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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 신앙을 자랑하는 목사님들께한국 교회 목사님들께 드리는 공개서한 [1]
류상태  |  shalom77@cho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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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6년 01월 23일 (월) 00:00:00 [조회수 : 2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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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한국 교회에서, ‘예수 천국, 불신 지옥’으로 대표되는 보수주의 신앙은 소위 ‘정통’으로 간주되며, 이에 의문을 제기하는 신앙은 이단으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저는 ‘예수 천국’ 신앙에 동의합니다. 저도 당신들과 똑같이 예수는 나의 주님이시고, 그리스도시며, 하나님의 아들임을 고백합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되시는 우리 주님께서는, 자신의 삶과 가르침이 하나가 되어 하늘 아버지를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그 분은 과연 ‘하느님의 아들’이셨습니다. 그 분의 삶과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은 원수가 가족이 되고, 눈 먼 자가 눈을 뜨며, 억눌린 자가 자유롭게 되는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였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이 천국으로 바뀌는 대변혁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주기도문에서 가르쳐 주신대로,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경험이었으며, “그 때, 바로 거기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천국)에 참여한 것이었습니다.

2천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저 역시 그 분의 삶 속에서 발현된 하느님을 보았으며, 그 분의 가르침을 통해 나타난 하늘 아버지의 음성을 들었으며, ‘그 때, 거기서’ 고백한 이들과 함께 ‘지금, 여기서’ 같은 고백을 하게 되었습니다. “진실로 그 분은 하느님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저 자신과 수많은 믿음의 선조들이 함께 공유했던 이런 아름다운 ‘고백’이 ‘교리’로 굳어지면서, 또한 정치 세력과 결탁하면서, 기독교가 다른 신념, 다른 문화를 부정하고 파괴하는 무서운 폭력으로 나타났음을 역사는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예수 천국’에 대한 바로 그 믿음 때문에, ‘불신 지옥’에 결코 동의할 수 없습니다. ‘불신 지옥’이라는 편협한 교리는, 유대의 민족신 안에 갇혔던 야훼 하느님을 전 인류의 아버지, 모든 생명을 품으시는 하늘 아버지로 재해석하신 주님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이 정말로, 우리 하나님이 정말로,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 없이 살기를 힘쓰는 수많은 우리 이웃들과, 진리와 선함과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살고자 애쓰는 길벗(이웃 종교인)들, 또한 우리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시는 어머니 아버지, 이 아름다운 분들을 오직 “예수를 믿지 않는다”는 이유로, 가차없이 지옥에 보내시는 분일까요?

그런 믿음은, “선인과 악인에게 똑같이 햇빛을 비추어 주시고,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를 가리지 않고 단비를 내려주시는” 예수님의 ‘하느님 믿음’과 공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 불신’을 이유로 가차없이 지옥에 보내시는 하느님은,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자비무한하신 ‘하늘 아버지’와는 달라도 너무나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불신 지옥’을 확신하는 신앙은 예수님을 모독하는 것이며, 또한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하늘 아버지를 심히 모독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좀 더 분명히 말씀드리면, “기독교만이 유일한 참 종교요 진리”라는 주장은, 무한하신 사랑의 하느님, 자비의 하느님을 ‘사람이 만든 배타적 교리 체계’안에 가둘 뿐 아니라, 그 존귀하신 하느님을 심술궂은 마술사 수준으로 끌어내렸기에,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며, 우리 기독교 용어로 ‘신성모독’ 죄를 저지르는 것입니다.

아마도 당신들은, 설교를 통해 바리새인의 굳어진 종교성을 비판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다”는 주님의 말씀을 인용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 말씀은, “사람이 율법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사람을 위해 있다”는 말씀이며, 또한 “사람이 교리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교리가 사람을 위해 있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사람이 성경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사람을 위해 있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결국 안식일도, 율법도, 성경도, 모두 수단일 뿐이며, 중요한 것은 사람이라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결국 사람을 살리기 위해, 사람 사는 세상에 평화를 이루기 위해, 모든 사람이 행복하게 잘 살도록 하기 위해, 기독교라는 종교도, 교회도 필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성경(당시에는 모세5경과 선지자의 글들)의 ‘기록’을 ‘문자적으로 절대화’하였기 때문에, 문자를 넘어 속뜻을 파해친 예수님의 자유로운 해석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성경의 권위를 부정(?)하는 예수는 이단자요 사탄의 하수인일 뿐이었으니까요.

