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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소개>목회자를 위한 <설교자노트> 2011년 9·10월호
정연복  |  pkom545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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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1년 08월 17일 (수) 21:39:12
최종편집 : 2011년 08월 18일 (목) 02:54:31 [조회수 : 2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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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소개> 목회자를 위한 <설교자노트> 2011년 9·10월호  

                                                                                         정연복(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저는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으로 일하면서 1997년부터 격월로 나오는 <설교자노트>라는 책을 번역해 왔습니다.

지금까지 92권이 나온 <설교자노트>는 '교회력에 맞춘' 설교 본문에 대한 성서 주석, 그리고 그 본문에 따른 미국의 실력 있는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의 최신의 설교를 번역하고, 아울러 설교 내용에 적합한 기도문과 예화 자료를 풍부하게 제공하여 목회자들의 설교 준비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책입니다. 특히 <설교자노트>에 실린 설교들은 설교자들에게 성서에 충실하면서도 독창적인 설교 아이디어를 제공합니다.

그런데 이 <설교자노트>는 시중 서점에서는 팔지 않고 신청하시는 목회자들에게 직접 우송합니다. '영성적이며 공동체적이며 생태학적인 신앙 공동체를 위한 자료'인 <설교자노트>를 구입하기 원하는 분들은 한국기독교연구소(전화: 031-929-5731)로 연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설교자노트>는 격월로 나오며 두 달치 분량의 설교 자료를 담고 있는데, 2011년 9·10월호 중 9월 셋째 주 설교 자료를 참고로 첨부합니다.


설교 제목: 당신은 죽을지도 모른다

* 성경 본문: 빌립보서 1:21-30
* 성경 주석

빌립보서는 바울이 아마도 로마에 있는 감옥에 구금된 상태에서 썼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즐겁고 명랑한 분위기를 띠고 있다. 빌립보서 1장은 인사말(1-2절), 빌립보 공동체에 대한 감사(3-8절), 여기에 뒤이은 중보기도(9-11절)로 시작된다. 바울은 뒤이은 절들(12-26절)에서 자기 자신에 관한 약간의 소식을 포함시키는 데로 나아가는데, 여기에서는 그의 투옥, 그리고 그가 점증적인 위기로 감지하고 있는 것에 특별한 초점이 있다. 바울은 빌립보인들이 그를 염려하고 있음을 인식하고 있으며, 그리고 그가 감옥에 갇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도로서의 그의 일은 계속되고 있음을 그들이 알기를 원한다.

오늘날 우리들 중에 믿음 때문에 투옥되고 고문 받고 혹은 죽음 당하는 나날의 위협에 직면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빌립보인들에게 보내는 이 편지가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듯이, 기원 후 1세기의 신자들에게 순교는 매우 실제적인 위험이었다. 역사적 전승에 따르면, 예수의 제자들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믿음 때문에 장렬한 죽음을 맞이했다.

언제인가부터 믿음으로 말미암은 순교자적 죽음이라는 주제는 신자들의 신앙생활과 신학에서 별로 인기가 없거나 심지어 금기시되는 주제들 중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1세기의 믿음에 충실한 사람들은 죽음의 신비에 기꺼이 정면으로 맞섰고, 그리고 자신들의 삶 속에서 죽음의 위치를 올바로 분별하려고 늘 애썼다.

우리는 바울이 감옥에 갇히게 된 정확한 이유를 모른다. 하지만 그가 시민으로서 마땅히 준수해야 할 법을 어긴 죄로 기소된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아마도 그는 그의 설교의 잠재적으로 분열적인 힘에 대한 로마의 통치 권력자들의 두려움 때문에 투옥되었을 것이다.

바울이 빌립보의 동료 기독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의 서두를 쓸 때, 그는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태연하고, 심지어 다소 고무되어 있는 듯이 보인다. 그는 그가 전하는 메시지 때문에 죄수가 되었음을 모든 사람이 알고 있다고 바울은 뽐낸다(13절). 다시 말해, 그의 투옥은 복음을 침묵시키기는커녕 오히려 복음 전파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그가 감옥에 갇혀 있는 이유에 관해 더 많이 이야기하면 할수록,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에 관해 더 많이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 인신 공격을 일삼는 거짓 설교자들에 대한 언급(15-18절)에서 분명히 드러나듯이, 그는 그런 설교를 하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동기나 신념에 관해 특별히 염려조차 하지 않는다. 바울에게는 복음의 메시지가 더 멀리 더 광범위하게 전파되는 것만이 중요하다.

