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학 > 성서이야기
성탄절을 앞두고 제기하는 예수 탄생 설화(?), 신화(?)에 관련된 질문들
박경은  |  0117669763@nate.com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입력 : 2010년 12월 17일 (금) 08:01:44
최종편집 : 2010년 12월 17일 (금) 15:13:38 [조회수 : 4677]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텔레그램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

마1:18~2:12


설화(說話, narrative)라는 용어에 대해

예수 탄생에 대한 내용을 기술하고 있는 복음서의 이야기들에 대해 ‘예수 탄생 설화’라고 한다거나 혹은 ‘예수 탄생 신화’라고 할 경우 일반적으로 강한 거부반응을 일으키게 된다. ‘설화’라는 말과 ‘신화’라는 말이 주는 선입관적인 이해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설화’라고 할 때나 ‘신화’라고 할 때 그것은 ‘실제성 없는 창작 이야기’라는 뜻풀이와 함께 ‘현실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고대문학’, ‘고대인들의 상상력에서 만들어진 고대의 세계관에 관한 글’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설화’나 ‘신화’라는 말은 ‘~에 관한 이야기’라는 뜻의 학술적인 용어로 사용될 뿐이다. ‘설화’라는 말은 한자어 그대로 ‘이야기’라는 뜻으로서의 ‘說話’이기 때문이다.

이 용어에 대한 영어는 narrative이다. 이때 이 어휘의 뜻은 “상상력에 의한 가상적인 내용”이나 “현실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허무맹랑한 이야기의 내용”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말하는 기술’로서의 이야기, 혹은 ‘어떤 내용을 묘사하여 표현하는 기술적인 측면’으로서의 이야기를 가리킨다. 공상과학 소설과 같은 비현실적인 내용으로서의 이야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내용을 전달하는 ‘화술(話術, 말솜씨)로서의 이야기’라는 뜻이다.

따라서 내용적으로 도무지 사실성이나 현실성 혹은 실현성이라고는 없는 순수한 창작 공상소설 같은 ‘이야기 거리’를 의미하는 tale(전적으로 사실이 아닌 상상력의 산물로서의 이야기)이나 동식물들이나 특정의 사물이 인격화되어 출연하는 fable(우화)과는 전적으로 구별된다. 물론 ‘어떤 이야기 거리이든지 나름의 목적을 갖는다’는 이야기 내용의 목적성 측면에서는 서로 공통점이나 유사점이 있다고 말할 수는 있다. 그러나 영어 어휘들의 이와 같은 의미의 차이를 우리말로 구별하여 나타내기가 쉽지 않다.


신화(神話, mythology)라는 용어에 대해

‘신화(神話)’라는 어휘는 ‘단군 신화’나 ‘그리스ㆍ로마 신화’와 같은 용어에서 받은 선입관의 영향이 있기 때문에 예수 탄생에 대한 이야기를 ‘예수 탄생 신화’라고 표현하면 예수를 그리스ㆍ로마 신화에 나오는 여러 신들 중의 하나와 같은 수준으로 격하시키는 것 같은 인상을 받게 된다. 그에 따라 신앙적으로 치명타를 입는 것 같은 생각에 방어기제가 작동하여 ‘신화’라는 용어에 거부반응을 일으키게 된다.

하지만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신화라고 말할 때 그것은 예수를 그리스ㆍ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여러 신들의 하나로 격하시키기 위하여 사용하는 것이 아니며 또 그렇게 인식시키려는 목적에서 사용하는 것도 아니다. 더구나 예수에 관한 이야기를 가상의 창작소설과 같은 순수 상상력의 정신적 산물이라고 몰아가기 위해 그 어휘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예수에 관한 이야기”에 관련하여 ‘신화’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신적인 이야기’, ‘신에 관한 이야기’라는 뜻으로 사용하는 것일 뿐이라는 학계의 입장을 이해해야 한다. ‘신화(神話)’라는 단어는 말 그대로 ‘신에 대한 이야기’, 혹은 ‘신적인 이야기’라는 뜻을 갖기 때문이다.

