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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소개>목회자를 위한 <설교자노트> 2011년 3·4월호
정연복  |  pkom545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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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1년 03월 03일 (목) 13:55:03
최종편집 : 2011년 03월 03일 (목) 22:30:18 [조회수 : 2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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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소개> 목회자를 위한 <설교자노트> 2011년 3·4월호 
 
                                                                         정연복(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저는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으로 일하면서 1997년부터 격월로 나오는 <설교자노트>라는 책을 번역해 왔습니다.

지금까지 89권이 나온 <설교자노트>는 '교회력에 맞춘' 설교 본문에 대한 성서 주석, 그리고 그 본문에 따른 미국의 실력 있는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의 최신의 설교를 번역하고, 아울러 설교 내용에 적합한 기도문과 예화 자료를 풍부하게 제공하여 목회자들의 설교 준비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책입니다. 특히 <설교자노트>에 실린 설교들은 설교자들에게 성서에 충실하면서도 독창적인 설교 아이디어를 제공합니다.

그런데 이 <설교자노트>는 시중 서점에서는 팔지 않고 신청하시는 목회자들에게 직접 우송합니다. '영성적이며 공동체적이며 생태학적인 신앙 공동체를 위한 자료'인 <설교자노트>를 구입하기 원하는 분들은 한국기독교연구소(전화: 031-929-5731)로 연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설교자노트>는 격월로 나오며 두 달치 분량의 설교 자료를 담고 있는데, 2011년 3·4월호 중 3월 둘째 주 설교 자료를 참고로 첨부합니다.


설교 제목: 자유와 선택

* 성경 본문: 창세기 2:15-17; 3:1-7
* 성경 주석

전통적으로 "타락"(the fall) 이야기로 불리는 오늘 본문처럼 유대교 신자들과 크리스천들의 성경에서 서구인들의 의식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해 온 구절은 거의 없다. 그것은, 우리가 경험하는 대로의 삶보다 뭔가 더 나은 삶에 대한 영원한 갈망을 많은 문화들과 오랜 세월 속에 사람들 속에 불러일으켜 온 자연적·사회적·인간적 조건들을 설명하려고 애쓰는 하나의 '원인론'(etiology)이다.

오늘 본문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인간이 먹지 못하도록 신이 금지하는 것(2:15-17), 그리고 그 금지에 인간이 불순종하는 것에 대한 보도의 서두의 절들(3:1-24)로 이루어져 있다.

오늘 본문까지의 이야기의 흐름은 "땅"(earth)과 "사람"(human)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단어 아다마('adamah)와 아담('adam) 사이의 밀접한 언어적 관계에 관해 성서학자인 E.A. 스파이저가 다소 변덕스럽지만 정확히 관찰하였듯이 창세기 2:4b에서 시작되는 최초의 인간 창조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맨 먼저 농업의 부재와 관련된다: "주 하나님이 땅 위에 비를 내리지 않으셨고, 땅을 갈 사람도 아직 없었으므로, 땅에는 나무가 없고, 들에는 풀 한 포기도 아직 돋아나지 않았다"(5절). 농업이 없었기 때문에 문명도 없었다. 이런 현실 앞에서, 주 하나님은 일반적인 "사람"(man)이 아니라 단수의 특정한 "한 사람"(a human being)을 지으셨다(7a절).

창세기의 이 부분에서 신성에 대한 이중적인 이름, 즉 "주 하나님"(the Lord God)은 이 지점까지 사용된 단일한 신명인 "하나님"으로부터의 갑작스런 변화이다. 학자들은 이것을 신명기 신학의 복잡한 신명이 창세기에 반영된 것으로 본다.

야훼 하나님은 그 사람을 에덴 동산에 두시는데, 에덴 동산은 동쪽 어딘가에 있는 미지의 장소이다(2:8). 하나님이 자라게 하신 울창한 나무들 중에, 두 그루의 나무에만 특정한 이름이 붙는다: 생명나무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9절). 오늘 본문에서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은 후자이다.

최초의 인간이 창조된 곳은 알 수 없지만 에덴 동산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주 하나님이 사람을 데려다가 에덴 동산에 두셨기" 때문이다(15a절). "두셨다"(put)로 번역된 히브리어 동사는 글자 그대로 "[그를] 쉬게 하셨다"(caused him to rest)인데, 이것은 "두셨다"라는 단어로는 포착되지 않는 의도성의 요소를 포함한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람을 에덴 동산에 두신 것은 사람이 아니라 동산을 위해서였다: "그곳을 맡아서 돌보게 하셨다"(15b절). "돌보다/경작하다"(till)로 번역된 히브리어 동사 아바드('avad)는 "섬기다"(to serve)를 의미한다. 창세기가 묘사하듯이, 최초의 인간이 놓여진 조건은 게으른 여가와는 거리가 멀었다. 농사를 짓는 수고, 즉 하나님께 속한 동산을 돌보고 보존하는 것이 사람이 창조된 이유였다. 이 점에 있어서, 창세기는 다른 창조 이야기들과 기본적인 개념을 공유하는데,  그것들 중 돋보이는 것은 기원전 17세기 고대 바빌론의 아트라하시스(Atrahasis) 이야기이다: "산파가 한 인간을 창조하도록 하자. 인간이 신의 고역을 떠맡게 하자." 그러나 오늘 본문을 넘어 이야기가 전개됨에 따라, 일 자체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내린 형벌이 아니었음이 암시된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명하신다: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는 네가 먹고 싶은 대로 먹어라.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어서는 안 된다"(16절). 이 명령의 의미는 "마음껏 먹어라"(Help yourself!) 혹은 "다 먹어라"(Eat up!)처럼 다소 회화적으로 포착될 수도 있다.

