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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소개] 목회자를 위한 <설교자노트> 2011년 7·8월호
정연복  |  pkom545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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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1년 06월 27일 (월) 13:39:40
최종편집 : 2011년 07월 07일 (목) 02:34:02 [조회수 : 2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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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소개> 목회자를 위한 <설교자노트> 2011년 7·8월호  

                                                                              정연복(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저는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으로 일하면서 1997년부터 격월로 나오는 <설교자노트>라는 책을 번역해 왔습니다.

지금까지 91권이 나온 <설교자노트>는 '교회력에 맞춘' 설교 본문에 대한 성서 주석, 그리고 그 본문에 따른 미국의 실력 있는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의 최신의 설교를 번역하고, 아울러 설교 내용에 적합한 기도문과 예화 자료를 풍부하게 제공하여 목회자들의 설교 준비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책입니다. 특히 <설교자노트>에 실린 설교들은 설교자들에게 성서에 충실하면서도 독창적인 설교 아이디어를 제공합니다.

그런데 이 <설교자노트>는 시중 서점에서는 팔지 않고 신청하시는 목회자들에게 직접 우송합니다. '영성적이며 공동체적이며 생태학적인 신앙 공동체를 위한 자료'인 <설교자노트>를 구입하기 원하는 분들은 한국기독교연구소(전화: 031-929-5731)로 연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설교자노트>는 격월로 나오며 두 달치 분량의 설교 자료를 담고 있는데, 2011년 7·8월호 중 7월 셋째 주 설교 자료를 참고로 첨부합니다.


설교 제목: 고통과 이익  

* 성경 본문: 로마서 8:12-25
* 성경 주석

오늘 본문은 별개이면서도 교묘히 통합된 두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첫째 부분(12-17절)에서, 바울은 크리스천들이 "육신을 따라 살지 않고.... 그들의 생각을 육신의 일들에 두어서는 안 되고"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앞에서의 단언의 결말을 특징짓는다. 육신과 육체적인 갈망들에 사로잡히기보다, 신자들은 "그들의 생각을 성령의 일들에 고정시킨다." 왜냐하면 그들은 "죄와 죽음의 법에서 자유롭게 되어" 이제 더 이상은 정죄 아래 있지 않기 때문이다(롬 8:1-5 참조).

둘째 부분(18-25절)에서, 바울은 "현재 우리가 겪는 고난"(18절)을 포괄적으로 재해석한다. "예수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의 영"의 상상할 수 없는 약속과 적극적인 개입에 기초하여(즉, 하나님은 "여러분 안에 계신 그분의 영을 통해 여러분의 죽을 몸도 살리실 것이다", 롬 8:11), 아직은 제거되거나 사라지지 않은 창조 질서의 고난들을 포함하여 "현재 우리가 겪는 고난들"은 우리와 우리의 세계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참여자들이라는 것을 입증한다.

12-17절에서, "육신을 따라" 사는 것과 "성령을 따라" 사는 것 사이에 존재하는 뚜렷이 대조되는 이분법에 관한 바울의 마지막 가르침이 제시된다. 이 주제에 관한 그의 확대된 논문, 즉 로마서 5:6 혹은 훨씬 더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갈지도 모르는 장황한 설명에 기초하여, 바울은 다음의 말로써 이 문제에 관한 그의 마지막 발언들의 시작을 적절히 알린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빚을 지고 사는 사람들이지만, 육신에 빚을 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육신을 따라 살아야 할 존재가 아닙니다"(12절). 더 나아가, 바울은 로마 교회 교인들에게 다음의 사실을 상기시킨다: 만일 그들이 계속해서 "육신을 따라 산다면", 그들은 무서운 현실, 즉 "죽음"에 직면할 것이다(13a절).

이 중대한 시점인 13절에서, 바울이 "육신"(flesh, sarx)과 "몸"(body, swma)을 어떤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지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육신"은 인간 존재의 그 측면에 대한 아무런 명예 훼손 없이 육체적인 몸(physical body)을 언급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문맥은 그 용어에 대한 보다 개념적 혹은 영적 견해를 요구하는 것 같다. "육신"을 "성령"과 대조적인 위치에 놓음으로써, 바울은 이 둘이 우리 안에서 작용하는 경쟁적인 힘들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육신", 즉 육체적인 몸 자체가 우리로 하여금 육체적인 갈망들에 순종하도록 명령하는 악한 독재자인 것이 아니라, "육신"과 "성령"은 서로 적대하는 경쟁적인 세력들이다.  육신은 사람들로 하여금 부패로 귀결되는 어둠을 향하게 한다. 반면에, 성령은 사람들로 하여금 생명을 가져오는 빛을 향하게 한다.