아마도 그가 감옥에서 순교자적 죽음의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는 것은 바로 바울이 그리스도를 세상에 선포하는 모든 방법을 받아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사형집행 소식은 확실히 멀리까지 널리 퍼지게 될 것이다. 그것과 함께, 그가 죽임 당한 이유, 즉 복음에의 충실성에 대한 설명이 반드시 뒤따르게 될 것이다. 그가 사형에 처해질지도 모르는 분명한 가능성에 직면하여, 바울은 삶과 죽음 사이의 연속성에 관한 근본적으로 새롭고 철저히 기독교적인 관점을 제시한다.

바울은 신자의 딜레마를 선언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 그리고 죽는 것도 나에게는 이득이 됩니다"(21절). 바울의 믿음은 너무도 압도적이고 철두철미하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삶을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와 함께", 혹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있는 것으로 경험하는 데서 머물지 않는다. 바울의 삶은 믿음에 아주 깊이 몰두해 있어서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아마도 이러한 확신에 찬 단언의 일부는 바울이 마음속으로 느꼈던 "지금 그리고 여기"의 그리스도에 대한 압도적이고 놀라운 능력을 부여하는 인식에서 유래했을 것이다.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임을 이해한 사람에게 있어서는, 모든 살아 있는 존재가 얼마 안 있어 그리스도의 영역에 있게 되리라는 것에 거의 의심이 있을 수 없음은 확실하다.

바로 이 신념 때문에, 바울은 "죽는 것도 나에게는 이득이 됩니다"라고 단언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신학적 추론들의 상세한 사항들이 아주 분명한 것은 아니다. 바울은 이 단언으로써 순교자적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일종의 "개인적인 재림"(individual parousia)에 대한 그의 신념을 드러낸다고 일부 학자들은 주장한다. 이 견해에서는, 바울이 언급하는 "이득"은 그 자신의 부활, 그리고 그리스도와 완전히 함께 있기 위해 부활의 결과로 일어나는 승천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죽은 기독교인들의 극적이고 "유일회적"(once-and-for-all) 부활의 때인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에 대한 바울의 종종 반복되는 믿음은 그러한 사유화된 견해를 거부하는 듯하다.

보다 그럴 듯한 해석은, 죽는 것도 이득이 된다는 바울의 단언은 죽음에 있어서조차도 그와 그리스도의 관계는 끊임없이 발전하고 깊어지리라는 그의 신념에 기초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죽음을 하나님과의 분리의 한 근원으로 간주하기를 거부한다. 따라서, 죽음에서 우리가 아직은 그분의 영광의 완전한 임재 속으로 부활하지 않았다고 해도, 기독교인들은 어떤 면에서는 주님과의 활기 넘치고 친밀한 접촉을 계속 유지해야 한다(롬 14:8).

삶과 죽음 둘 모두의 이득을 말한 후, 바울은 23절에서 맨 처음에는 죽음에 대한 편애처럼 보이는 것을 드러낸다. 죽음은 그의 개인적인 갈망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개인적인 소원에 바로 뒤이어, 바울은 그의 목회적 임무에 기초하여 삶에로의 부름을 언급한다(24절). 삶과 죽음 사이의 바울의 실제적인 논쟁은 매우 짧다. 25절에 이르러, 바울은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자신이 지상에 계속 머무는 것이 몹시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그 딜레마를 벌써 해결했다.

바울이 자신이 지상에 계속 머물러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와 빌립보 교인들 사이의 깊고 친밀한 관계를 드러낸다. 일부 학자들은 이 선교적 협력을 빌립보서의 핵심 주제로 간주한다. 그가 빌립보 교인들과 비록 몸으로는 멀리 떨어져 감옥에 갇혀 있기는 해도, 바울은 그와 빌립보 교인들이 복음을 널리 전파하기 위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안에서 굳게 결합되어 있다고 느낀다. 26절에서, 바울은 빌립보 공동체의 즐거운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랑"에 자신도 "풍성히 함께 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육체적으로 같이 있든 없든, 변함없이 활력 넘치는 일종의 보이지 않는 관계가 이 빌립보 교인들과 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을 굳게 결합시킨다. 바울이 촉구하는 종류의 협력은 그 자신과 빌립보 교인들 사이에서만이 아니라, 또한 빌립보 교인들 자신 사이에도 존재한다. 그러한 태도는 그들이 "복음의 교리를 위하여 한 마음 한 뜻으로 굳게 서서 분투 노력하면서"(27절) 늘 믿음에 충실함을 보여준다고 바울은 주장한다.

