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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백, 400년 된 카나다 속의 프랑스캐나다 동부 퀘백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밤새 달려서 새벽에 도착했다.
김충권  |  ckkim9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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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1년 04월 22일 (금) 07:35:52
최종편집 : 2011년 04월 22일 (금) 20:30:16 [조회수 : 47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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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400년 된 카나다 속의 프랑스 퀘벡 



   버스에 화장실이 있었어?


  토론토에 전절역 종점은 픽업 Pick Up 장소였습니다. 사방에서 드나들 수 있게 되어 있고, 주변으로는 주차장도 그렇게 둥그렇게 역사를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계단을 내려가 전철표를 끊으려니 기계만 있고 사람은 없었습니다. 요금은 2불 50센트. 캐나다 달라만 되고, 미국 달라는 안 된답니다. 이런, 동전이 부족했습니다.

  “뭘 도와 드릴까요?”

  “미국 달라로는 토큰을 살 수가 없어요.”

쩔쩔매고 있는데 어느 중년여인이 다가오더니, 한 손에든 미국 달라를 보고 다른 손에 동전을 보더니 모자란다고, 자기 동전을 더 보태서 1달라 보다도 더 작은 토큰을 기계 아래 ‘딸락’하고 떨어지게 해 주었습니다. 미국 달라를 준다고 해도 굳지 받지 않겠다고 그냥 갔습니다. 참 고마웠습니다. 그 여인이 아니었으면 다시 가게로 나와서 동전으로 바꾸든지 해야 했을 것입니다. 

 

 
   
 

 

퀘백에서 버스터미널과 기차역으로 함께 쓰고 있는 건물

 

 

  전철역은 큰 건물 지하에 있었습니다. 전철은 물론 지하에 있었고, 큰 도시의 기차역은 모두 지하에 있었습니다. 멘하탄은 미국 전역을 잇는 두개의 큰 역이 있는데도 지상에서는 기차선로도 구경할 수 없습니다. 시애틀도 도시 한복판에 역이 있는데도 버스를 내릴 때까지 역이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토론토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기차역이 그럴진대 전철은 건물과 건물을 잇는 수단이 되기도 했습니다. 건물 지하로 들어가고, 지하철을 나오면 밖을 나가지도 않고 볼일을 다 보고 다닐 수가 있었습니다. 겨울 추위에는 꽤 괜챦겠다 싶었습니다.

  버스터미널에 버스를 타는 사람들은 출발시간이 1시간은 남았는데, 벌써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버스를 타면 2시간 혹은 많아야 4시간을 달리는데, 지금 이 차를 타면 12시간을 가야한다고 생각하니, 1시간을 줄 서서 기다리는 것은 준비운동 쯤 되나 봅니다. 빨강 머리를 짧게 깎은 30대 초반쯤의 여자 운전사가 형광색 제복을 입고 표를 점검하고, 젊은 남자 직원이 손님의 짐을 차 트렁크에 싣기 시작한 지는 30분을 더 지나서였습니다. 3시 30분에 출발해서, 오타와를 거쳐, 몬트리올에서 차를 갈아타고, 퀘벡에는 이튿날 새벽 3시에 도착할 예정이었습니다. 도착하면 터미널에서 잠깐 기다리다가 아침을 먹고 여행을 할 생각이었습니다.

 

 

   

 

프롵뜨낙 관저, 퀘백의 대표적인 건물.

 

 

  버스는 서서히 출발해,  다시 넓은 길을 들어섰습니다. 구릉을 또 두 세 개 지나 하늘에 닿은 길을 넘어서면, 또 그렇게 하늘에 닿은 구릉이 여지없이 나타났습니다. 동으로 동으로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달렸습니다. 저녁식사 시간에 작은 도시에서 멈췄다가 또 끝도 없이 달렸습니다. 잠에 골아 떨어졌는지, 오타와를 느끼지도 못하고, 이 버스는 쉬지도 않고 달렸습니다.

  기차를 타도 두 세 시간에 한번은 쉬어서 달렸는데, 이 버스는 쉬지도 않고 달렸나 봅니다. 한잠을 자고 났더니 아랫배는 차 올라 화장실에 가고 싶었습니다. 쉬지도 않는 모양입니다. 나 말고 다른 사람도 분명이 화장실이 급한 사람이 있을법한데도 급한 소리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얼마를 참아서야 몬트리올에 도착했습니다. 몬트리올에서는 화장실을 찾아 가다가 터미널 직원을 만난김에 표를 보이면서

  “퀘벡으로 가는 버스는 어디서 탑니까?”

