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닥터로 변신한 방랑선교사

 법과 관습

사회규범과 질서가 확립된 선진화된 국가에서 메디컬 닥터가 되려면 반드시 그 정부가 인정하는 의사면허를 취득하여야만 의사가 될 수 있다. 그리고 면허를 취득한 자만이 의료행위를 할 수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아직 현대문명의 물결에 합류하지 않은 미개발지역 원주민 부족사회에서는 주술사나 특별한 치유능력을 가진 사람이 의사의 역할을 감당하는 경우가 많다. 그들의 문화 속에서는 면허증이라는 형식적 증서는 중요하지 않다. 실제로 병을 고치는 게 중요할 뿐이다. 의사면허를 갖고 있어도 약이나 수술도구가 없어 병을 치료하지 못하면 치료사로 인정받지 못한다. 그러나 전문 의학을 공부하지 못하였을지라도, 주술이나 민간요법 등으로 병을 고치는 신통한 능력을 발휘하는 자는 치유사로서의 권위와 위엄을 갖게 된다.  

한 사회의 사회규범은 그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에 의하여 만들어지고 그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구속력을 갖는다. 마찬가지로 원주민 사회에서도 조상 때부터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생활관습이 국가에서 제정한 법률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진다. 약 68억(2009년 1월, 미국통계국 예측)의 지구촌 인구 가운데, 경제개발 수준별 지역별 인구분포를 보면 2000년 선진국에는 11억 9천만 명이 사는 반면 개도국에는 48억 7천만 명이 거주하고 있어, 세계인구 5명 중 4명이 개도국에서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개도국의 30%정도가 아직 도시문명의 영향을 받지 않고, 산속이나 어촌에 모여 자기 부족들만의 고유한 전통문화를 유지하며 살고 있다. 그들은 국가적 사회통제시스템이나 보건의료 서비스를 받지 않고 스스로 사회와 격리되어 그들만의 공동체를 이루며 그들만의 삶의 방식대로 살아간다. 예를 든다면 가임여성의 경우, 나이가 어리거나 많건 산아제한을 위한 국가적 통제나 개인의 노력 없이 생기는 대로 낳아 기른다. 그런 연유로 15세 정도의 어린나이에도 자녀를 출산한 유모들이 많은가 하면, 여자 나이 30세 정도 되면 보통 7-8명 정도의 자녀를 갖게 된다. 국가가 그들을 통제할만한 자원이나 인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대로 방치할 수 없는 경우도 있고 아예 관심을 갖지 않는 경우도 많다. 하여 도시인구의 숫자는 급속도로 줄어드는 반면에 산속이나 어촌의 부족민들 숫자는 계속 늘어가는 추세다.

20여 가구의 작은 마을에 아이들이 바글바글하다.

선진국을 비롯한 각 법치주의 국가에서 만들어진 국내법이 온 인류사회에 동일하게 적용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받은 의사면허증을 온 세상에서 인정해 줄 것으로 생각하는 것도 잘못된 생각이다. 한국의사 면허증으로는 우리의 우방국인 미국에서도 사용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우리보다 못한 필리핀이나 미얀마 같은 후진국에서조차도 사용할 수 없다. 한국의사가 다른 나라, 예를 들어 필리핀이나 미얀마에 갔을 경우 그 나라로부터 허락받지 않고 의료행위를 할 경우엔 곧 그 나라 의료법에 저촉 받아 불법의료 행위자로서의 처벌을 받게 된다. 의료자원봉사활동도 마찬가지로 허락받지 않으면 불법이다. 매사에 돈을 요구하는 가난한 후진국의 관료들은 있어 보이는 외국인 의료자원봉사자들에게 더 엄한 규정을 제시하며 사리사욕을 채우려한다. 

그러나 비록 의사면허증이 없을지라도 그 나라 보건당국에서 의료행위를 할 수 있다는 허락을 받으면 누구나 적법한 의료행위를 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내가 아는 분은 한국 사설학원에서 받은 침술면허로 우리보다 선진국인 호주에서 침술원을 개업한 이도 있고, 필리핀에는 더 많은 분들이 오래전부터 개업하여 환자들을 시술하고 있다.  

