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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는 앓고 있다한국 교회 목사님들께 드리는 공개서한 [4]
류상태  |  shalom77@cho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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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6년 02월 13일 (월) 00:00:00 [조회수 : 25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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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 목사님들이여, 교회란 무엇입니까? 어려운 신학적 정의를 내리자는 것이 아닙니다. 성서적으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리스도는 머리이고, 교회는 그 몸인 것입니다. 몸은 머리의 지시를 따라 움직입니다. 가고자 하는 의지 작용이 머리에서 이루어지면, 몸은 즉각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거의 동시적이지요.

교회는 그래야 합니다. 주님의 뜻이 있으면 교회는 즉시 움직여야 합니다. 교회는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머리가 지시해도 몸이 말을 듣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팔 다리가 없어졌거나, 있어도 중추신경이 마비되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경우입니다.

그런 몸은 정상이 아닙니다. 병든 몸이고 문제가 있는 몸입니다. 그대로 두면 제대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팔 다리가 없으면 의수나 의족을 달아야 하고, 중추신경이 마비되었으면 고쳐야 합니다. 고칠 수 없으면 다른 기구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정상적인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치료해야 합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의지와 뜻을 그대로 따르고 움직인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걸 알아보려면, 오늘날 한국 교회들의 어떤 모습을 하고 있으며,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과연 성서적으로 옳은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한국교회는 시급히 고쳐야 할 몇 가지 중병에 걸려 있습니다. 그 병을 고쳐서 건강하고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몸으로 회복하지 못하면, 한국교회는 더 이상 현대사회에서 생명력을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제 진단이 반드시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만약, 제가 내린 진단이 옳음에도 불구하고 새겨듣지 않아서, 교회의 병이 깊어지고 하느님의 존귀하신 따님들과 아드님들의 믿음과 삶이 파괴된다면, 한국 교회의 목사님들은 주님 앞에서 그 책임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한국 교회의 병리 현상은 다음과 같습니다.

1. 한국의 많은 교회가 교리적 독선과 배타성 안에 갇혀 있습니다.

한국의 많은 교회들이 ‘다름’과 ‘틀림’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고, 자기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우리 이웃들의 다양한 삶과 문화를 ‘틀린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만 옳다”는 이런 배타성은 우리 사회에 많은 갈등을 안겨주었을 뿐 아니라, 교회 안에도 많은 분열을 가져왔습니다.

장로교회는 예장, 기장으로 갈라졌고, 예장은 고신, 합동, 통합으로 갈라졌습니다. 지금 합동은 수십 개로 갈라졌으며, 한국에는 장로교 교파만 100개가 넘습니다. 이 수많은 교단과 교파의 존재가 증언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다양성으로 인해서 존재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교리적 독선과 배타성 때문에 생겨난 것입니까?

지금도 한국 교회에는, 예수교장로회, 그 중에서도 통합측 교단은 제외하고 합동측 교단에 속해있는 교회만이 정통 교회이며, 나머지는 모두 이단이라고 용감(?)하게 말하는 어처구니없는 목사님들이 많이 계십니다.

그들은 천주교는 물론이고, 성공회, 기독교장로회, 개혁적인 감리교회 등 자신들과 견해가 다른 교단의 교회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과연 예수님을 주님이요 그리스도로 함께 고백하는 형제 교회에 대한 바른 태도하고 할 수 있을까요? 보수 정통을 자랑하는 목사님들께서는 깊이 상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제라도 한국 교회의 목사들은 “나만 옳다”는 생각을 버리고, 교단과 교파를 초월하여, 모든 형제 교회를 존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다른 종교와 문화에 대해서도 존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2. 한국의 많은 교회가 점점 세속화, 물화되어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는데, 한국 교회는 십자가를 지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주님이 지셨으니까, 그 공로로 이 땅에서 편하게 예수 믿다가 죽어서 천국가면 그만이라는 식의 ‘행함 없는 믿음’을 갖고 있는 분들이 매우 많습니다.