에덴 동산의 두 가지 특정한 나무들 중에 하나에 대해서만 먹지 말라는 경고가 따라붙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그것은 다른 나무, 즉 생명나무는 사람들이 자유롭게 이용해도 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생명나무의 영양분 덕분에,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렸다. 그러나 본래 그들은 영원 불멸의 존재로 창조되지는 않았다: "이제 그가 손을 내밀어서 생명나무의 열매까지 따서 먹고 끝없이 살게 하여서는 안 된다"(창 3:22).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금지는 남성 인간에게만 주어진 것이었음을 주목해야 한다. 여자는 아직 창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자의 창조는 창세기 2:18-22에 이르러서야 나온다.

"[선악과를 먹어서는 안 된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는 반드시 죽는다"(17절)는 것은, 남자의 예정된 영원한 생명을 박탈당하게 되리라는 의미가 아니라, 단수형인 남자가 생명나무에 접근하지 못하게 되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 본문에서는 최초의 여성 인간의 창조를 건너뛴다(창 2:18-25). "벌거벗은"(창 2:25)으로 번역된 단어는 어원학적으로 "간교한/교활한"(창 3:1)으로 번역된 단어와 관련된다. 최초의 남자와 여자는 "벌거벗은", 혹은 "꾸밈이 없는/교활하지 않은" 존재이다. 그러나 뱀은 그들과 다르다. 뱀은 인간이나 모든 다른 피조물들보다 속임수를 쓰는 성질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의 히브리어 원문의 애매 모호성은 의도적인 것임이 확실하다.

뱀과 여자 사이의 토론(창 3:1-5)은 오랜 세월 동안 남자과 여자 사이의 관계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여자는 정말로 뱀에게 유혹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창세기 3:6에서 "[그녀와] 함께"(with her)라는 히브리어 전치사 immah의 등장은, 남자가 뱀과 여자 사이의 대화가 이루어지는 동안 함께 있으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매우 실제적인 가능성을 불러일으키는데, 그렇다면 남자가 뱀의 유혹과 관련해서 아무런 잘못도 없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일반적으로, 구약성경에서 뱀은 두려움과 혐오감의 혼합물로 여겨졌다(민수기 21:6 참조). (민수기 21:9의 모세의 구리뱀처럼) 뱀이 존경을 받는 것은 아주 드문 경우였다. 뱀의 이미지는 구약성경을 통틀어 거의 일관되게 위험과 바람직하지 못함의 상징이다. 또한, 오직 후대의 종교 전승 속에서만, 이 구절 속의 뱀은 사탄이나 악마와 동일시된다.

뱀은 여자에게 "너희가 그 나무 열매를 먹으면, 너희의 눈이 밝아지고 하나님(혹은 신들)처럼 될 것"이라고 말한다(창 3:5). 그리고 이런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보아라, 이 사람이 우리 가운데 하나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되었다"(창 3:22a). 뱀의 입을 통해 새빨간 거짓말을 보도하지 않고 인간의 파멸을 초래하는 반쪽 진리를 보전하는 데서, 창세기 저자의 빼어나고 정교한 이야기 솜씨가 드러난다.

창세기 3:6의 표현은 이상하다: 선악과는 여자에게 "먹음직스럽고", "눈에 즐겁고" "사람을 슬기롭게 할만큼 탐스러운" 것으로 보인 것으로 묘사된다. 그런데 마지막 부분은 어색하다. 즉, "탐스럽다"(to be desired)로 번역된 동사는 의미와 구문론(syntax) 모두에 있어서 필요 이상이고 부적절하다. 그 동사는 "사람을 슬기롭게 하다"라는 원래의 본문에 나중에 첨가된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자신들이 벌거벗은 것을 인식한 최초의 남자와 여자의 반응은, 그들 자신의 몸을 가리기 위한 원시적인 옷을 만드는 것이다(7절). "치마" 혹은 "허리에 두르는 간단한 옷"(loincloths)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보통은 용사가 검을 차기 위한 "허리띠"(belt)를 의미한다(열왕기상 2:5; 열왕기하 3:21; 사무엘하 18:11). 그 단어는 어깨에서 허리로 띠는 "장식띠"(sash)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 설교 본문

창조주는 엄격한 지배자나 숙달된 조종자가 아니라 우리 인간이 자유의지로 주체적인 선택을 하도록 허락하실 만큼 자신감을 갖고 계신 한 분 하나님이다.

