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부는 바닷바람에 놀라 잠을 설치다 전망 좋은 바닷가 팬션 앞으로 수줍게 떠오르는 일출풍경에 넋을 잃고 말았다. 이곳이 아침 해가 맨 먼저 비친다는 성스러운 땅이란 말인가?

▲ 감포에서 맞는 환상의 일출풍경

어제는 찬란했던 화랑(花郞)의 정신적 숭고함이 베어있을 것 같은 곳곳을 말 대신 생태적인 이동수단인 자전거를 타고 기행 했지만 오늘은 오랫동안 자연을 품고 살아갔던 신라신화의 발원지 남산을 걷고, 때로는 바위산을 오르며 우리의 옛 신앙문명의 흔적들을 느끼고 교감하기 위하여 아이들과 함께하는 현장프로그램을 갖기로 했다.

▲ 역사기행에 나선 아이들은 신났다.

일제시대 때 최고의 전성기로 불야성을 이뤘던 감포항이 요즘 최대의 농어업 위기를 맞아 농촌마다 활력을 잃어가고 있다. 작은 규모의 어선들이 빼곡히 정박해 있는 감포 선착장을 뒤로하고 두 대의 차에 10명이 나누어 타고는 전촌리와 노동리를 거쳐 토함산 자연휴양림 가는 방향 못 미쳐 동해로 흘러들어가는 대종천의 상류계곡 언덕 위에 자리한 장항리 절터를 만났다.

▲ 자연이 품어 준 장항리 절터 석탑 앞에서

언제부터인가 이곳에 주차장과 시원스런 계곡위로 구름다리가 놓여졌다. 신이 난 아이들은 얼어붙은 계곡을 향해 뛰어들고, 어른들은 가파른 돌계단을 올라 원형이 제대로 보존된 5층 석탑과 그 옆으로 몸돌을 잃어 안쓰러워 보이는 석탑에 사랑이 간다.

금당 터에는 돌계단을 쌓았던 흔적이 있고, 불상을 모셨던 8각 연꽃 대좌(臺座)와 돋을 새김한 신수(神獸)가 남아 있다. 동탑은 계곡 속으로 굴러 떨어진 것을 해방 후 복구했고, 서탑은 도굴꾼에 의하여 무너져 내린 것을 1932년 복구하여 놓은 것이다.

굽이굽이 토함산 비경에 시선을 빼앗기고 높은 고도에 정신을 놓다보니 어느새 정산에 올라 시원스럽게 펼쳐진 경주를 한눈에 내려다보고는 이내 꼬불꼬불한 석굴암과 불국사 길을 내리달려 곧장 남산으로 향한다.

불국사는 전면에서 바라볼 때, 장대하고 독특한 석조구조는 창건당시에 건설된 8세기 유물들이고 그 위에 목조건물들은 임진왜란 전까지 9차례의 중창 및 중수를 거쳤으며 박정희 정권시절(1970년-1973년)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거치면서 현재의 위치로 자리 잡았다한다. 한국은 중국의 축소판 같다라고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불국사도 중국 안휘성 태호현 태호라는 큰 호수가 옆에 자리하고 있는 불도사와 같은점이 너무 많다.

재야사학자의 견해에 따르면 절 앞에는 큰 돌이 마주보고 서있고, 거대한 자연석 돌을 깎아 다보탑과 석가탑을 만든 것하며, 위쪽에 큰 샘이 있어 자연 폭포를 이루고, 절 앞에 큰 강이 흘러 팔정교(八正橋)를 놓았단다. 그곳에 불정교가 있는데 이는 백운교와 청운교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주변에 천주탑과 천취문(일주문)이 있고, 석굴사가 있는데 이곳에 오릉이 있다고 하니 중국의 불도사도 조망간 답사해 볼 가치가 있겠다.

아무튼 신라는 천년역사를 남산에서 시작하여 남산에서 그 막을 내렸다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남산은 신라 시조 박혁거세가 태어난 나정으로부터 나라의 종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포석정이 자리하고 있다. 아직도 수많은 문화유산이 그대로 살아 숨쉬는 곳, 노상에 방치된 박물관 같다. 과거 김시습이 최초로 한문소설을 썼다는 금오산(金鷔山 468m)도 남산의 주봉을 이루고 있다.

▲ 서출지의 시들은 연꽃위로 우뚝 숏아 있는 이요당

멀리서도 기암괴석들이 하얗게 송림 사이를 총총히 비집고 서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리 높지 않은 산이지만 수십 개의 작은 골짜기에 소나무 숲이 어울려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남산은 수많은 석탑과 불상, 설화를 남긴 토착적 신성이 깃든 곳임을 한 눈에도 알 수 있다.

