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럼 > 류상태칼럼
구약성서에 나타난 다원주의요나서를 중심으로
류상태  |  shalom77@chol.net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입력 : 2006년 01월 11일 (수) 00:00:00 [조회수 : 2605]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텔레그램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
   
우리나라 기독교인들은 대체로 다원주의에 대한 거부감이 많다. “다원주의” 하면 곧 “이단”이 된다. 그래도 지금은 많이 나아진 편이다. 불과 10여년 전만 해도 “다원주의자”로 한번 찍히면 매장이 되었다. 감리교 신학대학 학장이었던 변선환 목사님이 다원주의자로 찍혀 교단에서 축출되고 학교에서도 쫓겨난 사실이 그것을 증명한다.

그러나 다원주의는 한국 교회가 진화되어 도달하지 않으면 안될 하나의 목표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의 한국 교회가 갖고 있는 배타적 신념체계로는 다원화된 사회에서 수많은 갈등을 양산하여 사회를 불안하게 만들고, 자기 분열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편협하고 독선적인 배타적 신앙으로는, 진리의 길을 함께 찾아가야 할 아름다운 이웃 종교, 이웃 문화와의 공존은 커녕, 사회에서 왕따를 당해 존립 기반마저 흔들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원주의는 사해동포주의와도 통한다. 인터넷 채팅 등으로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과 한 공간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지구마을에서, 모든 인류가 서로 화합하고 평화를 누리는 ‘지구마을 사람들’로 함께 살아가려면, 다른 신념 체계, 다른 문화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존중하지 않고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사실 “다른 신념체계를 인정하지 않고는 나도 살 수 없다”는 주장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해묵은 것이다. 개신교 이외에는 거의 모든 종교가 이미 도달한 것이기도 하다. 어느 종교가 자기만 절대 진리를 갖고 있다는 과대망상증에 젖어 있는가. 유일신 종교 삼형제 가운데서, 유대교나 이슬람교도 “우리와 같은 방식으로 믿지 않으면 다 지옥에 간다” 식의 무모한 신앙을 갖고 있지는 않다.

천주교도 40여년 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배타주의 신앙을 극복했다. 오랫 동안 개신교 국가들로 자처해왔던 북유럽에서도 이런 식의 배타적이며 독선적인 원시 신앙은 극복된 지 오래다. 오로지 영국 일부와 미국, 그리고 한국의 개신교만이 아직까지 2000년 전의 야만적인 신앙을 그대로 갖고 있다.

그나마 미국에서도 한국과 같은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근본주의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은 전체 개신교인의 30~40%에 불과하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거의 80~90%에 달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배타적인 신앙이 옳다고 믿고 있다. 정치 경제적인 면에서 뿐 아니라, 종교적으로도 한국은 여전히 미국의 식민지인 셈이다.

다원주의를 절대로 허용할 수 없다는 답답한 개신교도들은 성서를 절대 무기로 내세운다. 그러나 성서에는 배타주의와 포용주의 내지는 다원주의의 치열한 이론 공방이 산재해 있다. 구약성서의 요나서를 예로 들어보자.

요나는 기원전 8세기, 북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아시리아의 큰 도성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심판을 전하라는 신탁(신의 명령)을 받는다. 요나의 예언을 들은 니느웨 사람들은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였고, 그들의 진정한 회개를 보신 하느님은 니느웨를 용서하기로 한다.

원수의 나라가 망해가는 꼴을 보고 신이 나서 신의 심판을 예언했던 요나로서는 김이 빠지는 일이었다. 그는 용서와 화해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멀리 나시스로 배를 타고 도망갔다.

그러나 신의 손길을 피해 어디로 가겠는가. 하느님은 폭풍과 해일을 보내 요나의 퇴로를 차단(?)했고, 선원들은 요나를 바다에 던져버렸다. 커다란 물고기에 삼켜진 요나는 사흘 동안 물고기 배 속에서 회개하고, 드디어 하느님은 물고기로 하여금 요나를 토해내게 하여 니느웨에 용서와 화해의 메시지를 전하게 한다.