이 협력의 목적의 일부는, 바울과 빌립보 교인들이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까지 당하는 특권"(29절)을 경험할 때, 그러한 사랑이 깃든 유대에서 솟아날 힘인 것 같다. 그들이 "믿음 안에서의 기쁨"(25절)과 함께 그들의 고난의 경험들도 공유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위해,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영위되는 그들의 삶의 본질적인 부분이다. 외롭게 감옥에 갇혀 있고 어쩌면 고문당하고 순교할지도 모르는 힘겹고 절박한 상황에서도, 바울은 그가 복음의 협력자들과 그리스도 안에서 느끼는 친밀성, 그리고 그와 그들을 영적으로 결합시키는 한 분 그리스도에 대한 동일한 믿음에서 샘솟는 기쁨을 노래한다.    

* 설교 본문

사도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서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가석방 날짜는 미지수이다.

바울이 감옥 안에 있었는지, 혹은 자택 연금 상태에 있었는지를 우리는 모른다. 그러나 그는 불과 4개의 절에서 자신의 구금에 관해 세 차례나 언급한다(빌 1:13, 14, 17). 그렇다면 우리는 그가 발목에 전자 수갑을 찬 채로 이탈리아의 한 별장 안에 갇혀 있었다고, 그리고 감시 구역을 벗어나지 않는 한에서 그는 자기 마음대로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사실, 그는 "감시인/친위대"(guard)에 대해서도 언급한다(빌 1:13). 기원 후 61년 무렵, 악명 높은 네로 황제 통치 아래의 로마 제국의 한 크리스천으로서, 그는 별로 인기가 없다. 바울은 자신이 자칫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로마의 감옥으로부터 빌립보 크리스천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바울은 매우 낙관적이다. 그는 그들이 복음을 함께 나누는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쁜 마음으로 그들을 위해 기도한다(빌 1:3-5). 자신이 감옥에 갇힌 것은 오히려 몇 가지 예기치 않은 유익을 가져다주었다고 그는 보도한다: "내게 일어난 일이 도리어 복음을 전파하는 데에 도움을 준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주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감옥에 갇혔다는 사실이 온 친위대와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습니다"(빌 1:12-13). 이것은 그의 동료 크리스천들로 하여금 "더 확신을 얻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겁 없이 더욱 담대하게 전하도록" 고무시킨다(14절).

위험은 사람들을 위축시키고 소심하게 만든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정반대가 맞는다. 위험은 오히려 사람들을 대담하고 용기 있게 만든다.

"나는 앞으로도 또한 기뻐할 것입니다"(18절)라고 바울은 말한다. 그의 기쁨은 계속될 것이다. 그는 "살든지 죽든지, 전과 같이 지금도, 내 몸에서 그리스도께서 존귀하심을 받으시리라는 것을" 기대하고 또 소망한다(20절). 그는 놀라운 고백을 한다: "나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시니,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21절). 그리스도에 대한 굳건한 믿음 안에서, 그는 자신이 직면하고 있는 고난과 심지어 죽음의 위험까지도 가뿐히 뛰어넘는다.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시니, 죽는 것도 유익하다! 그는 자신이 살아 있는 한 그리스도를 경험할 것이며, 그리고 그가 죽을 때에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확신에 차서 말한다.

바울은 어쩌면 죽을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그는 전혀 위축되지 않는다. "죽음이여, 내게 올 테면 와 보라"는 식이다.

그는 죽기를 바라는 것인가? 혹시, 그는 자살 충동(death wish)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가?

오늘날 우리의 문화 속에서, 죽음과 함께 춤추는 것이 점점 더 유행하고 있다. 마라톤이나 [수영 3.9km, 자전거 108.2km, 마라톤 42.195km의 3종 경기를 하루에 마치는] 트라이애슬론 등의 지구력 스포츠에 도전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 메릴랜드의 North Potomac의 브루스 알렌턱 같은 사람들이 있는데, 그는 자신의 몸과 정신에 최대량의 벌을 가하기로 결심한 사람이다.

<워싱턴포스트>(2011.2.11)에 따르면, 그는 미해군 특수부대 요원도 아니고 체력 코치도 아니다. 그는 작은 조경 사업체를 경영하면서 아내와 세 자녀와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있는 나이 마흔 가량의 남자이다. 여가 시간에, 그는 50파운드의 오크나무 덩어리를 가지고 저벅저벅 소리를 내며 6마일의 눈길을 밟고 가고, 두 양동이의 자갈을 짊어진 채로 3분의 1마일을 전속력으로 달리고, 혹은 60파운드의 트럭 타이어를 끌면서 [바다나 강의] 하구에서 5마일을 달린다.

단지 재미를 위하여!

6월에, 그는 <2011년 죽음의 레이스>를 달리기 위해 [미국 동북부의 주인] 버몬트로 여행했다. 이 레이스는 그야말로 혹독하다. 그래서 이 대회의 주최자들은 세 글자로 된 각서에 서명할 것을 참가자들에게 요구한다. 거기에는 "당신은 죽을지도 모른다"(You may die)고 적혀 있다.