널따란 통일전 길을 따라 기세등등하게 남산동 서출지를 지나 차로 남산순환도로를 종단해 보려던 계획이 도보통행만이 가능하다는 말에 서출지 앞에서 오던 길로 차를 돌려놓고는 겨울서출지를 감상했다. 서출지는 신라 때부터 내려오던 연못으로 신라 21대 소지마립간 10년(488)에 못에서 글이 나와 궁주의 흉계를 막았다하여 서출지(書朮池)라 하게 되었다. 연못에는 커다란 이요당(二樂堂)이라는 정자가 우뚝 솟아 있다. 한여름이 되면 연못주변으로 연꽃들이 주변의 자연스러움과 어울려 환상적인 멋을 부리겠다.

▲ 작고 소박한 절 무량사

좁다란 밭 사이로 난 길을 따라 무량사라는 작고 아담한 절에 들어가 범종과 법당 앞마당을 감상하고는 화랑로를 따라 가다가 좌측 남천이 흐르는 지류에서 양지마을과 음지마을 사이로 난 길을 통과하여 나정(蘿井)과 양산재(楊山齋)로 향했다.

▲ 나정과 양산재를 넘어 일성왕릉에서 바라본 저수지 풍경

나정은 신라를 건국한 혁거세의 설화가 깃든 우물이다. 건국설화에 따르면 혁거세(赫居世)가 붉은 알에서 탄생한 곳이 나정(蘿井)으로 삼국유사와 삼국사기를 보면 서기 69년(전한지절원년임자:前漢地節元年壬子) 3월 1일, 신라 건국의 주역인 6촌(村)의 촌장들이 모여, 군주를 선출하고 도읍을 정하자고 결정한 뒤 일행이 높은 곳에 올랐다. 그런데 양산(陽山) 아래 나정이라는 우물 근처에 이상한 기운이 돌며 백마 한 마리가 꿇어않아 있어, 가보니 백마는 하늘로 올라갔고 붉은색의 커다란 알만 남았는데, 이 알을 쪼개자 어린 사내아이가 나왔다. 이상히 여겨 동천(東川)에서 목욕시키자 몸에서 광채가 났고 새와 짐승들이 춤추듯 노니, 천지가 진동하며 하늘이 환해졌다.

▲ 남산기행에 나선 용감한 가족들의 행복찾기

대궐은 나정 남쪽 언덕 위 지금의 창림사 터에 세워졌다. ‘말 토템’을 가졌던 천신족(天神族)으로 북방계에서 경주로 이주해온 이주민집단이며, 알영 집단은 '닭 토템'을 가진 지신족(地神族)인 토착족 또는 앞서 이주해온 집단이라고 추정한다. 이로 말미암아 혁거세라고 이름하고 거서간(居西干)이라는 칭호를 붙였다. 처음에 알이 박과 같다하여 성을 박(朴)으로 삼았단다. 혁거세가 10여세 되던 해인 서기 57년 왕으로 추대되어 나라 이름을 아침 해가 맨 먼저 비치는 성스러운 땅이라는 뜻으로 서나벌(徐那伐)이라 했다고 전한다. 이는 경주 일원에 선주민이 정착해 살고 있던 상황에서 새로운 이주민 집단이 들어와 주도권을 장악했던 것으로 보이며, 6부(部)가 연합한 세력의 합의에 의해 대표자가 선출되었던 전통을 반영 했던 면도 엿 볼 수 있다.

양산재는 2천년 전, 고조선에 남하한 유민들이 한반도의 남동쪽 진한 땅에 여섯 곳에 촌을 이루고 살았는데 이 여섯 촌의 촌장들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6부 촌장은 신라(新羅)가 건국하기 전 진한(辰韓) 땅에 알천 양산촌(閼川 楊山村) 이씨 시조 알평(李謁平), 돌산 고허촌(突山 高墟村) 최씨 시조 소벌도리(崔蘇伐都利), 무산 대수촌(茂山 大樹村) 손씨 시조 구례마(孫俱禮馬), 취산 진지촌( 山 珍支村) 정씨 시조 지백호(鄭智伯虎), 금산 가리촌(金山 加利村) 배씨 시조 지타공(裵祗타), 명활산 고야촌(明活山 高耶村) 설씨 시조 설호진(薛虎珍)의 여섯 성씨가 탄생된 촌을 말한다. 신라 3대 유리왕 9년 (서기32년)에 6부 촌장들의 신라 건국 공로를 기리기 위해 6부의 이름을 개정하고 각각 성(姓)을 내리는데, 이 사당은 1970년 6촌장을 기리기 위해 건립하였다고 한다.

