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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소개>목회자를 위한 <설교자노트> 2011년 5·6월호
정연복  |  pkom545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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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1년 05월 03일 (화) 01:35:48
최종편집 : 2011년 05월 03일 (화) 14:35:12 [조회수 : 2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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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소개> 목회자를 위한 <설교자노트> 2011년 5·6월호  

                                                                                           정연복(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저는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으로 일하면서 1997년부터 격월로 나오는 <설교자노트>라는 책을 번역해 왔습니다.

지금까지 90권이 나온 <설교자노트>는 '교회력에 맞춘' 설교 본문에 대한 성서 주석, 그리고 그 본문에 따른 미국의 실력 있는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의 최신의 설교를 번역하고, 아울러 설교 내용에 적합한 기도문과 예화 자료를 풍부하게 제공하여 목회자들의 설교 준비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책입니다. 특히 <설교자노트>에 실린 설교들은 설교자들에게 성서에 충실하면서도 독창적인 설교 아이디어를 제공합니다.

그런데 이 <설교자노트>는 시중 서점에서는 팔지 않고 신청하시는 목회자들에게 직접 우송합니다. '영성적이며 공동체적이며 생태학적인 신앙 공동체를 위한 자료'인 <설교자노트>를 구입하기 원하는 분들은 한국기독교연구소(전화: 031-929-5731)로 연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설교자노트>는 격월로 나오며 두 달치 분량의 설교 자료를 담고 있는데, 2011년 5·6월호 중 5월 둘째 주 설교 자료를 참고로 첨부합니다.


설교 제목: "엠마오 도상" 이야기

* 성경 본문: 누가 24:13-35
* 성경 주석

누가복음은 예수와 제자들 사이의 부활 이후의 만남을 자세히 보도하는 일련의 설화로 끝난다. 각각의 경우에, 누가는 예수의 제자들 중 일부는 예수가 정말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났는지에 관한 상당한 의심을 계속 유지했다는 사실에 독자들의 주의를 환기시킨다(누가 24:11, 21-25, 37-38, 41참조). 이 일련의 불신앙의 중심에 오늘 본문인 "엠마오 도상 이야기"가 나온다. 그것은 낯익으면서도 설명할 수 없는 신비로 가득한 삽화이다.

오늘 본문은 일주일의 첫날 이른 새벽에 예수의 무덤에 갔던 여자들에 관한 누가의 보도에 바로 뒤이어 나온다. 누가에 따르면, 그들은 예수를 보지 못하고 그 대신 "눈부신 옷을 입은 두 남자"를 보았다(누가 24:4). 여자들은 신속히 다른 제자들에게로 가서 자신들이 예수의 무덤 밖에서 본 것을 말했다. 여자들의 보고를 들은 후, 베드로는 무덤으로 달려가서 무덤 안을 들여다보았고, 그런 다음 "일어난 일을 이상히 여기면서" 집으로 돌아갔다(누가 24:1-12 참조).

"마침 그날에 날에"(요한 24:13)라는 시간을 가리키는 평범한 구절을 사용하여 누가는 예수와 두 제자 사이의 비범한 만남으로 살짝 옮겨간다: "마침 그날에 그들 가운데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한 삼십 리 떨어져 있는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었다. 그들은 일어난 이 모든 일을 서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들이 이야기하며 토론하고 있는데, 예수께서 가까이 가서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누가 24:13-15 참조). 모든 가능성을, 즉 이 제자들은 예수를 개인적으로 알았고, 예수가 살아 있었을 때에 그와 함께 걸었고, 그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였으리라는 것을 감안할 때, "그들은 눈이 가려져서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였다"(16절)는 것은 놀랍다.

그들의 눈이 가려진 것은 어떤 신적 명령 때문인가?(16, 31절; 누가 2:50; 9:45; 18:34 참조). 혹은 그들 자신의 완고한 마음이나 불신앙 때문에 예수를 알아볼 수 없었나?(21, 25절). 아마 그것은 이 두 가지 요인과 어떤 관계가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눈먼 궁극적인 원인이 그 무엇이든지 간에, 한 가지는 확실해 보인다: 누가복음 저자의 특이한 논평은 우리에게 그 분명한 이유를 설명해 주지 못한다.

