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처럼

요즈음들어서 지인들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횟수가 부쩍 잦아진다.
나도 죽을 날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객관적인 증거 같아서 괜히 마음이
엄숙하고 숙연해 진다.

얼마전에 인터넷 신문을 통해서
" 인간은 죽음앞에 평등하다 " 는 내용의
수필을 읽은 적이 있었다.
한국의 어느 대형교회목사의 요란스런 죽음과
이름없는 장애 어린이들의 죽음을 비교하여
쓴 수필이었다.

이 세상에 인간은 죽음앞에 평등하다는,
그 정도 평범한 말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
그런데 그 글을 읽고 왠지 몇 주 동안 마음이 무거웠다.

학창시절에 고 함석헌 선생님으로부터
"사람은 어떻게 태어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죽느냐가 중요하다 " 는 말씀을
여러 차례 들은 적이 있었다.

그 당시에는 나이먹은 사람들의 푸념정도로
가볍게 생각돼서 심각하게 마음 속에
담아두지 않고 살아 왔었다.
그런데, 이순의 나이를 넘기고 나니
그 말의 의미가 자꾸 뇌리를 스쳐간다.

며칠 전에 가깝게 지내는 친구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솔직히 나는 한국인 특유의 체면치레로
조의금이나 떨구어 놓기 위해서
장례식에 참석하는 경우가 많았었다.
그나마 내가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는
마음은 있어도 참석하지 못하는 경우도
여러 차례 있었다. 장례식장 입구에서 나의 손을
빤하게 쳐다보고 있는 접수하는 분들의 눈초리가
여간 부담스럽게 느껴지 곤 했었다.
.
이번에는 달랐다. 예외적으로 고별예배뿐 아니라,
그 뒷날 하관예배까지 참석을 했다.
그 이유는 유족인 친구와의 각별한 사이라는 탓이
컸었지만, 한편으로는 가까운 장래에 치뤄 질
나의 하관예배모습을 미리 체험해 두고 싶었다.

1924년 한국출생
부인: 3년전 사망
유족: 5남매와 5명의 배필들, 손: 16명 배필 4명, 증손: 5명
경력: 일제 만주강제징용, 한국철도청 근무,
1974년 미국이민, 워싱톤디시 메트로 25년이상 근무.

고인에 대한 간략한 이력서다.
고인은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에 한국땅에 태어나서
일제, 해방, 6.25, 보릿고개, 군사독제시대 등
한국현대사의 온갖 험란했던 격동기를 모두
경험하고 뒤늦게 미국에 이민 온 사람이다.
그것이 이민일세 아버지들의 전형적인(TYPICAL)
과거 역사이고 삶일 지도 모르겠다.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고인은 87세라는 천수이상의 장수와
이 세상의 오복을 모두 누리고 간 축복 받은 사람임에
분명하다.
그런들 고인을 혼자서 저세상으로 보내야하는
유족들은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 하는
찬송가를 부르면서 언젠가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한들 무슨 위로가 되겠는가 ?

"아버지 ! 천국에 가셔서
이 땅에서 이룩하시지 못한 골프싱글의 꿈을
꼭 실현하시길 빌께요. 이메일로 그 기쁜 소식을
알려 주시면 축하해 드리고 싶어요 . "
고인의 장녀가 흐느끼며 읽어가는
마지막 장례사가 우리들 모두의 눈시울을 적셨다.

인생이라는 것이 별건가 ?
결혼을 해서 애들을 낳아 오손도손 기르면서
이런 작은 소망들과 꿈들, 그리고 그리움과 사랑으로
엮어가는 짧은 이야기같은 것이 인생이 아닌가.
이런 삶을 두고 평범함 속에 비범함이 숨어 있는
위대한 삶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

나는 운구차를 뒤따르는 긴 자동차들의 행렬에
끼지 않고 혼자서 공동묘지를 가로질러
장지까지 걷기로 했다.
공동묘지 파란 잔디위에 촘촘히 박혀있는
수많은 비석들위에는 무덤주인공들의 이름, 생년월일,
그리고 죽은 날이 어김없이 새겨져 있었다.
그외 다른 것이라 곤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2300여년 전, 20대 약관의 나이로
페르시아제국을 정복했던 알렉산더 대왕은
어느날 알프스산 정상에 올라 이렇게 한탄했었다.
"아, 나는 이 세상을 정복했으나
죽으면 한 평의 땅도 소유할 수 없구나"
나는 오늘 그 한숨어린 탄식의 실상을
눈앞에 두고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한참을 걷다가 장지가 내려다 보이는 정자안의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장지 너머로 아직 비어있는 넓고 파란 잔디밭의
확트인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도, 운구차를 자동차로 따르고 있는
저 수많은 조문객들도, 언젠가는
저 대지의 한귀퉁이의 주인공으로 묻히게 될 것이다.
정자처마에 매달려 있는 윈차임(wind chime) 소리가
스쳐가는 미풍에 서럽다.
고인의 죽음은 저 윈차임 소리인가,
아니면 윈차임소리가 허공에 남겨두고 간 여운일까 ?

