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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소개]목회자를 위한 <설교자노트> 2011년 1·2월호
정연복  |  pkom545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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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1년 01월 01일 (토) 13:10:16
최종편집 : 2011년 01월 17일 (월) 21:52:46 [조회수 : 3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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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소개>  목회자를 위한 <설교자노트> 2011년 1·2월호 
 
                                      정연복(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저는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으로 일하면서 1997년부터 격월로 나오는 <설교자노트>라는 책을 번역해 왔습니다.

지금까지 88권이 나온 <설교자노트>는 '교회력에 맞춘' 설교 본문에 대한 성서 주석, 그리고 그 본문에 따른 미국의 실력 있는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의 최신의 설교를 번역하고, 아울러 설교 내용에 적합한 기도문과 예화 자료를 풍부하게 제공하여 목회자들의 설교 준비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책입니다. 특히 <설교자노트>에 실린 설교들은 설교자들에게 성서에 충실하면서도 독창적인 설교 아이디어를 제공합니다.

그런데 이 <설교자노트>는 시중 서점에서는 팔지 않고 신청하시는 목회자들에게 직접 우송합니다. '영성적이며 공동체적이며 생태학적인 신앙 공동체를 위한 자료'인 <설교자노트>를 구입하기 원하는 분들은 한국기독교연구소(전화: 031-929-5731)로 연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설교자노트>는 격월로 나오며 두 달치 분량의 설교 자료를 담고 있는데, 2011년 1·2월호 중 1월 넷째 주 설교 자료를 참고로 첨부합니다.


설교 제목: 눈송이들의 하나님

* 성경 본문: 시편 27:1, 4-9
* 성경 주석

시편 27편은 시편들의 언어들 중 많은 것이 두 가지 뜻으로 해석할 수 있는 모호한 성격을 띠고 있음에 대한 훌륭한 실례이다. 한편으로, 시편 27편은 그의 군사적 무용(武勇)이 성서적 기억 속의 전설의 재료가 된 다윗 왕의 경험과 입술로부터 나왔을지도 모르는 "의기양양한 자신감의 노래"이다. 다른 한편으로, 시편 27편에 담겨 있는 언어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통해 평화와 위로를 발견한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의 은유적인 신뢰의 찬가이다. 시편의 언어는 이 두 차원 모두에서 해석 가능하고, 따라서 학자들이 이 두 차원을 분명히 떼어놓는 것은 불가능하다. 성경에서 역사와 신학은 깔끔한 범주화를 위해 아주 매끄럽게 뒤섞여 있는데, 시편 27편은 이 사실을 멋지게 예증한다.

시편 27편의 "다윗의 시"라는 표제는 역사적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이 시편을 구성하고 있는 몇 가지 주제, 즉 주님 안의 피난처, 원수들, 전쟁, 희생, 장막, 노래와 찬양, 믿음에 충실한 종, 이 모두는 다윗 전승으로 읽혀질 수도 있다. 동시에, 그러한 주제들은 일체의 경건한 야훼 숭배자들의 삶 속에서도 깊은 공명을 발견할 수 있다. 시편 전체를 통일시키는 "신뢰"(trust)라는 주제가 시편 서두의 절에서 확립된다. 그리고 그 주제는 시편의 전체적인 균형을 통틀어 설명되고 발전되고 상세히 언급될 것이다.

이 시편에서 발견되는 일반적인 한 무리의 개념은 구약성경의 많은 곳에서 발견되며(예를 들어, 출 15장; 삼하 22장=시편 18편; 시편 62; 89; 118; 이사야 12:2 등), 이로써 이 시편을 전통적인 이스라엘 종교 "사상의 세계"(thought-world) 속에 확고히 뿌리내리게 한다.

시편집의 이 부분의 시편들 대부분처럼, 시편 27편은 신학적 지향에 있어서 야훼 신앙의 색채가 짙다. 이스라엘 신의 신명(divine name)이 광범위하게, (그리고 9절에 단 한 차례 나오는 "하나님"을 고유명사보다 오히려 일반명사로 이해한다면) 독점적으로 사용된다.

빛은 신에게 속하는 것으로 자주 생각됨에도 불구하고(예를 들어, 민 6:25; 욥 37:15; 시편 4:6; 44:3; 89:15; 90:8; 이사야 2:5; 특히 시편 50:2 참조), 신을 "나의 빛"(my light, 1절)이라고 언급하는 것은 이 구절에 독특하다. 주님은 누군가의 "구원"(salvation)이라는 것은 구약성경, 특히 시편들과 이사야서에서 훨씬 더 빈번히 발견되는 생각이다. 구원이라는 단어는 현대의 청중들에게 강한 신학적 뉘앙스를 갖고 있기는 해도 그 밑바닥에 깔린 의미는 단순히 "도움"(help)이다.

