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이제 살만해지니

 (2010년 12월 16일)

질병이 들어 몸이 아플 때 육신의 고통보다도 더 아프게 하는 것들은 친숙했던 관계들과 서서히 멀어지는 점들이다. 직장에서 물러나게 되고, 친한 벗들을 맘대로 만날 수 없게 되고, 좋아하는 음식을 마음대로 먹을 수 없거나 취미생활을 할 수 없게 되는 점들이다. 더욱 마음 아프게 하는 것은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하거나 소외당할 때이다.  

그는 풍이 걸려 힘든 가운데도 몸부림치며 열심히 살려고 애썼지만, 정작 그의 살고자 하는 열정과는 반대로 그의 미래는 점점 어두워 가고 있었다. 몇 년 전에 선교자립을 시킨다고 후원기관에서 논 20만 헥타를 마련해 준 후 농사를 짓기 시작하여 이제 겨우 자립 단계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동안 선교 다녔던 산속 부족마을에도 가난하여 학교에 못 가는 어린이들을 위하여 건축 중이던 학교가 완공을 하고 학생을 수용하기 위하여 학기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이제 살만하게 되었다. 이만하면 경제적으로도 자립할 수 있고, 사회적으로도 보람을 느끼며 여생을 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부푼 기대감을 갖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갑자기 풍이 들어 고생을 하게 되니 그를 도우려는 손길 보다는 오히려 그도 모르는 사이에 그를 후원하는 후원단체들이 서서히 그와의 단절을 진행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 맛다라 농장

버젓이 아직 사람이 살아있고, 이제 회복이 되어 몸이 거의 정상인처럼 되어 가는데 이 사실도 모르고 그를 파송한 교회에서는 발 빠르게 후속인사를 단행하였다. 그에게는 한국에서 그를 도울 부목사를 보낼 테니 몸조리나 편하게 잘 하라고 하여 그런 줄 알고 사람을 받고 보니 부목사로 온 게 아니고 후임자로 왔다는 것이다. 부임한 첫날부터 아들 같이 나이어린 사람이 주인행세를 하고 후임자 역할을 하며 모든 영농업무를 인계 받고 20헥타의 논을 모두 자기가 경작하겠다고! 그리고 산속에 건립한 학교는 또 다른 선교사가 맡기로 했다고! 그뿐만 아니라 한국에서 보내오는 월급도 후임자로 온 젊은 목사의 통장으로 와서 매월 그에게 타서 쓰는 입장이다. 20년 동안 땀 흘려 일구어 논 선교현장을 온지 얼마 안 되는 젊은 목사가 자기 맘대로 좌지우지 하니 얼마나 기가 막히고 통탄할 일인가! 이런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을 경우 충격으로 인해 병세가 더욱 악화될 수도 있고, 고혈압 환자일 경우 쓰러져 사망할 위험성도 있다. 이런 처사는 빨리 죽으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의학적으로 매우 무지몽매한 인사결정이며 성서적으로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제 겨우 4살, 2살, 1개월 된 어린 딸을 셋이나 둔 중풍 맞은 늙은이가 재산도 직장도 집도 없이 쫓겨나면 어떻게 살란 말인가! 나에게 닥친 일처럼 격앙된 음성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흥분하여 화를 내니 오히려 그의 눈빛에서는 그동안 맺혔던 한이 좀 풀어지는 듯 하는 느낌이다. 이 억울하고 분한 분의 상한 심령을 돌보라고 부족한 나를 하나님께서 이 멀리까지 보내셨는가 보다. 20년 전에 기후도 맞지 않는 뜨거운 아열대의 나라에 와서 수많은 고생을 하며 선교사역을 하다 이렇게 낙오자가 된다면 너무 억울하고 불쌍한 일이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그에게 힘을 좀 실어 주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그는 마침 침과 뜸을 체험하고 그것의 효과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1년 전 나를 처음 만나고부터 매일 부인에게 뜸을 받을 뿐만 아니라 요즈음은 중의학에 관한 공부까지 하고 싶어서 내가 오자마자 책을 복사하여 배우려고 열심이다. 금방 배울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가 여러 권의 두꺼운 책을 보고는 질리는 눈치다. 그를 격려하였다. 공부는 평생 해야 되는 것이니 갑자기 다 하려고 생각하지 마시라. 경락경혈학 해부학 진단학 처방학 등 중의학 전반을 공부하려면 많은 시간이 걸리나, 건강을 위한 기본 보양뜸 12자리 정도는 쉽게 배울 수 있고 남들에게 해 줄 수도 있다고 격려하였다. 당신이 체험해서 알다시피 특별히 심한 질병이 아니면 보양뜸 자리 정도로 환자들의 건강을 도울 수 있으니 열심히 배우시라고 격려하였다. 그리고 앞으로 남은 인생 산속 부족마을을 다니며 기도해 주고 아픈 이들을 돌보아 주면 그들이 매우 좋아할 것이라고!  

그 말을 듣자 이제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일이 없고, 할 수도 없을 것이라고 스스로 비관하고 절망가운데 빠졌던 그가 새로운 희망을 갖는 모습이 엿보인다. 나의 말 대로 그렇게 하겠다며 너무 행복해 하고 좋아한다. 전에 복음 전하러 다니던 곳에 가서 그들의 건강까지 돌보아 준다면 정말로 너무 좋아할 것이라며 조금 전까지만 해도 좌절하고 어둡던 얼굴모습은 간데없고 새로운 희망으로 부풀어 있다. 할 일없는 사람에게 일이 주어진 다는 것은 새로운 희망이다. 경제적 수익이 있고 없고는 나중일이다.  