창세기에서는 말한다: "주 하나님이 사람을 데려다가 에덴 동산에 두시고, 그곳을 맡아서 돌보게 하셨다. 주 하나님이 사람에게 명하셨다.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는 네가 먹고 싶은 대로 먹어라.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어서는 안 된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는 반드시 죽는다'"(창 2:15-17).

무슨 의미인가? 한편으로, 하나님은 최초의 인간에 대한 지배력을 행사하는 초자연적인 힘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은 하나만 빼고는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는 네가 먹고 싶은 대로 먹어라"고 말씀하시면서 인간에게 상당한 자유를 주신다. 인간은 동산의 풍성한 나무 열매들 중에 자신이 무엇을 먹을 것인지를 광범위하게 선택할 수 있다. 오직 한 가지 나무, 즉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대해서만 자유로운 출입이 금지된다. 선악과를 따먹는 것은 인간의 죽음으로 귀결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에게 금지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그것을 선택할 수 있는 힘을 부여받는다.

인간은 자신이 마음먹은 대로 얼마든지 자유롭게 선택하고 타락할 수 있다. 선택의 선물! 성경에 따르면, 인간은 자유의지를 얻기 위해 애써 싸울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자유의지를 인간에게 거저 주신다.

우리의 창조주는 얼마나 놀라운 분이신가! 그분은 우리 자신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도록 허락하실 만큼 자신감이 넘치신다. 하나님은 인간이 동산의 모든 나무들 중에 하나만 빼고는 어떤 것을 먹어도 좋다고 말씀하신다. 이 금지 조항을 설정함에 있어서, 하나님은 자유로운 선택 그 자체의 선물을 주신다.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택 사항들을 설명하신 후에야, 우리는 그것들을 이용할 수 있다. 오직 그때에만, 우리는 어떤 경계들 안에서 살아가기로 선택할 수 있다.

오직 진실로 권능이 있으신 하나님만이 남들에게 힘을 주실 수 있을 만큼 강하시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무조건 통제하고 지배하지 않고 자유를 주신다.

자식을 진정한 애정을 갖고 돌보는 부모들은 자녀들이 그들의 삶을 위한 최선의 방향을 탐험하고 발견하는 데 필요한 자유를 준다.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인간에 대한 깊은 사랑과 신뢰를 가지고 그렇게 행하신다. 그러나 자녀들이 혹시라도 잘못될까 지나치게 걱정하는 부모들은 자녀들이 특정한 길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엄격히 통제하고 조종하려 든다.

몇 해 전에는, 자녀들에게 지나치게 간섭하는 부모를 "헬리콥터 부모"라고 불렀다. 그들은 자녀들 주위를 마치 헬리콥터처럼 끊임없이 맴돌며 감시하려 들기 때문이다. 지금은 상황이 훨씬 더 악화되었다. 그래서 자녀들에게 지나친 애착을 가진 부모들을 가리키는 "벨크로 부모"(Velcro parent)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2010년 <뉴욕타임즈>는 찍찍이처럼 자식 곁에서 떨어지지 않는 부모들 때문에 대학들이 골머리를 앓는다며 "벨크로 부모"라는 표현을 썼다.

우리의 하나님은 벨크로 하나님이 아니다. 그 대신, 하나님은 우리와 그분 자신을 떼어놓고서 말씀하신다: "너는 하나만 빼고는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자유롭게 먹어도 된다." 지나친 경계들은 인간의 성장과 주체적인 발견을 방해하는 반면 무제한적인 자유는 죽음으로 귀결된다는 것을 알고서, 주님은 경계들과 자유에 관해 분명한 태도를 취하신다.

그러나 인간이 언제든지 올바른 선택만을 하는 것은 아니다.

폴란드 출생의 위대한 영화감독 빌리 와이더(1907-2002)는 언젠가 말했다: 한 이야기의 제1막에서, 등장인물을 한 나무 속에 넣는다. 제2막에서, 그 나무에 불을 붙인다. 그런 다음 제3막에서, 그를 나무에서 끌어내린다.

그러나 창세기의 이야기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전개된다. 창세기의 제1막은 한 나무 속에 사람들을 놓고, 그리고 어떤 한계 내에서 그들이 원하는 것은 뭐든지 먹어도 좋다고 말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 나무에 불이 붙는 것으로 제2막이 열린다. 남자의 다정한 짝이 되도록 창조된 여자와 뱀 이 대화를 나눈다. 교활한 피조물인 뱀은 하나님이 주신 자유의 한계를 시험하는 질문을 여자에게 던진다: "하나님이 정말로 너희에게 동산 안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느냐?"(창 3:1).

