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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층적(表層的) 종교인과 심층적(深層的) 종교인 (1)
류기종  |  rkch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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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1년 07월 31일 (일) 15:05:13
최종편집 : 2011년 07월 31일 (일) 15:30:28 [조회수 : 3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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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층적(表層的) 종교인과 심층적(深層的) 종교인 (1)

   
▲ 류기종 박사
요즈음 종교학자들 사이에서는 종교를 구분하는 방법을 과거와 달리 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즉 과거에는 종교를 구분할 때 그 종교의 역사와 퍼져있는 분포의 크기에 따라서 기독교 불교 유교 도교 힌두교 이슬람교 유대교 등으로 즉 이 세상에 전파되어 있는 종교의 유형별로 분류했으나, 이제는 그러한 분류보다는 종교인들의 종교적 의식(意識)의 상태와 수준 및 그들의 삶의 태도에 따라서, 다시 말하면 각 종교인들의 영성적 인식(깨달음)의 상태 혹은 단계에 따라서 분류하려는 경향이다. 이러한 새로운 분류방법의 하나가 바로 '표층적 종교인'(신앙인)과 '심층적 종교인'(신앙인)의 구분이다. '표층적 종교인'(신앙인)이란 종교 생활을 하되 깊은 영성적 자각이나 깨달음이 없이, 단순히 경전(성경)을 문자적으로 밖에 이해 못하고 또한 주어진 교리의 틀 안에서 만 신앙하려는 사람을 말하며, '심층적 종교인'(신앙인)이란 문자주의의 틀을 넘어서서 문자의 배후의 깊은 영성적 진리까지를 깨달아 알려고 노력하며, 또한 자기 자신 밖의 다른 종교(종파)나 혹은 교파의 교리들에 대해서도 무조건 배타적이거나 폐쇄적이지 않고 열린 마음을 지닌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기독교는 갈릴리를 중심한 예수의 복음운동/평화영성운동으로 시작했다. 그러나 예수의 복음운동은 유대교 정통 보수 세력인 바리세파 인들의 강한 저항에 부닥쳤다. 당시의 바리세파 인들은 철저한 문자주의(율법주의)적 종교인들이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모세오경 및 구약성경)을 일점일획도 바꿀 수 없고 달리 해석할 수 없는 철저한 문자주의자들이었다. 그러나 예수의 복음은 저들의 문자자의적 율법(성경)관과는 전적으로 달랐다. 왜냐하면 예수의 복음은 선민을 자처하는 유대인만이 아닌 전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복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예수의 복음운동은 바리세파 인들의 문자주의/율법주의 대 예수의 영성주의/복음주의의 맞대결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예수의 복음 곧 그의 영성주의 말씀과 바라세파 사람들의 문자주의(율법주의)와의 충돌은 예수의 복음운동 시작 때부터 예수의 생의 마지막 때까지 지속되었다.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가 당한 십자가의 죽음(순교)도 바로 그 충돌의 결과였다고도 말할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들 바리세파 사람들은 앞에서 말한 '표층적 종교인'의 전형이라 한다면 예수의 입장은 '심층적 종교인'의 표상을 지칭한다고 말할 수 있다. 다음으로 예수의 복음적 영성주의와 바리세파 사람들의 문자주의와의 충돌의 사례를 몇 가지만 들어보겠다.

안식일 이해: 예수의 영성주의/복음운동과 바리세파 인들의 문자주의/율법주의와의 충돌은 먼저 안식일에 대한 이해와 태도에서 찾아볼 수 있다. 마태복음 12장과 누가복음 6장은 안식일에 대한 예수의 태도를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누가복음 6장 6절 이하에 보면, 바리세파 사람들이 예수가 모세의 율법을 어기고 안식일에 손 마른 병자를 치유해 주는지 주목하고 있을 때, 예수는 그들에 상관치 않고 그 병자를 취유해준 사실을 볼 수 있다. 이 때 예수는 그들을 향하여 이렇게 응답하였다: "내가 너희에게 뭇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여기서 예수는 안식일에 사람을 살리는 일, 자선을 베푸는 일, 약한 자를 돕는 일 곧 하나님의 사랑을 베풀고 선을 행하는 일이 안식일에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는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일보다 더 우선적이고 중요함을 역설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예수의 영성주의 및 복음주의 가장 근본정신임을 알 수 있다. 즉 하나님의 사랑과 선을 나타내는 일이 모든 종교행위에 있어서 가장 중요시 되며 또한 우위에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더 나가서 예수는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말씀하면서,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마2:27-28)고 하여 언뜻 보기엔 인본주의에 가까운 말씀을 하였음을 볼 수 있다.