  “8번 출구로 빨리 가세요.”

  “난 화장실이 급해서, 화장실을 들러갈께요. 고마워요.”

  “내가 앞장 설테니, 그냥 날 따라 오세요.”

따라오라고 급한 손짓을 했습니다. 왜 이러나 하고 따라갔더니, 이 차가 이제 출발한다고, 퀘백 가는 거라고, 어서 타라는 것입니다.

  “아니, 고맙기는 한데, 난 화장실이 급해 다음차를 타고 갈께요.”

  “화장실은 버스에 있어요. 빨리 타세요. 지금 출발해요.”

  “이 버스에 화장실이 있어요?”

  “모든 버스에 화장실이 있어요.”

자랑스럽게 말했습니다. 기차에는 화장실이 있는 것을 알았지만, 버스에 화장실이 있는 것은 처음 보았습니다. 버스에 자리를 잡고 가방을 놓자마자 화장실부터 갔습니다. 기차의 좁은 화장실과 비슷하게 있을 건 다 갖추었지만, 냄새는 고약하게 났습니다.

 

   

 

아랫마을 가게에 진열된 그림

 

  그랬습니다. 난 버스 앞자리에 앉아 있어서 차 뒤에서 화장실 들락거리는 사람들을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쉬지 않고 오래 달려도 급하다는 사람이 없었던 이유를 알았습니다. 표는 또 늦을 것을 예상하고 2시간을 여유있게 연결하는 버스표로 주었구나 싶었습니다. 우리나라 같으면 시간에 맞게 도착할 때의 표를 줄텐데 말입니다. 넓은 땅만큼이나 여유있는 사람들을 면면을 볼 수 있었습니다.

 

 

 

   

 

아랫마을 골목길


 

 

 

  버스터미널에서 하룻밤


  몬트리올에서 버스를 바로 탄 덕분에 퀘벡에는 2시간이 이른 새벽 1시에 도착했습니다. 터미널은 이미 텅 비어있고, 경비 서는 젊고 깔끔하게 생긴 직원만 택시 타는 사람들을 안내했습니다. 이 직원에게 사실 이야기를 털어 놨습니다.

  “새벽이 될까봐 호텔 예약을 안 했는데, 앞 차를 타는 바람에 일찍 왔어요. 터미널에서 좀 묵어야겠는데, 어디서 지내면 되겠어요?”

터미널 안에서 지내랍니다. 안내하는 터미널은 좀 썰렁했습니다. 의자에 앉아, 큰 가방에 발을 올려놓고, 머리를 벽에 기대고 한잠을 잤습니다. 얼마쯤 자고 일어났더니, 내가 타려던 차자 도착한 모양입니다. 나처럼 생각한 사람도 많았던가 봅니다. 여기저기 자리를 잡더니 눈을 붙이고 새벽을 기다렸습니다.

 

   

 

아랫마을 강가에 정박한 훼리호

 

  자기는 잔 것 같은데 몸은 찌뿌둥하니 안 좋았습니다. 밖을 보니 붐하니 날이 밝아 오고 있었습니다. 아침을 먹을 곳을 찾았습니다. 다른 건물로 연결된 듯한 문을 들어서니, 거기는 기차역이었습니다. 기차역이기는 해도 기차가 보이지도 않고, 기차 가는 소리도 못 들었습니다. 철로는 모두 지하에 있는가봅니다.

  기차역에서도 대여섯 명이 의자에 앉아 불편한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공기는 버스터미널보다 따뜻했습니다.

  ‘아, 여기서 잘 걸, 훨씬 따뜻한데.’

그러나 이미 날은 밝아지고 있었습니다. 빵집과 음식점이 지금 막 문을 열고 있었습니다. 몸도 안 좋은데 고기를 먹어야 힘이 날 것 같아서, 고기가 든 샌드위치와 따뜻한 커피를 마셨습니다. 머리가 한결 맑아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큰 가방을 보관함에 넣고, 메는 가방을 최소한으로 가볍게 하고, 야간 경비가 준 지도를 보고 길을 나섰습니다.

