
더욱 몸을 꼿꼿이 세우고
어찌 당당히 맞설 수 있는지

욕심도 버리고
빈 몸이 되면
떳떳할 수 있다는 걸
침묵으로 말한다
(유창섭·사진작가 시인)

+ 자연의 감사절

현란한 색상이 혼을 빼앗는
가을 中葉에 산길을 걷는다.
수만 개 촛불을 입은 듯
단풍나무에 불이 타고
천년 이끼를 입은 바위 틈새에
간신히 발을 붙이고 사는 잡초도
샛노란 등불을 밝히고 있다.
아름드리 고로쇠나무 잎들도
마지막 혼 불을 피우고
도토리를 쏟아낸 굴참나무도
마지막 열정을 잎으로 토한다.
산은 지금 조물주께 고마워하며
나무들마다 횃불을 손에 들고
감사절 예배를 드리고 있다.
각기 살아온 색깔대로
알알이 맺힌 열매를 내 놓으며
누구 하나 창고에 들이거나
발 밑에 묻어 두지 않고
내 것과 네 것을 구분 짓지 않으며
누가 가져가도 상관하지 않는
유무상통을 하고 있다.
몇몇 새들도 열매를 물고
감사의 노래를 부르며 날고 있다.
산은 나를 위하여 살지 않고
우리를 위하여 살고 있다.
나는 오늘 에덴동산을 걸었다.
(박인걸·목사 시인)

+ 하느님을 떠나지 말라 
 
남에게 사랑 받고 싶다는 바람이 커지면,
우선 네가 처한 상황과 곁에 있는 사람들이 정말
하느님이 바라시는 대로인지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영화를 보든, 책을 쓰든,
발표를 하든, 무엇을 먹든, 자든, 다른 무엇을 하든
너는 하느님과 함께 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외로움이 사무쳐 견디기 어렵거나
다른 사람과의 우정이나 사랑을 갈망하게 될 때도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이런 상황이 하느님이 허락하신 것인지 물어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하느님과 함께하는 곳에는
비록 고통스러운 순간이 있을지라도
그분이 너를 지켜 주시고 평화를 주시기 때문이다.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고 싶다면
절제되고 바른 생활을 해야 한다.

영적 삶에 관심을 가지고
마음속에서 들려오는 하느님의 말씀에 귀기울일수록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과 그렇지 못한 삶을
구분하기가 더욱 쉬워지고,
하느님이 함께하지 않는 곳을 버리고
떠나오기가 더욱 쉬워진다.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매 순간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하느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선택해야 한다.
먹거나 마시거나 일하거나 놀 때,
그리고 말을 하거나 글을 쓸 때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
즉시 그 일을 멈추어야 한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살지 않는다는 것은
네 자신의 영광을 위해 살기 시작했다는 뜻이며,
이는 네가 하느님을 떠나서 결국에는
스스로를 망치게 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무슨 일을 하든지 그것이 하느님과 함께하는
일인지 아닌지를 늘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너는 이미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알고 있다.

남에게 인정받고 받아들여지고
사랑받고 싶다는 바람에서 무슨 일을 하면,
그리고 이런 인간적인 바람이 커지도록 내버려두면,
하느님은 더 이상
네 곁에 계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인간의 바람과 욕망은 끝없어
이에 굴복하면 할수록 더욱 커질 뿐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면
너는 하느님의 평화를 느끼게 될 것이다.
(헨리 뉴웬)

+ 영혼의 망원경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아이작 뉴턴(1643-1727)은 인류 역사에 위대한 업적을 남긴 과학자였다. 동시에 믿음의 후배들에게 아름다운 본을 보여준 훌륭한 신앙인이었다. 삶이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늘 골방에 들어가 기도하여 새 힘을 얻은 그는 이런 고백을 했다고 전해진다.

