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럼 > 김영동 칼럼
'창작과 비평'이라는 말을 선물로 드림
김영동  |  deom-pastor@hanmail.net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입력 : 2011년 05월 07일 (토) 11:54:17
최종편집 : 2011년 05월 07일 (토) 13:55:37 [조회수 : 2507]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벗님,

해방후에 장준하 선생님이 주도하던 [사상계]라는 월간지가 있었지요. 내가 어렸을때 아버지와 작은 외삼촌이 그 월간지를 열심히 읽으시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해방과 함께 동족상쟁의 살 터지는 전쟁을 겪어내고 사상으로 남북이 갈린 상처투성이인 반토막 난 가난한 나라에 살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 청산과 부정부패한 독재정권에 맞서 민족정기를 새롭게 해야할 혼란기에 좌절하지 않고 주눅들지 않고 월간지를 사서 읽었다? 그 월간지 이름이 [사상계]라면 그 책명은 참 그럴듯한 이정표요 우리민족이 나가야할 새 길을 향한 선동의 깃발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초등학교 시절이었는데도 집에 쌓여가는 사상계를 뒤적이던 기억이 납니다. 군사정권 박통이 [사상계]를 못견뎌서 폐간시키는 바람에 어버지는 한동안 [신동아]를 구독하셨지요.

내가 청년 시절인 70년대엔 백낙청 선생이 주도하던 [창작과 비평]이라는 문예 월간지가 발간되었습니다.
나는 [씨알의 소리]와 함께 [창작과 비평]을 읽으며 청년기를 보냈지요...
그 어간에 이어령 선생이 주간이 된 순수를 앞세운 [문학사상]?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신학교 다닐때 어느 교수님이 '지식인이라면 적어도 신문과 전문 월간지 3권은 기본으로 읽어야 한다'는 선의의 압력도 내겐 좋은 힘이 되었지요.



창작과 비평!
돌이켜보면 참 좋은 이정표요 바라볼수록 도움이 되는 카피요 가야할 길이 보이는 깃발이지 않습니까?


사춘기와 청년의 때는 일단 자기를 확립하고 정립하기 위해 비판과 비평의 시각이 우선일 겁니다... 영(靈)인 머리쓰기가 먼저라는 말이지요. 청장년의 시기가 되면 자신이 원하든 원치 않든 확립된 자기를 중심으로 창작활동이 우선되어야 하지요... 육(肉)인 실천하는 몸쓰기가 우선이라는 말입니다.

청장년에서 장년에 이르는 시기는 그렇게 머리쓰기인 생각과 실천하는 몸의 생활이 서로 손발을 맞춰 자기 몸에서 영육(靈肉)이 하나가 되어 가는 시절입니다. 일을 하는 것에서나, 생각을 하는 것에서나, 글을 쓰는 것에서나, 모든 일상의 삶에서 새로운 창의적인 생각과 생활이 우선되고 그것을 실현해 낼 훈련되고 땀 흘려져야할 길목으로 이어지지요... 일상생활의 창의적인 노력인 창작! 누구나 그렇게 하지는 않지만 그렇게 해야하는 것이 내가 겪고 살아온 사람다움의 과정이었습니다...



벗님,

먼저 입장과 태도가 -처한 상황과 시각과 관점이-이하 시각이라 함- 중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머리를 써서 생각하는 것도 비평의 시각과 창작(창조)의 시각이 다른 것..., 구별되나요? 시각이 다르니 생각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니 말이 다르겠지요? 그래서 말만 들어보아도 그 사람에 대해서 대충 알게 되는 이유랍니다...

그리고 나서 일(직장)하고, 먹고, 마시고, 생활(취향)하는 것도 비평의 시각과 창조(작)의 시각이 다른 것..., 구별되나요 시각이 달라 살아가는 모습이 다르니 그 모습과 건강상태만 보아도 그 사람이 어찌 살아왔는지에 대해서 대충 알게 되는 이유랍니다...

총체적으로 고스란히 자신의 의도가 들어나는 글쓰기 또한 비평의 시각과 창작의 시각이 다른 것..., 이건 쉽게 구별이 되겠지요? 글을 읽어보면 처한 상황에대한 자기 이해와 어떤 관점과 시각에서 현실인식을 하고 어떻게 대처하기를 원하는지 쉽게 알아 볼 수 있게 되는 이유이지요...

그러면 이제 어느 때부터 창조의 시각과 관점에서 현실을 인식하고 생각하고 말하고 글을 쓰며 살아 왔는지? *^-^* 스스로 한번 돌아보시지요! 청년의 때와 청장년의 때가 갈라지는 것은 바로 비평과 창작이 구별되고, 혹 힘들어도 자기다운 창작을 하며 사는 삶을 도모하면서 부터입니다... 장의적인 생각, 창작을 하듯 사는 생활, 조금이라도 의식하고 아쓰던 바로 그게 언제쯤이었는지 돌아보면 한평생 살아서 얻는 인생의 열매인 자기다움을 이루어 가는 일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벗님,

내가 벗님에게 글쓰기를 권유하는 것도 청장년이 되면 스스로 살아내야할 자기다움의 삶이 있기에 그 삶의 실현됨이 곧 글쓰기로도 나타날 수밖에 없어 하는 강권이지요... 자기가 처한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생활하면서 자기자신이 자기를 돌아보면서 성찰할 수 있는 마음자리를 펼쳐내는 일이 글쓰기라는 말입니다.