 

   

 

아랫마을 골목의 한 건물에 그린 그림. 한 평면인데 그림을 그려 입체감을 주었다.



 전쟁터가 관광지로, 비무장지대가 생태공원으로...


  먼저 간 곳은 서쪽 아랫마을이었습니다. 도시를 가로지르는 고가도로 콘크리트 기둥마다 그림을 그려 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어느 성당의 문모습, 천상의 계단, 건물 모습 등 흉물스러울 수 있는 회색기둥에 장엄한 모습을 그려 놓아서 지나는 사람들이 뭔가를 생각하게 했습니다.

  이 그림을 보고는 발길을 돌려, 반대편 강가 쪽으로 갔습니다. 유리창에 그림을 전시하고 고물건을 진열한 상점들은 아직 문을 열지 않았습니다. 퀘벡이 프랑스풍의 건물이 많이 남아 있다더니, TV로만 보던 건물들이 전면을 아름답게 장식해 놓았습니다. 은행이나 관공서도 아직 문을 열지 않았고, 페리호도 사람 없이 조용히 정박해 있었습니다. 강변쪽 아랫마을에서 윗마을로 올라가는 길을 찾고 싶었습니다.

 

   

 

윗마을로 올라가자 처음 보이는 것이 400년 전에 쏘던 대포였다.

 

 

  “저 윗동네로 가는 길이 어디예요?”

자전거를 세워두고 강변 울타리에 기대어 아침 커피를 마시는 청년에게 길을 물어 보았습니다. 일러 주는 대로 골목을 들어섰습니다. 이리 기웃, 저리 기웃, 사진을 찍고, 감상을 하며, 천천히 걸어가는데, 자전거 청년은 한참 뒤에 내가 길을 잘 찾아 가는지 따라와 보았습니다.

  “와, 이 그림은 뭐야!”

경사길을 시작하는 즈음 5층 건물 벽에 화려한 그림이 보였습니다. 실재와 크기가 같은 모습으로 프랑스의 건물 모습과 창에 비친 생활상을 담고 있었습니다. 평면인 벽에 입체의 그림을 실물 크기로 그려 놓으니, 그림이 진짜인지 벽이 진짜인지 몰라보겠습니다. 얼마나 정교하던지 언덕을 올라가는 길 가 손닿는 곳에 사람들의 손때가 멀리서도 보였습니다.

 

   

 

퀘백을 지켜낸 레비스 허트의 동상

 

  나중에야 안 일이지만, 터미널에서 곧장 윗마을로 올라가는 길을 알았더라면 아랫마을 풍경은 구경하지 못할 뻔했습니다. 윗마을이 옛날 마을의 중심이라 한번 올라가면 아랫마을로 내려올 생각을 좀처럼 못하게 생겼습니다.

  퀘벡은 올해가 400년이 된 도시랍니다. 우체국에 들어갔더니 기념우표를 만들어 전시해 놓았습니다. 대표가 될 만한 프롱트낙 호텔은 파란 청동지붕을 하고 마을에서 가장 우뚝하니 아랫마을과 그 너머 강과 강 건너 마을을 한꺼번에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프롱트낙 총독의 관저였는데, 오늘날은 호텔로 쓰고 있답니다. 하룻저녁에 100만원, 비싸면 300만원까지 한답니다. 지하와 1층과 2층까지는 상점이 있었고 그 이상은 객실인데, 영어와 프랑스어로 가이드가 일일이 해설을 하며 소개를 했습니다.

 

   

 

400년 기념 우표. 침공을 기념하자는 것인지...

 

 

  이 마당에서 아이들을 부르는 한국말을 들었습니다. 귀가 번쩍 뜨였습니다. 

  “얘들이 장난하지, 말고 이리와.”

한국인 관광객들이 20여명 가이드를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가이드는 이 호텔과 옛 도시를 짧게 설명하고는 사진 찍기에 가장 좋은 곳이라고 데리고 갔습니다. 나도 어울려 듣고, 사진도 서로 찍어주고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뉴욕에서 왔답니다. 한국에서 온 사람도 있고, 미국에 이민 오사서 사는 사람도 있는데, 여행사의 페키지로 어울려 왔답니다.

  “자유로이 구경하다가 40분 후에 아랫마을 관광버스 세워 둔 곳까지 모이세요. 안 오면 버스가 그냥 출발합니다. 버스가 없으면 출발한 줄 아시고, 다음 코스까지는 버스로 오든지 택시로 오든지 마음대로 하세요.”

