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학 후 빈 교실에 돌아와 보니 학기초에 민경이 엄마가 사 주신 파초가 얼어 죽었지 뭡니까. 무성하게 잘 자라던 그 친구가 슬쩍 건드리기만 해도 잎이 우수수 떨어지니, 얼마나 안쓰러운지요. 다른 반에서 화장실에 둔 화초들은 한겨울 혹한에도 싱싱한 걸 보니 마음이 더 아프더군요. 식물과 아이들은 서로 다르지 않은 듯합니다.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고 개학이 되자 평소에는 거들떠도 안 보던 필기구가 교실에 하나도 안 보이는 것입니다. 마침 플러스 펜이 필요하여 심부름 시킬 아이를 찾는데, 우연히 뒷 출입문 마지막 자리에 앉은 영득이의 쌍꺼풀진 눈과 딱 마주쳤습니다.

"영득아, 선생님 좀 도와 줄래?"
초등학생들은 선생님 심부름을 무척 좋아합니다. 영득이도 신나서 다가왔습니다. 마침 잔돈이 없어 만원을 꺼내 주고 문구점에서 까만색 플러스펜을 사 오도록 시켰습니다.  볼 일이 있어 한참만에 교실에 들어오니 영득이가 제자리에 앉아 있는 게 눈에 들어옵니다.
"영득아, 플러스 펜 어딨니?"
아이들에게 심부름시킬 때는 꼭 보고하도록 훈련시켰는데, 마침 일이 바빠 당부하지 못한 게 불찰이었습니다.
"선생님 자리에 잔돈과 함께 뒀는데요?"
그런데 돈은 있는데 아무리 찾아도 펜은 찾을 길이 없었어요.
"네가 놓아 둔 데가 어딘지 찾아보렴."

영득이도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면서 찾아봤지만 어디에도 안 보였습니다. 며칠 전 교무실에 물을 엎지른 내 실수를 눈감아 주고 오히려 힘을 불어 준 선생님들의 따뜻한 말씨가 떠올랐어요. 난감해하는 녀석에게 어떻게 좋은 말을 해 줄까 잠시 생각했습니다.

"영득아, 다시 나와 볼래?"
혹시 혼날지도 몰라 이쁜 눈동자를 끔벅거리며 녀석이 천천히 다가왔습니다.
"펜 사 오느라 고생했는데, 잃어 버려서 어쩌냐? 다시 돈을 줄테니 한 자루 더 사 올래?"
"예."
버드나무 줄기에 물 오르 듯  영득이의 마른 버짐 핀 얼굴에도 웃음이 번져 옵니다.
오 백원짜리 동전을 손에 쥐어주었습니다.

삼 백원짜리 플러스 펜은 누가 가져갔어도 잘 쓸 것이고, 어디에 굴러갔으면 머잖아 다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애써서 심부름했는데 실수했다고 꾸중하거나 혼낸다면, 얼마나 속상할까? 만 원을 전부 잃어 버렸어도, 동심에 상처를 주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영득이는 다시 심부름을 했습니다. 영득이가 사 온 그 펜으로 일을 보다 이따금씩 영득이 쪽을 훔쳐 보니, 흔연히 동무들과 어울려 떠드는 영득이가 쏙 들어옵니다.
'고 녀석!'

싹싹하고 영리한 그 녀석이 언젠가 나도 알아보지 못할 만큼 커서 책임감있게 살아갈 것을 그려 봅니다. 이 아이가 천하보다 귀한 영(靈)을 얻고(靈得), 하나님에게 영광(榮)을 얻는 영득(榮得)이가 되기를,  마음 가득 빌어 줍니다.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는 식물도 사람이 어루만져 주고 말 걸어 주고 때마다 물주기를 바라는데, 어린이들은 얼마나 더 사랑에 갈급할까요? 하룻밤 자고 나면 마음가 키가 부쩍부쩍 크는 이 아이들이 밝고 건강하게 자라기를 바랍니다. 혹 나의 실수로 아이들이 다치지 않도록 늘 조심해야겠습니다. 

2006-02-12
^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