참가자들은 피로 서명할 필요, 즉 혈서를 쓸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들은 어쨌든 이 가슴 섬뜩한 각서에 서명해야만 죽음의 레이스에 참가할 자격을 얻는다.

대담성과 용기.

이런 종류의 모험은 <죽음의 레이스> 참가자들을 소심하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더 대담하고 용기 있게 만든다. "내가 고통을 뚫고 나아가 죽음의 레이스를 완주할 수 있는지를 나는 보고 싶을 따름이다"라고 알렌턱은 말한다.

이제, 사도 바울을 살펴보자. 그는 생사의 갈림길에서 무엇이 그에게 더 좋은지를 궁리한다. 만일 그가 살아 있다면 "결실을 맺는 수고"에 계속 참여할 것인데, 그는 이것이 빌립보인들에게 유익함을 알고 있다(22, 24절). 만일 그가 죽는다면, 그는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것이다(23절). 그런데 그는 생명 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듯하다. 그는 말한다: "여러분의 발전과 믿음의 기쁨을 더하기 위하여 여러분 모두와 함께 머물러 있어야 할 것으로 압니다. 내가 다시 여러분에게로 가면, 여러분의 자랑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 때문에 많아질 것입니다"(25-26절). 바울은 죽음의 가장자리까지 자신을 밀고 나아간다. 왜냐하면 그는 복음 전파를 위해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고 싶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크리스천들은 이 박력 있는 추진력을 상실한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우리 자신의 삶을 직시해 보라. 모험을 등지고 편안한 것을 추구할 때가 종종 있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하지만 <죽음의 레이스>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굉장한 헌신과 완벽한 준비를 참가자들에게 요구한다. 기독교의 "믿음의 경주" 또한 그렇다.

교회의 신입 회원은 세 글자로 된 증서에 서명해야 한다면 어찌 되겠는가? 그 증서는 <죽음의 레이스>의 각서와 똑같을지 모른다: "당신은 죽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불쾌한 혐오감을 줄 것인가, 아니면 그들의 마음을 끌 것인가? 우리의 믿음의 약속은 바로 이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죽을 때, 우리는 참으로 살 것이다.

바울은 모험의 유익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두 양동이의 자갈을 짊어지고 전속력으로 달리는 것처럼 엄격한 훈련 프로그램을 빌립보인들에게 제시한다. 기꺼이 자신을 인내의 한계까지 밀고 나아가는 크리스천들만이 그것을 시도할 것이다.

훈련 1: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방식으로 살아라(27절). 우리의 가장 강력한 복음 전도의 도구는 신앙공동체의 삶이라는 것을 바울은 잘 알고 있다. 이 첫 번째 연습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어울리는 방식으로 살아갈 것을, 그리고 우리가 모래알처럼 흩어진 개인들로서가 아니라 공동체로서 이 연습을 할 것을 촉구한다. 우리의 행동은 우리의 말보다도 훨씬 더 큰 소리로 말한다.

훈련 2: 한 마음으로 굳게 서라(27절). 교회 공동체는 남들을 위하고 남들과 함께하려고 애쓸 때, 특히 세상의 가장 궁핍한 사람들과 함께할 때에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훈련 3: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아라(29절). 모든 교회 안에는, 그 구성원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겪을 기회가 존재한다. 예수는 두 양동이의 자갈을 짊어지고 전속력으로 달리는 것에 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우리가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그를 따라야 한다고 말한다(마가 8:34).

이 세 가지 훈련이 모든 신자들이나 모든 교회에게 매력적으로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들은 하나같이 힘들고 대단한 노력을 요하고 고통스럽고 엄격하다. 그러나 이 훈련 프로그램은 예수의 가르침과 완전히 일치된다. 예수는 말한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구할 것이다"(마가 8:35).

우리는 목숨의 끝에 이르러 후회로 가득하기를 원하는가? 죽음에 직면하여, '내가 할 수 있었을 때 좀더 행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하고 뒤늦게 안타까운 후회를 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세상에 하나도 없을 것이다. 모든 크리스천들이 마라톤 연습을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모든 추종자들은 복음에 합당한 방식으로 살아가고, 한 마음으로 굳게 서고,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겪을 기회들을 가지고 있다.

바울은 이런 기회들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는 기꺼이 그를 닮으려고 하는 사람들을 칭찬했다. 그는 빌립보인들이 그가 하는 것과 "똑같은 투쟁"(30절)을 벌이고 있는 것에 감탄하였다. 그것이 그들을 대담하고 용감하게 만들었음을 바울은 잘 알고 있었다.