가이드가 이르고는 내려갔습니다.

 

   

 

프롱트낙호텔. 옛날에는 총독관저였단다.

 

  대부분 오던 길을 되돌아가고, 몇 대여섯 명이 옛날 방어벽이 있는 성체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 가다가, 시계를 보고는 작별인사를 했습니다. 꼭대기에서는 마을의 지붕과 지붕너머 아랫마을과, 멀리 세인트로렌스 강줄기까지 볼 수 있었습니다.

  퀘벡을 제대로 보려면 이틀은 걸린답니다. 하루는 윗마을을 보고, 하루는 아랫마을과 페리를 타고 주변도 돌아보아야 한답니다. 그런데 단 40분을 주고 ‘자유로이’란 이름을 붙였으니, 여기서도 한국인의 빨리빨리를 볼 수 있었습니다. 구경은 다 한 것입니다. 자유로이 다니는 시간도 있었으니까요. 그러고도 퀘벡을 다녀왔다고 그럴 테지요.

  한국사람들과 작별을 하고, 아직도 남아 있는 옛날 방어진지를 가 보았습니다. 400년 전 프롱트낙 제독이 영국군을 무찌르고 세운 진지랍니다. 별모양으로 되어있는 진지에는 아랫마을에서 올라오는 길옆에부터 진열된 포가 그대로 강 쪽을 겨루고 있었습니다. 400여 년 전에는 죽고 죽이는 치열했던 전장이 관광객이나 드나드는 한가한 곳으로 변했습니다. 인간의 욕심 때문에 생명을 바쳤던 이들의 피가 한포기의 풀이 되어 솟아나고 있습니다.

 

   

 

세인트 로랜스 강을 내려다 보는 프롱트낙 호텔 앞에서 한국인들과 어울렸다.

 

 

  ‘이 땅의 모든 전쟁터가 하루빨리 관광지로 바뀌고, 우리나라의 비무장지대가 하루속히 생태공원으로 바뀌게 해 주소서.’

멀리 고요하게 반짝이는 강물을 보며 기도를 했습니다. 여기에 박물관을 보고, 옛날식으로 사열하는 모습만 봐도 두 세 시간은 족히 걸립니다.


   

 

프랑스풍의 건물

 

 


 

 

  두 연인의 행복한 여행


  성벽을 동쪽으로 올라가서 남쪽을 돌아 서쪽문으로 내려오는 길에 또 한국말 소리를 들었습니다. 장교 둘이서 퀘벡의 군인들과 이야기 하다가 자기들끼리는 한국말을 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아, 한국 분이시군요. 혼자 관광하세요?”

  “예, 장교분들께서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공무같은데...”

  “내일 퀘벡시 400주년 기념 축하 퍼레이드에 우리 군악대가 참가합니다. 꼭 구경하세요.”

이국에서 한국인을 만나 반갑다고 덥석 악수를 하고 흔들었습니다. 난 오늘 보고 간다니까 하루 차이라고 안타까워했습니다.

  “우리나라 도시는 수백 년, 수천 년이 되었잖아요. 고작 400년 된 도시를 가지고 요란을 떨어요. 요란을....”

  “하하, 그건 맞아요.”

여행 잘 하시라고 다시 악수를 하고 헤어졌습니다. 그래도 대한민국의 존재를 여기까지 알리게 되었으니, 남북 대치 상황에서도 여유는 있었습니다.

 

   

 

퀘백 가장 높은 진지에서 세인트로랜스강을 내려다 보며

 

 

  동서를 연결하는 큰 도로는 400년을 축하하는 상징물이 머리 위로 길건너 건물끼리 연결해서 많이도 붙었습니다. 빼곡히 들어선 프랑스풍 건물의 출입구에는 꽃화분과 함께 현수막도 네모지게 걸어 두었습니다.

  그 사이로 400년 전에 사용했을 법한 마차가 관광객을 태우고 연신 지나다녔습니다. 건물은 여전하고, 마차도 그대로인데, 지나다니는 사람만 바뀌었습니다. 길도 여전하고, 성벽도 그대로인데, 사람에 따라 진열된 물건만 바뀌었습니다. 강도 여전하고, 대포도 그대로인데, 세월에 따라 사용용도만 바뀌었습니다. 산천은 의구한데, 관광객만 거리가 냇물인양 흘러갔습니다.

