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 넝쿨


아파트단지 울타리를 따라 이어지는 산책길에서 만난 아카시아향이 진했다.그 달콤한 내음에 붙잡혀 취할 적에 장미꽃이 나의 눈길을 끌었다.땅에 심겨진 장미의 넝쿨은 아파트 베란다와 창을 타고 3층까지 뻗어오르고 있었다.방금 살충제를 뿌리며 지나간 분무기의 소음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붉은 꽃들을 피운 덩굴은 크고 작은 꽃봉오리들을 자랑스럽게 떠받들며 고층아파트 꼭대기까지라도 오를 기세였다. 그런데 그때 맥 놓고 넝쿨 끝을 쳐다보고 있는 나를 놀라게하는 소리가 울렸다. H의 전화였다.그녀는 파킨슨병 치료에대한 이야기를 꺼냈다.시간이 갈수록 사지가 경직되는 그 병으로 아내를 잃은 나는 종종 그녀에게 말벗이 되곤한다.

"내 인생에서 최고 업적을 꼽으라면 이혼한 거예요."

몇 년 전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나를 당활스럽게 했던 말이다. '파킨슨ㅇㅇㅇ'라는 인터넷동우회를 통해 만난 그녀는 솔직하고 당당했다.난치병환자를 가족으로 둔 사람 같지 않았다.

그녀는 서울서 자랐다.여상을 졸업하고 취업했다가 어릴적부터 품어온 꿈을 이루기 위해 대학, 특수교육학과에 진학했다.지방대학이라서 그녀는 자취를 했다.그런데 대학 동아리에서 만난 선배 남학생이 그녀를 좋아했다.군복무를 마치고 복학한 그는 어느날 밤 동아리 모임이 끝난 뒤 그녀를 모텔로 강제로 끌고갔다.지난 80년대,순결의식의 지배를 받았던 그녀는 어쩔 수 없이 그와 결혼했다.하지만 동시에 언젠가는 이혼을 하리라 굳게 마음 먹었었다고 했다.

그녀가 보여준 두 딸의 사진 속에서 아이들의 아빠 얼굴을 본 적이 있다.미남 탤런트처럼 잘 생긴 얼굴이었다.돈도 잘 버는 사업가였다.그러나 그녀는 12년 결혼생활 동안 마음을 열고 남편과 동침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고 했다.그녀는 회유와 협박으로 매달리는 남편을 버렸다. 버린 것은 남편만이 아니다.시댁에서 강요한 기독신앙도 버렸다.3대째 이어왔다는 그 신앙의 실상은 우상숭배였기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의 탐욕적 소원성취를 위해 신을 이용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경건으로 포장된 위선과 허위의식에 얼마나 질식되었으면 이혼 뒤에야 비로소 숨 쉬고 사는 거 같았다고 말할까. 협의이혼하면서 아이들의 양육권은 그녀가 가졌지만 전남편으로부터 양육비를 한푼도 받아본 적이 없단다.

특수교사인 그녀는 아이들을 키우며 살다 재혼했다.나이 차이가 좀 나는 새 남편은 장성한 세 자녀가 있는 파킨슨병환자였다.사별한 교사이고. 병 진단을 받은 사실을 알았지만 결혼에 더 적극적인 쪽은 그녀였다. 병이 악화된 남편은 이제 거동이 어렵다.


그녀의 넝쿨은 어디로 뻗어가는 건가?

 장미 넝쿨을 다시 쳐다보며 걸음을 재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