누가복음 저자는 이 문제를 가지고 머뭇거리지 않는다. 그 대신, 예수가 가까이 와서 그의 동료 여행자들에게 "당신들이 걸으면서 서로 주고받는 이 말들은 무슨 이야기입니까?"(17절)라고 물었다는 보도로 독자들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전환시킨다. 지체없이, 제자들 가운데 하나인 "글로바라는 사람"이 날카롭고 재치 있게 답변했다: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으면서, 이 며칠 동안에 거기에서 일어난 일을 당신 혼자만 모른단 말입니까?"(18절).

예수는 글로바의 솔직한 답변에 기분이 상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예수에게 특징적인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예를 들어, 요한 1:43-51의 나다나엘과의 대화 참조). 신약성경에서 글로바는 오직 여기에서만 언급되는데, 예수는 그를 책망하지 않고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19a절).

이 질문은 즉시 글로바와 그의 동료가 이제 그들과 함께 걷고 있는 "낯선 사람"에게 가르치려고 애쓰면서 의심을 품은 말들을 거침없이 퍼붓게 했다. 그들은 그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나사렛 예수에 관한 일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였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대제사장들과 지도자들이 그를 넘겨주어서 사형선고를 받게 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19b-20절). 그러나 그들의 대답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자신들의 허무하게 무너진 기대를 드러냈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분이라는 것을 알고서, 그분에게 소망을 걸고 있었던 것입니다"(21a절).

그들의 실망이 억제된 어조를 띠고 있기는 해도, 그들이 몹시 실망했다는 것은 아주 명백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여자들과 다른 제자들이 그날 새벽에 무덤에서 발견했던 것을 자세히 말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런 일이 있은 지 벌써 사흘이 되었다"(21b절)고 묘사했는데, 이것은 예수가 전에 제자들에게 가르쳤던 것을 넌지시 암시하는 발언이다(누가 9:22; 13:32; 18:33 참조). 두 제자는 또한 설명했다: "우리 가운데서 몇몇 여자가 우리를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돌아와서 하는 말이, 천사들의 환상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천사들이 예수가 살아 계신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22-23절; 누가 24:1-10 참조). 예수가 살아 계신다는 말을 듣자마자 제자들 중 일부가 "무덤으로 가서 보니, 그 여자들이 말한 대로였고, 그분은 보지 못하였습니다"(24절; 누가 24:12 참조).

예수의 뒤이은 말에 기초하여 볼 때, 이 두 제자는 이 시점에서 확고하고 순전한 믿음이 없었던 것이 틀림없다. 예수는 그들에게 말했다: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마음이 그렇게도 무디니 말입니다"(25절). 그러나 이야기는 아무런 구체적인 성경을 언급하지 않는다. 그 대신, 누가복음 저자는 예수가 모세와 예언자를 해석했다는 사실에 독자들의 주의를 환기시킬 뿐이다(26-27절).

그런데 예수의 이렇듯 자상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글로바와 그의 동료 여행자는 낯선 이의 참된 정체성에 관해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요약하면, 그들은 자신들과 함께 엠마오 도상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아직까지도 인식하지 못했다. 그래서 마을에 도착하였을 때, 그들은 더 멀리 가는 척하는 예수를 만류하면서 말했다: "저녁때가 되고 날이 이미 저물었으니, 우리 집에 묵으십시오"(28-29절). 예수는 그들의 설득을 받아들여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으려고 식탁에 앉았다. 이 식사는 지금까지 그들이 경험했던 것과 전혀 달랐다. 식사 도중에 예수가 "빵을 들어 축복하고 떼에서 그들에게 주었기" 때문이다(30절). 바로 이 순간, "그들의 눈이 열려서 예수를 알아보았다"(31a절).