▲ 일성왕릉으로 난 오솔길은 섬세한 아름다움이 있다.

커다란 소나무에 둘려진 허름한 나정은 지금 공사중이라 자세히 보지 못하고 양산재도 지나쳐 곧바로 올라가니 작은 절 앞에 쪽빛의 저수지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다다랐다. 이곳 마을에는 유독 커다란 재실들이 많았는데 모두 6부 촌장들을 기리기 위한 사당으로 여겨진다. 초행길이라 산책하는 중년부부에게 유적답사에 도움을 청하니, 이곳 역사에 대한 사정을 누구보다도 여유롭고 자세하게 설명하여 주었다.

신라가 최초로 궁성을 정했다던 정림사 터 인근 숲과 망산과 남산에 얽힌 신화이야기 까지 해주셨다. 즉, 남산 삼릉 앞에 보이는 둥글고 아담하게 생긴 산이 망산으로 여자신이 변하여 일편단심 남산만을 바라본다하여 신라여인의 지조를 상기시켰고, 근육질에 기골이 장대하고 바위가 많은 남산은 남자신이 변화여 생긴 산이란 설명을 해주었다.

잠시나마 남간사터 인근의 역사문화해설을 해주셨던 분은 최씨 성을 가진 분으로 동학운동을 이끈 최수운 선생과 최시형선생 그리고 신라 최고의 갑부이자 CEO인 최부자 댁과도 깊은 인연이 있었다. 그분은 일성왕릉을 꼭 들러보라는 길안내를 하고는 가던 길을 재촉하여 사라지셨다.

절과 저수지 뒤로 난 콘크리트길을 따라 남산을 오르니 5분도 안돼서 제법 커다랗게 생긴 능이 보였다. 파란 저수지의 물과 연한 황토 빛 논밭 그리고 파란 하늘이 맞닿아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하고 있는 일성왕릉 오름길은 낭만적이다.

▲ 꾸미지 않은 천년을 간직한 일성왕릉

신라 제7대 일성왕(逸聖王, 재위 134~154)을 모셨다는 능은 경주남산 북쪽인 해목령에서 뻗어 내리는 능선의 서쪽 경사면에 위치하고 있다. 일성왕의 성씨는 박씨로 삼국사기에는 제3대 유리왕의 맏아들로 삼국유사에는 제3대 유리왕의 조카 혹은 제6대 지마왕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왕은 농사짓는 땅을 늘리고 제방을 수리하여 농업을 권장하였으며, 백성들이 금은주옥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다고 한다.

커다란 소나무들이 마주하고 있는 꾸미지 않은 왕릉에 들어서면 사방이 소나무들이 둘러섰다. 웅장한 봉분은 지름 15m, 높이 5m인데 둘레의 돌이나 주위 환경으로 보아 내부 구조는 돌방으로 추정된다. 이 능은 조선 영조 6년(1730) 이후에 알려지기 시작한 왕릉이다. 하지만 이 왕릉은 '삼국사기'에 남산 해목령에 장사지냈다는 경애왕릉일 것이라고 추정하는 사람도 있어 논란의 여지가 많다.

▲ 남간사 터의 당당한 당간지주는 외롭다.

일성왕릉을 내려와 저수지 물속에 잠겨버린 남간사 터를 뒤로하고 논 한가운데 우뚝 서있는 남간사 터 당간지주와 만났다. 주변에 논에서 기와 조각이 많이 발견되 절이 있었던 곳임을 알수 있다. 당간지주의 높이는 3m로 지주석(支柱石)에는 구멍 두개가 뚫렸고, 꼭대기에 +자 모양의 홈이 파져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 없는 특별함이 있고, 쓰임은 절에 행사가 있을 때 깃발을 세우는 받침이다.

좁은 농로 길을 빠져나와 삼릉 앞에 있는 맛있는 메밀국수로 요기를 채우고는 아이들과 삼릉을 올랐다. 삼릉 초입은 우람한 송림들이 멋들어지게 서있어 세분의 신라왕들이 심심하지 않겠다. 능은 맨 앞부터 신라 54대 경명왕릉(景明王, 재위 917~924), 53대 신덕왕릉(神德王, 재위 912~917), 제일 뒤에 8대 아달라왕(阿達羅王, 재위 154~184) 등 박씨 왕 능으로 전해오는데 신빙성은 없다.

