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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탐방] 역사현장에 깃든 삶의 흔적들로 취해보다.태백산 사고지를 찾아서...하늘과 땅, 사람이 만나는 골짜기마다에는 옛 향기로 가득했다.
류기석  |  yoogiseo@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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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6년 02월 01일 (수) 00:00:00 [조회수 : 3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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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린 태백산 사고지를 가다.

   
▲ 사랑방 정담으로 함께했던 시간들...
20일 ~ 21일, 역사와 자연, 전통과 문화의 고장 봉화군 춘양면에서 열렸던 제1회 농촌과 농업논단 3부 순서는 서로간의 긴밀한 사랑방 정담을 나누기 위하여 홍가네 민박집에서 별도로 진행됐다.

주민들이 십시일반 준비한 토종 옥수수 막걸리와 애지중지 보관해온 송이버섯, 앙증맞은 사과 등을 나누며, 시종일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농촌과 농업, 농민들의 어려움과 고충 등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전해 들었다.

늦은 밤 춘양의 맑고 깨끗한 하늘에는 초롱초롱한 별들과 달콤한 공기, 좋은 도시와 농촌의 벗들이 있어 더욱 정감 넘치는 이야기 시간이 되어 다음날 새벽까지 이어졌다. 함께했던 일행 중 두 분이 당일 사정이 생겨 춘양역에서 첫차이자 마지막 태백선 비둘기열차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 여럿이 태백산사고지 터를 생태기행하다.

다음날 간단하게 아침식사를 한 후 ‘정감록’에서 기록된 바, 전란을 피할 수 있다는 십승지 중 하나인 춘양면 석현리 각화산 중턱에 위치한 태백산 사고지 답사 길에 올랐다. 태백산 사고지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해 왔던 전국의 5대 사고지 중 한곳으로 선조 39년(1606)에 짓고 1913년까지 실록을 보관하였던 곳이다.

조선후기 5대 사고지로는 춘추관, 정족산, 오대산, 태백산, 묘향산이 있으며,  조선왕조실록의 정본으로서 가장 완벽하게 보관되었던 곳이 태백산사고지이다. 이곳에서 보관되었던 실록은 일제시대 조선총독부에 의해 경성제국대학으로 옮겨졌다가 지금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서 보관하고 있다. 건물은 해방 전·후 불타 없어지고 산사태 등으로 매몰되었던 것을 1988년 발굴하였다한다.

춘양에서 북쪽으로 8km 떨어진 석현리로 들어서니, 노폭이 비좁은 구불구불한 길로 이어진다. 과거 태백산사고를 짓고 관리하는 분들이 살았던 마을로 이곳 마을은 모든 세금을 면해 주었다하여 공세동이라 한다.

공세동 산꼭대기에 다다르니 아담한 암자가 나와 이곳에 차를 세우고는 계곡을 따라 산비탈을 줄지어 올라갔다. 춘양면 구룡산악회의 인솔하에 9명이 산을 오르는데 태백산사고지를 만만하게 여겨 대부분 일반복장에 구두를 신고 산행에 나서 볼만했다.

태백산맥 줄기의 각화산(1176m) 아래에 양지바른 곳에 위치한 태백산사고지는 여럿이 초보로 산을 오르는 이들에게는 힘든 코스였다. 초반의 가빠른 산길을 지나 서암에 이르니 탁트인 시야너머로 고은 산줄기들이 겹겹으로 줄서기하고 있다. 비스듬히 산등성이를 넘자 반대편이 각화사란다.

여기서부터 태백산사고지까지는 400보란 표지가 앙증맞게 서있다. 반송들이 숲을 이루는 산허리를 거쳐, 낙엽 쌓인 미끄러운 산골짝도 넘어, 각아 지른 듯한 협소한 골짜기를 넘고 넘어서야 겨우겨우 도착한 곳이 옛적부터 하늘과 땅, 사람들이 만나 역사를 기록하고 보관했던 사고지 현장이다.