삶의 커다란 비극은 사람들이 그들의 신념을 위해 죽는 것에 있지 않다. 그것을 위해 살고 또 심지어 죽을 수도 있는 분명한 목표를 발견하지 못한 채로 목숨의 끝에 도달하는 것이야말로 크나큰 비극이다.

"당신은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은 사실 너무 부드러운 진술이다. 진실을 말하자면, 당신은 죽을 것이다. 그러나 죽기 전에, 당신은 무엇을 할 것인가?

<가능한 설교 주제들>
* 하늘과 땅, 둘 모두에 균형 있게 초점을 유지하기.
*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랑하는" 훌륭하고 유익한 삶의 방식들은 무엇인가?
* 반대와 협박에 직면하여 굳게 서는 법.

* 예화

+ 가을 산길

맑은 바람 속을 맑은 하늘을 이고
가을 산길을 가노라면
가을 하느님,
당신의 옷자락이 보입니다.

언제나 겸허하신 당신,
그렇습니다.
당신은 한 알의 익은 도토리알 속에도 계셨고
한 알의 상수리 열매 속에도 계셨습니다.
한 알의 개암 열매 속에도 숨어 계셨구요.

언제나 무소유일 뿐인 당신,
그렇습니다.
당신은 이제 겨우 세 살바기 어린아이의 눈빛을 하고
수풀 사이로 포르릉 포르릉
날으는 맷새를 따라가며
걸음마 연습을 하고 계셨습니다.
(나태주·시인, 1945-)  

+ 빵 굽는 시간

가을 산에 들면 온통 빵 굽는 냄새
하느님이 커다란 화덕에 은근한 장작불 피워
온 산 숲에 빵 구우시는 시간

올록볼록 먹음직스런 소보로 빵
브라운 톤으로 익는 나무들
갈색 빛 식빵 부스러기 날리며
산에 사는 것들과
산에 오르는 이들을 배불리신다
춥고 힘든 겨울을 앞에 둔 생명 있는 것들이
가을 산에 들어
온 산 구시하게 익어가는 빵 한 덩이 통째로 먹고 오지
온몸에 빵 굽는 냄새 묻히고
다람쥐처럼 겨울을 준비하는 사람들

걸판지게 시루떡 한 판 쪄내는 가을 들녘
아침저녁 물안개 김 팍팍 올리며
인절미도 찰지게 치신다

저녁놀 장작불로 활활 타오르면
노릇노릇, 불긋불긋
빵으로 익으시는 하느님
(전태련·시인)

+ 예수 믿기  

예수를 믿는다는 건
그분 말씀에 내 삶을 싣는 것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그 음성, 그 빛을 향해
마음이 이끄는 대로 가야하는 것.

예수를 믿는다는 건
벼랑 끝에서도
독수리 날개 하나 바라고 나를 내던지는 것

그리하여
불확실한 미래를
오늘, 지금 살아야 하는 것.

그것은 늘 두렵고 진저리 나는 일이다
그것은 늘 불안하고 막막한 일이다.
(조희선·시인)

+ 믿음이란

믿음이란
시간에 대한 나의 생각이 주님 생각과 일치하지 않을 때에도
하나님이 시간의 주인이심을 인정하는 것.

믿음이란
내가 아무리 많이 하나님을 체험했다고 해도
그것이 매일 매일의 교제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면
영적 성장에는 한치의 도움도 안 됨을 아는 것.

믿음이란
내 방법을 끝까지 고집하기보다
나의 종 됨을 인정하는 것.

믿음이란
나를 통한 하나님의 역사가
인간의 능력이 아닌 기적을 토대로 일어나며,
나의 선함이 아닌 그분의 약속에 기초하여
일어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

믿음이란
설명되지 않는 것들을
설명되지 않은 채로 받아들이며 사는 것.

믿음이란
불확실한 세상에 살면서
지도에도 나와 있지 않은 길을 걸으며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을지라도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확신하는 것.

믿음이란
스테인드글래스의 신비로움이나
종교적 집기들의 성스러움을 통해서가 아니라,
고난과 실망과 환멸과 갈등과 낙담과 실패와 손해를 통해
무르익어 가는 것.

믿음이란
뭔가 특별해지고 싶을 때는
일상의 것들을 하나님이 내게 주신
최고의 것들이라 인정해 보는 것.

믿음이란
과거의 상처가 흉터로 남아 매일매일 눈에 띄더라도
하나님께서 그런 상처들을 통해
내 삶을 향한 그분의 완전한 계획을 이루어 가심을 바라보는 것.