한국 교회에는 아직도 요나서를 기원전 8세기에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찰떡같이 믿는 사람들이 많지만, 요나서는 사해동포주의 사상에 입각해 기원전 2세기에 쓰여진 위대한 문학작품이다.

요나서의 저자는, 솔로몬 이후 무너지기 시작한 이스라엘이 주변 강대국에 철저히 유린당하는 비참한 꼴을, 그리고 그 이유를 냉철하게 꿰뚫어보았다.

그는 자원과 지리적 한계를 넘어서기 어려운 이스라엘 민족이, 오로지 “신은 우리 편”이라는 배타적 신앙으로 무장하여 문화 정치적 쇄국주의로 일관하는 한, 다원화된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없음을 처절하게 인식하였다.

당시 세계는 그리스의 알렉산더에 의해 국가 간의 문화적 장벽이 제거되어 ‘세계화’가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로마라는 신흥 강대국이 지중해 서편을 평정하고 그 세력을 팔레스틴 지방으로 서서히 뻗치고 있었다.

이런 정황에서, 영적으로 깨어있는 사람들은 이스라엘 민족이 살 길은 국수적 배타주의를 넘어 사해동포주의로, 다원주의로 가는 길 밖에 없음을 알고 있었다. 이런 깨달음은 이미 ‘제2 이사야’를 필두로 기원전 6세기에 바빌론 포로기에 시작된 혁신운동으로, 그 맥을 타고 잔잔히 이어져온 예언자 전통의 한 흐름이었다.

그런 “깨어있는 하느님의 사람들”이 기원전 2세기에도 나타나 여러 문학작품을 낳았다. 그 중 다니엘서는 여전히 유대민족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묵시문학으로, 요나서와 욥기 등은 기존 신학의 탈피를 요구하며 실존적, 다원적 신학으로의 진화를 요구하는 혁명적인 작품으로 나타났다.

요나서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이제 우리는, 이웃민족은 모두 저주받을 민족이며 오로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만 사랑하고 구원하신다는 편협하고 배타적인 신앙과 신학을 넘어서야 한다. 하느님은 우리가 그토록 미워하는 원수 나라들, 그들까지도 사랑하신다. 하느님은 우리 유대인만의 하느님이 아니라 전 인류의 하느님이시다. 그 사실을 깨닫지 않은 한, 우리 민족의 살 길은 없다.”

그러나 이런 깨달음은 당시 유대인들이 공유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요나서의 저자는 대놓고 이런 주장을 할 수가 없었다. 잘못 하다가는 길거리에서 맞아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전통과 교리로 철저히 무장한 교리주의자들은 그런 ‘이단자’를 용서하지 않았다.

그래서 요나서의 저자는, 다원주의로, 사해동포주의로 가야만 이스라엘 민족이 살 수 있다는 자신의 신념을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해, 먼저 이스라엘 민족이 가질 수밖에 없는 거부감을 돌파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는 문학 작품으로 전하기로 했다. 마치 김홍신이 <인간시장 designtimesp=16595>에서 전두환 일파에 의해 벌어지는 기가 막힌 일들을 “권총찬” 혹은 “장총찬”이라는 이름으로나마 알리고 싶어했듯이...