  중심되는 프롱트낙 호텔 마당에 다시 와서, 바로 아래 골목에 접어들었습니다. 화가의 거리랍니다. 길가에서 즉석 초상화를 그리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작은 골목에서는 액자에 넣은 각양각색의 그림을 파는 상인들이 골목 양쪽을 도열해 있었습니다. 그 입구에서 또 한국말을 들었습니다. 연인 같았습니다. 온통 금색 옷을 입고, 금색 선글라스를 끼고, 얼굴과 손도 금색으로 칠하고 퍼포먼스를 벌이는 사람의 팔을 잡고 사진을 찍고는 1달러를 기부함에 넣었습니다.

  ‘연인 둘이 만난 것만도 즐거운데, 멀리 여행까지 왔으니 즐거움이 배나 되겠다.’

둘을 보니까, 아내 생각이 났습니다. 그러나 지금 와서 어쩔 것입니까? 생각을 툴툴 털고, 밥이나 먹어야 겠다고 식당을 찾았습니다.

 

   

 

화가 거리에서 만나 연인중 한명이 마임을 하는 사람과 사진을 찍고 있다.

 

  400년 전에 지었다는 카나다 최고(最古)의 성당 앞에서 점심을 먹었습니다. 건물 안에 들어가서 먹는 것보다 잠시라도, 조금이라도, 더 보겠다고 샌드위치를 사서 성당 앞 공원 밴치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여기도 거지는 있었습니다. 옆 의자에 오더니, 웃옷을 한겹한겹 벗는데, 네 개를 벗어도 웃통은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팔 짧은 옷을 그렇게 겹쳐 입는 이유는 뭘까? 밤에 추워서 겹쳐 입는다면 긴옷을 입어야하고, 짧은 옷을 겹쳐 입는다면 지참하기 귀찮아서 그럴까?’

400년 거리의 신비만큼이나 거지의 심리가 궁금했습니다. 400년이 되었어도 가난한 사람들을 가난한 채로 두는 것은 변하지 않았고, 서울역광장이나 지구 반대편 퀘벡의 한복판이나 가난한 사람들이 구별되어야하는 현실이 달라 보이지 않았습니다.


   

 

화가의 거리에서 초상화를 그리는 사람

 

 


 

 

  여행지에서도 회사 푸념하는 젊은이


  점심을 먹고 내리막으로 오던 길을 계속 갔습니다. 이번에는 남자들 둘이서 그늘에 앉아 한국말로 대화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진급하는데 골치가 아프단 말이야.”

  “부장님은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

아마 회사내에서 단체로 여행을 온 모양입니다. 멀리 지구 반대편까지 날아와 좋은 곳을 여행을 하면서까지 회사의 불만을 이야기해야할 정도로 골치 아픈 것이 무엇일까요? 그런 마음으로 바라보는 풍경이 얼마나 마음에 감동을 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일을 열심히 해도 일한만큼의 평가나 보상을 받지 못하는 것이 억울해서일 것입니다.

 

공원앞 거리

 

 


 

 

  대학을 1년 마치고 휴학하고 군대 가기 전, 청주에서 사촌과 함께 지낼 때였습니다. 생활비가 떨어져 건설공사장에서 품을 팔았습니다. 미장일꾼을 따라다니면서 시멘트를 섞고, 사모래를 져다가, 물을 부어 비벼주는 일을 일주일은 했습니다. 이젠 그만하겠다고 품값을 달랬더니 십장이 5일치는 주고 2일치는 남겨 두는 것입니다. 사흘 후에 주겠다더니 그 후로는 연락도 닿지 않았습니다. 닷새를 기다려도 연락두절입니다. 하는 수 없이 일을 처음 시작할 때 십장을 만났던, 집으로 찾아 갔습니다. 부인에게 따지고 물었습니다.

  “아, 일한 품값을 왜 안줘요?”

  “글쎄, 조금만 더 기다려 보래두요?”
나중에는 심한 말을 하면서 가만히 두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고야 나머지 돈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정당히 해 줄 때를 바라고 가만있으면 내 밥도 못 찾아먹는 것이 우리네 사회입니다.