바울은 로마서 7:5에서 비슷한 주장을 하고 있다는 것도 언급할 가치가 있다: "이전에 우리가 육신을 따라 살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죄의 욕정이 우리 몸의 지체 안에서 작용해서, 죽음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습니다"(롬 7:5; 롬 13:14도 아울러 참조). 덧붙여, 13b절의 "몸"이라는 단어의 사용뿐만 아니라, 로마서 8:3에서 바울이 "죄된 육신"(sinful flesh)이라고 말하는 것은 다음의 개념을 더욱 뒷받침한다: 적어도 이 문맥에서는, "육신"은 육체적인 몸이 아니라 한 개인의 삶을 인도하는 강력한 실재를 가리킨다.

그러나 죽음의 가능성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것은, 바울이 독자들에게 기대하는 긍정적인 결과에 대한 단언이다: "그러나 여러분이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입니다"(13b절). 그는 그들에게 단언한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누구나 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14절). 무조건으로, 바울은 그들의 전혀 달라진 운명에 관해 선언한다: "여러분은 또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자녀로 삼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영으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15절).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제 그들은 "죄와 죽음의 법" 아래 두려움에 떠는 종살이에서 벗어나,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이 친근하고도 본능적인 호칭은 하나님의 영이 그들 안에서 작용하고 있고 그들이 진실로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이 정하신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라는 것을 또한 확증한다(16-17절).

로마의 크리스천들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단언한 후, 바울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있어서 그들의 역할에 초점을 맞춘다. 로마인들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라고 분명히 말한 후, 바울은 교묘하게 덧붙인다: "우리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으려고, 그와 함께 고난을 받으면"(17b절). 그런 다음, 거의 아무런 방향 전환 없이, 바울은 그들이 당연한 일로 생각하는 고난에 대한 견해를 바꾸는 연설을 한다. 그의 사도적 관점에서 볼 때, "현재 우리가 겪는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견주면, 아무것도 아니다"(18절).

바울은 고난이 운명이나 신비적인 신들의 변덕 때문에 야기되었다고 명시적으로 선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로마 교회 신자들이 당시의 문화 속에 파고들었던 심적 태도에 더 이상 사로잡히지 않도록, 바울의 그 다음의 단언은 그런 개념들을 분쇄시킨다. 고난을 받을 운명이거나 혹은 유명한 신들과 여신들에게 저당 잡힌 노리갯감 역할을 한다기보다는, 창조 세계의 고난을 포함하는 현재의 고난은 사실상 또 다른 실재를 가리키는 신호라고 바울은 설명한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속박 아래 있었던 것, 즉 죄와 죽음의 종이었던 것과 똑같이, "피조물도 허무에 굴복했다"(20a절). 삶의 무의미성과 덧없음을 포함하는 이 질병을 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피조물은 저 다른 세계를 갈망한다: "그러나 소망은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곧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누릴 영광된 자유를 얻으리라는 것입니다"(20b-21절). 피조 세계의 허무함은 그 영향력이 너무나도 광범위하게 미치는 것이어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선언할 수 있었다: "모든 피조물이 이제까지 함께 신음하며 함께 해산의 고통을 겪고 있다"(22절). 뿐만 아니라, "첫 열매로서 성령을 받은 우리도 자녀로 삼아 주실 것을, 곧 우리 몸을 속량하여 주실 것을 고대하면서 속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23절). Harry Alan Hahne는 로마서 8:19-23을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신비스러운 종말론적 언어로, 사도 바울은 자연의 부패를 묘사하며,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구원의 우주적 범위를 표현한다."

바울에 따르면, 크리스천들과 피조물의 이 신음은 탄생, 번영과 쇠퇴, 죽음의 자연적인 순환이 정복되는 미래를 가리키는 초월적인 신호들이다. 요약하면, 우리의 신음은 우리의 연약하고 덧없는 육체와 자연계는 존재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아님을 암시한다.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우리의 구원과 썩어짐으로부터의 피조물의 구출이 아직 완전히 실현되지는 않았지만(24절), "우리가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면, 참으면서 기다려야 합니다"(25절). 따라서, 비록 지연되고 있기는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이 정하신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롬 8:17)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하고 언젠가는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할 이유는 충분하다.  