믿음이란
이미 하나님의 손에 맡겨 놓은 사안에 대해
다시 자기 힘으로 어떻게 해 보려는 유혹이 들 때
그것을 과감히 뿌리치는 것.
(작자 미상)

+ 믿음의 끈을 놓지 마세요

무엇을 위해
믿음을 버리는 겁니까!

밝은 태양 아래 있는 사람들은
믿음을 선택적으로 가질 수 있지만,
저와 같이 슬픔의 그늘 아래 있는 사람은
반드시 믿어야 합니다.

믿음마저 없다면 정말 우리에게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필립 얀시·미국 소설가)

+ 내 생에 가장 잘한 일

사랑하는 나의 주님
내 인생에서 돈이나 세상 명예보다 중요한 것은
주님을 믿고 의지하는 일입니다.

주님
주님을 믿는 일이 내 생에 가장 잘한 일이며
내 생애 최고의 일입니다.

주님
제 인생을 구원하신 일만으로도
영광 받으시고 찬미 받으셔야 마땅합니다.

주여,
사랑합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가슴 벅찬 일이지만,
언제나 당신이 너무 좋습니다.
주여,
감사합니다. 그리고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인)

+ 최고의 발견

에딘버러 대학의 제임스 심프슨 교수에게 한 학생이 물었다. "선생님의 생애에서 가장 뜻깊은 발견은 무엇입니까?"

심프슨 교수는 환자들이 고통 없이 수술을 받을 수 있는 마취제인 클로로프롬을 발견하여 세계 의학계에 위대한 혁명을 일으킨 사람으로 칭송을 받는 의학자였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은 심프슨 교수가 당연히 그 마취제의 발견을 얘기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심프슨 교수는 뜻밖의 대답을 했다. "나는 죄인이고 예수님은 나의 구세주라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야말로 내 생애에서 가장 소중한 발견입니다."
(김남준·열린교회 목사)

+ 소녀의 유언

미국 필라델피아 템플 교회에 한 병든 소녀가 찾아왔다. 하지만 교회가 너무 좁아 소녀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교사는 소녀에게 말했다. "나중에 다시 오렴. 지금은 너를 받아줄 수가 없구나." 소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집으로 돌아갔다. 결국 이 소녀는 교회에 가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소녀의 베개 밑에서 목사에게 보내는 짧은 유서와 동전 57센트가 나왔다. 유서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저도 교회에 가고 싶었어요. 제가 모은 이 돈으로 교회를 좀 넓게 지어주세요."

목사는 소녀의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유서를 읽어 주었다. 사람들은 소녀의 유언에 큰 감동을 받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금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그 결과 템플 교회는 크게 증축되었고 남은 돈으로 `선한 사마리아 병원'과 미국의 명문인 템플 대학이 설립되었다.

작은 소망이 큰 기적을 일으킨 것이다. 작은 불꽃 하나가 무서운 불길을 만든 것이다. 소망은 작은 불씨처럼 강한 생명력을 갖는다.

+ 헌신은 규모가 아니라 마음이 문제

미국 필라델피아 근처의 작은 마을에는 큰 교회당 하나가 우뚝 서 있다. 사람들은 ‘왜 이런 작은 마을에 이렇게 큰 교회당이 있을까?’ 하고 궁금하게 여긴다. 여기에는 아름다운 사연이 있다.

꽤 오래 전에 수잔이란 이름의 몸이 약한 소녀가 살고 있었다. 이 소녀에게는 한 가지 간절한 소원이 있었다. 가까운 곳에 교회가 하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안타깝게도 소녀는 그 소원을 채 이루기도 전에 병들어 죽었다. 그런데 그 소녀가 죽은 자리 밑에는 편지 한 장과 헌금 5달러가 놓여 있었다.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하나님, 우리 마을에 교회당을 하나 지어 주세요. 이 일을 위해 저의 전 재산인 5달러를 바칩니다."

얼마 후 이 소녀의 간절한 소원이 신문을 통해 미국 전역에 보도되었다. 그리고 각지에서 헌금이 들어와 마침내 아름다운 교회당을 봉헌할 수 있었다. 소녀의 헌금 5달러가 눈물의 겨자씨가 되어 소중한 열매를 맺은 것이다.

헌신은 규모가 아니라 마음이 문제다.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헌신할 때, 하나님은 작은 헌신도 크게 기뻐하며 받으실 것이다. 주님은 가난한 과부가 바친 동전 두 개를 참으로 기뻐하셨다. 하나님은 진실한 마음으로 드리는 사람의 헌신을 기뻐하신다.

+ 교회를 살린 어린이의 격려 편지    

일본의 한 작은 마을 교회를 개척한 목사님이 계셨다. 안내장을 찍어 부부가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돌렸다. 그러나 주일이 되어도 교회로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기를 한 달이 지났다. 목사님은 낙심에 빠졌다.