국내의 일부 성서신학자들은 이와 같이 학술적으로 사용하는 ‘설화’와 ‘신화’라는 용어에 대해 선입관적으로 갖는 일방적인 오해를 피하기 위하여 ‘설화(說話)’를 ‘서사(敍事)’라는 용어로 대체하기도 하고 ‘설화’를 뜻하는 영어의 narrative를 음역하여 그대로 내러티브라고 사용하기도 하며 ‘신화’에 대해서는 ‘신적인 이야기’, 혹은 ‘신에 대한 이야기’라고 풀어서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설화라는 용어나 신화라는 용어를 만났을 경우, 특히 성서신학에서는 어떤 의미로 그 용어들을 사용하는 것인지를 이해할 때 서로의 소통을 위해 도움이 된다. 참고로, ‘설화’라는 용어가 문학비평에 속하는 한 방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될 때 ‘설화비평’이라는 표현으로 사용되나 위에서 말한 대로 ‘설화’라는 용어가 갖는 선입관적인 이해로 인해 생기는 일방적인 오해를 피하기 위하여 이를 ‘서사비평’이나 ‘내러티브 비평’ 혹은 ‘이야기 비평’이라는 어휘로 표현하기도 한다.


설교와 관련하여 갖는 성서비평에 대한 전이해(前理解)

성서비평은 본문의 내용이 과거의 특정 시공 안에서 실제로 발생한 사건이냐에 대한 역사성의 여부를 확실하게 판단하려는 목적을 갖고 시행되는 학술적인 수고가 아니다. 오히려 성서비평은 이 본문이 왜 이 자리에 들어와 있는 것이며 그 의미가 무엇인지, 그리고 본문을 통해 말하려는 내용이 무엇인지 등을 밝혀 그것의 종교적, 신앙적인 의미를 강화, 또는 심화시키려는 것을 목표한다.

그러므로 본문에 관한 여러 질문들에 대해 답변할 때 그 답변의 방향성은 성서의 원래의 목적인 ‘종교적, 신앙적’ 차원으로 향하게 된다. 성서는 처음부터 종교적, 신앙적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존재하게 된 ‘말씀의 결집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문에 대한 어떤 질문에 답변을 줄 때 그 답변은 “지금 여기에서” 질문하는 이들에게 ‘생기를 불어 넣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육화될 수 있어야 하며 그 결과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게 하는 말씀’이 되도록 해야 한다(성서신학의 현장화, 혹은 성서비평의 설교화).

하지만 성서신학의 차원에서 주어지는 성서비평의 결과로서의 답변들은 늘 한 편의 설교형태로 주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성서신학적인 견해나 그 답변의 결과들이 그대로 설교로 이어지지 않는 난맥상이 생기거나 성서신학적인 답변들과 본문에 대한 설교화(說敎化)의 사이를 쉽게 이을 수 없는 절벽 같은 괴리가 생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성서신학적, 학술적 결과로서의 답변을 내놓는 신학자가 성서비평의 결과들을 제시할 때 항상 완벽한 설교형태로 진술하여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성서신학의 학술적 결과들은 모두 성서를 삶의 중심에 놓고 살아가는 신앙인들을 위한 설교로 이어져 나타나야만 한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서신학의 결과들을 곧바로 설교로 이을 수 있는 학술적인 연결고리가 제공되면 더없이 좋을 것이다. 그래서 성서신학자들은 본문에 대한 학술적 비평의 결과들을 설교화 할 수 있도록 예를 제공함으로 자신들의 학술적 수고로 인해 결과 된 답변들, 혹은 답변으로서의 결과들을 목회 현장에서 실제로 설교화시키는 데 도움을 주고 있는데 ‘주석과 설교’, ‘성서해석과 설교’, ‘설교(자)를 위한 성서해석’ 등과 같은 제목의 도서들이 그것에 해당한다.

이런 이유로 성서비평의 결과들은 모두 설교 자료를 제공하는 작업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성서비평의 모든 결과들이나 본문에 대한 질문에 답변하는 학술적 수고인 성서비평의 결과들은 설교로 선포되어질 수 있는 자료로서의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본문에 대해 역사비평을 가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본문의 역사성을 판단하는 것으로 끝마쳐질 일이 아니며 문학비평을 가한다고 해서 본문에 대한 문학적 이해만으로 마감될 일도 아니다. 왜냐하면 성서가 원래적으로 갖는 성격상 본문은 역사비평이나 문학비평을 통해 얻게 된 학술적 이해를 바탕삼아 ‘지금 여기에 있는 독자, 혹은 청중’에게 말씀되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계획하고 있는 내용의 설교를 하기 위한 근거를 마련하려는 의도를 갖고 비평을 시도해서는 안 된다. 만일 그런 목적을 갖고 본문에 대한 비평을 시도한다면 그것은 비평이 아니라 원하는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 본문을 억지로 쥐어짜는 ‘증거 만들기’에 지나지 않는 일이 될 뿐이다. 따라서 성서비평을 통해 원하는 내용의 결과들이 도출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반가운 일이겠지만 뜻밖에 전혀 생각지도 않은 내용들이 도출된다고 할지라도 설교자는 그것마저도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게 하는 하나님의 생기’가 될 수 있도록 중간매개자의 역할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서비평의 결과들은 설교에 객관적이며 학술적인 근거를 제공하는 자료들로서 기능해야 하지만 설교를 위해 의도적으로 차출되거나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자료여서는 안 된다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다.