현재의 문맥 속에서의 빛이라는 이미지는 (예를 들어, 시편 119:105의 "주님의 말씀은 내 발의 등불이요, 내 길의 빛입니다"처럼) 모험적이고 위험하거나 경건한 삶을 위한 "인도하는"(guiding) 빛이기보다는 오히려 안전의 표지이다. 이 시편에서의 공간적인 이동은 미지의 세계를 향한 탐험보다는 피난처를 향한다.

4절에서, 축어적인 것을 과장적인 것과 분명히 구별하기는 어렵다. 시편 화자는 예를 들어 "나실인"(Nazirite)처럼 모든 다른 것들보다 자신의 날들을 성전 예배 속에서 보내기를 소망하는 열렬한 성전 봉헌자인가? (화자는 남성인 것이 거의 확실하다.) 혹은, 화자는 그의 최고선이 신에게 아무런 제약 없이 다가서는 것임을 선언하고 있는 것인가? 만일 전자의 경우가 맞는다면, 우리는 (예를 들어, 시편 84편에서 발견되지만 여기에는 없는) 성전 경내에서의 삶의 주제를 더욱 발전시킬 것을 기대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화자가 둘 중 어떤 부류인지를 꼬집어 말하기는 어렵다.

시편 기자가 하나님의 "성전에서 주님과 의논하면서 살아가는"(4b절) 소망을 표현할 때, 그는 제사장이나 예언자의 신탁을 구하는 것을 가리키는 전문용어를 사용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스라엘의 종교를 포함하여 고대 근동 종교들에서, "신탁 예언"은 규범적인 의식이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림과 둠빔(출 28:30; 레 8:8; 민 27:21; 삼상 28:6 참조) 같은 점을 치는 도구들은 꿈과 예언자의 말 등의 신의 뜻을 구하는 다른 형태들과 함께 사용되었다.

신의 장막에 대한 언급은 문맥상 이례적이어서 한 새로운 사상으로의 매끄러운 전환이 전혀 아니다. 솔로몬이 예루살렘 성전을 짓기 전에는, 이스라엘의 광야 유랑 경험의 날들 이래로 이스라엘의 신의 지상 거주지는 "장막"(tabernacle), 즉 이동 가능한 텐트 모양의 구조물이었다. 그러나 성전이 건축된 후에는 장막은 예배에서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다. "지성소"(holy of holies)가 그것을 대체했다. 이것은 여기에서 언급된 장막이 성례(聖禮)에 사용된 것이기보다는 군사적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반석 위에 나를 올려서 높여 주실 것"(5절)과 "저 원수들을 내려다보면서 머리를 높이 치켜들겠다"(6절)는 언어는 군사적인 이미지를 강화시킨다.

되찾은 활력과 자신감의 표지로서 머리를 높이 치켜든다는 이미지는 매우 고대의 것이어서, 이스라엘과 가장 가까웠고 따라서 종교적으로 가장 영향력이 있었을 이웃들 중 하나인 기원전 14세기 우가릿 문헌들 속의 바알 서사시(Baal epic)에서 발견된다. 그것들 중에 특별히 잘 알려져 있는 한 구절이 현재의 이미지를 예증한다. 그 장면은 "신적인 집회"(divine assembly)인데, 적대적인 사자들(messengers)이 "심판의 강" 얌(Yamm)으로부터 그 집회 속으로 들어갔다. 열등한 신들은 자신들의 무릎까지 머리를 바싹 낮춤으로써 얌으로부터의 임박한 판결 앞에 공포에 떨며 위축된다. 그런데 이것은 자연의 풍요의 신 바알에게는 불필요하고 비겁한 몸짓이다: "너희들의 머리를 들어라, 오 신들이여, 너희들의 무릎 위로부터, 너희들의 옥좌로부터!"(KTU 1.2.I.27-28). 이것을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어라. 영원한 문들아, 활짝 열려라. 영광의 왕께서 들어가신다"(시편 24:7)와 비교해 보면, 성경 작가들이 가나안 종교의 이미지들에 의존하면서도 동시에 벗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높이 치켜든 머리의 이미지는 우가릿과 이스라엘의 음유 시인들이 의존했던 공동의 문학 전승의 일부였다.               
첫 열매를 드리는 것, 행복, 속죄, 대속, 그리고 "감사"를 드리는 것(6절)은 고대의 희생제사 제도의 규범적인 일부였다. 종교생활의 모든 다른 측면들과 마찬가지로, 희생제사 제도는 남용될 여지가 충분했다. "내가 이렇게 할 테니 당신께선 이렇게 해달라"는 식의 태도가 고대 이스라엘의 희생제사 의식을 특징짓게 되었던 것이 틀림없다.