그러던 어느 날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주일학교 2학년 꼬마 어린이가 보낸 편지였다. "목사님, 목사님이 찬바람이 쌩쌩 부는 추운 날 집집마다 편지를 돌리고 있는 모습을 여러 번 보았어요. 감기나 들지 않으셨나요. 사람들이 교회에 나와서 예수님 이야기를 들으면 참 좋겠어요. 저는 잠자리에 들 때마다 하나님께 기도를 드려요" 하는 내용이었다.    

목사님은 큰 위로를 받았다. 잃었던 용기가 샘솟았다. 그리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교회 간판을 떼고 교회 개척을 포기하려던 목사님은 이 어린이의 편지 한 통에 백만 대군을 얻은 기분이 들었다. 그는 다시 시작했다. 그러자 한 사람 두 사람 교회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철없는 어린이의 격려 편지 한 장이 하마터면 사라질 뻔한 교회를 다시 살린 것이다

+ 진홍 가슴새

최초로 여성 노벨 문학상을 받은 스웨덴의 라게를뢰프가 쓴 『진홍 가슴새』라는 동화가 있다.

하나님은 세상 만물과 동식물을 지으실 때 잿빛 털을 가진 조그만 새 한 마리를 만드시고 ‘진홍 가슴새’라는 이름을 붙여 주셨다. 이 새가 하나님께 물었다. "저는 온통 잿빛 털을 가지고 있는데, 왜 ‘진홍 가슴새’라는 이름을 붙여 주셨죠?" 하나님이 대답하셨다. "네가 참 사랑을 베풀 수 있게 될 때, 그 이름에 합당한 깃털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 후 오랜 세월이 흘렀다. 진홍 가슴새의 둥지 근처 언덕에 십자가가 세워지고, 그곳에 어떤 사람이 매달렸다. 멀리서 지켜보던 진홍 가슴새는 그 사람이 불쌍하게 여겨져서 그 사람에게로 날아갔다. 그 사람의 이마에 가시관이 씌워져 있는데, 그 가시마다 검붉은 피가 솟아나고 있었다. 이 새는 조그만 부리로 그 가엾은 사람의 이마에서 가시를 하나하나 뽑아내기 시작했다. 가시가 뽑힐 때마다 피가 솟아 이 작은 새는 온통 피투성이가 되었다. 이 새는 지칠 때까지 가시들을 뽑다가 자기 둥지로 돌아갔다. 그 사람이 결국 숨을 거두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기 몸에 묻은 피가 도무지 깨끗이 지워지지 않았다. 결국 목덜미와 가슴에는 핏자국이 남게 되었는데, 더욱 이상한 것은 그 새가 낳는 새끼들마다 모두 목덜미와 가슴에 선명한 진홍빛을 가진 채 태어나는 것이다.

이 진홍 가슴새 이야기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온통 덧입혀져 죄 사함을 받고 그분의 일꾼으로 부름 받은 존재다.
(양원석, 『영혼이 일어나고 싶을 때 읽는 책』)  

+ 예수와 함께 죽는다는 것

예수와 함께 죽는다는 게 무슨 뜻인지 제자가 스승에게 물었다.  

스승은 그를 공동묘지에 보내 죽은 자들에게 10분 동안 온갖 욕설을 퍼붓고 오게 했다. 제자가 돌아오자 스승이 물었다. "죽은 자들이 화를 내더냐?" "아닙니다."

이번에는 10분 동안 열렬하게 박수를 치고 오게 했다. "죽은 자들이 좋아하더냐?" "아닙니다."

만일 당신이 세상 사람들의 박수 갈채에 우쭐대지 않고 세상 사람들의 비난에도 주눅이 들지 않게 된다면, 당신은 세상에 대해 죽는다는 게 뭔지 조금은 아는 셈이다.

* 예배 자료

+ 예배에의 부름

당신을 하느님으로 안다는 것
그것은 다만
우리가 당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깨우치는 것입니다.