이곳은 삼재불입지로 사람들의 손길이 쉽사리 닿지 않는 오지 양택명당에 과학적인 방법을 동원해 실록을 보관해온 장소로 선조들의 지혜를 단번에 느낄 수 있었다. 남향으로 기다랗게 펼쳐진 터에는 어설프게 복원한 석축들과 과거 실록을 떠받치고 있었던 몇몇의 주춧돌만이 쓸쓸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건물배치는 각화산 밑 능선에 둘러싸인 경사진 지형에 남쪽으로 축대를 쌓아 대지를 마련하여 실록각과 선원각을 평면타원형의 담장 안에 동서로 배치하였으며, 이 두 건물은 팔각지붕을 상층에 둔 중층건물로서 서책을 보관하던 곳이었고, 담장 밖으로 포세각과 근천관이 있었는데 당시 사고관리인들이 거주하든 곳이며, 따로 또 한 채의 건물이 있었는데 기록은 없다.

가급적 오랫동안 머물면서 1년에 한번씩 실록들을 양지바른 곳에서 일일이 말렸다는 포세각을 상기하면서 친자연적인 방법으로 역사적인 소중한 기록물들을 영속적으로 보관과 보존했던 우수한 손길을 만나는 듯 했다.

과거 우리선조들은 서양보다는 기록과 출판인쇄 등을 할줄 모르는 미개한 민족으로 폄하하여 알아왔는데, 팔만대장경을 보관했던 해인사나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사고지를 보니 이제까지의 고정관념이 사라졌다.

민족의 정기를 세우려 수많은 기록물들을 일일이 종이와 목재, 금속 등에 남기고, 분실의 우려까지도 생각하여 여러 곳으로 나누어 풍수적으로 우수한 입지에 과학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기록을 남긴 조상들 앞에 숙연한 마음을 보낸다.

지금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린 태백산사고지이지만 따사로운 햇살에 비친 돌 하나 기왓장 하나 속에는 옛 선조들의 향취로 가득했다.

조선후기 조선왕조실록의 역사는 춘추관 실록은 분실되었고, 강화도 정족산 실록은 1910년 일제가 당시 경성제국대학으로 이관했다가 현재 서울대학교 도서관 규장각에서 보관하고 있으나 상태가 좋지 않고, 평창 오대산사고지 실록은 일본의 동경제국대학에 옮겨졌으나 관동대지진 때 소실되었다. 인조 11년(1633)에 마련된 묘향산 본은 무주 적상산으로 옮겨져 보관하였으나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북한이 가져갔다. 태백산사고는 조선 선조38년 경상감사 유영순의 장계에 의하여 입지가 결정(필택 절험지, 인적 불치처, 삼재 불입지)되어, 이듬해인 선조 39년(1606년)에 건립 5월 길일에 봉안하여 1913년까지 약300년간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해 왔다.

이곳에 보관되어 오던 실록은 848책으로 1910년 일본에 국권을 강탈당한 후 조선총독부에 이장되었다가 1930년 경성제국대학으로 옮겨져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보관중이다. 이 사고지 건물은 실록 이관 후 약 30년간 방치상태로 있다가 해방 전후 누군가의 방화로 소실되었다한다.

이후 산사태로 건물이 매몰되어 원형을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는데, 1988년 8월 건물의 유구를 발굴하였고, 1973년 국보 제151호로 지정, 1997년 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에 훈민정음(국보 70호)과 더불어 선정되었다. 복원계획을 수립하여 복원을 추진중이나, 산 소유주인 각화사 종단의 반대로 애로가 있다고 한다.

하늘과 땅, 사람이 만나는 골짜기마다에는 옛 향기로 가득했다.

이곳에서 1.1km 떨어진 산 아래쪽에는 신라 제30대 문무왕16년(676년)에 원효대사가 창건한 조계종 전통사찰인 각화사가 있다. 조선22대 정조 원년(1777년)에는 국내 3대 사찰의 하나로 손꼽혔으며, 800여명의 승려가 수도하였다고 한다.

산을 오르내리면서 볼 수 있는 각종 쓰레기와 산악회원들이 붙이고 간 이정표의 무분별함을 보고서 자연에 대한 배려를 생각해 보았다. 첫째, 산을 오르내릴 때 자신의 배낭에 쓰레기를 담아 올수 있는 봉투를 가져와 남의 쓰레기를 조용히 가져온다. 둘째, 등산단체에서 만든 각종 화학섬유 인쇄물 대신 한지로 만든 이정표를 만들어 쓴다.

청명한 햇살을 받으며 내려오는 발길들은 가벼웠다. 점심은 맛있는 묵밥으로 하기로 하고 애당리 초입 허름한 묵밥 집을 찾아 들어갔다. 그곳의 할머니께서 내오시는 묵밥은 말로 표현이 안될 정도로 시큼 새콤한 맛의 비밀을 간직한 정갈한 음식이다. 식사후 봉화의 주산인 문수산과 낙동강의 지류 운곡천을 따라 춘양시내에 있는 만산고택으로 향했다.