누가의 이야기는 최후의 만찬에 대한 그의 앞서의 묘사와 공명한다.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는 "빵을 들어서 감사를 드리신 다음에, 떼에서 그들에게 주셨다"(누가 22:19a). 한순간에 예수는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31b절), 두 제자는 예수의 부활에 관해 이제 더 이상 아무런 의심도 품지 않았다. 그는 영으로 그들과 함께 머물러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들은 "길에서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성경을 풀이하여 주실 때에,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졌다"(32절)고 말했으며, 그리고 더욱 중요하게는 "그들이 곧바로 일어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기"(33a절)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들은 예수와의 이 신비한 만남의 소식을 남들과 공유하는 것을 다음날 아침까지 미루어둘 수 없었다. 그들은 바로 그날 밤 지체없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그들이 곧바로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보니, "열한 제자와 또 그들과 함께 있던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모두들 '주님께서 확실히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고 말하고 있었다"(33-34절). 그것에 덧붙여, "그 두 사람도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비로소 그를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하였다"(35절).  

제자들이 믿음이 없는 이유와는 상관없이, 주님, 즉 그들과 함께 은혜롭게 빵을 떼었고 예언자 이사야가 오래 전에 다음과 같이 선언했던 분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눈이 열렸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상한 마음을 싸매어 주고, 포로에게 자유를 선포하고, 갇힌 사람에게 석방을 선언하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이사야 61:1-2a; 누가 4:18-19절 참조).

* 설교 본문

복음서들에 따르면, 예수는 걷기를 무척 좋아했다. 가만히 앉아 있는 것에 익숙한 우리가 경탄할 만큼, 예수는 장거리를 걸어서 여행했다. 몇 가지 통계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 마태복음 이야기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예수는 이집트에서 나사렛으로 돌아오는 동안 부모와 400마일 가량 걸었을 것이다.

* 갈릴리의 모든 경건한 남성은 일년에 세 번 종교 축제를 위해 예루살렘으로 여행을 하곤 했는데, 이것은 나사렛으로부터 왕복 240마일에 이르는 장거리 여행을 의미한다. 예수가 5살부터 30살까지 매년 이 패턴을 따랐다면, 그는 예루살렘을 여행하는 데만도 18,000마일을 걸었을 것이다(3 X 240 X 25).

* 복음서의 보도들에 기초해서 볼 때, 예수는 3년에 걸친 공생애에 3,125마일을 걸었다. 그의 제자들도 그와 함께 그만큼의 거리를 걸었을 것이다.

* 이상의 사실을 종합하면, 대충 계산해도 예수는 그의 생애 동안 21,525마일의 거리를 걸었음을 의미한다. 이 장거리 여행에 필요했을 가죽신만 해도 그 숫자가 엄청났을 것이다!

평생 동안의 장거리 걸음은 새로운 얼굴들을 보고, 다양한 이야기를 듣고, 낯선 이들의 환대를 경험하고, 땅과 그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느낄 기회를 예수에게 주었을 것이다. 예수는 그의 긴 여정에 제자들을 동반했는데, 이것은 그들에게 예수 자신의 목회와 그 목회에서의 그들의 역할 속에서 하나님이 행하고 계신 것을 배울 최고의 실험실을 제공했다. 우리는 그것을 "이리저리 걷는 목회"(ministry by walking around)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엠마오 걸음.

이 모든 것은 오늘 본문에서 벌어지는 일의 전주곡이다. 누가복음에 따르면, 예루살렘에서 엠마오까지 7마일의 거리는 여행의 가장 의미심장한 부분들 중의 하나였다. 예수의 두 제자, 즉 "글로바"라는 사람과 무명의 또 다른 사람은 성금요일의 재앙과 부활절의 당혹스러움으로부터 걸어나오고 있다. 엠마오가 그들의 목적지인 이유를 누가복음 저자는 우리에게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한 은신처로 도망치고 있는 것인가? 그곳에 그들의 친척이 있는가? 그것은 방금 일어난 일을 숨기고 그 일에 관해 생각해 볼 장소일 뿐인가? 대부분의 다른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머물러 숨어 있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계속해서 걷고 있다.