"나는 과학자로서는 늘 천체 망원경을 통해 하늘의 별들을 관찰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자주 골방에 들어가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그러면 세상의 그 어떤 망원경으로도 볼 수 없는 하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기도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게 하는 내 영혼의 망원경입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영혼의 망원경을 갖고 있는가? 역경을 만날 때에 그 역경만을 보지 않기 바란다. 그 역경을 통해 우리의 인격을 다듬어 가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보기 바란다. 우리가 당하는 모든 시련과 어려움을 통해 가장 좋은 것을 만들어 가시는 거룩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라. 아이작 뉴턴처럼 기도의 망원경으로 하늘의 영광을 바라보라.
(서정오, 『하나님만이 희망이다』)

+ 크고도 작은 하나님

영국의 유명한 사상가 안토니 콜린즈는 『자유 사상에 대한 강화』의 작가로도 잘 알려져 있다.

어느 날, 콜린즈는 교회로 가던 길에 허름한 옷차림의 노동자를 만났다. 그 노동자 역시 교회에 가는 길이라고 했다. 콜린즈는 그 노동자를 좀 당혹스럽게 할 생각으로 물었다. "당신의 하나님은 큰 하나님입니까? 작은 하나님입니까?"

콜린즈는 다소 장난스러운 기분으로 그 노동자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그는 아주 완전한 대답을 듣게 되었다. "하늘 중의 하늘도 그분을 품을 수 없을 만큼 그분은 큰 분입니다. 또한 그분은 내 마음속에도 거하실 만큼 그렇게 작은 분이십니다."

훗날 콜린즈는 이 간단하고도 빼어난 대답에 대해 이렇게 고백했다.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사람에게서 들은 이 대답은 내가 전에 호감을 가지고 탐독했던 방대한 양의 종교 서적들보다도 내 마음에 더 큰 감동을 주었다."

+ 하나님의 자유재량권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에 관해 참으로 많은 것을 듣는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 인정이 많으신 하나님, 참으로 위대하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세상에서 가장 힘이 세신 하나님, 초월적인 하나님,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생명의 수여자이신 하나님, 죽음의 창조자이신 하나님,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 의인과 악인을 심판하시는 하나님...... 이로써 내가 의미하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에 관해 아주 많은 것을 듣고 또 알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설령 우리가 하나님에 관해 속속들이 알고 있다고 해도, 하나님은 그분 나름의 자유 재량권을 갖고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에 관해 다 알고 있다는 자만심으로 하나님을 우리의 인간적인 생각에 예속시키거나 제한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밥 딜런)

+ 하나님을 만나려면

제자가 스승에게 매일 똑같은 질문을 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찾을 수 있나요?" 그리고는 매일 똑같이 신비스런 답변을 들었다. "갈망함으로써." "그렇지만 저는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갈망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그분을 못 찾지요?"

하루는 스승이 제자와 함께 강에서 목욕을 하고 있었다. 스승은 제자의 머리를 물 속 깊숙이 밀어넣었다. 그리고는 그가 숨이 턱까지 차서 벗어나려고 필사적으로 몸부림칠 때까지 놓아주지 않았다. 제자는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와서야 겨우 풀려났다.

다음 날 스승이 먼저 말을 꺼냈다. "어제, 자네 머리를 물 속에 들이밀었을 때, 왜 그리도 심하게 몸부림을 쳤지?"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아 그랬습니다." "바로 그걸세. 그렇게 하나님을 숨막히도록 간절히 찾는다면 반드시 하나님을 만나게 될 걸세."
(앤소니 드 멜로) 

+ 하나님을 만나려면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하는 한 어린 소년이 있었다. 그래서 소년은 초콜릿과 음료수를 배낭에 챙겨 들고 여행길에 나섰다.