여자는 뱀에게 대답한다. "우리는 동산 안에 있는 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동산 한가운데 있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다. 어기면 우리가 죽는다고 하셨다"(2-3절). 여자는 그녀의 자유와 결코 넘어서는 안 되는 경계, 이 둘을 아주 분명히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뱀은 성냥을 그어 나무에 불을 붙인다. "너희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고 뱀은 약속한다(4절). 교활한 피조물인 뱀은 사실상 진리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너희가 절대로 죽지 않는다"고 예언함에 있어서, 그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신 것의 진실성을 관한 의심의 씨앗을 뿌리고 있다.

남자와 여자는 한 나무 위에 올라가 있다. 그리고 이제 그 나무는 불타고 있다.

*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진실을 말씀하신 것인지 아닌지 의아하게 여기고 있다.
* 그들은 죽음이 정말로 불순종에 대한 벌인지 아닌지 의문을 품고 있다.
*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끌린다.
* 그들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에서 멀어지는 것이 과연 어떤 느낌일까' 하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 불타는 나무에 줄곧 올라가 있다. 성경에는 다양한 계명과 규칙, 그리고 규제들이 나온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들 모두가 오늘날에도 똑같이 참되고 우리의 삶에 구속력이 있는지 의아하게 여긴다. 어떤 선택들은 위험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들이 실제로 우리를 죽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자기 개선 혹은 자기 수양 세미나가 늘 제공되며, 그리고 사람들은 자신이 좀더 현명하고 자신감이 넘치게 되기를 원한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어떠한가? 물론,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참 좋은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유지를 자기 삶의 최우선의 과제로 삼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최초의 남자와 여자가 그랬듯이, 오늘날 우리도 선악과를 다반사로 따먹는다. 둘 모두 완전히 자유로운 선택을 하고, 그 결과 "두 사람의 눈이 밝아져서 자기들이 벗은 몸인 것을 발견한다." 자신들이 나체인 것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그들은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엮어서 몸을 가렸다"(7절). 우리도 이럴 때가 참 많다.

선택에 관한 진리는 무엇인가?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는 영화 <컨트롤러>(The Adjustment Bureau)와는 달리 인간의 선택에 관한 진리를 말한다. 인간이 뱀과 대화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인간의 선택은 언제든지 중요하고 지속적인 결과를 낳는다"는 점에서, 아담과 이브는 삶이 무엇과 같은지를 드러낸다. <컨트롤러>에서처럼 "신비한 사람들이 우리 삶의 이야기들을 조작한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말이다. 우리 인간은 저마다 자유로운 선택, 즉 우리를 하나님께 더 가까이 데려다 주거나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선택을 한다.

우리는 늘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우리 마음대로 타락할 수 있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벗어날 수도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인간을 불타는 나무로부터 어떻게 끄집어내시는가? 그것이 창세기의 제3막이다. 주님은 인간의 모습으로 그들에게 오시고 그들과 대화를 나누신다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를 에덴 동산에서 내쫓으시고, 출산의 고통과 밭의 식물을 경작하는 힘든 일로 얼룩진 삶 속으로 들이미신다(창 3:8-24절 참조). 다시 말해, 하나님은 그들을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의 삶 속으로 내모신다.

이 모든 것을 통하여, 우리의 창조주께서는 우리와 어떻게든 관계를 이어가기를 계속해서 원하신다. 때가 되면, 하나님은 나사렛 예수라는 인간의 모습으로 다시 우리에게 오신다. 그를 따르고, 그의 말씀을 신뢰하고, 그리고 그의 방식으로 살아가도록 예수는 우리를 부른다. 우리 인간은 그분과의 관계에서 떨어져 나가게 하는 선택들을 늘 하려고 한다는 것을 아시고서, 하나님은 보다 지속적이고 의미심장한 선택을 하신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하여 그분의 생명을 주시고, 이로써 그분이 우리와의 관계에서 과연 얼마나 멀리까지 갈 것인지를 보여주신다.

우리의 선택은 중요하다. 우리는 선하거나 악한 선택과 결정을 끊임없이 할 것이다. 그러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선택은, 그의 생명을 우리를 위해 내어줌으로써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회복시키려고 했던 예수의 결정이었다. 이것은 인간과 그들의 창조주 사이의 관계를 궁극적으로 틀짓는 위대한 결정이었다.

인간은 자유롭게 타락할 수 있다. 또한 인간은 자신을 다시 하나님께로 데려다주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유롭게 신뢰할 수도 있다. 자유의지를 가진 당신은 이 둘 중 어느 편을 선택하려는가?

<가능한 설교 주제들>
* 우리가 하는 몹시 중요하고 심지어 생사가 달린 선택들.
* 남자와 여자를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려고, 뱀은 "너희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는 진리를 어떻게 사용하는가?
* 우리의 실수나 잘못 때문에 우리의 삶 속의 중요한 실재들을 바라보는 눈이 열리는 때는 언제인가?
       
* 예화

+ 개나리

개나리가
창끝이 되어
내 동공으로 파고듭니다.

잠들지 말라고
깨어 있으라고
예수처럼 오고야 말
봄날을 위하여 예비하라고

후미진 울 밑으로부터
녹슨 공장 울타리를 타고 올라와
날카롭게 내 허기진 노동을 재촉합니다.