오늘 본문은 이중적인 간청으로 끝난다(7-9절). 시편 기자는 도움을 청하는 그의 외침을 주님이 "들어주실"(hear) 것을(7절), 그리고 그 들어주심의 증거로서 은혜로운, 즉 "아무런 공로 없이 얻는" 응답을 해주실 것을 요청한다.

시편 기자의 두 번째 요청은, 주님이 그분의 얼굴을 탄원자에게로 돌리심으로써 신적인 호의를 보여주시는 것이다. 여기에 사용된 언어는 매우 신인(神人) 동형론적인데, 이것은 왕조 이데올로기에서 가져온 것이다. 이 왕조 이데올로기에서는, 주권자인 군주는 자신의 얼굴을 탄원자 쪽으로 향하는 것만으로도 왕의 호의를 베푸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것은 민수기 6:24-26에서 [아론과 그의 후손들이 이스라엘 자손을 위해 빌도록] 주님이 모세에게 명하시는 축복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이미지처럼 보인다: "주님께서 당신들에게 복을 주시고, 당신들을 지켜 주시며, 주님께서 당신들을 밝은 얼굴로 대하시고, 당신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님께서 당신들을 고이 보시어서, 당신들에게 평화를 주시기를 빕니다."     
 
* 설교 본문

우리들 각자는 아름다움의 기적이고 디자인의 걸작품이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상처 입고  완전 붕괴되기도 쉬운 존재들이다.

윌슨 A. 벤틀리(1865-1931)는 색다른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나쁜 방식으로 그랬던 것은 아니다.

미국 동북부의 버몬트주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평생을 보낸 그는 젊은 시절에 눈에 매료되었다. 그는 눈송이들을 검은색 벨벳 위에 놓고 사진 찍는 방법을 발견했다. 그는 세상에 정확히 똑같은 모양의 눈송이는 없다는 가설을 직접 시험해 보고 싶었다. 그는 5천 개 이상의 눈송이를 사진으로 찍어 출판했다. 오늘날 우리는 <버펄로 과학 박물관>에서 그의 작품을 볼 수 있다.

눈송이들에 대한 그의 집요한 집념 때문에, 그에게는 "눈송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이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눈송이들을 현미경으로 관찰한 그는 그것들 모두가 아름다움의 기적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모든 결정체는 디자인의 걸작품이다. 그리고 어떤 디자인도 반복된 적이 없다. 하나의 눈송이가 녹으면, 그 디자인은 영원히 상실된다. 그리도 아름다웠던 것이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않은 채로 사라진다."

벤틀리의 "눈 결정체들의 수집물"을 세밀하게 살펴보고서, 모건 마이스라는 작가는 그가 특별히 892번 눈송이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범주상으로 대충 별 모양인 그것은 약간 불규칙하다: 그것은 다른 다섯 개의 눈송이처럼 왼팔 꼭대기에 모자가 달려 있지 않다.

불규칙하지만 아름답다.

우리 모두는 제각기 참으로 색다르다.

벤틀리는 "눈송이"라는 별명이 붙어야 할 유일한 사람은 아니다. 우리 모두에게 그런 별명이 붙어 마땅하다. 우리들 각자는 아름다움의 기적이고 디자인의 걸작품이다. 어떤 디자인도 결코 반복되지 않는다. 우리는 불규칙한가? 물론이다! 온갖 종류의 불규칙성이 우리의 존재를 수놓고 있다. 육체적, 정신적, 정서적, 영적으로 우리 모두는 제각기 독특하다. 우리는 불규칙한 인간 존재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은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사랑 많으신 창조주께서 아주 독특하고 유일무이하게 지으신 아름다움의 기적들이다. 

우리의 주님은 눈송이들의 하나님이다.

시편 27편은 다음의 말로 시작된다: "주님이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신데,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이 내 생명의 피난처이신데,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랴?"(1절). 만일 우리가 소중하고 유일무이하지만 한순간에 덧없는 사라질 수도 있는 하나님의 눈송이들이라면,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의 든든한 요새가 되어 주실 한 분 주님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녹아서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신앙의 선택을 하는 것.

성서학자인 J. 클린턴 맥캔은 이 시편 27편 서두의 절이 시편 전체를 사로잡고 요약하면서 믿음과 두려움 중에 하나를 선택할 것을 우리에게 촉구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나의 빛, 나의 구원"으로 간주하는 믿음의 선택을 할 것인가? 아니면, "내가 누구를 두려워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으면서 두려움을 선택할 것인가?

눈송이들로서, 우리는 두려워할 것을 발견하기 위해 굳이 멀리까지 갈 필요도 없다. 우리는 육체적 질병, 정서적인 고통, 관계의 붕괴, 경제적인 스트레스, 그리고 영적 위기들에 취약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따금 우리는 우리 자신이 눈송이처럼 가냘프고 덧없다는 느낌이 든다. 한순간에 녹아 덧없이 사라지는 연약하기 짝이 없는 존재!