간음한 여인의 용서: 모세의 율법 혹은 바리세파 사람들의 문자주의적 율법주의에 대한 예수의 근본 태도는 감음한 여인에 대한 예수의 태도를 통해서 잘 나타나 있다. 바리세파 사람들이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혀 온 여인을 예수 앞에 끌고 와서, 모세의 율법대로라면 돌로 쳐서 죽여야 하는데 당신은 어떻게 하겠느냐고 질문을 던진 것이다. 예수는 이 문제가 참으로 심각한 문제임을 직감했다. 오랫동안 거의 절대시되고 신성시 되어온 모세의 율법을 그대로 따라야 할 것인가? 아니면 아무리 신성한 율법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어기면서라도 천하보다도 더 귀중한 한 사람의 생명 곧 이 연인의 생명을 용서하고 살려야 할 것인가? 하나님은 어떠한 것을 더 원하시고 기뻐하실 것인가? 예수는 이 문제가 참으로 심각한 문제였기 때문에 장고에 장고를 거듭했다. 그래서 즉답을 주지 못하고 땅위에 무엇인가를 적기 시작했다. 한 참 후에 예수는 이렇게 대답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있으면 이 여인을 향하여 돌을 던지라! 이 말씀은 그의 깊은 영성주의적 복음주의의 선포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예수의 이 말씀은 표층적 종교(신앙) 형태에서 심층적 종교 형태로의 비상(飛上/날아오름)을 나타내는 말씀이란 뜻이다.

부활에 관해서: 바리세파 사람들과 공조관계를 가지고 있던 당시의 사두개파 사람들이 부활의 문제를 가지고 예수께 질문을 던졌다. 이들 사두개파 사람들은 부활에 대해 회의적 태도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였다. 그들의 질문의 요점은 부활 후의 우리 인간의 개체성(individuality)과 정체성(identity)에 관한 문제였다. 현대적 용어로 말하면, 부활 후에 우리 인간(각 개인)의 개체적 인격성이 유지되느냐하는 문제였다. 그래서 그들은 자식이 없이 죽은 칠 형제의 사례를 가지고 예수께 질문했다. 모세의 전승에 따라서 가계를 계승하기 위하여 차남이 형을 대신하여 그 여인(형수)을 아내로 취하였고 또한 그도 자식이 없이 죽어, 이렇게 일곱 형제가 다 자식이 없이 죽었고 마지막에 그 여인도 죽었는데, 이러한 경우 나중에 부활한다면, 그 여인은 누구의 아내가 되어야 하느냐하는 질문이었다. 이 질문은 언뜻 보면 하나의 우문 같은 질문 같지만 실제로는 우리 인간의 부활의 상태 곧 부활후의 우리 각 인간의 개체성의 존속 여부에 관한 매우 중대한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이때에 예수가 그들에게 준 다음의 대답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도 시집도 가되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 그들은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라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
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서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하나님은 죽은 자들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아있느니라 하시니....>
(눅20:34-38)

위의 예수의 말씀의 내용은 너무나 광범위하고 또한 심오한 것이어서 많은 사색과 영적 통찰이 요구되는 내용들이다. 요점을 정리해 보면, 부활 후의 우리 인간의 상태는 현재의 우리의 상태와는 전적으로 다르다는 점이다. 즉 부활 후의 인간의 존재의 양식(the mode of being or existence)은 이 세상과는 전적으로 상이하다는 점이다. 거기에서는 시집장가 가는 일이 없다는 점 곧 부부의 결혼생활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 다는 점과 그리고 부활은 누구나 자동적으로 부활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한 이들에게 주어진다는 점이 암시되어 있다. 그리고 부활체는 다시 죽음이 없다는 사실과 그리고 그 상태는 천사들의 모습과 동등하다는 점이다. 또한 부활에 참여한 자는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부활은 부인할 수 없이 확실한 사실인데 그 이유는 하나님이 영원히 살아계신 하나님 곧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자의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과 연합된 자는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과 연합된 자들이므로, 하나님 안에서는 모든 사람이 죽지 않고 (영원토록) 살아있다는 것이다.