예수는 길 위에서 그들과 합류하는 한 낯선 사람으로 그들에게 다가온다. 그는 잠시 함께 여행하는 동료로서 엠마오 도상의 두 사람의 대화에 슬며시 끼여든다. 그는 묻는다: "당신들이 걸으면서 서로 주고받는 이 말들은 무슨 이야기입니까?"(17절). 글로바는 이 낯선 동료 여행자가 지난 며칠 동안 동굴 속에서 살아온 것이나 아닌지 의아하게 여기면서 나사렛 예수에게 일어난 일, 즉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분"으로서의 그에 관한 그들의 희망과 그의 비극적인 십자가 처형과 빈 무덤의 당혹스러움을 이야기한다(18-24절 참조). 사실 그들은 지금까지 예수와 최소한 3,125마일을 걸었으며, 그 모든 시간 내내 그들은 자신들이 한 약속된 목적지를 향해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마음속에 아무런 실제적인 목적지도 없이 무턱대고 걷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미지의 곳으로 통하는 엠마오 도상에서 그들과 함께 걸으면서, 낯선 사람은 그들에게 지금까지 그들이 줄곧 걸어온 더 긴 여정에 관해 말하기 시작한다. 모세의 지도 아래 하나님의 백성의 출애굽 여정으로부터 예언자들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그 과정 속의 모든 표징들을 거론하면서, 예수는 그분의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 그리고 목적지인 동시에 새로운 시작인 그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이야기하면서 그들과 함께 걸었다.

두 제자는 이 낯선 사람에게 "날이 이미 저물었으니 우리 집에 묵으십시오"(29절)라고 초대한다. 그리고 식탁에 함께 앉아 있을 때, 그들은 줄곧 자신들과 동행했던 이 사람이 바로 부활한 예수라는 것을 갑작스럽게 인식한다. 한순간, 예수는 그들 앞에서 사라진다. 그러나 그들은 곧바로 일어나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그리고 한 새로운 미래 속으로 걷기 시작한다. 결국 엠마오는 그들의 결승선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을 따르는 여정 속의 또 다른 정거장일 뿐이었다.

우리는 예수와 함께 걸을 때에 가장 좋은 상태에 있다.

엠마오 도상 이야기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와 함께 계속해서 걸을 때에 가장 좋은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제자직은 우리가 그 안에서 즉각적인 결과들을 찾을 수 있는 여정, 우리가 날마다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과 장소들을 무시할 수 있는 여정, 혹은 자동차나 비행기를 타고 서둘러 가는 여정이 아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자신들의 삶이 예수를 따르고 그에게서 배우는 여행이라는 것, 그리고 아울러 길에서 그들과 합류하는 낯선 이들의 얼굴에서 예수를 발견하는 여정이라는 것을 인식한다. 온갖 위험과 잠재적인 유혹들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기꺼이 예수를 따른다. 그리고 그들은 아직 예수를 인식하지 못한 다른 사람들에게 환대를 제공한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예수 없이 홀로 그 여정을 걸어갈 수 없음을 또한 알고 있다. 예수는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세상 속으로 보냈다(누가 10:1-12). 그리고 그날 엠마오 도상을 함께 여행했던 것도 혼자가 아닌 두 사람이었다. 제자직은 장거리 여행이다. 이 믿음의 여정에서 우리는 늘 서로를 필요로 한다.

세례를 받을 때, 예수와 함께 하는 우리의 장거리 믿음의 여정이 시작된다. 우리는 또한 그 여정에서 줄곧 영양분이 필요한데, 성찬식의 빵은 그리스도의 은혜로운 희생을 통해 우리 모두에게 바로 그 영양분을 제공한다. 우리가 세상 어디에서 살고 어디를 향해 움직이고 있을지라도, 우리를 인도하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고 우리 곁에서 나란히 걷는 분은 바로 예수라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가능한 설교 주제들>
* 제자직의 긴 여정을 위한 빵으로서의 성찬식
* 신실한 제자직의 한 패러다임, 한 모범으로서의 엠마오 도상 이야기
* "무명의" 제자들은 왜 유명한 제자들만큼이나 중요한가?

* 예화

+ 5월이 오면  

무언가 속을 흐르는 게 있다.
가느다란 여울이 되어
흐르는 것.

이윽고 그것은 흐름을 멈추고 모인다.
이내 호수가 된다.
아담하고 정답고 부드러운 호수가 된다.
푸르름의 그늘이 진다.
잔무늬가 물살에 아롱거린다.

드디어 너, 아리따운
모습이 그 속에 비친다.
오월이 오면
호수가 되는 가슴.