한참을 걸었을 때 소년은 길에서 할머니 한 분을 만났다. 할머니는 지치고 배도 고파 보였다. 그래서 초콜릿을 꺼내 할머니에게 드렸다. 할머니는 고맙게 받아들고 소년에게 웃음을 지으셨다. 할머니의 그 모습이 너무도 아름다웠기에 이번에는 음료수를 드렸다. 할머니는 또다시 웃어 보이셨다. 할머니와 소년은 가끔 서로를 바라볼 뿐 다른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날이 어두워지자 소년은 피곤을 느꼈다. 그래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몇 걸음 걸어가다 말고 달려가 할머니를 꼭 껴안아 드렸다. 집으로 돌아온 소년의 얼굴에는 행복이 흘러넘쳤다. 소년의 어머니는 소년의 행복한 표정을 보고 물었다. "오늘 무엇을 했기에 그렇게 행복해 보이니?” “오늘 하나님과 함께 점심을 먹었어요. 엄마도 아세요? 하나님은 내가 지금까지 본 중에 가장 아름다운 미소를 가지셨어요."

할머니의 아들 역시 할머니의 얼굴에 나타난 평화로운 표정을 보고 놀라서 물었다. "어머니, 오늘 무슨 일이 있으셨기에 그렇게 행복해 보이세요?” 그녀가 대답했다. “오늘 공원에서 하나님과 함께 초콜릿을 먹었단다. 너도 아니? 그분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젋더구나." 

마더 테레사는 하루에 다섯 번만이라도 미소를 지으라고 했다. 그러면 주위 사람들이 하나님으로 바뀔 것이며 쉽게 하나님을 뵐 수 있을 거라고.
(권상혁 엮음, 『배꼽 없는 사람은?』)

+ 이 세상은 교회와 교인들을 바라보고 있다 

고든 케디 목사는 그의 저서 『그의 이름은 야훼』에서 말했다. "이 세상은 교회와 교인들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세상은 교회가 전파하는 메시지를 크리스천들이 실천하기를 원합니다. 이 세상은 크리스천들이 보다 높은 수준의 도덕과 겸비와 경건함을 유지해 주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무리한 요구가 아닙니다. 크리스천들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 것에 불과합니다. 성도 여러분, 당신들 주변에 있는 불신자들은 당신들의 삶과 양심이 그들보다 훨씬 더 고결하고 민감하기를 기대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불신자들은 모순된 크리스천들을 끄집어내기를 좋아합니다. 한편으로, 그런 것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배척하는 구실이 된다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그렇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말로는 사랑하라고 하면서도 사랑하지 못했으며, 감사하라고 하면서도 감사하지 못했으며, 겸손하라 하면서도 겸손하지 못했으며, 정직하라 하면서도 정직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정작 큰 문제는 어떤 시도나 노력을 해보지 않는 데 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지고 갈보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구원은 최종 목적이 아니라 오히려 시작이다. 우리를 구원하고 성장시키시는 절대적인 이유는 우리가 선한 일을 실천하게 하려는 것이다.
(박종신, 『예수 25시』)

+ 10분 동안의 묵상    

언젠가 놀란드 헤이즈라는 흑인 가수가 독일 베를린에서 독창회를 가졌다. 독창회에 모여든 사람들은 모두 백인이었다. 그런데 헤이즈가 노래를 시작하려고 할 때 누군가가 소리쳤다. "흑인의 노래는 들을 수 없다! 검둥이의 노래를 집어치워라!"

욕설과 함께 물건이 날아왔다. 얼마나 치욕스러운 일인가? 가수 자신도 이에 맞서 욕설을 내뱉었다. 그렇게 맞받아 욕하고 돌아서는데 그의 앞을 가로막는 환상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빌라도의 법정 앞에 서 계신 예수님이었다. 예수님은 온갖 모욕을 당하면서도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헤이즈는 그 환상을 보고 청중을 향해 돌아섰다. 고개를 숙이고 묵상에 잠겼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다. 눈에서는 말없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소란스럽던 청중도 그 모습을 보고 태도가 바뀌었다. 모두들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10분쯤 시간이 흘렀을까, 헤이즈는 목소리를 가다듬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깊은 감동을 받았다.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훌륭한 독창회가 되었다. 노래가 끝났을 때, 박수 소리가 우뢰처럼 터져 나온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여러분, 잊지 말라. 그 흑인 가수가 가졌던 10분 동안의 묵상은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럽고 아픈 것이었음을.