위의 예수의 말씀 중에서 특히 부활 후의 상태에 대해서 "천사와 동등"이란 말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천사들이란 시공을 초월하는 순수한 영적 존재들로서, 자신들을 위해서 존재하는 자들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곧 하나님 주위에서 혹은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전달자들이다. 예수는 부활의 은혜를 입고 부활에 참여한 자들은 바로 이러한 천사들의 존재 상태와 유사(동등)하다고 말씀한 것이다. 따라서 부활을 우리의 지상의 몸(육)의 부활처럼 생각하거나 또한 부활후의 상태를 이 세상 질서와 유사한 혹은 상관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문자주의적 이해의 태도를 일축하고 영성적으로 풀이해서 말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특히 마태복음 5장17절 이하에 보면, 예수의 율법(모세오경 혹은 구약성경)에 대한근본적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예수는 자신이 율법이나 선지자(예언자들의 가르침)를 폐기하러 온 것이 아니고 오히려 온전케(높은 영적 차원으로 승화)하려고 왔다고 말씀했다. 완전케 한다는 의미는 문자적으로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영성적으로 즉 보다 심층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그 내용이 바로 예수의 복음의 핵심이 되는 산상수흔의 중심 내용이다. 그중 몇 개의 예를 들어보자.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 편 뺨을
치거든 왼 편도 돌려 대며"(출21:24, 신19:21: 마5:5:38-39)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으나
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레19:18; 마5:43-44)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해
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 주심
이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뭇은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하나님의 온전(완전)하심
과 같이 너희도 온전(완전)하라"(마5:45-48).

우리는 위의 예수의 말씀들에서 예수의 복음의 영성적 지고함을 깨닫게 된다. 즉 예수는 바리세파 사람들의 문자주의적 율법(성경) 이해 태도를 거부하고 그 안에 담긴 심오한 영적 의미를 파악해서 재해석해 주는 영성주의를 보여준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의 복음(말씀)은 많은 종교인들이 흔히 범하기 시운 형식주의, 의식주의, 문자주의 및 외식주의의 차원을 훨씬 넘어서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요컨대 예수의 복음은 당시의 유대종교 특히 유대교 정통주의자들인 바리세파 사람들의 문자주의적인 성경관 그리고 자기 과시적이고 자기중심적이며 또한 얄팍한 이익을 추구하는 근시안적(기복적)인 영성 곧 표층적인 영성(곧 종교와 신앙 행위)을 훨씬 뛰어넘는 심층적인 종교 행위(영성)임을 알게 된다. 그런 점에서 예수의 복음운동은 요약해서 말하면 바로 유대교 정통주의 자들인 바리세파 사람들의 문자주의적 신앙형태 곧 표층적인 종교형태에서 문자 배후의 영적인 의미를 파악하고 실천하는 영성 곧 심층적인 종교형태로의 일대 변혁/개혁 운동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오늘날 한국의 (한국뿐 아니라 세계의 모든) 그리스도인들 특히 교회의 지도자들은 이점에 특별한 유의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을 내걸고 거부하고 개혁한 영성주의 곧 심층적 종교형태를 다시 문자주의적 신앙 곧 표층적 종교 형태로 후퇴시키거나 전락시켜서는 결코 안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행위 즉 성경에 대한 문자주의적/율법주의적 태도는 반(反) 복음운동, 반 예수주의, 반 영성주의 즉 예수의 영성적 복음운동의 반역행위 혹은 적대행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을 깊이 간파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한 것이다: "그(그리스도)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고후3:6)" 바울의 이 말은 율법(구약성경, 더 나아가서는 성경 전체)에 대한 문자주의적 이해는 우리의 영을 죽게 하는 것이므로 영적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되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설교내용이나 성경 해석, 혹은 신학적 진술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성주의적 태도 곧 심층적 종교/신앙 형태에 기초해 있는가 아니면 바리세파 사람들의 기본 입장인 율법주의 혹은 문자주의의 입장 곧 표층적 종교/신앙 형태에 머물러 있는가를 살피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만일 아직도 문자주의적/표층적 종교 형태에 머물러 있다면 하루 빨리 거기에서 벗어나 심층적 종교형태로 전환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예수의 복음적 영성 곧 심층적 영성에서 점점 더 멀어질 수 있으며, 결국에는 예수의 복음 곧 영성적 종교를 다시 바리세파 사람들의 율법주의(문자주의)적 종교 곧 표층적 종교로 환원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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