그 속에 언제나 너는
한 송이 꽃이 되어 방긋 피어난다.
(김용호·시인)

+ 해인사

큰 절이나
작은 절이나
믿음은 하나

큰 집에 사나
작은 집에 사나
인간은 하나
(조병화·시인)

+ 노동하는 부처님

부처님은
왜 말이 없으신가요
말로는 다할 수 없는
사연 지녔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왜 잠들지 않으시나요
잠자기엔 너무 많은
일이 밀렸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겨울 날씨에도 뻘뻘 땀을 흘리시며
안개 자욱한
사바세계의 길을 걸으신다

부처님 부처님
동에서도 서에서도
부처님 섬기는 소리 자욱한데
부처님은
동그라니 깊디깊은 정적만 놓아두고

남으로 북으로
분주히 떠도신다
휴전선도 마음대로 왕래하신다

공해와 비바람에 찢긴
일하는 부처님의 옷깃에
새로 돋은
저녁별이 찬란하다.
(김규동·시인)

+ 냄비가 부처 같다  

펄펄 끓는 물을 보니
냄비가 부처 같다

펄펄 끓는 물을 안고
움직이지 않는 저 힘,

부처가 연꽃에 앉아
번뇌하는 기도 같다
(임영석·시조시인)

+ 당신은 좋은 부모입니까?

미국의 유명한 판사였던 포터 박사는
어느 날 자신이 존경하는 스승의 아들을 재판하게 되었습니다.
난감한 상황에 처하게 된 포터 박사는 피고인에게
아버지가 쓴 책을 읽어보았는지 물었습니다.
스승의 훌륭한 책을 읽어보았다면
이러한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스승의 아들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네, 저도 그 책을 알고 있지만,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아버지가 그 책을 쓰시는 동안 저는 항상 뒷전이었고,
제가 응석을 부리면 원고를 빨리 끝내야 한다며 귀찮아 하셨습니다."
자신의 삶에서 아무리 성공적인 업적을 남겼다 해도
자녀가 어둡고 그늘진 삶을 살아간다면
결코 가치 있는 성공이 될 수 없습니다.

좋은 부모가 되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것,
이 세상 어떤 일보다도 소중하고 값진 일입니다.
(박종혜·가정행복학교 대표)

+ 신앙과 해석

신앙은 영원하고 참된 것을 찾지만,
학자들은 그 해석을 찾는다.
우리들의 삶에는 해석이 필요치 않다.  
삶은 몸소 사는 일과 스스로 체험하는 일과
순간 순간 누려야 할 일들이다.
이래서 삶은 수수께끼가 아니라
신비다.
종교적인 이론은 그 어떤 종파의 것일지라도
생동하는 삶에서 벗어난 말일 뿐이다.
그 공허한 말의 덫에서 뛰쳐나와
스스로 당당하게 살 줄을 알아야 한다
(법정·스님)

+ 길 위의 학교

나는 여행이란
길 위의 학교라고 굳게 믿는다.
그 학교에서는 다른 과목들도 그렇지만
단순하게 사는 삶, 돈이 없어도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사는 삶에 대한 과목을 최고로 잘 가르친다.
한번 배우면 평생 쓸 수 있는 매우 유익한 수업이니
필히 수강하시길 바란다.
(한비야·오지 여행가, 1958-)

+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

자동차에 올라타지 말라. 치명적인 사고들 중의 20%는 자동차와 관련된다. 집에 머물지 말라. 모든 사고들 중의 17%가 집에서 일어난다. 거리나 포장도로 위를 걷지 말라. 모든 사고들 중의 14%가 보행자들에게 일어난다. 비행기, 철도, 혹은 배로 여행하지 말라. 모든 사고들 중의 16%가 이런 여행을 하는 도중에 일어난다. 모든 사망들 중의 오직 0.001%만이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도중에 발생하며, 그리고 이런 극소수의 사고들마저도 보통은 이전의 신체적 장애들과 관련된다. 그러므로 당신이 언제나 머무를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은 바로 교회다!
(마르 레슬리)

+ 제자직의 문제

오늘날 우리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그들의 신앙 혹은 제자직의 문제에 이르러서는 아무런 실마리도 갖고 있지 않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종종 있다. 마치 다음의 작은 이야기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깬 아내가 남편에서 말했다. "당신이 저에게 우리의 결혼 기념일을 위해 진주 목걸이를 선물하는 꿈을 방금 꾸었어요. 당신은 이게 무슨 의미라고 생각하세요?" 그러자 남편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오늘밤이면 알게 될 거요."