* 설교 본문

우리는 고통스런 지점에 도달할 정도까지 우리의 믿음을 애써 훈련시킬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고통 없이는 이익도 없을뿐더러 우리의 믿음 또한 올바로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고통 없이는 이익 없다"는 속담은 신화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간단한 속담에는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신약성경에서 가장 유능한 건강 트레이너인 사도 바울 자신의 눈을 통해 이 개념에 대한 신선한 통찰력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물론, 그도 건강상의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강건한 크리스천의 모습을 인상적으로 보여주었다.

한 유명한 사이클리스트는 말한다: "규칙적인 자전거 타기가 나의 몸과 정신과 영혼에 유익하다는 것을 나는 발견한다." 그러나 그는 또한 말한다: "자전거를 2주일 가량만 타지 않아도, 나는 게으름뱅이로 되돌아가기 시작한다." 날씨가 추운 계절 동안, 대부분의 진지한 사이클리스트들이 스키 같은 겨울철 활동으로 전환하거나, 기후가 따뜻한 남쪽으로 향하여 자전거 타기를 계속하거나, 겨울철에 알맞은 복장을 하고 겨울 내내 자전거 타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게으름뱅이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쇠퇴의 과정으로 볼 수도 있는데, 그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대부분의 것들은 똑같은 상태에 머무르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향상되고 있지 않다면, 쇠퇴하고 있는 것이다. 스포츠와 건강 훈련의 용어로 말하면, 그것은 종종 "고통 없이 이익 없다"로 표현된다. 그러나 보다 정확히 표현하면, "고통 없이는 현상 유지도 없다"는 것도 사실이다. 보디빌더인 Tom Venuto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한다: "궁극적인 진리는, 당신은 앞으로 나아가든지 뒤로 나아가든지, 성장하든지 죽든지 둘 중의 하나이다. 편안하게 현상을 유지하는 따위의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 Venuto는 "고통 없이 이익 없다"는 철학을 육체적 영역을 넘어서는 노력들에 대해서도 적용한다. 그는 말한다: "성장하기 위해, 당신은 과거의 성취들을 뛰어넘어야 한다. 당신의 지각된 경계와 한계들을 넘어서야 한다. 그것은 알 수 있는 곳으로부터 벗어나서 알 수 없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것을 의미한다. 낯익은 것으로부터 낯선 것 속으로. 편안한 것으로부터 불편한 것 속으로. 당신은 당신의 '안락 지대'(comfort zone)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인가? 고통이 없으면, 정말로 이익도 없는 것인가?

그렇다. 정말로 그렇다. 물론, 당신은 "고통 없이 이익 없다"는 생각은 신화에 불과하다고 말하면서 정반대를 선언하는 연구들을 온라인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보통은 당신이 노력을 거의 혹은 전혀 기울이지 않고도 60달러씩 3번만 할부금을 내기만 하면 당신을 건강하게 만들어 줄 그들의 건강 프로그램을 사기를 원한다.

어떤 경우이든, "고통 없이 이익 없다"는 사도 바울이 적극적으로 지지할 철학이다. 사실, 그것은 오늘 본문에서 그의 논의의 기초들 중의 하나이다.

분명히, 최소한 바울의 독자들 중의 일부는 그들의 믿음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었다. 그 고통이 정확히 무엇인지 바울은 밝히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박해, 혹은 최소한도 추방이었을지도 모른다. 바울이 독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할 때, 그는 그것을 언급한다: "자녀이면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으려고, 그와 함께 고난을 받으면, 우리는 하나님이 정하신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입니다"(로마서 8:17). 한 발 더 나아가, 그는 말한다: "현재 우리가 겪는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견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나는 생각합니다"(18절). 그는 이 시대의 고통이 하나님 나라가 도래할 때 올 영광에 비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지금 고통을 감당하라, 그리고 나중에 하나님 나라를 얻어라. 고통 없이 이익 없다.