하품 나는 졸리운 삼월에.
(정세훈·시인, 1955-)

+ 원죄 - 선악과

사람이 올 때는 울면서 온다
황금빛 면류관 웃음으로 살다가
먼 길 떠날 땐
대성통곡 슬퍼서 간다 

눈물로 만나 
눈물로 이별하는 이유 
에덴동산 입안에 넣었던
탐욕 때문이다

이 넓은 과수원엔 선악나무 뿐
눈부신 그 과일
몰래 따먹고 살다
슬피 울며 가고 있네

아, 어리석은 사람아
바구니 속 가득 찬 그것
버리며, 비우며
살다 가자구나
(손희락·시인)

+ 마음

마음 바르게 서면
세상이 다 보인다
빨아서 풀먹인 모시 적삼같이
사물이 싱그럽다

마음이 욕망으로 일그러졌을 때
진실은 눈멀고
해와 달이 없는 벌판
세상은 캄캄해질 것이다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픈 욕망
무간지옥이 따로 있는가
권세와 명리와 재물을 좇는 자
세상은 그래서 피비린내가 난다
(박경리·소설가, 1926-2008)

+ 사자와 사람

배부른 사자는
사냥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은 먹이를 쌓아 놓고도
투망을 던진다

아직 굶주려 죽은 사자는
지상에 없다

그러나
가장 많이 아사한 동물은
인간이다

사자는
제 몫만 챙기면
나누어 갖도록 두지만

사람은
곳간을 만들어
먹이를 가두기 때문이다
(임보·시인, 1940-)

+ 자유

만인을 위해 내가 일할 때 나는 자유
땀 흘려 함께 일하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다라고 노래할 수 있으랴

만인을 위해 내가 싸울 때 나는 자유
피 흘려 함께 싸우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다라고 노래할 수 있으랴

만인을 위해 내가 몸부림칠 때 나는 자유
피와 땀과 눈물을 나누어 흘리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다라고 노래할 수 있으랴

사람들은 맨날
겉으로는 자유여 민주주의여 동포여 외쳐대면서도
속으로는 제 잇속만 차리고들 있으니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제 자신을 속이고서
도대체 무엇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제 자신을 속이고서
(김남주·시인)

+ 하나님과 걸음마

한 학생이 선생님에게 물었다. "왜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그분과 동행하는 삶을 살던 사람들이 때때로 좌절하고 하나님과 멀어지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까?"

그 질문에 선생님은 이렇게 설명했다. "어떤 아버지가 어린 아들에게 걸음마를 가르치려 한다고 하자. 그는 우선 아이를 자기 앞에 세우고, 아이가 넘어지지 않도록 두 팔로 아이의 몸 주위를 감싸겠지. 그러면 아이는 아버지의 두 팔 사이에서 조금씩 걷기 시작한다. 그러나 아이가 아버지에게로 다가오면 아버지는 약간 뒤로 물러나 계속해서 두 팔을 펼친다. 그렇게 계속하면 아이는 스스로 걷는 법을 배우게 되겠지. 우리가 하나님과 멀어졌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의 팔은 우리를 감싸고 계신 거야."

+ 인간에게 달려 있다

지상을 방문해서 인간의 모든 비극적인 잘못과 고통을 목격하고는 매우 놀라고 슬픔에 잠긴 한 마음씨 고운 천사에 관한 옛날 우화가 있다.

다시 하나님 앞에 선 천사는 왜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세상의 문제들을 시원스럽게 해결하지 않으시는지 물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요?"라고 천사는 탄원했다. 그러자 하나님이 대답하셨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벌써 그들에게 주었단다. 우리는 그들에게 불과 사랑을 주었어. 이제 모든 것은 그들에게 달려 있지."

+ 내 삶은 내가 선택하는 것

늘 행복한 스승이 있었다. 그는 늘 웃으며 살아 잠시도 불행한 기색이나 어두운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어느덧 스승이 나이 들어 임종을 맞게 되었다. 그런데 죽음 앞에서도 스승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예전부터 그런 모습을 궁금히 여기던 제자는 그제야 스승에게 물었다. "죽음을 앞두고서도 웃고만 계시니 무엇이 그리 즐거우십니까? 스승님도 틀림없이 언짢거나 슬픈 감정이 있으셨을 텐데, 어떻게 그런 모습을 한 번도 비치지 않으셨는지요?"

스승이 조용히 대답했다.  

"나는 열 일곱 살 때 스승을 처음 만났다. 그때 나는 이미 인생의 불행과 고통을 깨달아 늘 우울했지. 그런데 나의 스승은 늘 매사에 큰소리로 웃기만 하셨지. 스승의 그 모습이 이상하게 여겨져서 어느 날 스승께 여쭈었다. '스승이시여, 왜 항상 웃기만 하시는지요?' 스승은 또 잠자코 웃기만 하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시더구나. '전에는 나도 너처럼 불행에 짓눌려 살았다. 그런데 하루는 내 삶은 내가 선택하는 것이라  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날 이후 아침에 눈뜰 때마다 나 자신에게 물었다. 자, 오늘은 어떤  삶을 선택하겠느냐? 불행이냐, 행복이냐?'"

