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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목회세미나⑤] 하나님과 나의 목회 2 / 여성 하나님, 임보라 목사‘하느님은 과연 누구신가?’ 라는 질문
방현섭  |  racer6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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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1년 02월 15일 (화) 13:09:41
최종편집 : 2011년 02월 15일 (화) 13:23:28 [조회수 : 4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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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재 목사의 목회 이야기에 이어 향린교회 임보라 목사가 '하나님과 나의 목회' 이야기가 이어졌다. 임보라 목사의 이야기 요약이다.

원래는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가톨릭교회에 다녔었다. 십대도 되기 전에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찾은 성당에서 느낀 하나님에 대한 느낌은 '하나님은 참 고약한 분이시네요' 였다. 십대에는 딸 만 있는 친구의 집에서 집에 데리고 와서 키우던 사내아이를 보게 되었는데 말할 수 없이 부산하고 시끄러웠던 사내아이에 대해 그 친구의 어머니가 '하나님이 참고 사랑하라고 하셨으니까 참아야지' 하고 말하는 것을 듣게 되었다. 그때도 하나님은 여전히 고약한 분처럼 여겨졌다. 십대 후반에 교회에 빠진 사람에게 신실하지 못하다고 몰아붙이는 것을 보면서 역시 하나님은 참 쫀쫀하신 분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러던 후에 그동안 알고 있던 모든 것이 진실은 아니라는 것을 대학생활을 하면서 알게 되었고 신에 대한 생각도 조금씩 바뀌게 되었고 기장교회에 나가게도 되었다. 20대에 만난 하나님은 안개가 자욱한 곳을 헤쳐 가며 만난 분이다.

하나님에 대한 실존적인 고백이 없다면 모든 것이 꼬이게 된다. 하나님에 대해서 꼬치꼬치 캐묻는 사람과 전화로 상담을 하게 되었는데 나중에 그 사람은 무슨 목사가 그렇게 대답하느냐고 화를 내며 끊었다. 그 경험을 하면서 믿음이 교리에 과도하게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새삼스레 생각하게 되었다. 교리와 신조와의 전면적 대결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교리가 그렇다. 교회에서는 하나님 아버지라는 말을 자주 반복적으로 사용한다. 그러나 아버지라는 가부장적인 개념을 넘어서는 하나님이 되어야 한다. 또 사랑의 범주를 규정하고 그 규정에서 벗어나는 것을 죄인으로 규정하는 것도 성차별적인 요소가 있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고 본다.

이런 인식으로부터 나의 목회가 출발한다. 우선 현장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다. 현장성에 대한 갈급함이 나를 향린교회에 오게 되었다. 향린에서의 생활은 내가 향린을 잘 몰랐었다는 생각과 가부장적인 면이 있어 실망을 하게도 하였지만 여전히 현장을 붙잡고 놓지 않는 교회로서의 중요한 상징성이 있고 여기에 함께 할 수 있어 기쁘다. 하나님은 종종 작은 농성장 한 구석에서 나를 만나주신다.

두 번째로는 여성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다.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남성 하나님을 너무나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만 여성 하나님에 대한 관점도 받아들여야 한다. 성서연구반을 운영하면서 남녀 사이에 가부장적 관점 때문에 힘든 경험도 많았다. 그러나 10여주를 지나면서 결국은 끈끈한 정이 생기는 것을 보게 된다. 여성 하나님도 교회 안에서 진지하게 고백되어야 한다.

세 번째로 퀴어 하나님이다. 전통적인 사고방식으로 인해 벽장 속에 갇혀 있는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다. 동성애자 같은 경우가 그렇다. 퀴어 하나님은 여성보다 더 포괄적인 개념이다. 하나님의 성성을 거세하고 무성으로 몰아가는 것은 중지되어야 한다. 대부분은 스스로를 이성애자라고 자부하지만 성적 정체성은 감춰져 있을 뿐 100%는 확실하지는 않다. 성소수자들과 기독교의 관계는 꼬일 대로 꼬여있다. 이 문제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보자는 시도에 지속적으로 반대하는 것이 기독교이다. '차별 없는 세상을 위한 기독인 연대'를 결성해 활동하고 있다. 하나님을 빙자하고 성경을 빙자해서 차별을 만들어가는 일이 교회 안에서 얼마나 비일비재 한지 모르겠다.