남의 말을 듣고 전하는 것, 아주 중요합니다!
그러나 남의 말을 듣고 소화해서 자기것으로 만들어 자기다움으로 표현하는 것은 더 더욱 중요합니다!
한 평생 사는 인생의 실현이 주안에서 자기다움의 완성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벗님,

이 모든 것이 단순하게 태도가(순종이) 그 기본입니다...
아, 그래요? 그럼 그렇게 하지요!

믿거나 말거나 비로소(처음으로) 자신의 태도가 새롭게 조율된 것입니다.(o점 사격을 하고 총의 가늠쇠의 크리크를 조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자신의 시각과 관점과 가치관을 새롭게 조율한 것이죠.
아, 그래요? 그럼 그렇게 하지요! *^-^*


아, 창작과 비평?

창작은 작가나 예술가나 남의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창작과 비평이 사람살이 생활의 두 기둥임을 알아듣고 그 두기둥을 자기 생각(머리)과 생활(손발)에 받아들이고 이 두 기둥을 잘 세우고, 닦고, 활용할 줄 알게 되어야 한다는 거지요.


창작과 비평!

내 젊은 날의 이정표와 깃발을 이 봄에 벗님에게 전합니다...

죽음의 겨울을 깨고 일어나는 4월의 푸른 생명의 몸부림(창조와 창작)을 엘리엇은 그의 시 [황무지]에서 잔인함이라고 노래했지요... '4월은 잔인한 달...'로 시작되는 시는 봄이 되어 생명의 용트림, 그 몸부림을 자신의 몸으로 이루고 가야할 것으로 생각해 보니... 새 봄을 맞은 생명의 길이지만 고난의 길이요 거센 세파에 당당히 깨쳐 일어섬이니... 시인은 역설로 차라리 지난 겨울의 무지와 침묵이 따뜻했다고 노래합니다. 우리도 나태와 무지의 그 겨울에 몸과 마음을 묻어 두겠습니까? 생명과 시인의 선동을 따라 일어서겠습니까?

연일 몸을 파고드는 차가운 봄바람에도 싱그러운 한낮이 맑습니다.

사랑합니다...



덤 목사

김영동의 다른기사 보기  
기사를 추천하시면 "금주의 좋은 기사" 랭킹에 반영됩니다   추천수 : 3105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의견나누기(1개)
 * 11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최대 22400byte)
 * [운영원칙] 욕설, 반말, 인신공격, 저주 등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지 않은 글과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올린 글은 통보 없이 삭제합니다.
  
박평일 (72.205.29.125)
2011-05-07 21:08:24
좋은 지적에 많은 공감을 합니다. 저도 선생님과 같은 시대를 살아온 사람이라서 더욱 친밀감을 느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현제 살아가고 있는 시대를 한마디로 인터넷시대라고 불러도 무리는 아닐 듯 싶습니다. 저희들이 자라온 시대에 비해서 훨씬 빠르고, 편리하고, 쉬운 세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편으로 지난시대의 소중한 생각과 가치들을 그동안 너무 많이 잃어버렸다는 생각이 들리도 합니다. 그중에서 가장 아쉬운 것이 "자기 이름"의 상실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합니다. 장준하선생님의 창작과 비평, 함석헌선생의 씨알의 소리는 그분들의 이름 때문에 많은 수난을 당했습니다. 발행인들이 감옥에도 가시기도 했고, 잡지가 폐간되기도 했습니다. 그분들은 자기 이름과 주장에 대해서 무한책임을 지셨습니다. 이름은 단순한 단어가 아닙니다. 그사람의 인격이고 얼굴입니다. 또 자신의 생각과 사상에 대한 책임이기도 합니다. 저는 한국의 인터넷시대를 "이름을 상실한 가명의 시대" 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한국의 언론이나, 이 당당뉴스를 통해서 보는 한국의 모습은 그렇습니다. 글도, 댓글도 대부분 가명을 씁니다. 그래서 자기 글이나 말에 대해서 전혀 책임을 지지않습니다. 신앙을 고백하고, 종교를 논하는 이런 귀한 왭싸이트에서도 시장잡배들도 감히 입에 담을 수 없는 말로 서로를 욕하고, 비판하며 헐뜯습니다. 모두 가명탓입니다. "예수님이 우주보다 귀하다고 하신 한사람의 인격을 저토록 짓밟을 수가 있을까 ? 이는 기독교를 말살하려는 사탄들의 목소리가 아닐까 ? " 하는 생각이들 가끔씩 들기도 합니다. 저는 한국의 정치와 경제의 고질적 부정부패는 진정한 금융실명제의 부재에서 부터 비롯 됬다고 믿고있는 사람입니다. 자기 돈과 돈의 출처를 밝힐 수 없는 것은 그돈이 깨끗하지 못한 부정한 돈이기 때문입니다. 글을 쓰면서 자기 이름을 떳떳히 밝히고, 자기의 말이나 글에 책임을 질 수 없는 것 또한 일종의 자기기만이고 부정행위입니다. 특히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려는 기독교인들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성경 어디를 찾아봐도 가명임물은 한사람도 없습니다. 한국기독교의 참변화는 자기 이름을 되찾는데서 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바로 이 당당뉴에서 부터... 좋은 글 감사합니다.
리플달기
2 2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우)120-012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2가 35 기사연빌딩 401호 ☎ 02-393-4002(팩스 겸용)   |  청소년보호책임자 : 심자득
제호 : 당당뉴스  |  등록번호 : 서울아00390  |  등록연월일 : 2007.7.2  |  발행인 겸 편집인 심자득(010-5246-1339)
Copyright © 2005 당당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dangdang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