+ 선택과 버릇

녹슨 건전지나 너무 오래 쓰지 않아서 위축된 근육처럼, 우리의 잠재력 대부분이 한번도 사용되지 않은 까닭에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자기한테 선택권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해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선택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그래도 선택행위는 일상생활에서 우리에게 많은 유익을 준다. 한 가지 선택으로 생활의 사소한 부분들에 변화를 줄 수 있는가 하면 그냥 지금까지와 다르게 선택하는 것 하나로 전체 생활양식을 바꿀 수도 있다. 상황과 사람들에게 좀더 효과적으로 대처하도록 우리 자신을 가르칠 수도 있다. 실제로, 자기가 무엇을 선택하는지 알고 있으면, 그리고 바라는 마음이 충분하게 강하면, 그러면 우리는 우리가 하고 있는 거의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다.

이를 위해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주어진 모든 순간마다 자신이 선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자기가 한 선택의 결과가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점도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선택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들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는 선택할 수 있다. 우리에게는 곤경을 견디고 장애를 극복할 능력이 주어져 있다. 우리에게는 자유의지가 있고, 무엇을 선택할 자유와 힘이 있다. 그런 까닭에 힘든 상황을 딛고 올라설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우연으로 살도록 설계되지 않았다. 우리는 선택으로 살도록 설계되었다.
(할 어반, 『삶의 가장 위대한 교훈들』)

+ 진정한 자유   
  
나치에 대한 저항운동을 벌였던 독일의 신학자 본회퍼는 1943년 나치의 비밀경찰에 체포되어 2년 동안 수감생활을 하다 1945년 5월 사형집행을 당했다. 그는 진정한 자유는 불의와 타협한 안일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정의를 위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에 있음을 알았다. 그는 죽기 전에 말했다. "크리스천은 기도하면서 옳은 일을 행하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한다. 크리스천은 아무리 어려운 처지에 있더라도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남이 하지 않는 일을 한다는 것은 두렵고 떨림으로 다가온다. 누군가 해야 하는 일이지만, 그 일을 했을 때 핍박이 기다리고 있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특히 하나님의 뜻이 핍박을 당하는 일에 참여하는 것일 때, 우리 신앙인들은 결단하며 나아가야 한다. 그런데 핍박을 두려워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라 쉽게 그 길을 가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을 마음의 중심에 모시고 늘 그분과 대화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그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를 얻게 하실 힘을 더하여 주신다.

우리는 어떤 일을 하기에 앞서 주님과 대화하며 그분의 힘을 빌어 일을 추진해야 한다. 

+ 욕심의 결과

덴마크 출신의 동화 작가 안데르센의 「분홍신」이란 동화에 나오는 이야기다.

한 소녀가 마술사가 만든 분홍신이 몹시 갖고 싶었다. 그녀는 안달을 떨다가 마침내 그 분홍신을 손에 넣게 되었다. 그러나 소녀가 분홍신을 신는 순간부터 예상치 못했던 불행이 찾아왔다. 

그 분홍신을 신기만 하면 멈추지 않고 춤을 추어야 했다. 춤은 그칠래야 그칠 수 없이 계속되었다. 어떤 때는 많은 사람들의 박수갈채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였고 또다시 다른 곳으로 돌아다니며 계속 춤을 추어야 했다.

춤을 멈추고 집으로 들어가려고 애써도, 이제 좀 쉬어 보려고 해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그녀는 제 마음대로 못하고 분홍신에게 끌려 다녀야 했다. 결국 소녀는 분홍신을 신고 쉴새없이 춤을 추다가 지쳐서 쓰러져 죽었다.

사람은 반드시 뭔가에 이끌려 살게 되어 있다. "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들은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고,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영적인 것에 마음을 씁니다"(로마서 8:5). 그것이 육체적인 것이든 영적인 것이든, 선택은 각 사람 자신이 하는 것이다.

세상의 겉으로 보기에는 좋은 것도 일단 손에 넣으면 늘 우리의 주인 노릇을 한다. 그래서 사람은 그것에 끌려 다니며 살게 되어 있다. 이것이 세상의 원리다.

우리는 창조의 원리를 따라 하나님의 영에 이끌려 살아야 옳다. 성령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그 하나님을 우리 삶의 중심에 모실 때, 우리의 삶은 거룩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띤다.

+ 나침반이 여기 있습니다

어느 대학교 졸업식에서 한 노교수가 사회로 진출하는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물었다. “이제 위험한 바다에 배를 띄워 항해를 떠난다는 것을 자네들은 알겠나?” 학생들은 모두 숙연해졌다.

졸업식이 끝난 뒤에 한 학생이 교수님을 찾아와서 말했다. "위험한 바다를 향해 출발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교수님, 너무 걱정하지는 마십시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성경책을 꺼내더니 말했다. "위험한 바다를 항해하는 데에 필요한 나침반이 여기 있습니다."