그러나 만일 우리가 믿음의 선택을 한다면, 우리의 미래는 아주 달라 보인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굳게 신뢰한다면, 우리는 그렇게 취약하지 않다. 주님이 우리의 빛, 우리의 구원이시고 우리 삶의 든든한 요새가 되어 주심을 우리는 발견하기 때문이다. 열쇠는 우리의 신뢰를 우리 자신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께 두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빛 속에 살 때, 우리는 주님 앞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고전적인 구약의 축복에서처럼, 하나님의 얼굴은 종종 빛으로 등장하여 그분의 백성들을 비추신다: "주님께서 당신들을 밝은 얼굴로 대하시고, 당신들에게 은혜를 베푸신다"(민 6:25). 그러므로 주님이 우리의 빛이실 때, 우리는 하나님 가까이, 그리고 평화로운 곳에 살고 있는 것이다. 시편 27편은 몇 절 뒤에서 말한다: "주님의 얼굴을 내게 숨기지 말아 주십시오.... 주님은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이십니다"(9절).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하신다.

아울러, 믿음의 선택은 주님이 우리의 구원이시며 우리 삶의 요새라는 것을 우리에게 드러낸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후,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은 목소리를 높여 노래했다: "주님은 나의 힘, 나의 노래, 나의 구원, 주님이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하고, 주님이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련다"(출 15:2). 나중에, 시편 작가들은 하나님을 요새 혹은 피난처로서 반복해서 고백했다: "주님은 주님의 백성에게 힘이 되시며, 기름 부어 세우신 왕에게 구원의 요새이십니다"(시편 28:8).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이 되셔서 우리를 재앙에서 구하신다. 주님은 우리의 요새, 즉 그분을 신뢰하는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피난처이다.

그것은 눈송이 같은 존재들인 우리들 각자에게 더없이 좋은 소식이다.

우리가 두려움이 아니라 믿음을 선택할 때, 우리는 삶의 모든 도전들 속에서도 하나님의 권능과 임재를 확신하게 된다. 이것은 시편 작가가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고"(시편 27:4) 싶다고 말하는 대목에서 잘 표현된다. 성경의 시대에, 하나님은 예루살렘 성전 안에 살고 계신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므로 주님의 집에 산다는 것은 주님의 임재 안에 살아가는 것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최고의 우편번호"를 가진 집을 찾는 것에 관해 말한다. 이것은 좋은 학교들이 많이 있고, 범죄율이 낮고, 재산 가치가 상승하는 곳에 사는 것을 의미한다. 최고의 우편번호는 예루살렘 90210, 즉 하나님의 임재가 강력하고 영원한 방식으로 느껴지는 곳이라는 것을 시편 27편 작가는 알고 있다.

눈송이 같은 존재들로서 우리는 그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는 살아갈 수 없다.

그러나 당신은 궁금해할 것이 틀림없다: 하나님은 두려움이 아니라 믿음을 선택한 사람들을 위해 사실상 무엇을 행하시는가? 시편 27편은 말한다: "주님은 재난의 날이 오면, 주님의 초막 속에 나를 숨겨 주시고, 주님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감추시며, 반석 위에 나를 올려서 높여 주실 것이다"(5절). 이것은 하나님이 그분을 신뢰하는 모든 사람들을 보호하고 구원을 베푸셔서 그들을 멸망시킬 일체의 것으로부터 안전하게 지켜 주실 것임을 의미한다.      

물론, 믿음의 선택을 한 이후에도 여전히 삶의 다양한 도전과 위기가 닥칠 것이다. 그러나 보호와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가 그 무슨 역경에 의해서도 결코 완전히 멸망하지는 않으리라는 것, 우리는 햇빛 속의 눈송이처럼 덧없이 녹아 사라지는 일이 결코 없으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보호가 우리를 일체의 고난으로부터 방패막이 역할을 해주지 않을 수도 있다.

하나님의 보호와 구원의 약속은 우리를 고난이나 고통으로부터 완전히 막아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삶의 그 어떤 시련과 공포를 통과할 때에도 주님은 우리가 뜻밖의 치유와 힘을 가지고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우리를 보호하고 인도해 주심을 의미한다. 역경의 시간을 통과한 다음, 시편 27편 작가는 말한다: "그 때에 나는 나를 에워싼 저 원수들을 내려다보면서, 머리를 높이 치켜들겠다. 주님의 장막에서 환성을 올리며 제물을 바치고, 노래하며 주님을 찬양하겠다"(6절).

만일 우리가 두려움이 아니라 믿음의 선택을 한다면,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치유와 새 생명으로 인도하실 것을 신뢰한다면, 우리도 시편 작가와 같은 느낌을 가질 수 있다.