차별하지 않는 하나님, 자기의 모든 것을 바쳐 끌어안으시는 하나님을 고백하며 그런 하나님을 따르려고 하고 있다.


1. 열면서

 

‘하느님은 과연 누구신가?’ 라는 질문은 늘 새로운 전율을 느끼게 한다. 내가 믿는 하느님과 저이들이 고백하는 하느님이 같은 하느님이라고 하기에는 말이 안 된다고 여겨질 때, 내가 따르고자 애쓰는 예수의 삶과 저이들이 영접하라고 외치는 예수의 모습이 생경하게 다가올 때, 내게 끊임없는 용기를 북돋워주는 성령의 기운과 저이들이 받으라고 외치는 성령이 서로 상극관계라고 여겨질 때, 나는 묻고 또 묻는다. ‘하느님, 당신은 누구이십니까?’

지금-여기에 있는 나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지나온 삶 속에서 내가 만난 하느님을 풀어놓으며 시작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2. 하느님 당신은 누구이십니까?

 

- 10대에 만난 하느님

“하느님을 믿을 수가 없어요. 하느님, 당신은 고약한 분 같아요!”

“쫀쫀한 하느님!”

 

- 20대에 만난 하느님

“안개가 자욱한 곳을 헤쳐 가며 만난 하느님”

 

3. 하느님, 당신은 교리 안에 갇힌 분이 아니시지요?

 

공개적인 자리에서 하는 발제임에도 불구하고, 실존적인 고백으로 이어지는 목회의 현장까지 이야기로 풀어내려다 보니, 지난 날 내가 애타게 매달렸던 하느님을 처음부터 거슬러 올라가게 되었다. 몇 해 전, 점잖은 목소리의 60대 초반 남성으로 여겨지는 분이 전화를 걸어와 내가 믿는 하느님을 ‘이리저리’ 탐색하더니만, 결국 나를 향해 ‘안수는 제대로 받긴 받은 거요?’하며 왈칵 화를 내던 것이 떠오른다. 내게 영화를 만들 기회가 생긴다면, 으르렁 거리다 전화를 일방적으로 끊어 버리는 바람에 어이없어 하던 내 표정을 담아 클로우즈 업 하면서, 거기에 이어지는 장면으로 대대로 내려오고 있는 신조와 교리의 내용들을 긁어내려 오듯 잡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3-1.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사도신조) / ‘우리는 한 분이신 성부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분은 전능하셔서, 하늘과 땅과, 이 세상의 보이고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지으셨습니다.’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조) / ‘성서가 증언하고 그리스도 교회가 계속 믿어온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시요, 우리의 아버지시며 자신을 먼저 계시하신 분이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창조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거룩하신 아버지로 나타나셨고~’ (한국기독교장로회 신앙고백)  

3-2. ‘하나님은 사람을 자기의 형상대로 만드시고 그의 지혜와 그에게 응답하는 인격을 주셨다. 모든 창조물과 함께 인간은 창조주를 찬양하고 그를 즐기며 이웃과 더불어 사랑하게 하셨다.~일남일녀를 결합시켜 공동체를 이루어 생을 즐겁고 풍부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의 축복이다~인간이 이성의 상대자와 사랑의 사귐을 위하여 가지는 성(性)은 생의 의미와 창조의 기적을 발휘하는 귀중한 특성이다. 그러므로 성을 오용하거나 남용하여 불행을 초래하지 말고 그리스도 신앙으로 그 질서를 지켜야 한다.’ (한국기독교장로회 신앙고백서)

 

4. 지금-여기를 사는 나의 하느님 고백과 목회 현장  

4-1. 현장에 함께 하시는 하느님.  

4-2. 여성 하느님.  

4-3. 퀴어 하느님.  