말씀과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 필요한 본문에 대한 질문

성서가 왜 일주일 내내 책꽂이에 꽂혀 먼지만 쓰고 있어야 하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히 여기다 보니 함부로 대할 수 없어 책꽂이에 모셔놓는 것인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하나님을 향해, ‘내 인생을 위한 하나님의 뜻’에 대해 물어 볼만한 아무런 질문도 없기 때문이다. 혹은 어쩌다 물어 볼 말이 있다고 해도 대답을 들을 수 있을 만한 시원한 통로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게 하는 목적을 갖는 하나님의 생기 넘치는 말씀의 결집체인 성서를 ‘책꽂이에 모셔 놓고 먼지만 입히는’ 일을 반복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삶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답변이 도무지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현상이 생기는 것은 말씀을 향한 질문이 없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도무지 일주일 내내 하나님을 향해 질문하지 않으니 일방적으로 떠들어대는 하나님의 목소리에 싫증이 날 수 밖에 없는 일이 아닌가? 그러니 ‘하나님 입 다물고 좀 조용히 계세요. 주일 예배 시간에나 잠시 뵙겠습니다.’가 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상황이 이런데 “나와 말씀”과 무슨 교제가 있고 소통이 있단 말인가?

그러므로 내 인생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말씀과 대화가 잘 이루어지고 하나님과의 교제가 좀 더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양방향 통행식의 질문과 대답이 오고 가야만 한다! 대화가 주고받음의 형태로 이루어질 때 생명을 얻되 풍성하게 얻게 하시는 하나님의 생기가 활기 찬 소통을 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성탄절을 맞아 제기하는 질문들

ㅇ 예수는 성령으로 잉태되었다(1:18, 20).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말은 하나님의 영이 마리아를 임신시켰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남의 약혼녀를 임신시켰다는 뜻인가? 허다한 처녀들 다 놔두고 왜 하필 남의 약혼녀인가?

ㅇ 요셉은 마리아가 자신과는 상관없이 임신한 것을 알고 그녀와의 약혼관계를 ‘가만히(사적으로, 비밀스럽게)’ 끊고자 했다. 그렇게 하려고 한 것은 그가 ‘의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19). 그러면 ‘의로운 사람’이라는 뜻은 ‘여자가 부정하다고 판단되었을 때 남들이 알지 못하게 몰래 파혼’하는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인가? 아무리 조용하게 파혼할지라도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알려질 일이 아닌가?

ㅇ 약혼녀가 남편 될 사람과는 상관없이 임신을 했다. 그래서 요셉은 마리아와의 약혼을 없었던 것으로 하기 위해 파혼하려고 했다. 그런데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 ‘두려워 말라’고 했다(1:20). 그렇다면 요셉이 마리아와 파혼하려고 했던 이유는 두려워서였던가? 파혼하는 것이 두려워서 ‘가만히’ 끊고자 했었다는 의미인가? 약혼녀가 의심스런 임신을 했다면 그것은 기분 나쁜 일인가, 아니면 두려운 일인가?

ㅇ 인용된 예언의 말씀에서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다(1:23). 그런데 지어진 이름은 ‘예수’이다(1:21). 복음서 저자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고 했다(22). 임마누엘과 예수, 이 두 이름이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인가?

ㅇ 23절에 나타나는 ‘처녀’는 18절과 연계되어 ‘남자를 모르는 여자’의 뜻을 갖는다. 그것은 남녀 간의 성적 접촉이 전무하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히브리어 성경의 뜻은 이것과 별 상관이 없다. 단순히 미혼의 여성임을 나타낼 뿐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남자를 모르는 여자’라는 의미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러면 왜 본문은 ‘남자를 모르는 여자’라는 의미를 갖는 단어로 국한시킨 채 약혼자와 무관한 임신을 했음을 말하는 것인가?