+ 하나님의 미용실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를 위해 미용실을 경영하신다. 우리의 외모와 영혼을 말씀과 기도로 새롭게 디자인하기를 원하신다.

유명한 곡예사가 그의 제자들에게 고공에서 수평봉에 매달려 재주를 부리는 곡예를 가르치고 있었다. 이 곡예를 부리는 데 필요한 모든 설명과 지시를 마친 후, 마침내 곡예사는 제자들에게 그들 각자의 능력을 펼쳐 보이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그 중 한 소년이 높이 걸려 있는 수평봉을 올려다보고 그만 겁에 질려 버렸다. 그 소년은 옴짝달싹 못할 지경으로 완전히 얼어 버렸고, 그 높은 공중에서 자신이 사정없이 땅으로 떨어져 내리는 무서운 광경을 마음에 그리면서 극심한 공포로 인해 전신의 근육이 온통 빳빳하게 굳었다.

"못하겠어요. 도저히 못하겠어요." 소년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로 떨며 그렇게 말했다. 그때 곡예사는 그 소년의 어깨에 자신의 손을 얹으면서 말했다. "너는 충분히 할 수 있어. 네가 어떻게 하면 되는지 내가 너에게 가르쳐 주마." 그리고 곡예사는 소년에게 귀중한 한마디를 던졌다. "저 수평선 너머로 네 온 마음을 던져라. 그러면 네 몸이 그 마음을 뒤따를 것이다!"

이 말은 나를 변화시킨 소중한 말이다. 가끔 머뭇거릴 때마다, 나는 이 말을 생각하곤 한다. 사람이 환경에 사로잡히기 시작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하나님의 계획에 순응하는 것을 배울 필요가 있다.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을 수평선 너머에 계신 하나님께 맡기면 어떨까?
(이문희, 『하늘 한번 쳐다보고』)

+ 보이지 않는 손들

세상을 다스리는 것은
뱃심좋게 공약을 외치며 허공 높이 쳐드는 정치인들의 검은 손이 아니라
불의를 고발하고 악을 심판하는 용감한 민초들의 정의로운 흰 손이다

세상을 살지게 하는 것은
회전의자에 묻혀 계산기나 잘 두드리는 기업인들의 두툼한 손이 아니라
선적 일을 지키기 위해 밤새워 기계를 돌리는 공장의 기름 묻은 손,
그리고 땡볕에 들판에서 온종일 땀흘려 김을 매는 거친 농부들의 손이다.

세상을 끌어올리는 것은
얼굴 내밀기 즐겨하는 대학의 총장들이나 약삭빠른 어용교수들의 구부러진 손이 아니라
밤 깊도록 불을 켜 놓고 연구실을 지키는 겸허한 학자들의 곧은 손이다.

세상을 더 무너지지 않도록 떠받치는 것은
백화점에서 수백만 원짜리 모피코트를 흥정하는 붉은 매니큐어의 손이 아니라
구멍가게에서 몇 백 원어치의 콩나물을 소중히 안고 돌아오는 마디 굵은 손이다.

세상을 아름답게 꾸미는 것은
화려한 의상 향긋한 향수로 화사하게 치장한 멋진 여인들의 손이 아니라
길가에 떨어진 휴지를 줍기도 하고, 벙어리 저금통을 의연금함에 몽땅 쏟아 넣기도 하는
고사리 같은 어린 손이다.

세상을 구원하는 것은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솟은 장엄한 사원에서 기도하는 성직자의 경건한 손이 아니라
가난과 질병으로 거리에 버려진 불행한 이웃들을 남몰래 찾아다니며
고통을 나누는 사랑의 손이다.