20여 년 미국작가 스티븐 코비(Steven R. Covey)가 쓴
베스트셀러 "성공하는 사람들의 7곱가지 습관(The 7 habits
of highly effective people)이라는 책속에
아래와 같은 조셉 에디슨의 글이 인용되었다

"위대한 사람들의 무덤을 볼 때, 내 마음 속에는
시기심같은 감정은 모두 사라져 버린다.
미인들의 묘비명을 읽을 때, 무절제한 욕망은
사라져 버린다.
아이들의 묘비에 새겨진 부모들의 슬픔을 읽을 때,
나의 마음은 동정으로 누그러진다.
옆에 있는 그 부모들의 무덤을 볼 때,
곧 따라가 만나야 될 사람을 슬퍼하는 것이
얼마나 헛된 일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쫓겨난 왕들이 그들을 쫓아낸 사람들과 나란히 묻혀 있는
것을 볼 때, 또 서로 경쟁하고 다투었던 사람들이
나란히 묻혀 있는 것을 볼 때,
세상을 시끄럽게 하고 놀랍게 했던 사람들의 무덤을 볼 때,
나는 인간들의 하잘것 없는 경쟁,
불화, 논쟁에 대해서 슬픔과 놀라움에 젖는다.
묘비에 적혀있는 날짜들을 읽어가면,
어제 죽은 사람도 있고, 600년 전에 죽은
사람도 있다. 이를 보면 나는 모두가 부활하여
함께 살고 동시대의 사람이 되는 날을 생각해 본다.
-조셉 에디슨_

어떻게 사는 것이 성공적인 삶일까 ?
스티븐 코비는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의 출발을 자신의
가상 장례식 관속에서부터 시작했다.
자신의 장례식에 참석한 조문객들이 파킹장에서
서로 주고받는 대화, 가족과 친인척 대표,
개인적 친구, 직장동료, 그리고 교회와 봉사단체의
지인들이 읽어가는 조사들을 몰래 엿들으면서
자신의 지난 삶을 뒤돌아 보며 성공적인 삶의
모델을 설계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자신이 남기고 간 뒷모습이었다.

그렇다. 죽음과 생은 각기다른 두 몸이 아닌
한 몸이다. 생은 앞모습이고 죽음은 뒷모습니다.
생이 삶이라고 한다면 죽음은 생이 남기고 간
빈자리다.
그래서 성공적인 생이 무엇인가를 알려면
성공적인 죽음이 무엇인가를 먼저 알아야한다.

나는 "처음처럼" 이라는 한국소주를
즐겨 마신다. 특별히 내가 술맛을 식별할 만큼
미각이 발달돼서 그런 것은 아니다.
나는 어려서부터 무엇이든 "첫" 이나 "처음" 으로
시작되는 단어들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일종의
나만의 우상이고 미신이었다.
"첫사랑, 첫직장, 첫사업, 첫만남, 첫집,
첫 자동차, 첫신발....
그 "첫 " 자가 붙은 모든 것들은 늘
신선한 충격으로 나의 마음을 설래게 헸었다.
삶이 힘들고 지겨울 때마다 그 처음의 감격을
회상하며 새로운 각오로 마음을 가다듬곤 했었다.
마지막이라는 단어를 좋아했던 기억은 별로 없다.

그러나 이제 나는 "마지막처럼" 의 의미를
생각할 나이이다. 관속에 들어가기 전에 내가
남기고 갈 빈 자리를 생각하며 성공적인 삶을
다시 생각해 볼 나이가 된 것 같다.
소주도 "처음처럼" 아닌 '마지막처럼" 을
마실 때가 됐다.

"우리는 성공하기 위해 여기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은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서 입니다."
라고 했던 마더 테레사 의 말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성공의 의미를 깊게 음미해 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