 

     

 

 

 

  내가 열심히 일하면 그 다음은 국가가 나서서 질서를 잡아 주어야 마땅합니다. 그러라고 대통령을 뽑고, 국회의원을 뽑고, 시도지사를 뽑아서, 세금으로 먹여 살리지 않습니까? 

  미국이나 캐나다에서 살기가 좋다는 것은, 난 내일만 하면 나머지는 국가가 알아서 제도적으로 처리해 주기 때문이랍니다. 사기전화도 국가가 발본색원해서 뿌리를 뽑아주고, 불량식품도 국가가 엄하게 처벌해서 아무데서나 아무 음식이라도 마음 놓고 먹도록 해 주고, 일 하면 일 한만큼 임금을 보장해 주고, 이런 나라가 살기 편한 나라지, 땅 넓고 공기 좋아서 좋은 나라가 아닌 것입니다.  

 

   

 

지금도 400년 전 프랑스 풍속으로 살아가는 것을 시연하는 아가씨

 

 

 

 

  이런 관행이 아직도 고쳐지지 않고 있습니다. 건설공사장에서 한 달에 한 번씩이라도 꼭꼭 지급해 주어야할 노임을 미루고 미루다가 공사가 끝날 때 주든지 끝이 나도 부도를 내고 도망을 간다든지, 운송 트럭이 운송료의 절반도 못 받고 운송에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 여러 단계의 중간 소개업자에게 뜯긴다든지, 농민이 농사를 지어 헐값에 팔아도 사먹는 사람은 비싸게 사먹고 중간상인이 챙겨 간다든지, 철도청에서 여직원을 직접 채용하면 되는 것을 중간에 다른 사람을 개입시키고는 어차피 주어야할 임금 중에서 떼어먹게 해서 일하는 여직원에게는 적게 돌아가게 하는 일을 국가에서 자행하는 등, 아직도 후진적인 제도가 열심히 땀흘리는 사람들을 억울하게 하는 것이 우리나라의 현실입니다.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일하는 사람은 공평하게 정당한 노동의 댓가를 받게 하기만 하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을, 국가는 뭐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노동은 신성한 것이라면서 이 신성을 훼손하면서 노동하지 않는 자가 배부르게 하는 배부른 자의 나라는 누구의 나라입니까? 상거래 질서는 개인은 바로잡지 못하고 국가가 나서서 해야 할 국가의 책무입니다.

  “어이, 안녕하세요. 한국사람이네? 나 사진 좀 찍어 줘요.”

  관광을 와서까지 직원끼리 억울함을 토로하는 젊은이들이 가엽습니다. 이런데도 와보지 못하고 일을 해도 억울함을 풀지 못하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되겠습니까? 이 늙은이도 혼자 와서 이렇게 씩씩하게 다닌다고, 힘내라는 뜻으로 사진기를 넘겨주고 씩씩하게 폼을 잡았습니다.

 

   

 

젊은이에게 부탁해서 찍은 사진

 


 

 


“아이 돈 노 잉글리쉬. I don't know English."


  이제 내려갈 때가 되었습니다. 6시 40분 비행기로 캘거리로 떠나야 하는데, 버스를 타려면 시간을 넉넉하게 잡아야 했습니다. 윗마을 성밖을 서쪽으로 나와서 정류장에 서있는 버스 운전사에게 공항에 가는 버스는 몇 번이냐고 물었습니다. 80번이 간답니다. 그런데 80번을 타려면 한번 갈아타야 한답니다. 고맙다고, 당신 참 친절하다고 인사하고 터미널로 내려 왔습니다. 큰 길을 따라 내려가니 바로 터미널 건물과 그 앞 분수대가 보였습니다.

  터미널에 가서 승객을 기다리는 버스 운전사에게 공항가는 버스를 또 물었습니다. 짐을 찾아서 버스를 타고 80번을 갈아타고 싶었습니다.

  “왜 공항을 버스로 가려고 해요? 택시를 타고 가요. 버스는 없어요.”

  “버스를 타고 시내를 지나는 것은 나에게 또 다른 여행이예요.”

  “아이 돈 노 잉글리쉬. I don't know English."