이 동일한 구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성장하려는 노력을 멈출 때 후퇴하게 되는 것에 관해서도 언급한다. 그는 그것을 "썩어짐의 종살이"(bondage to decay, 21절)라고 부른다. 그는 그것을 모든 피조물에게 적용한다. 우리는 자연 속에서 썩어짐의 실례들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운동을 멈출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몸 속에서 그것을 가장 직접적으로 경험한다. 운동을 멈추자마자, 거의 지체없이 우리의 몸은 쇠약해지기 시작한다. 우리의 믿음을 운동시키지 않을 때, 우리는 그것을 또한 영적으로도 경험한다. 이 모든 경우에, 그것은 "고통 없이는 이익도, 현상 유지도 없다"는 철학이 딱 들어맞는 상황이다.

우리가 선택하는 고통.

바울이 그리스도와 함께 겪는 고난에 관해 말할 때, 그는 진실로 무엇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인가? 그는 부상, 질병, 실망,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뭔가의 희생물이 됨, 나쁜 행위, 죄 의식에 사로잡힌 양심, 혹은 삶의 다양한 시간에 거의 모든 인간에게 다가오는 어떤 다른 아픔, 한마디로 말해 죽음을 면할 수 없는 인간의 연약함 때문에 우리에게 오는 고통을 의미했을 것 같지는 않다. 우리의 연약함에 하나님은 깊이 공감하신다. 그리고 이따금 그분은 우리를 위로하신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함께 겪는 고난에 관해 말하면서 바울이 염두에 두었던 것은 인간 존재의 고통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선택된 고통"에 관해 말하고 있다. 바울의 독자들 중 일부는 그들의 믿음 때문에 박해를 받고 있었을 것 같다고 우리는 말했다. 그런데 박해는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이라면 일부러 추구할 것이 아니다. 그는 "고통과 이익의 상호 관계"를 예수의 이름으로 목회를 하려는 그들의 노력 때문에 고통을 겪는 사람들에게도 적용하려 했을 것이다. 희생은 고통스러울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겪는 희생과 고통은 영적 이익을 가져온다.

바울은 그들의 영적 근육을 부지런히 운동시키는 사람들, 즉 기도하고 연구하고 자신들의 모든 것을 그리스도께 바치려고 자신을 훈련시키는 사람들에게 대해서도 똑같은 주장을 한다. 사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경기에 나서는 사람은 모든 일에 절제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썩어 없어질 월계관을 얻으려고 절제를 하는 것이지만, 우리는 썩지 않을 월계관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목표 없이 달리듯이 달리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허공을 치듯이 권투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내 몸을 쳐서 굴복시킵니다. 그것은 내가, 남에게 복음을 전하고 나서 도리어 나 스스로는 버림을 받는, 가련한 신세가 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고전 9:25-27). 그것은 선택된 고통이다.

빌립보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바울은 신자들의 삶의 목표, 즉 죽은 자들의 부활에 관해 말한다. 그런 다음, 그는 말한다: "나는 이것을 이미 얻은 것도 아니며, 이미 목표점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사로잡으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좇아가고 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아직 그것을 붙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는 일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몸을 내밀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목표점을 바라보고 달려가고 있습니다"(빌립보 3:12-14). 그것 또한 선택된 고통이다.

앞에서, 바울은 삶의 일반적인 고난, 즉 선택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의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다가오는 고난에 관해 말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고 우리는 말했다. 그것은 맞다. 하지만 그것에도 몇몇 예외가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중병에 걸리면, 우리는 우리에게 도움이 될 다양한 형태의 의학적인 도움을 추구하면서도 또한 말할 수 있다: "나는 이 질병을 하나님이 이 질병의 고통 속에서 나에게 말씀하고 계실지도 모르는 일체의 것에 귀기울이는 기회로 삼을 것이다." 혹은, "나는 나의 질병의 고통으로부터 배운 것을 고통받고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다가서는 통로로 삼을 것이다." 혹은, 어떤 다른 방식으로, 그 피할 수 없는 고난을 우리의 신앙생활과 믿음의 실천에 통합시켜라. 유태인 대학살의 생존자인 소설가 엘리 위젤은 말했다: "고난은 아무런 특권도 주지 않는다. 그것은 당신이 고난을 가지고 행하는 것이다. 당신이 고난을 가지고 행하는 것이 우리를 영적 운동선수로 만들 수 있다. 비록 우리의 몸은 쇠퇴해지고 있는 동안에도."