+ 하나님을 신뢰하라

속박의 종교는 항상 자기를 높인다. 나의 노력, 나의 투쟁, 나의 신실성을 내세운다. 그러나 자유의 종교는 자신에게는 아무런 자랑거리가 없으며 모두 그리스도께서 이루시고 그리스도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어린아이는 자기를 자랑하지 않고 아버지와 어머니를 자랑하듯이 우리의 영혼도 자유의 생활에서 주님을 자랑하게 된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우리의 모든 필요를 충분히 공급하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당연히 그분의 상속자다.

나에게는 일찍이 한 친구가 있었다. 기독교인으로서 그녀의 삶은 곧 속박의 삶이었다. 그녀는 노예가 자유를 얻기 위해 일하는 것보다 훨씬 더 열심히 구원을 얻으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그녀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온갖 크고 작은 일들과 씨름하며 여러 가지 일들을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녀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유혹들과 싸워 이기지 못하면 그 날 하루가 무의미하게 흘러가 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느 날 신앙생활의 고충과 속박에 대해 나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녀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문제의 해결책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한나 W. 스미스, 『그리스도인의 행복한 삶의 비결』)

+ 하나님의 잘못이 아니다

나와 똑같이 육상 10종 경기 선수인 친구가 있다. 그는 매우 독실한 기독교인이다. 그는 경기 종목 중 하나인 투원반 던지기에서 뜻밖의 실수를 했다. 경기가 끝난 후 그는 내게로 다가와서 울먹이며 말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었어." 하지만 그 말에 대한 나의 첫 번째 반응은 투원반의 원 밖으로 나간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매사에 '하나님의 뜻'이라는 수식어를 갖다 붙이는 데에는 뭔가 훌륭한 점이 있다. 그러나 당신은 기도의 권능을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당신 자신의 삶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한다. 나는 설령 경기를 망쳤어도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일 투원반을 힘차게 던지려다가 실수로 원 밖으로 나갔다면, 나는 그 책임을 내 자신에게 돌렸을 것이다. 내가 세 차례나 계속해서 파울을 범해 실격 처리가 된다 해도, 그것은 하나님의 잘못이 아니다. 투원반을 던지고 있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브루스 제너·올림픽 투원반 선수)    

+하나님의 책임, 인간의 책임

한 아랍 속담에서는 신자들에게 "알라를 신뢰하라. 하지만 너의 낙타를 메라"고 훈계한다. 이 짧은 속담에는 신에 대한 신뢰에 못지 않게 인간 자신의 주체적인 역할도 중요하다는 날카로운 통찰력이 담겨 있다.

매주 매달 "제발, 하나님, 내가 복권에 당첨되게 해주세요"라고 열렬히 기도했던 한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또 있다. 마침내 그는 밤의 고요한 묵상 속에서 저 높은 곳으로부터 속삭이는 한 답변을 들었다. "그렇게도 복권에 당첨이 되고 싶으면 먼저 복권 한 장을 사라."

이 외견상 세속적인 조언은 거룩한 의미를 담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활동과 세상 속에서의 인간의 활동 사이의 관계라는 매우 중요한 쟁점에 대한 우리의 주의를 환기시키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책임은 무엇이고 인간의 책임은 무엇이며, 그리고 이것들은 어디에서 어떻게 교차하고 겹치고 혹은 차이가 나는 걸까?
(조셉 M 인칸델라, 『하나님 놀이: 하나님의 활동, 인간의 활동, 그리고 기독교 윤리』)  

+규칙에 충실한 삶

인간 존재로서의 우리의 삶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이런저런 규칙에 종속되어 있다. 신체 건강을 잘 유지하려면 규칙적인 수면 시간, 규칙적인 식사, 신체 운동과 오락과 일을 위한 규칙적인 시간이 필수적이다. "자신의 습관에 있어서 비규칙적인" 사람은 조만간 불행을 당하게 될 것이다. 질서 있는 생활 규칙은 신체적 복지를 위해 우리에게 꼭 필요하다.

더욱이, 사업이나 전문 기술, 혹은 예술에 있어서의 성공은 한 사람이 자신을 보통은 오랜 시간 동안 하나의 규칙, 즉 하나의 생활계획에 종속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한 사업가는 모든 영업일에 자기 사무실에 반드시 출근해야 한다. 그는 기분이 내킬 때만 사무실에 모습을 드러내면 안 된다. 만일 그렇게 행동한다면, 그는 자신의 일에 장시간 계속해서 머물러 있지 못할 것이다. 피아노를 성공적으로 배우려는 소년 소녀는 베토벤의 소나타 한 곡을 연주하는 기쁨을 알기까지 반드시 규칙적으로 오랜 시간 자신의 피곤한 다섯 손가락으로 피눈물나는 연습을 해야 한다. 여러 운동에 있어서의 기술 습득은 장시간에 걸친 혹독한 훈련이 필요하다. 한 대학의 축구팀의 일원이 되고자 하는 사람이 축구 경기를 완전히 습득하기를 기대한다면, 그는 주의 깊게 조절된 휴식 시간과 엄격한 식사를 동반한 힘든 훈련 과정을 통과해야 한다. 만일 건강과 능력과 성공을 추구한다면, 규칙성과 자기 훈련이 이런저런 형태로 인간 생활의 모든 부분들을 다스려야 한다. 이 보편적인 규칙과 훈련의 필요성이 무시되거나 심지어 멸시당하는 것을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오직 우리가 인간의 종교적이며 영적인 삶에 가닿을 때뿐이다.
(그랜빌 머서 윌리암즈, 『삶의 한 규칙으로서의 자기 훈련을 향하여』)      