이따금 우리들 각자는 바람에 이리저리 날리고 금방이라도 녹아 사라질 위험이 있는 눈송이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폭풍이 맨 처음 제자들을 강타했을 때처럼 우리를 강타할 때에도, 바로 우리 곁에 앉아서 "왜들 무서워하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가 4:40)고 묻는 예수를 발견할 것이다.

몹쓸 질병이 저 옛날 갈릴리 사람들을 덮쳤을 때처럼 우리에게 갑작스럽게 닥칠 때, 우리는 마음 또한 약해지고 낙담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예수에게 손을 뻗는다면, 우리는 뜻밖의 "온전함"(wholeness)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는 말할 것이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가 5:34).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위협했듯이, 죽음은 우리 또한 위협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우리에게 다가와서 말할 것이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마가 5:36).

제자들이 5천 명의 굶주린 사람들과 만났을 때 그랬듯이, 우리는 엄청난 개인적인 도전들에 직면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제자들에게 말했듯이 우리에게도 말할 것이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가 6:37). 만일 우리가 두려움이 아닌 믿음의 선택을 한다면, "모두 배불리 먹을" 것이다(마가 6:42).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할 필요가 있다.

벤틀리는 5천 장 이상의 개별적인 눈송이들을 사진으로 찍었다. 예수는 5천 명의 굶주린 사람들을 배불리 먹였다. 각자가 아름다움의 기적이고 디자인의 걸작품이며, 한 디자인이 똑같이 반복된 적은 결코 없었다.

1988년, 두 개의 동일한 눈송이가 발견되어 사진으로 찍혔다. 이것은 세상에 아주 똑같은 두 개의 눈송이는 없다는 가설이 그릇됨을 증명했다.

그러나 인간 존재들은, 중요한 것, 특히 하나님의 보호와 구원이라는 우리의 공동의 필요를 공유하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기적이고 걸작품일 수 있다. 우리는 두려움이 아니라 믿음을 선택하기 위해 협력하면서도 우리의 개별적인 정체성과 독특한 성격을 유지할 수 있다.

그것은 눈송이들에게는 들어맞지 않아도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틀림없는 진실이다.

<가능한 설교 주제들>
* 주님의 집에서 "마음 편하게 느끼기"(feeling at home)
* 하나님이 고통의 시대에 우리를 감추고 은폐하시는 방법들
*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얼굴을 우리 주변에서 찾고 발견하기

* 예화

+ 싸락눈 

하느님께서 
진지를 잡수시다가
손이 시린지




자꾸만 밥알을 흘리십니다.
(김소운)

+ 없다

없다!
하찮은 꽃은 없다.
눈 씻고 봐도 없다.

없다!
하찮은 인생 없다.
눈 씻고 봐도 없다.

작은 꽃은 있어도
예쁘지 않은 꽃은 없다.

미국말 못하는 사람은 있어도
웃을 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눈 씻고 봐도 없다.
눈 씻고 보면
더욱 없다.
(이현주·목사)

+ 과수원 시집

봄 과수원에
파릇파릇 돋는 저것은 풀이 아니다
노랗게 발갛게 피는 저것은 꽃이 아니다

바람에게 물어봐라
햇빛에게 물어봐라

대지를 물들이는 저 쑥과 냉이, 씀바귀에 대해
과수원 언저리를 온통 노랑물살 지게 하는 저 유채꽃에 대해

산비둘기가 나뭇가지에 두고 간 울음
그 여운 끝자락을 붙잡고 화들짝 꽃봉오리 여는 홍매에 대해

지난 겨울의 눈바람을 먹고
열병처럼 퍼지는 가뭄을 먹으며
온몸으로 대지가 쓰는 시, 나무가 쓰는 시

뻐꾹새에게 물어봐라
벌, 나비에게 물어봐라

저 시 없다면 누가 봄이라 하겠나

저 시집 한 권 읽지 않고 어떻게 봄을 말할 수 있겠나

별과 달이 밤새도록 읽다 펼쳐둔
과수원 시집
나는 거름 져다 나르며 읽고
앞산 뻐꾹새는 진달래 먹은 듯 붉게 읽는다
(배한봉·시인)

+ 당신만이 가진 존귀한 가치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는 안됩니다.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습관은,

한편으로는 불만을 낳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월감을 낳을 뿐입니다.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을 보면 기가 죽고,

자신보다 못한 사람을 보면
힘이 솟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는 안 돼'라는
생각 쪽이 훨씬 우세합니다.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이 지구상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당신만의 장점과 단점,
재능을 가진 개성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작자 미상)

+ 삶의 의미

만원버스에 한 사람이 타고 내려도
아무 표도 안 나듯이,

오늘 요단강을 건너는 사람이 있어도
지구의 하중엔 하등 변함이 없다.

너의 눈에서 눈물의 폭포가 쏟아져도
강물은 조금도 불어나지 않는다.