지금까지 영어로 잘도 말하다가, 영어를 모른다고, 프랑스어로 뭐라고뭐라고 떠들고는 버스를 몰고는 휑하니 가버렸습니다. 퀘백이 프랑스어를 쓴다지만, 지금까지 영어로 소통하지 못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불리해지니까 영어를 모른다고 귀를 닫아버립니다. 공항이 2,30분 거리인데, 택시비는 3,40불이나 한다는 말을 들었던 차에 끝까지 버스를 타고 가야겠다고 별렀습니다.

 

   

 

벽에 그린 그림들

 

 

  터미널 직원에게 공항가는 버스를 물어도, 버스 운전사처럼 택시를 타라 그러고, 자기는 공항 전화번호만 알아 줄 수 있을 뿐이랍니다. 공항 전화의 통화료는 무료였습니다. 안내 맨트를 따라 번호를 눌러서 안내원과 통화를 했더니, 처음 안내양은 시내버스 터미널 번호를 알려 주더니, 다음 안내양은 버스는 없다고 딱 잘라 말하고는 끊었습니다. 그럴수록 오기가 생겼습니다.

  ‘내가 버스타고 공항을 못 가나 봐라!’

  성밖에서 만났던 버스 운전사가 말해 준 80번이 서는 장소로 가려고 짐을 찾아 나서는데, 터미널 의자에서 또 한국말이 들렸습니다. 사촌 동생이 유학을 왔는데, 누나가 캐나다 관광을 와서 구경을 왔답니다.

  “아 글쎄, 내가 공항으로 버스를 타고 가려는데, 버스 운전사나 터미널 직원들도 택시를 타야한다는 거야. 공항 가는 버스가 있기는 한가본데 관광수입을 올리려고 한통속이 됐어. 공항 가는 길을 혹시 찾을 수 있을까?”

  “우리도 잘 모르겠는데요. 지도를 한 번 보지요.”

들고 다니던 지도를 펼쳤습니다. 퀘벡전도에는 버스노선도 나와 있었습니다. 80번이 근처를 지나고, 시내와 조금 떨어져서 공항이 있기는 했습니다. 자기의 지도를 주면서 좋은 여행이 되시라고 인사를 했습니다. 역시 이국에서 만나는 한국 사람들은 모두 친절했습니다. 나라를 떠나면 모두 애국자게 된다더니 동포를 만나기만해도 반가웠습니다.

 

   

 

길을 묻고 사진 한 컷

 

  큰 가방을 세워서 네 바퀴로 밀고 가기에 좋을 만큼 인도는 턱을 없앴습니다. 20분을 지도를 보고 걸어가, 드디어 80번 정류장을 찾아 버스를 탔습니다. 캐나다의 시내버스는 오르고 내리는 턱이 인도에서 낮은 한 계단 높이였습니다. 게다가 버스도 모두 니버스 Knee Bus 라고, 앞바퀴 쪽이 내려 앉아 타는 계단을 낮추었습니다. 버스도 인도에 바짝 붙여서 서서 노인이나 어린이도 아주 쉽게 이용할 수 있게 했습니다.

 

   

 

퀘백 공항 내부

 

 

  40분 버스를 타는 동안 운전사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내가 동양에서 온 것을 알고는, 묻지 않았는데도 자기는 부디스트 Buddhist 랍니다. 서구에 불교가 들어가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만나보기는 처음이었습니다. 조용하고 정적인 명상이 마음에 들어서 택했답니다. 지금은 가족들도 모두 명상을 한답니다. 아주 행복해 보였습니다. 공항에서 가장 가까운 정류장에 내려 주었습니다.

  “여기서 걸어서 10분이면 공항에 갈 수 있어요. 좋은 여행 되세요.”

  걸어서도 갈 수 있지만, 여기까지 버스를 타고 온 것만도 성공이다 싶어서, 공항에서 나오는 택시를 돌려 세웠습니다. 비행기를 타면서 시골길을 걸어 들어간다는 것은 또 꼴이 우습기도 할 것 같았습니다. 듣던 대로 택시의 바가지요금은 역시 엄청났습니다. 금방 오는 거리에 요금이 8불이 나왔고, 차가 섰는데도 메타기를 끄지 않고 짐을 내려 요금은 계속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10불을 주고는, 가방을 끌고 청사로 들어섰습니다. 점심 먹는 시간도 아까워 공원에 앉아서 먹던 그 애착이 모두 사라졌습니다.

  ‘잘 있어라 퀘벡, 난 간다.’ 

  

  

 

   

 

퀘백 공항 창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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