성경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가 ‘행동하는 신앙’을 갖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성경의 일점일획까지도 하나님의 영감에 의한 기록이라고 찰떡같이 믿고 있는 보수 정통(?) 목사님들이 행함을 강조하는 성경 말씀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보수 정통 목사님들이여, 당신들이 “너희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외면하고, ‘오직 믿음’으로 교회에 충성봉사하는 것이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신앙이라고 가르침으로써, 지난 반세기에 걸쳐 한국 교회는 양적으로 크게 부흥(?)했지만, 기독교는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한국 교회의 현실을 냉정히 돌아봅시다. 우리나라에서 부흥하는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달콤하고 세련된 설교에 무책임한 기복 신앙을 강조하는 교회일수록 성도들로부터 환영을 받습니다. 반면에, 고난을 받더라도 좁은 길을 걸으며 주님의 뜻을 따르자고 외치는 교회는 외면을 받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에 대해 우리 주님께서 과연 뭐라고 하실까요?

한국 교회는 세속화되었을 뿐 아니라, 물화, 상품화되었습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고 인격이 훌륭한 분이라도, 가난한 교우가 장로가 되기는 하늘의 별따기가 되었습니다. 왜 장로를 뽑는데 경제력이 그렇게도 중요하게 되었습니까?

일반적으로, 도시의 웬만한 규모를 가진 교회에서는 그렇지 않는 교회에 비해 가난한 교우가 많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교회에 오는 분이 모두 물질적으로 축복을 받아서 그런 것입니까? 아니면 가난한 사람은 교회에 다니기 어려운 분위기가 되었기 때문입니까?

우리 주님께서는 혼자된 여성과 어린이를 비롯하여 사회에서 외면당하는 ‘버려진 사람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예수님 주위에는 늘 장애인들과 병으로 고통당하는 이웃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의 일반 교회에, 노숙자와 장애인이 거의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제라도 한국 교회는 세속화, 물화, 상품화된 교회의 제도적 장치들을 하나하나 고쳐가야 합니다. 가난하지만 인격이 훌륭한 분도 얼마든지 장로가 될 수 있어야 하고, 노숙자와 장애인이 다닐 수 있는 열린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3. 대부분의 한국 교회에는 역사성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역사성’이란 교회가 역사의 중심에 서서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세상을 개혁하는 변혁의 주체로 존재해야 함을 뜻하는 것으로, 예수께서 전하신 복음의 핵심이며 원형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하느님께서 세계를 향한 당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인류 역사를 섭리하신다고 믿습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하느님의 뜻을 따라 역사를 이끌어갈 책임을 느끼고 앞장서 활동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이러한 ‘참여 정신’이야말로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며, 다른 이웃종교와 뚜렷이 구별되는 기독교의 독특한 매력이며 힘입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어떠했습니까? 유신 독재 시절, 소수의 깨어있는 교회와 기독교인만이 목숨을 내놓고 정의와 진리를 위해 앞장서서 활동했습니다. 대부분의 교회, 특히 정통교단의 대표 교회임을 자처하는 대형교회들은 그런 고난의 길을 철저히 외면했습니다. 외면할 뿐만 아니라, 그건 세상의 일이고, 교회는 그런 세상 일에 관심을 갖지 말고 하늘의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며, 교세를 확장하는 데 관심을 기울여 왔습니다.

그런 한국 교회를 보고 안타까워하던 지성인들은 이제 교회 자체에 대한 기대조차 버리려 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교회가 우리 사회의 암적 존재가 되었다는 비난도 공공연하게 합니다. 교회는 더 이상 지성인들의 비난을 ‘핍박’으로 간주하지 말고, 그들이 왜 그렇게까지 교회를 비난하는 지 겸손하게 귀를 기울이며 자기 성찰의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4. 대부분의 한국 교회는 가부장적 권위주의에 젖어 있습니다.