우리의 영적 운동.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영적 운동은 어떤 모습일 수 있을까? 그것은 우리의 영향력의 범위를 살펴보는 것, 그리고 그 영역에서 우리가 행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실천으로 옮기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성 프랜시스의 저 유명한 기도를 보라. 그것이 마치 당신의 믿음을 훈련시키기 위한 지침이요 명령이라고 간주하고 귀기울여 보라. 그것이 고통과 이익에 관해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주목하라:

오, 주여
나로 하여금 당신의 평화의 도구가 되게 하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범죄가 잇는 곳에 용서를
분쟁이 있는 곳에 화해를
잘못이 있는 곳에 진리를
의심이 있는 곳에 믿음을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오, 하나님이시여,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게 하시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게 하시고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소서.
주는 가운데서 받고
용서하는 가운데서 용서받고
죽는 가운데서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성 프란시스, '평화의 기도')

예수를 위해 땀 흘려 믿음의 운동을 하라.

바울은 삶을 훈련 시기, 즉 예수를 따르려는 우리의 노력에 있어서 땀 흘려 믿음의 운동을 해야 할 때로 간주했다. 우리는 도래할 하나님 나라의 전망 속에서,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을 알고 있는 데서 용기를 취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꾸준히 훈련시켜야 한다.

물론, 우리의 육체 운동에 있어서처럼 우리는 영적 운동에서도 실패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체육관으로 계속해서 돌아가서 우리 자신의 영적 근육을 열심히 스트레칭하여 나날이 더 강해지고 신앙생활에서 더 큰 지구력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것은 때로 고통스럽고 힘들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의 목표가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성장하지 않으면 우리는 뒷걸음질치게 된다는 것을 항상 기억함으로써, 우리 자신에게 부단히 박차를 가할 수 있다.

<가능한 설교 주제들>
* "고통 없이 이익 없다"는 우리의 육체뿐만 아니라 영성에도 적용된다.
* 피조물의 신음에 대한 바울의 언급은 환경에 대한 인간의 막중한 책임과 연결될 수 있다. 바울은 피조물의 고통을 해산 중인 여인의 고통에 비유한다. 태어날 아기를 기대하는 것은 여인에게 해산의 아픔을 견딜 기쁨을 가져온다. 그러나 실제로 그 기쁨을 경험하기 전에, 여인은 해산과 분만의 엄청난 고통을 통과해야 한다. 구원받은 사람들이 피조물의 구원을 위해 감당해야 할 역할은 무엇인가?
* 로마서 8;24-25는 희망의 성격에 관한 설교의 기초이다.    

* 예화

+ 축복

고통이 바뀌면
축복이 된다기에
그 축복 받으려고
내가 평생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나는 삶을 지고 왔을까요?
절망을 씹다 뱉고
희망을 폈다 접는
그것이 고통이었습니다
그 고통 누가 외면할 수 있을까요?
외면할 수 없는 삶
그게 바로 축복이었습니다
(천양희·시인, 1942-)

+ 욥의 기도

이 어지러운 사회 속에서도
모름지기
나아가야 할 방향을
잊어버리지 않고
움직이지 않는 출구를 찾아
조용하고 힘차게 전진할 수 있는
바른 시력을 주신 사람

작은 일에도 감사할 줄 알고
가진 것이 적어도
고마워할 줄 알며
어떠한 고난 속에서도
도자기처럼
더욱 단단해질 수 있는
확실한 신념을 가진 사람

다른 환경 속에서 자란
다른 사람더러
도저히 이해 못하겠다고
쉽게 욕하고 조롱하지 않으며
아무리 복잡하고
힘든 생활 속에서도
감사와 기도를 쉬지 않는
주님의 평안을 지닌 사람
자기만 잘났다고 뻐기지 않고
겸손히 남의 말을 들을 줄 아는 사람

만나고 싶은 사람
사랑하고 싶은 사람
하나님이 참으로 기뻐하시는 사람
언제나 함께 있고 싶은
그 사람
(이경아·시인)

+ 고난기에 사는 친구들에게

사랑하는 벗들이여, 암담한 시기이지만
나의 말을 들어주어라
인생이 기쁘든 슬프든, 나는
인생을 탓하지 않을 것이다.

햇빛과 폭풍우는
같은 하늘의 다른 표정에 불과한 것
운명은, 즐겁든 괴롭든
훌륭한 나의 식량으로 쓰여져야 한다.

굽이진 오솔길을 영혼은 걷는다.
그의 말을 읽는 것을 배우라!
오늘 괴로움인 것을, 그는
내일이면 은총이라고 찬양한다.