▲ 고즈넉한 배리 삼릉에는 송림 숲이 좋다.

전날 까지만 해도 엄청난 추위와 바람으로 고생했는데 삼릉에서 소나무 언덕을 오르다보니 바람은 온데간데없고 고요하다. 남산위에 저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소리 불변함은 우리기상일세가 이곳 남산을 오르면서 애절하게 생각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 머리와 두 손이 잘린 석불좌상

개울을 따라 300m즘 올라가니 길옆 바위에 머리와 두 손이 잘린 석불좌상이 오르내리는 사람들로부터 열렬한 초코렛과 사탕, 요구르트와 우유로 사랑을 받고 있음을 알았다. 편안히 않은 자세에 기백이 넘치고 가슴과 어깨가 당당해 보이는 불상은 왼쪽어깨 끈의 장식으로 보아 매듭이 먼 신라 때부터 전해왔음을 알 수 있다. 인근에 살고 있는 가족으로 보이는 분들이 간절하게 절을 하는 모습 속에서 아직도 불국신앙의 토착생활이 잊혀지지 않고 생명력을 넘치게 하는구나 생각한다.

왼쪽 길로 난 골짜기 사이를 비집고 들어서니 길쭉하게 생긴 바위를 깎아 만든 풍만한 얼굴에 지그시 미소를 머금고 있는 마애관음보살상의 붉은 입술과 마주했다. 입술부분은 바위의 재질로 인해 붉은 색을 띠고 있었다.

▲ 삼릉 마애관음보살상에는 붉은 입술이 아름답다.

삼릉계곡 마애관음보살상을 돌아 나와 계곡 상류를 따라 오르다 보니 맞은편 쪽으로 큰 바위의 널찍한 자연 암벽에 바위면을 다듬지 않고 각각을 선각(線刻)하여 만든 마애육존불이 눈에 띈다.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선각마애육존불을 멀리서 지켜본 후 오른쪽 길을 택하여 연꽃 대좌 위에서 결가부좌를 하고 향마촉지인을 하고 않아있는 순백색의 화강암 여래좌상을 맞았다. 주변에 웅장한 말의 엉덩이를 닮은 바위를 만나 신기했고, 곧이어 만난 여래좌상은 코에서부터 턱밑까지 파손되어 시멘트로 고정하였으나 정확한 보수 시점(일제 강점기와 1970년대)은 모르나 보기 흉했다. 하지만 오고가는 이들의 지극정성한 치성이며, 단정한 육계와 깨어진 광배의 아름다움으로 봐서 우수한 작품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풍만한 미소에 흉직한 보수를 한 순백색 화강암의 여래좌상

열심히 기도하시는 할머니의 도움으로 여래좌상 뒤쪽 300m쯤에 있는 선각마애여래좌상을 단숨에 뛰어가 대했다. 높이가 10m나 되는 크고 넓은 바위위에 선각으로 새긴 여래좌상은 연꽃대좌부분에 커다란 균열이 생긴 부분을 그대로 연결하여 조각한 듯 보였다. 두 손으로 화병을 잡은 듯한 자세에 인자하게 웃음을 머금은 얼굴부분만을 얕은 돋을새김으로 새겼으며, 나머지 부분은 선각으로 처리했다. 바로 옆에 부부바위와 뒤편에 장군바위가 있으며, 동근 얼굴에 긴 코, 입술이 두터워 고려시대나 신라말기의 것으로 추정한다.

▲ 산속 깊숙한 곳에 살아 숨쉬는 선각마애여래좌상

▲ 상선암을 오르다 만난 작은 새도 영성이 깊다.

상선암을 향해 오르는 길가 작은 새 한 마리와의 인연도 소중하게 생각하면서 숨차게 상선암에 도착해서는 드넓은 대지를 바라다보면서 살아있는 것, 나와 다른 것, 힘찬 기백이 넘치는 우리문화의 역동하는 삶을 생각해 보았다. 남산에서 가장 높은 암자이건만 작고 소박하기가 이룰 때 없는 상선암에는 손 바닥만한 텃밭이 몇 군데 있었는데 어찌도 이리 작은 밭을 일구었을까 존경심을 보내면서 따끈한 차로 목을 축였다.