후진국을 자주 다니다보니 그들의 사회 구조는 꼭 법대로만 돌아가는 게 아니고, 권력이나 재력 있는 자들의 의지대로 이루어지는 경우를 흔히 보게 된다. 그리고 이들 나라에서는 법보다 앞서는 것이 권력과 돈과 인간관계임도 알게 되었다. 그 세 가지가 만족되면 안 되는 일도 되게 만든다. 그래서 그런 곳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들은 “이 나라는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는 나라이다”고 말하는 것을 흔히 듣게 된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국가발전을 저해하는 매우 잘못된 사회의식이다. 그러나 고쳐야 할 잘못된 관습이지만 쉽게 고칠 수 없는 게 후진국의 현실이다. 그들은 그렇게 살기 때문에 계속 악순환을 거듭하며 후진국신세를 면하기 어렵게 된다.

정의의 실종

강직하고 열정적인 목사님이 미국에서의 목회를 12년이나 일찍 은퇴하시고 남은인생 가난한 나라에서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치료하며 선교하기 위하여 필리핀 민도로 섬 산속 부족마을에 선교하러 오셨다는 이야기를 앞서 하였다. 얼마 전에 그분이 병원건물을 완공하였다. 사재를 모두 털어 수천 평의 대지를 구입하고 지은 건물을 모두 필리핀정부에 기부채납(contributed acceptance)하기로 하였다. 뿐만 아니라 미국에서 자원봉사 의료진들을 모셔오고, 약품도 들여와 무상으로 치료해 주려고 행정당국에 절차를 밟는 중이다. 애초에 이러한 내용을 시 당국에 모두 알리고 건축을 시작하였다. 건축을 하는 도중 몇 번이나 시당국에서 호출이 왔다. 잘 하는 일이라고 칭찬하고 격려해 줄줄 알고 찾아가보니 감사하게 생각하기는커녕 매번 갈 때마다 까다롭게 굴면서 슬그머니 뒷돈을 요구하였다. 민주주의가 확립된 미국사회에서 평생 정직하게 목회하신 그 목사님의 양심으로는 그런 일을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다. 흥분된 어조로 공무원들을 야단치며 “난 가난하고 병든 사람을 도와주러 왔지 당신네들에게 뇌물 주러 온 사람이 아니다”며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그 후 몇달이 지나서 그 목사님이 그곳에서 병원 허가 받기가 매우 어렵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병원건물을 잘 지어놓고 아무 환자도 돌볼 수 없게 되었다니 안타까운 일이다. 후진국이라고 모든 곳이 이렇지는 않겠지만 이런 모습이 후진국 현실의 한 단면이다. 불의한 무리들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정의와 사랑은 설 자리가 없다. 이국의 산속 오지마을에서 하늘을 향하여 목 놓아 소리치며 잘못된 법이라고 외친들 누구하나 들어줄 사람이 없다.

선교사 부부가 땀을 흘리며 환자들을 열심히 돌보고 있다.

 그분의 간증

 일 년에 한번 한국을 다녀가시는 그분이 금년에도 비자문제와 총회에 참석할 겸 오셨다가 나를 방문하셨다. 지난겨울 필리핀 선교 가서 있었던 이야기를 하며 이사람 저사람 안부를 묻는 도중 그분은 시종일관 싱글벙글하며 그동안 일어났던 일을 간증 하신다.

요즈음 여기저기에서 와 달라는 환자들이 많아서 바쁘다고. 하여 한곳에만 정주하며 봉사하지 않고 더 많은 사람을 돌보기 위하여, 한 교회에서 한 달씩만 봉사하고 교회를 옮겨 봉사한다고. 환자를 돌보다보니 암환자를 비롯하여 수많은 환자를 접하게 되었다고. 치료받은 분들 모두 호전반응을 체험하고 좋아한다고. 그 중에 50대 초반의 한 여인은 어지럼증이 심하여 여러 해 전부터 고생이 심하였었다고. 가끔 힘없이 정신을 잃고 땅바닥에 쓰러지면 한두 시간씩 의식을 잃고 잃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그러던 차에 어느 분의 소개로 찾아와 그분에게 치료를 두 번 받고 나서부터는 그런 증세가 감쪽같이 사라졌다고. 고등학교 선생인 자기 동생도 그런 증세가 있어 데리고 와 치료를 받고 그 증세가 사라졌다고. 그 후 그들 두 자매는 너무 좋아하며 가는 곳마다 침뜸을 전하는 전도사가 되었다고.