그날 저녁, 남편은 예쁘게 포장된 작은 선물 꾸러미 하나를 들고 퇴근하여 그것을 아내에게 주었다. 아내는 너무 기뻐 감격스런 표정을 지으며 선물 꾸러미를 풀었다.

그녀가 발견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포장지 안에는 『꿈의 의미』라는 제목의 책 한 권이 달랑 들어 있었다.

+ 주님과 함께라면

영국의 한 광고 회사가 큰 상품을 내걸고 전 국민을 대상으로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에서 런던까지 가장 빠른 시간에 갈 수 있는 방법을 묻는 퀴즈를 냈다.

워낙 상품이 컸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응모했다. 비행기가 가장 빠르다느니, 기차를 타고 오다가 어느 시점에서 버스로 갈아타는 게 가장 빠른 방법이라느니, 새벽에 지름길로 승용차를 운전하고 오면 가장 빠르다는 등 사람들은 여러 가지 방법을 제안했다. 실제로 시간을 재어보면서 자신의 아이디어가 가장 빠르게 가는 방법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데 결국 일등상을 탄 사람의 답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간다"는 것이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아무리 머나먼 길도 무척 가깝게 느껴진다. 이것이 사랑의 거리 계산법이다. 주님과 함께라면 아무리 멀고 험한 길이라도 우리는 즐거운 마음으로 갈 수 있다.
(최병남·대전중앙교회 목사)

+ 용기는 어디에서 오는가?  

초등학교 1학년 교사가 자기 반 학생들을 동그랗게 앉혔다. 그리고는 아이들이 커서 어른이 되면 무엇이 되고 싶은지 아이들에게 질문했다. 아이들이 차례차례 일어나서 자기 꿈을 이야기한다. "나는 엄마처럼 간호사가 되고 싶어요." "나는 아빠처럼 은행원이 되고 싶어요." "나는 선생님처럼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고 싶어요." ....

마지막 차례는 반에서 수줍음을 가장 많이 타는 소년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나서 두 눈을 반짝거리며 말했다. "나는 커서 어른이 되면 서커스단에서 사자를 길들이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나는 채찍과 의자를 갖고 무시무시한 사자들에게 용감하게 직면해서 그들이 내 명령에 순종하여 불고리를 훌쩍 뛰어넘는 멋진 묘기를 부리게 할 거예요."

평소에 소심하기만 했던 소년이 그리도 용감하게 자신의 꿈을 이야기하다니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급우들을 바라보며 그는 재빨리 그들을 안심시켰다. "물론 내 곁에는 항상 우리 엄마가 있을 거예요."
  
+ 모든 시간이 전도의 시간

성 프란시스에 관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어느 날 프란시스가 한 제자에게 말했다. "시내로 가서 설교를 합시다." 그래서 그 두 사람은 거리로 나가 거닐며 시장의 갖가지 모습에 대해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서로의 영적 체험에 관해서도 대화했다.

날이 저물어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프란시스의 제자가 깜짝 놀라 외쳤다. "어쩌죠? 사람들에게 설교하는 걸 깜빡 잊어버렸어요." 프란시스는 제자의 어깨에 손을 얹고 웃으면서 말했다. "형제여, 우리가 시내를 거닐던 모든 시간 동안 우리는 설교를 한 것이오. 사람들은 우리를 보았고, 우리의 대화를 엿들었을 거요. 그리고 우리의 얼굴 표정과 행동들을 보았을 거요. 그것이 바로 우리의 설교가 아니겠소."

그런 다음 프란시스는 덧붙여 말했다. "형제여, 이것을 기억해 두시오. 우리가 거닐면서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가르친 게 없다면, 우리는 설교의 참뜻을 잃어버리고 있는 거요."