살아있는 사람은 누구나 인생의 목표와 꿈이 있다. 사람에게서 목표와 꿈을 빼앗아 버리는 행위는 정신적으로 처형하는 행위이다. 정년퇴임을 하고 우울증에 빠지던가 일찍 돌아가시는 분들은 퇴임 후 새로운 목표와 비전을 찾지 못하고 무료한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다. 삶에 바쁘고 즐겁게 살다 보면 들어왔던 가벼운 질병들은 슬며시 사라지게 된다. 열심히 사는 모습은 아름다운 모습이다. 좌절과 실망에 빠져있던 그에게 이제 새로운 소망의 비전이 생겨날 것이다. 그동안 벼농사, 망고농사 짓느라고 바빴던 그에게 이제 새로운 일거리가 생길 것이다. 그동안 농부처럼 산 인생이 이제 지금부터는 정말 선교사처럼 사는 인생이 될 것이다. 산속 야자수 숲속을 살피고 다니며 질병과 가난에 허덕이는 원주민들을 위해 보람 있는 인생이 전개될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보다도 앞으로 남은 인생이 더욱 보람되고 멋질 것이다.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했듯이, 그를 다시 살려내면 그를 통해 수천 명의 망얀족 원주민들이 영적 활기를 회복하게 될 것이다. 절망의 수렁에서 시달리고 있는 그를 먼저 건져내자. 그를 계속 격려하고 도울 수 있는데 까지 돕자. 무엇보다 여기서 지내는 동안 편한 관계를 유지하자. 아주 편한 관계! 아담과 하와가 벌거벗었으나 서로 부끄러운 줄을 모른 것처럼 그런 편한 관계를 이루자. 지금까지 돈뭉치를 들고 찾아 온 후원자들은 모두가 감사하고 고마운 분들이었지만, 너무 어렵고 높으시며 불편한 손님들이었다. 친구처럼 지낼 수 있는 분들이 아니었다. 그런 손님이 되지 말자. 똑 같은 입장으로 살자. 가능하다면 그가 하고 싶은 행동 모두 자유스럽게 하도록 터놓고 지내자. 그의 삶과 생각과 인격을 존중하며 전인 인간관계를 이루자. 반드시 병원에 가서 수술을 받던가 약을 먹는 것만이 치료가 아니다. 인간 육체의 구성은 몸과 마음과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다. 마음이 평안하면 몸의 질병을 치료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마음과 몸은 유기적인 관계에 있다. 마음 따로 몸 따로 있는 게 아니다. 마음이 상하면 몸이 상하고 몸이 상하면 마음이 상한다. 환자와의 진정한 마음과 정신의 교류를 통하여 환자가 원만한 인관관계 속에서 스스로 성취감을 가지며 살도록 유도할 때 더 큰 치료효과를 가져 올 수 있다.  

진정한 치료를 위해서는 그의 몫도 있다. 그도 이제 마음을 바꾸어야 된다. 더 이상 좌절과 실망 속에서 허우적거리지 말고 털고 일어서야 한다. 그 방법은 용서이다. 용서해야 한다. 치유의 근본적인 힘은 용서에서 온다. 용서는 남이 해 줄 수 없다. 자신이 스스로 해야 한다. 자기를 용서하고, 마음을 상하게 한 후원자들을 용서하고, 지난날을 용서하고, 현재의 마땅치 않은 자기 모습을 용서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용서하기 위해서 좁고 작은 자아(ego)에서 벗어나 자기보다 더 큰 존재와 함께 해야 한다. 더 큰 존재와의 관계 속에서, 우리는 나를 용서하고 이웃을 용서할 수 있으며, 지나간 날들과 현재의 초라한 나까지 용서할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속상했던 것은, 우리 관심을 우리의 보잘 것 없는 자아에게 집중했을 때였는데 우리 삶에는 그것을 뛰어넘는 더 큰 차원이 있으며, 그것은 눈에 보이는 유한하고 물질적인 것들로 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우리에게 잘못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도 그들의 인간적인 한계 때문에 그랬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런 깨달음을 얻을 때, 우리 내면에서는 새로운 존재가 탄생하게 된다. 그 전까지 나를 형성하고 있던 자아를 뛰어넘는 내가 새롭게 드러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용서하지 않으면, 다른 이들이 우리에게 저지른 악행들이 지워지지 않고 불현듯 고통스러운 기억으로 되살아나면서, 그것은 원한이 돼 버리고 만다. 원한을 가지게 된 원인이 실제적이든 상상에 의한 것이든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일단 원한이 생기면 원한은 서서히 우리 자신을 삼켜 버리고, 우리 주변의 모든 것까지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 말 것이다. 

우리 주변 곳곳에서, 쓴 뿌리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은 놀라울 정도로 세세하게 과거의 일들을 기억한 채, 자기 연민과 분노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당한 모든 억울한 일들을 샅샅이 기억하고 있으며, 틈만 있으면 주위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입은 상처가 얼마나 큰지 넋두리를 늘어놓는다. 겉으로는 안정되고 침착한 듯이 보이기도 하지만, 이들의 내면은 억눌린 증오로 들끓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신들의 분노에 대해 변명을 늘어놓기 마련이다. 자기들은 너무 깊이, 그리고 너무 많이 상처를 입었기 때문에 용서해야 할 사람에서 제외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 누구보다도 용서가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런 사람들이다. 이들의 마음은 깊은 증오심으로 가득 차서 사랑이 파고 들어갈 자리가 없는 것이다.  

용서하면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치유 받게 된다. 그것이 복음서를 통하여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치유방법이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 ”(요한복음 8:1-11)

                                                        자료제공 : 아시아미션(http://www.amccms.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