그분의 간증을 옆에서 듣고 있던 먼젓번 필리핀 함께 가셨던 권사가 “그건 순전히 하나님의 능력입니다”며 코멘트를 아끼지 않는다. 그 말은 아직 그분의 의술로 그만한 환자를 고칠만한 능력을 갖추지 못하였다는 뜻을 암시한다. 바른 지적이라 생각한다. 권사의 코멘트는 그분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고 물론 나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하나님이 권사의 입을 통하여 나에게 말씀하시는 말씀으로 생각하고 겸손하게 받아드린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자기노력과 능력으로 치유사역을 이루려 한다면 이는 자기 의(義)에 빠지게 된다. 욥이 아무런 흠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죽음의 직전까지 이르도록 자기 의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리라 생각한 것은 잘못이었다. 그러나 욥이 철저히 부서지고 진솔하게 회개하고 자기 의를 버리고 순전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갔을 때, 새롭게 거듭나고 새 생명을 얻게 되는 복을 누리게 된다. 선행을 하는 자들은 자기 의를 이루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해야 할 것이다.

의사가 인체의 생리현상과 병의 원인에 대하여 그리고 질병의 근본적인 치유를 위해 알면 얼마나 알겠는가. 안다면 암환자나 에이즈환자들을 왜 고치지 못하고 죽음의 길을 가게 내버려 두는가. 하물며 목회자가 의술을 알면 얼마나 알겠는가. 목회자의 치유사역은 세상의원들과 같은 의학적인 치유사역이 아니다. 심리치료나 기도를 통한 영적인 치유방법이다. 치유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환자로 하여금 마음을 비우고 자기 의로부터 떠나 하나님의 선을 바라보도록 돕는 역할을 할 뿐이다. 치유의 역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고 치유의 효과는 환자의 믿음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일이다.

한번은 로하스의 시장님도 소문을 듣고 다녀가셨는데, 이분도 전보다 훨씬 몸이 좋아졌다며 시청 청사 내에 빈 방이 있으니 거기에서도 봉사를 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청을 하였다고. 그리하여 그 분은 말이 난 김에 아예 공개적으로 의료봉사를 할 수 있도록 퍼미션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부탁하였더니 시장님이 그렇게 해 주겠다고 쾌히 승낙하였다고!

필리핀뿐만 아니라 후진국에서 법은 하나의 형식일 뿐이든가 아니면 약자를 다스리기 위하여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공직자의 정신이 썩은 사회에서는 돈이나 권력이 없으면 죄인 취급받기 쉽고, 돈과 권력이 있으면 의인의 반열에 쉽게 들어서게 된다. 어떤 민원이든지 행정담당관의 의지에 의하여 안 되는 것도 되게 할 수 있고, 되는 것도 안 되게 할 수 있다. 그야말로 그들의 법은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耳懸鈴鼻懸鈴)’다.

이런 분위기의 사회임에도 불구하고 요즈음 그분을 찾아오는 환자들은 그 분을 ‘닥터’라고 부른다고. 허면 그분은 “닥터가 아니고 선교사”라고 시정해 주면, 자기 병을 고쳐 주었으니 “당신은 분명히 닥터입니다!”라고 고집한다고. 하기야 목회자는 상한심령을 다루는 영적 치유사의 한 사람으로서 그렇게 부르는 호칭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 호칭에 우쭐하지 말아야 할 것은, 권사의 지적처럼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에 놀라운 치유의 역사가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미국에서 오신 목사님이 수많은 돈과 노력을 들여 힘들게 병원 건물을 세우고 그리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위하여 무료복지병원을 운영하려는 데도 허락을 받지 못해 개원을 하지 못하는 처지가 된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자기네 민족을 위하여 좋은 일을 하려는데 뇌물을 요구하는 행정당국의 직원들이 이해가 안된다. 그러나 진정 우리가 자신의 의를 나타내려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일하다 핍박을 받게 되면, 반드시 정의는 승리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의 손길이 함께 하시리라 믿는다.  

이제 그분은 선교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더 이상 논농사 망고농사에 미련을 둘 필요가 없게 되었다. 스스로 여기저기서 찾아오고 부르는 환자들만 만나도 바쁘게 되었다. 새로운 패러다임의 선교전략은 그분으로 하여금 새로운 꿈을 갖고 남은 인생을 행복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목회하게 만들었다. 그분의 치유사역이 온전히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아파서 고통받는 분들에게 큰 위로가 되길 기대한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목회적 과제는 정의와 가난과 질병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이 우주적 거대한 과업을 어찌 한 인간의 힘으로 감당할 수 있으랴! 오직 우리는 작은 틈새만이라도 메워 가고자 할 뿐이다.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부여하신 과업을 이루기 위하여, 우리 앞에 놓여진 작은 틈새만이라도 메우려는 신앙운동이 각 교회와 성도들에게서 일어난다면, 이 지구촌은 점차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어 가게 될 것이다.

2011년 5월 20일

자료제공 : 아시아미션(http://www.amccms.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