   
▲ 봉화 춘양 만산고택 칠류헌 앞에서...
경북에서도 산골 중 산골로 꼽히는 봉화, 봉화에서도 산골로 꼽히는 춘양에는 꼿꼿한 양반네들이 살았던 고택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유교 문화와 국운의 회복을 기원했던 살아있는 민속촌 만산고택이 있다.

고택은 정면 11칸의 긴 행랑채 가운데의 솟을대문이 청아하게 자리하고 있다. 바깥마당에 차를 대고 문을 열고 들어서니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사람들과 외국인들이 뒤엉켜 차례상을 차리고 있었다. 널따란 마당에 들어서니 만산고택의 4대손인 강백기(60)님이 나오시길래 함께한 일행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시제를 지내고 계시냐고 물으니 독일월트컵 G조 프랑스, 스위스, 대한민국(토고는 우리와 외교관계가 없어 이 행사에 참여하지 못했음)의 외교관들이 우리문화를 즐기는 행사를 진행 중이란다. 천천히 왼편에 2칸짜리 소박한 서실과 안채 등을 돌다가 오른편으로 따로 담을 두르고 문을 낸 별당 ‘칠류헌(七柳軒)’의 고풍스러움을 감상했다.

130여년 세월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는 고택은 춘양목으로 지은 화려한 건축미가 돗보이는 집이다. 과거 만산고택 안채와 칠류헌에서 묵었던 필자는 칠류헌을 떠받치고 있는 춘향목 적송(赤松)의 은은한 붉은 빛 아름드리 대들보를 다시금 눈여겨보고는 안주인께서 내주신 강정과 식혜로 목을 축였다.

   
▲ 깊은 산속에서 아내와 아들과 함께 재미있게 사시는 이경달님과 함께
몇몇 분들과 장소를 소천면 분천리 연애골로 옮겨 10년전 귀농하여 발효농사로 일가견이 있는 이경달(50)님을 만났다. 이곳에서 농촌과 농업이 희망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을 교환했고,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는 중도의 사회를 지향하자고 했다.

끝으로 이경달님은 돈으로 환산하지 못하는 가치를 발견하여 희망을 찾고, 무작정 깃발을 꽂고 앞으로가는 시대는 지나같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는 사고방식 속에 스며드는 전체주의를 견제하면서, 무조건 힘으로 밀어붙이는 시대,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시대는 지나갔음을 역설했다. 다름이 공존하는 사회 우리 안에 영성이 밝은 마음을 밝혀 농촌사회에 작은 공동체농업마을을 만들어 아름답게 살자고 제안했다.

이로서 1월 20일 ~ 21일에 있은 제1회 농촌과 농업논단은 자발적인 지역민들에 의해 도시인들이 초청되고 서로간의 신뢰의 정을 쌓은 후, 희망의 정신을 불사르며 아쉬운 막을 내렸다.

이 행사를 도우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먼저 감사를 드리고, 함께 참여하고 기도해주신 여러분들께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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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럿이 끌고 밀면서 오른 산행길

산행길에 만난 옹달샘에서 약수를 마셨다.

산행길에 만난 애벌레의 집

힘들면 쉬었다 가는 태백산 사고지 길

산넘고 물건너 낙엽을 제치며 오르는 사고지 길

태백산맥 각화산 겹겹의 산으로 둘러쳐진 사고지 전경

빈터에 축물을 두른 사고지 표정

황량한 빈터에 홀로 남아있는 사고의 추춧돌

산으로 둘러진 사고지 전경

태백산 사고지를 둘러보는 일행들

태백산사고지 터의 식수원인 샘물

각화산 밑 남쪽을 중심으로 바라다 본 양택의 명당

역사속에 깃든 흔적을 찾아서...

산밑으로 보이는 각화사 전경

화학섬유로 만든 반환경적인 등산안내 리본

칠류헌을 떠받치고 있는 춘향목 적송(赤松)의 은은한 붉은 빛 아름드리 대들보

발효농사를 짓는 이경달님의 서재풍경

풍경을 통해 본 연애골 풍경

해박한 혜안으로 미래를 통찰하시는 이경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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