목사와 장로, 집사의 구분은 직제의 구분일 뿐, 신분의 차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약성서는 모든 성도를 ‘왕 같은 제사장’(베드로전서 2:9)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한국 교회에서, 교우들이 목사나 장로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은 불경죄처럼 간주되고 있습니다.

목사는 교회에서 목회나 교육의 전문가로서, 장로는 행정을 담당하는 자로서, 그 전문성이나 연륜을 인정받은 것이지, 성도들 위에 군림해서 그들을 마음대로 다스리고 지배할 권리를 부여받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목사나 장로는 주님의 뜻을 교회를 통하여 세상에 이루는 종이나 사역자로서, 열심히 맡은 일에 성심을 다함으로 존경을 받을 수는 있으나, 그 직분을 맡았다는 사실 자체로 존경을 요구하거나 기대할 권리는 전혀 없습니다. 더구나 ‘권리’라기 보다 ‘의무’로 이해해야 할 그 직분을 가지고 교회 일을 좌지우지하려는 유혹은 반드시 극복해야 합니다.

한국 교회는 이제 가부장적 권위주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목사님들과 장로님들은 권위를 내세우기 전에 섬기는 법부터 다시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만찬 때 제자들의 발을 친히 씻어주시며, “내가 너희 발을 씻어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는 것이 옳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3장).

그러나 불행하게도, 많은 한국 교회는 주님께서 실생활에서 서로 섬기며 살라고 주신 ‘삶의 교훈’을 예식으로 바꾸어 <세족식 designtimesp=15128>으로 만들었습니다. 세족식은 성서적인 예식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발씻기는 행위’를 예식으로 하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그것은 기독교인의 삶의 특성으로서 삶 전반에 걸쳐 나타나야 합니다. 삶 전체로 살아내지 않으면서 예식으로 때우는 것은 주님의 가르침을 거스르는 것이며, 그 분의 뜻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5. 많은 한국 교회가 종말론적 현실도피주의에 젖어 있습니다.

많은 한국 교회 교우들이 “세상의 종말은 성서의 예언이므로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믿고 있습니다. 종말론에 대한 이런 믿음은 교회로 하여금 세상에 대한 책임감을 갖지 못하고, 환경 문제나 인권 문제 같은 당면한 현실 개혁적 책임에 대해 둔감하게 만들었습니다.

성서는 분명 종말을 말합니다. 그러나 종말은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연결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표현이 암시하듯이, 종말은 옛 질서의 종말이며, 새로운 세계로의 진입을 뜻하는 것이지, 지구의 파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는 종말론적 현실도피주의에서 벗어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하느님 나라 designtimesp=15137> 건설에 참여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교회는 그 교회가 속한 지역 사회를 건강하게 지켜주는 뿌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께서 이루고자 했던 천국(Kingdom of God,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주님은 천국이 어디 있느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천국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할 것이 아니요, 너희 가운데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신 천국은, 하늘나라(Kingdom of Heaven)가 아니라 하느님의 나라(Kingdom of God)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6. 많은 한국 교회가 성서 문자주의에 사로잡혀 하느님의 뜻을 왜곡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일점일획도 소홀히 하지 않고 중히 여기려는 그 자세는 좋습니다. 그러나 그런 의도가 결과적으로 하느님의 살아 움직이는 말씀을 교리의 틀에 가두어 죽은 문자로 만들었습니다. 그 책임은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이 져야 합니다.

사실 한국교회가 갖는 배타성, 세속화와 물화, 역사성 결여, 가부장적 권위주의, 종말론적 현실도피주의, 이런 것들이 모두 문자절대주의에 그 기초를 두고 파생된 기형적 병리 현상들입니다.

