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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신성을 묵상함신동엽의 시 '여자의 삶'
정연복  |  pkom545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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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0년 12월 28일 (화) 18:52:38
최종편집 : 2011년 01월 14일 (금) 01:49:41 [조회수 : 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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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신성을 묵상함 - 신동엽의 시 '여자의 삶'

해안선 따라
여인이 걷고 있었지

섣달 그믐
그리고 석양
눈ㅅ발은 잔잔한 바다
수평선 너머
날리는데

해안선
모래밭 따라
여인 하나 콧노래 부르며
걷고 있었지

고개는 숙이고
사각사각, 모래밭 밟으며
들릴 듯 말 듯 속삭이는 콧노래.
조용히 날리는
옷고름.

파도소리도
그녀의 귀엔
들리지 않고

겨울도
도시도
그녀의 눈엔
보이지 않고

다스운 피만
흰 볼기 따라
발끝으로
머리끝으로
고루고루
흐르고 있었지.

무엇을 생각하며
그녀의 귀밑머린
바람에 날리고
있었을까.

무엇을 노래하며
그녀의 두 젖무덤은
저고리 안섶에서
물결치고 있었을까.

무엇을 기원하며
그녀의 눈동잔
겨울 하늘 아래 수밀도처럼
드리워져 있었을까.

『나는 밭,
누워서 기다리고 있어요
씨가 뿌려질 때를.

하늘 나르는 구름이든
여행하는 씀바귀꽃이든나려와 쉬이세요
씨를 뿌려 보세요.

선택하는 자유는 저한테 있습니다.
좋은 씨 받아서
좋은 신성(神性) 가꿔보고 싶으니까.

좀더 가까이, 이리 좀 와 보세요
안 되겠어요, 당신 눈은 살기.

저 사람 와 보세요
당신 눈은 우둔, 당신 입은 모략,
오랜 대를 뿌리박고 있군요.

또 와 보세요.
당신은 전쟁을 좋아하는 종자,
또 당신은,
피가 화폐냄새로 가득 차 있군요.

안 되겠어요.
내가 기다리는
받고 싶은 씨는....』

비가 내리고 있었지, 그녀의 긴 목덜미
비가 내리고 있었지, 그녀의 가는 허리 아래
비가 내리고 있었지
구렁이처럼 흐느적치던 긴 네 다리
비가 내리고 있었지
그녀의 그 깊은 정상 위를.

언제이던가 빛나는 여름
지리산 산정 꽃밭 위에도
너는 서 있었지.

언제이던가 빛나는 여름
경부선 가로수 총 메인 소녀
언제이던가 빛나는 여름
미국으로 서독으로 품팔이 떠나던
내 소녀야.

언제이던가 빛나는 여름
강강수얼래 대열에 끼여
조국을 돌던 내 소녀.
그때 네 뒷꿈치에선
선혈이 흐르고 있었지.

여자는
집.
집이다, 여자는.
남자는 바람, 씨를 나르는 바람.
여자는 집, 누워있는 집.

빨래를 한다, 여자는 양말이 아니라 남자의 마음.
전장에서 살육하고 돌아온
남자의 마음.
그 피묻은 죄까지
그 부드러운 손길로
그 신비로운 늪에서
빨래를 시켜 준다.

쇠붙이도
탄도탄도
그녀의 무릎 밑에 와선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물.

여자는
물.
갈대가 아니라, 물.
있을 것이 없는 자리에 자기를 적응시켜
있을 것으로 충만시켜 주는, 물

껍질만 벗겨 던지면
여성은
신.

껍질만 벗겨 던지면
여성의 알몸은
평화.

껍질이여
여인을 질식시키고 있는
껍질이여,
네가 하나의 사내를 사유하고 싶어할 때
불행은 네 발 밑에 허당을 판다.
네가,
네가
자연 속 보물들을 자기 코걸이 귀걸이로 사유하려 할 때
세상의 발 밑은 구더기가 된다.

여자여,
신성의 늪을 기르는 여자여.
그대 호수가 흐려지면
사내들은, 전쟁을 장사하는
미치광이가 된다.

여자여,
신성의 늪을 기르는 여자여.
그대 호수가 맑으면
사내들은, 구도하는
성자가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길러 낸 토양이여
넌, 여자.
석가모니를 길러 낸 우주여
넌, 여자
모든 신의 뿌리 늘임을
너그러이 기다리는 대지여
넌, 여성

마을마다
빠알간 홍시감이 익어나갈 때
붉은 벽돌담이 있는 도시
그 도시로 가는 길가에서
나는 보았지
고개마다
옥바라지 봇짐, 그 옷보자기 속에서
나는 보았지.

남편의 것이었을까
아니면 오빠의 것이었을까
누럭누럭 기운
두툼한 솜바지 두툼한 솜저고리.
못쓰게 된 꼬마들 옷조각으로 기운
다스운 속 내의.

그리고 나는 보았지
그녀가 쉬었다 일어서면서
허리띠 조르는 것을.

그리고 나는 보았지
착각이었을까, 그녀의 쉐타 안섶에
꽂혀있던
한 권의 문화사개론 책.

그리고 나는 보았지
송화가루는 날리는데, 들과 산
허연 걸레쪽처럼 널리어
나무뿌리 풀뿌리 뜯으며
젊은 날을 보내던
엄마여,
누나여.

그리고 나는 보았지
진달래는 피는데
벌거벗은 산과 들
가마니 속에
솔방울 고지배기 따 이고
한 손으론 흐르는 젖 싸안으며
맨발 길 삼십리
울렁이며 뛰던
아낙네의 종아리.

해안선 따라
여인이 걷고 있었지

함박눈은 산과 도시
여인의 호수 위 펑펑
쏟아져 오는데

고궁 담 모퉁이 따라
여인 하나, 걸어오고 있었지

두 손을 깍지 싸
높은 가슴 위에 얹고
눈은 수밀도처럼 내리깐 채
들릴 듯 말 듯
콧노래 부르며

고궁길 돌담 따라
여인 하나 걸어오고 있었지
(신동엽·시인, 1930-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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