요나서는 기원전 2세기, 급변하는 세계에서 눈먼 장님으로 살아가던 이스라엘 민족의 눈을 뜨게 하려는 진보 지식인의 치열한 고뇌를 담고 있다. “제발 눈을 떠라. 배타적 민족주의, 독선적 신앙으로는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다. 우주만물을 창조하고 섭리하시는 위대한 신의 사랑을 어찌 한 민족이 독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불행하게도 2천년 동안 기독교의 맥을 이어온 ‘문자주의’ 신학은, 이 위대한 요나서마저 ‘문자’ 안에 가두어 버렸다. 골수 기독인들은 상징과 비유를 ‘뜻’으로 읽지 못하고, 여전히 ‘문자’로 읽고 있다. 사람이 실제로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 동안 있었다고 믿고 있는 사람이 “아직도 많다”. 뿐만 아니라, 요나서야말로 예수께서 사흘만에 부활하실 것을 예언한 사건이었다고 믿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

사람이 물고기에 삼켜진 채로 물고기의 내장 안에서 기도한다는 것, 또한 사흘 만에 토해져서도 여전히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이 자연 상태에서 불가능하다는 것은 그들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전능하신 하느님이 개입하시면 그 모든 일이 가능하다고 ‘진실로’ 믿고 있다. (이런 이런~!! 그들이 믿는 하느님은 짖궂은 마술사 수준인 게로구만.)

골수 기독교인들에게 묻고 싶은게 있다. 그네들은 하느님을 진실로, 세상을 질서와 조화 속에 창조하신 분, 자연에 법칙을 부여하신 분이라고 믿고 있는가? 그렇다면, 왜 그 하느님은 그렇게도 자주 자신이 만든 자연법칙을 스스로 깨뜨리는 것인가? 그것은 하느님 마음이라고? 우린 그냥 기록된대로 믿기만 하면 된다고? 오호, 통제라...

그래서 어느 사회학자가 이렇게 말한 것이다. “사람이 종교를 가짐으로 해서 받을 수 있는 불행 중 가장 큰 것은, 자주적으로 생각하는 능력을 박탈당하는 것이다.”

[관련기사]

나는 네오콘이 무섭다
종교계의 사학법 개정안 반대에 대하여
통일교 주최 <평화통일 세미나> 참석 보고서
‘목사님’과 ‘좋은 차’
영화 ‘FACE OFF’, 현실세계에 이루어지는가?
류상태의 다른기사 보기  
기사를 추천하시면 "금주의 좋은 기사" 랭킹에 반영됩니다   추천수 : 3059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의견나누기(2개)
 * 100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최대 20000byte)
 * [운영원칙] 욕설, 반말, 인신공격, 저주 등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지 않은 글과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올린 글은 통보 없이 삭제합니다.
  
나그네 (68.238.228.54)
2008-09-10 01:12:48
비방을 일삼는 자
상태라는 자는 진화를 신봉하는 자로써 교회까지도 진화를 해야 한다는 괴변 가로써
다른 종교까지도 구원이 있다라고 하는 반 성경 적인 적 그리스도에 가까운 소리로
전통적인 신앙과 신학을 부정 하면서 숭고한 믿음을 지키기 위한 순교자들 까지도
잘못됐다고 주장하며 교회에게 대적을 하는 이단에 속한 자이다.
진보와 개혁이라는 허구로 다신론과 범신론에 편협하고 괘팍한 성격자로써
현 개신교회를 비방하는 일에 앞장서는 경계의 대상자이다.
리플달기
1 4
fbtkdxodi (211.114.22.102)
2008-09-09 11:28:03
류상태란 사람은
류상태씨 당신이 쓴 이글을 보니 당신은 진실로 믿는사람이 아니군요

'그러나 그들은, 전능하신 하느님이 개입하시면 그 모든 일이 가능하다고 ‘진실로’ 믿고 있다. ' 이말 당연히 하나님이 개입하시면 어떤일이든지 무엇이든지 가능한거 아닙니까?
당신이야 말로 깨닥기 바랍니다
리플달기
2 4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우)120-012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2가 35 기사연빌딩 401호 ☎ 02-393-4002(팩스 겸용)   |  청소년보호책임자 : 심자득
제호 : 당당뉴스  |  등록번호 : 서울아00390  |  등록연월일 : 2007.7.2  |  발행인 겸 편집인 심자득(010-5246-1339)
Copyright © 2005 당당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dangdang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