너의 웃음이 호들갑스러워도
가지를 스치는 바람만큼도
나뭇잎을 흔들리게 할 수 없다.

그러나
너의 조그만 힘이,
너의 조그만 눈물이,
너의 조그만 웃음이,
지구를 움직이는 원동력임을
한시라도 잊어선 안 된다.
(김시종·시인)

+ 믿음이란

믿음이란
시간에 대한 나의 생각이 주님 생각과 일치하지 않을 때에도
하나님이 시간의 주인이심을 인정하는 것.

믿음이란
내가 아무리 많이 하나님을 체험했다고 해도
그것이 매일 매일의 교제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면
영적 성장에는 한치의 도움도 안 됨을 아는 것.

믿음이란
내 방법을 끝까지 고집하기보다
나의 종 됨을 인정하는 것.

믿음이란
나를 통한 하나님의 역사가
인간의 능력이 아닌 기적을 토대로 일어나며,
나의 선함이 아닌 그분의 약속에 기초하여
일어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

믿음이란
설명되지 않는 것들을
설명되지 않은 채로 받아들이며 사는 것.

믿음이란
불확실한 세상에 살면서
지도에도 나와 있지 않은 길을 걸으며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을지라도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확신하는 것.

믿음이란
스테인드글래스의 신비로움이나
종교적 집기들의 성스러움을 통해서가 아니라,
고난과 실망과 환멸과 갈등과 낙담과 실패와 손해를 통해
무르익어 가는 것.

믿음이란
뭔가 특별해지고 싶을 때는
일상의 것들을 하나님이 내게 주신
최고의 것들이라 인정해 보는 것.

믿음이란
과거의 상처가 흉터로 남아 매일매일 눈에 띄더라도
하나님께서 그런 상처들을 통해
내 삶을 향한 그분의 완전한 계획을 이루어 가심을 바라보는 것.

믿음이란
이미 하나님의 손에 맡겨 놓은 사안에 대해
다시 자기 힘으로 어떻게 해 보려는 유혹이 들 때
그것을 과감히 뿌리치는 것.
(작자 미상)

+ 믿음의 끈을 놓지 마세요

무엇을 위해
믿음을 버리는 겁니까!

밝은 태양 아래 있는 사람들은
믿음을 선택적으로 가질 수 있지만,
저와 같이 슬픔의 그늘 아래 있는 사람은
반드시 믿어야 합니다.

믿음마저 없다면 정말 우리에게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필립 얀시·미국 소설가)

+ 당신이 하나님을 믿는 만큼

H. N. 러셀이라는 프린스턴 대학 천문학자가 은하수에 대한 강의를 마쳤을 때, 한 여자가 다가와서 물었다. "우리가 사는 지구가 무한한 우주에 비해 그렇게 작다면, 하나님이 과연 우리에게 큰 관심을 갖고 계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러셀 박사는 대답했다. "그것은 말이죠, 전적으로 당신이 하나님을 얼마만큼 믿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 망원경과 현미경

망원경으로 우주의 ‘나’를 추적해 볼까요?

우주에는 천억 개 가량의 은하가 있고, 그 각각의 은하에는 또 천억 개 정도의 별이 있다고 합니다. 거기에다 같은 양의 혹성도 있지요! 그러니 우주의 바다에 떠 있는 별의 총수는 자그마치 100억의 1조 배나 된다고 합니다.

이 지구도 우주에서는 이처럼 한 점 티끌에 불과하지요. 그런데 ‘나’는 이 지구 속의 50억의 사람 중의 하나이니 얼마나 작은 티끌 중의 티끌인가요?

이번에는 현미경으로 몸의 ‘나’를 추적해 보지요. 사람 중의 하나인 ‘나’의 몸은 33조라고 하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많고 많은 세포들로 조직되고 조화되어 생명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정밀한 조직은 ‘나’의 머리 속에 있는 대뇌의 표면으로서 여기에 있는 140억 개의 신경세포가 생각하는 기능을 한다고 합니다.

- 뭔가 좀 있다고 교만하지 마시오. 망원경으로 본 당신은 티끌 중의 티끌도 되지 못하오.
- 뭐가 좀 없다고 풀죽지 마시오. 현미경으로 본 당신은 엄청난 은하의 공동체이오.
(정채봉·아동문학가,『모래알 한가운데』)

+ 내가 중요한 이유

인도양의 외딴 섬에 ‘도도’라는 이름의 새들이 살고 있었다. 도도새는 모양새가 우스꽝스러웠다. 게다가 도도새의 고기는 끓이면 끓일수록 질겨지고 맛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도도새를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고 여겼다.