성경을 문자대로 해석하는 일은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생명의 말씀을 인간의 문자 안에 가두고 제한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 믿음의 선조들이, 시간과 공간 안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책입니다. “그 때, 거기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음성을 담은 그릇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들은 “그 때 거기서 말씀하신” 하느님의 음성을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새롭게 물어야 합니다. 역사 속에서 생동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그 의미를 찾아 읽지 않고 문자 속에 갇혀 ‘기록된대로’ 믿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믿는 것이 아니라” 그릇에 담긴 생수를 쏟아내고 “그릇을 씹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 목사님들이여, 그릇을 씹지 말고, 그 안에 담긴 생명의 양식을 교우들이 먹을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저는 지금까지 한국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 그 병리적인 현상들에 대해 제 나름대로 진단과 처방을 내려보았습니다. 만일 저의 진단과 처방이 잘못되었다고 확신하신다면 무시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리가 있다고 생각된다면,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은 반드시 이 문제를 검토해야 합니다. 피해가서는 안될 것입니다.

한국 교회 목사님들이여,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주님은 교회의 머리가 되십니다. 당신들이 교회의 머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당신들이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진정 “주님께서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을 만들어 감으로써, 지금까지 언급한 병리 현상들을 하나하나 고쳐가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사역하는 곳마다 사회 변혁이 일어났습니다. 병든 자, 억눌린 자, 창기들이 몰려와 예수님을 만났고, 그들의 삶이 치유되었습니다. 옛 생활이 변화되어 새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를 믿고 천국 간다는 희망에만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인격과 삶이 변화되었고, 사회적 파장을 일으켜 사회에 생동적인 변화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몸인 우리 교회는 어떻습니까? 교회가 존재함으로써 과연 우리 사회가 밝아졌습니까? 오늘날 한국 교회는, 교회가 해야 할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지 못했음을 속히 인식하고 주님 앞에 회개하고 돌아와야 합니다. 진정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건강하고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을 회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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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요한 (82.126.237.5)
2006-02-17 01:11:48
동업합시다!! 교회는 종교성을 충족시켜 주는 곳이 아니다.
동업합시다...! (믿에 나익성 님의 글을 읽고). 교회는 종교성을 충족시켜주는 곳이 아니다.
현재에 우리 한국교회는 사도행전에서 말하는 '종교성이 가득한 도시' 와 같은 표현의 현장을 보는듯하다..

교회는 왜 다니는가? 우리도 어느새 복음을 듣고 진리를 들을려고 다니는것이라기보다 종교적 충족을 얻기 위함이 되버리고 말았다. (종교성: 내세문제, 현재 복받는 문제, 악과 재화를 막는 마음으로)

그리스도교회의 출발과 예수님의 말씀의 출발은 전적으로 그렇지않다.
그 운동의 역동성은
유대교..유대회당과의 다름에 그 역동성이 있다.

우리는 오늘날 (대부분의 목사들) 일정한 액수를 받고 주일날 사람들의 종교적의식을 집행해주고 있다.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핵심은 그것을 완전히 거부하는데에 그 내용이 있고, 움직임이 있고 연대하는 형재애,,사랑의 공동체가 있다. 그것이 궁극적인 교회이다.
그러나 오늘날은 듣는이나 전하는이 모두...거의대부분 그들의 종교적충족감만 채워주면된다..이것이 교회의 심각한 변질이고 복음을 말한다 하면서 유대교의 일을 똑같이 반복하고 있는것이다.

현 교회안에서 교회를 개혁하는것도 좋은 일이지만 그 형식과 틀 자체가 생명을 살게하지 못하고 또 규격화 의식화 하게 만든다.

동업해야한다.
주님께서 당시 유대교 회당체제에서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시고 나를 따라오라고 말씀하신것처럼

오늘날도 새로운 주님의 공동체 운동이 필요하다.. 그것은 참된교회를 또 이시대에 새롭게 만드는것이다. 옛것은 옛것으로 가게두라..
어찌 눈물을 질질짜며 그들을 부르겠는가? 아마 뒤도 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새술은 새부대에 담듯이 수많은 방황하는 사람들 ...9시에..10시에..11시에 시장에서 놀고있는 사람들을 불러모아야한다. (현교회에 방황하는자들..등)

그리고 성서를 옳게, 새롭게 말하고 해석해 주는 운동이 일어나야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비본질적인 것들은 사라지게 된다.