그래도 아직 세상을 이만큼 지켜 온 것은
총과 칼의 힘이 아니라
세상에 드러난 유명한 얼굴들 때문이 아니라
자유와 평화를 생명처럼 사랑하는
보이지 않는 수많은 손들 때문이다.
(임보·시인, 1940-)

* 예배 자료

+ 예배에의 부름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
내게 당신을 주소서.
당신 한 분으로 나는 만족하나이다.
내가 구하는 오직 한 가지는
당신께 합당한 자가 되는 것.
당신께 합당치 못하면
나는 언제나 궁핍한 자가 되오니,
나는 오직 당신 안에서만
만물을 소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줄리앙, '내가 구하는 오직 한 가지')
 
+ 11월 - 마지막 기도

이제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두고 갈 것도 없고
가져갈 것도 없는
가벼운 충만함이여

헛되고 헛된 욕심이
나를 다시 휘감기 전
어서 떠날 준비를 해야지

땅 밑으로 흐르는
한 방울의 물이기보다
하늘에 숨어사는
한 송이의 흰 구름이고 싶은
마지막 소망도 접어두리

숨이 멎어가는
마지막 고통 속에서도
눈을 감으면
희미한 빛 속에 길이 열리고
등불을 든 나의 사랑은
흰옷을 입고 마중 나오리라

어떻게 웃을까
고통 속에도 설레이는
나의 마지막 기도를
그이는 들으실까
(이해인·수녀 시인)

+ 기도

내가 외로운 사람이라면
나보다 더 외로운 사람을
생각하게 하여 주옵소서.

내가 추운 사람이라면
나보다 더 추운 사람을
생각하게 하여 주옵소서.

내가 가난한 사람이라면
나보다 더 가난한 사람을
생각하게 하여 주옵소서.

더욱이나 내가 비천한 사람이라면
나보다 더 비천한 사람을
생각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때때로 스스로 묻고
스스로 대답하게 하여 주옵소서.
(나태주·시인)

+ 우리 아버지시여, 우리 왕이시여 

우리 아버지시여, 우리 왕이시여,
우리는 당신 앞에서 범죄하였나이다.

우리 아버지시여, 우리 왕이시여,
우리에게는 당신 이외에 다른 왕이 없습니다.

우리 아버지시여, 우리 왕이시여,
완전한 회개 가운데서 우리를 당신께 돌아가게 하소서.

우리 아버지시여, 우리 왕이시여,
우리의 이름을 구원의 책 속에 기록하소서.

우리 아버지시여, 우리 왕이시여,
우리 안에 비록 선한 일이 없을지라도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우리는 온 세상 안에서 당신의 이름을 거룩하게 할 것입니다.

오 하느님, 우리 조상의 하느님이시여,
영광 가운데 온 세상을 다스리소서.
(기원전 유대회당에서 드리던 기도)

+ 헌신에 대한 묵상기도

목불木佛이 되어
연화좌에 모셔진 것도

장승이 되어
동구 밖을 지켜선 것도

나무입니다
죽어서 다시 사는 나무.

책상이 되어
공부를 도와주는 것도

기둥이 되어
추녀를 떠받치는 것도

나무입니다
죽어서 큰일을 하는 나무
(김종상·시인, '나무')

 

정연복의 다른기사 보기  
기사를 추천하시면 "금주의 좋은 기사" 랭킹에 반영됩니다   추천수 : 3048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의견나누기(0개)
 * 100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최대 20000byte)
 * [운영원칙] 욕설, 반말, 인신공격, 저주 등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지 않은 글과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올린 글은 통보 없이 삭제합니다.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우)120-012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2가 35 기사연빌딩 401호 ☎ 02-393-4002(팩스 겸용)   |  청소년보호책임자 : 심자득
제호 : 당당뉴스  |  등록번호 : 서울아00390  |  등록연월일 : 2007.7.2  |  발행인 겸 편집인 심자득(010-5246-1339)
Copyright © 2005 당당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dangdang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