* 예배 자료

+ 예배에의 부름

하나님,
내 머리와 나의 지혜 속에 함께하소서.
하나님,
내 눈과 나의 시야 속에 함께하소서.
하나님,
내 입과 나의 말 속에 함께하소서.
하나님,
내 마음과 나의 생각 속에 함께하소서.
하나님,
내가 죽어 세상을 떠날 때에도 함께하소서.
(사룸의 작은 기도문)

+ 어버이의 기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
저로 하여금 참된 부모가 되게 하소서
제 자녀들을 잘 이해할 수 있게
저를 인도하소서.

그들의 모든 이야기를 인내와
끈기 있게 들을 수 있는 마음의 귀를 열어주시고
그들의 질문에 자상하게 대답할 수 있게 하소서.
그들의 말 중에 가로막거나 반박하여
그들의 마음을 닫히게 하지 말게 하소서.

제 자녀들이 저를 존경하며
공손하게 대해 주길 바라듯이
그들에게 다정히 대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그들의 실수를 지나치게 탓하지 말게 하시고
비록 저를 불쾌하게 하여도,
그들에게 창피를 주거나 무안을 주어
그들의 마음에 상처를 받지 말게 하소서.

제 욕심을 앞세워 그들에게 무엇을 강요하거나,
권위를 내세워 그들을 벌하지 말게 하소서
저 때문에 제 아이들이 거짓말이나
도둑질이나 여러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시고
정직이 행복을 가져온다는 것을
저의 언행으로 보여줄 수 있도록
매 순간 저를 인도하여 주소서.

제 자녀들이 성숙하고 있는 어린아이들이라는 것을
결코 잊지 않게 하시어
어른다운 판단력을 그들에게서 기대하지 말게 하소서.
자신의 일을 그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기회를 빼앗지 말게 하시며
그들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
당신이 원하는 성숙에 이를 수 있도록 하소서.

그들의 정당한 요구를
모두 인정할 수 있는 관대함을 허락하시고
그들에게 해롭다고 여겨지는 요구를
거절할 용기를 주소서.
저로 하여금 올바르고 다정하고
지혜 있는 부모가 되게 하소서.

오 주여! 제가 제 자녀들에게
모든 것을 주고 받아들일 수 있는
맘과 삶을 허락하시고
자녀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으며,
제 자녀들이 저를 본받을 수 있는
모범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해주소서.
그리고 이 생활을 이웃에게 보여줌으로써
당신이 주신 사명인 복음전파의
가장 큰 기초가 되는 것임을
깨달을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아멘

+ 부모님을 위한 기도

사랑의 주님!
저희에게 세상에서 가장 귀한 부모님을 허락하시고
그 부모님을 통해 생명을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부모님의 해산의 아픔과 기르시는 수고의 희생을 먹고
오늘의 이 자리에 이르게 하심도 감사드립니다
어려서는 품에 안아 길러 주셨고
자라서는 혹시나 세상 길로 나갈까 봐
마음을 졸이시며 사랑으로 기다리셨던 부모님!
자식이 울 땐 통곡하며 기도하셨고
자식이 웃을 땐 기뻐 뛰며 찬송하셨던
평생을 자식 사랑으로 바쳤던
부모님을 주셨음을 감사드립니다
한평생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주셨기에
이제는 더 줄 것이 없어 가슴 아파하며 눈물지으시는
부모님을 주께서 축복하여 주소서
주님!
이제는 부모님의 믿음을 배우게 하시고
이제는 부모님의 사랑을 배우게 하시고
이제는 부모님의 뜻을 받들어 이 세상에서
주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주님의 사람이 되게 하소서
주님! 이제 부모님의 남은 생을 축복하셔서
영육의 강건함을 허락해 주시고
자식들로 인하여 눈물 흘리시는 일이 없도록
최선의 공경과 효도로
기쁨을 안겨 드리는 자녀가 되게 하소서  
(작자 미상)

+ 헌신에 대한 묵상기도

가장 낮은 곳을 택하여 우리는 간다
가장 더러운 것들을 싸안고 우리는 간다
너희는 우리를 천하다 하겠느냐
너희는 우리를 더럽다 하겠느냐
우리가 지나간 어느 기슭에 몰래 손을 씻는 사람들아
언제나 당신들보다 낮은 곳을 택하여 우리는 흐른다
(도종환·시인,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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