어설픈 것만이 죽어간다.
다른 것들에게는 신성(神性)을 가르쳐야지.
낮은 곳에서나 높은 곳에서나
영혼이 깃들인 마음을 기르는

그 최후의 단계에 다다르면, 비로소
우리들은 자신에게 휴식을 줄 수 있으리.
거기서 우리들은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으며
하늘을 우러러 볼 수 있을 것이리라.
(헤르만 헤세·독일 소설가, 1877-1962)

+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슬픈 날엔 참고 견디라
즐거운 날이 오고야 말리니

마음은 미래를 바라느니
현재는 한없이 우울한 것
모든 것 하염없이 사라지나
지나가 버린 것 그리움 되리니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노하거나 서러워하지 말라
절망의 나날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 반드시 찾아오리라

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언제나 슬픈 법
모든 것은 한순간 사라지지만
가버린 것은 마음에 소중하리라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우울한 날들을 견디며 믿으라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현재는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적인 것, 지나가는 것이니
그리고 지나가는 것은 훗날 소중하게 되리니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설움의 날을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이 오고야 말리니
(A. 푸쉬킨)  

+ 풀이 받은 상처는 향기가 된다

사람은 상처를 받으면
비명을 지르거나 욕을 하거나 화를 낸다.
분노하고 고함지르고 보복하려 하고 때로는 좌절한다.

그러나 풀은 상처를 받았을 때 향기를 내뿜는다.
그 향기는 그냥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바람에 쓰러지고 비에 젖고 찬 서리에 떨어야 한다.
땅 밑까지 휘어지고 흙탕물에 젖어도 꺾이지 않아야 한다.

보살펴 주는 이 없는 거친 들판에서
억센 발에 짓밟혀도 새로이 솟구쳐야 한다.
고통과 시련에 굴하지 않고 오해와 억울함에 변명하지 않고
꿋꿋하고 의연하게 다시 제자리로 일어서야 한다.

풀의 향기에는 살을 에는 아픔이 숨어 있다.
그러나 풀은 말하지 않는다.
그저 조용하게 향기로 미소 지을 뿐이다.
상처는 다 아픔과 독기가 되는 줄 안다.
그러나 향기가 되는 상처도 있다.
상처가 향기가 되면 가슴 저린 아름다움이 묻어난다.
상처받은 풀이 내뿜는 향기는 상대를 감동시키고 취하게 한다.

향나무는 자기를 찍는 도끼에 향기를 묻혀 준다.
향나무의 입장에서 보면 자기를 찍는 도끼는 원수다.
그럼에도 향나무는 자신의 아픔을 뒤로하고
원수의 몸에 아름다운 향을 묻혀 준다.
피아의 구별이나 원망은 사라지고 관용과 화해만 있을 뿐이다.

진짜 향나무와 가짜 향나무의 차이는
도끼에 찍히는 순간 나타난다.
평소 겉모습은 같아 보이지만 고통과 고난이 닥치면
진짜는 향기를 내뿜지만 가짜는 비명만 지르고 만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재물의 크기가 아니라
내뿜는 향기와 비명에 따라 그 품격이 결정된다.

내가 세상을 향해 매연을 뿜어내면
남들만 상처받는 것이 아니라 내 호흡기도 해를 입게 된다.
결국은 그 독기가 나에게 되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상처와 분노를 향기로 내뿜어야 나도 향기로워질 수 있다.
깊은 향, 아름다운 세상은 그렇게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다.
(황태영·수필가, 1961-)

+ 삶은 계란  

유대인은 음식 규례가 까다롭다. 성경에 나오는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의 구별이 있고, 절기마다 먹는 음식의 의미가 있다. 무교절 같은 경우 이스라엘을 여행하면 일주일 내내 누룩 없는 떡을 먹어야 한다. 아무 맛도 없다. 관광객에게는 고역이다.

그래도 먹을 만한 것은 삶은 계란이다. 무교절기 중에는 꼭 삶은 계란을 먹는데 그 이유가 있다. 생계란 속은 흐물흐물하나 열을 가해 삶으면 단단해지기 때문이다. 이 삶은 계란의 교훈은 고난(열을 가함)을 받으면 더 단단해(강해짐)진다는 데 있다. 요즘 우리는 여러 가지로 힘들다. 그러나 이런 시련과 고난을 통해 좌절할 것이 아니라 더 의지가 굳어지고, 연단을 통해 더 믿음이 강해지는 삶이 되어야겠다.
(김경원·서현교회 목사)

+ 동거

진주가 보석으로서 이름값을 하는 것은 조개라는 숨은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모나고 보잘것없는, 고통의 씨앗인, 어쩌면 원수 같은 모래 한 알을 내뱉지 못하고 기어이 몸 속 손님으로 받아들인 조개의 저 아름다운 동거!