* 예배 자료

+ 예배에의 부름

기쁨의 영이시여 오소서 
아버지 하느님,
당신의 성령을 저희에게 보내소서.
저희가 기쁨 속에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저희 위에 당신의 성령을 보내시어
기쁨을 지니고 봉사하면서, 용서하면서,
겸손하게, 그리고 평화롭게
당신에 대해 모두에게 말할 수 있도록
힘을 북돋아 주십시오.
이 사순절 절기를 기도와 회개로 살아가도록,
특히 사랑하며 봉사하려는 마음으로 살아가도록
은총을 주십시오.
(작자 미상, '당신의 성령을 저희에게 보내소서')

+ 봄 햇살 같은 축복을 청하며

풍성한 은혜를 베푸시는 주님,
주님의 보살핌이 없다면
저희는 단 한순간도 살아갈 수 없나이다.
주님께서 내려주시는 비와 바람, 햇빛으로
만물은 아름다운 결실을 맺습니다.
이와 같이 저희한테도 축복을 내려주소서.
자연의 축복 속에서
땀 흘려 일하는 성실한 사람이
마땅한 열매를 수확하듯이
저희한테도 봄 햇살을 내려주시어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게 하소서.
당신의 따사로운 손길 안에서
믿음을 키우고 서로 사랑하게 하소서. 
(이재희, 『엄마의 기도수첩』 중에 새 영세자를 위한 기도)

+ 3월의 기도

날마다 부르는 노래에
천사의 날개를 달고
잔잔히 흐르는 언어의 무대는
입술이 아니고 마음이게 하소서.

오랜 벗이 아니어도
반가운 표현을 할 줄 알고
미소 띤 얼굴에
마음의 향내가 풍기는 행복을 알게 하소서.

꽃이 있어 나비가 되고
벌이 있어 꿀이 되는
아름다운 이치를 깨달아
인연의 소중함을 따뜻이 안고 살게 하소서.

검은색이 싫다고
타인의 실수를 질책하기보다
하얀색을 좋아하는 자신의 착오로
오늘과 내일을 비교치 말게 하소서.
(안성란·시인)

+ 福 동이 - 시편 1편
 
福 동이가 살아가면서
나쁜 사람의 생각 따라 살지 않으며
아예 잘못된 사람의 길을 가지 않고
나쁜 일을 계획하는 모임에 참석하지 않고
건방진 사람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오로지 당신의 규율과 법치대로
사는 것을 즐거워하며, 밤낮으로
당신이 지시하는 법칙을 되새기며 살겠습니다.

福 동이는 순종하며
당신이 원하시는 삶을 살려고
시냇가에 나뭇가지 푸른 잎처럼
그 잎사귀가 시들지 아니하고
계절에 따라 열매가 주렁주렁 맺힙니다.
그러나 안 풀리는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마치 바람에 까불리는 겨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당신께서 심판하실 때 얼굴을 들 수 없고
福 동이의 그 모임에 얼씬거리지 못했습니다.
그렇습니다. 福 동이의 길은 당신께서 인정하시지만
끝까지 죄를 지고 가는 사람의 길은 안 풀립니다.
福 동이는 좋은 사람과 함께 손을 잡고
당신께서 인도하시는 길을 따라가겠습니다.
(조동천·시인)

+ 헌신에 대한 묵상기도

손이 있어 손짓을 합니다.
발이 있어 걸음 걸어갑니다.

두 손이 있습니다.
한 손은 얻는데 쓰고
한 손은 바치는데 쓰고
바치지 않으면 얻을 수 없습니다.
얻지 못하면 바칠 수도 없습니다.

두 발이 있습니다.
한 발은 가는 데 쓰고
한 발은 머무는 데 쓰고
머무르지 않으면 갈 곳이 없습니다.
가지 않으면 머무를 곳도 없습니다.

손짓도 하고
걸음 걸어 나가기도 하고
그렇게 손과 발의 뜻에 따라
오늘도 한 손과 또 다른 손의 뜻을 생각합니다.
오늘도 한 발과 또 다른 발의 뜻을 생각합니다.

저는 사람의 길을 가고 싶습니다.
그렇게 저는 사람을 사랑하고 싶습니다.
사람이 사람으로 태어나 할 짓이라 여겨서입니다.
그렇게 여겨져서입니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그저 그렇게 살아가 보렵니다.
(김형효·시인, '손과 발의 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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