심지어 예수님은,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원수를 사랑하라”고, ‘절대적인 하느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뒤집는 파격적인 말씀까지 하셨습니다.

또한 모세의 율법에는 “남편이 이혼증서를 써 주면 이혼이 성립된다”고 하였으나, 예수님은 “그것은 너희 마음이 완악하여 할 수 없이 모세가 그런 법을 허용한 것이고 하느님의 뜻은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여, 성경이 시대의 산물이며 사회적으로 보다 성숙한 시대에는 문자 그대로 적용될 수 없음을 암시하는 위험한 발언도 서슴없이 하셨습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과 예수님이 마찰을 빚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이런 성서 해석 차이에 그 근본 원인이 있었습니다. 성서 문자를 절대화하느냐, 아니면 문자에 매이지 않고 그 뜻을 읽느냐의 차이였던 것입니다.

당신들이 설교 시간마다 자주 비판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당시의 ‘정통’ 유대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오늘날 ‘정통’ 기독교 지도자를 자처하는 당신들처럼 말입니다.

아마도 당신들은, “율법의 시대는 지나갔으며, 거기에 매일 필요가 없다”는 당연하고 옳은 설교를 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교리 역시 시대의 산물이며, 그것에 매여서는 안된다”는 명제 역시 당연하고 옳은 상식입니다.

그런데 왜 당신들은 그 명제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요? 대단히 죄송합니다만, 저는 당신들이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처럼, 성경의 문자에 매여 그 안에 담긴 참 뜻을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당신들 중에, 성경이 전혀 오류가 없는 완전무결한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믿기에, 성경이 (문자적으로) 말하는대로 “예수를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는 신념을 견지할 수밖에 없다면, 옳고 그름을 떠나, 일단 당신들의 정직한 신앙을 존중하겠습니다.

그러나 당신들 중에는, 그것이 2천년 전 사람들의 원시적인 시대 환경에서 나온, 비록 정직한 고백이라 하더라도 무지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알고 있는 분들이 적지 않게 있습니다. 그러나 교세를 확장시키고 성공적인(?) 목회를 위해서는 여전히 그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교리가 유용하기 때문에, 교인들을 계속 무지의 우물 속에 가둬두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인류를 갈등 상태로 몰고가는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며, 또한 복음의 순결한 빛을 가리는 것이고,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순종하신 하나님의 뜻을 정면으로 거스르고 파괴하는 씻을 수 없는 죄를 짓는 것임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당신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 싶어 가톨릭 사제이며 수도사인 앤소니 드 멜로 신부의 글을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탐험가가 고향으로 돌아오자
사람들은 신바람이 나서 아마존에 관한 모든 것을 샅샅이 알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탐험가가 거기서 기막히게 아름다운 꽃을 보았을 때나
한밤에 숲 속의 소리를 들었을 때에 가슴에 용솟음치던,
그 때의 그 느낌을 어찌 말로 다 옮길 수 있겠습니까?

혹은 야수의 위협을 알아차렸을 때,
혹은 변덕스런 물살을 가로질러 쪽배를 저어갈 적에 마음 졸이던 그 절박감을
무슨 재주로 전달할 수 있었겠습니까?

“몸소 찾아들 가 보시지요.
이 경우야말로 ‘백 번 듣는 것이 한 번 보는 것보다 못하다’는 경우입니다.”
그리고는 아무튼 길잡이 삼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아마존 지도를 한 장 그려주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지도를 붙들고 늘어졌습니다.
그것을 액자에 넣어 마을 회관 벽에 걸었고, 제각기 사본을 떠 가기도 했습니다.

사본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아마존 전문가로 자처했습니다.
아마존 강의 이 굽이와 저 소용돌이는 어디이고,
이곳 너비와 저곳 깊이는 얼마이며,
급류는 어디 있고 폭포는 어디 있는지,
아닌게 아니라 어느 것 한가지인들 모른다는게 없었습니다.

탐험가는 지도를 그려준 일을 평생 내내 후회했습니다.
아무 것도 그려주지 않았던들 차라리 나았을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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