제 피와 살점을 뜯어 먹여 마침내는 완벽한 진주로 키워내고야 마는 조개의 저 지독한 사랑이여!

그러므로 조개는 진주의 밥이요 집이요 아내요 어머니요 모든 것이다. 이름 없는 조개는 이름 있는 진주의 진짜 이름이다. 상처 난 조개만이 진주를 품을 수 있다. 진주의 중심엔 언제나 조개의 고통이 스며 있다.
(김선태·시인, 1960-)

+ 시계추의 무게

추가 달린 커다랗고 낡은 시계가 하나 있었습니다.
이 시계는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성실하게 시간을 알려주었습니다.

어느 날, 물끄러미 시계를 바라보던 시계 주인은
'낡은 시계에 저렇게 무거운 추를 달아놓는 건 좋지 않아.'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추를 떼어버렸습니다.
그러자, 시계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시계는 좌우로 흔들리는 시계추의 무게 때문에 감아놓았던 태엽이
일정한 속도로 풀리는 원리로 시간을 가리키기 때문이니까요.

인생을 살면서, 우리가 지고 가는 짐이 너무나 무겁게
어깨를 누른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짐이 된다고 느끼는 그것이 우리를 움직이는 추진력이 된다고
생각될 때는 없으신지요..

+ 고난의 길

어머니가 아들을 낳고 아들이 어머니를 낳았습니다
이소선 여사가 그 어머니고
전태일 열사가 그 아들입니다

나는 혹사의 노역장으로 노동자를 내모는 자본의 세계에 살면서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 아들에 그 어머니를 본 적이 없습니다
상복을 입고
불에 타 죽은 아들의 사진을 껴안고 오열하는 이 여인이 그 어머니인가
목놓아 흐느끼는 모습이
험한 세상에 자식을 빼앗기고
가파른 인생을 사는 우리네 어머니들과 꼭 닮았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여
자식의 죽음으로 다시 태어난 천만 노동자의 어머니여
나는 알고 있습니다
당신의 자식이 굴리다 굴리다 힘에 겨워 못다 굴린 삶의 무게를
그 무게를 머리에 이고 당신이 걸었던 고난의 길을
그 길의 시작과 끝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길에는 끝이 있습니다 나도 가렵니다
자본의 무게에 짓눌린 노동자의 틈에 끼여 어깨동무하고
당신이 지금 걷고 있는 그 길을 함께 가렵니다
노동자가 여는 해방의 길이 인류해방의 길과 맞닿는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한테 배워서
(김남주·시인, 1946-1994)

+ 고난 13계명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 나에게 왜 이런 고난이 오는가?" 하고 부르짖습니다.

1. 믿는다는 고백 안에는 고난도 함께 받겠다는 고백도 숨어 있습니다. (빌 1:29)
2. 예수를 믿고 받는 고난은 절망이 아니라 특권입니다. (빌 3:10)
3. 예수의 엄청난 고난에 비하면 우리의 고난은 가벼운 것입니다. (고후 4:17)
4. 우리의 과오로 고난이 옵니다. (갈 6:7)
5. 죄의 결과로 고난이 옵니다. (요 5:14, 민 12:10, 대하 16:12)
6.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기 위하여 고난을 주십니다. (요 9:2-3)
7.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고난을 주십니다. (요 11:4)
8. 하나님이 허락한 원수가 고난을 주기도 합니다. (막 5:1-10, 눅 13:16, 행 10:18)
9. 자녀를 징계하듯 하나님의 징계로 고난이 옵니다. (히 12:5-13)
10.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입증하기 위하여 징계가 옵니다. (히 12:8)
11. 우리를 유익 되게 하기 위하여 징계가 옵니다. (히 12:10)
12.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하여 징계를 하십니다. (히 2:11)
13. 고난을 당할 때 낙담하면 안 됩니다. (고후 12:9)
(최용우·전도사)

+ 핍박을 받으신 적이 있습니까?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크리스천이기에 애매한 고통을 받아본 적 있습니까? 물론 우리 크리스천들이 세상에서 겪는 고난은 죄로 인해 벌을 받는 고통과는 달라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과는 다르게 경건하게 살려는 우리 크리스천의 독특한 정체성으로 인해 핍박받아야 떳떳한 고통입니다.