 

5. 나가면서

 

올해 예수 목회 세미나의 초대의 글 중, 가슴 깊이 와 닿았던 부분은 다양한 차별을 자행하는 집단으로 ‘기독교인들의 교회집단’을 지목한 대목이다. 그것도 ‘하느님의 이름을 빙자해서’말이다. 하느님의 이름을 앞세우면서 직간접 살인을 대놓고 하는 집단은 우리와는 정녕 전혀 상관없는 집단인가? 방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아니 아예 한발 담그고 있을런지도?

무엇으로 보수/진보를 나눌 수 있는가에 대한 논쟁은 계속 되고 있지만, 그야말로 보수/진보로 나눈다는 것이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도드라지는 지점이 ‘여성’, ‘성 소수자’문제 이다. 내 자신이 깊게 관여되어 있는 이슈이기 때문에 더 ‘민감성’이 발동되는 탓도 있겠지만, 입으로는 ‘성 평등’, ‘동성애자 인권’을 말하지만, 이것이 미처 체득되지 못했을 때의 현상을 주변에서 곧잘 만나게 된다. 마치 이 시대의 트랜드이니 이 정도는 따라 잡아줘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식의 발상에서 출발하다 보니, ‘차라리 말이나 하지 말지’라고 느끼게 되는 경우가 왕왕 있다. 그러한 불편함이 느껴질 때마다 ‘쌈닭’이 되어야 할 것인지, ‘우아한 연대감’으로 그 상황을 넘겨야 하는지 헷갈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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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빛 (24.141.4.52)
2013-01-23 15:00:30
임보라 목사님. 우리나라에서도 여성 대통령이 당선되었듯이, 한국 기독교 내에서도 여성 지도자들이 많이 나와서 여성들도 남성들 못지 않게 훌륭한 목회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실증하여 주시기를 기대합니다. 요즈음은 여성이 앞서 나아가는 세상입니다. 절대 꿀리지 마시고 꿋꿋이요...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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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로 가는 샛강 (180.182.135.173)
2011-02-15 22:07:05
당당뉴스에 오면 많은 부분 도전받는다. 자기 안에 갇혀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시각과 청각을 일면 열어줌에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진보적 매체라는 것이 또 다른 교회내의 파벌 형성을 이루는 것에 늘 안타깝게 생각한다. 예수 그리스도께 동화되었던 당시의 사람들도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는 진보 혹은 보수였으나 예수로 인해 진보도 보수도 아닌 오직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는데, 오늘의 교회는 좀 개혁을 외치고 교회가 바로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사람이라기보다는 인간적인 자기 색깔이 너무 강해 안타깝다. 왜냐하면, 나같은 사람은 그 안에 끼어들기가 거북스럽다.
아버지 하나님이 가부장적 사고라 하여 어머니 하나님을 찾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히브리적 사고에서나 성경을 잘 살펴보면, 이미 어머니 하나님을 우리에게 알려주시고 있다. 어머니 하나님이 바로 성령이시다. 히브리인들은 지금도 성령 하나님을 어머니 하나님으로 인식한다. 예를 들어 어머니가 밖에 나갔다가 들어오시면 '성령님이 오신다'라고 말한다. 이미 삼위일체 안에는 아버지 하나님과 어머니 하나님의 모습을 나타내보이시고 있다. 이렇게 하나님의 모습을 잘 알려주시고 있는데, 굳이 아버지 하나님을 가부장적 개념으로 이해하고 어머니 하나님을 찾는 것은 무리라 싶다. 그리고 아버지라는 개념을 단지 남성과 여성의 차원에서 이해하는 것도 무리라고 생각한다. 아버지라는 표현은 가부장적이거나 남성과 여성의 성개념인 차원이라기보다는 '낳은 자'혹은 '근원이신 자'라는 의미가 크다. '아버지'에 대한 인간의 해석이 문제이지, 용어 자체를 문제삼는 것은 오히려 성서를 오해하는 것이라 여겨진다.
우리의 인간적 시선이 오히려 하나님의 참 모습을 가리는 것이 아닌지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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