당신은 우리의 사유와 관념
그 너머
영원한 세계
그곳에 계시는 까닭입니다.
(조만나스, '하느님이신 당신에게')

+ 가을에 드리는 기도

가을은
말에 있지 않고
열매에 있으니
가을, 좋은 열매 맺도록
노력하며 기도 드리기 원하네

허튼 맹세
비난과 모욕의 말 뽑아내며
아름다운 말
행함의 열매 맺어가도록
노력하며 기도 드리기 원하네

벌레 먹고
썩은 행동 뽑아내며
내 안에 계신 빛으로
탐스럽게 살찌워 가도록
노력하며 기도 드리기 원하네

내 안에 계신 맛
또랑또랑 여물어가게
불의하고 추하고 더러운 것
회개로 꾹꾹 짜내기 원하여 기도 드리오니
가을에 드리는 기도 들어주소서.
(권정순·시인)

+ 마지막 몇 시간이라도

마음에 슬픔을 느끼며 잠자리에 들고
똑같은 슬픔을 느끼며 잠을 깹니다.
나는 모든 걸 견딜 수 없습니다.
비를 맞으며 여기저기를 걸어다녔습니다.
아버지시여,
생명의 근원이시여,
우주의 영이시여,
생명의 원천이시여 나를 도와주소서.
내 인생의 마지막 며칠,
마지막 몇 시간이라도
당신에게 봉사하며
당신만 바라보며 살 수 있도록
나를 도와주소서.
(톨스토이·러시아 작가)

+ 일본을 위한 기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요동치는 땅과 너울대는 바다와 험악한 파도를
다스리시는 절대 주권자이십니다.
아버지의 권능 앞에 우리는 떨며
불가해한 심판과 헤아릴 수 없는 방법들 앞에 엎드립니다.
우리는 얼굴을 가리우고 아버지의 전능하신 손에 입을 맞춥니다.
무기력하게 무릎 꿇고 기도하며,
우리 무릎이 닿는 이 땅이 얼마나 연약한 것인지 깨닫습니다.

오 하나님,
우리는 아버지의 거룩하신 위엄 밑에
겸손히 우리 자신을 낮추어 회개합니다.  
눈 깜짝할 사이인 한순간, 우리 역시 휩쓸려 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일본사람들보다 더 견고한 땅에 있을 만한 자격은 없습니다.
우리도 인간입니다.
육체를 갖고 있고, 집과 자동차와 가족과 소중한 장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압니다.
만약 우리의 죄를 따른다면 그 누가 제대로 서 있을 수 있겠습니까?
모든 것들은 일순간에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어둠의 시간에 우리는 아버지가 아닌,
우리 죄에 대해 돌아섭니다.

그리고 일본을 위해 부르짖습니다.
아버지, 자비를 베푸소서.
그들이나 우리가 자비를 받을 만한 자격은 없습니다.
그러나 자비를 허락하소서.

아버지께서 자비하심 속에 우리에게 용기를 주시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아버지의 말씀 가운데
수백 번이나 그 온화하심과 관대하심, 인내하심을 듣지 않았습니까?
아버지께서 수천 번이나 심판을 거두시고
반역적인 세상을 회개로 이끌지 않으셨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
주님의 길은 우리의 길과 다르며,
주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다릅니다.
하나님,
악한 자들이 자신들의 길을 포기하게 하시고,
불의한 자들이 자신들의 생각을 버리게 하소서.
긍휼을 베푸시어
죄 많은 피조물인 우리가 아버지께로 돌아서게 하소서.
분명히 아버지께서 풍성한 용서를 허락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아버지의 사랑하시는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름 받은 모든 자들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헤아릴 수 없는, 그 모든 애끓는 상실감을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상처 난 손길로 치유해 주소서.
하나님은 주님의 피조물이 당하는 고통을 잘 아십니다.
독생자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그 아들을 우리 모두를 위해 버리셨습니다.
예수 안에서 하나님은 상실감을 맛보셨습니다.
예수 안에서 하나님은 거대한 홍수와 같은
우리의 슬픔과 고통을 나누셨습니다.
예수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 고통의 한가운데에서
긍휼하신 대제사장이십니다.

아버지여,
이제 이 연약한 자들을 온화하게 대해 주소서.
그들을 지지하시고 승리하게 하시며 구원하소서.
그리고 그들 머리 위에 갑자기 출몰하여
두려움을 안긴 그 홍수가 복으로 변하게 하소서.
오, 그들이 자신들의 보잘것없는 감각으로
주님을 판단하지 않게 하시고,
그저 주님의 은혜를 위해 주님을 신뢰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이 섭리 후에, 곧 웃음이 피어나는 얼굴을 갖게 하소서

자비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존 파이퍼·미국 목사)

+ 헌신에 대한 묵상기도

돌에 붙은 풍란이
꽃대를 뻗쳐 올렸다.
꽃대에 힘을 주기 위하여
풍란 잎 하나가 떨어졌다.

솟아오른 꽃대가
향기로운 꽃을 피웠다.
꽃에 빛깔을 주기 위하여
풍란 잎 하나가 또 떨어졌다.

지고지순한 사랑이여,
한 생명 탄생을 위하여
한 생명이 헌신하는
숭고한 정신이여,
(권달웅·시인, '헌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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