사도 베드로도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서 아름답다"(벧전 2:20)고 하면서 그리스도인이 당하는 고난의 특징을 강조합니다.

또한 히브리서 저자도 우리가 일터와 세상에서 당하는 고통의 의미에 대해 히브리서 12장 7-8절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하나님의 친아들로서 세상에서 살면서 당하는 당연한 징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사도 바울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면 핍박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저 남들이 하는 대로 하면 비난받을 일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크리스천이기에 우리는 할 수 없는 것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것을 거부하고 고집 부리면 당연히 미움 받고 왕따도 당합니다. 물론 그렇게 크리스천으로 정체성을 드러낼 때에도 지혜가 필요하긴 합니다.

어쨌든 우리가 삶의 현장에서 크리스천이기에 당하는 고난에는 반드시 의미가 있습니다. 그 의미를 잘 깨달으면서 주님의 고난을 본받아 침묵 정진하는 삶을 산다면 고난과 죽음 후의 영광을 체험하는 기쁨을 누릴 것입니다.
(『직장인 큐티』)

* 예배 자료

+ 예배에의 부름

하나님,
내 머리와 나의 지혜 속에 함께하소서.

하나님,
내 눈과 나의 시야 속에 함께하소서.

하나님,
내 입과 나의 말 속에 함께하소서.

하나님,
내 마음과 나의 생각 속에 함께하소서.

하나님,
내가 죽어 세상을 떠날 때에도 함께하소서.
(사룸의 작은 기도문)

+ 백 배의 고통을 더 주소서

주 하나님,
이 고통을 주신 당신께 감사하나이다.
내 주여,
당신의 뜻이라면
백 배의 고통을 더 주소서.
당신의 거룩하신 뜻이 이루어짐이
나에게는 넘치는 위안이 되오니,
당신이 주시는 고통을
내가 진심으로 받아들이겠나이다.
(성 프란체스코·로마 가톨릭 聖人, 1182-1226)

+ 고난

주여,
고난의 십자가에
감사의 사다리를 놓아
주의 발에 입맞춤하게 하소서.
(어느 인도인)

+ 고난을 딛고 승리할 능력을 얻기 위한 기도

하나님 !
저는 놀랄 만한 일이나
영웅적인 행동을 바라지 않습니다.
단지 고난을
이겨내기를 바랄 뿐입니다.

저를 위해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들의 도움도 아무런 소용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짜증을 내지 않고
원망하지 않고
눈물과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고
어려움을 견딜 수 있는
훌륭한 믿음의 용사가 되게 하소서.

저를 도우셔서
한계에 이르거나
그것에 부딪혀 좌절하지 않게 하소서.

예수님 !
이 모든 고난을 당신은 아시나이다.
겟세마네의 정신적인 고통을 당신은 아시나이다.
태형과 가시 면류관과 십자가형이 주는
육체적 고통을 당신은 아시나이다.
당신이 그 모든 것을 이겨내신 것을
제가 기뻐한다고 해도,
그 모든 것을 겪으신 당신이시기에
제 마음을 주관하시는 주님
당신께선 결코 화내지 않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모든 것은 지나가오니
그 때까지 제가 용기를 가지게 하소서.
더 이상 고난과 역경이 없을 때,
곧 오리라는
당신의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믿고 기다립니다.
(작자 미상)

+ 헌신에 대한 묵상기도

아버지!
이 몸을 당신께 바치오니, 좋으실 대로 하십시오.

저를 어떻게 하시든 감사드릴 뿐,
저는 무엇이나 준비되어 있고
무엇이나 받아들이겠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저와 모든 피조물에 이루어진다면,
이밖에 다른 것은 아무 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내 영혼을 당신의 손에 도로 드립니다.

당신을 사랑하기에 이 마음의 사랑을 다해
하느님께 영혼을 바치옵니다.

당신은 나의 아버지이기에 끝없이 믿으며
남김없이 이 몸을 드리고 당신 손에 맡기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저의 사랑입니다.
(샤를르 드 푸코, '아버지! 이 몸을 당신께 바치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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