바울이 여러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전하고 지역마다 여러형제공동체(교회)를 돌본것처럼 그런 운동이 일어나야한다.

현제 한국교회는 복음을 말한다 하지만 그 형식에서는 제사형식이되어있고 목사는 그위에 군림하고 장로들은 돈으로 그권세를 잡고있고 모든성도들은 그것을 찬양하고 있기때문에 그 심각함은 이루말할 수 없다. 그것은 예배가 의식이 되어있기 때문에 모두 눈을 그 의식에 멀게 만들고 있다...내용을 못보게하고 그 의식에 눈멀게 하고있다.

엄밀히 말해서 우리주님과 그의제자들이 전했던 복음의 교회라고 말하기가 어렵다.

동업해야합니다.
주님의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
수많은 목마른 사람들에게 기쁜소식을 전해주기 위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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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익성 (211.186.128.94)
2006-02-13 22:51:47
적당히 삽시다?
나를 알고 있는 예수꾼들은 이렇게 말한다. "이젠 적당히 살라"
이말의 요지는 남들은 교회안에서 목사 눈에 들어 편하게 신앙생활을 하는데 유독 나만 떠들어 봤자 득될것이 없다는 것이다. 세월이 지난뒤 생각해 보면 맞는 말인 것 같다. 예수 믿는 목사가 시무하는 교회를 찾아 헤매기를 2년. 누군가에 의하여 소개 받은 교회를 출석하다가 여의치 않아 보따리를 싼 뒤 일년을 다시 헤매다가 지금의 제법 큰 대형교회를 찾아서 등록을 했다.
참말로 희안한것이 교회의 생리적 구조요 교인들의 생리적 구조인데 교회 동동체가 크던 작던 똑같은 것은 몇가지가 있다. 열거 하자면, 목사의 우상화, 교회당의 성전화, 헌금의 제물화, 예배의 제사화, 등이다. 일부 교인들은 자녀가 신학교에 합격한것을 놓고 "주의종" 을 만들었다고 가문의 영광처럼 자랑을 하고 담임목사 승용차 사준것을 "주의종" 대접한것으로 만족하고 있는 것은 나에게 참 분통이 터지고 분노를 느끼게 한다. 우리 교회도 기획위;원회를 열어서 교회당건물을 새로 짓기로 했단다. 이럴려면 조만간 부흥회를 열것이고 특별새벽기도회 를 선포[?]할것이고 작정헌금을 강요할것이고 모든 교육부 지출은 삭감할 것이고[ 담임목사 사례비는 왜? 삭감을 하지 않나?].
않봐도 비디오 같다. 나는 헌금을 무명으로 한다. 나를 항상 챙겨주는 장로님 한분이 --나중에 장로같은 직분이나 교회안의 중직을 맡을려면 표시를 내야 하니 --기명으로 하란다. 그래서 나는 갈등한다. "교회를 또 옮겨야 하는가? 라고.
그런데 이상한 것은 세월이 지날수록 담임목사들의 우상화와 신격화는 지능적으로 그리고 관행적으로 이루어 지는데 개교회 교인들은 영 반응이 없다. 이유를 물으니 "주의종은 주님이 심판하신다" 란다.
작금의 한국교회를 들여다 보면 성경에 예언된 말세의 징조가 한국교회안에서 부터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도 생긴다.
"여기저기에서 주님를 주장하는 자들이 넘칠때가 바로 말세의 징조이다" 라고 하셨는데 지금의 한국교회가 그런것 같아 답답하다.
관행적으로 ,의례적으로, 습관적으로 행해지고 벌어지는 교회의 타락과 교회지도자들의 고갈된 양심에 언제 비가 축축히 내려서 아름다워 질려나.....
나도 이젠 적당히 교회생활을 해야 할때가 온것 같다.
지친다. 남는 것 하나도 없고 나만 공동체 안에 미움을 당하는 것 같다.

이참에 나도 교회하나 차릴까 보다.
누구 같이 동업할 사람 없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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