그런데 도도새가 멸종되고 몇 년이 지난 후, 사람들은 그 섬에서 자라고 있던 갈바리야 나무가 더 이상 번식하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갈바리야 나무의 씨앗은 껍질이 너무 두꺼워서 도도새가 먹어서 배설물로 나올 때에야 비로소 싹이 틀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세상의 모든 것은 그 나름대로 존재 가치가 있다. 사람은 더욱 그렇다. 쓸모가 없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하나님 앞에서 똑같이 귀한 존재다. 주님의 영을 담은 그릇이니까. 

+ 너는 너답게 되어라

미국의 어느 부흥사가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었다.

"하나님, 제게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주셔서 미국의 아브라함이 되게 하소서."
"네가 아브라함처럼 되고 싶으냐? 그럼 너는 아들을 내게 바칠 수 있니?"
"나는 아들을 번제물로 바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너는 아브라함처럼 될 수 없다."
"하나님, 그러면 모세와 같은 지도력을 주셔서 미국의 모세로 만들어 주소서."
"모세처럼 되고 싶으냐? 그러면 모세처럼 사람을 죽여 모래에 파묻을 수 있겠느냐?"
"나는 살인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너는 모세처럼 될 수 없다."
"하나님, 그러면 엘리야와 같은 능력을 주셔서 미국의 엘리야가 되게 하소서."
"엘리야처럼 되고 싶구나. 그러면 너는 많은 이방인을 죽일 용기가 있느냐?"
"나는 그런 끔찍한 일을 도저히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너는 엘리야처럼 될 수 없다."

성경의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을 하나하나 들어 하나님께 기도했지만 하나님의 대답은 모두 부정적이었다. 부흥사는 화나서 하나님께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나님, 그러면 나는 누구처럼 되라고 하는 말입니까?" 그러자 하나님의 나지막한 음성이 들려왔다. "너는 너답게 되어라."

나 이전에는 나는 없었다. 나 이후에도 나는 없을 것이다. 나는 나다. 누구처럼 살려고 할 게 아니라 나는 바로 나로 살아야 한다.
(강문호·목사)

+ 모든 것이 오묘하고 무한하다

위대한 흑인 과학자인 G. 위싱턴 카버는 "어떻게 그렇게 훌륭한 과학자가 될 수 있었습니까?"라는 질문을 종종 받았다. 어느 날, 그는 학생들 앞에서 대답했다:

"나는 어린 시절 과학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조물주에게 기도하면서 물었지. '하나님, 왜 우주를 만드셨습니까?’ 그러자 하나님이 대답하셨어. '얘야, 그 질문은 너의 작은 머리로 깨닫기에는 너무 어려운 질문이란다. 네게 적당한 것을 물어봐라.'

그래서 내가 다시 물었지. '그러면 하나님, 인간은 왜 지으셨습니까?' 이 물음에 대해서도 하나님은 나에게 대답하셨어. '얘, 아가야, 그 질문도 너의 능력을 벗어나는구나. 어려운 질문만 하지 말고 정말 네가 알고 싶은 게 뭔지 분명히 말해 보아라.'

그래서 나는 내키지 않는 기분으로 손바닥을 펴 보았지. 내 손바닥에는 먹다 남은 땅콩 한 알이 있었지. 나는 퉁명스럽게 물었어. '하나님, 그렇다면 땅콩에 대해 이야기해 주세요.'

그 질문에 하나님은 이렇게 대답하시더구나. '그래, 그것 참 좋은 질문이구나. 내가 말해 줄 수 있는 것은 이 세상 모든 게 오묘하고 무한하다는 거야.' 그리고는 하나님께서는 땅콩을 분해하고 결합하는 따위의 여러 가지 방법을 나에게 알려주셨지.

나는 여러 해에 걸친 연구 끝에 땅콩은 땅콩 쨈 같은 요리뿐만 아니라 플라스틱이나 페인트를 만들 때에도 사용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 그리고 지금까지 나는 땅콩 사용법이 무려 350가지 이상이라는 것을 알아내어 유명한 과학자가 되었단다."

카버 박사는 학생들에게 마지막으로 덧붙여 말했다. "여러분, 모두 현재 처한 곳에서, 현재 갖고 있는 것들로 출발하여 뭔가 만들어내라. 비록 가진 것이 도토리 크기만 하더라도 그것이 얼마나 큰 참나무로 변해갈 수 있는지 모두 잘 알지 않니?"

+ 기적 가운데 살고 있는 사람들

사람들은 자연 법칙을 초월하는 어떤 놀라운 일이 일어날 때 기적이라고 말합니다. C.S. 루이스는 기적을 "기적은 초자연적인 능력이 자연 질서에 개입하는 사건"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기독교의 성경은 기적으로 가득 찬 책입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기적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천지 창조를 시작으로 출애굽, 홍해의 갈라짐, 여호수아가 태양의 멈춤, 엘리야의 승천, 그리고 예수의 동정녀 탄생, 부활, 승천, 재림에 이르기까지 기적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야말로 크리스천은 기적을 믿고, 기적을 보고, 기적을 경험하고, 기적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신앙이라는 말 자체가 그렇습니다. 신앙이란 '믿는다'는 말입니다.