▲ 아담한 상선암 풍경

이윽고 만난 상선암 마애대좌불 6m가 넘는 바위에 아무런 장식없는 광배를 만들고 거대한 여래좌상(如來坐像)을 새겼다. 잠시 단에 올라 기도하듯 대지를 향해 머리를 숙이고는 마애대좌불을 천천히 올려다보았다. 머리부분은 도드라지게 조각하여 목 아래부터는 거의 선각(線刻)에 가깝게 처리했다. 연꽃 대좌에 결가부좌(結跏趺坐)한 발과 왼손은 다리위에 올려 선정인(禪定印)을 하였고, 오른손은 엄지와 중지, 약지를 한데모아 가슴 높이로 들고 설법하는 몸체로 인공을 생략하고 주위의 바위산과 조화를 이루었다.

▲ 상선암 마애대좌불은 신령한 산기운에 더욱 빛이 난다.

상선암 마애대좌불에서 더 올라가다보니 금오산 정상쪽 거대한 바위능선을 만났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바위가 높이 15m에 달하는 큰 바위로 상사병을 앓는 사람이 소원을 빌면 낳는다는 거대한 바위다. 이곳 위에서 상선암 마애대좌불을 바라보면 화강암의 흰색과 소나무의 푸른색이 만나 더욱 감칠맛이 느껴진다. 더구나 바위 앞에 겹겹이 중첩된 산들의 풍광이란 말할 수 없는 희열과 출렁이는 생명력을 느끼게 해준다.

▲ 바위산 정상에서 만난 산, 돌, 사람

상사바위에서 능선을 따라 1km쯤 가다보면 금오산 정상, 남산일주도로와 겹치는데 구간에는 사방팔방으로 숏아 난 바위산과 마을풍경들이 아름답게 펼쳐져 보인다. 금오산(金鰲山 468m) 정상에는 “높고도 신령스런 금오산이여! 천년왕도 웅혼한 광채 품고 있구나 주인 기다리며 보낸 세월 다시 천년되었으니 오늘 누가 있어 능히 이 기운 받을련가?” 라고 적혀있었다.

▲ 금오산 정상에서

▲ 커다란 송림위에서 바라본 경주!!!

금오산 정상에서 300m 내려오니 좌측으로 약수곡 마애대입불상 이정표가 기다리고 있었다. 골짜기를 따라 한참을 내려 가다보면 고목들이 스러져 불이 났던 흔적들로 가득한 곳을 통과하여 아늑한 양지바른 터를 만나게 되는데 이곳에서 대나무 밭아래 문을 통해 들어가면 몸높이만 8.6m에 달하는 석불로, 남산 불상 중 가장 큰 마애대불상을 만난다. 머리부분이 없어져 아쉬움이 남았지만 오른손은 늘어뜨리고 왼손은 가슴높이로 들어올려 엄지와 검지를 맞댄 손끝이 너무나 곱다. 필자가 결가부좌를 하고 입과 코, 눈과 귀를 통하여 한껏 신령스러운 축복의 기운을 모으니 숨구멍과 땀구멍뿐 아니라 온 몸을 통해서 남산의 힘이 내안으로 스며 들어옴을 느낀다.

▲ 경주남산만의 이정표 문화

마애대불상을 따라 곧장 내려가는 길을 택하지 않고 되돌아와 마사토로 미끄러운 산길을 주위하면서 경주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삿갓봉 쪽으로 방향을 잡고 서서히 내려왔다. 현실의 처절한 고통을 잊기 위해서나 죽어서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끊임없이 이 골짜기를 찾았던 과거우리네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형과 누이 그리고 동생들의 마음을 느껴본다. 더욱이 사시사철 시원한 계곡물로 육체의 위안을 삼고 맑은 정신으로 근원적인 생활신앙을 찾았던 우리서민문화는 자연을 품고 신앙을 품고 진리를 품고 우리에게 독창적인 자유를 품어 주었다.

▲ 마애대불상으로 향하는 길목에는 대숲 문이 있다.

남산에는 줄잡아 40여개나 되는 골짜기와 등성이마다 수많은 문화재가 산재해 있어 살아있는 야외 박물관이라고 불릴만하다. 하지만 굴리고 엎어지고 잘리고 쪼개져 헌신짝이 된 우리의 문화유산을 대하니 씁쓸하기 짝이없다.

▲ 남산 마애대불상에는 목이 없다.

중간에 오르던 길을 만나 삼릉에 다다르니 행운의 돌탑과 길가 오래된 사과나무와 소나무가 범상치 않았던 과거를 상기시켜준다. 오르며 함부로 버린 귤껍질에 눈살 찌푸리고 이리 버리고 저리 쳐 박아 놓은 사소한 쓰레기들에 마음이 아파 작지만 호주머니에 넣어 쓰레기통에 버리니 무거웠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 잠시나마 마애대불상의 목이 되어 묵상하는 모습

▲ 감포항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목 해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