ㅇ 동방의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해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에 있는지를 수소문하고 다닐 때 다른 백성들은 소동할 일이 아니라(2:1~3) 오히려 환영해야 할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온 예루살렘”이 소동했다고 한 것일까? 소동했다는 말의 뜻은 불안해하면서 우왕좌왕했다는 이미지를 갖는다.

ㅇ 헤롯은 동방의 박사들보다 먼저 모든 정보를 알게 되었다(2:4~6). 그러므로 헤롯은 얼마든지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 알지 못하도록 비밀리에 미리 손을 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방에서 온 박사들이 로마의 꼭두각시 노릇이나 하는 팔레스타인의 왕의 말에 순순히 따를 것이라고 보았던 것인가? 헤롯은 동방의 박사들이 자신의 말을 순순히 따를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렇게 부탁조의 말로 말했던 것인가(2:8)?

ㅇ 2:7과 16을 통해 볼 때 동방에서 온 박사들은 예수 탄생 이후 2년 정도의 시간이 지나서 예루살렘에 도착한 것으로 보게 된다. 그러면 마태복음의 예수 탄생 이야기를 누가복음의 예수탄생 이야기와 조화시켜 예수의 출생 연대를 일치시킬 수 있을까?

ㅇ 동방의 박사들을 예수의 집으로 안내했던 별은 가로등 높이에 있었나? 어떻게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섰다(9b)’고 할 수 있는가? 저 하늘 높은 곳에 있는 별이 베들레헴의 많은 집들 다 제쳐 놓고 오직 아기 예수가 있는 집만을 서치라이트처럼 비추었다는 뜻인가?

ㅇ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 드린 예물이 모두 세 가지이다(2:11). 왜 이런 선물들이 드려졌다는 것인가? 누가복음은 왜 아무런 말도 없는가?

ㅇ 동방에서 온 박사들은 별을 따라 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꿈을 통해 지시를 받고 다른 길로 돌아 그들의 고향으로 돌아갔다(2:12). 그러므로 그들은 별 따라 꿈 따라 다니는 사람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그렇게 그들의 삶을 살아 간 신비의 사람들이었는가?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변이 객관성을 가지려면 성서비평의 방법을 통한 학술적인 논거들이 제시되어야 하며 학술적인 논거들이 제시된 객관적인 성서비평의 결과들이 설교로 선포될 때 그 설교는 본문을 통해 들려오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객관적으로 대언하는 '말씀 증언'이라고 할 수 있다. “객관적으로 대언하는 말씀 증언”이라는 말의 의미는 ‘나에게만 들리는 목소리, 내가 생각하는 본문의 의미를 전체에게 들리는 목소리,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의미라고 우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관련기사]

박경은의 다른기사 보기  
기사를 추천하시면 "금주의 좋은 기사" 랭킹에 반영됩니다   추천수 : 3163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의견나누기(1개)
 * 100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최대 20000byte)
 * [운영원칙] 욕설, 반말, 인신공격, 저주 등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지 않은 글과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올린 글은 통보 없이 삭제합니다.
  
갈바람 (210.2.37.62)
2010-12-18 08:08:12
목사님으로서 더욱이 신학을 공부하고 있는 신학도로서 이런 질문을 제기하는 것 자체가 신기합니다.
성서에서의 불일치와 긴장은 여러 곳에서 목격되고 잇지만 이를 제기하는 신도는 보이질 않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를 어떻게 풀어서 설교 하여 신도들을에게 나누어 주실지 여간 흥미롭지 않습니다. 기대해 보겠습니다.

허기야 성서의 목적은 생의 의미와 가치를 주려고 쓰인 것을 동의한다 하더라도 넘 종교의 프로퍼간다에 치우친 감을 지울 수 없습니다. 전 신약을 한마디로 정의하라면 <교회>라고 정의 하겠습니다.

제 우문에 대한 필자님의 답변을 기대합니다.
리플달기
5 8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우)120-012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2가 35 기사연빌딩 401호 ☎ 02-393-4002(팩스 겸용)   |  청소년보호책임자 : 심자득
제호 : 당당뉴스  |  등록번호 : 서울아00390  |  등록연월일 : 2007.7.2  |  발행인 겸 편집인 심자득(010-5246-1339)
Copyright © 2005 당당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dangdangnews.com