뭘 믿습니까? 믿지 못할 일을 믿는 것입니다. 믿을 만한 것을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는 것이요, 이해하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성경의 기적을 믿을 뿐만 아니라, 오늘 그 기적이 일어남을 또한 믿습니다.

자연계에서 일어나는 가장 놀라운 일들 가운데 하나는 먼 거리를 여행한 후 몇 달 후 다시 제 집으로 돌아오는 동물과 새의 능력입니다. 이 동물들은 전에 가본 적이 없는 수천 마일 떨어진 목적지를 나침반이나 지도의 도움 없이 찾아갑니다. 특히 새는 이런 능력이 아주 뛰어납니다.

예를 들면, 북극 지방의 제비갈매기는 생후 6주밖에 되지 않은 어린 새도 따뜻한 곳을 찾아서 17,700km를 여행합니다. 여름이 되면 이 새는 다시 북극의 자기 둥지를 찾아 돌아옵니다. 여기에 대해 과학자들의 견해는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훈련을 받았을까요? 그들이 태양을 따라서 갔을까요? 북극성이 그들을 인도했을까요? 누구도 이 상황에 대해 만족할 만한 대답을 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새를 이주시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시험해 보았습니다. 그는 영국 웨일즈 해안에서 섬새 한 마리를 잡아 다리에 띠를 맨 후 미국 매사추세츠의 보스턴으로 운반했습니다. 거기서 그 새를 풀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새는 정확히 12일 반만에 4,900km 떨어진 자신의 보금자리로 돌아왔습니다. 섬새는 아무런 표시도 없는 바다를 홀로 건너 자기의 보금자리로 안전하게 도착한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지에 관해 많은 학설이 있었지만 아직 명백한 학설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새의 뇌 안에는 본능이라고 부르는 설명할 수 없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새와 다른 동물들의 내부에 "시계와 나침반"을 장치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연계의 생물들을 창조하실 때에 그 생물들에게 어떤 능력과 본능을 주셨습니다.

사실 믿음의 눈으로 보면 기적 아닌 것이 없습니다. 기적을 보기 위해 힘들게 찾아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애벌레가 나비가 되고, 가냘픈 풀이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작은 도토리가 커다란 참나무로 자라는 것, 이보다 더 놀라운 기적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모두가 기적 가운데 살고 있는 것입니다.
(작자 미상)

* 예배 자료

+ 예배에의 부름 
 
지상의 허물을 덮어 주는
큰 사랑 앞에
내딛는 발걸음이 부끄러워
다가서지 못하고 바라만 봅니다

편견 없는 당신의 사랑이
가녀린 마음에
촉촉한 그리움으로 젖어 들어
순백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허물일랑 보지 말고
하얗게 하얗게
티없이 사랑하게 하소서

끝없이 펼쳐지는
당신의 뜻
소복이 쌓인 백설 그 위에

한 점.
부끄럽지 않은 발자국을 남기게 하소서
(하영순·시인, '눈 오는 날의 기도')

+ 날마다 배우며 살게 하소서 

초라해 보잘것없어 보이고 아주 작고
사소한 것에서도 배울 것이 있다면

머뭇거리거나 지나치지 않고 부끄럼
없이 날마다 배우며 살게 하소서

배움을 통해 확실히 깨닫게 하소서
나의 삶의 위치를 바로잡게 하시고
늘 새롭게 하소서

나의 삶이 늘 정지된 상태가 아니라
봄날에 돋아나는 새순처럼
푸르고 싱싱하게 잘 자라게 하시고

나의 삶이
늘 틀에 박혀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

새로운 변화를 거듭하여
생명력 있는 믿음을 갖게 하소서

배움을 통하여 깨닫게 하사
나에게 주어진 소중한 기회들을
놓쳐버리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소서

모르는 것들을 배워 알게 하시고
아는 것들을 삶에 적용시키게 하소서

나의 삶 속에서 날마다 배우며 살게 하소서
(작자 미상)

+ 믿음
 
한 사람 거기 있어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으로 지켜보네

그는
죽어가는 내게
심장 터트려
수혈하셨네

많고 많은 사람 중에
하필이면
내 영혼에
생명의 피를

결국
그는 죽고
나 이제 살아
여기 남았네

그가 남긴
사랑
꼬옥 붙잡고
남은 생애 영혼 위해
믿음으로 살리라
(함영숙·시인)

+ 헌신에 대한 묵상기도 

눈은 가볍다
서로가 서로를 업고 있기 때문에
내리는 눈은 포근하다
서로의 잔등에 볼을 부비는
눈 내리는 날은 즐겁다
눈이 내리는 동안
나도 누군가를 업고 싶다 
(김종해·시인,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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